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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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을밀대에서 고공농성을 하는 강주룡의 모습과 당시의 보도 기사. 당시 언론들은 강주룡에게 '공중에 머물러 있는 여자'라는 뜻의 '체공녀'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 스포일러 포함

  체공녀 강주룡낯선 수식어에 낯선 이름이다. ‘체공녀滯空女는 공중에 머물러 있는 여자라는 뜻으로, 1931년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인 한 여성 노동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강주룡은 그녀의 이름이다평범한 노동자였으니 고공농성을 했다는 것 외에는 그녀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장편소설의 소재로 삼기에는 공백이 너무 많은 인물인데강주룡을 영웅화하면서 프로파간다로 흘러가는 것은 아닐까우려 반 호기심 반인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작가는 서장에서부터 그런 우려를 씻어낸다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는 비장한 상황에서도 주룡은 배고픔에 지친 나머지 엉뚱한 상상을 한다나 자신을 삼키면 비어 있는 배가 다시 부를 거고뒤집어진 나는 또 배가 빌 거라고그러나 누군가가 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다시 몸을 꼿꼿이 세운다그것이 굶주린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가장 나중 된 저항의 몸짓이었다그녀의 저항은 거창하거나 비장하지 않다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저항을 할 뿐이다

  주룡이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서장을 지나 이야기는 그녀가 스무 살 되던 해 혼례식 날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남편을 만나 혼인하기 전 주룡의 삶은 당시의 다른 농민 여성들의 삶과 다름없었다사상이나 투쟁 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집안일을 돕다 어른들이 시집을 보내면 시집을 가는 삶그러던 그녀가 어떻게 투쟁하는 사람이 되었던 걸까

  작가는 그녀의 투쟁을 사랑에서 시작된 것으로 재해석했다어머니가 통화현(주룡의 가족이 살고 있던 지역)에서 가장 고운 게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토끼 새끼라고 대답했던 주룡은혼인하고 나서는 가장 고운 것이 남편이라고 생각한다그 정도로 주룡은 얼굴 곱고 성정이 순수한 남편에게 빠져 있었다남편이 독립군 활동을 하겠다고 했을 때 주룡은 시댁에서 남편을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남편과 함께 독립군 활동에 뛰어들기로 선택했다. “주룡이 독립을 원하는 것은 제 임자 때문이다당신이 좋아서당신이 독립된 나라에 살기를 바라는 마음.” 여성은 연애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라는 편견에서 나온 재해석이 아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떤 거창한 대의보다도 더 와 닿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투쟁에 뛰어들었지만주룡은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과 편견억압과도 싸워야 했다독립군 동지들은 주룡을 동지라기보다는 부엌일 해 주는 하녀 정도로 취급했고주룡이 기지를 발휘해 활약하고 대장인 백광운 장군에게 신임을 받자 시기했다심지어 백광운 장군과 주룡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까지 퍼뜨렸다사랑하는 남편마저 주룡에게 열등감을 느끼고동지들이 퍼뜨린 소문 때문에 괴로워하다 결국은 주룡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다남편이 독립군 활동을 하다 병으로 죽자시댁에서는 남편 잡은 년이라며 주룡을 살인죄로 고소해 감옥에 갇히게 만든다일주일 만에 감옥에서 풀려나와 친정에 돌아오니친정아버지는 남편을 잃은 딸을 위로하기는커녕 딸이 과부가 되었다고 부끄러워한다게다가 친정 식구들은 땅 몇 마지기 구해보겠다고 늙은 지주에게 주룡을 후처로 보내려고 한다. “망그러진 간나 거둬주는 걸” 고맙게 여기라면서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온갖 억압을 당한 끝에 주룡은 결심한다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평양으로 간 주룡은 그곳에서 고무 공장에 취직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그녀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뒷받침해 준 것은 노동이었다자기 생계를 책임질 수 있게 되면서 주룡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다시 시집갈 마음도 없고, 부양할 가족이 없으니 집이니 땅이니 하는 것도 관심 없다. 그저 제 한 몸 재미나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극장 구경도 하고. 저 커피에도 맛을 들이고. 양장도 맞춰보고. 빼딱구두에 실크 스타킹이니 하는 것도 신어보고. 고무 냄새 나는 보리밥 먹어가며 내가 번 돈, 날 위해 쓰지 않으면 어디에 쓴담.”


그녀가 꿈꾸는 새로운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자기가 번 돈으로 자기 한 몸 부양할 수 있고일을 마친 뒤에는 소소한 행복을 즐기는 삶그런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노동이었기에비인간적인 노동 조건과 작업반장의 폭력도 그런 대로 견뎌보려 했다

  그러나 파업단의 교육을 들으면서 그녀는 알게 되었다월급을 제 때 받고손찌검을 당하지 않고아이를 낳고 집에서 쉬면서도 월급을 받는 게 당연한 권리라는 것을자신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고민하던 주룡은 동료가 파업단에 가입했다 회사로부터는 해고할 것이라는남편으로부터는 이혼할 것이라는 으름장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파업단에 가입했다자신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사람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사람 대접을 받기 위해서

  인생에서의 두 번째 투쟁을 시작했을 때주룡은 또 다시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과 싸워야 했다평양적색노동조합에서 함께 투쟁하자고 권유하러 왔던 동지 정달헌조차 처음에는 주룡이 여성이라는 것에 당황해한다여성 혁명가 콜론타이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자리에서도 정작 여성인 주룡이 말할 때는 미심쩍어 하고엘리트 남성인 달헌이 말해야 신뢰한다그럼에도 주룡은 모든 억압을 뚫고 자기 목소리를 낸다오히려 남성 동지들의 모순을 비판한다여성 혁명가의 글을 공부하면서 왜 아내에게는 사상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는지노동자가 으뜸이고 근본 되는 계급이라고 하면서 엘리트들은 노동자를 계도와 계몽의 대상으로만 보는지주룡은 사상을 배울 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자라는 당사자성을 활용해 세상의 모순과 억압을 간파하고 그것들과 맞서 싸운다

  이 책의 홍보 문구는 삶이란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투쟁하는 것이다첫 번째 투쟁에서 사랑하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면 두 번째 투쟁에서 주룡은 사랑하는 동지들의 손을 잡았다주룡은 어린 직공인 옥이에게 말한다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고삶이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투쟁하는 것이라면혁명은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 주는 것이 아닐까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되고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되고세상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그렇기에 주룡에게 혁명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동지들과 목숨을 걸고 두 번째 파업을 결행했지만 경찰들에게 무참히 진압 당했을 때그녀는 마지막 선택을 했다혼자서 을밀대 지붕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는 것경찰들의 손으로 끌려 내려간 뒤에도 단식 투쟁을 거듭하던 그녀는 건강을 해쳐 이듬해 서른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소설은 주룡의 마지막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동료 직공 삼녀를 통해 주룡의 최후를 알린다비극적인 최후인데도 소설은 지극히 담담한 문장으로 끝난다. “저기 사람이 있다.” 

  저기 그녀가 있었고또 다른 높은 곳에 자기 권리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있었다그들 모두가 사람이었다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사람답게 살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었다이렇게 이 소설은 우리의 현재와 삶을 위해 투쟁했고삶 자체가 투쟁이자 혁명이 된 한 사람의 삶을 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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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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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일러 포함 


  나는 눅눅한 현실을 그리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성애 묘사가 노골적인 소설도 좋아하지 않는다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이하자이툰 파스타)에 실린 단편들은 그 둘 다에 해당한다그런데도 계속해서 읽게 되었다내 입맛에는 안 맞는데하면서도 자꾸자꾸 손이 가서 어느 새 그릇을 싹싹 비워버리게 되는 음식처럼이 단편들의 어떤 점이 취향을 뛰어넘어 나를 사로잡은 걸까.


  우선자이툰 파스타의 단편들은 눅눅한 현실을 그리고 있는데도 유쾌하다눅눅한 현실을 그린 소설을 읽다 보면 나까지 현실의 비참함에 잠식되는 기분이다하지만 작가는 뛰어난 유머감각으로 비참한 현실마저 블랙코미디로 승화시킨다.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서 의 라이벌 다니엘 오’ 감독이 의 유도질문에 걸려 관객들 앞에서 자신의 무식하고 천박한 진면모를 드러낼 때선배 영화인들이 자신의 영화를 홍상수 아류로 폄하하자 주인공들이 술 마시고 섹스만 했다 하면 무조건 홍상수 아류이기까지 한 것이고. ... 사지말단을 자르면 김기덕장식적이고 예쁜 벽지가 붙은 곳에서 살인하면 박찬욱이라고 하겠지.’라고 가 속으로 비꼴 때 깔깔 웃었다.

 

  하지만자이툰 파스타는 그저 유쾌한 데서 그치지 않는다.자이툰 파스타속 인물들은 모두가 성공을 향해 가는 세상에서 낙오되었다는 점에서 내게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그들은 실패하고 망했다그들은 실패가 성공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식상한 조언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안다. “실패는 인간을 성숙하게 한다개소리다실패는 인간을 한껏 구겨지고 쪼그라들게 만든다. ... 실패에 그럴듯한 의미를 붙이는 사람들치고 제대로 된 성공을 해본 사람이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아무것도 아니며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고백한다그들은 남들이 쯧쯧너 완전히 망했구나.”라고 손가락질해도 그래나 망했다!”라고 스스로 당당하게 외친다그런 당당함 덕분에 분명 비참한 상황인데도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오히려 후련하다.

 

  그들은 망했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는다망해도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들 또한 이 세상에 없던 훌륭한 퀴어 영화를 만들어 칸 영화제의 주역이 되는 것’ 같은 높은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현실에 치여 살아가다 보니 꿈은 저만치 멀어져버렸다그들도 자신이 꿈에서 너무 멀어져 버렸다는 것을 알지만여전히 사랑하고 살아간다.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의 와 왕샤가 선배 영화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동네 노래방 주인에게 사기를 당하고 나서도 다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처럼이들은 희망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분명 희망적인 메시지는 아니지만이상하게도 위로가 된다.

 

  노골적인 성애 묘사라는 또 하나의 걸림돌은 어떻게 넘길 수 있었을까사실 이 책 속 첫 단편의 몇 페이지를 훑어봤을 때 노골적인 성애 묘사에 당황했었다그것도 동성 간의 성애 묘사가 대부분이다 보니 더 낯설게 느껴졌다하지만 찬찬히 더 읽어가다 보니,자이툰 파스타속 섹스는 그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인 행동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그리고 성소수자들의 섹스도 이성애자들의 섹스만큼이나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렇게 지극히 일상적인 퀴어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이다.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의 주인공 는 동성애를 훈장처럼 전시하지도대상화해 신파로 소모해 버리지도 않는” 퀴어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었는데,자이툰 파스타속 단편들을 영화화하면 가 만들고 싶었던 퀴어 영화가 될 것이다성소수자들이 가슴 두근거리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하고 서로 싸우기도 하고 권태에 빠지기도 하는지극히 평범한 사랑을 하는 퀴어 영화.

 

  본문 뒤의 해설에서 평론가 윤재민은 이성애적 관점으로 대상화된 퀴어에 대한 의 비판에 경청할 대목도 있지만, ‘가 세상에 없던 퀴어 영화를 만들려는 것은 그저 남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 욕구의 발로였다고 이야기한다하지만 나는 그에게 퀴어 영화가 단지 인정받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선배 영화인들이 그의 퀴어 영화에 퍼부었던 비판들은 퀴어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그대로 드러낸다동성애자들은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뇌해야 한다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뇌 때문에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한다등등그들을 보면서 는 생각한다. ‘성적 소수자가 뭔지나 알기는 하냐알 리가 없지특별히도 불행하고 이상하게 섹스를 하는 애들 같겠지애초에 보통의 존재로 생각한 적조차 없겠지.’ 보통의 존재인데도 보통의 존재로 간주되지도 못하는 것바로 곁에 존재하는 데도 멀리 있는 다른 세계의 존재처럼 여겨지는 것이 그와 같은 성소수자들이 겪는 일상이다그러니 보통의 존재들이 연애하는 퀴어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그의 마음 자체는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정말 인정 욕구의 발로였다 해도그 인정 욕구 중에는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 자체로서 살아가고 싶다는 인정 욕구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매력 중 또 하나는 여성 캐릭터를 현실감 있게 구축한 것이다누군가에게서 남성 작가가 쓴 여성 캐릭터도여성 작가가 쓴 남성 캐릭터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그 말에 100프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소설을 읽을 때 작가가 자신의 성별과 다른 성별인 캐릭터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지켜보게 된다.

 

  이 책의 작가는 남성이다그런데 이 책에 실린 단편 일곱 편 중 세 편(부산국제영화제조의 방,햄릿어떠세요)의 화자가 여성이다작가는 여성 캐릭터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하면서그 캐릭터가 품고 있는 감정과 고민들을 섬세하게 풀어낸다.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의 여주인공이자부산국제영화제의 화자인 캐릭터 박소라그녀의 남자친구가 화자인 단편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에서 외모만 예쁘고 머리는 텅텅 비었으며 중학생보다 유치한 자기 예술에 도취된 인물로 묘사된다그러나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의 복잡한 속내가 드러난다그녀는 부모님 돈으로 편하게 사는 듯하지만 시한부 인생인 어머니를 돌보고 있고, SNS에서의 호응이 헛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SNS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햄릿어떠세요의 주인공 는 연예기획사 연습생이었지만 아이돌로 데뷔하지 못했고, 20대 중반에 서바이벌 오디션에 도전하지만 본선에 진출하기 직전 떨어진다그녀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벌써 포기와 체념이 최선일 수 있다는 것을 배웠지만순수하게 누군가를 사랑했던 시간을 그리워한다박상영 작가의 여성 캐릭터들은 누군가의 고정관념이나 환상 속 존재가 아니라 피와 살로 이루어지고 자기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현실 속 존재로 느껴진다.

 

 실패한 사람들성소수자들여성들작가는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이 자신이 흘려두고 온 시절과 닮아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씹다 버린 껌이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여기는 사람, ... 함부로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그렇게 잘난 척을 하며 살다 보니 나 아닌 누군가에게 한 번도 제대로 가 닿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아 버린 사람.” 작가는 이 책이 좀체 웃을 일이 없는 그들에게 건네는 자신의 수줍은 농담이라고 했다그의 수줍은 농담은 내 마음에 와 닿아 나를 울고 웃게 했다나뿐만 아니라 웃을 일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럴 것이다나는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의 가 제제에게 그랬던 것처럼 작가에게 매일 농담 하나이야기 하나씩 들려달라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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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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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포일러 포함 


 19세기 후반 러시아 오룔 지방에서 끔찍한 사건이 잃어났다. 젊은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귀에 끓는 납을 부어 살해한 것이다. 사람들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사람을 그토록 잔혹하게 죽였다는 것에 놀랐다. 오룔 출신인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는 고향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이 영화 <레이디 맥베스>의 원작인「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이다. 


  레스코프는「러시아의 맥베스 부인」과 이 책에 실린 다른 단편「쌈닭」을 비롯해 고향 오룔 지방의 다양한 여인들을 그려낸 소설을 12편 쓰려고 했지만, 실제로 소설로 쓰여진 것은 이 두 편이다. 두 단편의 주인공 모두 선하고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인물들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마음먹은 일을 한다. 그래서 남들에게 맥베스 부인(셰익스피어의 희곡「맥베스」에서 여주인공 맥베스 부인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남편에게 악행을 더 부추긴다.), 쌈닭(원제는「여전사」)이라고 불리지만, 그녀들은 이렇게 응수할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 뿐이라고.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영화 속 캐서린(플로렌스 퓨, 원작에서는 카테리나)의 모습. 캐서린은 가난 때문에 나이 많은 상인에게 팔리듯 시집 온 후 답답하고 권태로운 삶을 살아간다.


"깨어나면 또 다시 러시아의 권태, 상인 집의 권태가 찾아온다. 그걸 견디느니 차라리 목을 매고 죽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이다."


  영화에는 이 문장이 나오지 않지만, 영화 속 주인공 캐서린(원작에서는 카테리나)의 목소리로 읽히는 듯 하다.(영화에서는 배경이 영국으로 바뀌었으므로 '러시아'를 '영국'으로 바꾸면) 젊은 나이에 나이 많은 홀아비 상인에게 팔리듯 시집을 온 카테리나의 삶은 권태의 연속일 뿐이었다. 시집 온 지 5년이 되었어도 아이가 없다고 시아버지와 남편은 카테리나를 죄인 취급 한다. 친한 친구도 없고, 오락거리도 없다. 영화를 먼저 봐서 그런지 소설을 읽을 때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집 안에서 고집스럽고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던 캐서린(플로렌스 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자신에게 제멋대로 구는 하인 세르게이(영화 속 세바스찬)를 만나면서 그녀의 삶은 바뀐다. 세르게이는 카테리나의 방에까지 찾아와 그녀를 유혹했고, 그녀도 세르게이에게 빠져든다. 그녀는 결혼한 이후 처음으로 욕망에 눈을 뜨고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카테리나의 불륜을 눈치채면서 사건은 비극적으로 흘러가게 된다.


 마침 남편은 장사 때문에 먼 도시에 나가 있는 참이었다. 카테리나는 몰래 시아버지에게 독버섯이 든 수프를 먹여 죽인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늙은 시아버지가 노환으로 죽었을 거라고 여기고 의심하지 않는다. 남편은 돌아와서 카테리나가 불륜을 저지른 것을 알고 있었다며 그녀를 추궁하지만, 그녀는 남편 앞에서 당당하게 세르게이와 키스하고 관계를 가진다.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남편이 카테리나와 세르게이를 폭행하다 오히려 그 둘에게 살해당한다. 이제 유산을 차지하고 세르게이와 잘 살아보려 했는데, 사람들이 남편의 어린 조카(영화에서는 사생아)를 데리고 와 그애에게 상속권이 있다고 한다. 그러자 카테리나와 세르게이는 아직 어린 조카까지 목을 졸라 죽여버린다. 


악행을 저질렀는데도 들키지 않아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집안을 차지하는 캐서린


이 사건 이후부터 원작과 영화는 다른 길을 걸어간다. 영화에서 세바스찬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캐서린과 자신의 죄를 폭로하지만, 캐서린은 모든 일은 세바스찬과 하녀 안나가 저지른 것이라고 누명을 씌우고, 자신은 유유히 집안의 모든 것을 차지한다. 반면 원작에서는 마침 교회에서 축일 행사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던 한 무리 동네 청년들이 카테리나와 세르게이의 불륜 행각을 훔쳐보려다, 둘이 조카를 죽이는 것을 목격한다. 이러니 변명할 여지도 없다. 둘은 그대로 끌려가 감옥에 갇히고,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진다.


 카테리나(또는 캐서린)가 저지른 악행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억압하던 것들을 모두 제거해 버리고 원하는 것을 손에 얻는 영화판 결말을 생각해 보면, 원작의 결말은 답답하게 느껴진다. 자기 뱃속 아이의 아버지가 세바스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망설임 없이 그를 버리는 캐서린과 달리, 카테리나는 끝까지 세르게이를 놓지 못한다. 영화 속 캐서린에게 세바스찬은 낭만적인 연애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성적 욕구를 푸는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카테리나는 세르게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카테리나는 철저하게 파멸한다. 


 악행을 저지를 때는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주도적으로 행동하던 그녀가 사랑 때문에 무너지다니. 세르게이가 카테리나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다른 여자와 애정 행각을 벌이고 카테리나를 모욕하는데도, 그에 대한 사랑을 놓지 못하는 카테리나가 답답했다. 세르게이에 대한 애증 때문에 괴로워하던 그녀는 세르게이의 새 애인을 붙잡고 볼가 강에 함께 뛰어들어, 마지막으로 세르게이에게 복수를 한다. 영화의 결말만큼 통쾌하지는 않지만 이 또한 그녀다운 결말이었다. 왜 세르게이가 아니라 바람 핀 상대를 죽였는지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세르게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유형지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도록 둔 것이 죽이는 것보다 더 큰 복수였다고 생각한다.(세르게이는 또 다른 애인을 만들고 유형지에서도 특유의 잔꾀로 그럭저럭 잘 살아갔을 것 같지만.)


 19세기의 독자들에게는 악녀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잘 사는 결말이 납득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카테리나가 처절하게 파멸하는 결말이라고 해서, 작가가 그녀를 단죄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레스코프는 톨스토이처럼 자기 작품 속 죄인들을 단죄하지 않고, 판단하지도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그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 지는 독자의 몫이다. 


쌈닭


「쌈닭」의 주인공 돔나는 카테리나처럼 극단적인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오지랖 넓은 아주머니다. 어떤 때는 따뜻하고 푸근하지만, 어떤 때는 놀랄 만큼 이기적이다. 망설이지 않고 선의를 베풀지만, 그 선의라는 것도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자기 멋대로의 선의다. 그녀는 아주 선하지도, 아주 악하지도 않은 보통 사람이다. 


 그녀의 선의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것인지는 레카니다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돔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며 귀족 부인들에게 레이스나 다른 옷감을 방문판매하고 있다. 레카니다도 그렇게 알게 된 젊은 귀족 부인이었다. 레카니다는 남편에게 권태를 느끼고 자기 집에 세든 청년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 청년이 레카니다를 속이는 바람에 전 재산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는다. 돔나는 며칠 동안 레카니다를 자기 집에서 묵게 해 준다. 레카니다는 남편에게 돌아갈 여비만 달라고 애원하지만, 돔나는 레카니다가 그 동안 먹고 입고 자는 데 든 비용을 따지며, 고관 대작에게 매춘을 하도록 권한다. 그러면서 진심으로 그것이 레카니다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레카니다는 호강하면서 살 수 있고, 자신은 소개비를 챙길 수 있으니까. 울며 불며 거절하던 레카니다는 결국 고관대작에게 자기 몸을 팔고, 귀족들의 정부, 고급 창녀로 전락하게 된다. 


 돔나가 그저 남편에게 돌아갈 여비만 줬더라도 레카니다는 창녀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렇게 돌아간 레카니다를 남편이 받아줬을지는 모르지만) 그런데도 돔나는 여전히 자신이 레카니다에게 선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원망하는 레카니다를 배은망덕하다고 여긴다. 그녀의 말발이 얼마나 구성진지, 분명 돔나의 잘못인데도 레카니다가 얄미워질 정도다.(물론 자신을 거두어준 귀족 부인의 남편과 불륜을 저지른 것은 레카니다의 잘못이었고, 돔나가 그것을 폭로할 때는 좀 통쾌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다름 없이 이기적이고 자기 이익에 충실하게 살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사기꾼에 도둑놈이고 자신은 너무 순진하고 선량해서 당하고만 산다고 항상 한탄한다. 


 그렇게 뻔뻔스러운데도 돔나를 미워할 수 없다. 이 소설의 화자가 돔나의 이런 이기적이고 뻔뻔한 면을 훤히 들여다보면서도 여전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처럼. 화자는 돔나의 이야기를 듣다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돔나를 싫어하거나 돔나와 연을 끊지는 않는다. 그리고 돔나가 자기 자식뻘인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등골만 빼먹히고 초라하게 죽어간 것을 진심으로 연민한다. 완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으려 애쓰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으니까. 


 다 읽고 나면 시장이나 동네 아주머니의 수다를 한참 듣고 난 기분이 든다. 돔나 특유의 푸근하고 수다스러운 말투를 잘 살려서 더 그렇다. 레스코프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더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구어체와 방언을 살리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번역자는 돔나의 오룔 사투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하지만, 표준어로 번역된 문장들을 통해서도 돔나의 수다스러움과 오지랖은 생생하게 느껴진다. 


 레스코프의 이 두 단편은 만들어진 이야기라기보다 현실에서 뚝 떼어온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두 단편 속 주인공들은 선하고 정의롭지 않지만, 어디선가 실제로 살아간 인물들 같다. 거친 세상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고 때로는 양심도 내려놓다 감정 때문에 무너지기도 않는 현실의 인간들. 비극적인 결말을 맞아도 천벌을 받았다기보다는 그들의 삶이 그렇게 흘러갔구나, 싶다. 이런 자연스러움과 현실감이 레스코프의 매력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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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카렐 차페크 지음, 김희숙 옮김 / 모비딕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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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로봇Robot'은 '노동, 부역'이라는 뜻의 체코어 '로보타Robota'에서 따온 말로,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Karel Capek가 그 개념을 만들어냈다.('로봇'이라는 신조어 자체는 카렐과 공동 창작을 하던 형 요제프가 제안했다.) 사람과 비슷한 인조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는 차페크 이전부터도 있었지만, 과학의 힘으로 인조인간을 만들어 대량생산하고 판매한다는 발상, 현대적 의미의 인조인간은 차페크에게서 처음 나왔다. 그러니 로봇을 처음 등장시킨 그의 1920년 희곡『로봇』은 최초의 로봇 SF라고 할 수 있다. 


  차페크의『로봇』은 1921년 체코 프라하에서 초연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23년에는 런던에서『로봇』 을 놓고 버나드 쇼와 G.K.체스터턴 등 당대의 유명 작가들이 공식 토론을 벌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로봇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했다. 그러나 차페크 자신은 로봇보다 인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이 작품을 썼다고 밝혔다. 


 차페크에게 로봇은 생산성과 효율성만 따지느라 인간을 하나의 부품처럼 대하는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선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무표정한 승객들의 모습에서 로봇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승객들은 아무 생각 없이 출근을 하고 일을 한다. 회사는 노동자들을 인간으로서 배려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노동자를 더 싼 값에 부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노동자의 생산량을 더 늘릴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극 중에서 로봇의 인권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여주인공 헬레나에게 '로숨 유니버설 공장(작품 속 로봇을 만들어내는 회사)'의 관리자들은 말한다. 로봇 덕분에 사람들은 더 싼 값에 빵을 사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로봇은 인간이 아니니 임금을 주지 않아도 돼서, 로봇이 만드는 빵의 가격이 저렴해진 것이다.

이렇게 인류는 로봇의 노동 덕분에 식량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로숨 유니버설 공장의 사장 해리 도민은 로봇 덕분에 인간이 생계를 위한 노동에서 자유로워지는 세상을 꿈꾸었다. 노예들의 노동 덕분에 정치와 문학, 예술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데만 몰두할 수 있었던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인간이 고통스러운 노동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여유롭고 즐겁게 살아가길 바랐다. 그러나 노동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인간은 즐기는 것 외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게 되었고, 노동을 하면서 느끼는 보람도 의욕도 잃어버렸다. 더 이상 아이도 낳지 않게 되었다. 그 사이 헬레나의 요청으로 로봇 개발자 갈 박사는 자의식을 가진 로봇을 개발해내고, 로봇들은 인간의 종 노릇을 그만두고 인간의 주인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결국 로봇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로숨 사의 건축 담당자 알퀴스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인류를 절멸시킨다. 로봇을 이용해 신세계를 만들려고 했던 도민도, 로봇을 동정하고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려 했던 헬레나도 죽임을 당한다. 알퀴스트는 아직까지도 스스로 노동을 하는 인간이어서 유일하게 살려둔 것이다. 로봇들은 알퀴스트에게 자신들도 인간처럼 번식을 하고 싶다고 방법을 찾아보라고 하지만, 로봇의 설계도는 로봇의 대량생산을 두려워한 헬레나가 불태워버렸다. 알퀴스트는 로봇들을 해부하며 방법을 찾아보려 하지만, 과학자가 아니라 건축가인 그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이 죽어버렸으니 뭔가를 할 의욕도 없다. 그러나 상대방이 해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해부당하겠다며 서로 희생하려고 하는 두 로봇 프리무스와 헬레나(인간 헬레나에게서 이름을 따 왔다.)를 보고, 알퀴스트는 그들이 인간처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알퀴스트는 그들을 풀어주면서 그들을 통해 생명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두 로봇이 기계라면 알퀴스트는 두 로봇이 생명을 낳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작품 속 로봇들은 기계라기보다는 유기물들을 합성해서 만든 인조 생명에 가깝다. 도민은 로봇이 여러 부품을 조합해 만들어지지만 조립된 뒤 부품들 스스로가 자라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로봇들을 해부하면 피가 나오고, 로봇들은 고통스러워한다. 기계라기보다는 인조인간이었기 때문에 헬레나가 더욱 더 그들을 인간처럼 여기고 도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서로 사랑하면서 인간성을 얻게 되었다. 카렐 차페크가 이 최초의 로봇 SF에서 말하려고 한 것은 서로 사랑하고, 스스로 땀 흘려 일할 수 있는 것이 인간에게 인간성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작품 자체를 보면 구성이 다소 엉성하다. 그리고 작품 속 로봇에 대한 발상들은 식상하게 여겨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봇에 대한 이후의 상상들은 이 작품에서 시작되었고, 인간성에 대한 고민을 던졌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 이제 작품에서처럼 로봇이 산업 현장에 투입되고 있다. 인간의 노동을 완전히 대체하는 단계는 아직 아니지만, 로봇과 인간이 공생하는 세상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인간 복제도 시도되고 있다. 복제인간에게서 인간에게 필요한 장기들을 적출하는 상상을 하는 SF들도 나왔다. 로봇과 복제인간 등,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과 유사한 존재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올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고민에서 더 나아가 인간 아닌 것들과의 공존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차페크는 원래 의도했던 현대 사회 비판과 함께 미래에 대한 고민까지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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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과 안생
칭산 지음, 손미경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 소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스포일러 포함


 올해 초에 중국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보고 마음이 아렸었다. 서로를 소중히 여겼지만 서로 너무나 달라서 엇갈려야 했던 두 친구의 애증. 나에게도 그토록 지독하게 아끼고 미워했던 친구가 있어서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원작『칠월과 안생』이 우리나라에 번역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웠다. 읽어야 할 책들이 산더미 같아서 이제야『칠월과 안생』을 읽게 되었다. 


"칠월七月이 안생安生을 처음 만난 건 열세 살 때였다. 입학식장에 길게 늘어선 낯선 얼굴들이 눈부신 가을 햇살에 어른거렸다. 그 중 한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이 첫 문단에서부터 맑고 싱그러운 영화의 분위기가 다시 떠올랐다. 영화 속 싱그러움, 두 친구 사이의 애틋한 감정은 원작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평범한 삶을 꿈꾸었던 모범생 칠월(마사순)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안생(주동우). 그러나 둘의 입장이 뒤바뀌어 둘은 상대가 원하던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나는 영화 쪽을 더 높이 평가한다. 원작에서도 안생이 "왜 나는 칠월이 될 수 없을까"라고 부러워하는 말을 하지만, 평범한 칠월이 독특한 개성을 지닌 안생에게 일방적으로 매혹되는 느낌이다. 안생도 칠월을 아끼지만 전반적으로 봤을 때 칠월이 안생을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편이다. 심지어 안생이 자기 남자친구를 유혹해 그의 아이까지 가졌는데도 칠월은 임신한 안생을 지극정성으로 돌본다.(영화에서는 칠월의 남자친구 가명의 딸이 안생이 아니라 칠월이 낳은 아이로 설정이 바뀌었다.) 영화에서 두 친구가 상대가 원하던 삶을 살게 되면서 상대의 입장에 놓이게 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원작 속 안생이 공중에 붕 뜬 것처럼 살다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것과 달리, 영화 속 안생은 칠월처럼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면서 오히려 칠월을 돌보게 된다. 반면 안정적인 삶을 살면서 안생을 돌보던 칠월은 안정된 삶을 버리고 여행을 떠난다. 현실에서는 아이를 낳고 세상을 떠나면서 칠월의 여행이 끝나지만, 안생의 소설 속에서 칠월은 여전히 자유롭게 여행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매혹된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지독하게 아끼다 못해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된 관계. 각본가들이 둘의 관계를 더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칠월과 안생」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개 단편은 하나의 이야기나 다름 없다. 안安(또는 란藍)이라는 이름의 아름답고 자유분방하지만 불안정한 여자와 린林이라는 잘생기고 따뜻한 남자가 사랑에 빠진다. 린은 인내와 사랑으로 안을 감싸려 하지만 안은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받은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현실에 발 붙이지 못한 채 붕 뜬 것처럼 살아간다. 린은 결국 현실에 지쳐 안을 포기하고, 안은 자살하거나 살해당하는 등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작가의 소설 속에서 사람은 세 부류다. 아름답고 불안정한 젊은 여성(안)과 잘생긴 외모에 그녀보다 경제적, 심리적으로 안정적이지만 결국 그녀를 놓게 되는 남자(린), 그리고 나머지 평범한 사람들. 이 틀에서 그나마 조금이라도 벗어난 게「칠월과 안생」인데, 이름에 '안'이 들어가 있듯이, 안생도 '아름답지만 불안정한 여자 주인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남주인공 가명도 다른 소설 속 남주인공 린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소설 속 평범한 사람들이 여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달리, 독특한 여주인공을 이해하고 포용하려 하는 칠월이 이 소설집에서 가장 개성적인 인물이다.


  아련한 첫사랑과 가혹한 현실, 그 사이에서 무너지는 남녀의 사랑. 이런 비극적이고 애틋한 정서, 한없이 여린 풀꽃 같다가도 독을 내뿜는 독초 같은 여주인공의 매력. 이런 분위기와 정서의 묘사는 정말 뛰어나다. 그 덕분에 중국의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내용이 열 편 내내 반복된다는 것이다. A 단편의 안A를 B단편의 안B와 바꿔도 문제가 없을 만큼 비슷한 인물들, 비슷한 이야기, 비슷한 정서가 반복된다. 처음 들을 때는 아름다워 매혹되지만 들을수록 지치는 음악 같다. '아름답고 청초하고 신비스럽지만 자기 고독에 잠겨 비극에 빠지는 여자'라는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둘러싼 세계에 작가 자신이 매혹되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작가가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새로운 소설을 써도 자기복제만 하고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요즘 일본 애니메이터들이 현실에서 인간을 관찰하지 않고 애니메이션 캐릭터만 보면서 캐릭터를 만들어낸다고 지적했었다. 칭산 작가는 현실이 아니라 자기 세계 속 캐릭터들만 보면서 캐릭터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느낌이다. 자기 세계에서 눈을 돌려 더 넓게 바라보지 않는다면, 작가의 동어반복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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