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홍콩 필름 마켓 갔다는 브이로그 겸 여행기를 올렸는데 BDNS에서 작품을 수입했나보다. 뉴미디어인 유투브 채널로 시작해서 배우 정성일을 기용해 웹드라마를 만들고 영화도 수입하고 행보가 특이하다. 비전형적인 방식으로 문어발 확장을 하고 있다.


https://youtu.be/iVa_HtODG8k?si=kW0qaQ0SJze7wr4N



그러나 컨셉은 확실하다. 코미디. 정식 공채 코미디언으로 데뷔한 것은 아니지만 문상훈도 부캐가 희극인이고 영상도 코미디를 지향한다. 웃음은 중요한 미래 어젠다라고 생각한다. 코미디는 현실문제가 버겁고 국제정세가 과열되어 있을 때 해학으로 카타르시스를 주어 분위기를 체인지하기 좋다. 사회분위기뿐 아니라 실제로 여름이 덥기도 하다. 올해는 수퍼엘니뇨이고, 통계적으로 계속 온도가 상승하고 있다. 기후위기가 증대되어 너무 더운데, 사회도 기후도 안팎으로 더운 날씨에 웃음이라도 없으면 어떻게 생존할지.


중세 왕정 출입을 허락받은 비귀족계층은 광대다. 종교율법이 엄격한 이슬람 국가에서 아재개그하는 스탠드업 코미디가 각광을 받는다. 돈을 아주 많이 본다고 들었다. 또, 매사 공기를 읽으며 눈치를 보아 과하게 사람을 억압하는 일본사회에서 보케 코미디 예능TV가 계속 나온다.


의례, 율법, 권위가 강한 사회에서 코미디가 출현하는 것을 라깡을 경유해 표현하면, 욕망을 금지하고 질서를 만드는 상징적 기표이 아버지의 이름이 강하게 제도화된 상징계에서는 대타자의 응시가 일상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고 그 결과 상징계는 과잉 안정화되며 실재계는 틈새적으로만 출현한다, 라고 해볼 수 있겠다. 대타자의 일관성을 신봉하고 아버지의 이름이 견고하게 봉합된 상징계에서 해학이 오아시스 역할을 한다. 종교 율법이나 강한 사회 규범은 상징적 기표를 제도적으로 반복하는 장치일 뿐, 이런 구조적 억압이 강할수록 틈새나 균열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비정상적 방식으로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이렇게 웃음으로 컨셉을 잡은 BDNS가 마음에 든다고 말하고 수입한 영상도 코미디다. 2008년으로 돌아가는 타임슬립물이다.


타임슬립은 기본적으로 과거를 더 찬미하는 회고적, 레트로한 시각을 바탕으로 하는데 현실이 힘들면 항상 등장하는 트렌드다. 지금 중동, 우크라이나는 전쟁 중이고 정치는 암담하며 경제는 양극화로 힘들며 생존을 위한 하루하루 밥벌이의 지겨움에 마음의 평화가 없다. 시청자층인 대략 2-40대가 보호받았던 시절로 한 20년 정도 시계를 돌려 익숙한 옛 광고판, 물건, 패션 등을 보여주고 과거의 자신을 소환한다. 김종국이 유투브 채널에서 자기 콘서트 오는 사람은 그 노래 불렀던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말을 얼핏했던 게 기억하는데 그런 비슷한 감정이다. 1995년 터보로 데뷔한 김종국이 2005년 사랑스러워를 내며 전성기를 맞이했을 Y2K시절을 그리워하는 팬들이 찾아온다는 말일테다.




타임슬립에 일본 현실의 역차별문제와 뮤지컬을 섞으면 부적절한 것도 정도가 있어다. 쇼와 시대로 돌아간다. 과거를 무한히 찬미하지만도 않고 현실을 완전히 부정하지만도 않는 균형있는 드라마다.


타임슬립의 한 계열인 멀티버스에 존재론적 철학을 섞으면 에에올이다.



과거이동하는 고전적 빽투더퓨처, 어바웃타임, 미드나잇인파리, 폭군의 셰프, 인현왕후의 남자도 있다. 모두 다 이유가 있다. 과거를 수정하고 싶거나, 현실에 없는 사랑을 찾고 싶거나, 1920년 파리를 그리워하거나, 운명적인 만남을 추구한다.


시간을 이동하듯, 시공간이 아예 다른 판타지 세계로 이동하는 이세계물도 있다. 나니아연대기도 있고 최근 일본애니에 아주 많다. 월소득의 많은 분이 세금과 공과금으로 나가 가처분소득이 부족한 일본의 직장인들이 혼밥하며 20분 동안 보는 양산형 애니로 많이 나왔다. 이곳의 가장 평범한 기술, 물품을 사용하는 별볼일 없는 내가 저곳에서는 크게 대접받는다는 심상을 깔고 있다. 부자나라의 가난한 국민이 감상하는 시대적 픽션이다.


비슷한 계열로 타임루프물인 엣지오브트모로우, 스즈미야하루히의우울2기, Re: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 도쿄리벤저스도 생각난다. 타임루프물에 대한 생각은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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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영화제 간 적이 없다고 썼는데 독립영화관의 기획전이나 소규모 영화제는 갔다. 부국제, 전주 등 전국규모 네임드 영화제는 아니지만 그것도 영화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표현을 정정한다.


부산, 전주, 무주산골까지는 가기 어려워도 가끔 독립영화관에서 지역, 감독, 주제에 맞춰 기획전(영화제?)를 할 때 최대한 찾아 보려고 하는 편이다. 나중에 소스가 없어 못 볼 수도 있기 때문. 독립영화관뿐 아니라 메가박스, CGV에서도 기획전을 한다. 에무, 건대, 라이카, 모모, 아트나인, 헤이리, 더숲, 멀리는 강릉에서도 보았다. 명동 시네라이브러리는 이제 없어졌다 한다


3월에 스레드에서 누가 민음사 세계문학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 추천해서 서가에서 꺼내 읽었는데 아마 빔 벤더스 영화제에서 보고 언급한 것이라고 추후에 짐작했다.


<안젤름>은 MMCA에서 봤고 <파리 텍사스>와 <피나>좋았다. 을유현대거장의 책의 피나바우쉬를 읽고 보면 더욱 좋다.




CGV 빔 벤더스 감독전 파트1

https://cgv.co.kr/evt/eventDetail?evntNo=202603107031


에무 시네마 <피나>

https://www.instagram.com/p/DXX9_hJDXDq/?utm_source=ig_web_copy_link&igsh=MzRlODBiNWFlZA==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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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훌륭해 글 3000자는 써야하는데


단상

침묵의 친구

음악 페촐드 <어파이어>풍 EDM+엠비언스, 댐핑 고음발성 라틴노래, 18세기 흑백 여성억압시대, 20세기말 히피, 21세기 코로나 교차, 시냅스, 은행나무 수정 장면 좋음, 식물처럼 느린 호흡의 편집, 몽타주의 최전선


내 이름은

제주고는 없고 남고는 제일오현대기인데 로케는 서남쪽 대정고

캐스팅이 좋다. <막걸리가 알려줄거>와 <웅비와인간이아닌친구들>의 김다민이 초등2학년 정도 되는 아이들을 귀엽고 단아하게 카메라에 담고, <우리들><우리집><세주>의 윤가은이 초6에서 중고등 되는 청소년을 카메라에 잘 담는다면 (데우스 엑스마키나인 남동생 연출의 마스터다), 정지영은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같은 학폭의 세계 연출이 탁월하다. <소년들>처럼.


둘 다 마지막 엔딩이 참 좋고, 줄거리 요약이나 배속이 아니라 전체를 극장에서 본 사람만이 엔딩의 감동을 얻을 것이다. 거대한 은행나무 줌아웃, 제주 중산간 살풀이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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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치 사카모토 도쿄멜로디에서

부인 아키코와의 듀엣 통푸가 제일 좋았다

사카모토는 자신의 수준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일본에 별로 없다고 덧붙였는데 그 말에 매우 동의했다

버라이에이션이 황홀하다 영화에선 훨씬 더 긴 풀버전 연주였다

https://youtu.be/Y6v4tpTKknU?si=BLJQpA10mKv8unC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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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가니> 보고 황동혁은 이상일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보았다. 이창동과는 비극의 구조가 어떻게 다른지도. <힌드의목소리> 이후 문학적 비극의 계보에 대한 생각을 다듬고 있다.


<남한산성>에서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식 분)이 근왕군을 애타게 찾고, <도가니>에서는 무진인권운동센터 간사 서유진(정유미 분)이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는 응답되지 않고 서늘한 비극으로 끝난다. <오징어 게임>의 결말과 같다.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라는 책을 썼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고통 속에도 어딘가 열려 있는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 시련을 겪는 사람의 의지가 닫힌 구조 속에서의 소진되지만 인간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더 이상 변명할 수 없는 비극으로 매듭지어진다. 이상일이 도스토예프스키에 가깝다. 혹은 <주홍글씨>의 호손에. 낙인 찍힌 여성이 정상적이 삶을 향한 의지를 보이고 사회적 응시를 견디다가 내적 재구성을 하고 제한적으로 회복한다.


이상일은 일반적인 영화가 이미 1시간 반으로 끝날 지점에서 30분을 더 추가해 복선을 모두 회수하고 캐릭터를 하나씩 다 정리해준다. <유랑의 달> <악인> <분노> 모두 그렇다. 심지어 희극인 <식스티나인> <스크랩 헤븐>

<훌라걸스>도 이미 디즈니식 기승전결에서는 끝났을 지점에서 무대가 끝난 뒤 남겨진 사람들의 비화, 갈등의 해결을 다 다루어주고 슬레이트를 친다.


까닭은 도스토예프스키적 비극은 최종적으로 차갑게 응결된 고체가 아니라 지각에 덮힌 끓고 있는 맨틀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목적 없이 존재하지 않고 변형을 위한 압력처럼 기능한다. 서늘함 속의 불꽃, 즉 희망의 불씨를 남긴다. <악인>이나 <분노>에서 고백, 신앙, 광기, 눈물, 참담함이 소용돌이치지만 어느 캐릭터 하나는 살아남기에 인간에 대한 환멸이 회복 불가능하다고 제안하지 않는다. <유랑의달>에서도 구설수의 폭격을 맞은 폐허 속에서도 주인공 둘은 살아간다. 냉험한 현실 속에서도 폭발하는 마음의 레짐이 있다. 같은 방식으로 식어 있는 듯한 형식이지만 이상일이 남겨두는 감정을 끝까지 채집해 제거해버린 자는 황동혁이다.


이상일에 비하면 황동혁은 훨씬 더 차가워 소포클레스나 하디를 닮았다. <오이디푸스왕>이나 <메데이아>에서 스토리의 중추는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이 파멸의 조건이라는 점이다. 모를 때는 문제가 없다. 무지보다 진실에 도달했을 때 캐릭터가 붕괴된다. 구원의 여지가 없다. 인식이 곧 형벌이기 때문이다.


이상일이 개인에 집중하는 정치학자라면 황동혁은 구조에 초점을 맞추는 사회학자다. 시스템의 잘못된 청사진, 미비한 설계를 드러내는데 힘쓴다.


비극이라면 당연히 카프카, 카뮈, 베케트도 생각이 나지만 이들은 무력하다. 이상일과 황동혁의 캐릭터들은 훨씬 더 능동적이고 성실한 사람들이다. 사태 해결을 위해 분투하는 열띤 개인들이 있다. 그러나 가녀린 개인의 시도는 구조에 의해 무효화되고 도덕적 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결말이 대부분 죽음으로 냉혹하게 닫힌다. 최근에 보았던 <힌드의 목소리>와 같다. 테스에서도 토마스 하디가 정상적인 삶을 회복하려고 부단히 애쓰지만 세계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노력은 도덕적으로 옳지만, 구원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반면 부조리의 알베르 카뮈는 의미를 거부하거나 끝내 발견하지 못한 채 네러티브가 끝난다. 건조한 사무엘 베케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비극의 시간으로 다룬다. 프란츠 카프카의 죄는 설명되지 않고 시스템은 끝내 도달할 수 없게 짜여져있다. 무엇보다 구조, 형식이 판결의 현현이다. 황동혁은 재판정까지 연출해 판결을 통해 해결을 보려한다. 카프카처럼 공백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이상일, 호손은 옳게 살면 의미는 바뀐다는 일말의 여지를 남겨두는 반면

황동혁, 하디는 옳게 살아도 소용없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세계는 원래 잔인한가? 인간의 노력이 무력한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 암담한 픽션을 왜 시청할까? 영화의 의의는 무엇일까? 비극이 바로 세계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도가니, 힌드의 목소리, 남한산성, 분노 모두 실화 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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