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집 - 화가가 머물고 그림이 태어난 집을 찾아서
제라르 조르주 르메르 지음, 장 클로드 아미엘 사진, 이충민 옮김 / 아트북스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에게 집은 우리 자신의 작은 세상이다. 사는 게 바빠서 자기의 취향이나 가치관에 맞게 집을 가꾸어 나갈 여유가 없다 해도, 집은 우리 삶의 흔적들로 인해 우리가 살기 이전과는 다른 공간이 되었다. 누군가의 집에 갔을 때 우리는 바깥 세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 사람이 만들어 온 내밀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각 예술을 업으로 삼고 자기만의 세계를 확고히 세우는 화가의 집에서는 그 화가의 삶뿐만 아니라 예술 세계까지 들여다 볼 수 있다.『화가의 집』은 프랑스의 미술사학자와 사진작가가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19세기와 20세기 미술사를 빛낸 화가 열네 명의 삶과 예술 세계를 들여다 본 책이다.


프란티섹 빌렉의 집 내부. 빌렉은 이 집을 '지상에 옮겨 놓은 신의 사원'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의 의도대로 나무와 돌, 흰 벽으로 이루어진 집은 수도원처럼 절제되고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사진 출처: http://en.ghmp.cz/

제임스 엔소르의 고향 집 거실. 벽 하나를 가득 메운 그의 작품 <1889년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과 거실 곳곳에 놓인 온갖 골동품과 꼭두각시 인형이 기괴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방문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사진 출처: http://priscillasadventuresineurope.blogspot.com/


  화가에게 집은 번잡한 바깥 세상을 피해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작은 세상이다. 때로는 그 작은 세상을 자신의 작품들을 보관하는 작은 미술관으로 쓰기도 한다. 화가의 집은 단순히 예술 작품을 만들고 보관하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화가의 캔버스가 되어 또 다른 예술 작품으로 남는다. 열네 명의 작가들의 작품 세계가 서로 다르듯 집도 각각의 개성이 뚜렷하다. 같은 체코의 예술가인데도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1939의 집이 그의 작품들처럼 화려하고 유려한 장식과 골동품들로 가득 찬 반면, 프란티섹 빌렉Frantisek Bilek, 1872-1941의 집은 조각 작품들만 치운다면 목사관이나 수도원처럼 보일 정도로 경건하고 절제된 분위기의 공간이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집이 그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온갖 꽃들로 방문객을 환영한다면, 벨기에의 화가 제임스 엔소르James Ensor, 1860-1949의 집은 기괴한 작품과 골동품으로 방문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지베르니의 정원 풍경. 모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연못과 그 위에 놓인 일본식 무지개 다리가 보인다.

사진 출처: https://sonurai.com/bingwallpapers/856

지베르니 집의 식당. 천장과 벽, 식탁, 청화백자 타일까지 푸른색 톤으로 맞추어져 있어 정갈하고 청결한 느낌을 준다. 모네는 미식가로서 부엌을 맛과 향의 실험실로 여겼다고 한다.

사진 출처: http://fondation-monet.com/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은 모네의 지베르니 저택이다. 두 개의 강으로 둘러싸인 지베르니의 아름다운 풍경은 물을 좋아했던 모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모네는 지베르니에 집을 지을 때 특히 정원에 정성을 쏟았다. 그는 회화의 구도에 따라 정원을 배치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품종의 꽃을 심었고, 지금도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어 다채로운 풍경들을 만들어낸다. 말년에 거동이 불편해져 외출하기 힘들어진 모네가 정원의 모습만으로도 수백 점의 작품을 그려낼 수 있었을 정도다. 저택 내부의 방들도 각각의 색에 맞추어 간결하고 소박하게 장식되어 있어, 생활하고 창작하기에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화가의 작품들이나 온갖 수집품으로 가득 차 상상력과 영감을 자극하는 집도 좋지만, 실제로 살아가고 활동하기에는 오래 머물기 편안한 집이 좋다. 


 화가와 그의 집에 대한 기록을 풍부하게 인용하면서 화가의 집과 예술 세계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글과, 현장감이 넘치면서 집안 곳곳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사진 덕분에 화가의 작은 세상에 잠시 머물렀다 온 기분이 든다. 벽에 걸린 그림 한 점, 장식품 하나에서도 화가의 흔적과 마음이 느껴진다. 원래 알고 있던 화가보다 모르던 화가들이 더 많지만, 알고 있던 화가의 더 깊은 내면을 알게 되었고 모르던 화가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책에 나온 집들에 직접 가서 그 집에서 살면서 창작을 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느껴보고 싶다. 


 아쉽게도 인터넷 서점의 판매지수를 보니 이 책은 그렇게 많이 팔리지도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절판되어 중고도서로 사거나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밖에 없다. 홍보가 잘 되지 않았던 걸까,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 이야기가 많아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은 걸까. 글과 그림, 디자인, 구성부터 공을 많이 들인 아름다운 책인데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지금은 소장할 수도 없다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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