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설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7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금정 옮김 / 비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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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설백물어』에는 각 장의 원전이 된 괴담과 삽화를 함께 실어 기괴하고 오싹한 분위기가 더욱 강해진다.


  무서운 이야기는 듣고 나면 밤에 잠을 못 잘 걸 알면서도 듣고 싶어진다. 그렇게 괴담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다. 『항설백물어巷說百物語』 는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이야기'라는 뜻으로, 일본의 소설가 교고쿠 나츠히코가 일본에서 전해져 오는 괴담들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에도시대(도쿠가와 막부가 일본을 다스렸던 시기, 1603~1867)에 괴담집을 만들기 위해 각 지방의 괴담을 수집하러 떠돌아다니는 청년 모모스케와 해결사 마타이치 일당이, 함께 괴이한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겪는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에피소드 형식의 소설이다. 괴이한 이야기들을 모아 놓았으니 이 소설 자체가 일종의 괴담집이다. 


  괴담집인데도 이 소설에서는 귀신이나 요괴가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모스케와 마타이치 일당이 겪는 기묘한 사건들은 겉보기에는 귀신이나 요괴의 농간처럼 보이지만, 결말에서 귀신이 아닌 사람이 저지른 짓으로 드러난다. 진상을 알고 나면 사건을 일으킨 인간의 탐욕과 증오, 잔혹함에 치를 떨게 된다. 그들을 처단하는 마타이치 일당도 마냥 선하고 정의롭지만은 않다. 마타이치 일당은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사건을 해결한다. 마타이치 일당이 교묘한 수를 써서 범인들을 함정으로 몰아넣고 스스로 파멸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면, 그들도 범인들 못지않게 잔혹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악귀보다 독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건은 해결되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세상에는 요괴나 귀신이 저지른 짓으로 알려진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수많은 괴담들이 이렇게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세상에는 어떤 작가도 상상하지 못했을 만큼 기묘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그 뒤에는 복잡하게 뒤얽힌 인간의 감정이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어두움은 앞으로도 잔혹하고 괴이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런 기묘한 사건들, 어지러운 세상을 보는 마타이치 일당의 시선은 냉소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약한 사람들을 고통과 원한에서 구하고, 위험으로부터 지켜준다.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면 다칠 사람들을 위해 일부러 진상을 밝히지 않는다.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 구르다 보니 사람에게서 어떤 선한 것도 바라지 않게 된 마타이치 일당에게도 인정은 남아 있다. 희미하게나마 남은 사람의 온기가 잔혹한 이야기들에 지친 마음을 감싸준다. 

  이야기들 자체가 흥미로우니 그저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고, 악인들이 처단되고 잘못되었던 일들이 바로잡히는 모습에 통쾌할 수도 있고, 그럼에도 씁쓸한 마음이 남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항설백물어』 는 좋은 읽을거리가 되어줄 것이다. 분량도 5백 페이지가 넘으니, 읽을 것이 많아 좋다. 읽을 것이 많다는 건 맛있는 음식을 잔뜩 쌓아둔 것만큼이나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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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조장하는 위험들 - 위기에 내몰린 개인의 생존법은 무엇인가?
브래드 에반스.줄리언 리드 지음, 김승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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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가 조장하는 위험들'이라는 제목과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전쟁, 테러...계속되는 재앙과 재난 속 안전과 안보를 책임지지 못하는 국가 통제 시스템의 진실'이라는 홍보문구를 보면, 국가 안보 시스템의 허점을 파헤치고 비판하는 책인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국가보다는 전 세계 국가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비판하고 시장의 기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이론. 이전의 자유주의가 낡은 옛 관습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한 반면, 신자유주의는 인간이 자신의 지성으로 옛 습관, 관습, 제도, 신념을 새로운 현실 조건과 연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위험을 겪고 나서 스스로를 회복시키는 역량, 즉 회복력을 키워야 한다고 독려하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기만적인 일인지를 밝히고 있다.(그래서 원제도 '회복력 있는 삶 Resilient Life'다.) 


  과거에 국가 권력은 국민들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명목으로 국민들의 삶에 개입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위험은 주로 지구 전체의 위험, 특히 생태계적인 위험이다. 인류는 지구 생태계의 일부지만, 산업 발전을 위해 지구를 이용하면서 환경을 파괴시키고 자원을 고갈시켰다. 인류 스스로 전 지구적 위험을 일으킨 것이다. 위험 자체는 완전히 제거할 수 없고, 우리 모두는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주장이다. 그러니 개개인이 위험을 겪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위험을 겪고 나서 회복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지구상의 생물종들이 위기를 넘기고 진화했듯이, 우리가 위기를 통해 오히려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그저 위험에 대처하고 적응하는 삶을 거부한다. 그러한 삶은 불안에 사로잡혀 그저 살아남는 것 이상의 삶, 더 나은 삶을 꿈꾸지 못한다. 위험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위험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삶만을 살다보면 우리는 불안과 고통에 우리 자신을 소진시켜 버린다. 저자들은 미래를 우리에게 올 재앙으로만 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삶과 세상을 꿈꾸자고 주장한다. 팍팍한 현재와 막막한 미래에 한탄하고 있지만 않고, 신자유주의와 국가 권력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들에 의문을 품고 저항하는 것에서 변혁의 가능성을 본다. 이성으로 신자유주의 통치의 허점을 알아채고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상상력으로 세상이 정한 한계를 뛰어넘어 세상을 변화시킨다. 저자들은 회복력에 의존하는 삶 이상의 삶이 있음을 믿는다.


  정치철학을 이야기하는 책인데 이 책은 정치적이기보다 철학적으로 느껴진다. 사회과학 서적인데도 시적인 표현들이 많이 사용되고, 대안은 다소 원론적이고 이상적이다. 문제점을 지적하는 부분은 다소 동어반복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상상력으로 신자유주의나 국가 권력이 정상이라고 이야기하는 삶 너머를 바라보자는 이야기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나 정신승리에 그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한다. 나는 지금 당장 내가 겪고 있는 작은 억압 하나도 이길 힘이 없는데 상상이 무슨 힘이 있을까. 그래도 지금의 고통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 지금의 삶을 저당잡히지 않고, 더 나은 삶,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싶다. 이런 마음들이 모여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더 나아지고, 세상이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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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음, 형사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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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아주 단순해 보였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남자가 아내의 불륜 상대인 남자와 그의 임신한 아내를 죽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담당한 형사 쉬유이許友一는 뭔가 미심쩍다고 느낀다. 수사 방향을 놓고 선배 경찰과 술집에서 말다툼을 한 다음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경찰서에 출근하니 뭔가 이상하다. 지금은 분명히 2003년인데, 다른 사람들은 오늘이 2009년 3월 15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6년 동안의 기억을 잃어버린 형사가, 6년 전 살인사건의 진상을 찾아간다. 이 한 줄의 줄거리 소개만으로도 흥미롭다. 쉬유이와 기자 루친이盧沁宜가 함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2009년의 이야기와 과거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면서 예상치 못한 진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쉬유이는 살인사건의 진상뿐만 아니라 자신이 잊어버렸던 자신의 진실까지 마주하게 된다. 


  이런 추리소설에서 반전을 미리 알게 되면 재미가 없는데, 바보 같이 책을 이리저리 들춰보다 딱 반전이 밝혀져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하지만 반전을 알고 나서도 그 반전이 밝혀지기까지의 전개 과정이 흥미로워 책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반전을 뒤엎는 또 다른 반전이 있었다. 


  두 번째 반전을 통해 밝혀진 범인과 범행 동기는 억지스러운 감이 없잖아 있다. 자신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주인공의 캐릭터가 앞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급격하게 바뀌어서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주인공의 캐릭터가 변하면서 작품 전반을 지배하던 분위기도 갑자기 변한다. 참혹한 살인사건과 기억상실,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무거운 소재와 중간중간에 인용되는 데이빗 보위의 노래 'The Man Who Sold the World'의 섬뜩한 가사가 빚어내는 안개 속 같은 분위기가 결말에서 싹 걷혀 버린다. 


  좀 더 무게감 있고 어두운 스릴러를 기대했다면 아쉽겠지만, 주인공이 기억상실과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안개 속을 뚫고 나오는 과정을 풀어가는 이야기의 힘이 뛰어나다. 그리고 찬호께이의 다른 작품들처럼 홍콩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지금의 홍콩을 생생히 전달한다. 이후의 작품들보다는 무게감이 떨어지지만 이야기 자체의 흡인력이 뛰어난 추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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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가장 위대한 모험 아폴로 8
제프리 클루거 지음, 제효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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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의 회색 대지 위로 푸른 지구가 떠올라 있다. 이 사진은 50년 전, 인류 최초로 달에서 지구가 떠오르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지구돋이Earthrise' 사진을 찍은 사람은 달에 처음 발을 내딛었던 아폴로 11호의 우주비행사가 아니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기 이전, 인류 최초로 달의 궤도에 들어갔던 아폴로 8호의 우주비행사 윌리엄 앤더스William Anders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폴로 11호가 달에 처음 착륙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아폴로 8호가 달 착륙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폴로 8호는 달의 궤도를 돌면서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데 필요한 과제들을 수행했다. 아폴로 8호의 선원이자 아폴로 13호의 선장이었던 짐 러블Jim Lovell과 함께 아폴로 13를 썼던 과학 에디터 제프리 클루거Jeffrey Kluger가 아폴로 8호의 도전을 그린 책이 인류의 가장 위대한 모험 아폴로 8』이.

 

  냉전의 시대였던 1960년대에 미국과 소련은 우주 개발 계획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1970년까지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케네디가 1963년에 갑자기 암살되어 린든 존슨 Lyndon Johnson 정부로 교체된 뒤에도, 미 항공우주국NASA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숨가쁘게 달렸다.

 

  1970년까지 남은 시간은 촉박한데 달로 사람을 보내는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1969년 안에 인간을 달로 보내야 한다는 과중한 목표 때문에 우주선 생산 과정의 전 단계에서 규칙이 무시되고 안전보다 속도가 우선시됐다. 그 결과가 아폴로 1호의 비극이었다. 1967127, 우주로 날아가기도 전에 지구에서 시험을 하던 도중 화재 사고가 일어나 아폴로 1호의 비행사 3명이 사망했다. 사망 사고가 발생한 데다 우주선을 달에 쏘아보낼 새턴 V 로켓의 상태는 못 미더웠다. 게다가 소련에서는 유인 우주선 존드Zond를 개발하고 있으니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달에 사람을 보낼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NASA에서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달 탐사 일정을 앞당긴 것이다.

 

  지구 궤도를 선회하는 데까지만 성공한 상태에서 아폴로 8호가 맡은 임무는 막중했다. 지구를 벗어나 달로 비행하고, 달 궤도에 진입하고, 달의 궤도에서 벗어나 지구로 돌아오는 임무는 아직까지 누구도 해 보지 않은 시도였다. 우주선의 속도를 적절하게 설정하지 않으면 달과 충돌하거나 다시 지구로 내던져질 수도 있다. 아폴로 8호는 달의 궤도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위험은 남아 있었다. 너비가 3475킬로미터나 되는 달의 뒤편을 비행할 때는 지구와의 통신이 두절된다. 일이 잘못된다면 달에서 지구로 영원히 답신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달이 지구를 한 바퀴 공전하는 동안 자전도 한 번 하게 되므로, 지구에서는 항상 달의 같은 면만 보게 된다.



달의 뒷면. 다른 천체와 부딪쳐서 만들어진 크레이터로 가득하다. 아폴로 8호의 우주비행사들은 인류 최초로 이 모습을 보았다.


  아폴로 8호가 달의 뒷면으로 진입하느라 지구와의 교신이 끊긴 지 35분 52초만에 아폴로 8호 비행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폴로 8호의 비행사 프랭크 보먼, 짐 러블, 윌리엄 앤더스는 달의 궤도를 비행하면서 인류 최초로 달의 뒷면을 본 사람이 된 것이다.(달의 공전주기와 자전주기는 같기 때문에 지구에서는 항상 달의 앞면밖에 볼 수 없다.) 거대한 달의 뒷면에 유성과 부딪힌 흔적들이 길쭉하게 펼쳐져 있었다. 비행사들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달의 지형들을 생중계했고, 달 위로 떠오르는 지구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10억 명의 사람들이 지구에서 이 경이로운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책은 아폴로 8호가 탄생하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달의 궤도를 비행하면서 아폴로 8호가 한 일들, 아폴로 8호 미션 이후의 상황까지, 아폴로 8호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인류가 달에 발을 딛게 하기 위해 길을 닦았던 사람들과 그들의 곁을 묵묵히 지켰던 사람들, 그들을 둘러싼 정치적, 사회적 배경까지 짜임새 있게 엮어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실제 인물의 인터뷰와 아폴로 8호의 교신 기록을 재구성한 것일 정도로, 이 책은 사실을 충실히 고증했다.사실을 충실히 고증하면서도 사람들이 아폴로 8호의 비행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느꼈던 온갖 감정과 드라마들을 소설처럼 흥미롭게 그려낸다. 아폴로 8호의 비행에 적용되었던 과학적 원리들도 대중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설명했다. 

  아폴로 8호의 비행사 프랭크 보먼, 짐 러블, 윌리엄 앤더스는 인류 최초로 달의 궤도를 비행하고 달의 뒷면을 보았지만, 정작 달에는 발을 딛지 못했다. 그들은 닐 암스트롱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모험을 했고, 인류가 달에 착륙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 책을 통해 아폴로 8호를 알게 되고 기억하게 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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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기 세계신화총서 11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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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지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하고 있다.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를 읽고 그 책에 소개된 소설 사람의 세상에서 죽다』 를 읽었고,사람의 세상에서 죽다와 같은 프로젝트에서 만들어진 일본 소설 여신기를 읽게 되었다두 소설을 만들어낸 프로젝트는 '세계신화총서'라는 프로젝트로한 영국인 편집자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신화를 분석하는 책도 좋고 신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어도 좋으니 자기 나라의 신화를 모티브로 한 책을 쓰라는 제안이었다.사람의 세상에서 죽다』는 중국의 백사 전설을 모티브로 중국의 작가 리루이가 쓴 소설이고,여신기는 일본의 창조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부부의 신화를 모티브로 일본의 작가 기리노 나쓰오가 쓴 소설이다. 기리오 나쓰오는여신기』에서 일본의 창세 신화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재창조했을까?

 

고바야시 에이타쿠, <창으로 바다를 휘젓다>, 창으로 바다를 휘젓고 있는 남자가 이자나기, 그 옆의 여자가 이자나미다. 이자나기가 바다를 휘저어 뭉친 덩어리가 일본 열도가 되었다고 한다.


『여신기』 의 원전이 되는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의 신화는 이렇다. 태초에 부부신인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함께 일본 열도와 여러 신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자나미가 불의 신을 낳다 화상을 입어 죽고 말았다. 슬픔에 빠진 이자나기는 황천까지 가서 이자나미를 다시 데려오려 했다. 그러자 이자나미는 자신이 봐도 된다고 할 때까지 자신의 모습을 보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자나기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횃불을 켜고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죽은 지 시간이 꽤 지나 이자나미는 살이 썩어 구더기가 들끓는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놀란 이자나기는 달아나 버렸고, 이자나미와 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황천에 버려진 이자나미는 이자나기에게 복수하기 위해 하루에 인간을 천 명씩 죽이겠다고 했다. 그러자 이자나기는 하루에 천오백 명씩 인간이 태어나게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서는 매일 천 명이 죽고 천오백 명이 태어나게 되었다.

  일본의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이자나기-이자나미 신화와 오키나와 어느 섬의 풍습을 뒤섞어 『여신기』를 완성했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죽은 무녀 나미마와 황천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여신 이자나미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둘 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그의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에게 버려지고 원한을 품었다. 나미마는 뒤늦게 자신이 아이를 낳는 도구로 이용당했음을 알게 되고, 이자나미는 아이를 낳는 고통을 혼자 짊어지는 여자의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에 한탄스러워한다. 

  나미마가 살았던 고대 일본의 어느 작은 섬은 대무녀가 우두머리가 되는 모계사회이지만, 개인이 사회 제도에 억압당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대무녀 집안의 첫째 손녀는 섬을 이끄는 대무녀가 되지만, 둘째 손녀는 밤의 세계, 죽은 자들의 세계를 섬기는 무녀가 되어 평생 처녀의 몸으로 무덤 곁을 지켜야 한다. 무녀가 될 딸을 낳지 못하는 무녀 집안은 마을 전체에서 따돌림당하고 고기잡이를 나가는 것도 허락받지 못한다. 딸을 낳지 못하는 것이 생계를 위협받을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뒤집어보면,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도 당연히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평생 남자와 관계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규율을 깨고 나미마가 아이를 낳았고, 빛의 무녀가 되어야 할 아이가 어둠의 무녀가 되었어도 마을에는 어떤 천벌도 떨어지지 않는다. 신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제도와 관습이 얼마나 헛되고 자의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자나미가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을 때 이자나기는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여자와 남자의 신체상 구조와 기능이 달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여자인 이자나미가 남자인 이자나기에게 건방지게 먼저 말을 걸었다는 이유로 이자나미의 첫 아이가 뼈 없는 기형아로 태어난 것은 부당한 처사다. 이자나미가 어두운 황천에서 매일 사람을 죽이고 있을 때 이자나기는 전국을 유랑하며 사냥을 즐기고, 가는 곳마다 새로운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임신시킨다. 이자나미가 사람을 죽이고 있으니 자신은 사람을 태어나게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그런데도 신인 이자나기를 해칠 수 없어 이자나미는 상대 여자들만 죽이니 또 다른 가해자가 된다. 

 인간도 신도 벗어날 수 없는 이 부당한 상황에 인간인 나미마와 여신인 이자나미는 어떻게 대처할까. 나미마는 자신을 배신한 마히토를 죽이지만, 죽은 마히토의 영혼이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자 마음이 약해진다. 복수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달은 나미마는 이자나미에게 이제 이자나기를 용서해 주자고 말한다. 그러나 이자나미는 자신은 복수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힌 이자나기를 벌하는 것이라며, 뒤늦게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이자나기를 끝내 용서하지 않는다. 그렇게 이자나미는 황천의 여신, 죽음의 여신으로 남는다. 

  기리노 나쓰오가 보는 세상은 고대에나 현대에나, 인간에게나 신에게나 가혹하고 차갑다. 나미마처럼 복수하려는 마음도 내려놓을지, 이자나미처럼 용서도 화해도 거부하고 복수를 포기하지 않을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 것은 아니다. 둘 중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 애매한 태도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래서  『여신기』 는 황천보다도 더 차갑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결정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신의 이야기이면서 인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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