섞는다는 행위는 같아도 미국식 샐러드 한국식 비빔밥 태국식 똠양꿍은 모두 철학이 다르다


재료를 섞어 음식을 만든다는 점은 비슷해보이지만 미국식 샐러드/포케, 한국식 비빔밥, 태국식 똠양꿍은 모두 다르다. 국중박에서 새로 열린 전시 <어메이징 타일랜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작년 예술의 전당에서 한세재단 후원으로 국내최초 태국현대미술전이 열린 이래 한국에서 본 두 번째 태국 전시다. 고대로마신 얼굴, 페르시아 직물, 중국 도자기, 일본 칼을 태국식으로 토착화한 코스모폴리탄적 미술을 보면서 이것이 소스를 중심으로 대동단결하는 로컬화의 정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똠양꿍은 샐러드나 비빔밥하고 다르다고


샐러드에는 미국의 건국이념인 프리덤이 들어가있다. 조합의 자유가 핵심이다. 뭘 먹든지 내가 먹는 것이고, 너는 상관할 바 아니라는, 개인의 자유가 정체성의 고갱이다. 드레싱도 여러 개가 동등한 선택지다. 오리엔탈, 치폴레, 마요, 온갖 소스가 있고 소스 사이에 위계는 없다. 김치 파인애플 연어 시리얼 온갖 것을 함께 버무린다. 개인의 취향이 음식의 규범보다 앞선다.


그러나 한국식 비빔밥은 섞는 철학이 다르다. 생각보다 보수적이고 정통을 중시한다. 고추장을 중심으로 위계화가 되고 선명한 스타일적 지향점이 있다. 아무거나 섞을 수 없다. 비빔밥하면 어떤 고추장의 맛이 생각나지만, 샐러드의 소스는 정확히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 비빔밥은 나물 조합에 한해서는 거의 무한정이지만, 재료를 으깨서 떡처럼 만들어 먹는 관습적 방식이 있고, 고래고기 된장 비빔밥이라든지, 사슴고기 스윗와사비갈릭소스 버터비빔밥 같은건 이상하게 여겨진다. 김밥도 김으로 싼다는 점에서 휴대용 간편식 비빔밥이다.


그런 맥락에서 비유하면, 아무거나 개인이 꼴리는대로 다 넣겠다 아무도 평가하지마라고 외치며 조합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식 샐러드/포케와 조화의 규범을 중시하는 한국식 비빔밥은 매우 다르다.


고추장, 간장, 참기름이 중심을 단단히 잡고 다양한 나물의 식감과 향이 일정한 범위 안에서 밸런스를 준다. 설사 고명은 바뀔지라도 비빔밥다움을 유지해야한다. 따라서 여러 식재료가 섞인다고 해도 아무 재료나 다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비빔밥은 조합의 가능성이 무한정 열려있는 리눅스식 개방형 조합 샐러드와는 달리,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마냥 폐쇄형 문법 안에서 노니는 보수적 변주라고 할 수 있다.


훈제 캥거루스테이크 블루치즈 두리안 청어절임 취두부 메이플시럽 샐러드는 가능할 수 있어도 비빔밥은 안된다. 대역죄인이 될 것이다.


캐비어 석류 두리안 버팔로모짜렐라 배 들기름 마시멜로 고사리 버터헤드샐러드 포케는 가능해도 김밥은 안된다. 


왜 안될까? 샐러드와 포케는 조합에 따라 과일, 유제품, 단백질이 무대의 중심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비빔밥은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전달된 고맥락적이고 관습적인 위계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아는, 이게 맞아! 라는 암묵지가 있다


참기름, 고추장, 간장의 감칠맛을 중심으로 나물과 채소의 섬유질 식감을 주며 단맛은 보조적이고 유제품 향은 거의 없어야하며 허브향은 깻잎 정도를 제외하면 강하지 풍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샐러드와 달리 비빔밥에선 소스가 재료를 뒤덮지 않고 느슨하게 연결하되 주인은 나야 에헴하는 큰 어르신 역할이다


샐러드의 소스는 공통의 강요된 정답 없이 각자의 조합이 존중되기 위한 최소의 안전장치다. 어메리칸 드림, 자유민주주의, 금융자본주의라는 큰 세계관을 인정하는 어느 인종이든 멜팅 보울의 미국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 반대로 한국은 원형, 피, 한민족을 중요시한다. 이런 사회문화와 식문화는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비빔밥이라는 장르의 문법을 뒤트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똠양꿍의 정체성은 건더기가 아니라 소스와 국물에 있다. 미국의 소스는 정체성까지는 아니었다. 아무 재료를 넣을 수 있는 조합이라는 행위에 핵심이 있었다. 그런데 태국은 재료는 아무 거나 넣을 수 있다는 미국식 샐러드의 기본 기능 위에 소스로 토착화를 시킨다.


똠양꿍 페이스트의 주재료는 레몬그라스, 갈랑갈, 카피르라임잎, 고추, 피시소스, 라임, 으깬 새우라고 한다. 이 똠양꿍 향만 유지되면,  그 안에 넣고 푹 고는 재료가 브라질 닭이어도, 필리핀 해산물이어도, 한국 라면이어도 상관없다.


재료는 잘 하는 다른 국가에서 들여온다. 재료를 현지화하는 게 아니라 소스가 재료를 현지화한다. 이것이 국중박 전시의 코스모폴리탄 아유타야 왕조의 장식품을 보면서 생각한 것이다.


비빔밥은 재료의 조합은 보수적이며 고추장이 묶는다. 한국사람이면 자연스럽게 아는 어떤 암묵지가 있고 그것을 벗어나면 눈총을 받는다. 일본만큼 숨막히는 의례적 사회는 아니고 겉보기에 자유로워 보이고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외부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당연히 군대를 간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대학교를 간다. 부산사람이면 단골 국밥집은 있다. 손님은 상석에 앉는다. 연장자에게 말을 높인다. 파란불에 건너간다. 밖에 나갈 땐 화장을 한다. 옷을 단정하게 입는다.


당연한거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국인의 최애주제인 교육으로 한정해서 보자면 그렇지 않다. 미국에선 칼리지를 가는게 개인의 선택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같은 아시아인인 일본인도 고교졸업 후 가업을 잇거나 취직을 하는 선택지도 얼마든지 고려된다. 상경하는 쪽, 취업하는 쪽 등등 졸업생은 여러 카테고리로 나뉘고 그 사이에 어떤 평가의 태도는 크게 관찰되지 않는다. 마치 카페에서 말차, 카푸치노, 논커피 사이에 선택하는 차이의 감각이다. 그런데 한국은 너무 당연하게 한 가지 선택으로 수렴되고 그 선택지 외부를 고려하면 눈총을 받는다.


그래도 일본은 매뉴얼로 설명이 되는 부분도 있는데 한국은 각자도생의 사회라 어릴 때부터 공기를 느끼고 문화에 침윤되어 개인의 성장에 의례규범이 부착되어 있다.


그래서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를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왜 대학교를 가? 왜 입대를 해? 혹은, 왜 이순신이 위대해?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바보같고, 이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은 어떻게 그런 걸 질문할 수 있어? 하며 화가 난다. 자신의 문화를 외국에 설명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상대가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질문은 권위에 대한 도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게 관습을 위반하는 사람은 거슬려보이는데, 정작 왜 그런지는 말로 잘 설명이 안되고, 그걸 모르는 사람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외부자는 계속 고립된다. 다문화, 유학생, 외국인노동자 등등. 일본어의 특성상 한자음이 여러 개고 지방마다 너무 어휘, 독음 등이 다른데다 제지업과 지식저술업이 공진화해, 일본어라는 허들만 넘는다면, 설명해주는 정보는 꽤 많다. 읽는게 어려워서 그렇지. 한국은 아예 그런 자료가 없거나 접근성이 없다. 이런 문화적 부분이 으레 당연히 고추장+나물이 비빔밥이 정답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과 닮았다.


똠양꿍은 소스가 문법이다. 재료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 그래서 태국음식은 해외에 진출하면서도 현지 재료를 쉽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국제경제학의 분업구조를 14세기부터 일찍 깨달은 것이다. 각자 잘하는 걸 잘해서 무역으로 교환하자.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오랫동안 우리끼리만 잘 살아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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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규범과 관습으로 환경과 뇌가 세팅되면 그 카테고리의 외부는 생각하지 못하는데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한 타자화가 심해지면 배척, 악마화에 이르기까지 한다. 마일드하게 이런 예시가 생각난다

마을 모두가 10대 후반에 결혼하던 농촌사회에서 자란 할아버지할머니는 아들딸에게 왜 결혼 안 해? 어떻게 안 할 수 있어? 물으며 해야 사람이 된다 한다

모두가 이슬람을 신봉해 하루 5번 기도로 신체가 훈육된 이들은 유럽과 아시아에 종교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기독교일 수는 있어도 어떻게 종교가 없을 수 있지? 가능한가?

학교를 졸업한 모두가 취업해 집을 사고 차를 사던 산업화 시절에 살던 이들은 어떻게 회사를 안 다니고 쉴 수가 있어? 하며 일이 없는 쉬었음청년을 견딜 수 없다.

그렇게 계보는 이어지는데

어떻게 야구를 응원하지 않을 수 있어?
술을 안 마신다고?
뭐? 게임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
헐 인스타 계정이 없다고? 미친거 아냐?
폰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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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생각의 단상

집중은 한 가지만 몰두하기 위해 그외 나머지 백 가지를 다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독서는 책을 읽기 위해 그외 나머지 모든 것을 버리는 자율적인 감금이다.

세상을 선명한 해상도로도, 여러 렌즈로도, 다른 구도로도 보기 위해 읽는다.

사진은 풍경을 찍음으로써 시간을 붙잡는 것이며

여행은 비단 물리적으로 멀리 갈 뿐 아니라 내면의 익숙함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것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발명하는 게 아니라 있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며
보이는 것을 더 자세히 보게 하고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한다.

사랑은 완벽한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함을 견디는 것이고

우정은 자주 만나는 게 아니라 오래 비워도 어색하지 않은 것이며

용기는 두려움의 부재가 아니라 두려운 곳으로 적극적으로 행진하는 것이다.

나이는 시간이 쌓인 것이고 성숙은 해석이 쌓인 것이고

경험은 오래 했다는 뜻이라기보다 자주 수리한 것이며

실패는 끝이 아니라 방향을 수정하는 비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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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남에게 공감받을 수 없는 만성 불치병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늘 고민이 되고 불편해 남은 어떻게 그 병 없이 정상적으로 사는지 알 수가 없다.

고통의 정의를 우회해서 안 힘든 고통은 없고, 지옥의 정의를 우회해서 천일이 하루 같은 재미있는 지옥을 살 수 없기 마련.

그 병명은 종이책을-봐야만해-병이다.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스크린으로 글을 계속 읽지 못한다.

이동하거나 여행할 때 특히 괴롭다. 가볍게 킨들을 들고다니거나 폰으로 읽으면 되는데 잘 읽혀지지가 않아 짐이 늘어난다. 우리말 단행본은 너무 무거워 강제로? 외국어만 읽게 된다. 가벼운 일본문고본이나 펭귄으로.
서양고전은 파싱해서 읽지만 한자는 종이에서만 읽을 수 있다. 논문은 인쇄

만화도 종이로 봐야한다. 온라인결제보다 돈이 더 드는데도. 웹소도 못 읽는다. 일단 스크린과 종이가 함께 시야에 있으면 주의가 분산된다. 노트북이 없는 테이블에서 책으로 읽어야하는데 특이하게 웹툰은 스크린으로 볼 수 있다. 자기맘대로라 참 지랄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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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생각의 단상

운은 불청객마냥 사람을 불쑥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이 우연히 발견하는 것이다

침묵은 모든 말의 결여가 아니라 불필요한 말이 없는 상태다

실패해서 포기하는게 아니라 가능성을 더 이상 믿지 않을 때 포기한다

남보다 위에 군림하는게 최고가 아니라 어제의 자신에게 지지 않는게 최고다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쓰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을 되찾기 위해 멍청비용을 지불한다. 일에 몰두하다가 가족구성원과 시간을 보내지 않고 조급하 맘에 화만 내다 신뢰를 잃고 원하지 않아하는 비싼 해외 여행을 간다랄지

속력은 경쟁력을 만들고 방향은 역사를 만든다. 속력보다 속도가 중요한 이유는 속도에는 어디로 향해 가는가 쿠오 바디스라는 질문까지 포함된 신중하고 반성적인 진행이기 때문이다

지혜는 답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잘 바꾸고 관점을 선명히하 는 것이다.

창의성은 없던 것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커넥팅닷, 아무도 연결하지 않았던 것을 연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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