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rry Winogrand: All Things are Photographable (Sasha Waters Freyer, 2018)보았다.

창동서울사진미술관 전시 <컴백홈>에 갔다가 픽업한 샛노란 리플렛의 뒷편에 스크린 상영 일정 중에 있던 다큐영화다. 먼 길을 다시 발품 팔아 가긴 어려웠고 검색해보니 러시아 유투브에 영상이 있어서 온라인으로 시청했다. 미술관 영상관에 갔다면 한글자막이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화질은 좋았다.

오디오 중에 harbinger(선지자) of the public relations이나 라틴어에서 유래한(휠록 맨 처음에 소개되는), 끝에서 두 번째의=마지막의 바로 전(second to the last)을 이르는 피널티메이트(Penultimate) 같은 좋은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거의(almost)라는 뜻의 라틴어 paene와 마지막(last)을 뜻하는 ultimus가 합쳐진 단어인데 페닌술라가 거의+섬이라는 말로 휠록엔 설명되어있다.

미국 50-80년대 일상적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해 수백만 장의 이미지를 남긴 개리 위노그랜드에 대한 영상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필름 시대에 이미 디지털 시대의 문제가 보인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전시장에서 그림을 보고 와 예뻐 감탄하면서 사진을 찍고, 날씨 좋은 날 정원에서 자연과 풍경 사진을 찍지만 스마트폰 속 누적 저장된 수십만 장의 사진을 다시 보는 사람은 드물다.

위노그랜드가 디지털 시대 이전에 이미 그런 삶을 살았다. 35mm 라이카 카메라로 100만 장이 넘는 사진을 촬영했다. 일견 현상은 비슷해보이지만 결정적 차이는 비용이다. 스마트폰은 셔터를 누르는 비용이 0원이다.

그러나 위노그랜드는 필름 구매 및 현상비, 인화비를 감수하며 찍었다. 만약 1970년대 기준으로 필름과 현상비를 합쳐 롤당 수만 원이라고 가정하면 그가 남긴 1만 롤은 수억 원대 비용에 해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위노 그랜드는 그냥 많이 찍은 게 아니라 어마무시한 경제적, 시간적 대가를 치르면서도논스탑으로 찍었다는 것이다. 더 특이한 점은 지속적으로 셔터를 눌렀는데 대부분은 보지 않았고 남기기만 해서 그의 때이른 죽음 이후 전문가들은 그의 아카이브를 어떻게 다루어야하는지 난제에 봉착했다.

그러니까 위노그랜드는 너무 많이 찍고, 너무 적게 정리해 수십만 장이 미완성 상태로 남았다. 촬영자가 편집하지 않은 방대한 자료를 어떻게 다루어야할까? 에 대해 다큐에서 여러 전문가들의 고민이 담긴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이런 아카이빙은 나아가, 이미지가 너무 많아질 때 우리는 무엇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가라는 질문을 상기시킨다. 으레 예술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 선택의 역사다. 그 반대 사례로서 위노그랜드는 선택을 포기했고, 오직 생산만 했다.

필름 시대의 사진가는 찍고 현상하고 개중 선택해 최종 인화하는 단계를 거치는데 특히 후반기의 위노그랜드는 습관적으로 찍고 찍고 찍고 찍기만 했다. 그래서 미현상된 몇 만롤의 유산은 촬영자가 평생 미처 선택하지 못한 가능성의 산더미라고 표현해볼 수도 있다.

그런 위노그랜드의 레거시를 다루는 다큐에 기대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우리가 스마트폰에 이진법 신호로 남긴 ㅔ이터 더미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필름 시대에 디지털 인간이었던 그는 사진가보다는 데이터 수집가라고 함이 더 적절해보인다. 혼자서 세상을, 미국을 샘플링한 것이다. CCTV, 사물인터넷, 자율주행 데이터, 머신러닝 데이터셋의 아이디어처럼.

그 순간에는 진심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저장했던 것조차 잊어버린 엄청난 자료들. 읽지 않은 메모, 보지 않은 사진, 정리되지 않은 파일이 쌓이고 앞으로도 쌓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가보다 데이터 아키비스트로서 위노그랜드는 미술관의 아카이빙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끔한다. 창동서울시립사진미술관이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전시된 사진보다 보관소의 필름 상자가 더 많기 마련이기 때문에 큐레이션이 중요하다.

나아가, 심혈을 기울이는 제작방식 특성상 작품 숫자가 제한적인 회화와 달리 사진은 진정한 의미는 개별 사진이 아니라 덩어리, 모음집, 클러스터라고도 생각해보았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일상적이고 우연적인 모습을 30년 동안 지속적으로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수집한 거대한 시각 데이터베이스는 전체 학습단위를 모두 이해할 때 그 온전한 의미가 다가온다.

위노그랜드가 미국을 백과사전과도 같은 초상(encyclopedic portrait)으로 구축했다고 다큐에서 말했을 때 그 의미도 동일할 것이다.

백과사전은 소설이 아니다. 결론이 없다. 플롯도 없다. 백과사전은 정보의 모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을 촬영했던, 모든 것은 사진촬영대상이라고(제목) 생각했던 위노그랜드의 작업이 같다. 그의 사진은 답정도 아니고 재판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려고 했을 뿐이다. 해석하지 않고 기록만 했다. 거기엔 소수의 위대한 영웅의 불가능한 전설은 없고 매일의 평범한 영웅적 하루가 있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것을 수집했으나 아무것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남기기만 했던 그를 보며 누구는 의미없다할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왜 그렇게 까지 했던거야! 그런 의미없음에 일말의 미학이 있는 것임을 모른 채.

위노그랜드가 말하길, 나는 어떤 것이 사진으로 찍혔을 때 어떻게 보이는지 알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좋은 말이다. 그의 사진들이 부담스럽게 설교하지 않는 까닭이 왜 인지 짐작된다.

현실 속에 풍덩빠져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시공간이 사진 속에서 어떻게 변형되는지 실험하는 자세는 배려적이다. 이미 무엇을 말할지 정해두고 현실을 끼워맞춘 게아니라 세상이 무슨 말을 하는지 보자! 하면서 관찰한 것이다. 이해가 우선이고 해석이 나중이었다.

다큐에서 다 보여줄 수 없었지만 엄선된 그의 사진은 모두 일관적으로, 어색한 표정, 우연한 몸짓, 예기치 않은 구도, 의도되지 않은 연출이 많다. 드라마틱한 무언가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사진은 감상하기 편안하다. 무의미한 일상같지만 묘하게 중독적이다.

그의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걸까, 빛이 저기에 있으니까 정오겠네, 저 낡은 사물은 도대체 어떤 경로를 지나 여기까지 왔을까 토이스토리인가, 하는 연상작용의 몰입에 빠지게 된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의 끝에 정말 좋은 사진가는 세상을 엄격하게 분류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사진을 머리와 눈과 마음을 하나의 축 위에 놓는 것이라고 했다. 위노그랜드도 그 연장선에서 사진은 주장이나 판결이 아니라 발견의 과정이라 여겼던 모양이다.

좋은 사진가의 마음가짐이란 그런 것이다. 평가보다 관찰을, 규정보다 이해를, 해석보다 호기심을 앞세우는 것.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앞서나가 말로 프레이밍하기 전에 꽃잎의 방향과 색깔과 이슬을 지켜보기. 사람을 보고 호불호와 편견으로 판단중지하고 그가 서있는 자세와 손짓을 보고 느끼기. 낡은 건물을 보고 허름하다고 단정하기 전에 벽에 켜켜히 쌓인 시간의
윤슬을 응시하기.

그리하여 카메라는 눈의 연장선이면서(시각-기계), 명상의 태도를 수행하는 사유-기계가 된다.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보는 방식을 바꿀 수 있게 만든다. 판단하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지켜볼 수 있게. 좋고 나쁨을 결정하기 전에 우선 빛과 시간과 자연과 사람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경청하는 자세를 훈련할 수 있다.

다큐의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사진이 회화를 몰아내고 객관적 재현의 왕좌를 차지했다는 통념을 은근히 해체한다는 데 있다. 명시적으로 드러난 내용은 아니고 영화를 보며 나의 의식의 흐름이 그랬다.

19세기 초 광학기계 등장 초입에 많은 회화가들은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Paul Delaroche같은 사람은 오늘부터 회화는 죽었다고 했다고 한다. 실제 발언여부는 논쟁적이긴한데, 당시 미술계의 위기감을 잘 드러낸다.

그런데 사진의 발전사를 보면 오히려 역설적이다. 외적 발전사인 매체의 기술적 성장을 보면 사진기는 점점 완벽해졌다.

사진 기술은 계속 발전해서

노출 시간 단축, 선명도 향상, 컬러 구현, 자동 초점, 배터리 시간 향상, 광각 스마트폰 카메라, AI 보정 등등. 대단하고 눈부신 성과다.

기술적 목표는 일관적이었다.
더 정확하게, 더 많이, 더 빠르게 현실을 기록하자!

이렇게 외적으로 보면 사진은 승리의 역사다.

그러나 내적 발전사를 검토하면 점점 불완전성을 발견했던 것 같다.

사진은 진실을 보여준다고 초기에는 믿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사진은 현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예컨대 렌즈 선택, 구도와 프레이밍, 셔터 타이밍, 인화 방식, 크롭이라는 사진가의 인위적 선택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생성된다. 따라서 사진은 객관적 기록을 가장한 의도성의 결과물이었다.

여기서 위노그랜드의 생각을 다시 음미해보자. 거리에서 남녀가 걸을 때 회화적 관점은 ˝저들이 누굴까?˝라면 다큐적 관점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 인데 위노 그랜드는 카메라가 저 장면을 어떻게 이상하게 만드는 거지? 를 고민했던 것이다.

시간이 없고 이제 출발해야해서 아래는 미완성노트복붙.

19세기에는
회화 = 해석
사진 = 기록

20세기엔
회화 = 자기 해석을 인정
사진 = 객관성을 주장하지만 실제론 강한 해석

그래서
회화는 ˝나는 해석이다˝라고 솔직하게 말함
사진은 ˝나는 현실이다˝라고 말하면서 해석을 숨기는 편

사진은 회화를 대체한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사실 사진은 회화를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회화가 수천 년 동안 씨름해오던 문제를 재조우했다.

회화의 핵심 문제는 원래 인간은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
였는데
사진이 등장한 뒤에는 카메라가 세계를 어떻게 보게 만드는가로 바뀌었고
사진은 재현의 종착점이 아니라... 재현 문제의 제2막
기술적으로는 최신 사진가였지만, 철학적으로는 오히려 고전 회화의 질문으로 되돌아간거다

사진을 통해 현실을 증명하려 하지 않지 않은 시각인식의 회의론자로서 위노그랜드는 외려 현실이 얼마나 쉽게 낯설어지고, 오해되고, 비틀리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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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표현
있지 않은 것 같다니!

있다 아니다 사실을 판단해줘야 할 AI야 홍상수 데이터셋으로 잘못 배웠니
(그의 영화에서 늘 ‘그런 거 같습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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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quin Phoenix and Michael Stuhlbarg


<조커> <보 이즈 어프레이드> <나폴레옹> <허>의 호아킨 피닉스와

<링컨> <컨택트> <콜미바이유어네임> <더포스트>의 마이클 스툴버그가

너무 똑같이 생겨서 깜짝 놀랐다.

옛날에 올렸던 포스팅에 리스트 추가해야겠다.

-내 생각에 닮아보이는 얼굴-

한쪽이 한쪽의 보급형인 경우도 아닌 경우도

주원 강동원
박진영 멧데이먼
제시 플레먼스 브레드피트
송중기 홍경
김고은 이수지
한소희 류진

유현준 손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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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에 1위로 올라와 있길래 <중간계>보았다. 러닝타임은 1시간이다. 작년에 개봉했을 때 CG가 어설프다고 사람들이 욕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1위라니

감독의 전작 <카지노>나 ˝너 납치된거야˝의 손석구가 빌런으로 나오는 베트남 배경의 스릴러 <범죄도시2(2022>풍으로 시작한다.

음악은 퓨전 국악풍이니 <전우치전>이 생각나고

가장 평범한 모습으로 숨은 고수가 있다는 도시전설은 <소림축구> 등 홍콩영화의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 홍콩영화의 백미인 <쿵푸허슬>의 CG, 액션연출과 유머를 닮았다.

어설픈 CG가 문제가 아니라 컷마다 CG의 퀄리티가 균질하지 않고 화면과 어우러지지 않는 것이 문제인데 온갖 CG에 대한 불만이 퐁글퐁글 샘솟는 중에

갈수록 얼탱이가 없는 진행에 턱이 빠져서 실없는 웃음이 나오다가 끝났다.

설마설마 했는데 매트릭스 베인처럼 끝날지 몰랐다.

시온 반란군의 함정 해머(묠니르)호 탑승원 베인의 매트릭스 아바타를 감염시켜 현실에 존재하는 베인의 뇌까지 잠식한 스미스 요원의 느낌으로 슬레이트를 쳤다는 말이다.

김유정이 주연한 티빙 오리지널 피카레스크식 드라마 <친애하는X>에는 리움미술관, 파주 미메시스미술관이 나왔다.

그렇듯, <중간계>에서는 안국역, 조계사, 인사뮤지엄, 세종문화회관과 광화문광장이 나온다.

특히 지하철 승강장 바깥은 누가 보아도 3호선 안국역이다. 1번출구에 국립민속박물관이 있고 B1 복도가 낯익다.

그러나 변요한 일행이 뛰어 들어간 승강장은 좁은 섬식 승강장이라 안국역이 아니다. 양방향으로 탑승가능하지 않다.

이정도로 승강장 사이가 좁은 곳은 종로3가역이나 을지로3가역이 있지만 기둥 타일 디자인이 눈에 익지 않다. 지축역도 섬식 승강장이지만 지상이고 지하가 아니다.

심지어 지하철이 곡선으로 휘어져 승강장에 진입하기 때문에 3호선 라인에는 없다.

인천1호선 박촌역이었다.

검단에서 부평까지 내려오는 중에 395m의 계양산과 115m의 형재봉을 터널 뚫고 직선으로 오지 않고 우측으로 산을 감싸며 휘어져 내려오기 때문이다.

김포 골드라인의 수요예측 실패로 지옥철이 되자 그 대안으로 김포-방화 5호선 연장선이 부각되었는데 예타조사하면서 인천시가 검단을 지나달라고 해서 또 휘어지게 되었다.

한중일 각 나라마다 약간의 그레이한 영역이 있다. 합법도 아니고 위법도 아닌 영역, 사회의 규율과 관습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젊은 혈기가 어떤 탈출구로 사용할 수 있는 장소.

서부 웨스턴 같은 곳이다. 자신의 힘과 의지로 무언가 제로에서 쌓을 수 있을 것 같은 곳. 태어난 사회가 강요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부, 권력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곳이다.

2000년대 초 조폭 느와르 시대에는 대개 성남시 같은 서울 재개발 지역이었다. <똥파리>에서 양익준이 열연한 고통 받는 가난한 서민 가정이 집결한 판자촌 같은 곳을 싹 밀고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아파트를 짓고자 인력을 동원한다.

그렇게 동원되는 청년들도 시골에서 상경한 젊은이들인데 장기 판의 말로 소비된다.

사회의 감시망이 촘촘해질수록 그런 중간계적 장소는 없어진다.

일본은 호적제도가 미비하고 (<어리석은 자는 누구인가>처럼) 디지털 전환이 안되었고 사무라이 지방분권의 영역으로 각 지역마다 행정시스템이 제각기이라 누가 누구인지 신분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도쿄리벤저스>의 양키, 폭주족이나 <바람의 검심>의 신선조, 과거의 야쿠자 오늘날의 한구레처럼 사조직을 만드는 것이 조금 사회적으로 양해되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일본은 완벽한 공적 영역에 있서 정치경제사회의 최전선을 달리는 이(한자와 나오키 등) 완벽히 사적 영역에 있어 개인적 취미에 탐닉하는 세카이계나 히키코모리나 오타쿠가 양극단 사이에 사회와 불화하고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계속 떠돌아 다니고 찾으려면 찾을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중국은 일단 나라 사이즈가 너무 커서 상식과 인지 감지 범위를 넘어설 수 있다. 또한 소수민족이나 그들이 사는 곳이 그런 그레이한 영역으로 기능한다.

<와호장룡>에서 티벳(으로 잘못 자막이 달린) 신장 위구르가 그렇다. 분명히 자막과 말에서 씬쟝新疆 Xīnjiāng이라고 했었다. 티벳은 씨짱西藏 Xīzàng이다. 둘 다 중원 입장에서는 너무 멀다. 대개 무협의 정파가 아닌 마교나 사파가 있다고 여겨지는 곳은 남만, 청해로 무당파 소림사가 있는 중원이 아닌 외곽 지역, 타자의 공간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샤이어는 영국의 순수한 시골이고, 사루만이 있는 모르도르는 불가리아다. 민족문화에서 낯선 타자의 공간으로 슬라브 민족을 택했다.

한국은 국내에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국외가 그 타자의 공간이다.

범죄가 일어나는 곳은 베트남, 필리핀, 수리남, 태국, 캄보디아다. 한국 내부에선 촘촘한 CCTV와 높은 디지털 문화로 인해 개인이 숨을 곳이 없다. 북한 같은 극장국가 감시사회는 더더욱 없다. 사생활이 없는 곳이다. 영화 <탈주>에서 북한 안에 여자 무장 반란군 설정에서 핍진성이 없었다. 애니 <광장>도 그런 측면에서 스웨덴 남자(할머니는 한국인)과 북한 여성 사이의 로맨스가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기에 핍진성이 덜해보였다. 현실적이지 않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한반도는 한반도 외부를 상정해야 그런 그레이 공간이 나온다. 인천을 거쳐 외국으로 나가면 거기서 이제 한국 내부에서 불가능했던 수많은 것을 시도할 수 있고 외국에 있는 이들의 행적은 모호해진다. 그런 블러, 흐림이 주는 애매모호성과 자유를 위해 출국하기도 한다.

한국 안에서는 모두 말씨와 민족과 문화가 높은 수준으로 동질적이어서 바깥을 상상할 여지가 없다. 사회 감시망도 촘촘하다. 코로나 초기에 입국 보균자의 이동경로까지 추적해 멍석말이 했을 정도다.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이 만주 웨스턴을 시도했지만 그런 광막한 공간은 한국에 없다. 일단 한국어가 아니라 해독불가능한 외국어로 된 정보가 들려야 비로소 한국인은 이역이라고 여긴다. 한반도 안에는 율도국이 없다.

미국은 서부 웨스턴 카우보이였고 디지털 공간을 거쳐 우주 달탐사와 화성 식민지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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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상자 속의 양>을 보던 중에 제일 의아했던 건

왜 남편이 아내를 부를 때 ˝夫(おっと)˝라고 했을까라는 것이다.

남자가 자신을 부를 때 남편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색하지만
아내를 칭할 때 ˝남편은?˝ 이라고 하는 것은 더 어색하다.

야구하러 가기 전, 드라이 샴푸할 즈음 등등 세 번 나왔는데 자막도 이상했다.

한 번은 ˝당신은.. ˝ 한 번은 ˝오토는?˝ 이라고 풀었다.

엔딩크레딧은 너무 빨리 지나갔는데다가 다 영어 음차로 쓰여있어서 캐치를 잘 못했는데 돌아와서 확인해보니

여자 주인공(아내) 이름이 甲本音々(코모토 오토네)였다. 이름을 부른 거 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최신작 중 도전적인데 괜찮은 것은 <괴물>이고 도전하지 않고 옛 스타일 그대로 갔는데 나쁘지 않은 것은 넷플 드라마 <아수라처럼>이다. 브로커와 상자 속의 양은 최고는 아니다. 영상미만 좋은데 인위적인 느낌이 든다.

확실한 건 고레에다가 좋아하는 아역배우상이 있다. 그들은

진한 쌍커풀에 눈이 부리부리한데 여린, 마치 어린 사슴을 생각나게 하기도 하고, 어둠 속에 타오르는 촛불을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그 고레에다 히로카즈 키즈의 이름은
<상자 속의 양>의 쿠와키 리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니노미야 케이타
<어느 가족>의 죠 카이리
<괴물>의 히이라기 히나타와 쿠로카와 소야 (히이라기는 이상일의 <국보>에서도 아역출연)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히로세 스즈
다.

한국 아역배우 중 미스터선샤인과 승부의 김강훈이 유력하지만 몽골로이드 DNA가 강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취향에 가깝지는 않다.

그런데 이런 아가들은 스크린에 담길 때는 예쁜데 갈수록 성장하며 얼굴이 변하고 앞으로 계속 배우활동을 할지 알 수 없기에

그때 그 순간에만 존재하고 사그라지는 벚꽃과 같은 배우들이다. 내년을 기약할 수 없다. 이번 <상자 속의 양>에서도 얼굴이 변해감이 보였다.

제목은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을 암시하고 책을 읽어주는 신이 있었고 어린 왕자처럼 언젠가 없어진다.

//
스토리는 다섯 구조로 1. 휴머노이드를 데려온다 2. 휴머노이드를 가족이 받아들인다 3. 휴머노이드의 존재를 어떻게 대하고 가족 안에 수용할지 갈등하고 고민한다. 4. 잠잠하게 받아들인다. 5.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이를 해결한다.

극적인 갈등은 없고 드라마틱한 문제 해결은 없어요 잔잔해요
후반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여러 터치가 들어가는데 (키키 기린 같은 못된 말 하는 엄마, 가족간 소통미비와 오해, 본질적 태도로 인한 갈등, 아이들의 사생활 자기들의 세계)
이 부분이 설득이 되려나 모르겠어요

호적제도 미비하고, 지방 사무라이 영주의 분권이 강하고, 도쿄리벤저스나 바람의 검심 신선조처럼 그레이한 영역에 파벌이 만들어질 수 있는 일본적 풍토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예요

<침묵의 친구> 식물과의 교감, <애프터양> 휴머노이드, 김태용의 <원더랜드>의 아이디어가 들어가있는데, 김태용은 문제제기만 하고 끝났다면 고레에다는 디벨롭을 했고 자기의 것으로 소화했는데 썩 시원치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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