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reuters.com/business/retail-consumer/lvmh-finds-making-louis-vuitton-bags-messy-texas-2025-04-10/


21:40 KST - 톰슨로이터 - 로이터 통신은 미국 텍사스 LVMH(루이 비통, 모엣 & 샹동, 헤네시) 공장에서 지난 6년간 고분분투한 루이비통의 노력이 트럼프 재임시간에 어떻게 달라질지 보도하고 있습니다.




6년전 2019년,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 최초로 들어선 루이비통 공장 오픈일에 직접 참석했습니다. 그 이후로 루이비통 텍사스 공장은 루이비통의 골치아픈 공장으로 떠올랐습니다. 전세계 루이비통 생산공장중에서 최악의 생산성과 품질을 보여 꼴찌를 도맡아 했습니다.




2019년 문을 연 LVMH 텍사스 "로샹보" 공장

초기에는 가죽 절단,재단에서 무려 40% 손실 보여. 꼴찌에서 2번째 공장이 평균 20% 손실율 기록

품질 및 마감에서도 도저히 답이 안나오는 숙련도. 마감 박음질 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해.

가죽 마감이 불량이라 토치로 지져서 불량 마감을 숨기는 사례가 속출하기도

초기 몇년간 불량 백들이 트럭으로 수백대를 실어날라 폐기 조치

나중에는 감독관들이 문책 피할려고 앞장서서 불량 마감 및 은폐 조치 지시해

로샹보 공장에는 루이비통 최저가 라인업 백들만 생산 맡겨. 그나마 그것도 생산불량 높아.

프랑스 루이비통에서 직원 교육만 6주. 그것도 최상위 장인 교육관들이 직원 교육 전담.

텍사스 루이비통에서는 직원 교육에 2~3주. 그것도 생산 작업과 병행해서 직원 교육 실시.

그나마 있던 직원들도 고숙련 작업 기피현상. 페덱스나 UPS 택배직업으로 이직선호열풍.



그러나 루이비통은 계속해서 텍사스 공장을 증설하고 규모를 넓히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로이터는 덧붙입니다. 트럼프의 무역분쟁에서 Made In USA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인간과 인간이 만든 작업물은 유리된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작가는 글을 쓰는데

작품과 나는 별개의 존재다

작품에 대한 찬사가 자신에 대한 칭찬은 아니고

작품내용이 자서전도 아니며

주인공이나 대상이 반드시 만든 이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국가도 정교분리를 해야하듯

제작자도 작품-자아 분리를 해야한다


감상자 역시 작품에 감정이입하면 곤란하다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와 배우 자신을 동일시하게 될 우려가 있다

선역이면 그나마 낫지만 악역일 경우엔

시골에서 할마씨들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게 될 공산이 있다

"너 그렇게 사는거 아냐!"


깃발이 펄럭인다

펄럭이는 사건은 펄럭이고난 다음 어디로 간 걸까?

펄럭이는 순간은 깃발의 것인가?

배우는 얼굴근육 운용전문가이자 감정의 테크니션으로서

연기를 펼친다

연기를 펼친 순간은 그 다음 어디로 간걸까?

카메라로 녹화하지 않으면 근육의 움직임, 미묘한 표정변화는 사라진다

그 연기의 순간은 배우의 것인가?

배우가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연기와 배우가 유리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페이스 갤러리에 다녀왔다


1층은 그림자를 제4의 요소로 포함시켜 흑목회화를 만든 네벨슨의 전시이고 2층은 나이젤 쿡의 바닷물을 재료로 만든 바다심상 추상회화다.


나이젤 쿡의 화풍 변천사를 알아야 이번 전시가 의미있게 다가온다. 쿡은 초기에 티치아노와 터너와 같은 유럽 고전회화의 거장의 흔적을 더듬었다.

화면 안에 조형을 명징하게 새겨넣은 풍경화와 윤곽이 선명한 모노크롬을 그리다가 중기에 예술가는 문화적 캐리커쳐라는 자각을 한 후 일러스트 그래픽요소가 두드러지는 소방관 캐릭터를 알터이고, 제2의 자아로 삼아 포스트-아포칼립스풍의 그림을 그렸다.


문득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제는 휘몰아치는 색채의 소용돌이가 물비늘처럼 번져나가는 회화를 그린다

굵기와 방향과 세기가 저마다 다른 스트로크가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고 물살처럼 출렁이다가 구름처럼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겹겹이 쌓인 색선은 바람결에 이는 갈대밭처럼 살랑살랑 떨리고 작업은 외형을 뚜렷이 잡기보다는 아스라이 스미며 구체와 추상, 사물과 기억, 자연과 인간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가로지른다. 구상, 반구상, 추상의 궤적을 천천히 걸어온 쿡은 비정형경험과 내면풍경을 전달하기 위해 터치 자체에 집중했다. 거센 돌풍과 잔잔한 윤슬을 동시에 구현하는 쿡의 붓끝은 형상의 재현, 인식의 감각, 시간의 흐름을 통째로 끌어안는다.


그림에선 영국 켄트 앞바다 군청색 해일와 같이 거친 스트로크도, 어느새 잠잠해진 은빛 아침바다 잔물결처럼 부드럽고 우아한 붓질의 흐름도 보인다. 색감은 쨍한 대비도 물안개처럼 퍼지는 차가운 음영도 보이며 어렴풋한 숨비소리와 같은 선도 한들한들 잔물결을 따라 번지는 흔적도 보인다. 낙하하는 하얀 갈매기가 솔바람을 따라 찰랑이는 파문의 궤적을 닮은 선도 보인다. 관찰하는 쿡의 손길은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들고나는 시간을 닮았다.


구체적인 형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터지는 외침보다 조용한 숨결이 대신 자리한다. 빛과 물, 바람의 기운이 스며들어 몸과 마음, 자연과 시간의 자국을 낡은 경첩처럼 보여준다. 어쩐지 마치 오래전 동굴 벽에 남은 손자국처럼.


작업은 고요하되 쌔근쌔근 숨쉬며 고동한다.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의 어느 알 수 없는 가느다란 틈새를 타고 우리는 쿡이 초청하는 영국바다 어느 깊은 내해로 인도된다. 손에 닿지 않는 감각을 붙들어 전달하려는 그의 붓질 자취는 바람숨을 잡으려는 일처럼 덧없지만, 덧없기에 아득하고도 눈부시다.


전해지는 마음이 눈부셔 찬란하기까지한 쿡의 그림은 환풍기 소리만 가만가만 울리는 페이스 갤러리, 신성한 성당의 침묵의 아우라를 풍기는 전시장 한켠 늘 그 자리에서 잔물결치며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사라졌다 생기는 유동적인 세계에 대한 원초적 감각을 가만가만 두드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베르나르 포콩은 사진 도록의 말미에서 이와 같은 에필로그를 적었다


나의 연출 사진과의 이야기는 끝났다. 나의 20년간의 되찾은 낙원(Mon histoire avec la mise en scène photographique est terminée : mes vingt ans de Paradis retrouvé)


사진이라는 두 번째 낙원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어린 시절의 낙원 이후에 잃어버렸던 그 세계를 이 최고의 순간들로 엮어보려 한다.


나는 프랑스어로 된 글들로만 한정했다 (사실 다른 언어, 특히 일본어로 된 글도 많이 존재한다). 단지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모국어와는 숙명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이렇게 자문했다. 세상은 그것을 처음 이름 붙인 언어 밖에서도 존재할 수 있을까? “행복”, “좋은 하루”, “휴가”를 말하기 위한 다른 소리들, 다른 음악들이 존재할까? (d’autres sons, d’autres musique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앞의 중림동 약현성당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에 다녀왔다


가톨릭의 중후하고 차분한 분위기는 적벽돌 건축으로 완성된다. 


새문안교회 순복음교회 소망교회 같은 개신교 건물에는 발랄한 락밴드와 가운입은 합창단이 묘하게 습합되어 있어 젊고 현대적 분위기를 풍긴다면 가톨릭 성당은 나이듦과 죽음과 노화와 부질없음을 사유하기에 알맞은 깊고 짙은 심층수와 같은 공간이다. 


G플랫으로 떨어지며 성스럽고 숭고한 고양감을 주는 그레고리안 찬송을 배경으로 박물관 내부는 편안하고 평화롭다. 색면추상의 레이어가 한꺼풀씩 쌓여 적층수와 같이 고즈넉한 맛을 준다. 물론 그러한 평화는 교회법의 엄수와 엄격한 위계에서 비롯되는 질서이기도 하다. 마치 성가의 완벽한 화음이 수학적 비례에 기반하는 것처럼.


천주교는 보수라는 이미지가 있으나 프로테스탄트처럼 어의 그대로 항의하는 자였던 시절이 있다. 19세기 박해시절 핍박에 항거했던 혁명적인 나날이다. 그 모진 고문 속에 숨을 거두어간 핏빛 순교자가 묻힌 곳이 이 서소문이다. 하여 이 공간은 태생적으로 어두운 공간일 수밖에 없으나 미국호러처럼 선혈이 낭자하는 위협적인 공포가 아니라 주님의품에서 모든 것을 안아주는 거대한 심연 같은 흑암이다. 무덤 속의 적막과 같은 것이다. 


중세교회가 묘지를 품고 지하에 유골을 안치하게된 역사적 맥락에는 중세인들의 악령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원인모를 병과 끝없는 전쟁으로 죽어간 영혼들의 소름끼치는 절규가 밤마다 들린다고 호소하는 중세인들은 성직자들이 그 영혼을 교회 아래서 구제하고 벽사해줄 것이라 믿었다. 


이런 맥락에서 개신교 교회는 무덤이 빌트인 되어있지 않고 천주교 성당만 무덤과 함께 하는 전통이 이어졌다. 같은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를 믿는 종교지만 가톨릭 건물에서만 죽음에 사후세계에대한 선연한 위안이 느껴지며 생로병사를 고민하는 50대 이상 어머니들의 존재가 많이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개신교는 되려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 유교의 철저한 현세관과 기복신앙적 요소가 더 많이 보인다.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은 김대건 성인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애프터 라이프를 생각해보기 좋다. 쿠오 바디스,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 많던 성인들은 신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처마처럼 콘크리트 외벽 선이 떨어지며 지하로 하강하는 듯한 걸음을 유도하는 1층 입구를 지나 박물관 시설은 지하1,2,3층에 있다. 무덤과 같은 높이다. 우연이 아니다.



오늘 온 이유가 있다. 건축 공간 디자인 학회를 하고 있어서다. 학회의 주제를 보고 있으면 그 시대의 흐름을 읽기 좋다. 아무래도 젊은 학생들과 호흡하며 미래를 고민하는 학자들이가에 시대변화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올해 춘계 한국공간디자인학회에서는 브랜드디자인, 노후공간, 공유스페이스가 눈에 띈다. 상업주의, 고령화, 청년실업과 같은 시대정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나 특이한 것은 크루즈 디자인인데 건축공간을 정주공간뿐 아니라 노마드공간까지 포함하여 외연을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재밌는 인사이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25-04-27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주 추사관 내부와 비슷하군요. 창이 아래에 배치되어 있어 빛이 아래에서 들어오게 되어 있던게 기억나서요.

글을매일씁니다 2025-04-27 18:46   좋아요 0 | URL
제주 추사관도 참 좋았어요 승효상 건축가가 건축했었던가 그랬죠
멋진 조상님들, 6년 전인가 갔는데 거기서 윤두서 자화상을 봤던 것 같아요 (완전 정확하지 않은데 제주에서 본 것은 확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