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미술관 올해 첫 전시 <오류를 거니는 산책자>전시가 열렸다. 3월 말까지다. 역에서 멀고 근처 다른 전시장이 없어서 동선이 단조롭고 단독으로 가야한다. 개강하고 사람이 몰릴 듯하다.


공학자가 제작한 AI와 디스플레이와 반도체는 말끔히 외적으로 완벽해보이는 신제품을 판매하는 한편 예술은 미드저니가 만든 어그러진 이미지마저 과정으로서 전시한다. 


디지털 세상의 오류는 제거해야 할 결함이 아니며 AI는 경이로운 거짓이라고 선언하는 전시서문이 흥미롭다. 이분법적으로 인간은 선, 로봇은 악이라고 하거나 기계는 완벽, 인간은 오류라고 하지 않는다. 되려, 멈춰서 질문을 여는 오류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피에르위그, 히토슈타이얼, 왈리드 라드, 롤라(북서울), 백남준아트센터, 교각들(상희)의 화두와 닮았다


오류는 즉각적 해석이라는 강박을 멈추고 미정리된 과거의 잔여를 음미하게끔한다. 메시지 전달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지각을 재조정하는 훈련과정이자 의미 생산매개로서 기술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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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회 송은미술대상전 지하, 가벽 뒤 초록색 비니와 함께 낙서처럼 적혀있던 나의 세상 악보, 검색해보니 이런 포크 음악이었다.

작가는 시각예술가, 뮤지션이자 기획매개자로 활동하고 있는 봄로야다. 사회에서 소외된 이에 주목하는 작업을 한다. 이런 이슈를 다루는 사람은 귀하다. 리플렛에서는 ˝비인간을 포함한 몸을 가진 주체가 사회 집단으로부터 통제될 때 내면화되는 모순과 저항에 주목˝한다고 하였다.

전시장을 다니는 이는 크게는 (유럽)회화파와 동시대미술파로 나뉠 것 같다. 색채를 중시하며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이와, 미술을 사유의 매개체로 생각하는 이다. 반드시 이분법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고 경향이 그래보인다. 전자는 예전, 국중박 등을 자주 다니고 후자는 MMCA, 서울시립, 아르코, 두산, CR콜렉티브, 프로젝트사루비아를 많이 방문한다.

컨템포러리 미술은 돌아와서 보는 것도 어렵고 글도 난해하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주제도 광범위해서 신체, 노동, 전쟁, 퀴어,비시각(청각, 후각), 디지털, AI 끝도 없다. 컨템포러리 미술을 대할 때 느끼는 피로감이 분명히 있다.

작품은 불편한 질문을 어렵게 던지며 우리의 생각의 흐름과 태도를 조정하라고 권유한다. 의도적으로 혼란을 유발하면서 소격효과로 우리를 둘러싼 시스템 전체를 메타인지하기를 요청한다. 익숙한 의미작용과 빈번한 패턴을 어긋나게한다.

이를 해석하는 언어도 평범하지 않다. 작품을 만드는 작가와 이를 해석하는 큐레이터/평론가의 언어가 일치하는지, 그들이 같은 말을 하는지, 내가 그들과 같은 것을 보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복잡한 담론, 정치적 맥락, 기술적 전제, 윤리적 입장을 빠짐없이 호출하다 보니 문장은 방어적으로 변한다. 독자를 설득하기보다는 오해를 예방하려 글을 쓴다. 영어로 읽으면 차라리 쉬운데 번역투의 문체가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관람자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떠안는다. 마치 따라잡지 못하면 창피를 당하는 세미나에 멀뚱히 앉아 있는 기분이다. 정답은 없고온갖 해설지만 난무한다. 최종적으로 검토해주는 이도 없어 내 생각이 맞는지도 확정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이 동시대 미술의 묘미다. 완성된 세계관을 제시하지 않는다. 작가는 특정 화두를 끌어안고 우리 대신 이슈와 씨름하면서 살아가며 그 과정, 그리고 생각의 부산물을 전시한다. 당연하게 여겨온 접근방식 자체를 어색하게 만든다. 왜 이것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나, 왜 지금 이 주제인가, 왜 이 매체여야 하는가. 답보다 질문이 오래 남고 감상보다 태도가 축적된다.

관객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전시장을 나선다. 미완의 상태를 견뎌야한다.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감각 속에서 배움이 슬그머니 움튼다. 어느 날 전혀 다른 맥락에서 다시 말을 걸어올 때 멈칫, 하며 나의 생각이 달라져있음을 발견한다.

봄로야, 〈나의 왕국(The Kingdom)>
가벽에 펜 (원곡: 황푸하)

곡은 황푸하 나의 세상
https://www.youtube.com/watch?v=UuDWjWkzs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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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전치사는 직역하기 보다 우리말로 옮길 때 술어로 바꾸면 적절하다.

국중박 로버트리먼전에 있는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유명한 피아노를 치는 두 소녀는 영어로 two young girls at the piano다. at을 '~에서'라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치는(playing)'이라고 용언 어간에 관형사형 어미를 붙여주여야 우리말에서 자연스럽다.

같은 영어전치사지만 문맥에 맞게 다르게 바꿀 때도 있다. 쥘 뒤프레의 소 떼가 "있는(with)" 리무쟁의 풍경(Landscape with Cattle at Limousin)이고 폴 시냐크의 주전자를 "그린(with)" 정물(Still Life with Jug)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한 단어에 다층적 뉘앙스가 있고 번역가는 문맥의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적절한 단어 하나를 그물로 잡아 건져낸다.

간단하 글자지만 우리말로 풍성하게 풀어야할 때도 있다.

알베르 마르케의 식민지에 파견된(of) 연대 부사관(Sergeat of the Colonial Regiment)이고 이젤 앞에 선(and) 마네(Manet and His Easel)다.

그리고 같은 유럽어족이지만 영어와 불어의 전치사도 기계적으로 치환되지 않고 각 언어권의 원어민 나름대로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감각이 있다. 언급한 르누아르 작품 불어로는 Jeunes filles au piano로, au는 à+le, 즉 at+the를 부드러운 발음을 위해 축약한 말이다. 그럼 영어의 앳과 불어의 아가 늘 같은가? 그렇지 않다.

분홍색과 검은색 모자를 쓴 소녀는 Jeune fille au chapeau rose et noir로, 불어의 à가 영어에선 in을 바뀌어 in a .. hat이 된다. 안경을 "쓴"도 à lunettes고

영어는 in glasses지만 때에 따라 wearing glasses도 쓴다.

at이나 with을 à가 아니라 전치사 없이 분사형태로 바꾸기도 한다. 르누아르의 landscapes with a woman은 산책하는 여자와 풍경(Paysage et femme jardinant)이다. with a woman이 아니라 walking woman이다.

그러니 같은 유럽어족이라고 영어의 at과 불어의 à가 기계적으로 치환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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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익힘정도는 괜찮았는데 순위를 매겨보자면

2번 세종 미국 샌디애고전 65점 (가장 광범위)

3번 국중박 미국 뉴욕메트 로버트리먼전 81점 (가장 바이럴, 큐레이션 좋음)

4번 마이아트 이태리 카포디몬테 국립미술관전 74점 (19세기 초점, 아시아최초전시, 모르던 이태리화가들 다수포진)

1번 예당 프랑스 오랑주리 오르세 르누아르 세잔전 유화는 51점 (피카소 2점 제외 르누아르 세잔 2명 차이에 초점)

6번 국현미과천 소장품전 44점 모네 수련, 르누아르, 달리, 피카소 (그외 현대미술비중 높음, 과천은 무조건 하루종일)

5번 노원아트 예루살렘 소장품전 21점 모네 르누아르 고흐 세잔 (작품수 가장 적음, 그러나 밀도 있고 메시지가 수렴하는 전시)

순으로 좋았던 것 같다

오르세 리뉴얼 중에 순회로 한일에 같이 왔는데 확실히 일본쪽이 더 좋은 것 같다. 자체 소장품도 있고.

국현미와 국중박은 평일 오전에 가야하고 주말은 관람환경이 확실히 안좋음.

순위매김에 우열은 없고 각자 기준점을 드러내준다고 생각

한국을 배회하고 있는 서양화전 6전에 대한 작은 코멘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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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I가 득세해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트렌드 속에, 기술적 신체의 반대항으로 퀴어성을 부각하는 한 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1) 올해 신간 신간이 나오는 해방일지의 정지아 작가는 퀴어 가족을 다룬다.

2) 아트선재 이번 장소특정적 전시 적군의 언어가 끝나면 다음은 퀴어작가 70명 단체전으로 알고 있다.

3) 한편 이미 메이저전에 퀴어작가의 약진이 도드라진다.

예컨대 국현미에 OLED 프로젝트로 설치된 아가몬의 작가이 추수는 퀴어성을 다룬다.

APMA 마크 브래드포드도 흑인퀴어하층이라는 중첩된 소수자성을 다루었다.

이 전시들을 다루는 사람들이 대개 넓은 지하공간의 개방성과 높은 해상도의 화면, 엔드 페이퍼 바닥을 강조했지만 그것이 작품을 만든 작가의 핵심의제는 아니었다.

어쨌든 한국인들에게 작가의 퀴어정체성을 강조하지 않고 예쁘다 좋다 같은 주변적이나 일반적인 심성을 건드리면서 충분히 이 글로벌 의제를 다룰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


LGBT를 넓은 의미로 확장해 이분법으

로부터 도주, 몸에 대한 탐구(바디올로지), 장애와 노인 등 소수자성에 대한 주목으로 생각한다면


1세대 여성조각가이자 90대(1935년생)인 김윤신의 첫 여성작가 개인전을 여는 호암의 대규모 회고전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90대를 뜻하는 영단어 nonagenarian는 공교롭게도 할머니를 이르는 이태리어 nonna와 비슷하다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다루는 뉴미디어 아티스트 린 허쉬만 리슨의 서울시립전도 너무 유리되지 않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의 여성들 연작이 대표적


AI자동화 대척점에 있는 불완전한 인간성에 대한 주목이다


옛날에도 포스팅한 적 있는데 특정시대에서 인정투쟁하던 두 시대정신은 한 쪽을 말살하며 끝나는게 아니라 의미를 잃으며 흡수되어 끝난다.

서로 전쟁하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싸움은 소련붕괴로 끝난 것처럼

젠더갈등도 로봇과 버추얼 아바타의 등장으로 인해 차라리 인간이 낫지하고

"야 엄빠때는 퀴어라도 사람을 사랑했어 진심으로 비인간을 사랑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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