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의 비밀 - 아시아 베스트 컬렉션 아시아 문학선 15
바오 닌 외 지음, 구수정 외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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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물결이 품은 수많은 이야기들. 우리와 달라서 흥미로운 데도 있고, 우리와 다르지 않아서 공감하게 되는 데도 있다. 이야기의 재미로는 <곡쟁이>와 <돼지기름 한 동이>가 베스트. 표제작 <물결의 비밀>은 단 4페이지만으로도 몇 배의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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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뒷골목을 읊다 - 당시唐詩에서 건져낸 고대 중국의 풍속과 물정
마오샤오원 지음, 김준연.하주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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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와 전쟁, 법으로는 볼 수 없는 역사들이 있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역사, 조정과 왕실의 역사인 정사正史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꿈을 꾸었고 어떤 일에 기뻐했고 슬퍼했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중국사 중에서도 가장 역동적이고 다채로웠던 시대였던 당나라는 정사만으로 그 다양한 면모를 다 알 수 없다. 그래서 중국의 작가 마오샤오원毛曉雯은 당나라의 시로 눈을 돌렸다. 시는 공식적인 역사서와 달리 국가나 군주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아도 된다. 역사서처럼 나라의 정책이나 큰 자연재해를 기록할 수도 있지만, 가족들의 일상과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 한가로울 때 마시는 차 한 모금 같은 각자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기록할 수 있다. 이 사적인 이야기들이 모여 생동감 넘치는 한 시대의 실상이 된다. 저자는 당나라 사람들이 쓴 시 5만 여 편을 모은 시집 『전당시全唐詩』에 담긴 당나라 사람들의 일상을 문인들의 자기 홍보, 결혼 풍습, 꽃에 대한 사랑, 경쟁심 등 아홉 가지 주제로 정리했다. 그 책이『당나라 뒷골목을 읊다』이다. 


  당나라 사람들에게 시는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일상 속에서 시가 워낙 다양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당나라 과거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은 진사과進士科였는데, 진사과 시험은 시를 짓는 것이었다.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직무시험인데도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을 제안하라고 하는 대신 시를 지으라고 한다.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들은 1년에 한 번 치러지는 진사과 시험만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시 중 가장 훌륭한 작품들을 골라 고관대작들에게 보여주었다. 진사과 시험에서 답안은 이름을 적어 제출했기 때문에, 시험을 보기 전에 이미 시로 명성을 얻은 응시자에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자기 뜻을 펼치고자 하는 당나라의 선비들에게 시는 자소서이자 포트폴리오였던 셈이다. 이런 실용적인 용도 말고도 시는 일종의 일기장 역할을 했다. 당나라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어떤 곳에 가서 어떤 것을 즐겼는지 사소한 일상까지도 시로 기록했다. 혼인식 날 신부를 빨리 나오라고 재촉할 때도 시를 읊었고, 연애 상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거나 이별을 고할 때도 시를 읊었다. 당나라 사람들에게 시는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있어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작자 미상, <유기도遊騎圖>, 당나라. 당나라 사람들은 마구(馬球, 말을 타고 공을 막대기로 치면서 하는 스포츠), 줄다리기, 씨름, 투계 등 격렬한 경기를 즐겼다. 이 그림에도 마구를 하는 당나라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북을 두드리니 어룡희(戱, 광대들이 탈을 쓰고 물고기가 용으로 변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광대놀음)가 어지럽고, 종을 치니 씨름이 펼쳐진다."는 구절은 경기장의 열기를 전해준다. 


  저자는 시에 담긴 당나라 사람들의 호쾌하고 개방적인 성품을 사랑한다. 지체 높은 권력자에게 뵙기를 청하는 간알干謁도 당나라 사람들에게는 아부가 아니라 당당한 자기 홍보였다. 아직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선비는 조정에서 정책을 논하지 못하는 대신, 권력자에게 국가 정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또한 당나라는 유난히 승부욕이 강한 시대였다. 당나라 사람들은 서민들부터 왕족들까지 계층을 가리지 않고 두 편으로 나누어 시합하는 것을 좋아했다. 차 끓이기, 향 피우기 같은 소소한 취미에서조차 적극적으로 경쟁을 벌였다. 상대방에게 지지 않으려는 승부욕이 당나라 사람들의 역량을 끌어올렸다.


장훤, <괵국부인유춘도>, 당나라. 맨 오른쪽에서 관복을 입고 말을 탄 사람은 남성이 아니라 남장을 한 여성이다. "새로운 화장 하며 정교하게 두 눈썹을 그리고, 상주의 비치는 이마 가리개로 되는 대로 싸맸네. 바로 마주한 채 반들반들한 홀(옛날 관리가 황제를 알현할 때 손에 들었던 막대)을 몰래 문지르고, 천천히 걸으며 가볍게 무늬 부서지는 물결을 밟는다." 남자들의 관복을 입고 남장한 여인을 묘사한 이 시에서 여성들의 남장이 당나라 때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나라 여성들 또한 씩씩하고 자기 감정에 솔직했으며 자존심이 강했다. 유교에서 여성의 질투를 죄악으로 규정하는데도 남편이 첩이나 기생을 가까이 하면 질투심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남편에게 버림 받는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이별을 맞았다. 남성이 이혼할 때보다는 제약이 많았지만 여성도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재혼할 수 있었고, 두 번, 세 번까지 결혼한 공주도 있었다. 유교 윤리에서 여성이 남장을 하는 것은 하늘이 정한 법도를 어기는 짓이었지만, 당나라 여성들은 남장을 즐겨했고 칼과 화살로 무장까지 했다. 그렇게 해서 남자들처럼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고 자기 뜻을 펼치지 못하는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달랬을 것이다. 여인들에게 남장하는 자유나마 안겨준 것은 당나라가 다른 시대에 비해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시대였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당나라와 당나라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지만 그들을 마냥 찬양하지만은 않는다. 당나라 여성 중 기생들만이 유일하게 예술을 향유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남성의 유흥을 위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방관으로 부임했다 관기와 사랑에 빠진 관리가 임기를 마쳤을 때 자신이 사랑하는 관기까지 후임 관리에게 인수인계한 일, 총애하는 기생이 자신을 정식 아내로 받아달라고 부탁하자 "진흙 속의 연꽃(기생을 비유한 말)이 더럽혀지지 않았더라도, 집의 동산으로 옮겨오면 (더러운 것이) 없지 않으리."라는 시로 응수하며 거절한 일 등을 예로 들면서, 기생의 미모와 재주를 찬양하는 당나라 시가 아무리 많았어도 기생은 남성들에게 물건이나 애완동물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사랑하는 대상의 단점을 직시하고 비판하기 쉽지 않은 일인데도 저자는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시와 연관된 옛 중국 그림들이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면서 책에 정취를 더해준다. 모두 당나라 시대의 그림은 아니고, 후대의 그림이 더 많지만, 당나라 때 쓰인 시나 당나라 때의 고사, 전통을 담고 있는 그림이라 본문에 나온 시들과 무관하지 않다. 당나라 시대의 그림들은 양이 아주 많지는 않지만, 천 년하고도 수백 년 전의 그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색채와 필치로 당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당나라 뒷골목을 읊다』의 원서 표지(위)와 한국어판 표지(아래). 노란색으로 뒤덮이고 딱딱한 글씨체를 박아넣은 원서 표지와 달리 한국어판 표지는 파스텔톤 색채들과 단아한 글씨체로 시적인 분위기를 살렸다. 


 원서 자체도 훌륭하지만 한국어판은 출판사에서 공을 들여 만든 것이 보인다. 표지 전체를 샛노란 색으로 덮고 직각에 가까운 딱딱한 글씨체로 제목을 넣은 원서 표지와 달리, 파스텔톤 색채들과 단아한 글씨체를 넣은 한국어판 표지는 시적인 분위기를 더욱 살렸다. 소단원 표지에는 청나라 화가 추일계의 그림 <도화도桃花圖>에서 따온 복숭아꽃 문양을 넣어 화사함을 더해준다. 시각적인 요소들뿐만 아니라 본문 내용에도 공을 들였다. 요즘은 주석을 본문 뒤에 넣는 미주로 처리하는 것이 대세다. 본문 자체만 페이지 위에 깔끔하게 놓기 위해서다. 이 책에서 보충 설명은 본문 페이지 아래의 각주로 넣고, 해당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 시의 제목과 저작, 출처, 한문 원문은 본문 뒤의 미주로 넣었다. 보충 설명만 읽으면 충분한 독자들은 번거롭게 본문과 미주 페이지를 왔다갔다 할 필요가 없고,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은 독자는 미주를 보면 된다. 독자들을 배려한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시의 출처와 제목, 저자는 원서에는 없는데, 중문학 연구자인 두 번역자가『전당시全唐詩』를 샅샅이 뒤져 300여 개에 이르는 구절의 출처와 저자, 제목을 모두 찾아내 주석으로 달았다고 한다. 원서 자체도 훌륭한데 한국어판에 들어간 공도 많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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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아내 만들기 - 피그말리온 신화부터 계몽주의 교육에 이르는 여성 혐오의 연대기 걸작 논픽션 13
웬디 무어 지음, 이진옥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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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해당 책, 희곡 <피그말리온>,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스포일러 포함


  고대 그리스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가 있었다. 그는 현실의 여인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실물 크기의 여인상을 만들었다. 그 여인상이 얼마나 완벽했는지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조각상을 사랑하게 되었고,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자신의 조각상과 같은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빌었다. 아프로디테 여신은 그의 기도에 응답해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고, 피그말리온은 사람이 된 조각상을 아내로 맞았다. 18세기 말 영국에도 피그말리온처럼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아내를 만들려고 한 남자가 있었다. 문제는 그가 조각상이 아닌 사람을 자신의 이상에 맞는 완벽한 아내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사람은 조각상처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도 말이다.


(왼쪽) 완벽한 아내를 만들기 위한 실험을 했던 토머스 데이. (오른쪽) 토머스 데이의 실험 대상이 되었던 소녀 사브리나 시드니. 만년에 그려진 초상화다.


  토머스 데이 Thomas Day 는 18세기 영국의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그가 친구 존 빅널과 함께 쓴 시 <죽어가는 검둥이 The Dying Negro>는 흑인 노예의 고통을 생생하게 그려, 많은 사람들이 노예제의 부당함에 공감하게 했다. 그는 노예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선거권을 위해서도 싸웠고,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려고 했으며 아이들을 위한 동화도 썼다. 그러나 그가 보호하고 권익을 찾아주려고 애쓰는 대상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믿고 의지하던 어머니의 재혼에 충격을 받고 연애에 몇 번이나 실패하면서 데이는 여성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여성을 의심하고 혐오하게 되었다. 


  데이는 자신이 아직 제대로 된 여성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연애에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또 다른 사랑을 찾아나섰을 텐데, 그는 제대로 된 여성이 세상에 없다면 만들어내면 되지 않겠느냐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그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여성, 자신의 이상에 맞는 여성은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며 거친 시골 생활을 견딜 만큼 건강하고, 자신과 말이 통할 정도의 지성을 갖추면서 자신의 희망사항에 따라 완벽하게 순종하는 여성이었다. 여성도 남성과 같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면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당시의 남성으로서 진보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데이는 여성이 자신과 동등한 존재가 아닌, 자신의 완벽한 부속품이 되어주기를 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미 교육 받고 가치관이 정립된 성인 여성이 아닌 어린 소녀를 데려와 자신에게 맞는 아내로 키우겠다고 결심했다. 


  어떤 부모도 자기 딸이 미래의 남편의 손에 넘어가 그의 뜻대로 양육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데이 자신도 자신이 하는 일이 떳떳하지 않음을 알았던지, 아무 연고도 없는 고아 소녀를 고아원에서 데려왔다. '미래의 내 아내로 키우기 위해 데려갑니다.'라고 말하면 고아원에서도 당연히 아이를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데이는 소녀를 하녀로 데려간다고 거짓말했고, 고아원은 아무 의심 하지 않고 흔쾌히 소녀를 내어주었다. 그는 예비용으로 소녀 한 명을 더 데려왔다. 둘 중 자신의 마음에 드는 소녀를 아내로 맞을 생각이었다. 나중에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 데이는 소녀들의 이름까지 바꾸었다. 앤 킹스턴에게는 사브리나 시드니라는 이름이, 도카스 카에게는 루크레티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데이는 소녀들에게조차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지 않고, 아무런 설명 없이 두 소녀에게 교육 실험을 했다. 자신과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지성을 갖추게 하기 위해 소녀들에게 지리학과 물리학, 천문학을 가르쳤고, 사치스러운 풍조에 물들지 않도록 외출할 때도 화장을 하지 않고 검소한 옷을 입게 했다. 사교계가 겉치레만 하고 헛되다고 경멸했기 때문에 사교를 위해 악기 연주나 춤을 배우지도 못하게 했다. 집안일은 하인들이 아닌 아내가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집안일을 두 소녀에게 모두 맡겼다. 좀 더 발랄하고 활발한 루크레티아를 내친 뒤 사브리나에게 실험을 집중하게 되면서, 실험은 상식의 수준을 벗어나게 되었다. 데이는 고통을 초연하게 견뎌내야 한다면서 사브리나를 연못 깊은 곳에 던졌고, 사브리나의 피부 위에 끓는 밀랍 덩어리를 부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고아원에서 꺼내주고 먹여주고 입혀주는 데이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했던 사브리나도,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하고 고통당하게 되자 데이에게 반항했다. 


 놀랍게도 데이의 친구들과 지인들은 데이에게 완벽한 아내를 만들겠다는 계획 이야기를 들었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관하거나 심지어는 협조했다. 어떤 친구는 고아 소녀를 데려오는 데 자신의 명의를 빌려주었고, 어떤 친구는 데이와 함께 직접 고아 소녀를 골랐다. 데이의 계획이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지인까지 있었다. 데이의 실험이 점점 더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고 실험을 중지하라고 당부한 지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조차 실험으로 고통 받는 소녀보다는 실험을 하면서 광기에 사로잡혀가고 실험이 발각되었을 때 비난을 받을 데이를 더 걱정했다. 


  지인들에게 그렇게 무모한 실험을 하느니 다시 연애를 하라는 충고를 받고, 소녀들이 자신의 뜻대로 따라와 주지 않는 것에 절망한 데이는 소녀들을 내버려두고 연애를 몇 번 더 했다. 그러나 한 연인은 아내가 완벽히 자신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데이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부의 행복은 두 사람의 평등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며 데이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 뒤에 사귄 연인에게는 푹 빠져 있었는지, 웬일로 자신을 바꿔볼 생각을 했다. 아내에게는 온갖 조건을 요구하면서 지저분하고 매너도 없는 자신의 모습은 고칠 생각도 안 하던 위인이 말이다. 연인의 마음에 드는 멀끔한 신사가 되기 위해 1년 동안 수업까지 받았지만, 오히려 더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그 모습에 경악한 연인에게 차인 뒤, 데이는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사브리나에게 눈을 돌렸다. 자신의 아내 후보에서 밀어낸 뒤 시골의 기숙학교에 보내놓고 몇 년 동안 신경도 쓰지 않다, 연인에게 차이고 나서야 사브리나를 다시 아내 후보로 생각한 것이다. 사브리나는 자신의 후원자라고만 생각했던 데이가 자신을 아내 후보로 여기고 있다는 것에 경악했고, 당연히 데이의 청혼을 거절했다. 데이도 사브리나의 반항적인 모습을 보고 사브리나를 아내로 맞으려는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데이의 혹독한 실험을 겪었지만 사브리나는 사람이었고,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처럼 호락호락하게 조물주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인간이 평생 결혼하지 않기를 바랐건만, 안타깝게도 데이는 결국 결혼을 했다. 데이의 높은 이상에 반한 에스터 밀네스라는 여성이 데이가 연애에 실패하고, 사브리나에게 한 청혼도 실패하는 과정까지 모두 지켜보면서 끝까지 그를 기다렸다. 연애도 아내 만들기 실험도 실패한 데이는 자신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에스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터는 데이 못지않은 지성에 데이보다 훨씬 훌륭한 인품을 지녔는데도, 데이의 뜻대로 제일 가까운 이웃과도 십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외딴 시골집에서 남편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했다. 인내심 강한 에스터조차 데이의 독재를 견뎌내지 못하고 종종 데이와 부부싸움을하고 가출했지만, 매번 자신이 다 잘못한 거라고 사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데이가 41세의 젊은 나이에 낙마 사고로 사망했을 때 (나는 속이 시원했지만) 에스터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에 데이를 따르듯 세상을 떠났다.


 에스터는 데이의 죽음(또는 자신의 죽음)으로 데이가 씌워놓은 굴레에서 해방되었지만, 사브리나는 데이의 아내 후보에서 탈락된 이후로도, 심지어 데이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도 고통 받았다. 데이는 사브리나의 삶에 계속 간섭해, 성실한 젊은 약사가 사브리나에게 청혼했을 때도 사브리나 대신 그에게 거절하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면서 정작 사브리나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브리나는 그 약사 대신 데이의 친구인 빅널과 결혼했지만, 빅널은 무절제하고 방탕하게 살다 빚과 두 아들만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사브리나는 주변 지인들의 호의 덕분에 어느 사립학교의 관리인이 되었고, 수십 년 동안 성실히 일하면서 학생들과 아들들 모두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그러나 데이의 친구들이 회고록을 출간하고, 그 회고록들에 사브리나의 이야기가 실리면서 사브리나는 만년에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물론 이런 비인간적인 실험을 한 데이도 큰 비난을 받았지만, 사브리나는 아무 잘못도 없이 남 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안줏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사브리나는 끝까지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고 가족들과 학교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완벽한 아내를 만들겠다는 데이의 실화에서 영감을 받은 문학 작품들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아일랜드의 희곡 작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은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로 영화화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피그말리온>의 주인공 일라이저는 자신을 우아한 숙녀로 교육시킨 히긴스 교수가 자신을 실험대상으로만 대하는 것에 반발해, 다른 사람과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일라이저가 히긴스 교수와 맺어지는 것으로 결말을 바꾸어, 피조물이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는 당당한 결말에서 한참이나 퇴보했다. 그리고 피그말리온 신화가 낳은 환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많은 인기를 얻었던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는 아버지로 설정된 이용자가 여자아이를 입양해서 한 사람의 성인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기본 설정인데, 경악스럽게도 딸이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와 결혼하는 결말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결말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게임을 진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는 이러한 결말이 이루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완벽한 아내를 창조하겠다는 것은 이루지 못할 목표다. 물론 갈라테이아(후대 사람들이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에 붙인 이름이다.)도 신비의 존재일 따름이다."


  우리는 완벽한 상대방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약자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 데이가 완벽한 아내를 만들겠다는 이유로 사브리나에게 비인간적인 실험을 했는데도, 데이는 부유한 귀족에다 지식인 남성이라는 이유로 친구와 지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비호를 받았다. 데이의 친구들은 사브리나에게 연민을 가졌지만 데이가 사브리나에게 비인간적인 실험을 하고 사브리나의 삶을 통제하는 것을 방관하고 있었다. 사브리나는 고아, 가난한 사람, 여성이라는 삼중의 굴레를 쓰고 있는 약자였기에 보호받지 못했고, 피해자였는데도 온갖 소문에 시달렸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 없이 실험 대상이 되고 고통 당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개척한 사브리나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게임이나 문학 작품 속 캐릭터가 아닌 실제 사람에게 자신의 환상을 투영하고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려는 일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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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창과 쿤팬의 이야기 지만지 고전선집 581
라마 2세 외 지음, 김영애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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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친숙한 영미권과 일본, 중국어권, 그리고 비교적 인지도가 큰 서유럽권을 제외한 지역의 문학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도서관에 갈 때마다 문학 도서 서가 중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제3세계 지역 문학 코너를 유심히 보게 된다.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도 그렇게 발견한 책이었다.『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는 16-17세기경 태국에 실제 살았던 쿤창과 쿤팬, 완텅이라는 세 인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태국의 고전문학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판소리처럼 소리꾼과 소리의 박자를 맞춰주는 반주자가 장편 서사시를 낭송하는 '쎄파' 라는 형식의 작품인데, 태국에서는 우리나라의 <춘향전>만큼이나 잘 알려진 작품이라고 한다.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도 <춘향전>처럼 사랑 이야기이다. 쿤팬과 쿤창이라는 두 남자와 완텅이라는 한 여자의 삼각관계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두근두근 설레거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고 봤다가는 실망할 것이다. 이 이야기의 장르는 멜로가 아니라 막장드라마다. 


 삼각관계를 다룬 이야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두 남주인공 중 누구를 응원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갈리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 때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쿤창과 쿤팬 둘 다 인성이 막하막하여서 응원할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쿤팬은 잘생긴 외모 덕분에 여주인공과 서로 사랑을 나누는 메인남주이다. 하지만 여주인공 완텅이 잠든 사이에 완텅의 몸종과 성관계를 가지고 이후에도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한다. 여기까지는 일부다처제여서 그렇다 치자. 자신이 전쟁에 나간 사이 쿤창의 속임수로 완텅이 쿤창에게 시집가게 된 것을 알았을 때, 완텅에게 "이년아, 넌 죽어라, 살아 있지 마라, 이 칼을 뽑아 네 머리통을 내리쳐 죽이겠다."고 폭언을 하면서 칼을 빼어들고 죽이려고 한다. 완텅이 쿤창의 속임수로 어쩔 수 없이 시집을 가게 된 거라고 하소연을 했는데도. 아내를 빼앗긴 분노 때문이라고 해도 완텅 또한 쿤창에게 속은 피해자다. 무엇보다 쿤팬이 저지른 가장 끔찍한 짓은 수호 정령을 만들기 위해 자기 자식을 죽인 것이다. 태국에는 인간이 부리는 '꾸만텅'이라는 귀신이 있는데, 반드시 출생 직전의 태아로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쿤팬은 꾸만텅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아이를 잘 낳을 만한 여자에게 접근해 아내로 맞는다.(완텅이 아니라 다른 여자다.) 그리고 임신한 지 여러 달이 되자 잠든 아내의 배를 갈라 뱃속의 아이를 꺼내 꾸만텅으로 만든다. 꾸만텅이 된 아이는 성불도 하지 못하고 작품 내내 자기를 죽인 아버지와 이복동생들의 심부름꾼 노릇을 한다. 이 얼마나 끔찍한가. 


  쿤창은 못생긴 외모 때문에 쿤팬과 완텅과 어울려 놀던 어린 시절부터도 완텅에게 "너는 못생겨서 같이 놀기 싫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런 취급을 당하면서도 한결같이 완텅을 좋아한다. 그러나 쿤팬이 전쟁에 나간 사이 쿤팬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막대한 재산으로 완텅의 어머니의 마음을 사 완텅과 결혼하는 비열한 인간이다. 완텅이 낳은 아들 프라와이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 쿤팬의 아들이라는 걸 알았을 때 아이의 간이 터질 정도로 심하게 폭행한다. 그랬으면서도 위기에 처했을 때 프라와이에게 길러준 은혜를 생각해 보라고 뻔뻔하게 말한다. 이후로도 쿤팬과 완텅을 갈라놓기 위해 끊임없이 쿤팬을 모함한다. 그나마 쿤팬과 달리 완텅에게 폭언이나 폭행을 한 적이 없고, 자신 때문에 완텅이 음탕한 여자 취급을 당하고 죽은 것에 대해 후회하고 반성하지만, 독자들이 응원해 줄 만한 주인공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 막장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들에게는 인권이 없다. 완텅은 쿤팬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데도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쿤창과 결혼해 원래 남편인 쿤팬과 헤어져야 했다. 그런데도 국왕은 완텅이 음란한 여자라고 낙인을 찍고 당장 처형하라고 한다. 완텅의 아들 프라와이가 자신과 아버지가 나라에 세운 공을 참작해 용서해 달라고 해 왕의 사면령을 받았지만, 사면령이 도착하기 전 이미 완텅은 처형됐다. 다른 여성 캐릭터들도 결혼하고 나면 남편의 폭력에 시달린다. 한 나라의 공주였던 여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도 여성 캐릭터들의 친정어머니들은 한결같이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을 받들라고 가르친다.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가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정리될 시기에 서양인들과 서구 자본주의가 태국에 막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의 놀이 문화에서도 여성의 전통적인 성 역할을 강조하고 규범화했을 것이라고 한다. 태국 전통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가 단지 남자의 부속물 정도였다는 것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다른 전통설화와 달리 캐릭터나 서사가 단순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 많은 설화 속에서 주인공은 선하고 잘생기고 능력이 뛰어나고, 악역은 악하고 못생기고 능력도 주인공보다 부족하다. 그런데 쿤창과 쿤팬은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모두 갖고 있어 누가 주인공이고 악역이라고 구분할 수 없다. 서사도 전래동화처럼 단순하지 않고 때때로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긴장감과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에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는 태국의 백성들에게 흥미진진한 드라마였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태국의 풍습들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근대 이전 아이들은 학문을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절에 들어가 스님들에게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다. 승려가 출가할 때, 집들이할 때, 먼 길을 떠나거나 먼 길에서 돌아왔을 때 등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집안의 어른이나 초청해 온 승려가 복과 장수, 평안을 기원하는 '탐콴 의식'을 올린다. 거미가 가슴을 치며 우는 것은 태국에서 흉조로 여겨진다. 태국은 인도와 힌두교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아,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가 태국에서는 <라마끼엔>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태국에서는 <라마야나>의 주인공 라마를 프라람, 라마의 아내 시타를 씨다, 시타를 납치해 간 악당 라바나를 톳싸깐이라고 부르고, 이 작품 속 인물들도 스스로를 <라마끼엔> 속 등장인물들에 비유하기도 한다. 같은 아시아에 있는 나라인데도 정말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아쉽게도 이 책은 줄거리 요약에 원문 일부를 발췌했다. 이 책은 주인공들 위주로 요약한 것이고 원문은 아주 방대하다던데, 언젠가는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가 완역되었으면 좋겠다. 완역된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에서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태국의 전통 문화, 풍습을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2002년 태국 영화 <쿤팬-전쟁영웅의 전설>의 포스터.


P. S.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는 2002년 <쿤팬-전쟁영웅의 전설>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태국에서 유명하고 인기 많은 고전문학이니 이 영화 말고도 드라마나 영화로 여러 번 만들어졌을 것 같은데, 영어로 검색해서 나오는 건 이 영화 하나니 더 자세히 알 수 없다. 줄거리 소개를 보니 쿤팬의 영웅담과 완텅과의 사랑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영화 같다. 쿤팬은 정의롭고 로맨틱한 남주인공으로 나오고 쿤창은 쿤팬을 위기에 빠뜨리는 악역으로 나오는 듯 싶다. 원전을 읽어보면 어느 한 쪽이 더 착하고 더 나쁘다고 말하기도 힘든데. 더러운 외모지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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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9-14 0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콕에 여행와 미술관에 들렀다가 이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어요. 궁금해서 책이 있나 검색하다 리뷰 재미있게 읽고갑니다. 전문을 다 읽어보고 싶어요.

바스티안 2019-09-14 16:33   좋아요 0 | URL
방콕 여행을 갔다 오셨다니 좋으셨겠네요. 아직까지 이 책의 완역판이 없는 게 안타까워요. 번역자 분이랑 출판사에서 더 힘내서 완역판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래주의 요리책
필리포 톰마소 마리네티.필리아 지음, 이용재 옮김 / 마티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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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주의 Futurismo, Futurism 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현대 예술 운동으로, 예술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기존의 가치와 문화를 혁신하려고 했던 운동이었다. 미래주의자들은 과거의 것과 전통을 현대화의 걸림돌로 여겼고, 현대화된 도시와 기계 문명의 속도감과 역동성을 찬양하며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려 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산업화가 늦었던 이탈리아에서, 미래주의자들은 삶과 예술 모두를 현대화시키고 싶어했다. 삶과 예술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현대화되는 것이 미래주의자들이 꿈꾸는 혁명이자 미래였다. 미래주의자들이 혁신시키려고 하는 대상에는 미술, 음악 같은 예술뿐만 아니라 요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래파의 창시자이자 수장인 마리네티 Filippo Tommaso Marinetti, 1876-1944 는 동료 미래주의자인 화가 필리아(Fillia, 1904-1936, 본명은 루이지 콜롬보)와 함께 1930년 <미래주의 선언>을 발표하고, 2년 뒤에는 미래주의가 창안한 음식 레시피와 새로운 식사법을 소개하는 책 『미래주의 요리책』을 펴냈다. 


 서문에서 마리네티는 미래주의 요리 혁명을 통해 이탈리아 민족의 식습관을 바꾸고, 실험과 상상력이 가득한 새로운 음식과 인간다운 식사법을 제안하겠다고 패기 넘치게 선언한다. 그런데 그 제안이 황당하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인 파스타를 추방하자는 것이다. 그가 파스타를 추방하려는 이유는 이렇다. "입에 맞을지는 몰라도 파스타는 구시대 음식입니다. 비만을 초래하고 짐승처럼 먹게 합니다. 영양이 많다고 착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회의적이며 굼뜨고 비관적이게 만듭니다." 파스타를 이탈리아인의 식탁에서 영원히 추방하자는 제안에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다. 마리네티가 파스타를 게걸스럽게 먹는 사진이 찍혔지만 마리네티 본인은 자신을 모함하기 위해 만들어진 합성사진이라고 일축했다. 


 미래주의자들이 꿈꿨던 식생활은 비만을 불러일으키는 음식을 몰아내고 신체에 필요한 열량을 빨리 공급하며, 음식의 맛과 색, 형태, 촉감, 음식을 먹을 때의 주변 환경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들은 현대 기술을 적극 활용해 오감을 동시에 자극하며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요리들을 개발해, 사람들에게 미래적인 감성을 일깨우려고 했다. 그런데 이 요리들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항공음식', '탄성케이크', '이혼한 계란', '입체파 채소밭', '당근+바지=교수', '직관적인 전채', '깜짝 바나나' 등등. '최강정력'이라는 요리 이름에서는 풋 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뒤로 이름만큼이나 정신 나간 레시피들이 이어진다. 강철의 맛을 느끼기 위해 강철 볼베어링을 닭고기 안에 넣고 오븐에 10분 구워 볼베어링의 맛이 닭고기에 배게 한다. 공감각적 맛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향수에 재료를 재워두는 레시피들도 여럿 있다. 심지어 다양한 향수를 풍선에 채우고, 풍선 입구 가까이에 불붙인 담배를 가져다대고 빠져나오는 향을 들이마시는 것도 요리라고 한다. 그럭저럭 먹을 만해 보이는 레시피조차 재료의 양은 대략적으로만 적혀 있고, 아예 적혀 있지 않을 때도 있다. 조리 시간은 아예 적혀 있지 않다. 그런데 재료의 양과 조리 시간이 적혀 있지 않아서 오히려 요리사의 창의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한다. 


  식사법도 레시피만큼이나 독특하다. '항공음식'은 검은 올리브와 회향 구근, 금귤을 아무 조리 없이 그냥 먹는 간단한 요리이지만, 먹을 때 왼손으로 사포, 비단, 우단을 엮어 만든 천을 만지고 종업원이 식사를 하는 손님의 목 뒤에 카네이션 향수를 뿌리고 비행기 모터 소리와 바흐의 음악을 틀어 공감각적인 식사로 만든다. '미래주의 항공시 저녁 식사'는 고도 3000미터 높이에 오른 비행기 조종칸에서 아래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면서 하는 식사다. '지리학 저녁식사'에서 종업원이 몸에 두른 아프리카 지도 중 한 군데를 손님이 가리키면 손님이 가리킨 지역과 관련된 요리를 내어온다. 


  이 모든 정신 나간 소리를 아주 진지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들의 요리가 식생활의 혁명이라고 240페이지 내내 자화자찬하고 있는데, 역시 맨 정신으로 프로파간다를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신들의 요리 혁명에 전 유럽의 주요 언론들이 주목했다는데, 과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관심을 가져주었을지 모르겠다. 기계 문명을 느끼기 위해서 쇳덩어리를 음식에 넣고, 빵을 비행기 모양으로 만들어낸다는 것도 1차원적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외국인과 연애하거나 외국 음악을 즐기고 외국 제품을 쓰면 해외병 환자로 매도하는 국수주의에, "감성적인 여성 화장실에 있는 암컷 침팬지처럼", "뱃사람 애인만큼이나 뚱뚱한 양파" 등 여성을 대상화하고 비하하는 표현, 흑인을 항상 "검둥이"로 지칭하고 식사 분위기를 돋우는 도구로 취급하는 인종 차별까지 미래주의자들의 편견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솔직히 말하면 본문보다 본문을 패러디하면서 미래주의자들을 풍자하고 놀리는 번역자 후기가 더 재미있다. 번역자는 마리네티에게 현대의 레스토랑들을 보여주면서 파스타가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준다.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 사람들도 파스타를 즐겨먹고 있다. 탄수화물과 면이여, 영원하라. 파스타의 당당한 기세에 기가 죽은 마리네티는, 미래주의 요리는 현대적인 요리라기보다는 충격을 주고 주의를 끌기 위한 일종의 장난이었다는 냉정한 분석에 더욱 더 의기소침해진다. 그러나 아이팟으로 재생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해산물 요리를 먹게 하고, 꽃 향기가 나는 캘빈 클라인의 향수 '이터너티'와 어울리도록 오렌지꽃 젤리, 바질, 바닐라 크림을 곁들인 귤 그라니타(granita, 과일과 설탕, 와인을 혼합한 뒤 얼려서 만든 디저트)를 만드는 등 공감각적 맛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21세기 요리사들의 모습을 보면 흡족해할 것이다. "마리네티를 비롯한 미래주의 일당에게 미친 구석이 있는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렇게 미친 자들 기운데 일부가 결국은 선구자가 되는 게 아닐까." 번역자의 말처럼 미래주의자들의 장광설에도 미래를 내다보는 선구안이 숨어있기는 하다. 미래주의자들의 방식 그대로 미래주의자들을 풍자하면서도 미래주의자들의 주장에서도 가치를 찾아내는 멋진 번역자 후기다. 이 후기가 이 책을 읽는 노고에 대한 보상이 되었다. 


미국의 요리사 맷 바인가르텐이 재현해낸 미래주의 요리 '직관적인 전채'. 오렌지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살라미 소시지, 버터, 버섯절임, 앤초비와 녹색 파프리카를 채운 뒤 

미래주의 격언을 적은 쪽지를 넣는다. 


P. S. 2009년 미국의 요리사 맷 바인가르텐은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미래주의 요리들을 재현한 정찬을 열었다. 바인가르텐의 말에 따르면 미래주의 요리들의 맛은 훌륭하다고 한다. 그러나 바인가르텐의 미래주의 정찬을 기사로 쓴 기자는 여전히 미래주의 요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했고, 네티즌들도 기사 댓글에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사에 실린 요리 사진만 보면 그럴 듯한 요리 같긴 한데. 


참고 기사: https://dinersjournal.blogs.nytimes.com/2009/02/23/the-future-arrives-on-park-ave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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