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모델, 미국 - 미국의 인종법은 어떻게 나치에 영향을 미쳤는가
제임스 Q. 위트먼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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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이 히틀러의 모델이라니, 선뜻 납득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스스로를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의 수호자, 세계 모든 민족에게 개방된 땅으로 자부해 왔다. 히틀러에게 미국은 최대의 적이었고,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은 미국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인 민주주의와 평등을 혐오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이 책은 나치 독일이 반유대주의 법인 '뉘른베르크 법'(1935년 발표)을 제정할 때 미국의 인종 차별적인 법들을 참고했다고 이야기한다. 미국의 법학자인 저자는 미국이 겉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을 역사의 어두운 면을 파헤친다. 


  수많은 인종이 섞여 있는 미국이지만 건국 당시부터 인종주의(인종의 생리학적 특징에 따라 민족 사이의 불평등과 억압을 합리화하는 비과학적인 사고방식)는 미국 법에 스며들어 있었다. 미국 초대 의회에서 제정된 법 중 1790년의 귀화법은 "자유로운 백인 외국인"에게만 귀화를 허용했다.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도에서 해방된 흑인들에게 미국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1868년에는 "미국 영토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모의 시민권 여부와 관계 없이 미국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 받는다"는 수정헌법 14조가 헌법에 추가되었다. 그러나 문맹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법, 노예 해방 이전에 조상이 투표권을 가졌을 경우에만 투표권을 주는 "조부조항" 등 흑인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으려는 교묘한 인종 차별법들이 생겨났다. 1898년 미국이 스페인에게서 필리핀의 식민 지배권을 넘겨받았을 때 필리핀 사람들은 법적 권리를 가진 미국 시민이 아니라 단순한 "비(非)시민 국적자"가 되었다. 


 나치의 법조인들과 입법자들은 이러한 미국의 인종차별적인 사례들을 꼼꼼히 검토하고 연구했다. 독일에서는 시민권을 취득하는 것이 동호회에 가입하는 것만큼이나 쉽다고 비꼬았던 히틀러가 미국의 인종차별적인 꼼수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나치 독일은 뉘른베르크법에서 유대인의 국적과 참정권을 박탈해 단순한 체류자로 전락하게 했다. 나치 법률가들은 미국인들의 출중한 법적, 정치적 재능과 교양을 보여준다며 미국의 인종차별적인 법들을 찬양하기까지 했다. 


 '인종의 순수성'을 지키는 점에서도 나치 독일은 미국을 모범사례로 보았다. 나치 독일에게 미국은 게르만 족의 친족이자 아리아인의 한 갈래인 노르딕 인종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세운 국가였다. "백인과 흑인의 혼인, 백인과 위로 3대 이내에 흑인 조상이 있는 자의 혼인, 또는 백인과 말레이 인종의 혼인, 또는 흑인과 말레이 인종의 혼인은 영구히 금지되며 무효다. 이 조항의 규정을 위반하는 자는 18개월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메릴랜드 주의 혼혈금지법, 한 방울만 흑인의 피가 섞여 있어도 흑인으로 간주한다는 "한 방울 법칙(one drop rule)"은 나치 법조인들조차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진저리 치게 만들었다. 다만 미국이 유대인을 백인으로 취급하는 것만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혈통이나 배우자의 인종, 과거의 노예 신분 등 다양한 기준으로 인종을 규정했던 미국의 법들을 참조해, 뉘른베르크법에서는 조부모 중 두 명이 유대인이고 유대인과 혼인하거나 유대교 공동체의 일원인 사람을 유대인으로 규정했다. 


 나치가 뉘른베르크법을 제정할 때 미국의 영향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은 독일 외에 인종주의를 법에 적용했던 유일한 나라였고, 그러한 나라가 세계에서 강대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나치를 자극했다. 미국이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독일에 맞서게 되면서 둘은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데 크게 공헌한 것도 사실이다. "이게 다 미국의 잘못입니다. 미국을 탓하세요."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의 과거에는 우리(미국인)가 잊고 싶어하는 측면도 담겨 있고, 그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계 인종주의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위치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인 학자인 저자나 미국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뼈 아프게 다가올 것이다. 게다가 현재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는 2016년 대선 출마 당시 출생시민권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올해 10월 30일에도 "외국인이 미국에 들어와서 아이를 낳으면 시민으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모든 혜택을 주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미국뿐"이라며, 출생시민권을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는 미국에 들어오는 다양한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일삼고 있고, 백인우월주의 단체 KKK의 대표였던 극우 인종주의자 데이비드 듀크는 그런 트럼프를 지지한다. 인종주의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려는 이 시기가, 미국인들이 교묘한 인종차별법을 최근까지도 시행하고 있었던 자국의 역사를 되돌아봐야 할 때다.


 그런데 이것이 미국의 문제라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다양한 인종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고, 인종주의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될 수 있다. 우리는 동양인으로서 인종차별과 인종혐오 범죄의 희생양이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 들어오려는 이민자와 난민들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나치는 이 세상에서 유일무의한 극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극악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보다 선하다고 자신하면서 자신 안의 악을 직시하지 못할 때 나치의 유대인 학살 같은 비극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또한 읽고 되새겨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참고 기사: "트럼프 '출생시민권' 폐지 발언에 수정헌법 14조 논란 격화"(2018.12.31.뉴시스)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81031_0000459692&cID=10101&pID=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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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1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2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송기원의 포스트 게놈 시대 - 생명 과학 기술의 최전선, 합성 생물학, 크리스퍼, 그리고 줄기 세포
송기원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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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03년 인간 유전체(게놈 genome, 한 개체가 가지고 있는 유전 정보 전체)의 모든 정보를 읽어내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23년 만에 완료되었다. 인류는 이제 자신의 유전 정보를 모두 알 수 있는 '포스트 게놈(게놈 프로젝트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유전 정보를 쉽게 얻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유전 정보를 모두 읽어내고 분석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니, 이제는 역으로 유전 정보를 조립해 인간이 원하는 대로 생명을 설계하고 편집하고 창조하려는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런 연구들을 통틀어 '합성생물학'이라고 한다.    


크레이그 벤터 박사의 연구팀이 2016년 3월에 만들어낸 합성 생명체 Syn 3.0. 인간이 합성한 유전체만으로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합성생물학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2010년 미국의 생명과학자 크레이그 벤터는 한 세균의 유전체를 인공적으로 합성한 다른 세균의 유전체로 교체했고, 인간이 교체하고 합성한 유전체로도 세균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2017년 8월에는 인간의 배아에서 유전체를 성공적으로 교정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유전자 조작 농산물(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을 먹어도 안전한지는 궁금해하면서, 그 밖의 생명과학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생명과학은 앞으로의 인류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생명과학자 송기원 교수가 생명과학이 최근 어떻게 진행되고 발전되고 있는지, 이런 상황 속에서 고민할 문제는 무엇인지 소개하기 위해 쓴 책이  『송기원의 포스트 게놈 시대』 다.


​  이 책의 저자가 공동저자로 참여한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을 몇 달 전에 읽었었는데, 같은 저자가 같은 주제의 내용을 쓴 책이다 보니 이 책과 겹치는 내용이 있다. 겹치는 부분은 복습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가 2017년 3월에 출간된 책이니 그때까지의 상황을 다루고 있는 반면, 이 책은 그 이후의 상황과 이슈들까지 다루고 있다. 또 다른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책이 나오면서 이 책의 시의성 또한 떨어지겠지만, 2018년을 전후해서 생명과학 분야에서 어떤 일들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 그리고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에서 소개됐던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CRISPR, Clustered Regularl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회문 구조(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똑같은 구조) 염기 서열 집합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유전자를 편집하려면 필요한 부분만 잘라내는 유전자가위가 필요하다. 2012년 세균이 자기 몸에 침입한 바이러스의 DNA를 크리스퍼라는 유전자 사이에 저장해 두고 있다가, 다음에 같은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저장된 정보를 통해 침입한 바이러스의 DNA 염기서열을 인식해 잘라버린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원리를 응용한 크리스퍼 가위는 기존의 유전자가위들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유전자를 편집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이전의 유전자가위들과 크리스퍼 가위의 특징을 비교하고, 크리스퍼 가위 기술을 활용한 사례들을 보여준다.  말라리아모기에게 불임 유전자나 말라리아 전달을 차단하는 유전자를 이식하는 연구, 인간 배아의 유전체를 편집하는 연구 등 크리스퍼 가위를 활용해 동식물이나 인간의 유전체를 인간의 의도대로 편집하고 교정하려는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  그러나 이 책은 크리스퍼 가위의 단점과 합성생물학의 문제 또한 이야기한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다른 유전자가위에 비하면 정확한 편이지만 엉뚱한 부분까지 같이 잘라내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그리고 인간의 세포는 매 순간 새로운 세포로 교체되고 있기 때문에, 성인의 세포를 가지고 유전자 교정 시술을 할 경우 시간이 지나면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 수정란이나 배아 세포였을 때 세포의 유전자를 편집해야 수정란이나 배아 세포에서 만들어진 모든 세포의 유전자를 영구적으로 교정할 수 있다. 



박사와 고양이, 생쥐 캐릭터가 합성생물학의 원리를 설명해 주는 일러스트. 한 챕터당 하나 꼴로 실려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또한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자연의 간섭을 피할 수 없다. 앞에서 이야기한 말라리아 모기 불임 유전자 연구는 자연의 힘에 부딪치게 되었다. 처음 4세대까지는 불임 효과가 나타났지만, 세대가 지나갈수록 불임 효과를 상쇄시키는 또 다른 변이가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의 생명과학 기술이 아무리 빠르게 발달해도 자연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길을 찾아내고야 만다. 그리고 유전자를 변형시킨 생물이 생태계로 유출되었을 때 기존의 생물과 전체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인간 유전체를 모두 분석했다 해도, 어떤 유전자를 편집했을 때 의도했던 효과 외에 또 어떤 효과가 나타날지 지금의 기술로서는 예상할 수 없다. 


​  이렇게 이 책은 최근의 생명과학, 특히 합성생물학의 명암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대학교 때 교수님의 강의보다 명쾌한 필기 노트로 동기들의 공부에 도움을 주었다던 송기원 교수는 이 책에서도 최대한 쉽고 명쾌하게 최근의 생명과학 연구와 그 원리들을 설명한다. 송기원 교수를 캐릭터화한 것으로 보이는 박사 캐릭터와 고양이 캐릭터, 생쥐 캐릭터가 그림을 통해 합성생물학의 원리를 설명하는 일러스트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처음에는 이 책이 그런 일러스트들로 이루어진 책인 줄 알았다. 막상 책을 읽어보니 텍스트가 주이고 일러스트는 한 챕터당 하나씩만 나오지만, 합성생물학의 원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캐릭터들이 귀여워 과학책의 딱딱한 느낌을 덜어준다. 


​  이 책을 통해 지금의 생명과학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연구자들도 버거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생명과학이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 책뿐만 아니라 더 많은 생명과학 관련 소식에 귀를 기울여야겠다.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생명과학이 영향을 미치는 날은 생각보다 빨리 올지 모르고, 이미 와 있을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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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집 - 화가가 머물고 그림이 태어난 집을 찾아서
제라르 조르주 르메르 지음, 장 클로드 아미엘 사진, 이충민 옮김 / 아트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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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집은 우리 자신의 작은 세상이다. 사는 게 바빠서 자기의 취향이나 가치관에 맞게 집을 가꾸어 나갈 여유가 없다 해도, 집은 우리 삶의 흔적들로 인해 우리가 살기 이전과는 다른 공간이 되었다. 누군가의 집에 갔을 때 우리는 바깥 세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 사람이 만들어 온 내밀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각 예술을 업으로 삼고 자기만의 세계를 확고히 세우는 화가의 집에서는 그 화가의 삶뿐만 아니라 예술 세계까지 들여다 볼 수 있다.『화가의 집』은 프랑스의 미술사학자와 사진작가가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19세기와 20세기 미술사를 빛낸 화가 열네 명의 삶과 예술 세계를 들여다 본 책이다.


프란티섹 빌렉의 집 내부. 빌렉은 이 집을 '지상에 옮겨 놓은 신의 사원'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의 의도대로 나무와 돌, 흰 벽으로 이루어진 집은 수도원처럼 절제되고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사진 출처: http://en.ghmp.cz/

제임스 엔소르의 고향 집 거실. 벽 하나를 가득 메운 그의 작품 <1889년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과 거실 곳곳에 놓인 온갖 골동품과 꼭두각시 인형이 기괴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방문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사진 출처: http://priscillasadventuresineurope.blogspot.com/


  화가에게 집은 번잡한 바깥 세상을 피해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작은 세상이다. 때로는 그 작은 세상을 자신의 작품들을 보관하는 작은 미술관으로 쓰기도 한다. 화가의 집은 단순히 예술 작품을 만들고 보관하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화가의 캔버스가 되어 또 다른 예술 작품으로 남는다. 열네 명의 작가들의 작품 세계가 서로 다르듯 집도 각각의 개성이 뚜렷하다. 같은 체코의 예술가인데도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1939의 집이 그의 작품들처럼 화려하고 유려한 장식과 골동품들로 가득 찬 반면, 프란티섹 빌렉Frantisek Bilek, 1872-1941의 집은 조각 작품들만 치운다면 목사관이나 수도원처럼 보일 정도로 경건하고 절제된 분위기의 공간이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집이 그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온갖 꽃들로 방문객을 환영한다면, 벨기에의 화가 제임스 엔소르James Ensor, 1860-1949의 집은 기괴한 작품과 골동품으로 방문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지베르니의 정원 풍경. 모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연못과 그 위에 놓인 일본식 무지개 다리가 보인다.

사진 출처: https://sonurai.com/bingwallpapers/856

지베르니 집의 식당. 천장과 벽, 식탁, 청화백자 타일까지 푸른색 톤으로 맞추어져 있어 정갈하고 청결한 느낌을 준다. 모네는 미식가로서 부엌을 맛과 향의 실험실로 여겼다고 한다.

사진 출처: http://fondation-monet.com/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은 모네의 지베르니 저택이다. 두 개의 강으로 둘러싸인 지베르니의 아름다운 풍경은 물을 좋아했던 모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모네는 지베르니에 집을 지을 때 특히 정원에 정성을 쏟았다. 그는 회화의 구도에 따라 정원을 배치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품종의 꽃을 심었고, 지금도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어 다채로운 풍경들을 만들어낸다. 말년에 거동이 불편해져 외출하기 힘들어진 모네가 정원의 모습만으로도 수백 점의 작품을 그려낼 수 있었을 정도다. 저택 내부의 방들도 각각의 색에 맞추어 간결하고 소박하게 장식되어 있어, 생활하고 창작하기에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화가의 작품들이나 온갖 수집품으로 가득 차 상상력과 영감을 자극하는 집도 좋지만, 실제로 살아가고 활동하기에는 오래 머물기 편안한 집이 좋다. 


 화가와 그의 집에 대한 기록을 풍부하게 인용하면서 화가의 집과 예술 세계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글과, 현장감이 넘치면서 집안 곳곳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사진 덕분에 화가의 작은 세상에 잠시 머물렀다 온 기분이 든다. 벽에 걸린 그림 한 점, 장식품 하나에서도 화가의 흔적과 마음이 느껴진다. 원래 알고 있던 화가보다 모르던 화가들이 더 많지만, 알고 있던 화가의 더 깊은 내면을 알게 되었고 모르던 화가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책에 나온 집들에 직접 가서 그 집에서 살면서 창작을 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느껴보고 싶다. 


 아쉽게도 인터넷 서점의 판매지수를 보니 이 책은 그렇게 많이 팔리지도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절판되어 중고도서로 사거나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밖에 없다. 홍보가 잘 되지 않았던 걸까,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 이야기가 많아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은 걸까. 글과 그림, 디자인, 구성부터 공을 많이 들인 아름다운 책인데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지금은 소장할 수도 없다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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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의 사자 - 고양이는 어떻게 인간을 길들이고 세계를 정복했을까
애비게일 터커 지음, 이다희 옮김 / 마티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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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는 호랑이가 산다. 4.8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이 작은 호랑이는 내가 자기 뒤를 쫓아다니면서 쓰다듬어 주거나 엉덩이를 두드려주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밥을 먹으러 부엌에 가거나 TV를 보러 거실에 가기만 해도 같이 방으로 돌아가자고 떼를 쓴다. 그런데 막상 귀찮을 때는 내가 쓰다듬든 말든 거들떠 보지도 않고, 푹신한 이불 위에서 잠이나 잔다. 엄마는 주인이 집에 오자마자 반갑다고 핥아대고 심부름도 척척 해내는 개가 더 좋다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귓등으로 흘린다. 내 작은 호랑이, 내 고양이뿐만 아니라 전 세계 수억 마리의 고양이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인간에게서 사랑을 받는다.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고양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미국의 저널리스트 애비게일 터커의 책 『거실의 사자』는 이러한 의문에서 시작된다.


모든 고양이의 조상인 리비아살쾡이. 1만 년에서 1만 2천 년 전에 리비아살쾡이 중 일부가 인간의 마을에 침투했고, 오늘날의 애완고양이로 이어졌다.


고양이는 어떻게 인간과 함께 살게 되었을까? 안타깝게도 고양이와 인간은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로 오랜 인연을 시작했다. 야생의 대형 고양이들은 우리의 조상인 원시 인류를 잡아먹었고, 원시 인류는 고양잇과 동물을 순전히 음식으로서 사랑했다. 그러나 인간이 한 곳에 머물러 생활하게 되면서 고양잇과 동물들의 진화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고양잇과 동물들에게 인간 정착촌의 음식물 쓰레기는 새롭고 다양한 먹을거리였다. 고양이는 인간을 두려워하고 혼자 살고 싶어하는 경향을 극복하고 대담하게 인간이 사는 곳에 침투했고, 먹을 것과 잘 곳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익을 누리게 되었다. 인간이 고양이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고양이가 인간을 선택한 것이다. 인간의 배에 고양이가 몰래 숨어들어 다른 나라에 가게 되었든, 쥐를 잡으려는 목적으로 인간이 고양이를 의도적으로 풀어놓았든, 인간에게 힘입어 고양이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사실 고양이는 실용적인 동물이 아니다. 개들이 양치기 개, 군견, 애완견, 장애인 안내견 등으로 활약하는 반면 고양이는 실용적인 방면에서 거의 활동하지 않고 있다. 흔히들 고양이를 쥐 잡는 동물이라고 생각하지만, 고양이는 힘들게 쥐를 사냥하는 것보다 음식물 쓰레기를 먹는 것을 좋아한다. 쥐를 잡아먹는다 해도 실제로 전염병을 옮기는 성체 쥐보다는 연약하고 어린 쥐를 잡아먹는다. 게다가 전 세계에서 희귀동물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포식동물이어서 희귀동물을 보호하려는 사람들에게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한 생물학자는 특정한 동물(즉 고양이)에게는 애정을 쏟으면서 다른 동물의 안녕을 무시하는 현실에 한탄한다. 게다가 가축화가 덜 되어 예민하고 주변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며 독립성이 강한 것 등, 애완동물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고양이 사진에 "이번 달은 돈을 아껴써야 해요"라는 문구를 넣은 인터넷 밈. 이와 같은 고양이 밈들은 수많은 밈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인기를 몇 개월씩, 몇 년씩 누린다.


이런 고양이의 단점들에 대해 읽고 있다 보면 "이래도 고양이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것 같다. 그럼에도 나를 비롯한 고양이 집사들의 답은 하나다. "그래도 고양이입니다." 고양이는 동그란 얼굴, 통통한 볼, 넓은 이마, 큰 눈, 작은 코까지 갓난 아기처럼 느껴지는 특성을 갖고 있다. 평균 3.6킬로그램인 고양이의 몸집마저 갓난아기의 체구와 정확히 일치한다. 인간은 고양이의 갓난 아기 같은 모습에서 양육 본능에 가까운 끌림을 느낀다. 완전한 고립 상태를 즐기는 고양이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만족감을 느끼게 한다. 다양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개의 얼굴과 달리 무표정한 고양이의 얼굴은 백지와 같기 때문에, 오히려 온갖 인간의 감정을 갖다 붙이고 의인화하기 더 쉽다.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현실 집사들은 키우는 고양이를 예뻐하고 랜선 집사들은 SNS 속 남의 고양이에게 열광하며, 수억 명의 사람들이 고양이 밈(meme,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사진, 동영상 등의 짧고 재미있는 콘텐츠. 유행어와 비슷하지만 단어가 아니라 사진이나 동영상의 형태를 하고 있다.)을 즐긴다. 고양이는 물리적인 지구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라는 가장 침범하기 어려운 영역까지 지배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고양이를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우리의 놀잇감이 아닌 자기만의 전략과 사연을 가진 강인한 생명체로 보아야 한다고.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조차 죽이고 마는 우리의 잔혹함과 무관심을 경계하고, 고양이뿐만 아니라 고양이만큼 귀엽지 않거나, 함께 생활하기 편하지 않거나, 생존력이 뛰어나지 않은 동물을 대하는 우리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고양이가 우리에게 길들이든 우리를 길들이든, 인간에게 유용하든 무용하든 고양이는 그 자체로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거실의 사자』의 한국어판 표지. 고양이가 문틈 사이로 발을 내미는 귀여운 모습을 담은 이 표지는 알라딘에서 "2018 올해의 표지" 3위에 선정되었다.


P. S. 1. 안타깝게도 표지는 고양이 사진이지만 본문에는 고양이 사진이 한 점도 실리지 않았다. 단지 보고 즐거워할 수 없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이 책에 실린 수많은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시각 자료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쉽다. 그리고 하드커버를 감싸는 겉표지는 보관하기 어려워 아예 제거하는 도서관 정책 때문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서 읽은 나는 귀여운 고양이 표지를 즐길 수조차 없었다.

P. S. 2. 역자 후기에 따르면 출판사는 이 책의 번역자를 찾기 위해 고양이를 키우는 번역가를 찾는다는 소식을 SNS로 전했다고 한다. 책에 애정을 갖고 번역할 사람을 찾으려 했던 출판사의 사려 깊음이 엿보인다. 고양이 집사가 번역한 책답게 이 책의 번역에서는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역자 후기에서도 번역자는 자기 고양이에 대한 애정을 숨김 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 역자 후기는 이렇게 끝난다. "(이 책의 번역을 맡게 된) 이 행운의 공을 우리 술이(고양이 이름)에게 돌리며 오늘도 어김없이 집사 된 도리로 캔을 따주기 위해 일어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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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싱어의 <실천윤리학> 읽기 세창명저산책 57
김성동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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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을 몇 년 동안 공부했는데도 내가 읽어 온 인문학 책의 대부분은 해설서이다이 정도로 오래 공부했으면 원서를 읽어야 할 텐데 아직도 해설서에 의존하고 있다니 부끄럽지만해설서가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원서를 읽기 전 기본 개념을 머릿속에 정립한다면 원서를 이해하기 훨씬 수월해질 테니까해설서 읽기가 원서 읽기로 이어지지 않을 때가 많은 게 문제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의 철학자 피터 싱어 Peter Singer, 1946-에 대해서도 그의 원 저서가 아니라 해설서인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피터 싱어는 실천 윤리즉 규범으로서의 윤리를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사안에 적용시키는 윤리학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고동물의 권리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킨 사람이다.실천윤리학 Practical Ethics은 싱어의 윤리 사상 전반을 담은 핵심적인 저술이고이 책은실천윤리학의 한국어판 번역자인 김성동 교수가실천윤리학을 요약하고 해설한 책이다.


  피터 싱어는 윤리를 정당화하는 것이 개인의 이익이 아닌 모든 사람의 이익사회적 이익이라고 이야기한다그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윤리는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 행위의 목적이나 선악 판단의 기준을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증진하는 데 두는 사상)그는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을 주장했다그런데 싱어는 이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을 적용하는 대상에 사람들뿐 아니라 동물들까지 포함시킨다동물들 또한 인간들처럼 자신을 한 존재로 인식하는 인격을 가지고고통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피터 싱어가 동물을 인간이 이용하는 도구가 아닌인간처럼 동등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주장한 것은 혁신적인 일이다그러나 인격을 갖춘 인간처럼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로 동물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데영아나 지적 장애인치매 노인처럼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람들 또한 동물과 다를 바 없으니인간의 생체 실험에는 분노하면서 동물 실험에는 분노하지 않는 것은 종 차별주의라는 그의 주장은 많은 비판을 불러왔다게다가 유전병이 두려워 유전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50퍼센트인 태아를 임신중절 하는 것보다는유전병에 걸린 것이 확실한 영아를 살해하는 것이 더 확실하며 영아와 태아 모두 의식과 인격을 가진 존재라고 하기 어려우니 영아 살해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그의 논의 또한 격렬한 논란을 일으켰다철저히 결과를 중시하고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싱어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나 또한 읽으면서 싱어에게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러나 피터 싱어는 자신의 실천 윤리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또한 다양한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충분히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은 윤리적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그는 우리가 왜 윤리적으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는 대신그 질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답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또한 단순히 우리는 착하게윤리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신어떤 사안에 대해서 어떤 것을 고려하는 것이 윤리적인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싱어에게 윤리는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이러한 점에서 피터 싱어가 말하는 논의는 완벽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생각할 실마리를 남긴다.

 

  철학자이자실천윤리학의 한국어판 번역자답게 김성동 교수는 윤리 교과서처럼 명쾌하게 싱어의 논리들을 해설한다각 장 뒤에 있는 주요 내용 정리가 싱어의 논지와 기본 개념을 머릿속에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싱어의 주장을 해설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김성동 교수 나름대로 싱어의 주장을 비판하기도 하고우리의 현실에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기도 한다.


  200여 페이지의 책이지만 책 판형이 작아 몇 시간 만에도 읽을 수 있다많지 않은 내용이지만 주제 하나 하나가 오래도록 고민해야 할 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김성동 교수가 명쾌하게 해설해 주었지만 김성동 교수의 해설이라는 틀 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나 스스로 원서를 읽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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