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에서 박찬욱 감독의 33년을 조명한 지상파 최초 다큐멘터리 <뉴-올드보이 박찬욱>이 넷플에 동시에 공개되었다.


2년 전 봉준호 감독의 영화학교 입학 전 초기를 조명하는 넷플 오리지널 다큐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가 여러모로 생각난다. <노란문>에서는 '우리는 그냥 동아리였는데, 봉준호는 영화를 진심으로 생각했구나'라는 회한이 중심 감정이었다. <뉴-올드보이>는 박감독과의 협업이 의미있었다는 주변인들의 증언이 중심이 된다.


두 다큐멘터리에서 그려진 감독들의 영화사적 성취는 공동체 모두의 성취로 기능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의 소속감과 성취감은 이 두 감독의 세대에 국한된 것이고 다음 세대는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시대정신과 세대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후속 세대는 우리의 성공이 충무로의 성공이자 나라의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고 다르게 접근할 것 같다. 자신이 속한 취향 공동체의 지향을 드러내는 수단이라든지, 사업적 성취를 위한 홍보 수단이라든지


국가나 영화계의 집단적 위신 향상이 자신의 자존감 향상과 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영화는 발전하고 좋은 영화는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인류에겐 맥락과 이야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큐는 DDP 바스키아전이나 리움 이불전, MMCA 김창열전 같이 그간 작품을 톺아보며 시대의 변화를 음미하는 회고 형식인데, 스틸컷의 미술은 전시회로서 존재하고, 움직이는 이미지의 영화는 영상으로 존재한다. 정지되어 있는 이미지는 정적 공간에 정지되어 있기에 사람이 동적으로 움직여서 가야만 감상이 되고, 동적으로 존재하는 영상은 흘러가기에 사람이 정지해 앉아서 보는 것이다.


아울러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영화 감독의 피사체는 살아있고 인격이 있는 배우이기에 감독 자신도 그 배우, 나아가 스태프의 관계성 속에 존재한다.  봉, 박 감독 모두 내향인이지만 협업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고 다큐로서 기록된다는 뜻. PR을 원하지 않아도 자신이 다루는 매체 형식의 특성상  이미지 외부에 존재할 수 없고 카메라 안에 포함되어야한다. 내향인이지만 살다보니 외향인이 되어야하는 아이러니. 인격적인 감독과의 기억이 따뜻하고 좋을수록 동료의 입을 빌려 감독은 선하게 그려진다.


두 감독이 존재했기 때문에 시네마테크나 영화감독조합도 유지되고 저작권, 스태프 노동문제, 룸쌀롱 문화타파 같은 여러 구태들이 타파될 수도 있었던 것 같다.



<올드보이>의 시그니처 장면, 오대수의 격투 연출에서 봉준호 감독의 얼굴이 보인다. <올드보이> 유지태 아역은 유연석 배우라는 걸 이 다큐를 보고서 알았다. 좋은 작품은 다시 읽으면 재밌다. 시간이 갈 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2부 마지막에서 탕웨이의 중국어 인터뷰 중 자막에 포함되지 않은 게 있다. 억양(어조의 기복:语气的起伏) 다음에 因为有跟着去说的时候, 是能(跟)深刻的感觉到 정도로 들리는데 yinwei you genzhe qu shuode shihou shi neng gen shenke de ganjue dao


조금 이상하다. 분명히 shi neng gen shenkedeganjuedao로 들리는데 neng gen이 아니라 能给人이 되어야 말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함께 가서 말할 땐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 정도의 뜻이다.


말하다가 말이 좀 꼬였을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의 작품성을 설득하기 위해 근친서사의 <오이디푸스>를 언급한다.


화면에 언급된 구절은 오이디푸스의 자기 인식을 나타내는 핵심 구절로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에게서 태어나 - 존재론적죄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과 결혼하고 - 근친상간(어머니와 결혼)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을 죽였따 - 부친살해(아버지 살해)


라는 비극적 운명의 삼중 구조와 인간의 무지가 빚어내는 윤리적인 아이러니, 그리고 너무 늦은 알아차림을 나타낸다.

ὦ τάλας, ἐγὼ μὲν ὃς ἐγένοντο παρ᾽ οἷς οὐ χρῆν,

καὶ οὓς οὐ χρῆν ἔγημα, καὶ οὓς οὐ χρῆν ἔκτεινα.

이때 첫 문장은 자세히 보면 의미심장하다.


한: 나는 태어나서는 안 될 이들에게서 태어났고

영: Born of those from whom I should not have been born

희: ἐγένοντο παρ᾽ οἷς οὐ χρῆν

나는 태어났다 — 그러면 안 되는 이들로부터


희랍어 직역에 소포클레스가 숨겨놓은 모호한 중의성이 보인다.


이 말의 해석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들은 나를 낳아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는 부모의 죄이고(혈통의 금기)

또 하나는 나는 그들로부터 태어나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는 나의 죄(존재의 금기)다.


그들이 낳아서는 안 되었고, 나 역시도 태어나서도 안 된다는 두 겹의 금기가 포개져있다.


오이디푸스의 부모인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불길하다는 신탁을 듣고 버렸으니 애초에 그들의 잘못이 있고


신탁에서 예언했던 자신은 존재 자체가 죄의 증거이며 운명(신탁), 법(결혼), 도덕(살인)라는 세계의 질서를 붕괴시킨 불법적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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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숙 드라마 작가의 넷플 드라마 <다 이루어질지니>는 설정도 독특하고, 캐스팅도 적절하고, 자본도 뒷받침되고, 그간의 경험과 노하우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화부터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서 13화까지 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가영은 버린 부모는 증오하고 길러준 조부모는 사랑하는 최근 세대를 상징한다. 아무리 사이코패스 연기라지만 자신의 눈에만 지니가 보이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갑자기 과하고 찰진 욕설을 쏟아내고 급발진한다.


<멋진 하루>의 하정우처럼 계속 화를 받아주기만 하는 캐릭터였더라면 더 매력적이었을텐데 지니도 주인공의 목을 조른다. 이는 사패인 주인공이 아이였을 때 할머니 목을 조르는 신과도 연결된다. 이것이 사패의 자기반성을 요구하는신인걸까?


그런데 사패라는 캐릭터가 극 전체의 분위기와 걸맞는지 다른 캐릭터였으면 안되는지, 캐릭터 안에 일관성이 있는지 의문이 드는 걸리는 장면이 많다.


파리의 연인, 도깨비, 미스터 선샤인급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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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론:아레스 보고 왔다. 비주얼적으로는 좋으나 스토리는 의뭉스럽다.


우선 음악은 트론:레거시(2010)의 다프트 펑크를 능가할 수는 없다. 명확한 킬링 멜로디가 귀에 꽃히는 EDM이 영화의 분위기를 이끌어나가는 또 다른 주연 배우라고 할 정도였다.


아레스의 음악은 튀지 않는다. 펄스파형 신스의 잔상이 있고 크게 거스르지 않는데 그렇다고 돋보이지도 않는다. 영화에 묻어서 트론의 분위기를 살리는 정도다. 이정도면 음악으로서 제 역할을 다한 셈인데 워낙 전작의 음악이 좋았다.


AI 윤리학, 아니 AI 교육학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20대 초보 파파인 줄리안은 자기 말 잘 듣는 착한 프로그램에게 과하게 혼내고 꼽을 준다. 같잖은 오류라고 심하게 말하고 억압한다. 굳이 이렇게까지 화 내야하나? 좋은 아빠 되기 프로그램을 먼저 이수해야할 것 같다. 이제 막 태어나 옹알이 하고 메아리처럼 부모 말 따라하는 애한테 소모품이라고 남들 앞에서 폭언을 해대니 애가 반항하는 것이 당연


다른 여러 SF 영화와의 연결성이 보인다. 매트릭스에서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에 넘나드는 것과 비슷하게 펄스 레이저로 트랜스퍼를 한다.


빙글뱅이 구겐하임/국현미 과천/리움형 계단식 지상 주차공간에서 금발 염색 까까머리 아테나가 이브 킴을 쫓을 때 터미네이터 T-1000의 추격신이 생각난다.


질린저스가 장군 등 이사회 앞에서 PT하는 장면은 앤트맨 등 마블에 나온다. 싱이 신제품 PT하는 것은 스티브잡스가 생각난다.


빌딩이나 감옥에서 리클라이너 의자에 눕고 책상에 발 올리고 머그잔으로 무언가를 마시는 뚱뚱한 관리직 클리셰는 데이터센터 관리요원으로 나온다.


줄리안 딜린저(에반 피터스)와 아테나(조디 터너스미스)는 주어진 악역을 잘 소화했다. 조연뿐 아니라 주연 마스터 컨트롤(제레드 레토)의 메소드 연기도 좋다. 캐릭터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이브 킴(그레타 리)는 긴박한 액션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마지막에 차에 기대 나누는 대화를 클로즈업한 장면만 좋다.



연기의 색깔이 트론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공계 아시아인 여아들의 자아동일시 롤모델로서 시장확장 전략이다


디즈니의 PC주의가 완전히 빠지지 않았다. 설교적인 색채가 없지는 않다. 서사의 방향성을 위해 스튜디오의 지향성을 지우려고 했으나 말끔하게 제거되지는 않았다.

굳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을 그리기 위해 CEO 자매를 묘사하고 여성이 코드 두드려서 영속성 코드 얻어내는 장면, 오토바이 혼자 타고 다니는 장면을 그려놓고 결정적이 클라이맥스에서 오토바이 뒤에 남자 안고 매달려 타고 스포츠카 모는 주연 옆에서 보수적인 조연 여성 역할에 머무는 것은 방향이 부적절하다. 영화 내내 그닥 주체적인 느낌이 없다. 오히려 흑인 여성 아테나가 파워풀하고 진취적으로 느껴진다.


아울러 그레타 리는 객관적인 영화 연출적 시각에서 카메라 테스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낀다. 약간 땅딸막한듯 보여 대개 늘씬하고 팔다리 긴 배우들과 함께 투 샷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투 샷 장면은 빠르게 지나가거나 도형이나 프레임 안에 가둔다.


테스 킴(셀린 윤)이라는 자매를 잃은 슬픔에 대해서는 설득될만큼 연출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K드라마 클리셰의 나이브한 활용 같다.


카체이싱도 특별히 좋은 것 같지 않다. 무난하지만 준수하지 않다. 뚝뚝 리듬이 끊기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비주얼이 좋아서 이음새가 뚝딱거리는 것을 못 보고 지나친다.


공격모드에서 무기에서 나오는 달군 유리 같은 네온빛 흔적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 연출은 지난 작이 더 임팩트있었다.


영화 끝나고 감독이나 배우 이름보다 유닛 디자이너 이름이 먼저 나온다. 그럴만하고 그래야한다. 영화는 그래픽적 요소가 더 중요하다. 플린 오피스 등 여러 덕질할 요소가 많다. 디즈니 테마파크에 새로 사용될 무대 디자인이 보인다. 영화가 아니라 2차 시장까지 염두에 두고 디자인한 탈 것들과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공간이 정말 보안 프로그램 입장에서 필요한지 왜 해당 건축물이 그곳에 그러한 형태로 위치해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기능 없이 형상만 있다.


사진의 엔컴 침투신에서 가장 마지막에 따라 나오는 멤버의 달리기가 어색하다. 



마지막 전투에서 거대한 모함을 그 짧은 시간에 펄스 레이저로 구현이 가능했던걸까? 29분이라는 제한시간에 그렇게 느리게 움직이는 모함으로 가서 결국 캐리어처럼 인터셉터만 날린다.


29분이라는 제한시간이라는 설정이 마스터 컨트롤이 말해주는 18분 몇 초 남았다는 대사와 스마트 글래스의 상태창로만 전달되는데 전혀 긴박감이 없다. 딜린저스가 있는 산 위 센터에서 도심 내려가는 시간만 삼십분이상 걸릴 것 같다.


주유소 직원이 혼다 시빅 클래식 스포츠카를 갖고 있는 것은 클리셰고 직원에게 잡지 보여주면서 나 누군데 1만 달러 송금(wire)할테니 핸드폰 빌려달라고 하는 것도 빈번히 등장하는 클리셰다.


디즈니가 좋아하는 서사구조가 너무 쉽게 읽힐 정도로 전형적인 구성을 따른다. 중간에 멘토를 만나는 것까지. 비트의 세계에서 2D 오마주가 나온다.제프 브리지스는 많이 늙었다. 상징성을 위해 나와야만 했다. 


이전 작품 레거시가 메시지가 더 명확하고 몰입력이 있었다. 음악도 비주얼도 더 좋았다. 이번 작품은 팬서비스 같은 작품이다. 전작을 능가하지는 않았다. 연기는 여성 주연 배우만 빼고 남자 주연 배우와 남자 여자 조연 배우가 좋다. 연출, 서사 모두 특별하지 않다. 비주얼은 펄스 레이저신을 제외하곤 더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전작에서 더 많은 가능성을 주었다. 그러나 이번 아레스는 시리즈 팬이라면 안 볼 수 없다. 다음 작품에서 흑화한 줄리안이 그리드의 무너진 보안 시스템을 재건해서 복수할지 이미 예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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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A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 대해 더 생각난 것을 써보자


1.

혁명을 꾀하는 지하조직 프렌치75와

백인남성 상류층의 비밀조직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은 거울쌍이다. 본사, 점조직, 인력망, 시스템, 음모론, 암구호(비밀용어)

그리고 두 주인공 밥(디카프리오)과 스티븐 대령(숀 펜)은 이 조직에 대해 인정투쟁을 벌인다.


밥은 나 몰라? 나 대단한 놈이야 나 전쟁 영웅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증명하고

대령은 입단 질문에 대답하며 열심히 살아왔음을 증명한다


2. 둘 다 중고등시절 비밀 동아리가 돈으로 확대된 어른버전


5함대 통수권자 역시 차별적. 아반티는 백인이고 유능하지만 not home grown 미국땅에서 안 자랐다고 차별. 유능하지만 에스키모 혼혈이라고 출신성분으로 차별. 미국 공화당 비슷


그러나 프렌치75는 업적 기반. 아무나 받되 능력주의로 차별. 미국 민주당 비슷

몇 년 전에 능력주의가 반드시 옳은 것인가 논쟁이 있었던 게 생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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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본 이란 감독의 영화 2편 다 좋았다.


모함마드 라술로프의

<신성한 나무의 씨앗>

자파르 파나히의 <그저 사고 였을 뿐>


엊그제 개봉한 후자의 영화에서는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윤리적 딜레마가 특징적이다. 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을 일견 상기시킨다.


라쇼몽식 다중 서사와 파나히 감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혼란과 불편함을 제공하지만 둘 다 관객에게 윤리-정치적 성찰의 여지를 줌으로써, 진실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의 체념과, 체제 억압 속의 빠른 포기를 넘어 새로운 공동의 질문을 제공한다. 즉 관점의 충돌이 반드시 무기력으로 끝나지 않으며 우리로 하여금 윤리적 사유를 촉발시킨다는 것이다.


자파르 영화 이야기의 대부분은 차량, 정비소 같은 한정된 공간에서 누가 가해자인지 확증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정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추적과 갈등으로 전개된다. 밀실 스릴러와 윤리적 딜레마에 더해 불법 촬영, 은밀한 제작과정이 작품의 정치적 메시지를 증폭한다는 특징이 있다.


소수의 비공식 촬영과 필름의 밀반출 및 국제영화제 출품이라는 현실 스릴러적인 과정이 영화 텍스트 바깥의 정치적 퍼포먼스, 즉 체제에 대한 까발리기식 고발로 기능한다. 복수 스릴러의 서술을 빌려 검열된 현실을 노출해 촬영자가 처한 정치적 억압을 고발하는 것이다.


현실은 평화로운데 작품에서는 추적과 복수의 대환장 파티가 벌어지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스릴러에선 네러티브로 정치를 고발하지 않는 점과 차이가 있다.


세속국가의 정교분리 원칙처럼 작품-정치 분리라고 할까. 이란은 정교일치의 신정국가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상징계와 상

상계가 긴밀하게 얽혀 상호작용한다.


하여 제작 유통의 은닉이 역으로 소리없는 아우성이자 보여주기식 항의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저예산 및 검열이라는 시련 속에 어쩔 수 없이 동반된 어지러운 화면이나 어긋난 초점 등 불완전성은 작품의 퀄리티를 떨어뜨리지 않고, 되려 영화적 긴장과 정치적 진정성을 강화한다.


으레 사건에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고 기대한다. 그러나 <라쇼몽>은 사실이란 주관적 기억, 이해관계의 교차물임을 폭로한다. 사건은 반복되지만 사실은 사람마다 달라진다. 기억의 불일치는 사회적 위선을 드러내기에 사건의 사실성보다 자기서사(자기정당화)가 드라마적 핵심이다.


구로사와 감독은 한 사건에 대한 여러 진술을 점잖게 나열해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진술을 신뢰할 것인가를 고민하게끔하면서 판단을 윤리적 행위로 승화시킨다. 이는 전형적 미스터리에서 누가 범인인가 그놈을 조지자 추적하고 체포하자 같은 나이브한 진행과 차원이 다르다


구로사와와 자파르 감독 모두 가해자은 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듯하다. 그러나 라쇼몽은 서로 다른 증언들을 순서대로 진열하며 개인의 서사가 어떻게 사회적 체면이나 이익관계 혹은 욕망에 의해 주관적 기억으로 변형되는지 보여주며 진실의 부적합성에 도달한다. 이에 반해 그저사고였을뿐은 텍스트-현실의 관계를 실험적으로 보여주며 개인의 실존적, 도덕적 선택의 승기를 들어주는 한편 


라쇼몽의 "어떻게 우리가 사건을 말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우리가 존재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진실은 상대적이다에서 멈추는게 아니라 그 혼란스러운 관계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행위에 방점이 있다. 어려운 현실을 딛고 출품해서 폭 넓은 전세계 관객에게 이 모순을 보여주려는 그 모든 과정이 이런 의지를 증거한다.


메타인지로 생각수준을 한 층 높여 작품 감상하면서 진실 탐구의 방식 자체를 질문하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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