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올 환기전에 다녀왔다. 기부체납된 솔올은 강릉시립에 흡수되어 솔올과 교동 2원체제이다. 아직 네이버지도에는 업데이트 안되어 헷갈리게 되어있다.

정리하면

관동중/터미널 옆 마이어가 지은 솔올

제일고/구법원 옆 기존 강릉시립 교동

택시기사님에게 전달할 암호다. 기억하자.

강릉역에 내리니 여우비와 함께 물기 잔뜩 머금은 봄태풍이 술렁인다. 솔올의 백색공간은 마치 캘리포니아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하얗게 눈이 시리도록 반사되는 빛의 사막 같다. 선글라스가 필요할 정도로 찌르듯이 쨍쨍한 빛은 한국적이지 않아 마이어가 디자인한 전면 백색 건축에 눈부시게 반사되는 정도가 아니면 경험하기 어렵다. 환기의 후반 뉴욕시대의 작품들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에어앤사운드 2-X-73에서는 실핏줄처럼 피어오른 운무가 스르르 스며든다. 구름이 산 능선을 휘감고 자욱하게 그리움이 피어나는듯하다. 3-7-1972에서는 고국의 산등성이가 아련히 일렁이고

바다 건너 두고 온 자신의 조각들이 포개져 내려앉는다. 17-7-71에서는 전남 앞바다 자욱한 물보라 사이로 우뚝 선 절벽에 언뜻 부처의 자비로운 얼굴이 스르륵 스친다.

환기 뉴욕시대 작품은 사무치게 그립다. 매 번 볼 때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같은 색면 추상계열로 분류할지언정 로스코처럼 종교적이지 않고 뉴먼처럼 개념적이지 않다 조선에서 태어나 일제를 거쳐 산업화를 살고 존슨과 닉슨을 경험한 다층적 배경이 그림에 버무러져있다. 그 작품 심상 공간은 그리움과 햇살이, 조선과 경성과 뉴욕의 레이어가 겹겹이 쌓이는 무대다 바람은 솔솔 불고 빛은 반짝이고 그림이 조용히 말 걸어온다. 저 멀리 보이는 그곳이, 네가 두고 온 네 자신이 아니냐고

환기의 작품을 걸만한 장소로 솔올이 제격이다 미술관의 하얀 벽 마저 포함해 관객 경험을 완성한다. 단순한 여백이 아니다. 기억을 반사하고 감정을 튕기고 사라진 시간을 비추는 거울이다 환기의 그림이 우리 안에 고요하고 또렷하게 고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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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아트페스티발. 배울 점

1. 예술가는 스타일이 고정되면 내용을 바꾸면서 다양한 작품 양산이 가능하다. 스타일을 대중에게 인지시키고 학습시키는 초기단계를 지나면 나중엔 작품의 일부만 봐도 이 작가에 귀속된다는 것을 다 알게된다.

웨스 앤더슨의 대칭과 파스텔톤과 카메라패닝

봉준호의 사회계급갈등 안쓰러운캐릭터 앙상블샷

스콜세지의 마피아, 찰진 욕, 초반의 빠른 성공과 느린 몰락

나중에는 차기작에서도 그 프레임을 찾게된다

강릉에서는 홍이현숙의 꼼꼼한 만지기(북서울에서는 석불을 만졌다)+자연

정연두의 3채널 스크린으로 보여주는 음소거된 노동과정, 전면샷+공연, 전통문화(현대차와 청주상설작에서도)

호추니엔의 일제시대+2차대전, 애니+실사 레이어, 스파이, 괴이한 동물, 기억의 정치학(아트선재에서도)

2. 이양희 산조 공연이 인상적이었다.

무반주 독무로 시작해 EDM배경에 한국무용을.

마지막 3분 가이드보이스가 들어간 어릴 적 공연영상이 몰입감이 있었다.

잔잔잔 누르고 하나 돌아서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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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평창동에 있는 <작은형제회 성 안토니오 수도원> 앞이다.




https://www.samseyoung.com/


얼마 전 평창 갤러리 삼세영에 다녀왔다


봄 밤에 사부작사부작, 별의 길을 따라 함께 바라보는 마음이 느껴졌다.


어떤 만남은 처음부터 결과를 품고 있다. 이 전시도 그랬다. 다를 異, 합할 合. 젊은 청년 작가와 나이든 여류 화가 서로 다른 둘이 우연히 알바하다 만나 서로 다름을 껴안고 함께 어우러진 마음을 엮어낸 전시였다.


문득 싱어게인이 생각났다. 음악하는 40대 이후 여가수가 없었는데 롤모델이 되어주셨다며 중년과 청년 여성이 듀엣을 이룬 장면. 이 전시 역시 그랬다. 앞서 걷는 이가 되어준 나이든 작가와 그 뒤를 따르다 이윽고 나란히 걷게 된 청년 작가. 두 여인의 손끝에서 피어난 작품은 협업이 아닌 삶의 리듬을 맞춰가는 동행이었다. 그 동행은 큐레이터에 의해 기록이 되고 별자리가 되었다.


너와 나의 사이, 아주 느린 별의 움직임처럼


롤모델이라는 말이 참 야속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존경의 형태이면서도 사실은 절박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해서. 누군가를 동경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고된 시절이 있고 그 숨막힌 시절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등을 보고 견딘다


그런 만남이 기록되지 않은 매일 밤의 전경처럼 휘발되어 사라질 수 있는 것을 큐레이터가 살포시 결과물로 빚어냈다. 그러나 그녀의 글끝에는 어떤 슬픔이 맺혀있다. 예술이 저 멀리 부자의 전유물이지 않냐 되묻는 사람들 앞에서 당황하고 자신의 예술을 만들지 못한 채 남의 예술을 팔고 있는 영업사원일 뿐이라는 회한과 대형화랑의 자본의 위세에 주눅들어 골목 끝에서 기획을 이어가는 고독은 어느 순간부터 존재를 분할하는 고행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우울한 마음 앞에 평창동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참 무심하다. 벚꽃은 어쩌면 봄이 지고 나서야 비로소 피는지도... 찬란해지기까지는 그보다 먼저 견뎌야 할 계절이 있다는 뜻이다.


정채희, 돌아보다 배경 연잎, 종이 부조에 나전, 색분, 90x90cm, 2025

정채희, 돌아보다 동자, 세라믹, 20x20x45cm, 2018

감만지, Hi There!, mixed media on canvas, 30x30cm, 2025


작품들은 조용했다. 소리를 낼 듯 말 듯, 감정을 품은 듯 품지 않은 듯. 나는 그 중 한 작품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색이 아니라 온도로 그려진 것 같았다. 그 온도는 손끝보다 미세하고 마음보다 먼저 스며드는 종류의 것이었다. 슬픔이 있었다. 그러나 또한 곧 위로가 되었다. 신기한 일이다. 참지 못할 것 같던 지금도 나중에는 누군가의 발끝을 덮는 포근한 무늬가 될지 모르니.


어쩌면 우리는 닮고 싶은 사람을 만나야 끝내 닮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는가보다. 밤하늘에서 마주 보고 있는 별 두 개, 혹은 시간차를 두고 같은 자리에 뜨는 계절 별자리가 있다. 누군가 이어주지 않았으면 별자리로 이름 붙여지지 못했을 만남이다. 빗방울처럼 톡톡, 물드는 붓질이 마치 속삭이는 듯하다. 뚝뚝, 사각사각. 말 없는 위로이자 보이는 시였다.


멀고 아득한 길을 앞에 두고 주저앉고 싶을 때 다른 누군가의 자취를 보면서 버틴다. 그러다 누군가의 손길 하나 미소 하나가 등을 떠민다. 혼자인 것 같지만 누군가는 너의 걸음을 보고 있다고. 그리고 그 걸음을 닮아 걷는 누군가도 있을 거라고


별은 멀리서 서로를 본다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만 한동안 서로를 몰랐다.

겉으로는 나란히 서 있지만

쌓아온 삶과 시간의 밀도는 전혀 달랐다


청년 작가는 갤러리 한켠에서 조용히 일을 했다.

중년 화가는 자신의 세계를 붙들고 있었다.

큐레이터는 매 시즌 다른 작가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 셋은 마치 계절이 달라 서로를 만나지 못하는 별자리처럼 긴 시간 같은 하늘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별들이 느리게 각을 바꾸듯

세 사람의 궤도가 교차했다

그래서 생긴 전시가 바로 이합이다.

다르기에 아름답고 다르기에 필요했던 만남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우리는 보통 별들을 한 덩이로 본다.

하지만 실은 그 별들 사이에는

빛이 닿는 데만도 수십 년이 걸리는 거리가 있다.


거리를 품고도 별들이 하나의 별자리를 이룰 수 있는 이유는 큐레이터는가 그 별을 잇는 선을 그려줬기 때문이다


실제로 별자리란 별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그은 선의 이야기다.

아무것도 없는 밤하늘에 그림을 그려


그 그림 속에

의미를 입히고 모양이 된다.


이합은 그렇게 탄생한 별자리였다.

큐레이터는 만남을 이어 별자리를 만들고 전시로 자기 그림을 그리는 셈이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 초속 5cm OST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


같은 시대에 살아도 서로 다른 궤도를 돌고 있는 우리에게

이 전시는 말하고 있었다.

누구나 누구의 별이 될 수 있고

누구나 누구의 별자리를 그려줄 수 있다고

빛이 닿지 않는다고 해서

그 별이 없는 게 아니며

보여질 때까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 괜찮다.

속도가 느려도, 거리가 멀어도, 방향이 다소 틀려도

언젠가는 만나게 될지니

아마도 별의 언어는

지금의 반짝임이 아니라

훗날 도착할 과거의 빛으로 말하는 것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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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galeriebhak.com/?p=current-exhibition


며칠 전 오픈한 한강진역 갤러리 Bhak의 함섭 회고전에 다녀왔다. 90년대 지어진 듯한 건물의 내외관은 시청역 근처에 있었던 구 로댕갤러리 같은 느낌이 든다. 때론 어떤 추억은 공간과 함께 남는다. 과거의 향기가 언뜻 느껴진다. 오직 Bhak의 레트로퓨쳐리스틱한 공간에서만 그 느낌이 난다.


사진은 옛날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Ham Sup, One's Hometown 2354, 2023, Hanji and mixed media, 46x53cm



고 함섭 작가의 작품. 이런 전시는 스크린으로 전해지지 않는 기운생동을 느끼기 위해 직접 방문해야한다. 발터 벤야민도 함섭의 작품을 보고 아우라를 이야기했을 것이고 루돌프 오토도 같은 작품을 누미노제의 예시로 삼았을 것이다. 우리네 초가집 황토방의 숨쉬는 한지마냥 회화작품에서 바스락 들숨과 날숨이 느껴진다. 빛의 다섯 갈래, 숨의 다섯 내쉼

얇디얇은 숨결을 품은 한지 위로 겹겹이 쌓인 색과 토박이 기운이 바람처럼 일렁인다. 명상을 유도하는 색면추상이나 물성 탐구하는 평면화를 넘어선다. 손으로 두드려 누른 한지 임파스토의 두툼한 질감은 마치 진흙을 빚어 가마에 넣기 전 물레 위에서 느끼는 촉각의 무게처럼 생생하다. 보는 회화가 시각에서 촉각으로 건너가는 일종의 감각전환의 징검다리다.


언뜻 민족적 기억이 담긴 오방색이 보이는 듯하면서 자신만의 창의적 색 배합도 넣었다. 덧입힌 한지의 두툼한 마티에르감과 꼬아 비튼 줄로 감긴 조형요소가 포커스를 주고 호방한 기세를 부여한다.



이제는 독자를 거의 잃은 한자는 풍화되어 빛 바래, 작품의 메인 포커스가 아닌 캔버스 측면에 자리한다. 누군가 낭독했을 법한 한 시대의 숨소리는 이제 읽히는 글자가 아니라 마야문자 같은 옛 문명의 기호가 되었다.

한지의 울음과 먹물의 번짐은 한민족의 고난과 생존을 함께 담는다. 울어서 뭉개지 한지는 번지는 듯 뭉개지고 뭉개지는 듯 새겨진다. 화면 안에서 시간의 울림을 만든다.

고 함섭 작가는 문인화에서처럼 여백의 싯구나 문명의 이상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민화처럼 자유분방함과 파격을 추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숨을 먹인 한지 위에 질감으로서 비움을 되새기되 색의 덩어리를 방망이질하여 토속적으로 재해석했다.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는 평면위에 장단맞춰 채우는 색의 리듬과 가락으로 공간을 다시 직조한다. 질감은 말하는 듯하다. “나는 화면 속 사물이며 동시에 사물 아닌 기운이로소이다”

나아가 아울러 함섭의 그림은 ‘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내가 아니라 그림이 나를. 그림을 보는 자가 그림을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그림이 숨쉬며 나를 바라본다. 춘천 어느 마을 호수를 굽어보는 산등성에서 울창한 나무 사이로 낙하하는 빛처럼 그림의 시선은 따사롭다. 허투루 색을 얹지 않았고 덕지덕지 범벅하지도 않았다. 전통은 단순히 모방되거나 상업적으로 복제되거나 의미없이 재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함섭의 손을 거쳐 땅에서 솟은 뿌리처럼 자생했다. 그 뿌리 깊은 그림에는 한 많은 한국 땅의 아릿하고 그윽한 슬픔이 깃들어 있다.



과연 한국적이란 것이 있는가? 7-80년대 선대 예술가들은 고민했다. 이 전시는 그 화두를 삭혀온 누군가가 제출한 하나의 해답이다. 매 세대는 한국적이란 것이 과연 무엇일지 선대의 해답을 참조하고 트렌드와 호흡해 자신의 답을 제출해야하겠다.

전통이 스스로 숨결을 틔우고 현대 속에서 다시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다. 단순한 양식적 변형이 아니라 감각 구조의 이탈과 전환 그리고 전통 의례와 상징이 새로운 시각 언어로 재창조되었다.

봄 밤의 바람결처럼 장구의 가락처럼 굿판의 장단처럼 한지 위로 스민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쩐지 응시하고 있으면 오래 묵혀 깊은 맛이 은근히 우러나는 된장국을 먹은 것처럼 속이 뜨끈해진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숨그림의 의미일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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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 머핀에 다녀왔다.


Hernan Bas

The space between needful & needless

헤르난 바스 <필요와 불필요 사이의 공간>

2025년 4월 10일 - 5월 31일 April 10 – May 31, 2025


https://www.lehmannmaupin.com/exhibitions/hernan-bas7/selected-works

리만 머핀 서울 2층

Hernan Bas, 비(rain), 2025



작품 하나를 봐서는 뜻을 알 수 없고

설명을 읽어야 신화와 환상의 구조를 빌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육발고양이의 관리인(헤밍웨이 하우스), 2025

라는 작품은 헤밍웨이 반려동물의 후손인 희귀한 고양이를 돌보는 일이다.

고양이가 헤밍웨이 하우스의 것인지는 설명을 들어야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휙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상적인 작품이다.


이렇게 회화에 신화와 초자연적 이야기를 부여해서 네러티브를 만드는 작업이 눈에 밟힌다.


언뜻 일상적인 장면을 그리는 것 같지만 작품 창작 동기와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한 겹의 이해가 더 쌓여져서 작품을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일종의 브랜드 네이밍, 기업 철학과도 같다.


지난 파운드리전에서도 그랬고 Ulrike Theusner: Sweet Bird of Youth 17 JANUARY 2025 - 8 MARCH 2025


최근 탕 전시도 그렇다. Ellen Sheidlin : Unconditional 3. 22 – 5. 3, 2025



2. 헤르난 바스의 화풍은 아메리칸 고딕을 닮았다.



Grant Wood, American Gothic – 1930 – 78 x 65,3 cm






반려동물 전문 점쟁이의 딜레마, 2025

라는 작품은 암탉이 모종의 이유로 검은 알을 낳기 시작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반려동물 전문 점쟁이가 소환된 장면을 상상한다.



홀리데이 스피릿, 2025

이라는 작품은 탄생과 기쁨을 상징하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망자와 소통하는 도구인 위자보드를 대비시키고 있다.



3.

작품을 먼저 보고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내가 작품을 통해 무엇을 느끼는지 시각적 분석을 한 다음에

작품 외적 정보를 접해야한다.


그가 쿠바 출신 마이애미 거주하는 작가라는 것

작품에서 사랑, 구애, 그리고 죽음의 의식에 참여하는 중성적 남성을 자주 등장시킨다는 것

젊음과 성인, 순수함과 경험, 공사의 경계를 다룬다는 것


내가 보고 느낀 것과 연결시키는 것이 그 다음에 해야할 작업이다.

왜 그렸을까? 무슨 의미일까? 를 나의 언어로 표현해본 이후

설명과 함께 매칭시켜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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