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
장수연 지음 / 어크로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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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 누구의 엄마도 아니다. 지금 나 한 사람의 삶만으로 벅차고, 앞으로 엄마가 될지 되지 않을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엄마로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싶었다. 우리 엄마부터 엄마가 된 친구들, 선후배들, 지인들, 그리고 내가 공공장소에서 마주치게 될 이름 모를 엄마들까지, 나는 수많은 엄마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네가 애를 안 낳아봐서 모르는 거야."라고 말하는 대신 "엄마로 사는 게 나한테는 이래."라고 말하는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다. 이 책은 MBC 라디오 PD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삶을 솔직담백하게 털어놓은 에세이집이다.


  저자는 모성애를 무조건적으로 찬양하지도 않고, 비혼과 비출산을 결심한 사람들에게 아이를 낳고 키우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나는 엄마가 된 게 이렇게 좋은데 너는 이 행복을 모르겠지. 넌 왜 결혼 안 하니? 왜 아이를 안 낳니?"라고 말하는 친구나 친척을 만났을 때의 곤혹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에, 엄마가 될 생각이 없는 사람들도 이 책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나는 비혼과 비출산을 선택한 당신을 응원한다. 지지한다. 그 선택에 따르는 행복을 충만하게 누리길 기원한다. ...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 아니듯 아이는 행복의 증명이 아니며, 당신이 선택에 따르는 무게를 감당하는 딱 그만큼 나 역시 내 선택의 대가를 치르며 살고 있다.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행복'을 늘어놓듯이, 비혼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 역시 그만의 행복을 나열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내 글이 '결혼과 출산이 정상적인 삶'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공고화하는 데 일조하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결혼과 육아가 부담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행복보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로 한 선택의 대가가 더 와 닿을 수밖에 없다. 한 번도 임신하고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태동을 처음 느꼈을 때, 첫째가 갓 태어난 동생을 처음 바라보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뭉클함에 공감하기는 어렵다. 아이가 없고 고양이를 키우는 나로서는 아이의 몸짓 하나 하나가 신기하고 사랑스럽다는 이야기에 내 고양이를 대입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이와 사람 대 사람으로 소통하면서 느끼는 감동은 고양이와는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반면 나 혼자 살아가기도 빠듯한 경제적 상황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막막해지고, 공공장소에서 도무지 통제가 안 되는 아이들을 마주치면 저 아이들을 집에서 키우는 것은 얼마나 어려울지 두려워진다.


  아이를 키우면서 생기는 문제들은 다양하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고, 아이에게 먹일 돈까스를 튀기다 기름이 튀어 화상을 입는 것 같은 사소하고 사적인 문제들이 있다. 다른 한편 아빠와 엄마의 육아와 가사 배분이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문제, 노동 시간은 긴데 정부에서는 보조금만 지원해 주니 아이와 지낼 시간이 부족해지는 문제처럼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도 있다. 저자는 사적인 문제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면서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는 분노한다. 사회과학 서적이 아니니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거나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친밀감과 연대감을 느끼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부모가 아닌 사람들은 부모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충을 헤아려보고 그 고충을 자아낸 원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모로서가 아닌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들 중에서도 공감되는 것들이 있다. 마침 회의에서 바보 같은 소리만 하다 나온 것 같았을 때, 회의가 성공적으로 끝났어도 나 자신이 기여한 건 없는 것 같아서 좌절감을 느낀다는 구절을 읽었다.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한 건가 싶어 자책하다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게 위로가 됐다. 좀 더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은 먹는 것과 같고 그 감상을 글로 쓰는 것은 똥을 싸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에도 공감했다. 많이 읽고 보기만 했지 아무 것도 쓰지 않으면 뭔가 묵은 것이 내 안에 쌓인 것 같다. 저자가 말하는 '글 마렵다'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안다. 머릿속에 묵혀 뒀던 글을 마침내 썼을 때의 후련함도. 또한 요즘 같이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오고, 그만큼 생각지 못한 곳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때에 글을 쓰는 사람의 두려움도 공감한다. 페미니즘 관련 도서의 서평을 썼다가 정말로 악플이 달리고 나서부터는 더 두려워졌다. 하지만 누구도 불편하게 하지 않는 글이 과연 좋은 글일까? 그런 글을 쓰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글을 쓰는 것의 목표는 욕을 먹지 않는 게 아니다, 글을 쓰면서 욕을 먹을까에 신경 쓰는 것, 실수할까 걱정하느라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이 책의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다.


  이 책은 육아 문제를 심도 있게 분석하는 책도 아니고, 육아의 꿀팁을 제시해 주는 책도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자 엄마로서 살아가는 삶을 털어놓은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아이가 없는 나는 아이가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마음을 헤아려본다. 이 책이 모든 엄마들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와 다른 사람,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한 타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몰랐던 세상 한 귀퉁이를 보게 되고, 세상을 점점 더 많이 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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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60년을 연애했습니다
라오 핑루 글.그림, 남혜선 옮김 / 윌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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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결혼을 할지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오래도록 서로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렇게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 중국의 노부부 라오핑루 할아버지와 메이탕 할머니의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 중 하나다. 60년을 함께한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반 년 동안이나 라오핑루 노인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림으로 그려두면 그 속에는 아내가 살아 있을 수 있다 여겼다. 그림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정이 마음을 움직이니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함께한 60여 년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니 18권이나 되는 화첩이 되었다. 그 화첩을 책으로 정리한 것이 이 책 『우리는 60년을 연애했습니다』다.


(위) 젊은 시절의 라오핑루와 메이탕 (아래) 노년의 라오핑루와 메이탕


둘의 시작은 소설이나 영화처럼 낭만적이거나 운명적이지 않았다. 둘은 집안에서 맺어준 사이였다. 그러나 둘은 서로를 마음에 들어했고, 정혼하자마자 60여 년간의 긴 연애를 시작했다.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둘의 삶도 평탄했겠지만 험난한 역사 때문에 둘은 고된 세월을 함께 견뎌내야 했다. 핑루는 젊은 시절 조국을 침략한 일본군에 맞서 싸웠지만, 국민당 출신 부대에 소속되어 싸웠다는 것이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항일 전쟁이 끝난 뒤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을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고, 결국에는 내전까지 벌이게 되었다. 국민당이 패배해 대만으로 쫓겨나면서 함께 국민당 소속 부대에서 싸웠던 전우들도 대만으로 떠났지만, 핑루는 중국에 남아 있었다. 결국 핑루는 노동 개조(공산당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그런 세력으로 의심받는 사람은 강제 노동과 세뇌 교육을 받아야 했다.) 대상이 되어 1958년부터 22년 동안이나 가족들과 떨어져 살며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1년에 한 번만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직장에서는 남편과 이혼하라고 했지만, 아내는 남편의 결백함을 믿는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끝까지 남편과 헤어지지 않았다. 1979년에 노동 개조 처분이 철회되면서 핑루는 마침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신혼 시절 함께 누워 달을 바라보며 월병을 먹었던 기억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이미지 출처: http://www.visualdive.com


험난한 인생사이니만큼 이야기를 더 극적으로 쓸 수 있었을 텐데도, 핑루 할아버지는 일기를 쓰듯 담담하게 인생사를 기록한다. 로맨틱한 사랑의 말도, 애절한 이별의 순간도, 감동적인 재회의 순간도 없다. 소소한 일상들만이 그림 일기를 채우고 있다. 연애 시절 호수 공원을 함께 거닐며 이야기하고, 신혼 시절 함께 침대에 누워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받으며 월병을 나누어 먹었던 기억 같은 행복한 일상부터 서로 떨어져 지내던 시절의 가난하고 고단했던 일상들까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살면서 겪은 수많은 소소한 일들이 무슨 특별한 연유도 없이 마음 깊은 곳에 흔적으로 남아, 오랜 세월을 거치며 소중히 기억되곤 합니다." 소중히 기억하고 있는 그 모든 순간이 사랑이었다.


눈이 나빠서 일어났던 일들을 가지고 서로 놀리는 핑루와 메이탕


핑루는 메이탕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는 원래 눈이 좋았는데도 근시인 메이탕에게 맞춰 늘 영화관 앞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다 근시가 되고 말았다. 메이탕은 논에 심은 모와 부추를 구별하지 못했고, 핑루는 배추와 양배추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눈이 나빠졌다. 그런데도 핑루는 드디어 메이탕에게 보조를 맞출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메이탕이 "당신은 어째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수!"라고 타박을 놓아도 핑루는 허허 웃기만 했고, 화를 내도 오히려 얼마나 힘들었으면 화를 내겠냐고 가엽게 여겼다. 부록으로 실린 메이탕의 편지들에서는 반대로 메이탕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한다거나 보고 싶다, 그립다는 말은 없지만 자신과 아이들은 괜찮으니 당신 몸부터 챙기라는 말은 편지마다 빼놓지 않는다. 남편 없이 다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버거웠을 텐데도 남편부터 먼저 걱정하는 것이 메이탕의 사랑이었다.


2008년 메이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둘은 영영 이별하게 된다.

이미지 출처: http://www.visualdive.com


핑루가 돌아온 1979년부터 메이탕이 세상을 떠난 2008년까지 두 사람은 29년 동안 함께 지냈다. 그러나 고된 노동과 가난으로 둘은 건강이 많이 상해 있었고, 나이가 들면서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됐다. 둘이 번갈아 큰 병치레를 하느라 둘은 번갈아서 서로를 간호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함께 지낸 29년 중에서도 두 사람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낸 시간이 짧았던 것이 핑루에게는 큰 한으로 남았다. 그렇게 함께한 시간이 길었는데도 아쉬워하는 사랑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바다는 깊지 않네.

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바다보다 깊다네.

핑루와 메이탕의 이야기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의 깊이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일기장처럼 담담한 글과 소박한 그림에 담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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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의 비밀 - 아시아 베스트 컬렉션 아시아 문학선 15
바오 닌 외 지음, 구수정 외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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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알게 되는 경로는 참 다양하다. 이웃 블로거 분이 작년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었던 <만토>라는 영화 이야기를 했었다. <만토>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작가인 사다트 하산 만토Saadat Hassan Manto, 1912-1955라는 인물의 삶을 그린 영화인데, 그의 작품 중 단편소설 「모젤」이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소설이 담긴 단편집 『물결의 비밀』을 언급했다. 인터넷에서 좀 더 정보를 찾아보니, 『물결의 비밀』 은 사다트 하산 만토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국가의 작가들이 쓴 단편들을 모은 책이었다. 일본과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의 문학은 접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의 단편도 모두 읽고 싶어졌다. 「모젤」 덕분에 나머지 열한 편의 단편도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책을 만나게 한 단편 「모젤」은 인도에서 일어나는 종교 간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인도는 1947년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으로 분리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학살, 폭행, 강간을 저지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이후로도 종교 간의 갈등으로 인한 폭력사태와 학살은 인도에서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작가는 종교 간의 갈등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문제도 작품에서 다루었다고 한다. 이 작품도 그러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주인공 티얼로천은 무슬림들이 폭력 사태를 일으키고 있는 동네에서 사는 약혼녀 키르팔을 걱정한다. 시크교도인 키르팔은 언제라도 무슬림의 희생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티얼로천이 고민만 하고 있을 때 티얼로천의 전 연인 모젤은 키르팔을 구하러 나선다. 종교 간의 갈등이 폭력을 낳는 상황에서 소수자인 유대인인데도 주눅들지 않고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모젤의 용기가 빛난다.(그런데 모젤만 티얼로천에게 존대를 하고 티얼로천은 모젤에게 반말을 하는 것으로 번역된 것이 아쉬웠다. 둘은 동등한 연인 관계이고, 모젤은 당당한 여자인데. 그래서 머릿속으로는 모젤이 반말을 하는 것으로 바꿔 읽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지만 약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는 모젤은, 만토가 활동했던 시기 인도 여성들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파격적인 여성 캐릭터다. 만토는 이 작품 외에도 파격적인 작품들로 논란을 몰고 다녔다는데 그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졌다.

또 다른 인도 작가 마하스웨타 데비의 단편 「곡쟁이」는 인도의 밑바닥 인생들을 그린 블랙코미디다. 주인공 사니차리는 남편이 죽었을 때도, 아들이 죽었을 때도 울지 않았다. 그러나 장례식에 가서 곡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게 되자,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친가족보다 서럽게 통곡한다.

"슬퍼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독한 재난을 당한 뒤에도 사람들은 차츰 목욕을 하고 밥을 먹고, 마당에서 고추를 물어뜯고 있는 염소를 쫓아낸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먹지 못하면 죽는다. (...) 사니차리는 슬픔에 넋을 잃었지만 울지는 않을 것이다. 돈, 쌀, 새 옷, 이런 것들을 대가로 얻지 않는다면, 눈물은 쓸모없는 사치다."

사니차리는 낮은 카스트의 가난한 하층민이고, 의지할 가족 한 명 없는 과부다. 살기 위해서는 눈물이나 감정조차 상품으로 팔 수밖에 없다. 사니차리의 눈물을 사는 부자, 고위층들은 정작 가족이 살아 있을 때는 병상에 방치해 두면서 죽고 난 뒤에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룬다. 순전히 체면치레 때문에. 진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을 곡쟁이들의 통곡도 장례식을 빛내는 수단으로 여기고 기꺼이 돈을 내어준다. 이렇게 비정한 현실을 입담 좋게 풀어내 읽는 재미가 있지만, 읽고 나면 씁쓸함이 남는다.

읽는 재미로는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들 중 「곡쟁이」와 투 톱을 이루는 작품이 중국 작가 츠쯔젠의 소설 「돼지기름 한 항아리」이다. 주인공은 세 아이를 둔 엄마이고, 남편은 헤이룽장성의 임업 작업장에서 일하느라 주인공과 아이들과 떨어져서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관리소에서 가족들과 살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며, 살고 있던 집을 팔고 아이들을 데리고 오라고 편지를 보낸다. 주인공은 집을 판 돈으로 산 돼지기름 한 항아리와 세 아이를 데리고 남편에게 간다. 무거운 돼지기름 항아리와 세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이끌고 가는 여정이나, 이사 간 임업 작업소에서의 삶이나 만만치 않지만 그 안에 따뜻한 정과 나름대로의 행복이 있다. 단편이다 보니 몇 문장만에 수 년, 수십 년이 훅훅 지나는 게 아쉬웠다. 살을 좀 더 붙여 장편으로 만들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 글에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이야기하지만, 가장 먼저 독자들을 맞는 작품은 표제작 「물결의 비밀」이다. 베트남 작가 바오 닌이 쓴 이 작품은, 베트남 전쟁 당시 어느 마을의 어느 강이 품고 있는 비극을 이야기한다. 모든 비극을 보고도 묵묵히 흐르는 강물처럼, 주인공도 자신만이 알고 있는 슬픈 비밀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전체 분량은 4페이지밖에 안 되지만, 작품이 남기는 여운은 그보다 수십, 수백 배 길다.

표제작처럼 다른 작품들도 아시아 곳곳의 물결들이 품고 있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어떤 부분은 우리와 닮아서 공감하게 되고, 어떤 부분은 우리와 달라서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의 모습들을 보게 된다. 편집 후기에서 미처 다 담지 못해 아쉽다고 했던 단편들도,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을 쓴 작가들의 다른 작품들도 이어서 만나고 싶다. 우리가 만나지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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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의 비밀 - 아시아 베스트 컬렉션 아시아 문학선 15
바오 닌 외 지음, 구수정 외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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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물결이 품은 수많은 이야기들. 우리와 달라서 흥미로운 데도 있고, 우리와 다르지 않아서 공감하게 되는 데도 있다. 이야기의 재미로는 <곡쟁이>와 <돼지기름 한 동이>가 베스트. 표제작 <물결의 비밀>은 단 4페이지만으로도 몇 배의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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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창과 쿤팬의 이야기 지만지 고전선집 581
라마 2세 외 지음, 김영애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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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영미권과 일본, 중국어권, 그리고 비교적 인지도가 큰 서유럽권을 제외한 지역의 문학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도서관에 갈 때마다 문학 도서 서가 중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제3세계 지역 문학 코너를 유심히 보게 된다.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도 그렇게 발견한 책이었다.『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는 16-17세기경 태국에 실제 살았던 쿤창과 쿤팬, 완텅이라는 세 인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태국의 고전문학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판소리처럼 소리꾼과 소리의 박자를 맞춰주는 반주자가 장편 서사시를 낭송하는 '쎄파' 라는 형식의 작품인데, 태국에서는 우리나라의 <춘향전>만큼이나 잘 알려진 작품이라고 한다.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도 <춘향전>처럼 사랑 이야기이다. 쿤팬과 쿤창이라는 두 남자와 완텅이라는 한 여자의 삼각관계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두근두근 설레거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고 봤다가는 실망할 것이다. 이 이야기의 장르는 멜로가 아니라 막장드라마다. 


 삼각관계를 다룬 이야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두 남주인공 중 누구를 응원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갈리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 때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쿤창과 쿤팬 둘 다 인성이 막하막하여서 응원할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쿤팬은 잘생긴 외모 덕분에 여주인공과 서로 사랑을 나누는 메인남주이다. 하지만 여주인공 완텅이 잠든 사이에 완텅의 몸종과 성관계를 가지고 이후에도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한다. 여기까지는 일부다처제여서 그렇다 치자. 자신이 전쟁에 나간 사이 쿤창의 속임수로 완텅이 쿤창에게 시집가게 된 것을 알았을 때, 완텅에게 "이년아, 넌 죽어라, 살아 있지 마라, 이 칼을 뽑아 네 머리통을 내리쳐 죽이겠다."고 폭언을 하면서 칼을 빼어들고 죽이려고 한다. 완텅이 쿤창의 속임수로 어쩔 수 없이 시집을 가게 된 거라고 하소연을 했는데도. 아내를 빼앗긴 분노 때문이라고 해도 완텅 또한 쿤창에게 속은 피해자다. 무엇보다 쿤팬이 저지른 가장 끔찍한 짓은 수호 정령을 만들기 위해 자기 자식을 죽인 것이다. 태국에는 인간이 부리는 '꾸만텅'이라는 귀신이 있는데, 반드시 출생 직전의 태아로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쿤팬은 꾸만텅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아이를 잘 낳을 만한 여자에게 접근해 아내로 맞는다.(완텅이 아니라 다른 여자다.) 그리고 임신한 지 여러 달이 되자 잠든 아내의 배를 갈라 뱃속의 아이를 꺼내 꾸만텅으로 만든다. 꾸만텅이 된 아이는 성불도 하지 못하고 작품 내내 자기를 죽인 아버지와 이복동생들의 심부름꾼 노릇을 한다. 이 얼마나 끔찍한가. 


  쿤창은 못생긴 외모 때문에 쿤팬과 완텅과 어울려 놀던 어린 시절부터도 완텅에게 "너는 못생겨서 같이 놀기 싫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런 취급을 당하면서도 한결같이 완텅을 좋아한다. 그러나 쿤팬이 전쟁에 나간 사이 쿤팬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막대한 재산으로 완텅의 어머니의 마음을 사 완텅과 결혼하는 비열한 인간이다. 완텅이 낳은 아들 프라와이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 쿤팬의 아들이라는 걸 알았을 때 아이의 간이 터질 정도로 심하게 폭행한다. 그랬으면서도 위기에 처했을 때 프라와이에게 길러준 은혜를 생각해 보라고 뻔뻔하게 말한다. 이후로도 쿤팬과 완텅을 갈라놓기 위해 끊임없이 쿤팬을 모함한다. 그나마 쿤팬과 달리 완텅에게 폭언이나 폭행을 한 적이 없고, 자신 때문에 완텅이 음탕한 여자 취급을 당하고 죽은 것에 대해 후회하고 반성하지만, 독자들이 응원해 줄 만한 주인공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 막장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들에게는 인권이 없다. 완텅은 쿤팬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데도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쿤창과 결혼해 원래 남편인 쿤팬과 헤어져야 했다. 그런데도 국왕은 완텅이 음란한 여자라고 낙인을 찍고 당장 처형하라고 한다. 완텅의 아들 프라와이가 자신과 아버지가 나라에 세운 공을 참작해 용서해 달라고 해 왕의 사면령을 받았지만, 사면령이 도착하기 전 이미 완텅은 처형됐다. 다른 여성 캐릭터들도 결혼하고 나면 남편의 폭력에 시달린다. 한 나라의 공주였던 여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도 여성 캐릭터들의 친정어머니들은 한결같이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을 받들라고 가르친다.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가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정리될 시기에 서양인들과 서구 자본주의가 태국에 막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의 놀이 문화에서도 여성의 전통적인 성 역할을 강조하고 규범화했을 것이라고 한다. 태국 전통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가 단지 남자의 부속물 정도였다는 것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다른 전통설화와 달리 캐릭터나 서사가 단순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 많은 설화 속에서 주인공은 선하고 잘생기고 능력이 뛰어나고, 악역은 악하고 못생기고 능력도 주인공보다 부족하다. 그런데 쿤창과 쿤팬은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모두 갖고 있어 누가 주인공이고 악역이라고 구분할 수 없다. 서사도 전래동화처럼 단순하지 않고 때때로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긴장감과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에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는 태국의 백성들에게 흥미진진한 드라마였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태국의 풍습들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근대 이전 아이들은 학문을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절에 들어가 스님들에게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다. 승려가 출가할 때, 집들이할 때, 먼 길을 떠나거나 먼 길에서 돌아왔을 때 등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집안의 어른이나 초청해 온 승려가 복과 장수, 평안을 기원하는 '탐콴 의식'을 올린다. 거미가 가슴을 치며 우는 것은 태국에서 흉조로 여겨진다. 태국은 인도와 힌두교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아,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가 태국에서는 <라마끼엔>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태국에서는 <라마야나>의 주인공 라마를 프라람, 라마의 아내 시타를 씨다, 시타를 납치해 간 악당 라바나를 톳싸깐이라고 부르고, 이 작품 속 인물들도 스스로를 <라마끼엔> 속 등장인물들에 비유하기도 한다. 같은 아시아에 있는 나라인데도 정말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아쉽게도 이 책은 줄거리 요약에 원문 일부를 발췌했다. 이 책은 주인공들 위주로 요약한 것이고 원문은 아주 방대하다던데, 언젠가는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가 완역되었으면 좋겠다. 완역된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에서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태국의 전통 문화, 풍습을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2002년 태국 영화 <쿤팬-전쟁영웅의 전설>의 포스터.


P. S.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는 2002년 <쿤팬-전쟁영웅의 전설>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태국에서 유명하고 인기 많은 고전문학이니 이 영화 말고도 드라마나 영화로 여러 번 만들어졌을 것 같은데, 영어로 검색해서 나오는 건 이 영화 하나니 더 자세히 알 수 없다. 줄거리 소개를 보니 쿤팬의 영웅담과 완텅과의 사랑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영화 같다. 쿤팬은 정의롭고 로맨틱한 남주인공으로 나오고 쿤창은 쿤팬을 위기에 빠뜨리는 악역으로 나오는 듯 싶다. 원전을 읽어보면 어느 한 쪽이 더 착하고 더 나쁘다고 말하기도 힘든데. 더러운 외모지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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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9-14 0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콕에 여행와 미술관에 들렀다가 이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어요. 궁금해서 책이 있나 검색하다 리뷰 재미있게 읽고갑니다. 전문을 다 읽어보고 싶어요.

바스티안 2019-09-14 16:33   좋아요 0 | URL
방콕 여행을 갔다 오셨다니 좋으셨겠네요. 아직까지 이 책의 완역판이 없는 게 안타까워요. 번역자 분이랑 출판사에서 더 힘내서 완역판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