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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설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7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금정 옮김 / 비채 / 2009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항설백물어』에는 각 장의 원전이 된 괴담과 삽화를 함께 실어 기괴하고 오싹한 분위기가 더욱 강해진다.
무서운 이야기는 듣고 나면 밤에 잠을 못 잘 걸 알면서도 듣고 싶어진다. 그렇게 괴담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다. 『항설백물어巷說百物語』 는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이야기'라는 뜻으로, 일본의 소설가 교고쿠 나츠히코가 일본에서 전해져 오는 괴담들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에도시대(도쿠가와 막부가 일본을 다스렸던 시기, 1603~1867)에 괴담집을 만들기 위해 각 지방의 괴담을 수집하러 떠돌아다니는 청년 모모스케와 해결사 마타이치 일당이, 함께 괴이한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겪는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에피소드 형식의 소설이다. 괴이한 이야기들을 모아 놓았으니 이 소설 자체가 일종의 괴담집이다.
괴담집인데도 이 소설에서는 귀신이나 요괴가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모스케와 마타이치 일당이 겪는 기묘한 사건들은 겉보기에는 귀신이나 요괴의 농간처럼 보이지만, 결말에서 귀신이 아닌 사람이 저지른 짓으로 드러난다. 진상을 알고 나면 사건을 일으킨 인간의 탐욕과 증오, 잔혹함에 치를 떨게 된다. 그들을 처단하는 마타이치 일당도 마냥 선하고 정의롭지만은 않다. 마타이치 일당은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사건을 해결한다. 마타이치 일당이 교묘한 수를 써서 범인들을 함정으로 몰아넣고 스스로 파멸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면, 그들도 범인들 못지않게 잔혹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악귀보다 독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건은 해결되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세상에는 요괴나 귀신이 저지른 짓으로 알려진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수많은 괴담들이 이렇게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세상에는 어떤 작가도 상상하지 못했을 만큼 기묘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그 뒤에는 복잡하게 뒤얽힌 인간의 감정이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어두움은 앞으로도 잔혹하고 괴이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런 기묘한 사건들, 어지러운 세상을 보는 마타이치 일당의 시선은 냉소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약한 사람들을 고통과 원한에서 구하고, 위험으로부터 지켜준다.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면 다칠 사람들을 위해 일부러 진상을 밝히지 않는다.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 구르다 보니 사람에게서 어떤 선한 것도 바라지 않게 된 마타이치 일당에게도 인정은 남아 있다. 희미하게나마 남은 사람의 온기가 잔혹한 이야기들에 지친 마음을 감싸준다.
이야기들 자체가 흥미로우니 그저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고, 악인들이 처단되고 잘못되었던 일들이 바로잡히는 모습에 통쾌할 수도 있고, 그럼에도 씁쓸한 마음이 남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항설백물어』 는 좋은 읽을거리가 되어줄 것이다. 분량도 5백 페이지가 넘으니, 읽을 것이 많아 좋다. 읽을 것이 많다는 건 맛있는 음식을 잔뜩 쌓아둔 것만큼이나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