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회 송은미술대상전 지하, 가벽 뒤 초록색 비니와 함께 낙서처럼 적혀있던 나의 세상 악보, 검색해보니 이런 포크 음악이었다.

작가는 시각예술가, 뮤지션이자 기획매개자로 활동하고 있는 봄로야다. 사회에서 소외된 이에 주목하는 작업을 한다. 이런 이슈를 다루는 사람은 귀하다. 리플렛에서는 ˝비인간을 포함한 몸을 가진 주체가 사회 집단으로부터 통제될 때 내면화되는 모순과 저항에 주목˝한다고 하였다.

전시장을 다니는 이는 크게는 (유럽)회화파와 동시대미술파로 나뉠 것 같다. 색채를 중시하며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이와, 미술을 사유의 매개체로 생각하는 이다. 반드시 이분법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고 경향이 그래보인다. 전자는 예전, 국중박 등을 자주 다니고 후자는 MMCA, 서울시립, 아르코, 두산, CR콜렉티브, 프로젝트사루비아를 많이 방문한다.

컨템포러리 미술은 돌아와서 보는 것도 어렵고 글도 난해하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주제도 광범위해서 신체, 노동, 전쟁, 퀴어,비시각(청각, 후각), 디지털, AI 끝도 없다. 컨템포러리 미술을 대할 때 느끼는 피로감이 분명히 있다.

작품은 불편한 질문을 어렵게 던지며 우리의 생각의 흐름과 태도를 조정하라고 권유한다. 의도적으로 혼란을 유발하면서 소격효과로 우리를 둘러싼 시스템 전체를 메타인지하기를 요청한다. 익숙한 의미작용과 빈번한 패턴을 어긋나게한다.

이를 해석하는 언어도 평범하지 않다. 작품을 만드는 작가와 이를 해석하는 큐레이터/평론가의 언어가 일치하는지, 그들이 같은 말을 하는지, 내가 그들과 같은 것을 보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복잡한 담론, 정치적 맥락, 기술적 전제, 윤리적 입장을 빠짐없이 호출하다 보니 문장은 방어적으로 변한다. 독자를 설득하기보다는 오해를 예방하려 글을 쓴다. 영어로 읽으면 차라리 쉬운데 번역투의 문체가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관람자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떠안는다. 마치 따라잡지 못하면 창피를 당하는 세미나에 멀뚱히 앉아 있는 기분이다. 정답은 없고온갖 해설지만 난무한다. 최종적으로 검토해주는 이도 없어 내 생각이 맞는지도 확정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이 동시대 미술의 묘미다. 완성된 세계관을 제시하지 않는다. 작가는 특정 화두를 끌어안고 우리 대신 이슈와 씨름하면서 살아가며 그 과정, 그리고 생각의 부산물을 전시한다. 당연하게 여겨온 접근방식 자체를 어색하게 만든다. 왜 이것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나, 왜 지금 이 주제인가, 왜 이 매체여야 하는가. 답보다 질문이 오래 남고 감상보다 태도가 축적된다.

관객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전시장을 나선다. 미완의 상태를 견뎌야한다.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감각 속에서 배움이 슬그머니 움튼다. 어느 날 전혀 다른 맥락에서 다시 말을 걸어올 때 멈칫, 하며 나의 생각이 달라져있음을 발견한다.

봄로야, 〈나의 왕국(The Kingdom)>
가벽에 펜 (원곡: 황푸하)

곡은 황푸하 나의 세상
https://www.youtube.com/watch?v=UuDWjWkzs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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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달강
권정생 지음, 김세현 그림 / 한울림어린이(한울림)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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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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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talian Executioners: The Genocide of the Jews of Italy (Hardcover)
Simon Levis Sullam / Princeton Univ Pr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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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대 출판사에서 나온 이탈리아 실행자 읽었다. 공식적으로는 200페이지라 되어있으나 조금 큰 폰트에 각주빼면 130페이지 남짓이다. 역사적 풍경을 서술하기에 가볍고 빠르게 읽기 좋다. 내용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1943-45년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던 이탈리아의 동조자가 왜 이탈리아사에서 잊혀졌는지를 다룬 내용이다.


저자는 베네치아 카포스카리 국립대에서 현대사 담당으로 있는 시몬 레비스 술람. 핵심은 전후 정권의 필요에 의해 배신, 밀고, 체포, 서류 작성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유대인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이들이 강제적으로 국가의 공적 기억에서 제거되었다는 고갱이다.


전후 경제 부흥기와 냉전시기 이탈리아는 민족국가 정체성을 위해 기억을 선택적 재구성하고 패배한 독일의 폭력성과 대척점에서 선량한 이탈리아인이는 픽션적 신화를 만들어냈다. 이탈리아인 스스로가 과거의 악행과 연결짓지 않겠다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고 그 결과 실제로 존재했던 가해자들이 역사 담론에서 소외되었다. 따라서 공식 역사에서 유대인 학살 동조자들은 사회적 편익, 정치적 절충, 사법적 회피의 삼중주 때문에 사라졌고 저자는 이들을 실행자라고 명명하며 역사의 무덤에서 호출한다.


사회적 편익과 정치적 걸충과 사법적 회피의 삼중주. 즉, 선량한 민족으로 간주하는 것이 국가 재건에 유리했고, 전후 엄혹한 냉전 구도에서 파시스트 잔재를 제거하는 데 인색했으며, 따라서 파시스트 실행자에 대한 처벌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침묵하는 학살 피해자가 아니라 어찌되었든 살아남은 생존자 증언에 초점을 맞추는 역사 서술의 선택적 강조에 대한 숙고를 불러일으킨다.


나아가 저자는 실행자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유대인 아이에게 총을 쏜 이가 아니라 거기까지 이르는데 가담한 모든 이로 정의를 하는데 이런 정의를 내리는 이유는 그간 이탈리아사에서 저항자와 구조자 쪽이 강조되면서 실행자들은 주변화됐기 때문에 후자를 쟁점화하기 위함이다.


전쟁과 폭력의 기억이 어떻게 공식적인 역사가 되는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특정 국가의 동조자 문제를 기억의 정치학, 역사의 윤리학이라는 보편적 이슈로 승화시키니, 동아시아 근현대사도 이에 빗대어 생각해볼 수 있게끔한다.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저자의 주장인 그간 축적된 영미권, 유럽권 선행연구에 비판을 가하는 부분을 이해해야 책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이탈리아는 비교적 유대인을 보호했다는 상식이 있다. 또, 이탈리아인은 원래 착하고 관용적이라 독일처럼 적극적으로 유대인을 학살하지 않았다, 즉 Italiani brava gente라는 이미지가 퍼졌다. 이 이야기에 균열을 가해 브레시아(특히 마지막 장)의 문서사료와 증언을 통해 수천 명의 체포와 배신이 평범한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드러냈다.


미시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실행자들은 이념적 반유대주의, 관료주의적 복종, 기회주의적 이익추구, 경쟁, 개인적 적대감, 복수 같은 다양한 동기에 의해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다. 이러한 관점이 주는 시사점은 학살이 구조적이고 기계적인 면모도 있지만 사람들의 복잡한 선택과 상황들이 얽힌 결과(어쩔 수가 없다!)라는 부분이다. 그리고 생존자들은 다시 기억과 망각의 정치적 역학에 얽혀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고 다른 서사를 선택한다.


또한 2차 대전에서 이탈리아가 독일과 함께 추축국으로 같은 편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독일이 대표적으로 패배하고 전쟁중 이탈리아는 독일에 동조했으나 빨리 연합국편에 붙음으로써 이미지 쇄신에 성공했다. 좋은 이탈리아인 vs 나쁜 독일인이라는 구도는, 사실 이 둘이 전쟁 중에 같은 편이었기 때문에 전후에 책임회피(물타기)를 위해 만들어진 선악 이분법이다. 파시스트 정권을 너무 부각하면 새로운 공화국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다. 마치 맥아더 정권이 친일파 인사를 그대로 기용해 안정적 정권운용을 꾀한 것처럼, 전시 범죄를 저질렀던 수많은 파시스트 인사들이 1946년 특별 사면에 의해 처벌 없이 풀려났다.


패배한 독일의 폭력성과 비교해 자국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드는 편이 편한 현실적이었고 그래서 유대인 박해는 범죄로 간주되지 않았다. 사회적 비난이나 본인들의 사과도 없었다. 이런 전후 사법 처리와 사회적 무죄화는 다른 국가에서도 있었을 법한 일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유대인 공동체의 반응이다. 피해를 받은 유대인 서클 내부도 구조와 보호 사례를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전후 유대인 생존자의 입장에서 누가 나를 살려줬는가, 라는 질문이 우선적이었다. 즉, 왜 죽지 않았던거지 다행이다, 라는 말이 먼저였지, 누가 나를 배신했는가를 캐묻는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생존을 가능케한 실질적 면모는 다양했다. 이웃이 숨어 있게 해주었거나, 가짜 서류를 만들어주었거나, 경찰이 눈을 감아주었거나, 성직자나 일반 시민이 대피에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면 생존자의 기억은 구조되었다는 언명에 붙잡힌다.


생존자 입장에서 구조의 서사는 중요하다.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다. 모든 이탈리아인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살아남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런 말들이 삶을 단단히 붙잡는 앵커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매일같이 얼굴 보고 살아가는 커뮤니티에서 누군가 밀고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의지해야하는 행정시스템과 공권력이 바로 나를 체포하려 들었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순간 이 공동체에서 살아나갈 심리적 기반이 무너져버린다. 저자가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혹은 그랬을 수도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면 유대인으로서 다행히도 생존했다는 사실과, 이탈리아인으로서 다행히 생존했다는 사실은 밀접히 연관된 종이 한 장 차이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러한 생존서사는 이탈리아 유대인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같은 동유럽 유대인과 상황이 달랐다. 베니스의 상인때부터 언급된 이탈리아 유대인은 이미 수백 년간 이탈리아 사회의 일부였다. 동유럽 유대인처럼 이디시어를 쓰지 않고 이탈리아어를 쓰며 문화, 교육, 군복무, 시민권 등등 모두 동일하게 누렸다. 종교만 다를 뿐 외부자 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다시 말해, 유대인을 넘긴 사람은 이웃이었다. 그러니 전쟁의 혼란이 끝나고 전후 처리를 할 때 밀고자가 지인이었다고 말하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독일이, 파시즘이, 일부 예외적 인간들이 했다고 가해를 외부화하는 서사가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 편리주의적 낙인을 직면하자고 요청하면서 20세기에 여러 유럽 국가에서 자국의 콜라보레이터에 대해 스스로 물어봤던 기억과 청산의 과정을 이탈리아는 부분적으로 건너뛰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책의 단점은 이러한 수정주의 서사를 취하는 대부분의 역사서술과 궤를 같이한다. 다층적인 접근, 입체적인 해석,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미시적 이야기를 공적 테이블에 올려놓는 모든 접근은 사료의 대표성 이슈를 벗어날 수 없다. 왕조사나 정치사 같은 굵직한 서사가 아니라 다종다양한 사료를 취해 네러티브에 엮겠다면 얼마나 다양해야하는가? 대표적으로 꼽은 사례가 과연 대표성이 있는가? 이미 모집단에서 부분집합이 아닌가? 일부를 통해 전체를 말하겠다면서 특수에 함몰된 것은 아닌가?


예컨대 피렌체, 브레시아 등 북부사례에 집중한 나머지 Salò 공화국, 남부 저항 등은 약하게 다루었다. 내부 공모자만 다루었지 파시스트 내부 갈등과 암약, 연합군과 왕당파, 파르티잔 등 다층적 전후 상황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탈리아 전체 2차 세계대전 경험의 다양성 일부만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맥락적 편향이 있다는 비판을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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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슈레더 감독의 미시마 그의 인생 보았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평생 고민하며 형식미를 추구해 온 그의 일대기를 감각적인 무대 연출과 장엄한 음악으로 몰입감을 높여 빚은 훌륭한 시네마토그래피다. 예술지상주의적 삶과 아티스틱한 영화의 미감이 정합적이다. 엔딩의 일출은 그 이전의 4개의 장에서 미시마의 인생을 모두 종합한다.


국가별로 진입이 다소 어려운 특유의 감성이 있다. 예컨대 한국의 한, 프랑스의 자유분방함, 러시아의 구원이 없는 죽음, 일본의 헛되고 쓸쓸한 와비사비 감성 같은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적인 미학을 순수하게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서구권에서 여전히 찬사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극우민족주의적 태도가 공분을 사고 일각에서는 반발심을 일으키는 듯하다. 작가의 인생관과 정치적 입장도 작품을 해석하는 하나의 태도다. 별개로 미학적 입장은 음미해볼 부분이 있다.


감독은 영어로 각본을 썼고 배우는 일본어로 연기했다 

그러나보니 문화적 의미손실이 일어난다. 들리는 일본어 음성과 영어 자막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전혀 뉘앙스가 다르다. 어떤 부분은 아예 도착어인 영어에 맞게 앞뒤를 잘라버린 부분도 있다. 각본을 우선적으로 영어로 썼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며 풍부한 2차 창작이 들어갔다고 본다. 일본어는 대표적인 고맥락 언어다. 생략하는 표현도 많고 해석에 사회문화적 이해가 깊이 들어가야한다. 기계적으로 번역해서는 말이 통하지 않으며 전달방식도 신경써서 특유의 태도, 악센트와 함께 발성해야한다.


예를 들어 이런 부분이 흥미롭다. 맨 처음에 전화로 여집사가


마님께서 학교에 (奥さんが学校に)라고 하는데 이미 일본어 자체에서 뒷 부분의 (아이를 데리고 가셨다) 다 끊어먹었다. 영어 자막에서는

당신의 아내가 이미 그들을 학교로 데려갔다(Your wife's already taken them to school)라고 했다. Your wife에는 오쿠상(안주인, 마님)이라는 표현에 들어간 화자의 청자에 대한 위계관계가 드러나지 않는다.


또, 혈서를 쓰는 장면에서 미시마는 손가락 끝에 피를 내는데 지켜보는 대원에게 아파보이나?(이타소오까, 痛そうか)라고 한다. 영어로는 아프지 않아(It doesn't hurt)라고 한다. 어느 한 언어에서 직역하면 절대 말이 안된다. 일본어에서는 그런 식으로 겸양적으로 설의법으로 물어야하고 (아파보이나? 사실 안 아파), 영어에서는 사실 그대로 아프지 않다라고 해야지 Does it look painful to see? 같은 말로 하면 매우 어색하다.


옛 공계귀족 출신인듯한 할머니가 요즘 젊은애들을 한탄하는 장면에서도 특유의 귀족어법이 나오는데 영어로는 애초에 뉘앙스를 살릴 수 없다.


또, 음성으로는 스님, 중을 의미하는 보-즈(坊主-한자로 읽으면 방주)가 들리고 자막에서는 조수나 카톨릭의 복사를 의미하는 애콜라이트(acolyte)가 뜬다. 그리스도교의 시종을 의미하는 애콜라이트는 이정재 배우가 참여한 스타워즈 시리즈 제목이기도 하다. 젠 마스터와 그 제자 관계에서 '제자'정도의 의미다. 기독교 제자인데 불교 제자로 종교문화적인 쓰임새가 바뀌었다. 그런 단어는 또 장로가 있다. 원래 노장 사상에서 유래한 도교 용어인데 이제 개신교의 직급 높은 일반신자로 바뀌었다. (고 한형조 교수의 책에서 읽었다)


마지막 자위대 앞의 일장연설 첫 대사도 흥미로웠다.

일본어로는 이렇게 들렸다.

自衛隊の諸君。

このような時代で、諸君と対面するのは、実に残念なことである。

俺は、悲しみと憤りをもって、ここに来た。

今の日本で、ただ自衛隊だけが、日本の魂を持っていると、俺は信じていた。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렇다.

자위대 제군. 이와 같은 시대에 여러분과 마주하게 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나는 슬픔과 분노를 안고 이 자리에 왔다.

지금의 일본에서 오직 자위대만이 일본의 혼을 지니고 있다고 나는 믿어왔다.


그런데 자막에서는 이렇다.

Dear soldiers! 

It's a terrible affair to have to speak to army men in circumstances like these.

I thought that the army was the last hope of Japan,

the last stronghold of the Japanese soul.


친애하는 장병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군인 여러분께 말씀드려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끔찍한 일이다)

저는 군대가 일본의 마지막 희망이자

일본인의 정신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습니다.

음성과 자막이 어떻게 다르냐?


일단, "나는 슬픔과 분노(이키도오리)를 안고 이 자리에 왔다."라는 표현이 아예 빠졌다.

자위대의 제군과 soldiers는 소속에서 차이가 있고

끔찍한 일(terrible affair)과 안타깝다(잔넨..)은 다른 말이며

대면하다와 have to speak to는 다르게 들리고

소울보다 혼(타마시이)이 더 입체적인 문화적 뉘앙스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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