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hankyung.com/article/202603102147i


"공장 불 꺼진 금천구, 서울 첫 뉴미디어 특화미술관이 불 밝힌다"

한경 강은영 기자

금천구 서서울미술관
전문 관장 체제
서울역사박물관 등 두루 거친 박나운 초대 관장

이 기사를 보고 서서울 미술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한경 강은영 기자의 박나운 초대 관장 인터뷰

1. 미술관과 박물관 차이(서서울미술관 정체성 설정)
서울역사박물관 개관부터 박물관에서 경력을 쌓아왔습니다. 박물관과 미술관의 차이를 어떻게 보는지.
"미술관과 박물관의 전시는 정말 다릅니다. ‘검증되지 않은 것는 전시할 수 없다’가 박물관의 원칙입니다. 따라서 최소 10년에서 20년까지의 시간을 두고 연구한 성과들이 나왔을 때 그를 기반으로 한 전시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미술관은 작품만으로도 이야기가 됩니다. 관람자의 상상을 더해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역사는 가정이나 상상이 없기 때문에 박물관 전시는 과거에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 모습에 도달했는지를 추적해 가는 것들이 주를 이룹니다. 미술관은 현 시대에 발생하는 다양한 현상들에 얼마든지 화두를 던져가며 전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기대가 됩니다."

2. 전문 관장을 둔 서울시립미술관은 사진미술관과 서서울미술관이 유일

3.개관이 미뤄진 이유
(지하 건물 구조상)
"맞은편 안양천의 영향으로 습도가 과하게 높아져 보완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건물이 위로 높지 않아 옥상의 찬 공기와 난방을 튼 실내 전시장이 바로 맞닿으면서 결로 현상도 발생해 어려움"

4. 방향성
뉴미디어라고 하면 실감형 영상을 활용한 미디어 아트 전시를 많이들 떠올립니다. 인공지능이나 코딩, VR, AR처럼 과학 발전에 따라 파생되는 기술들을 생각하기 마련인데요.

서울시립미술관이 정의하는 뉴미디어는 조명과 영상, 음향 등을 이용한 예술 작품을 비롯해, 퍼포먼스와 무형의 개념 미술, 인터넷이나 코딩 등 소프트웨어에 기반한 아트까지 매우 광범위합니다. 동시대에 이뤄지고 있는 모든 실험적인 예술을 포함해 뉴미디어 예술을 아주 넓은 영역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5. 외국롤모델
독일 카를스루의 미디어아트 기관 제카엠(ZKM, Zentrum für Kunst und Medien Karlsruhe)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군수품 생산 시설이 모여 있던 카를스루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쇠락했지만 제카엠이 들어서면서 환골탈태하게 됩니다. 지금은 독일의 실리콘밸리라 할 정도의 IT 도시로 거듭났죠. 이 도시의 모습이 서울 서남권과도 많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6. 장소성
한국의 IT 지역하면 판교 일대를 많이 떠올리곤 하는데, 자본 규모가 큰 대기업이 판교에 상당수 포진돼 있는 것은 맞지만, 구로디지털단지와 가산 디지털 밸리 등이 있는 서남권은 소규모 IT기업 최대 밀집지입니다.

서서울미술관이 금천예술공장이나 금천문화재단 등 지역 문화 기관이나 지역 작가 등과 협력해 이 지역에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카엠을 서서울미술관의 롤모델로 삼고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려 합니다."

7. 향후 전시
앞으로 서울 서남권 지역성을 담은 전시를 진행하실 계획인지.

"서남권은 매우 특별한 지역성과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과거 대규모 제조업 단지로 노동집약산업이 밀집돼 있던 이곳은 공장 3교대 근무로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지역이었죠. 하지만 지식산업센터들이 들어서며 지역의 산업 형태가 바뀌자 밤이 되면 이곳은 아무도 없는 도시로 변하게 됐습니다. 이런 지역의 모습이 작가들의 영감을 강하게 자극할 거라고 생각해요. 과거 노동집약적 산업은 물론이고, 현재 지역 기반 IT 산업의 특성을 뉴미디어 아트에 반영하면 굉장히 좋은 시너지가 날 것이라고 봅니다.

미술관 앞을 흐르는 안양천도 굉장히 좋은 이야깃거리입니다. 1960년대 금천구에 공업 지역과 준주거지역이 생겨나면서 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서 직선화 작업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물이 고이는 구간이 발생하기도 하고, 공장 폐수나 생활 하수가 쌓이면서 생태계가 파괴되고 수질이 악화됐다고 하더라고요, 안양천 물길의 변화와 생태를 복원해 나가는 모습 또한 뉴미디어 아트의 일환으로 보여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8. 어려운 점: 아카이빙
뉴미디어 작품은 아카이빙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진행하고 계신지.
회화나 조각은 크기와 규격이 일정한데, 영상은 분량을 재는 것부터가 난관입니다.

다만 희망적인 부분이 있다면 대부분의 작품이 2020년 이후에 소장한 것이라 작가님들이 모두 살아계셔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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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아까 까페에서 우다다 써서 비문이 많음)





리움 티노 세갈전은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미술이란 무엇인가? 모두 SNS에 전시사진을 올리는 시대에 미술관은 어떠해야하는가? 를 생각해보기 좋은 전시다.

어떤 의미에서 행위예술이 한국에 다소 늦게 메이저 전시실에 들어온 감도 있다. 리움 앞마당의 페이스갤러리와 아마도미술공간에서는 리움의 위성으로서 같은 테마를 동기화해서 70년대의 수행예술의 효시 이건용과 조영주의 행위예술 영상도 상영하고 있다. 더불어 행위예술의 반복 수행성을 데리다의 차연으로 생각해보기 좋은 동선이다.

티노 세갈은 사진영상촬영을 금지해 관객이 모두가 다른 경험을 기억 속에만 간직하도록 디자인했다. 순간의 경험은 이진법으로 구성된 디지털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뇌내 기억으로만 남고, 같은 전시를 왔더라도 저마다 다른 시간에 다른 각도와 다른 입장에서 상호작용이 구성된다. 다시 말해, 퍼포머를 보는 관객과 관객을 보며 그들의 카메라를 주시하며 관리하는 요원과 관객의 따가운 시선을 감내하며 동작을 수행하는 퍼포머들 설령 같은 시공간에 위치했더라도 다른 기억을 갖게 된다.

입구에선 컨템!폴러!리!하며 덩실덩실 춤추는 퍼포머가 맞아주어 발랄한 주토피아 분위기로 시작한다. 극I라도 두려워할만한 위협은 없다.

로비에서는 퍼포머 세 명이 기둥을 만지고 쓰다듬고 화음으로 노래하며 이들이 뭐하는거지 하는 관객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받는다.

이어, M2 입구에 있는 일본 상점의 노렌, 장지문, 한국 사찰의 하마석처럼 문지방 역할을 하는 초록색 비즈커튼(무제-시작)이 고정적이지 않은 행위예술의 시작점을 구분해주고 자전거, 축구, 바이올린 퍼포머들이 움직이는 장면을 바라본다. 언제 누가 어떤 동작을 수행하는지는 모른다. 여기서 관객은 이제 선불교의 깨달음을 제각기 추구해야하는 과업을 떠맡게 된다. 명시적 가르침 없이 각자 알아서 도를 깨쳐야할 것. 앞의 퍼포머는 열반을 지연하고 우리 앞에서 가르침을 드러내는 부처다.

가장 큰 전시장에서 하는 이 구성은 분기별로 바뀌니 그 누구도 같은 전시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주토피아에서 느릿한 북유럽 인디영화 분위기로 전환하더니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14점에 둘러싸인 방의 <키스>에선 <어바웃타임> <노트북> 같은 로코풍 진한 로맨스로 톤체인지한다. 물론 <색, 계>, <폭풍의 언덕>까지는 아니다.

남녀 두 퍼포머가 바닥에 누워 이미 정해진 안무 가이드라인에 따라 천천히 로댕과 클림트와 뭉크의 키스와 제프쿤스의 메이드인헤븐의 포즈를 수행한다.

같은 안무를 반복하지만 퍼포머-관객-시공간의 조합은 다르다. 이런 반복 수행성은 데리다의 차연을 호출해 설명함이 좋다.



엘베를 타고 1층에 올라가면 로댕 조각 포즈(아리아드네)로 바닥에 누워 천천히 움직이는 퍼포머를 권오상의 미국 백인 중년 남성풍 조각(캄보드)이 벽에 기대어, 동양 젊은 여성풍 조각(Bbd)이 누워 바라본다. 브리콜라쥬를 차용한 권오상의 조각과 그 곁으로 개념미술의 창시자 솔르윗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수행성, 차연, 구성주의와 개념적 관련성이 있어서다 자코메티, 최만린, 이우환의 관계항, 고 강서경 작가의 조각 모두 행위예슬의 의미를 톺아보기 좋은 현명한 배치다.

이런 일련의 경험을 지나 보는 이는 물질 없는 예술이란 곧 최종적으로 고정된 물성있는 작품만 미술이 아니라 순간의 행위와 일시적 상황으로만 고정되는 것도 작품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큐레이터의 논문투 전시설명이 많았던 다른 전시와 달리 설명문도 최소화되었다는 것도 발견하게 된다.

행위예술의 선구자 Marina Abramović(와 연인관계)나 광주비엔날레 감독으로 초빙된 니콜라 부리오는 우리나라에 어느정도 유통된 이름이다. 특히 부리오는 관객 사이의 관계 자체가 작품이라는 그의 관계적 미학을 판소리 마당에서 관객이 즉흥적으로 추임새를 넣는 것에 착안해 비엔날레를 기획했다.

티노 세갈은 이런 맥락 속에서 한결 더 나아가

작품은 오브제가 아니라 사건 즉 이벤트라는 점을 부각시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잠깐 발생하는 상황성에 주목한다 리움은 세갈 전시를 통해 고미술 컬렉션 소장중심 미술관이라는 기존 고착된 이미지에서 프로젝트 기반으로 변하며 라이브 경험을 생산하는 기관으로 탈피를 시도한다.

세갈은 디지털의 최전선을 달리는 서울 중심부에서 가장 비디지털적 예술을 시도하고, 초고속 통신망과 5G의 한복판, 반도체 생산의 메카에서 SNS와 클라우드와 NFT같은 디지털 아카이빙을 금지함으로써

관객을 포스트 휴먼시대의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예술이란 무엇인지 학습시키고 이와 함께 리움미술관을 물건을 전시하는 수장고에서 경험을 생산하는 맞춤형 장소로 환골탈태하게끔 한다.

이런 맥락에서 티노세갈전에 들어 온 사람이 작품을 찾고 보는 순간 작품 속에 들어와 작품의 일부로 구성됨을 경험한다. 퍼포머는 의례를 행하고 관객은 현장 공연에 참가해 기록이 아니라 기억만을 남긴다.

이런 방식의 개별사건 중심 예술은 예술을 소비하는 방법을 전환하는 실험 프로젝트다.

그러니까 세갈은 아무리 노동집약적이라도 거래가능한 최종 완성본 형태로  존재하는 캔버스, 물성있는 조각(근처 타데우스 로팍에선 김주리의 거대한 웻소일이 있다), 파일영상으로 의미를 정박시키기를 거부하고, 이런 점에서 예술의 존재론(온톨로지)를 스나이퍼철럼 겨냥해 타당하고 고정관념을 깨부시며 일갈한다.

미술은 잠깐의 대화, 매번 바뀌는 정해진 몸짓, 일시적 상황일 수도 있다고.

이런 시각에서 <키스>를 보면 바닥에서 서로 천천히 자세를 이동하며 미술사의 익숙한 연인포즈를 보여주는데 분명 정확한 동작순서를 루프 구조로 반복하는 게 보인다.

앞서 언급한 유명 키스도상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지만 완전히 똑같이 재현하는건 아니고 몸의 구도만 차용한다. 어차피 완벽한 재현도 없고 그를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회화사에서 사랑을 표현한 몸의 문법이 벽에 붙박힌 그림과 받침대 위의 조각에서 떨어져, 완성태로서 그림이 아니라 그림이 움직이는 것을 보게된다. 사진촬영 금지라는 정언명령 속에서도 이미 이미지는 살아 있는 복제다.

그림은 신체화되고  이미지는 사건화되며 역사는 현재화 된다. 훈련된 안무 퍼포머들은 특정 포즈를 오래 유지하지 않고 다시 다른 제스쳐로 이동하는데, 몸의 연속적인 변환이라는 과정 속에 일종의 살아있는 조각같기도 하다.

자크 데리다는 차이 속에서 의미가 생기고 고정된 본질로서 의미는 없고 그저 반복 속에 계속 생성된다고 말했다. 그의 차연 개념이다. 디페항스라는 같은 음성이지만 처자를e에서 a로 바꾼 창의적인 기획이었다. 의미는 항상 반복되지만 같지 않다. 이에 감화를 받은 주디스 버틀러가 젠더와 사회적 규범으로 수행성을 확장할 때도 핵심은 반복에 있었다.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만 언어, 규범, 젠더, 의미가 존재하지만 완전하게 동일하게 반복되지는 않는다. 반복 가능성 속에 있는 미세한 차이는 맥락 때문에 생긴다. 같은 기호, 같은 문장, 같은 제스쳐, 같은 의례도 다른 시공간, 다른 화자, 다른 맥락 속에서 의미가 바뀐다. 세갈도 같은 안무, 규칙, 작품이지만 미술관 장소적 특성과 관객특성에 따라 매번 다른 의미를 낳기에 동일한 작품도 매번 다른 사건이 되는 것이다. 데리다의 차연적 반복을 적절히 설명하는 예시다.

퍼포먼스 예술의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매번 현재적인 것 같음에도 순수하게 완전한 현재가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예술이라는 점이다. 왜냐면 정확히 같은 퍼포먼스는 절대 다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복될 때마다 변하기 때문이다. 무상, 즉 반복되는 세계에서 동일한 것은 없다.

반복은 동일성을 만들지 않는다. 반복은 차이를 생성하고 그 차이가 의미를 만든다. 따라서 수행성은 차연의 실천적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은 퍼포머와 관객과 장소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펄럭이는 깃발 같은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금 더 고전으로 들어가보자면 판타레이(πάντα ῥεῖ), 즉 모든 것은 흐른다고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유전론자(流轉, flux)가 떠오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No man ever steps in the same  river twice!"

우리는 같은 강에 들어가지만 동시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이다.

(ποταμοῖς τοῖς αὐτοῖς ἐμβαίνομεν καὶ οὐκ ἐμβαίνομεν)

강이 흐르며 물이 계속 바뀌므로 같은 성분의 물에 담그지 못한다. 그러니 같은 강이 아닌데, 강 이름(로고스)는 동일하니 동일성은 유지된다. 전시의 이름은 무제인데, 무제라는 이름만 동일하고 그 안의 변화하는 퍼포먼스는 퍼포머의 상태와 분위기와 관객의 응시에 따라 매번 다른 것과 같다.

헤라클레이토스가 강은 동일하지만 동시에 동일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나 데리다가

기호는 반복되지만 동일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나 같다는 말이다.

공통분모는 동일성은 반복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

그런데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고 싶다. 헤라클레이토스 더 급진적인 유전론자였던 크라튈로스(Cratylus)와 세갈이 닮아 보인다. 이미 벤야민적 디지털 영상 복제시대에 유전론은 테스트되었고, 사진촬영, 기록금지라는 


세갈의 아이디어는 극단적인 유전론자 크라튈로스에 가깝다고 본다. 애초에 동일성도 없다. 기록된 것도 없다. 같은 전시도 아니다.

플라톤의 대화편과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인용문에서 단독저서없이 발언으로만 간접 언급되는 크라튈로스는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 자다.

헤라클레이토스를 더 밀어붙여 단 한 번도 같은 강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디지털 영상시대 반복수행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기록금지를 요구한 오직 순간의 차연으로만 존재하는 티노 세갈의 생각이 크라튈로스와 맥을 같이한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헤라클레이토스는 강은 계속 변하더래도 강이라는 동일성은 유지된다고 생각했는데(변하지만 로고스는 존재)

크라튈로스는 변화가 너무 급진적이어 동일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강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았던 리움 티노세갈전의 이벤트들이 과연 같은 전시인가? 개별적으로 관객은 관람했다는 일, 퍼포머는 수행했다는 일, 관리요원은 감시했다는 일만 있고, 애초에 동일성이 있다고 조차 말할 수 없다.

같은 시공간에서 같은 사건을 본 무리조차도 같은 혀를 공유하며 대화를 나눌 수 없다 .그만큼 설명텍스트도 결여되어있고 오직 퍼포먼스를 보는 나만 명징하고 나머지는 다 가변적이다.

단어를 말하는 순간 대상은 이미 변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처럼 관측하는 순간 위치가 바뀐다. 그래서 말도 않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했다. 동일성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전시장을 나와 까페에 앉아 서로 느끼고 본 것을 말하는 순간 의미가 미끄러진다.

데리다의 차연에서 기호는 대상을 고정하지 못하기에 의미는 계속 미뤄진다. 언어의 불안정성

기호와 대상의 간극.. 의미의 지연. 아 화장실 가야해서 여기까지만. 아메리카노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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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데우스 로팍의 안젤름 키퍼 생일축하 메시지 피드에

작년에 가보지 못한 일본 신사의 설치작품이 보인다

비슷한 맥락에서 청담 탕에서 본 Von Wolfe도 대만 남부 가오슝 미술관에서 아시아최초 대규모 회고전 같은 거 했는데 못 봤다 아쉽


https://www.instagram.com/p/DVokmxsiCW0/?utm_source=ig_web_copy_link&igsh=NTc4MTIwNjQ2YQ%3D%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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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르네상스의 거장, 플랑드르 화가 얀반에이크(1390-1441)의 판화(1572)다.


1. 라틴어 해석해본다

내가 바로 아마인유로 색을 빚는(채색하는) 법을 처음 세상에 드러낸 그 사람이다.

형 Hubert와 함께 만든 새 기법에 브뤼허 (도시)는 경탄했고

어쩌면 고대의 (장인) 아펠레스조차 알지 못했을 기술이었다.

부유하게 번성하던 브뤼허에서 우리의 장인적 명성은 전 세계에 널리 퍼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우리의 명성=예술적탁월함=장인적 완성도=도덕적 미덕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2. ss의 약자로 게르만어권에서 쓰는 ß(Eszett)가 보인다

Straße=strasse=street 라틴어에 없는 글자인데 이 판화가 안트베르펜(Antwerp) 즉 저지대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긴 s는 8-9세기부터 18세기까지 쓰인 s다. 옛 필사본 읽을 때 익숙해져야하는 부분.


3. ille ego qui-docui 구조는 베르길리우스(Virgil)의 아이네이드에도 있는 (-coegi로)고전문형이다. docuit이 아니다. this is I who I taught


ere는 erunt대신 쓰이고, Brugae는 florentes (+abl.=opibus) 때문에 pl. 

Huberto cum fratre에서 cum은 대개 가운데 쓰고, 해석은 앞뒤로 붙일 수 있다. (형제인데, 팩트체크를 해보면 먼저 태어나서 형) 1, 2 둘 다 가능하다.

1) 나는 아마인유로 색채를 배합하는 법을 처음으로 (형 후메르토와 함께) 세상에 알린 사람이다.

2) (형 후베르토와 함께) 이룬 새 발명에 브뤼허는 경탄했다.


I am he who first, with my brother Hubert, taught to blend beautiful colors from oil pressed out of linseed. Bruges, thriving with wealth, was astounded at this new discovery, perhaps even unknown to Apelles himself; soon afterward, our worth has not ceased to be spread far and wide through the whole world 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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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윅4 영화에서 회화의 사용

같은 들라크루아의 작품인데 윈스턴 배경으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보인다. 최고회의를 전복하려는 의도를 시각화하고 후작 배경으로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이 보인다. 권력에 취해서 타인을 도구처럼 소모하다 죽는 결말을 예고한다. 윈스턴은 존윅을 협력자로 등용해 듀얼규칙을 재해석하고 체제를 무너뜨리자 제안한다. 호텔리어로서 직접 총들고 싸우는 게 아니라 상징으로서 반란의 불씨를 차용한다. 사르다나팔루스를 닮은 통제욕이 어마어마한 후작은 케인의 눈을 뽑고 이용해 질서를 유지한다. 규칙을 절대화했던 자기 발언의 족쇄에 묶여 자승자박으로 몰락한다 오만한 자가 전부 가지려다 모두 잃는 결말을 시각장치로서 적절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다 Delacroix, Eugène 1) The Death of Sardanapalus. 1827. 2) Liberty Leading the People. 1830. 

Oil on canvas. Musée du Louvre,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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