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벨문학상 앤카슨 수상발표가 난 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녹스와 그 리뷰였다. 몇 년 전 서울리뷰오브북스에 18세기 영문학을 연구하는 민은경의 서평을 읽은 것이 기억났고 어디서 읽었더라, 중얼중얼 거리며 서가에서 잡지 시리즈 전권을 빼서 찾다가 22년 가을호에서 발견했다. AI나 사이트 검색으론 못 찾았는데 손으로 더듬얼 찾았으니 결국 아날로그적 피지컬 경험을 대신할 수 없다.

3D를 2D에 재현하려는 지난 몇 천 년 동안 인류의 노력도 제한적이었는데, (입체인 건물을 평면인 설계도에 그리거나 회화, 만화로로 현실을 재현하거나) 어떤 경험은 특정 사물과 시공간에 고정되어 있어 이진법으로 환원되는 어휘로는 호출이 되지 않고, 색성향미촉법이 환기되어야 비로소 소환이 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어디서 읽었더라? 를 대답하기 위해서는 그때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비슷한 현실자극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종이책을 넘기며 육안으로 읽은 개인적 독서 경험을, 매트릭스의 니오가뇌에 가라테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하는 메모리 학습으로는 대체할 수 없다.

서평 대상 책이 신기해서 우리말 번역본과 원서를 다 구매했었다. 22년간 소식이 끊겼던 오빠가 덴마크에서 갑자기 죽은 후 상실과 애도의 감정을 담아 비전형적인 형식으로 만든 실험적인 책이었다. 사진, 편지, 단상, 낙서, 번역메모를 오려 붙었던 원본 수첩의 방식을 그대로 복제해 고전부터 현대까지 시, 산문, 일기, 사진, 사전적 정의, 비평이 모조리 뒤섞여 기존 문학적 분류체계로는 정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던, 특이한 책이었다.

2. 이민진의 아메리칸 학원이 내용이 친근하고 문체는 쉬워 술술 읽히긴 하지만 600페이지로 분량은 있는 편이라 좀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내일 모레 우리말로 출간되는데 영어원서로도 우리말로도 두 번 읽어야한다는 것은 확실히 느끼고 있다. 한국어와 다른 표현방식으로 익숙한 문화요소를 번안해서 비교해 볼 필요가 있는 까닭. 마치 같은 식재료를 다른 레시피로 사용하는 것처럼 예컨대480페이지에 홍길동을 ˝비범한 지적 능력과 기술을 지닌 소년으로, 더 큰 공동체를 구하고 삶에서 명예로운 지위를 얻고자 노력하는 인물(a boy with unnatural powers of intellect and skills who tries to save the larger community and earn an honorable station in life)˝이라고 묘사한다. Lion이 엑소더스의 초중딩과 포트레스의 고딩을 대상으로 강연하면서 쓴 표현이다. 더 큰 공동체에 헌신 운운은 입학 원서 SOP에 빈출하는 표현이라, 1500달러로 칼리지 투어하며 대학 입시를 논하는 앞뒷장 전후맥락과 상응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어쨌든, 한국에서는 홍길동하면 서자로서 주류인 적장자가 아닌 한이 있다든지 하며 ˝아비를 아비라 부를 수 없는˝ 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과 차이가 있다. 참고로, 펭귄에서 홍길동 영어번역이 옛날에 나왔는데 너무 멋 부리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 선호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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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데우스 로팍에 새로 조인한 1956년생 영국인 덴질 포레스터 왈, 미술학교 동기들 대부분 북미의 추상표현주의에 관심을 가졌지만, 난 내면을 뒤흔들고 깊이 울림을 주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1980년대에 난 달스턴에 있는 피브스같은 나이트클럽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모네의 수련이나 반 고흐의 풍경화가 회화 그 자체라는 단순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자신에게 진정한 의미가 있는 대상을 그려야 하는 거지

로팍이 소개하길, 왈, 1980년대 초 런던의 덥(dub)과 레게신이 지닌 생동감 넘치는 사운드와 에너지에 기반을 둔 회화 작업을 발전시켜 온 작가는 선과 색채를 통해 리듬과 움직임과 감정을 시각적 형태로 구현해낸다. 샘플링, 믹싱, 루핑과 같은 음악적 기법을 시각적 언어로 치환하여,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독창적인 색채가 뚜렷하며 대담하고 역동적인 구성을 만든다

조토 고야 피카소에 음악이 융합하고
아프로캐리비안과 유럽이 조우하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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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 언박싱프로젝트가 하반기 가장 지적으로 흥미로운 전시 중 하나였고 곧 끝난다고 하는데 너무 생각이 많아 쓸 시작도 못하고 있다.

참여 작가 태반이 다른 갤러리에서 한 두 번 봤던 사람들이어서 더 재밌었는지도 모르겠다.

학부4년 배운 이들의 졸전이 아니라 현직으로 활동하고 있고 실제로 작품도 팔리는 중량감 있는 작가들의 대형 졸업작품 전시회같은 느낌이었는데

흑백요리사나 더인플루언서 같은 경연 프로그램의 첫 방송 때 어 이 사람도? 이 사람이? 하는 느낌이었다고 하면 좀 비슷하려나

그러나 토너먼트가 아니고 수상자 선정하며 우열관계가 나뉘는게 아니라 감상은 편했다. 만약 스타트업이었다면 이 PM 너무 날로 먹는거 아냐? 하며 이윤이라는 공동목표 속에 노력의 정도를 상호 비판하고 그랬을텐데 그런 점에서도 자유롭다. 누구는 1시간만에 완성할 수도 누구는 상당한 시간을 들였을 수 있지만 의미가 없다. 모두 같은 크기와 물성이 고정된 상태에 그 작가가 무엇을 하고 시그니쳐가 무엇인지 각인이 되면 그만이니까. 다만 그동안 풀었던 유형이 모두 종합적으로 랜덤하게 나오는 파이널 모의고사같기에 이 전시로 공부를 스타트하기엔 무리고 지난 몇 년간 이 작가군을 직간접적으로 개인전 단체전을 통해 접해왔어야 지적 호기심 배가된다

단 한 명도 같은 방식으로 목재를 사용하고 디스플레이한 작가가 없었다

기억컨대 합판이 주제가 되기도 형식이 되기도 작은 캔버스로 쓰기도 자석을 붙여 퍼즐로 만들기도 아이패드를 넣기도 고정대로 쓰기도 비즈나 종이를 넣어 보내 훨씬 부피가 큰 설치미술이 되기도 합판을 잘게 자르기도 장작과 함께 세워놓기도 경첩을 이어 병풍처럼 만들기도 적층하기도 적층하며 나무로 잇기도 기하학 주제를 드러내기도 2판을 모아 영상을 쏘는 스크린으로 활용하기도 4판으로 쓰기도 전혀 다른 알루미늄 물성을 덧입히기도 오브제를 넣기도 그리기도 포장이 되기도 작품의 일부가 되기도 편지가 있기도 작품을 올려놓는 받침대가 되기도 기계가 들어있기도 화면이 비틀리며 삐어져나오기도 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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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에도 재삼수가 있는 것처럼, 영미권 입시에도 gap year가 있는 것처럼, 일본 전시에도 순회전이 있어 한 번 놓친 전시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다. (마우리츠허위스나 이탈리아 조각전처럼 1회로 온 곳도 있지만) 신에게는 아직 전시를 볼 몇 번의 기회가 더 남아있습니다! 대개 도쿄에서 교토로 가는 편이긴한데 케바케다.


물론 한국도 순회전이 있다. 일본만큼 지방이동 교통비가 비싸지 않고 얼리 아답터들이라 기다리지 않는 분위기지만. 예컨대, 요하네스버그미술관 인상파전도 제주, 경주 등을 거쳐 홈플러스 전략처럼 지방에서 서울로 역으로 들어왔고, 예당 고야, 대전의 전시도 다른 곳에서 하는 듯하고, 광주ACC 미디어아트가 울시미나 포항시립으로 간 것도 봤다. 순회는 전략의 하나.

고흐 전시를 먼 도치기현 우츠노미야에서 순회시작했을 땐 놓칠 수 있었다. 오사카 아베노하루카스 미술관은 가기 좋은 입지였으나 무덥고 습한 시기였고, 지금 나고야에서 11월까지 하는 것은 놓칠 수가 없긴 해




작품 설명 및 사이트

https://art-museum.city.nagoya.jp/data/9d31c0549937933c0c791a9e3241f69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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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 고흐, 뛰는 다리=도개교=아를의 랑글루아다리전 9-11월

작품 리스트 총70점을 보니

클로드 모네, 르누아르, 귀스타브 카유보트, 폴 고갱, 폴 시냑(점묘) 4점씩

시슬레, 보나르, 쿠르베가 3점씩 (근데 피에르 보나르는 인상파라기보다 20세기 앙티미즘/색채파이긴함)

쿠르베, 외젠 부댕, 카미유 코로와 라 페냐 (바르비종), 그리고 세잔과 고흐와 테오 반 레이셀베르헤(점묘)가 2작품씩

마네, 밀레, 피사로, 쇠라, 마티스, 반 동언, 마르케.. 등등 23여명이 1점씩이다.

https://art-museum.city.nagoya.jp/exhibitions/post/van_gogh_and_the_impression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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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에서 사이언스파크로 상전벽해를 겪은 마곡나루에 위치한 서울 식물원에 초등학교 교실 마냥 빼곡히 심어져있는 이국식물 사이로 장한나 작가의 뉴 락을 발견했다.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이 파도, 바람, 태양열에 의해 풍화되어 자연의 돌처럼 변해버려 새로운 돌과 진배없다는 아이디어를 담은 뉴 락. 식물원이라는 완벽한 자연의 공간에 침투시켰다. 근데 애초에 식물원이란 박물관, 박람회 등과 마찬가지로 자연상태에선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는 여러 소재를 인공적으로 배치한 것 아닌가. 자연을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인간의 위대하고도 어리석고 헛된 욕망이 자리잡은 곳. 플라스틱 시대와 인류세를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뉴 락을 식물 사이에 배치한 전시 디스플레이는 그간 환경문제를 다뤄왔던 고발형 예술이나 친환경 캠페인의 구조를 전복해, 쓰레기를 줄이자고 목소리 높여 외치는 대신, 인간인 우리가 만든 인공물이 이미 자연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깊숙이 지구와 한 몸이 되었다, 라는 거대한 공존의 네트워크를 역설적으로 증명해냈다고도 볼 수 있다. 자연(식물원) 속에 숨겨진 인공의 의사(쑤도pseudo)-자연, 혹은 유사-자연인 셈.

쓰레기 매립지의 퀴퀴한 전경, 오염된 해안가에서 녹조와 뒤엉킨 어망이 하얗게 비어 있는 화이트 큐브 갤러리에서 이게 문제야! 하면서 고발의 형태로 제시되었던 전형적 환경예술 전시 디스플레이는 흡사 평창 서울시립아카이브에서 오윤이 판화로 척박한 노동현실을, 국현미 안국 올해의 작가상에서 홍진훤이 사진으로 시위와 데모를, 혹은 일민이나 경기도미술관에서 수 년 전 임민욱이 재개발을 다루는 방식과 비슷하다. 현장을 있는 그대로, 그러나 극적으로 묘사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문제가 되는 현실을 드러내 자본주의가 제공한 편리한 일상을 살고 있는 일반 관객을 불편하게 할 것.

그러나 장한나 작가의 방식은 드러내는 고발이 아니라 정반대로 숨바꼭질과 같다. 인간이 돌도고 정성스럽게 가꾼 순수하고 이상적인 자연(이 자체가 형용모순이긴해)의 공간인 온실 내부를 선택해 진짜 식물과 천연석들 사이에 뉴 락을 은밀하게 숨겨뒀다.

관객으로 하여금 무엇이 진짜 돌이고 무엇이 플라스틱 돌인지 단번에 구별하기 어렵도록
윌리를 발견한 순간은 슬그머니 시각적 충격으로. 무균실처럼 아름답게 관리된 식물원에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허연 돌이 사실은 인간이 버린 쓰레기의 최종 형태? 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인지부조화가 발생하는 까닭. 아 이게 플라스틱이라고? 새로운 시대의 돌이나 마찬가지라고?

전시 설명문 왈. ˝정답을 맞히는 것보다 구별이 어렵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진짜 돌과 플라스틱 돌이 서로를 닮아가는 풍경 앞에서, 우리는 지금의 자연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맞는 말이다.

외면하고 싶고 얼른 치워버리고 싶은 쓰레기가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의미마저 도출해볼 수 있는데 이는 가치 판단을 유보하고 선악 구도를 넘어선 새로운 지질학적 현실을 인정하는데까지 이른다.

사실 인간은 악하고, 파괴되는 자연은 보호해야 한다는 고루한 이분법적 구도는 왠지 도덕적 부채감을 자극해왔던 게 아닐까. 반대로 작가는 뉴 락의 발생을 비난하거나 애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수집한다. 다큐멘터리 작가같은 태도지만, 선택과 배치는 애초에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탈정치적인 태도도 하나의 태도를 취한 것,

한편 돌은 무엇을 말하는가? 에에올. 도가도 비상도. 자연은 말하지 않고. 않기에 자연의 무심한 수용력을 보여줄 뿐이다. 플라스틱이 지구에서 사라지지 않고 결국 자연의 일부로 동화되어가는 자연의 적응은 곧 새로운 진화. 자연은 인간의 선악 판단과 관계없이 쓰레기마저 자기 품으로 끌어안아 풍화시킨다. 몇 천 년이 걸린다고 하나 시간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편.

뉴 락을 박물관의 광물 표본처럼 정교하게 분류하고 배치해 지층에 영원히 새겨질 신암석 유형으로 선언하는 한편 인간이 소멸한 이 땅에 남을 미래의 화석은 바로 인공 플라스틱이라는 담담한 경고를 발신한다
역설적으로 추한 쓰레기에서 콜렉팅한, 수석을 닮은 플라스틱은 더러운 기피대상이라기보다 기묘하고 아름다운 질감과 색채를 지녀 아이러니하게도 미의 관조대상이 된다. 역설적인 예쁨이다. 모순적인 감각을 느끼는 이는 환경문제를 지루한 의무나 정언명령이 아닌 매혹적이고도 섬뜩한 미적 탐구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될지도 모르겄다,

현지에선 냄새 좋은 풀, 감기에 잘 듣는 풀, 빨강이 초록이로 불렸을지 모르는 식물이 라틴어 학명으로 어렵게 브랜딩되어

입에 올려 외우기도 힘들지만 과거에도 지금도 현지에서도 누구는 아이폰 모델명 외듯 외우고 이것도 몰라! 하며 애들 쿠사리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 혀가 꼬이는 이름을 지닌 여러 사막 지중해 열대 식물 사이로 철제 조형물이 숨겨져 있는데 이것은 전시의 일부일까? 의도된 것일까? 페인트칠이 보이는데...

수련을 보면서 모네는 백내장의 눈으로 물에 비친 반사면에 집중했겠구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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