내가 영어학습법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는 주님만 아신다. 내가 읽은 대로 실행했다면, 나는 영어학습법 책의 저자들처럼 성공한 사람이 되었을까. 더 이상 영어학습법 책을 읽지 않아도 될 만큼.
영어를 잘하기 위한 방법을 전수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는 ‘영어학습법’ 책들 중에는 뇌의 움직임에 대한 내용을 포함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영어학습법 책’의 끝머리에서 역시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저자는 ‘영어 상상 훈련’을 제안한다. 잠들기 전, 특정한 환경에서 영어를 유창하게 사용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하라는 것이다. 처음 15일이 중요한데, 우리의 뇌가 상상 속 가상 세계를 현실처럼 믿기 위해 필요한 최소 시간이 15일이라는 설명에 의해서다. 생각보다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영어를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말하고 있는 나의 모습. 사이사이 영어 농담을 주고 받는 나의 모습. 이틀 밤을 성공했다. 겨우 이틀.
영어 학습법 중에 그래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여기는 ‘영어 소리 내어 읽기법’. 이를 언급한 책에서도 역시 뇌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데, 영어 문장을 소리 내어 읽을 때 우리의 뇌가 ‘읽고’ 있는 문장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소리 내어 ‘읽는’ 문장을 ‘만들어낸’ 문장으로 오해함으로써 ‘영어 말하기 능력’이 향상된다는 주장이다. 보고 읽는 것을 머리 속으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믿는 것. 실제로는 영어를 잘 하지 못하지만 영어를 아주 잘 한다고 상상함으로써 영어를 잘하게 될 거라는 믿음. 상상이 실제가 되는.
소설을 읽는 일이 그렇다. 이런 사람은 없었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소설을 읽을 때, 나는 딱 그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의 일이 바로 내 일이 된다. 절박하고 중요한 바로 나의 일. 소설을 읽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
쉬운 경우. 엘레나 페란테 4부작 중 1권 『나의 눈부신 친구』. 이탈리아 남단 나폴리의 가난한 마을. 초등학교를 다니는 릴라와 레누.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영특한 소녀. 선생님에게 대들고, 친구를 희롱하는 마을 최고 부잣집 아들에게 칼을 들이대는 결기를 가진 소녀. 나는 릴라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레누는 가능하다. 릴라에 가려진 나, 릴라의 아름다움을 부러워하는 나, 릴라의 재능을 질투하는 나. 물론 나는 레누처럼 금발이 아니고 레누처럼 공부를 좋아하지도 않지만, 릴라가 될 수는 없기에 그래서 레누가 된다. 나는 검은 머리의 레누가 되어 릴라를 시기하고 니노를 사랑한다. 이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면 어떨까. 나는 마흔 여덟, 런던 교외에 사는 중산층 여자다. 이제 푸르게 젊지 않지만 아직 ‘두려운 것’이 찾아오지 않을 만큼은 젊은 나. 그런 내가 테니스클럽에서 새로운 파트너를 만난다. 폴, 내 두 딸보다 더 어린 청년. 자신만만하고 예의바르면서도 한없이 나를 배려해 주는 젊은 남자. 말이 통하는 남자, 말이 통하는 젊은 남자.
지금의 내가 마음껏 바라보고 마음껏 환호하고 마음껏 사랑해도 되는 유일한 20살 청년은 오직 BTS의 정국이 뿐이다. 내 마음대로 바라볼 수 있는 젊은 남자도 정국이 뿐이다. 하지만, 잠깐, 아주 잠깐만. 상상의 나래를 편다. 수전 매클라우드가 된다. 폴을 마음껏 바라보고 폴과 대화하고 폴을 마음껏 사랑하는, 사랑해도 되는 수전이 된다.
“태워다 드릴까요? 차 있는데.”
그녀는 곁눈질로 나를 보았다. “음, 차가 없다면 태워다달라고 할 수가 없겠죠. 그러는 건 비생산적인 일이 될 테니까.” 그녀가 그 말을 하는 방식에는 도저히 기분 나빠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쪽 평판은 어떻게 한담?”
“내 평판요?” 나는 대답했다. “나는 평판 따위는 없는 것 같은데요.”
“오, 이런. 그럼 하나 생기게 해드려야겠네. 모든 젊은 남자에게는 평판이 있어야 하거든요.”(26쪽)
물러서고 반항하고 거부하던 나는, 이 슬픈 사랑의 주인공이 된다. 이 아픈 사랑의 여주인공이 된다. 수전이 된다.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나중에 오는 것이고,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현실성에 근접한 것이고,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심장이 식었을 때 오는 것이다. 무아지경에 빠진 애인은 사랑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고 싶어 하고, 그 강렬함, 사물의 초점이 또렷이 잡히는 느낌, 삶이 가속화하는 느낌,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는 이기주의, 욕정에 찬 자만심, 즐거운 호언, 차분한 진지함, 뜨거운 갈망, 확실성, 단순성, 복잡성, 진실, 진실, 사랑의 진실을 느끼고 싶어한다. (141쪽)
새로 사온 물건에 쌓이는 먼지. 닳아지고 빛이 바래지는 것들. 사랑이 그렇게 변해갈 때의 서늘함이 밀려와 내 맘에 콕 박힌다. 사랑을 시작했던 것을, 이 사람을 사랑한 것을 나는 후회하는가. 후회하고 있는가, 나는.
물론, 그의 공책에는 이런 내용도 적혀 있었다. “한 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는 것보다는 사랑하고 잃어본 것이 낫다.” 그것은 그렇게 그 자리에 몇 년을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줄을 그어 지워버렸다. 그랬다가 다시 적어 넣었다. 그 뒤에 다시 줄을 그어 지웠다. 이제 그에게는 두 항목이 나란히 있다. 하나는 깨끗하게 진실로, 다른 하나는 줄이 그어진 거짓으로. (297쪽)
폴의 사랑을 받으며, 폴을 사랑하며 이틀을 살았다. 수전으로서 이틀을 살았다.
이제 339쪽. 아직 수전으로서의 삶이 남아있다. 퇴색해가는 사랑이라 할찌라도, 기억 속의 슬픈 사랑이라 할찌라도 나는, 수전의 사랑을, 그리고 내 사랑을 이어나갈 생각이다.
금요일이다. 날이 흐린 금요일의 오후. 날씨대로라면 김광석의 ‘흐린 가을에 편지를 써’가 맞겠지만, 연애의 기억 때문에 한껏 우울한 나는 더 슬퍼지고 싶어 ‘김동률’과 ‘이소라’를 부른다.
사랑한다 말해도.
난 네 앞에 서 있어.
너는 생각에 또 잠겨 있네
함께 있어도 더 외로운 나
어쩌다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