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 언박싱프로젝트가 하반기 가장 지적으로 흥미로운 전시 중 하나였고 곧 끝난다고 하는데 너무 생각이 많아 쓸 시작도 못하고 있다.

참여 작가 태반이 다른 갤러리에서 한 두 번 봤던 사람들이어서 더 재밌었는지도 모르겠다.

학부4년 배운 이들의 졸전이 아니라 현직으로 활동하고 있고 실제로 작품도 팔리는 중량감 있는 작가들의 대형 졸업작품 전시회같은 느낌이었는데

흑백요리사나 더인플루언서 같은 경연 프로그램의 첫 방송 때 어 이 사람도? 이 사람이? 하는 느낌이었다고 하면 좀 비슷하려나

그러나 토너먼트가 아니고 수상자 선정하며 우열관계가 나뉘는게 아니라 감상은 편했다. 만약 스타트업이었다면 이 PM 너무 날로 먹는거 아냐? 하며 이윤이라는 공동목표 속에 노력의 정도를 상호 비판하고 그랬을텐데 그런 점에서도 자유롭다. 누구는 1시간만에 완성할 수도 누구는 상당한 시간을 들였을 수 있지만 의미가 없다. 모두 같은 크기와 물성이 고정된 상태에 그 작가가 무엇을 하고 시그니쳐가 무엇인지 각인이 되면 그만이니까. 다만 그동안 풀었던 유형이 모두 종합적으로 랜덤하게 나오는 파이널 모의고사같기에 이 전시로 공부를 스타트하기엔 무리고 지난 몇 년간 이 작가군을 직간접적으로 개인전 단체전을 통해 접해왔어야 지적 호기심 배가된다

단 한 명도 같은 방식으로 목재를 사용하고 디스플레이한 작가가 없었다

기억컨대 합판이 주제가 되기도 형식이 되기도 작은 캔버스로 쓰기도 자석을 붙여 퍼즐로 만들기도 아이패드를 넣기도 고정대로 쓰기도 비즈나 종이를 넣어 보내 훨씬 부피가 큰 설치미술이 되기도 합판을 잘게 자르기도 장작과 함께 세워놓기도 경첩을 이어 병풍처럼 만들기도 적층하기도 적층하며 나무로 잇기도 기하학 주제를 드러내기도 2판을 모아 영상을 쏘는 스크린으로 활용하기도 4판으로 쓰기도 전혀 다른 알루미늄 물성을 덧입히기도 오브제를 넣기도 그리기도 포장이 되기도 작품의 일부가 되기도 편지가 있기도 작품을 올려놓는 받침대가 되기도 기계가 들어있기도 화면이 비틀리며 삐어져나오기도 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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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에서 사이언스파크로 상전벽해를 겪은 마곡나루에 위치한 서울 식물원에 초등학교 교실 마냥 빼곡히 심어져있는 이국식물 사이로 장한나 작가의 뉴 락을 발견했다.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이 파도, 바람, 태양열에 의해 풍화되어 자연의 돌처럼 변해버려 새로운 돌과 진배없다는 아이디어를 담은 뉴 락. 식물원이라는 완벽한 자연의 공간에 침투시켰다. 근데 애초에 식물원이란 박물관, 박람회 등과 마찬가지로 자연상태에선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는 여러 소재를 인공적으로 배치한 것 아닌가. 자연을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인간의 위대하고도 어리석고 헛된 욕망이 자리잡은 곳. 플라스틱 시대와 인류세를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뉴 락을 식물 사이에 배치한 전시 디스플레이는 그간 환경문제를 다뤄왔던 고발형 예술이나 친환경 캠페인의 구조를 전복해, 쓰레기를 줄이자고 목소리 높여 외치는 대신, 인간인 우리가 만든 인공물이 이미 자연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깊숙이 지구와 한 몸이 되었다, 라는 거대한 공존의 네트워크를 역설적으로 증명해냈다고도 볼 수 있다. 자연(식물원) 속에 숨겨진 인공의 의사(쑤도pseudo)-자연, 혹은 유사-자연인 셈.

쓰레기 매립지의 퀴퀴한 전경, 오염된 해안가에서 녹조와 뒤엉킨 어망이 하얗게 비어 있는 화이트 큐브 갤러리에서 이게 문제야! 하면서 고발의 형태로 제시되었던 전형적 환경예술 전시 디스플레이는 흡사 평창 서울시립아카이브에서 오윤이 판화로 척박한 노동현실을, 국현미 안국 올해의 작가상에서 홍진훤이 사진으로 시위와 데모를, 혹은 일민이나 경기도미술관에서 수 년 전 임민욱이 재개발을 다루는 방식과 비슷하다. 현장을 있는 그대로, 그러나 극적으로 묘사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문제가 되는 현실을 드러내 자본주의가 제공한 편리한 일상을 살고 있는 일반 관객을 불편하게 할 것.

그러나 장한나 작가의 방식은 드러내는 고발이 아니라 정반대로 숨바꼭질과 같다. 인간이 돌도고 정성스럽게 가꾼 순수하고 이상적인 자연(이 자체가 형용모순이긴해)의 공간인 온실 내부를 선택해 진짜 식물과 천연석들 사이에 뉴 락을 은밀하게 숨겨뒀다.

관객으로 하여금 무엇이 진짜 돌이고 무엇이 플라스틱 돌인지 단번에 구별하기 어렵도록
윌리를 발견한 순간은 슬그머니 시각적 충격으로. 무균실처럼 아름답게 관리된 식물원에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허연 돌이 사실은 인간이 버린 쓰레기의 최종 형태? 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인지부조화가 발생하는 까닭. 아 이게 플라스틱이라고? 새로운 시대의 돌이나 마찬가지라고?

전시 설명문 왈. ˝정답을 맞히는 것보다 구별이 어렵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진짜 돌과 플라스틱 돌이 서로를 닮아가는 풍경 앞에서, 우리는 지금의 자연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맞는 말이다.

외면하고 싶고 얼른 치워버리고 싶은 쓰레기가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의미마저 도출해볼 수 있는데 이는 가치 판단을 유보하고 선악 구도를 넘어선 새로운 지질학적 현실을 인정하는데까지 이른다.

사실 인간은 악하고, 파괴되는 자연은 보호해야 한다는 고루한 이분법적 구도는 왠지 도덕적 부채감을 자극해왔던 게 아닐까. 반대로 작가는 뉴 락의 발생을 비난하거나 애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수집한다. 다큐멘터리 작가같은 태도지만, 선택과 배치는 애초에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탈정치적인 태도도 하나의 태도를 취한 것,

한편 돌은 무엇을 말하는가? 에에올. 도가도 비상도. 자연은 말하지 않고. 않기에 자연의 무심한 수용력을 보여줄 뿐이다. 플라스틱이 지구에서 사라지지 않고 결국 자연의 일부로 동화되어가는 자연의 적응은 곧 새로운 진화. 자연은 인간의 선악 판단과 관계없이 쓰레기마저 자기 품으로 끌어안아 풍화시킨다. 몇 천 년이 걸린다고 하나 시간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편.

뉴 락을 박물관의 광물 표본처럼 정교하게 분류하고 배치해 지층에 영원히 새겨질 신암석 유형으로 선언하는 한편 인간이 소멸한 이 땅에 남을 미래의 화석은 바로 인공 플라스틱이라는 담담한 경고를 발신한다
역설적으로 추한 쓰레기에서 콜렉팅한, 수석을 닮은 플라스틱은 더러운 기피대상이라기보다 기묘하고 아름다운 질감과 색채를 지녀 아이러니하게도 미의 관조대상이 된다. 역설적인 예쁨이다. 모순적인 감각을 느끼는 이는 환경문제를 지루한 의무나 정언명령이 아닌 매혹적이고도 섬뜩한 미적 탐구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될지도 모르겄다,

현지에선 냄새 좋은 풀, 감기에 잘 듣는 풀, 빨강이 초록이로 불렸을지 모르는 식물이 라틴어 학명으로 어렵게 브랜딩되어

입에 올려 외우기도 힘들지만 과거에도 지금도 현지에서도 누구는 아이폰 모델명 외듯 외우고 이것도 몰라! 하며 애들 쿠사리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 혀가 꼬이는 이름을 지닌 여러 사막 지중해 열대 식물 사이로 철제 조형물이 숨겨져 있는데 이것은 전시의 일부일까? 의도된 것일까? 페인트칠이 보이는데...

수련을 보면서 모네는 백내장의 눈으로 물에 비친 반사면에 집중했겠구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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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르윗전 뿐 아니라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의 전시서문은 정교하게 쓰여져 있어 글을 비교해 읽는 맛이 좋다. 한국어와 영어 각기 다르게 적합한 방식으로 각 언어의 맥락에 맞게 조탁되어 있다. 형광펜으로 아래 캡처에 표기해두었다

흥미로운 것은 adj(or Ved), adj + noun하면서 and 없이 리듬감을 주는 표현이 매 전시마다 간혹 관찰되어서 상당히 문학책 많이 읽은 원어민스러운 느낌이다고 생각해왔는데 지난 마크 브래드포드 전시의 도록에서도 비슷한 패턴을 발견해 이 학예사가 쓴 것이겠구나 짐작했다. 이번에도 반환점 돌아오는 구간에 그런 표현이 있는 글이 있었다.

한편 조나스 우드에서 솔르윗으로 급히 변경된 탓인지 글의 짜임새와 별개로 전시장 디스플레이에서 오타가 좀 있었는데 2.3.4 전시실 도입 서문 영어에 dimensions하고 온점period가 없고 안료pigments는 piaments로 오타났으며 already는 r이 빠져있다. 전시 첫 주에 갔었으니 지금은 교정되었겠지싶다

최근 흥미롭게 읽은 작은 미술관의 학예원이 쓴 일본어 책에서 국보급 전시는 2년 전에 기획전은 최소 1년 전에 준비한다고 하는데 아무리 솔르윗전이 도쿄에서 올해 상반기에 했던 전시를 그대로 들여왔다해도 밤샘작업이 있었을 것이다

구조단위-시스템연결-시간과 빛이 주는 깊이감-비유클리드기하학적 나비에스토크스방정식이라는 전시 테마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분절에서 연속성으로, 단위에서 깊이감으로, 고정에서 흐르는 유체로.

생각보다 더 흥미로운데 다들 지나치는 아카이브 공간. 개념미술원리 초고를 읽어보거나 엑셀같은 테이블을 보거나 사진모음집을 보며 어떤 분류체계로 이런 유틸리티를 모았는지 확인해보는 것도 재밌다. 생김새가 비슷한 것은 이유를 알겠다. 그러나 책은? 왜 이 책을 모아서 3x3로 배치했을까

예컨대 지금 진행중인 다른 전시에서 책을 모아둔 아카이브가 있는 경우 북서울시립 오인환장서영전은 무지개색으로, 혜화 아르코 예술학교전은 미술공간 기획에 도움되는 문화이론 비평위주로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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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아시아문화의전당,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국립중앙박물관 정도가 아니면 국내 전시에서 파인화된(극도로 세분화된) 외국을 느끼기 쉽지 않다. 해외작가 다양성의 범위가 베스킨라빈스 31보다 적다. 거의 구미작가라는 말. 국공립정도가 아니면 태국(국중박특별전), 북아프리카, 아랍, 남미 등 여러 나라의 작가를 보기가 어렵다.

극도로 동질적이고 균질적인 한국사회에서 국적, 문화, 출신, 인종이 모두 하이브리드된 작가를 세분화해서 의도적으로 이해하는 노력은 다양성을 표방하는 예술의 영역에서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질적인 존재들을 인지하는 것에서 이해와 수용이 시작된다. 부유한 지역은 선진국 위주로 글로벌화되고(미국영국유학, 유럽풍베이커리와 까페, 일제제품), 가난한 지역은 도상국 위주로 글로벌화되는데(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 네팔 몽골 이주노동자) 이것도 어쨌든 탈냉전 후 명시적인 적이 없어진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에서 자유무역과 세계화가 가져온 후속효과다. 인력의 모빌리티.

비슷한 맥락에서 비싼 미술품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상업화랑은 문화자본이 큰 미국, 유럽 작가를 위주로 전시해야 콜렉터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데, 다양성이 들어온다면 그것은 미국, 포르투갈, 영국 등 본국의 헤드쿼터에서 정체성 정치가 중요한 아젠다이기 때문이다. 소속작가의 해외투어라고 볼 수도. 해외법인에 출장간 본사의 임원은 해외에 적응하기 보다 본국의 사회문화적 변화에 더 민감하기 마련이다.

그래도 외국계 갤러리에서 성장배경이 다른 작가들이 어떤 의도로 어떤 작품을 만드는지 보면 생각의 확장에 도움이 되고 부분적으로 해외 트렌드의 변화를 일별해볼 수 있다.

예컨대 아프리카출신(화이트큐브에서 본 가나의 엘아나추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알렉스 카츠, 장미셸바스키아), 베네수엘라+아이티계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자 한국에서 유행하는 단색화 색면과 화풍을 공유하는 타데우스로팍 알바로 배링턴, 팔레스타인+말레이시아계의 영국런던태생 리만머핀의 멘디엘사예가 생각나고 러시아 근처 라트비아계 디아도 다른 예시다.

비엔날레도 다양한 지역의 작가를 만나기 좋다. 물론 어느 작가가 출신지와 문화를 모두 대변하지는 않지만,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낯설게 현실을 바라보게 해주는 소격효과는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렇게 보는구나. 한편 참여작가수만 늘리기 위해 의도가 선명하지 않은 작품을 거는 경우가 있으니 알잘딱깔센으로 주의

호추니엔이 디렉팅한 광주비엔날레. 삼십 개 넘는 곳을 땡볕에서 다녀야해서 과유불급이었던 24년과 달리 집약해서 접근성이 좋아졌다. 그래도 몇 군데 빼고 거의 다 갔지만 재작년엔 정말 고생했었던 기억이 있다. 소낙비 맞으며 택시타며. 안소연님의 광주비엔날레와 베니스비엔날레 비교 학위논문을 읽은 지금이라면 더 재밌게 즐길 지도.

제주비엔날레에서 울시미 소장 와엘샤키 영상을 오랜만에. 국현미 과천 1층과 부산 카린과 대구에서도 있었는데 오래 전시를 다니면 이렇게 누적 경험에 따른 반가운 만남이 있다. 국현미 작가상의 제인 진 카이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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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리는 음식들 - 선재 스님의 인생 발효 에세이
선재 지음 / 나무의마음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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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스님의 에세이 읽었다. 구매를 유도하기 위해 앞부분에만 자극적으로 재밌는 스토리를 배치하고 뒤는 맥이 빠지는 용두사미형 책이 있는 반면(경제경영에 많다), 뒤로 갈수록 점점 흥미로워지고 훨씬 더 웅숭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글이 있는데 선재스님의 발효된 장맛 같은 글은 후자에 속한다. 자신이 만드는 음식과 자신이 쓰는 글과 그 글감이 되는 자신의 삶이 모두 합치한다.

삶과 마음의 제행합일, 자연에 따르는 목적의식과 제철음식을 각 재료의 특성에 맞게 적절히 요리하는 레시피가 조화를 이룬다. 먹는 것이 곧 삶이고, 음식이 곧 나이자 부처인 것이다.

흑백요리사2를 통해 모두 그 맛 보고 싶었으되 어디서도 팔지 않아 맛의 비밀이 꼭꼭 감추어진 그 잣국수, 선재가 성재를 감동시킨 그 잣국수의 레시피가 공개되어있다. 이와 더불어 그리운 옛 할머니들이 만들어 주던 투박하되 시원한 동치미의 비밀도. 재료는 그저 청각과 고추씨가 전부이고 기술적으로는 대나무 껍질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간단한 레시피가 모두 공개되어있지만 그 맛을 구현하는 자는 많지 않으리라. 음식을 만드는 자의 진심과 정성이 더해져야하기 때문. 그것이 선재스님의 가르침이었다. 음식은 상품 이상의 것이고, 음식 만드는 자와 그이가 만드는 음식을 구분할 수 없다는 점.

이외에 제호탕도 흥미로웠는데 일본어로 제호미(醍醐味 다이고미 だいごみ)는 제호처럼 매우 좋은 맛, 묘미, 석가여래의 심오한 가르침이라는 듯이고 제호는 우유로 만든 무슨 음식으로 알고 있는데 한국의 제호탕은 레시피가 달랐다.

르코르동블루 강연에서 꿀벌 일화를 통해 감동받은 학생, 샌프란시스코 강연 때 만난, 사업실패 후 스님 조언따라 연근 먹고 기도하고 회생한 사업가 이야기, 사찰음식 지망 고등학생, 은사 스님의 시금치 데친 물 아끼라는 이야기, 성재셰프가(이름은 언급안되었고 맥락상) 칼질 숭덩숭덩이 아니라 싹싹에서 몸짓이 통해 웃었다는 이야기 모두 기억에 남는다.

9남매중 7번째로, 직장다니다가 출가하고, 40살에 간경화로 죽을 뻔하다가 발효간장차와 당근김치주스 마시고 푹 쉬어 회복했다는 개인사도 모두 울림이 있다. 자기가 건강을 잃고 좋은 음식을 통해 회복했던 전사가 있었기에 사람들의 건강을 살릴 수 있는, 오프라 윈프리 같은 상처입은 치료자가 될 수 있었을 것 같다.

음식 안에 생명과 평화가 깃든다. 5대 영양소로, 칼로리로 환원할 수 없는 자연과 사람간의 조화에 대한 철학이 있다. 먼저 나 자신이 바로 세워지고 나와 세계와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어야 주변을 돌보고 큰 일을 도모할 수 있는 법. 모두 내 입에 들어가 나를 구성하게 될 음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잘 익어가야한다. 은은하게 깊어져야한다. 간단한 진리지만 누구보다 선재스님이 이 말을 했기 때문에 한결 먹먹한 울림이 든다. 타인이 말했으며 억압적인 설교조였을 것 같은데 선재스님이 음식으로 대접하며 말해 맑고 상쾌한 기분이 든다. 이는 또한 쓴 이의 삶이 청정하고 정갈했던 까닭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좋았던 두 문단은 위에 캡쳐에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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