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기 세계신화총서 11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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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지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하고 있다.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를 읽고 그 책에 소개된 소설 사람의 세상에서 죽다』 를 읽었고,사람의 세상에서 죽다와 같은 프로젝트에서 만들어진 일본 소설 여신기를 읽게 되었다두 소설을 만들어낸 프로젝트는 '세계신화총서'라는 프로젝트로한 영국인 편집자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신화를 분석하는 책도 좋고 신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어도 좋으니 자기 나라의 신화를 모티브로 한 책을 쓰라는 제안이었다.사람의 세상에서 죽다』는 중국의 백사 전설을 모티브로 중국의 작가 리루이가 쓴 소설이고,여신기는 일본의 창조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부부의 신화를 모티브로 일본의 작가 기리노 나쓰오가 쓴 소설이다. 기리오 나쓰오는여신기』에서 일본의 창세 신화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재창조했을까?

 

고바야시 에이타쿠, <창으로 바다를 휘젓다>, 창으로 바다를 휘젓고 있는 남자가 이자나기, 그 옆의 여자가 이자나미다. 이자나기가 바다를 휘저어 뭉친 덩어리가 일본 열도가 되었다고 한다.


『여신기』 의 원전이 되는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의 신화는 이렇다. 태초에 부부신인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함께 일본 열도와 여러 신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자나미가 불의 신을 낳다 화상을 입어 죽고 말았다. 슬픔에 빠진 이자나기는 황천까지 가서 이자나미를 다시 데려오려 했다. 그러자 이자나미는 자신이 봐도 된다고 할 때까지 자신의 모습을 보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자나기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횃불을 켜고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죽은 지 시간이 꽤 지나 이자나미는 살이 썩어 구더기가 들끓는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놀란 이자나기는 달아나 버렸고, 이자나미와 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황천에 버려진 이자나미는 이자나기에게 복수하기 위해 하루에 인간을 천 명씩 죽이겠다고 했다. 그러자 이자나기는 하루에 천오백 명씩 인간이 태어나게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서는 매일 천 명이 죽고 천오백 명이 태어나게 되었다.

  일본의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이자나기-이자나미 신화와 오키나와 어느 섬의 풍습을 뒤섞어 『여신기』를 완성했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죽은 무녀 나미마와 황천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여신 이자나미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둘 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그의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에게 버려지고 원한을 품었다. 나미마는 뒤늦게 자신이 아이를 낳는 도구로 이용당했음을 알게 되고, 이자나미는 아이를 낳는 고통을 혼자 짊어지는 여자의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에 한탄스러워한다. 

  나미마가 살았던 고대 일본의 어느 작은 섬은 대무녀가 우두머리가 되는 모계사회이지만, 개인이 사회 제도에 억압당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대무녀 집안의 첫째 손녀는 섬을 이끄는 대무녀가 되지만, 둘째 손녀는 밤의 세계, 죽은 자들의 세계를 섬기는 무녀가 되어 평생 처녀의 몸으로 무덤 곁을 지켜야 한다. 무녀가 될 딸을 낳지 못하는 무녀 집안은 마을 전체에서 따돌림당하고 고기잡이를 나가는 것도 허락받지 못한다. 딸을 낳지 못하는 것이 생계를 위협받을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뒤집어보면,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도 당연히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평생 남자와 관계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규율을 깨고 나미마가 아이를 낳았고, 빛의 무녀가 되어야 할 아이가 어둠의 무녀가 되었어도 마을에는 어떤 천벌도 떨어지지 않는다. 신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제도와 관습이 얼마나 헛되고 자의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자나미가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을 때 이자나기는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여자와 남자의 신체상 구조와 기능이 달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여자인 이자나미가 남자인 이자나기에게 건방지게 먼저 말을 걸었다는 이유로 이자나미의 첫 아이가 뼈 없는 기형아로 태어난 것은 부당한 처사다. 이자나미가 어두운 황천에서 매일 사람을 죽이고 있을 때 이자나기는 전국을 유랑하며 사냥을 즐기고, 가는 곳마다 새로운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임신시킨다. 이자나미가 사람을 죽이고 있으니 자신은 사람을 태어나게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그런데도 신인 이자나기를 해칠 수 없어 이자나미는 상대 여자들만 죽이니 또 다른 가해자가 된다. 

 인간도 신도 벗어날 수 없는 이 부당한 상황에 인간인 나미마와 여신인 이자나미는 어떻게 대처할까. 나미마는 자신을 배신한 마히토를 죽이지만, 죽은 마히토의 영혼이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자 마음이 약해진다. 복수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달은 나미마는 이자나미에게 이제 이자나기를 용서해 주자고 말한다. 그러나 이자나미는 자신은 복수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힌 이자나기를 벌하는 것이라며, 뒤늦게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이자나기를 끝내 용서하지 않는다. 그렇게 이자나미는 황천의 여신, 죽음의 여신으로 남는다. 

  기리노 나쓰오가 보는 세상은 고대에나 현대에나, 인간에게나 신에게나 가혹하고 차갑다. 나미마처럼 복수하려는 마음도 내려놓을지, 이자나미처럼 용서도 화해도 거부하고 복수를 포기하지 않을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 것은 아니다. 둘 중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 애매한 태도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래서  『여신기』 는 황천보다도 더 차갑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결정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신의 이야기이면서 인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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