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 전시는 대개 8월 말에 열러 12월까지 계속 해서

땡볕일 때 움직이지 않고 선선해지면 여유있게

움직이는 게 좋다고 몇 달 전 글에 썼다


혹시나 얼리 어답터, 도파민 중독자여서 오픈하자마자 갔다면

지금은 보릿고개 구간이다


메이저 전시는 다 갔고

올해 말에 열릴 전시가 아직 다가오지 않았으니.


8월에 열려 10월에 마무리한 

가고시안 무라카미 때문에 APMA

금호 유현미 때문에 국현미와 아트선재는 빨리 갔을텐데


그럼 국중박 멧, 세종문화회관 샌디애고, 송은미술대상 등

마지막 피날레가 오기 전까진

청주, 과천, 광주, 대구, 대전 등 서울 외곽과

평창 북촌 서촌 을지로 등의 강소 갤러리를 돌아 추궁기를 버텨야한다


국현미 올해의 작가상+김창열+하이라이트(공통 12.21까지)

리움 이불+셔틀로 호암 루이즈 부르주아(모두 26.1.4까지)

아모레퍼시픽 마크브래드포드(26.1.25)

K&L 시대전술+국현미과천 젊은 작가+근현대2개

국현미덕수궁과 서울시립 강령

예전오르세, 세화노노탁, 부산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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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립미술관 전시에 윌리엄 켄트리지 있었다

작년 여름 대만 타이페이 시립미술관에서 한 대규모 회고전은 갔다.

작년 전남도립미술관 지하 오른쪽에서 했었다.

올해 5월 강남 GS아트센터에서 한 공연은 못 갔다.


청주시립미술관에는 국현미 2022 올해의 작가상 최우람 작가 작품도 있었다. 그 작은 방주의 모티프를 공유하는 리움과 현대화랑에 있었던 쿠스토스 카붐(2011)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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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미술관 <차원확장자: 시·이미지·악보·코드>전시가 어제 열렸다.


내일 개천절에도 열고 추석당일만 휴관이지만 반경 3km 이내에 들릴 수 있는 다른 갤러리가 없어서 벌처럼 날아서 정확히 쏘고 빠져야한다.


근처에 존재하는 다른 곳은 청담 화이트큐브 옆 호림미술관 신사분관이 아닌 신림본관과 서울대박물관 정도일까. 어쨌든 교내로 한 번 들어가면 쉽게 나오기 어렵다. 안에 박혀서 학식을 먹으며 연구에 몰두하기는 좋은 환경이다.


원래 동숭동 혜화역에 있던 서울대의 시위대를 제한하기 위해 골프장 개발부지이던 곳으로 이전했던 역사가 있다. 신림/서울대입구/낙성대역 어느 루트로 나와도 30분은 걸린다. 윗공대에서 관악산을 넘어 과천으로 빠지는 무병장수를 위한 전설의 출퇴근코스를 타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나마 미술관은 교문 앞에 있다.


1주일 남짓했던 지난 여름전시 굿모닝조지오웰과 비슷하다.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있다. 안 갈 수 없다. 그러나 관람시간은 짧게 끝나고 인스타사진용은 아니다


이상의 실험적 시

백남준의 텍스트 악보

구자명의 바이러스

김호남의 신호와 울림

김은형의 신화적 벽화

정수정의 회화

윤향로의 유사회화

기민정의 종이와 유리

전소정의 이상의 시 모티프 영상

코딩 구현 작품 등


이상은 100년은 빨리 존재한 이과계통 시인이다. 그의 시를 물리학적으로 분석한 논문이 나왔다. 건축, 수학, 물리를 통섭하는 그의 때 이른 생각을 식민지 지식인들이 쫓을 수 없었다.


백남준은 50년 빨리 존재한 선구자다. 전자 초고속도로와 디지털 정보통신 사회를 미리 대비시켰다.


구자명은 2024년 겨울 제24회 송은미술대상전에서 보았다. 미래적 작가다.

2025년 갤러리SP에서 한 화학식구조로 만든 냉매

2021년의 소프트웨어의 성장과 형태, 2020년의 분자생물학 모티프의 작품과 웹사이트 구조의 편집방법개발 같은 독특한 생각을 선보였다.


김호남은 기흥 백남준센터의 랜덤액세스에 출품한 메아리 같은 디지털 버퍼링 작업 모티프와 같은 작품으로 지연된 소리와 울림에 천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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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미술관 <차원확장자: 시·이미지·악보·코드>전시가 어제 열렸다.


내일 개천절에도 열고 추석당일만 휴관이지만 반경 3km 이내에 들릴 수 있는 다른 갤러리가 없어서 벌처럼 날아서 정확히 쏘고 빠져야한다.


근처에 존재하는 다른 곳은 청담 화이트큐브 옆 호림미술관 신사분관이 아닌 신림본관과 서울대박물관 정도일까. 어쨌든 교내로 한 번 들어가면 쉽게 나오기 어렵다. 안에 박혀서 학식을 먹으며 연구에 몰두하기는 좋은 환경이다. 


원래 동숭동 혜화역에 있던 서울대의 시위대를 제한하기 위해 골프장 개발부지이던 곳으로 이전했던 역사가 있다. 신림/서울대입구/낙성대역 어느 루트로 나와도 30분은 걸린다. 윗공대에서 관악산을 넘어 과천으로 빠지는 무병장수를 위한 전설의 출퇴근코스를 타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나마 미술관은 교문 앞에 있다.


1주일 남짓했던 지난 여름전시 굿모닝조지오웰과 비슷하다.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있다. 안 갈 수 없다. 그러나 관람시간은 짧게 끝나고 인스타사진용은 아니다


이상의 실험적 시

백남준의 텍스트 악보

구자명의 바이러스

김호남의 신호와 울림

김은형의 신화적 벽화

정수정의 회화

윤향로의 유사회화

기민정의 종이와 유리

전소정의 이상의 시 모티프 영상

코딩 구현 작품 등


이상은 100년은 빨리 존재한 이과계통 시인이다. 그의 시를 물리학적으로 분석한 논문이 나왔다. 건축, 수학, 물리를 통섭하는 그의 때 이른 생각을 식민지 지식인들이 쫓을 수 없었다.


백남준은 50년 빨리 존재한 선구자다. 전자 초고속도로와 디지털 정보통신 사회를 미리 대비시켰다.


구자명은 2024년 겨울 제24회 송은미술대상전에서 보았다. 미래적 작가다.

2025년 갤러리SP에서 한 화학식구조로 만든 냉매

2021년의 소프트웨어의 성장과 형태, 2020년의 분자생물학 모티프의 작품과 웹사이트 구조의 편집방법개발 같은 독특한 생각을 선보였다.


김호남은 기흥 백남준센터의 랜덤액세스에 출품한 메아리 같은 디지털 버퍼링 작업 모티프와 같은 작품으로 지연된 소리와 울림에 천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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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DP 바스키아전은 좋다. 못 보던 작품도 있고 갯수도 많으며 회화, 드로잉에서 조각보, 조형, 설치까지 다양하다. 으레 반달리즘과 공공예술이라는 점에서 뱅크시와 연관겠지만, 바스키아와 접속할 수 있는 한국미술도 있다고 생각한다. <제시이야기> <옌안송>의 박건웅이나 경기도미술관의 한국현대판화 60년전(3-6월)이다. 굵은 스트로크와 같은 기법적 연관성, 판화의 대량생산과 공공성, 메시지 중심적 성격, 민중예술 지향에 주류에 반대하는 혁명적 성격 같은 요소가 그렇다.


2. 한국미술전에서 케데헌을 언급하지 않는 곳이 없다. 케데헌과 한국미술은 아주 느슨한 관계만 있고 이를 정교하게 연결해야하는데 대개 한국문화라는 거대한 맥락을 통해 니것도 내것하는 식으로 말하고 글을 쓴다. 그런 글을 읽으면 토가 나올 것 같다. 협소하고 폐쇄적 생각에 갖혀있다.


3. 넓고 개방적인 시야는 돈이 많아 유학을 가야지만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는 그랬다. 


외국을 가야지만 외국어를 배우고 다른 사고방법을 배워 새로운 시각으로 자기와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강제적으로 공간과 문화를 이동해 이방인으로서 자기를 재정초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서 비주류로서 뿌리를 내리고 살기는 쉽지 않다. 내가 태어난 땅에서 해외경험의 유익만 추수할 수는 없을까? 


디지털 시대에 즉각적으로 유통되는 지식정보를 빠르게 습득하기 위해 외국어를 배우고 외국자료를 섭취하는 것이 한 방법이다. 그러나 현지경험 없이 번역을 통한 완전한 이해는 한계가 있다. 내 다리로 가고 내 눈과 귀로 보고 들은 체화된 경험적 지식은 더욱 아니다. 혹은 일본처럼 전문적이고 거대한 번역집단을 통해 한 번 필터링된 지식을 섭취하는 것도 방법이다.


2000년대 외고가 우후죽순 만들어졌다. 국제유학반을 목표로 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영어전형 등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외국어 고등학교지만 사실 입시명문의 다른 이름이었다. 20년쯤 지나고보니 외고출신인물의


진로를 통해 앞서 말한 출생지에서 사춘기 민감한 시절에 부모님과 함께 안정적으로 살며 외국어 공부를 통해 해외경험의 유익만 취득하는 효과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장단점은 여러 개 있으나 굳이 말할 필요는 없고, 중립적인 의미에서 특별한 현상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실제 가서 살아보지 못한 자의 외국에 대한 베일에 쌓인 그리움과 이를 해소하기 위한 텍스트 기반의 이해와(영어로 된 논문) 결국 제도적으로 해결보고자 하는 유학에 대한 동경이다.


외고의 국제반이 아닌 국내반(수적으로 더 많다)은 실제 외국의 국제학교에 살았던 자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이 던지는 현지 생활, 현지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약간의 열등감 섞인 그리움이 더 증폭된다. 사실 부모님따라 잠깐 산 것에 불과한데도, 그들에게 결여된 감각이다. 아예 모르면 아무 느낌이 없는데, 베일처럼 알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감각이다. 


대학입시에서 국제학과를 선택하기도 하는데 외국고를 나온 학생을 만나며 이 감각은 더 증폭된다. 외국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모르는, 블라인드에 쌓여있는 것 같은 감각이. 여행이나 교환학생으로 인한 단기체류는 청소년 때 정서적 성장기에 주변의 모든 것을 쫘악 흡수하던 그 감각과 다르기도 하고 이전의 글로벌 호황기가 아니라서 채울 수 없는 결핍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쨌든 외국에 나가고 싶어서 유학을 가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생각하는 것과는 꽤 다르다. 절대 말을 하지 않지만 부적응으로 귀국하는 이들도 꽤 있다. 일본의 프랑스병을 겪는다. 일본인 5명 중 1명꼴로 가지고 있는 여권을 어렵사리 발급받아 비싼 돈을 들여 현지에 도착했는데 판타지와 픽션에서 그리는 그 아름답고 낭만적인 프랑스가 아니라 빈대 나오고 냄새나고 아랍어가 들리는 인종차별하는 프랑스라는 것에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과호흡을 하는 정식 증후군이다. 생각과 다름을 인정하고 적응할 수 있다면 계속 살 수 있다.


3. 나는 유학이라는 경험이 주는 부수적 효과가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유학을 가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외국의 명문대를 나왔어도 지금부터 말할 이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그 돈과 시간이 아무 의미없다고 생각한다. 학벌이라는 멋있는 네임밸류는 자신의 본질이 아닌 피상적 악세사리에 불과하고 삼선 쓰레빠에 해진 츄리닝을 입고 반클리프 백에 구찌 귀걸이를 해봐야 미스매치될 뿐이다.


그 유학이 주는 부수적 효과는 한국인으로 동질집단으로 구성된 한국사회문화에서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이심전심의 고맥락문화에서 떨어져 철저하게 분리된 개인으로서 나를 설명하고 말로 이해시키는 경험이다. 작게는 나의 취향과 생각과 내가 원하는 바와 싫어하는 바를 룸메이트에게 일상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하나이고, 크게는 한국인으로서 나와 내 작품이 학문 공동체에 무엇을 기여할 수 있을지 학술 언어로 설득하는 SOP의 과정이 있다.


오랜 전통문화와 관습이 강한 고맥락 사회언어적 공간인 교토에서는 "아드님이 피아노를 참 잘 치시네요"라는 말이 "피아노 소리가 시끄러워 방해가 되니 치지 말아달라는 말이다" 비슷한 경험을 한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있으면 이심전심이 되고, 거시기가 거시기하니까 거시기하다고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다. 지시어의 정확성이 아니라 학습화된 맥락과 표정과 제스처 같은 비언어적 표현이 커뮤니케이션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유학을 가면 내가 말하지 않으면 나를 먼저 적극적으로 이해해주지 않는 소수자 외부인이 되어서 나의 모든 것을 철두철미하게 낯선 언어로 설명해야만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굳이 이렇게까지 일일히 말해야해? 싶지만 그렇게 해야한다. 우리나라도 인도네시아 유학생의 고충에 대해 모른다. 이슬람과 무슬림과 아랍은 다 다른 카테고리라는 것을 스스로 한국어로 풀어주지 않으면 주변은 모른다. 이런게 내가 나고 자란 출생지에서만 살아왔던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런게 부분이 사소하게 느껴진다면 외국에서 살아도 좋다. 앞서 말했던 이들이 부러워한 청소년기 아이들은 이 부분이 짜증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되었는데 누구든지 서로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학창시절에는 신경쓰지 않아도 아주 자연스럽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간의 차이도 그렇게 심각하지 않은데다가 차이가 문제라고, 다름이 틀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시기다. 나이가 들어 외국에 가면 익숙해서 편안하던 관습에 교란이 오고 앉은 자리가 불편해지기 때문에 다름은 틀림이 되어버린다. 한국어른들이 다르다를 틀리다로 혼동해 사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끼리 신토불이하면서 사는 것이 어쩌면 더 행복할 사람은 외국을 안 가는게 적절하다.


이 외국경험의 부수적 효과는 한국을 어떻게 소개할지 문제와 연관이 된다.


그동안 한국미술전시 정말 많이 갔다. 나는 전시 소개  채널이 아니라 간 곳을 다 올리지는 않지만 올해 5월만해도 전국 117군데를 갔고 한국미술전시도 꽤 된다.


그런데 대개 한국미술전은 이런 네 가지 이야기를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1) 한국화는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변화)

2) 한국화는 옛날 것이 아니다(고루하지 않다) (전통과 현대의 융합)

3) 한국화는 이런 그림도 그릴 수 있다(기법, 소재의 혁신)

4) 드디어 한국도 세계에 인정받는다.


유명한 APMA, 국현미 덕수궁, 국중박, 리움호암 같은 곳도 갔고 인사동 거리의 수많은 소규모 화랑도 갔다. 예컨대 인사아트센터 지하 제주갤러리의 4.3사건 거대 드로잉(김영화, 7월), 세화의 건식벽화(오기영, 9월) 같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도 갔다.


대전시립미술관 이동훈미술상 본상 수상의 최예태(9.17~)는 일월오봉도 모티프에서 해와 달을 1:2의 비율로(1/3:2/3) 분할한 독특한 리듬도 보았고


서촌 이상범가옥의 손동현(5-11월)도 그전에 송은부터해서 수많은 곳에서 봤었고


선혜원의 김수자 보따리 작품도 보았는데 심지어 다들 모르는 2024년 작년 갤러리 세줄의 자수 작품도 봤다.


김지평 작가의 경우도 지금 하고 있는 국현미 올해의 작가상 뿐 아니라 혜화역 아르코 2층에서도 하고 있다. 전시장에서 큐레이터 2명과 나눈 메일 인터뷰집도 읽었다. 2024년에는 경기도미술관 민화전 2층 안쪽, 부산비엔날레 초량재 단독주택 골목 1층에서도 봤었다.


생각나는 예시만 브레인스토밍해도 이렇다. 곳곳을 최대한 보았다는 증거다.


그런데 이 모든 곳에서 한국미술전시 소개는 내수용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영어 번역의 문제가 아니다. 외국에 어떻게 소개할 것인지에 대한 부분, 외국인이 읽었을 때 과연 K란 무엇인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 결여되어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류 현상과 그 성과에 대해 대부분의 주간지에서도 위의 네 가지 이야기를 넘는 경우가 없다.

국뽕, 고양감, 한류 확산으로 인한 산업 성장, 현지 진출, 현지 행사, 김밥 수출, 굿즈 실적 등등.


네 카테고리를 한국화를 한국으로 바꾸면 거의 같다.

1) 한국은 이렇게 바뀌었다

2) 한국은 오지가 아니다

3) 한국은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4) 드디어 한국도 세계에 인정받는다.


해외 주간지, 잡지에서 기술적으로 한류 확산이라는 현상에 대한 구절은 떼와 편파적으로 보도한 기사는 있되 그들의 관심사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인용한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누구나 케데헌과 케이팝을 말한다. 자랑스러운 일은 맞다. 세계화 초기에 변방오지 취급을 받던 불과 20년 전을 생각하면 상전벽해다. 괄목성장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케이팝의 불편한 진실은 함구한다. 한국계 미국인이나 외국대학에서 한류를 연구하는 여러 논문에서 읽고 다큐도 본 결과 이런 부분도 있었다.


팬덤에는 퀴어도 포함되고 BTS를 초기부터 응원한 수많은 미국 인플루언서 중에는 게이도 있다는 점. 한국남돌이 결혼 안하고 무해한 남성성을 전시하는 것에서 몸과 배에 검은 털이 많고 자신을 자궁이자 성욕해소수단으로만 보는 수많은 마초적 남성성에 대항하는 정서적 서사로서도 이해한다는 점.


한국여돌을 미성년자라고 생각한다는 점. 킴 카다시안 같은 어른 여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 따라서 동양여성을 좋아하는데에는 일부 소아성애도 결합되어 있다는 점. 실제로 유럽에서 한국입양아를 많이 데리고 왔는데 이제 성인이 된 그 입양아들은 어렸을 때 남녀를 막론하고 양아버지에게 펠라치오 같은 성폭행을 당했다고 증거한다는 점.


경찰관이 수염을 안 기르면 터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에서는 한국보이밴드는 남성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점. 이들을 좋아하는 여성들을 멸시한다는 점,


혹은 케데헌을 PC주의 없는 디즈니라고 이해한다는 점.


그러니까 한국과 외국이 케데헌을 인식하는 방법은 차이가 있다.


케이팝의 성공신화와 한국의 세계적인 인정과 경제성장만 생각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이야기다. 


허나 한국문화의 세계적 열풍만 보지 않고 다양한 이면도 이해해야지 한국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건설적으로 논의해볼 수 있다.


왜 한국을 원하는가? 


한국을 좋아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한국은 무엇을 할 수 있나? 


케이팝이 세계적 담론에 철학적으로 무엇을 기여할 수 있나? 


그래야 일시적 현상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된다


케이팝이 세계적 담론에 철학적으로 무엇을 기여할 수 있을지 말이다. 그래야 일시적 현상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된다

출생지에서 살아가지만 외국어를 배우고 외국자료를 습득하는 이들이 우리를 외국에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 어떻게 접근해야하는지에 대한 방법과 같은 맥락이다. 대개 영어독해를 통해 외국→한국으로 외부→내부로 이해했던 이전의 흐름에서 한국→외국으로, 내부→외부로 우리를 설명하는 단계다.


저기는 선진국이고 저쪽 문화와 기술은 발달되었으므로 우리가 잘 이해해야해라는 맹목적 습득에서, 우리도 선진국이고 저쪽에 줄 것이 있으니까 저쪽의 니즈과 생각을 감안해서 우리의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알려줘야해, 라는 상호이해로 전환하는 것이다.


좋은 롤모델은 있다. 이미 해외에 한국을 잘 설명해온 선진 작가들이다 .예컨대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하면서 쌍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자기 작품 세계를 국내외에 설득력있게 표현해 온 김수자는 검정색을 말하면서 내재된 시간성과 전통의 오방색이라는 개념어휘와 전통어휘를 동시에 사용한다. 보따리 작업을 통해 우주관계와 몸과 여성성과 존재론을 말한다. 한국성이라는 폐쇄된 출신 공동체를 언급하는 동시에 보편적인 공동체인 여성성을 논한다. 남성 작가는 못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여성성 말고 선택할 수 있는 카테고리가 더 많고 (오히려 여성은 여성성이라는 글로벌 담론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몸-마음 이분법을 해체하고 소수자를 포용하는 이해를 탑재할 수도 있다


관건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자산을 비평언어에 적합하게 그리고 세계와 소통될 수 있도록 조탁하는 것이다. 유학생은 동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온 다른 유학생의 크리틱과 설명방법을 접하면서 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간접적으로 체험한 반면, 예컨대 외고 국내반출신 국내대 국제학과는 영어는 알아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


무엇이든지 빠르게 되지는 않고 조급할 필요는 없다. 한국과 한국화는 그런 어휘를 이제 만들어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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