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큐멘터리 영화 일과 날 보았다. 9명의 노동하는 순간과 그들의 생각을 날 것 그대로 담은 서정적인 다큐다. 박민수와 안건형 감독은 내레이션 없이 노동자의 삶 자체를 화면에 담는데 집중했다. 엔딩 크레딧에도 출연자 이름이 먼저 나오고(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직장명과 직종명은 제외한 듯) 감독이 아닌 연출자 이름으로 나중에 등장할 정도로 출연자를 중심에 두었다. 기승전결의 서사가 없기에 배역이나 주인공은 아니다. 존재를 대우했다는 뜻이다.
사실 그리 특별한 것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삶의 단면을 나열한 것 같으나 묘하게 흡입력있다. 유투브에 공장 메이킹 영상을 롱테이크로 담는 채널이 있는데 그 댓글에 보면 시각적으로 만족스럽다 visually satisfying이라고 댓글이 달려있다. 그런 느낌이다.
맨 처음에 스틸컷으로 영화제목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기원전 7세기 헤시오도스의 글이 인용했다. 위키피디아를 인용해보면, 《일과 날》(고대 그리스어: Ἔργα καὶ Ἡμέραι, 에르가 카이 헤메라이, 라틴어: Opera et Dies, 노동과 나날로도 번역)은 헤시오도스가 쓴 약 800편의 그리스어 운문으로 이루어진 시가 작품이다.

영화 초반에 언급된 인용문과 그 글의 원전에서는 농업 위기, 노동 소외, 환경 우려 등에 대한 레퍼런스를 약간씩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평범한 유투브 메이킹 롱테이크 영상으로 환원될 수 있었던 영화가 이 인용문과 이에 해당하는 출연자의 혼잣말로 인해 지적 고민이 있는 영화로 환골탈태했다.
언뜻 디즈니식의 명확한 서사와 갈등구조 없이, 과거 제철소 근무했던 염전노동자, 전국을 돌아다니는 프리랜서 PD, 육아휴직 중인 두 아이 엄마의 가사노동, 마라톤 풀코스 40번 완주한 재활용분류, 백반집 요리하는 할머니, 40년 매일 출근한 동네 전파사 할아버지, 독실한 기독교인 영어학원 데스크 사무직, 양조장에서 일하고 영어공부 주경야독하는 청년, 아이가 보고 싶어도 단가를 맞추기 위해 주말출근해 마네킹 합성수지 제작하는 9명의 노동을 카메라에 담았다.
등장인물이 모두 임금노동자는 아니다. 자영업자도 있고 영세업자도 있고 노동이라고 분류되지 않은(현재 사회적으로 논의가 진행중인) 가사노동자도 있다. 따라서 부여되는 노동과 자기가 자기에게 주는 노동을 모두 포함해 노동의 외연을 넓게 담았다.
연출적으로도 잘했다. 감독은 이들의 하루를 브이로그로 담는 안일한 선택을 현명하게 피하고, 순서대로 반복해서 병치해서 지루함을 주지 않았다. 중간중간에 약간씩 초점이 정합적으로 맞춰지는 부분이 있어서 거칠고 느슨하게 영화를 세 등분해보자면, 처음은 노동의 순간, 두 번째는 노동의 의미, 세 번째는 노동의 미래와 과거다.
출연자는 각자의 언어로 일의 의미를 정의하고, 하루의 일과에 대해 평가한다. 직업의 귀천에 관계없이 향후 AI와 저출산 고령화에 대해 고민한다. 나아가 지금-여기의 노동을 어떻게 버틸지, 그리고 앞으로 삶은 어떻게 꾸려할지 각자의 방식으로 고민한다.
느릿하니 서정적이고 보통 우리가 볼 수 없는 일거리의 모습 자체를 알 수 있는 좋은 다큐다. 육아, 요리, 코팅, 복사, 다듬기, 밀고 닦기, 물청소하기, 자기, 유투브나 뉴스보기, 운동하기 등 선명한 동사로만 구성된 다큐다. 김훈의 건조하면서 생동감있는, 단단한 술어로만 구성된 문장 같다.
다만 9명의 노동은 어떤 노동이지 노동의 일반명사가 아니다. 중저임금 노동을 위주로 담았기에 부분집합으로서 '어떤 노동'이지 모든 노동이 아니다. 노동의 귀천이 없다는 말이 맞으려면, 투자자의 노동, 엔지니어의 노동, 외화내빈인 재벌의 노동 이 모든 것도 노동이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도 하루의 태스크를 쳐내는 자의 일이란 모두 동일하게 귀하고 소중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