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서울에는 미술가의 글쓰기를 다루는 글짓 예술전이 열렸고, 올해 하반기에 국현미에서 그래픽디자인을 다루는 읽기의 기술: 종이에서 픽셀로 전시가 열린다. 과천은 팩션에서 일한 타이포그래피스트 및 디자이너를 영입해 뭔가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문학+미술의 융합, 텍스트+이미지를 다룰 때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의 역할이라는 시의적 아젠다를 더하면 연필의 흑연이 닳을 때까지 신문지를 긁는 노동집약적, 반복수행적 최병소나 다다르지 못하는 편지 작품을 만드는 조소희 작가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최병소와 조소희는 국현미 청주 4층 보이는 수장고 드로잉 소장품전에도 있었고 최병소는 우손갤러리 성북에서도 작고 전 개인전을 열었다.

청주 왔다갔다 하는 길에 자율주행 자동차는 개인화된 고속버스라고 생각했다.
운전을 외주화하고 늘어난 시간에 무엇을 할지 창밖을 바라보며 명상할까
절차시간을 대폭 생략한 대신 그만큼 할 일이 있을지 혹은 그 시간을 남을 헐뜯고 싫어하는데 쓸지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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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현미 청주 5층 방혜자 전시(와 2층 보이는 수장고의 2점과 로비의 1점)에서 닥지를 구겨서 천연안료 먹 유화 흙 아크릴 등을 섞어 만든 작품을 보며 61년에 프랑스 유학가 프랑스인 인류학자 남편과 결혼해 동서양을 넘나들며 초국적 노마드의 1세대이자 글로벌 하이브리드 문화의 증인으로서 살았던 그녀의 삶과 작품은 합일한다는 생각을 했다.

즉 작품의 제작방식과 물성과 작가의 삶이 모두 동서양 문화의 합치를 증명하는 듯했다. 삶의 궤적과 제작방식이 호응하며 내외면이 합일한다. 그 최종 정점은 중세유럽 성당의 대표격인 사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방혜장이 동양적 빛이 선정된 것이다.

뉴저지에는 한국재료로 전통양식의 정자와 가옥을 만든 곳이 있다는데, 방혜자는 남프랑스 아주의 수도원풍 개인 아틀리에 안에 염소털로 만든 한국 붓으로 먹과 닥지로 작업을 하며 다도를 음미하고 불교식 절을 하며 기공을 수련한다.

다큐 영상에서 작가는 평화 영성을 말했고, 종교도상학자 Jean-Paul Deremble은 중세유럽의 원형으로, 도록에서 천체물리학자는 우주와 광학으로 해석해 다면적으로 접근할 여지가 많다

나아가 방혜자의 프랑스어 실력이 탁월해서 깜짝 놀랐다. 아무리 현지에 살아도 깊이 있는 생각을 정확한 문법으로 관계대명사를 이어가며 또박또박 표현하는 것은 상당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하는 일이다. 아무리 동양에 호의적인 인류학자 남편이 서포트를 했더라도 인터뷰 앞에선 개인적 노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빈곤국이던 전후 한국인으로서 국가 문화 출신 젠더 자본 오중차별을 견디며 노력한 결과물이다.

방혜자의 조근조근한 프랑스어 말하기는 마치 윤여정의 영어 말하기 같았다. 영은미술관의 2000년 초 인터뷰인 60대에도 잘했고 2011년과 2021년 인터뷰에서도 잘했다. 쓰지 않으면 녹슬고 모래시계 같이 계속 퇴화하는 외국어실력을 80대에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한국어와 외국어 둘 다 말이다.


예를 들어 이런 표현은 대단했다(누가 타이핑한 것이지만 말할 때 이미 잘함이 뿜뿜 드러났다)

Cela crée un cercle vertueux dans lequel la lumière est la vie, la vie est l‘amour et l‘amour est la paix.
빛이 생명이 되고 생명이 사랑이 되며 사랑이 평화가 되는 선순환을 만든다.
Dans lequel의 성수일치


C‘est en France que je me suis connue en tant que coréenne. Le fait d‘être une étrangère m‘a révélée à moi-même.
내가 한국인임을 깨닫게 된 것은 바로 프랑스에서였다. 이방인이라는 처지가 오히려 나 자신을 온전히 마주하게 해 주었다.
Participle connu+e의 여성 성수일치 révélé+e의 m 도치에 대한 성수일치


Cette énergie m’a pénétrée jusqu’à la moindre de mes cellules..Je voudrais qu’à travers ces pigments, la matière devienne lumière, qu’elle puisse donner à celui qui regarde une énergie, un sourire intérieur.
이 에너지는 내 모든 세포 하나하나까지 스며들었습니다. 나는 이 피그먼트(채색 재료)를 통해 물질이 빛이 되기를, 그리고 보는 이에게 에너지와 내면의 미소를 선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외국에 이주하며 고국과의 교류가 끊어지는 순간 고국의 문화적 변화와는 유리되어 해당 시점에 일시정지한다. 고착화되고 세대로 이어지는 타임캡슐이다

자이니치는 30년대 조선의 한복문화와 타령을 기억한다.
70년대 미국에 이주하며 군사문화와 기독교, 산업화의 잔재가 이어진다.방혜자는 60년대 한국의 기억전달자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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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독일의 아트북 명가 타셴출판사에서 나온 피카소 미술사책을 읽었다. 슈타이들과 함께 고급 아트북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슈타이들은 그라운드시소 서촌에 전시하며 출판과정을 상세히 보여준 적 있고 지금은 광주ACC에 있다. 슈타이들 출판사의 고급 소장본 도서로 구성된 코너가 인상적이었다. 타셴은 화정박물관에 2만달러 50x70cm, 60 kg, 500여 페이지의 티벳벽화 책이 있다.(사진13)

퐁피두 한화 뮤지엄샵에도 타셴의 그 티벳벽화책만큼 크고 무거운 데이비드 호크니 책이 있다. 비매품이다.(사진12)

그 타셴출판사의 피카소 책에 보면 퐁피두 소장본이 꽤 많고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런던 뉴욕 클리브랜드 파리 등 전세계의 피카소 작품을 모아 조형적 특징을 알기 쉽게 비교해주어 이해하기 쉽다. 옛 학자의 위대함이며. 인터넷과 AI로 정보를 많아졌으나 홍수에 식수가 없듯 알짜 정보는 희귀하고 외려 인터넷이 불편하던 시절의 책이 더 양질이다.

사진2-4는 이번 개관전에 온 퐁피두 소장 피카소 작품이다. 얼굴과 신체를 선과 면으로 분해하며 기하학적 실험을 하는 과정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특히 이전에 The Blue Period 파랑의 시기 동안 정서와 색의 관계를 실험하던 과정을 이해하면 색과 조형이 개별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또한 이 작품은 단독으로도 강렬한 시각적 임팩트가 있지만 다음 페이지에 아비뇽의 처녀들에 이르기 위한 과정으로서 맥락화되어 작품의 의미가 한층 더 깊어진다. 전시 캡션에서도 뉴욕에 있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언급했다

사진 6-11는 퐁피두에 소장되어 있으나 한국에 오지 않은 게르니카 이후 후기작이다. 누워있는 나체(리클라이닝 누드)같은 것도 포함되면 좋았겠지만 피카소 개인전이아니라 큐비즘의 발전사를 개괄하는 이번 전시 의도에서 다소 벗어났을 수도 있다. 일본의 서양미술전시는 작품과 섹션수가 우리나라의 2배 정도 분량이라 포함되었을 수도 있으나 exhaustive즉 부담스러울 수 있는 지적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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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영화 시리즈를 기점으로 엔딩크레딧을 끝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겼다, 쿠키 영상 때문이다. 앞으로 나올 시리즈를 예고하거나 중요한 복선 혹은 못 다한 이야기를 전하는 짧은 영상으로서 쿠키는 가끔 1+1행사를 해 2개가 나올 때도 있다.

전시도 쿠키 작품이 있다.
마지막까지 돌고나와야 다 보이는 것, 메인 전시실이 아니라 다른 전시실에 있는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서 쿠키 작품이다.

예를 들어 국현미 청주 5층의 메인 전시실에 방혜자 개인전을 하고 있는데 2층 보이는 수장고에도 두 점이 있고 1층 로비에도 한 점이 있다.

퐁피두 큐비즘도 로비엔 대형 말이 있고 1전시실에서 집중적으로 소개된 피카소, 조르주브라크와 후안그리스는 2전시실 맞은 편에 이르러 20년대 후의 흐름으로 한 번 더 등장한다. 모두 1913-14년의 작품이지만 이후 양식변화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전시의 배치를 자세히 보면 그 의도를 엿볼 수 있고 맥락에 집중하고 있어야 쿠키로 재등장할 때 알아볼 수 있다

왜 이렇게 배치했을까? 관객을 어떻게 설득하려했을까? 좌우가 어떻게 같고 다를까? 라는 물음에 스스로 답하며 맥락과 구조에 집중하면 생각의 훈련이 많이 된다. 영화와 전시장 마지막의 쿠키는 흐름을 간파할 때 캐치할 수 있는 것이다.

퐁피두 1전시실 피카소의 강렬한 작품으로 모두 횡적으로 건너가 흐름을 놓치지만 바로 맞은 편에 피카소의 작품이 기하학적으로 변형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아래 두 작품이 전시장 입구 바로 맞은 편에 있고 구상과 비구상, 얼굴과 기하학적 해체인 거울상인데 두 작품은 서로 마주하지만 멀리 떨어져있고 관객은 다음 벽면을 따라가느라 이 두 작품이 상호 조응하는 것을 캐치하기 힘들다 그 맥락을 발견한다면 유레카! 쾌락의 모먼트다 지적 희열의 순간이다

수원시립 소장품전 블랑블랑도 벽면을 따라 배치된 작품이 호응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색을 검정으로 고정했으니 물성과 형태의 차이가 남는다.

평창가나아트 소장품도 대각선이 조형과 물성에서 호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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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Kraus의 Angel Down
온점이 없고 쉼표로 이어지며 문단 시작이 and으로 시작하는 이상한 소설이다. 특이한 문체가 주는 리듬이 꾸란의 fa(فَـ)로 시작하는 문장처럼 느껴진다. fa도 and다.

혹은 그리스어의 kai나 구약의 히브리어 waw같은 (모두 and을 의미한다) 문장이 주는 연쇄적 계시(revelatory chaining)처럼 느껴진다.
사건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며, ‘그리고‘로 이어지는 중에 존재론적으로, 계시의 압력으로 밀려온다.

저자가 의도적으로 모든 문장에서 온점 제거한 이유는 (의미의) 닫힘을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대개 점을 찍으며 생각을 종료하고 의미를 봉합하고 감정을 매듭짓는다.

그런데 크라우스는 모든 문장을 쉼표로 이었기에 낭독자는 어디서 끊어 읽고 어디서 숨을 쉬어야 하는지 불명확하다. 독자는 무엇이 핵심인지 흐려지는데, 구어체와 생각과 서술과 시간과 기억과 현재가 모두 혼합된 상태로 경험하게 된다. 전쟁의 PTSD를전하기 위해 선택된 문체다. 난해하게만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전쟁과 트라우마와 광기의 인지 상태를 재현하기 위한 것이다.

사건의 연쇄 작용 가운데 인간이 흐름에 휩쓸리는 느낌이 우리나라 문화로 비유하자면 판소리같다. 북의 장단에 이어붙이는 구술문화다. 야전 보고, 전장 증언, 기도문, 의식의 흐름같다(후술)

캡쳐2는 p235는 스포일러다(메롱)

3인칭 객관적 소설이라기보다 POV 1인칭으로 누군가가 살아남기 위해 중얼거리는 기록이 마치

우크라이나 전쟁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하는 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 감독의 <마리우폴에서의 20일(2023)>, <2000미터 안드리브카 전선(2025)>같고

의식의 흐름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Ulysses)>같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영화화를 목표로 쓰여진 많은 현대소설 <하우스메이드>나

프랑스 기욤 뮈소의 <구해줘 (Sauve-moi, 2005)>,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Seras-tu là?, 2006)>,<파리의 아파트 (Un appartement à Paris, 2017)> 등에서 보이는 빠른 컷 전환의 기법과는 대척점에 있다.

또, 캐릭터의 내면 설명과 심리 분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소설과도 정반대의 지점에 있다. 서사적 설명이라기보다는 중언부언 구토에 가깝다. 분절된 논리가 아니라 반복과 접속과 누적에 방점이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크쉬슈토프, 부분적으로 알베르 세라, 오즈 야스지로나 소마이 신지의 롱테이크처럼

장면을 컷하지 않고 문장을 질척질척하게 이어붙인다.

그래서 시체, 진흙, 피, 기억, 환영, 천사의 이미지가 분리되지 않은 몽타주로 혼재되어 있다. 구술된 악몽같다. 포크너나 코맥 매카시로도 비유해볼 수 있겠다.

전쟁 주술, 집단적 애가(哀歌), 패배자의 성서, 타락한 복음서로서 이 이야기가 진흙 냄새와 숨막힘과 쇳소리와 끌려가는 감각의 추체험을 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네메시 옐레시 라슬로 <사울의 아들(2015)>도 생각난다.

아이가 정말 자신의 아들인지 왜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장례를 지내주려고 하는지 아무런 설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우슈비츠를 1인칭 시점으로 추체험하는 영화다.

깔끔하게 신 분할하고 논리적으로 플롯을 분석할 수 있는 소설이라기보다 늪을 걸어가는 육체적 느낌마저 든다.

아마 이 소설을 가장 흥미롭게 읽은 사람은 유발 하라리이리라 생각한다. 그는 한국어로 이 글을 못 읽겠지만.
하라리는 옥스퍼드대 지저스 컬리지에서 2002년에 중세 전쟁사로 박사를 받았고 그 박사논문에 기반한 책은 <르네상스 역사 회고록>으로 번역되어있다.

중세 전쟁 참전 군인과 용병의 회고록이라는 구술문학을 토대로 균일하고 선형적인 달력에 기반한 역사서술이 아니라 자기에게 의미있는 전쟁을 과장하고 필요없는 이야기는 소략해 서술이 점프컷처럼 튄다는 점을 논했다.

군인의 반복 증언과 구전 서사와 히브리 묵시문학이 미국소설의 외피를 입은 특이하고 재밌는 이야기지만 읽기는 쉽지 않다.

한국은 한 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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