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결산

@erino_87 가 꾸준히 짐자무시 영화 소감문을 올려주어 정기적인 가이드를 서행하며 따라갔다. 14편 중 패터슨, 파마시브만 봤어서 나머지 12편을 보았고 나의 일부가 되었다


@cinemakase 가 1월에 소개한 영화 50여편 중 안 본 것 14편이 있어서 도서관, 유툽, OTT에서 찾아 하나 빼고 다 보았다


스즈키 세이준 <아지랑이좌(1981)>

대니 보일 <트레인스포팅(1996)>

테리 길리엄 <브라질(1985)>

크리스토퍼 놀란 <두들버그(1997)>(3분 단편)

장 자끄 베넥스 <베티블루 37.2(1986)>

프리츠 랑 <메트로폴리스(1927)>

폴 슈뤠이더 <미시마 그의 일생(1985)>

테시가하라 히로시 <타인의 얼굴(1966)>

자크 타티 <플레이타임(1967)>

데이빗 크로넨버그 <비디오드롬(1983)>

ㅠㅠ레이 엔라이트 <레디 윌링앤 에이블(1937)>

이대희 <파닥파닥(2012)>

얀 슈반크마이에르 <어둠 빛 어둠(1989)>(10분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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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애스터의 네 번째 장편영화 <에딩턴(2025)> 보았다. 칸에서 1.4점, iMDB에서 6.6점, 제작비 2500만불의 반도 거두지 못한 처참한 성적에 수입배급사에서 정식상영을 결정하지 않았다. 며칠 전 vod로 풀렸다는 말을 듣고 왓차에서 결제해서 보았다.


전작과 달리 공포라기보다 현실 미국사회를 풍자하는 서부극에 가깝다. 최근에 접한(심지어 바로 어제 접한) 도서, 영화와 묘한 연관성이 있었다. 줄거리는 밝히지 않는다. 영화를 스포 없이 다른 작품에 비유하자면 세르지오 리오네+시라트+어쩔수가없다+마니아(책)+부고니아+소년의시간에 아리 애스터식 터치가 들었갔다.


세르지오 리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 3부작을 대표로 하는 서부극의 황량한 뉴멕시코 사막을 배경으로 서부극처럼 개인적 원한이 악순환이 되는 구조인데 보다 매운 맛이다.


영화의 뒷 부분의 폭사는 시라트급 충격이 있고 EDM은 없다. (현재 개봉 중인 <시라트>의 홍보문구는 서브스턴스급 충격이라고 하지만, 더? 아직도 더? 같은 크례센도형 바디호러보다는 순간 놀람+서스펜스가 압권인 촉각적 EDM의 영화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처럼 작업쳐서 누명씌워 범죄를 덮는데 우연히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에게 돌아가는 정황이 있다. 물론 박찬욱처럼 유쾌하게 끝나지는 않고, 아리 애스터식 무겁고 눌러 앉은 음산함이 없지 않다.


영화는 21년 언저리 코로나 바이러스 락다운 때 강제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 음모론 유투브, BLM운동을 둘러싼 모든 정치적 혼란을 그리는데, 이는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책 <마니아>에서 비판하는 미국사회의 풍경과 닮았다. 저자처럼 대체 근과거를 상상했든, 감독처럼 가상의 미국도시를 다루었든, 이야기는 얼마든지 현실이 될 수 있고 부분적으로는 이미 겪은 엉망진창의 미국현실을 다룬다.


백인하류층에 SNS로 퍼진 음모론하면 제시 플레먼스가 연기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부고니아>다. 어른 없는 가정과 교육 없는 학교에서 답을 얻지 못했는데 쇼츠나 릴스가 세상에 대한 간단하고 강력한 설명을 제공한다. 소속감을 제공해주는 공동체에 공유되는 반복되는 짧은 슬로건과 해시태그가 이 말에 공감만하면 우리 편이 된다는 인스턴트 정답을 제공한다.


영화에서 BLM 집회에 참가하는 청소년들은 <소년의 시간>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며 정체성을 형성하는 청소년들에게 SNS가 먼저 쉬운 아이덴티티 프레임을 제공하며 깨어 있고 진실을 아는 소수의 정의로운 자라고 명명하며 좋아요로 즉각적 보상이 강화된 심리구조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논쟁에서 이겼다는 쾌감이 도덕적 우월감과 결합되고, 화낼수록 디지털 공동체의 보상이 커지며, 더 급진적인 태도를 보일 수록 주목도가 높아진다. 너는 속지 않았고 오직 너만 진실을 봤다는 메시지가 정서적 앵커를 제공한다. 이 모두 불안과 무력감을 겪으며 피해의식과 권위의식이 뒤섞인 복잡한 아버지 캐릭터의 우당탕탕 땜빵식 해결이 아이들의 상태를 악화시킨다.


유전(2018), 미드소마(2019), 보이즈어프레이드(2023) 같은 아리 애스터의 이전 작품과는 달리 <에딩턴>은 개인의 트라우마와 가족 구조를 부각하지 않고 집단의 도덕과 사회의 확신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언뜻 애스터 영화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이 봉준호식 범죄드라마, <설국열차>가 봉준호식 SF, <데드돈다이>가 짐자무시식 좀비물, <오직사랑하는이들만이살아남는다>가 짐자무시식 뱀파이어물인 것처럼 장르영화를 만들어도 감독의 터치가 들어가기 마련이다. 심지어 감독이 데뷔작으로 생각했던 영화인데 여러 제약조건 속에 <유전>이 먼저 개봉해 감독 스스로는 허명을 얻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일단 애스터 영화에서 보이는 연출적 공통점은 있다. 기괴한 인형 소품도 등장하고 화면 전환하며 빛의 반사를 활용했다. 차가 선인장에 부딪히며 프레임 둘레로 선인장군이 등장하며 2000년대 할리우드식 카메라 돌리아웃을 활용한다.


무엇보다 아리 애스터는 후반에 강하다. 그의 영화는 끝까지 봐야하는 이유다. 마지막 30분에 사건이 증폭되면서 오히려 의미가 닫히는 게, 마치 깔끔하게 매운 고추기름 같다.


애스터 영화는 으레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처음에 불안은 개인의 문제처럼 보인다. 무력한 주인공은 고뇌하고 주변 인물에게 침범당한다. 그러다가 점점 구조문제가 드러난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후반부에서 탈출구 없다는 점이 확정된다. 그래서 보는 이에게 해결되었다는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는다. 초반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 질서도 복원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에 믿었던 모든 것이 아스라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저항했던 주인공이 이 세계의 일부가 되면서 빠져나올 수 없는 공포의 구조적 수렁에 갖힌 기분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회풍자 서부극도 이전 세 장편영화의 축 늘어진 음산한 공포와 가족 트라우마만 없다뿐 아리 애스터식 터치가 잔뜩 들어가있다.


대부분 다른 감독은 복선을 회수하면서 스토리를 닫는다. 비밀이 드디어 폭로되고 악의 정체가 드러나며 처음 갈등을 촉발한 문제상황이 해결된다. 마치 야구경기에서 홈그라운드에 돌아오듯 주인공은 집에 돌아오며 마무리 된다. 쿠키로 스케일이 확장하며 속편이나 다음 시즌에 대한 예고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리 애스터는 다르다. 관객에게 정보를 차근차근 하나씩 주면서 이해를 빌드업하다가 기존 정보를 재배열해서 의미를 폭발시킨다. 우리는 위기 속에서 얼마나 빨리 서로를 악마로 만들 수 있는가... 위기 상황에서 인간은 얼마나 빨리 도덕적 확신을 폭력으로 바꾸는가...


영화를 보는 관객이 뇌내회로를 돌리면서 계속 쌓아온 해석이 다 맞고 이제 되돌릴 수 없고 너도 이 무서운 사태의 공범이야, 하면서 동참시킨다. 연루된 관객은 감독의 스토리에서 벗어날 수 없고 무서운 현실의 빌딩블록이 된다. 그래서 초자연적 현상이나 악마 숭배도 없는데 SNS공간에 마을광장이 침범당한 이 이야기가 오싹해지는 것이다.


위 사진은 셰리프로서 시장출마하는 연설을 담은 쇼트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실제 모습을 블러처리하고, 카메라에 초점을 맞추었다. 오늘날 우리는 숨 쉬는 신체가 아니라 SNS에 등장하는 가상의 모습만이 진짜라는 감독의 메시지다. 자신을 재료로 하되 자신이 아닌 이 디지털 아이덴티티는 동그란 조명과 카메라의 사각 프레임 속에 이중으로 갖혀있어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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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는 기승전결에 맞춰 억지 자극을 추구하고 어떤 감독은 당장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실제 삶과 유리된 과장된 연기를 배우에게 주문하기도한다

한편 최대한 객관적인 관찰자적 시점을 유지하려는 사회학자나 집단 속에 풍덩 자신을 던지되 외부자로서 관점을 굳건히 하고 현장답사하는 인류학자처럼 카메라로 피사체를 응시하는 영화가 있다. 그런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민낯이 무엇인지, 우리 곁에 있을법한 인물이 상황 속에서 어떤 대응을 하는지 차분하게 지켜볼 수 있게끔한다. 예컨대

70년대후반생 남성의 사별 명퇴 후 30년 전 여행 자유화 직후 유럽배낭여행 때 이탈리아 친구 찾으러가는 <피렌체>
편부모 삼형제 장남이자 공고 졸업반 18세 사회초년생의 적응을 다루는 <3학년 2학기>
제곧내 <82년생 김지영>
자기도 자기를 모르겠고 호르몬의 지배를 받는 17세 낭랑청춘이 과거 트라우마를 직면하는 <세계의 주인>
손녀결혼식 대신 첫사랑 49재에 가는 노년여성의 성과 사랑을 그린 <첫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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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릭스에 있는 독립영화관 많이 가봤는데

라이카시네마는 연대후문 콘크리트노출건물
아트하우스모모는 이대 ECC안 지하 낙차 높은 설계
KU시네마는 건대 안 극장
인디스페이스 홍대입구
등등 대학가와 연관된 곳이 많다

광교 경기인디시네마
아트나인 이수역(강남 유일)
에무시네마 광화문
헤이리 파주
더숲 북카페와 연결된 지하 노원처럼
수요는 있는데 공급없는 곳도 좋은 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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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슈레더 감독의 미시마 그의 인생 보았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평생 고민하며 형식미를 추구해 온 그의 일대기를 감각적인 무대 연출과 장엄한 음악으로 몰입감을 높여 빚은 훌륭한 시네마토그래피다. 예술지상주의적 삶과 아티스틱한 영화의 미감이 정합적이다. 엔딩의 일출은 그 이전의 4개의 장에서 미시마의 인생을 모두 종합한다.


국가별로 진입이 다소 어려운 특유의 감성이 있다. 예컨대 한국의 한, 프랑스의 자유분방함, 러시아의 구원이 없는 죽음, 일본의 헛되고 쓸쓸한 와비사비 감성 같은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적인 미학을 순수하게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서구권에서 여전히 찬사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극우민족주의적 태도가 공분을 사고 일각에서는 반발심을 일으키는 듯하다. 작가의 인생관과 정치적 입장도 작품을 해석하는 하나의 태도다. 별개로 미학적 입장은 음미해볼 부분이 있다.


감독은 영어로 각본을 썼고 배우는 일본어로 연기했다 

그러나보니 문화적 의미손실이 일어난다. 들리는 일본어 음성과 영어 자막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전혀 뉘앙스가 다르다. 어떤 부분은 아예 도착어인 영어에 맞게 앞뒤를 잘라버린 부분도 있다. 각본을 우선적으로 영어로 썼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며 풍부한 2차 창작이 들어갔다고 본다. 일본어는 대표적인 고맥락 언어다. 생략하는 표현도 많고 해석에 사회문화적 이해가 깊이 들어가야한다. 기계적으로 번역해서는 말이 통하지 않으며 전달방식도 신경써서 특유의 태도, 악센트와 함께 발성해야한다.


예를 들어 이런 부분이 흥미롭다. 맨 처음에 전화로 여집사가


마님께서 학교에 (奥さんが学校に)라고 하는데 이미 일본어 자체에서 뒷 부분의 (아이를 데리고 가셨다) 다 끊어먹었다. 영어 자막에서는

당신의 아내가 이미 그들을 학교로 데려갔다(Your wife's already taken them to school)라고 했다. Your wife에는 오쿠상(안주인, 마님)이라는 표현에 들어간 화자의 청자에 대한 위계관계가 드러나지 않는다.


또, 혈서를 쓰는 장면에서 미시마는 손가락 끝에 피를 내는데 지켜보는 대원에게 아파보이나?(이타소오까, 痛そうか)라고 한다. 영어로는 아프지 않아(It doesn't hurt)라고 한다. 어느 한 언어에서 직역하면 절대 말이 안된다. 일본어에서는 그런 식으로 겸양적으로 설의법으로 물어야하고 (아파보이나? 사실 안 아파), 영어에서는 사실 그대로 아프지 않다라고 해야지 Does it look painful to see? 같은 말로 하면 매우 어색하다.


옛 공계귀족 출신인듯한 할머니가 요즘 젊은애들을 한탄하는 장면에서도 특유의 귀족어법이 나오는데 영어로는 애초에 뉘앙스를 살릴 수 없다.


또, 음성으로는 스님, 중을 의미하는 보-즈(坊主-한자로 읽으면 방주)가 들리고 자막에서는 조수나 카톨릭의 복사를 의미하는 애콜라이트(acolyte)가 뜬다. 그리스도교의 시종을 의미하는 애콜라이트는 이정재 배우가 참여한 스타워즈 시리즈 제목이기도 하다. 젠 마스터와 그 제자 관계에서 '제자'정도의 의미다. 기독교 제자인데 불교 제자로 종교문화적인 쓰임새가 바뀌었다. 그런 단어는 또 장로가 있다. 원래 노장 사상에서 유래한 도교 용어인데 이제 개신교의 직급 높은 일반신자로 바뀌었다. (고 한형조 교수의 책에서 읽었다)


마지막 자위대 앞의 일장연설 첫 대사도 흥미로웠다.

일본어로는 이렇게 들렸다.

自衛隊の諸君。

このような時代で、諸君と対面するのは、実に残念なことである。

俺は、悲しみと憤りをもって、ここに来た。

今の日本で、ただ自衛隊だけが、日本の魂を持っていると、俺は信じていた。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렇다.

자위대 제군. 이와 같은 시대에 여러분과 마주하게 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나는 슬픔과 분노를 안고 이 자리에 왔다.

지금의 일본에서 오직 자위대만이 일본의 혼을 지니고 있다고 나는 믿어왔다.


그런데 자막에서는 이렇다.

Dear soldiers! 

It's a terrible affair to have to speak to army men in circumstances like these.

I thought that the army was the last hope of Japan,

the last stronghold of the Japanese soul.


친애하는 장병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군인 여러분께 말씀드려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끔찍한 일이다)

저는 군대가 일본의 마지막 희망이자

일본인의 정신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습니다.

음성과 자막이 어떻게 다르냐?


일단, "나는 슬픔과 분노(이키도오리)를 안고 이 자리에 왔다."라는 표현이 아예 빠졌다.

자위대의 제군과 soldiers는 소속에서 차이가 있고

끔찍한 일(terrible affair)과 안타깝다(잔넨..)은 다른 말이며

대면하다와 have to speak to는 다르게 들리고

소울보다 혼(타마시이)이 더 입체적인 문화적 뉘앙스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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