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강남 교보문고 매대에서 막 번역 출판된 이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나는 베르베르의 <개미>나 최근작 <행성>보다 이 단편모음집에 수록된 <상표전쟁>을 좋아한다. 정말 있을 법한 미래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는 2010년, 프랑스에서는 2008년 10월께 나온 책인데, 2025년 오늘날에 읽어도 이후의 미래를 잘 예측했다. 처음 이 책을 손에 집었을 2010년에도 <상표전쟁>을 단숨에 흡입하듯이 읽었다. 책을 사게 되 것은 2019년 후 신판이 나온 다음이다.
단편 <상표전쟁>은 소위 테크 자이언트라고 일컫는 기술 거대 기업의 부상에 따른 국가의 점진적 대체를 그리고 있다.
국가보다는 기업광고송이나 사가(회사 노래)를, 국기보다는 로고를 사람들이 선호하게 되면서 물건구매가 투표행위의 일환이 되어간다. 일련의 과정을 지나(스포일러니 책을 읽어야함) 기업들이 과거에는 주권 국가만이 수행하던 전쟁을 벌이는 미래를 그리는데 예측 중 일부(2040년께의 우주 전쟁이나 2018년의 콜라 전쟁)는 실현되지 않았으나 관료주의에 의해 둔화된 국가를 기업이 대체하는 흐름은 놀랍도록 정확하다.
펜데믹 전부터 조짐이 있었다. 미국의 일론 머스크와 중국의 마윈의 부상. 2010년 후반에 알리바바가 항저우에 너무 큰 위치를 차지 해서 국가기관이 기업 안에 들어와서 서류발급 민원처리를 한다고 했던 어느 기사를 읽고 이 단편을 떠올렸었다. 스페이스X나 나사의 업무 일부를 대체하고, 국경을 초월하여 유럽의 이민정책과 극우정치 공론에도 영향을 미치는 2025년 기사를 보면서 다시금 이 단편을 떠올린다.
스토리에서는 규제 지연과 정치적 분열로 인해 국가들은 거대 기업의 기동성을 따라잡지 못하게 된다. 기업이 곧 국내경제만을 담당하던 시대를 지나 세계화시대에는 국제 무역을, SNS와 AI의 시대에는 이념적 담론까지 기업들이 주도하게 된다.
국가들이 이에 적응하여 다시금 주도권을 회복할 것인지, 아니면 기업들에게 더욱 많은 권한을 내어줄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역사가 보여주듯 권력 구조는 정적이지 않다. 기술 기업들이 계속해서 영향력을 확장하는 가운데, 경제적 민족주의와 지정학적 충돌로 인해 국가들이 새로운 균형을 모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이야기에서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중세처럼 변해간다는 것이다. 공급망 붕괴, 우리가 알던 세계화의 종말, 중도의 몰락과 극좌와 극우 양극화, 기후변화, 각자도생의 시대. 모두 성벽을 세우는 중세의 특징이 아닌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근작이 '상실의 시대' 같은 그의 이전 작품의 집대성처럼 읽는 사람도 있으나, 다가올 미래, 즉, 벽을 세워 중세도시를 만드는 시대를 예측한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책을 읽다보면 시대에 대한 통찰이라는 부산물을 얻을 수 있다. 작가가 반드시 예언서를 쓰기 위한 목적으로 쓰는 것은 아니고, 책을 집어드는 독자도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책을 읽는 것은 아닌데, 재밌게 스토리를 따라가다보면 생각지 않게 얻게 되는 부산물이 바로 시대에 대한 통찰이다. 왜 그것이 가능한가?
아이디어의 전파와 현실화 과정에 글이 에너지와 질량이 낮기 때문에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고민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와 질량이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개념이 현실에 미치는 속도와 영향력이 결정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장 적은 에너지가 드는 것은 음성언어 즉, 말이고, 그다음이 문자언어, 즉, 글이다. 말과 글은 한 개인이 적은 노력으로 바로 발산할 수 있기 때문에 시대의 유동성을 포착하고 기록할 수 있다.
이후 말과 글에 감화를 받은 예술가들이 이를 그림, 이미지, 영화로 시각화한다. 물론 예술가들이 작가 자체일 수도 있겠다. 내 말은, 시각화는 소리화와 문자화에 비하며 훨씬 더 에너지와 노력이 들기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기술을 통해 실체화되는 것이며 이후 상용화를 거쳐 대중이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다시 짚어보자. 미래를 내다보는 한 비저너리는 먼저 아이디어를 말로 표현한다. 아직은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구술언어로 말하는 단계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을 정리해 말을 글로 정리해 출판하고 독자들이 읽기 시작한다. 출판과 유통에는 시간이 조금 걸린다. 그러나 책은 말보다는 널리 퍼지는 효과가 있다. 소리는 가청범위에만 다가갈 수 있지만 책은 지역을 넘기 때문이다. 책을 읽은 예술가들이 공감하여 그림과 이미지로 시각화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기술자들이 실제로 이를 구현하지만 초기에는 비용이 높아 쉽게 보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용화되면서 마침내 대중의 인식 속에 자리 잡는다.
예컨대 로켓, 우주 개발, SNS, AI, 배터리, 전기차 등 모든 혁신이 이 경로를 따른다. 처음에는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렸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이 되었다. 대중은 자기 앞에 물성으로 다가와야 이를 이해한다. 말과 글인 단계에서 비웃지 않고 공감하 사람은 축복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시대의 흐름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작가들의 글에 주목해야 한다. 작가가 기록하는 생각이 곧 있을 법한 미래의 현실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