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립 블롬의 The Vertigo Years(2008)읽었다. 유럽문화사, 유럽지성사를 전공한 필립 블롬의 세 번째 책이다. 함부르크 출생으로 옥스포드에서 박사를 받고 비엔나에서 살고있다. 흡입력있는 그의 이 세 번째 책은 '정부가 어쨌다, 전쟁이 일어났다, 운동은 유럽전역을 휩쓸었다' 같은 추상적 서술이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화, 증언, 매일의 일상을 묘사하다 구조적 요인의 영향 속 상호작용으로 점차 시선을 확장하는 미시사의 장점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설령 약간의 표현은 14년 연상이자 저널리스트인 아내나 편집자의 도움을 받아 윤문을 했을지언정, 그가 추적하고 섭렵한 수많은 사료들은 놀라울 지경이다. 2000년의 유럽땅을 딛으며 100년 전 1900년을 걸은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책은 우리말로 구할 수 없다. 첫 번째 책 <수집>이 번역되었으나 절판이다. 나머지는 없다. 독일, 네덜란드에서 상받은 이 책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빌 브라이슨처럼 지식이 방대해서 쉬이 손대기 어려울지도, 이 책을 번역할 능력을 갖춘 유럽사전공생의 팍팍한 삶을 방증하는지도 모르겠다. 미번역의 이유는.
꽤 오래 붙잡고 있었는데 한 번에 다 읽기엔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흡입력있는 서술 덕분에 매번 한 꼭지씩 읽어도 재밌었다. 비엔나 분리파에 대한 부분도 재밌었고. 라임이 좋아 읽는 맛도 좋고, 과하게 구체적인 고유명사로 독자를 압도하지 않아 대중적으로도 접근성이 좋다. 쓸 것은 많은데 무엇부터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럴 때면 일단 서론부터 시작하자. 대개 구매자는 서론부터 펼쳐보고 이 책이 재밌어서 살 가치가 있다고 홍보하려면 처음 문단을 잘 꾸민다.
귀찮아서 채선생에게 번역해달라한 첫 서론이다. 이 한 문단에 이 시대의 감각(압도적인 스피드), 책의 포인트(미시사), 표현의 유려함이 다 드러난다.

1.번역
그들은 가로수가 늘어선 시골길 옆에 서 있다. 대부분 남자와 소년들로, 기대에 차 있다. 여름의 열기가 그들 위로 내리쬔다.
그들은 시야가 닿는 데까지 뻗은 도로를 내려다본다. 희미한 윙윙거림이 들리기 시작한다. 곧 직선 도로 위에 자동차 한 대가 나타난다. 작고, 먼지 구름에 둘러싸인 채, 매 순간 점점 커진다. 강력한 엔진이 차를 몰아붙이며 점점 더 큰 굉음을 내고, 응축된 힘의 환영처럼 관중을 향해 돌진한다.
구경꾼 가운데 열여덟 살의 한 청년이 기다려온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를 준비한다. 차량은 점점 가까워지고, 포효하며, 에너지로 맥동한다. 이제 거의 도달했다. 십대 사진가는 렌즈를 통해 집중해 바라본다. 그는 거대한 보닛 뒤에 있는 운전자와 동승자를 또렷이 본다. 연료 탱크에 그려진 숫자 6도 보인다. 엔진이 그를 스쳐 지나갈 때 소리와 힘의 충격파를 느낀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셔터를 눌렀다. 이제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사진이 어떻게 나왔을지 지켜봐야 한다.
1912년 6월 26일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자신이 찍은 사진을 확인했을 때, 젊은 사진가는 실망한다. 6번 차량은 화면에 절반만 담겼고, 배경은 번지고 기묘하게 왜곡되어 있다. 그는 사진을 치워둔다. 그의 이름은 자크 앙리 라르티그다. 그가 실패작이라 여긴 그 이미지는 40년 뒤 전시되어 그를 유명하게 만들 것이다. 세기 전환기부터 1914년 가을까지의 세월을 특징지었던 돌진, 에너지, 속도를 모두 보여주면서.

2. 그리고 중간에 Those Magnificent Men부분도 재밌었다. 비행-그리스신화-프랑스-독일-구체적 수치-기업사 산업과 지정학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글이다. 너무 재밌고 잘 써서 251쪽만 세 번 읽었다.
비행은 화려하고, 위험하며,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스의 장인 다이달로스가 전설 속에 남긴 오래된 꿈을 실현한 일이었다. 신들은 그의 날개에 바른 밀랍을 녹게 만들어 아들 이카루스를 젊은 나이에 죽음으로 내몰음으로써 그를 벌했다.
이제 거의 삼천 년이 지난 뒤, 인류는 이전까지 올림포스의 신들과 새들이 독점하던 하늘을 깨뜨렸다. 신들은 여전히 젊은 조종사들을 하늘에서 떨어뜨려 그들이 만든 기계의 불길 속에서 죽게 했지만 — 1912년 프랑스 대중 잡지 Je sais tout에는 지난 5년간 시험비행 중 사망한 수십 명의 비행사들을 집단 초상으로 실은 바 있었다 — 장벽은 이미 무너졌다. 이제부터 사건의 속도를 좌우하는 것은 신화가 아니라 기술 발전이었다.
조종사들만이 대중에게 마법 같은 매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자동차 경주 선수, 랠리 드라이버, 사이클 챔피언들도 인기 영웅이 되었다. 그들의 경력의 모든 단계는 신문에 보도되었고, 새로운 기록은 매주 깨지고 또 기록되었다. 경주는 그 시대의 강박 가운데 하나였고, 속도는 그들이 선택한 마약이었다. 그리고 속도라면, 급부상하던 독일만큼 두드러진 곳은 없었다. 독일의 기술자들은 세계를 선도하고 있었다.
이미 1903년 10월 28일, 독일 기업 AEG는 시속 210.8킬로미터(130.5마일)에 도달한 전기 기관차를 시험하여 인류가 만든 가장 빠른 탈것이 되었다. 그 불과 일주일 전에는 경쟁사 지멘스가 제작한 유사한 기관차가 시속 206킬로미터(128.5마일)에 도달했다.
한 세대 만에 그 나라는 바람에 흩날리던 봉건 소국들의 누더기에서 벗어나, 누구와도 맞설 준비가 된 산업 거인으로 변모했다. 프랑스라는 숙적을 물리쳤고, 제국이 되었으며, 식민지를 획득했다. 프로이센의 모래 평원에서는 군인과 행정가들이 나왔고, 농촌적이던 남부는 화학 산업과 정밀 공학 분야에서 세계적 선두가 되었다. 북부의 항구들은 전 세계에서 온 상품들과 ‘메이드 인 저머니’ 제품들로 넘쳐났으며, 서쪽 변경에는 유럽 최대의 도시적 대화재(대도시의 거대한 집적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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