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평창동에 있는 <작은형제회 성 안토니오 수도원> 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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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평창 갤러리 삼세영에 다녀왔다
봄 밤에 사부작사부작, 별의 길을 따라 함께 바라보는 마음이 느껴졌다.
어떤 만남은 처음부터 결과를 품고 있다. 이 전시도 그랬다. 다를 異, 합할 合. 젊은 청년 작가와 나이든 여류 화가 서로 다른 둘이 우연히 알바하다 만나 서로 다름을 껴안고 함께 어우러진 마음을 엮어낸 전시였다.
문득 싱어게인이 생각났다. 음악하는 40대 이후 여가수가 없었는데 롤모델이 되어주셨다며 중년과 청년 여성이 듀엣을 이룬 장면. 이 전시 역시 그랬다. 앞서 걷는 이가 되어준 나이든 작가와 그 뒤를 따르다 이윽고 나란히 걷게 된 청년 작가. 두 여인의 손끝에서 피어난 작품은 협업이 아닌 삶의 리듬을 맞춰가는 동행이었다. 그 동행은 큐레이터에 의해 기록이 되고 별자리가 되었다.

너와 나의 사이, 아주 느린 별의 움직임처럼
롤모델이라는 말이 참 야속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존경의 형태이면서도 사실은 절박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해서. 누군가를 동경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고된 시절이 있고 그 숨막힌 시절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등을 보고 견딘다
그런 만남이 기록되지 않은 매일 밤의 전경처럼 휘발되어 사라질 수 있는 것을 큐레이터가 살포시 결과물로 빚어냈다. 그러나 그녀의 글끝에는 어떤 슬픔이 맺혀있다. 예술이 저 멀리 부자의 전유물이지 않냐 되묻는 사람들 앞에서 당황하고 자신의 예술을 만들지 못한 채 남의 예술을 팔고 있는 영업사원일 뿐이라는 회한과 대형화랑의 자본의 위세에 주눅들어 골목 끝에서 기획을 이어가는 고독은 어느 순간부터 존재를 분할하는 고행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우울한 마음 앞에 평창동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참 무심하다. 벚꽃은 어쩌면 봄이 지고 나서야 비로소 피는지도... 찬란해지기까지는 그보다 먼저 견뎌야 할 계절이 있다는 뜻이다.

정채희, 돌아보다 배경 연잎, 종이 부조에 나전, 색분, 90x90cm, 2025
정채희, 돌아보다 동자, 세라믹, 20x20x45cm, 2018
감만지, Hi There!, mixed media on canvas, 30x30cm, 2025
작품들은 조용했다. 소리를 낼 듯 말 듯, 감정을 품은 듯 품지 않은 듯. 나는 그 중 한 작품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색이 아니라 온도로 그려진 것 같았다. 그 온도는 손끝보다 미세하고 마음보다 먼저 스며드는 종류의 것이었다. 슬픔이 있었다. 그러나 또한 곧 위로가 되었다. 신기한 일이다. 참지 못할 것 같던 지금도 나중에는 누군가의 발끝을 덮는 포근한 무늬가 될지 모르니.
어쩌면 우리는 닮고 싶은 사람을 만나야 끝내 닮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는가보다. 밤하늘에서 마주 보고 있는 별 두 개, 혹은 시간차를 두고 같은 자리에 뜨는 계절 별자리가 있다. 누군가 이어주지 않았으면 별자리로 이름 붙여지지 못했을 만남이다. 빗방울처럼 톡톡, 물드는 붓질이 마치 속삭이는 듯하다. 뚝뚝, 사각사각. 말 없는 위로이자 보이는 시였다.
멀고 아득한 길을 앞에 두고 주저앉고 싶을 때 다른 누군가의 자취를 보면서 버틴다. 그러다 누군가의 손길 하나 미소 하나가 등을 떠민다. 혼자인 것 같지만 누군가는 너의 걸음을 보고 있다고. 그리고 그 걸음을 닮아 걷는 누군가도 있을 거라고

별은 멀리서 서로를 본다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만 한동안 서로를 몰랐다.
겉으로는 나란히 서 있지만
쌓아온 삶과 시간의 밀도는 전혀 달랐다
청년 작가는 갤러리 한켠에서 조용히 일을 했다.
중년 화가는 자신의 세계를 붙들고 있었다.
큐레이터는 매 시즌 다른 작가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 셋은 마치 계절이 달라 서로를 만나지 못하는 별자리처럼 긴 시간 같은 하늘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별들이 느리게 각을 바꾸듯
세 사람의 궤도가 교차했다
그래서 생긴 전시가 바로 이합이다.
다르기에 아름답고 다르기에 필요했던 만남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우리는 보통 별들을 한 덩이로 본다.
하지만 실은 그 별들 사이에는
빛이 닿는 데만도 수십 년이 걸리는 거리가 있다.
거리를 품고도 별들이 하나의 별자리를 이룰 수 있는 이유는 큐레이터는가 그 별을 잇는 선을 그려줬기 때문이다
실제로 별자리란 별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그은 선의 이야기다.
아무것도 없는 밤하늘에 그림을 그려
그 그림 속에
의미를 입히고 모양이 된다.
이합은 그렇게 탄생한 별자리였다.
큐레이터는 만남을 이어 별자리를 만들고 전시로 자기 그림을 그리는 셈이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 초속 5cm OST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
같은 시대에 살아도 서로 다른 궤도를 돌고 있는 우리에게
이 전시는 말하고 있었다.
누구나 누구의 별이 될 수 있고
누구나 누구의 별자리를 그려줄 수 있다고
빛이 닿지 않는다고 해서
그 별이 없는 게 아니며
보여질 때까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 괜찮다.
속도가 느려도, 거리가 멀어도, 방향이 다소 틀려도
언젠가는 만나게 될지니
아마도 별의 언어는
지금의 반짝임이 아니라
훗날 도착할 과거의 빛으로 말하는 것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