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문화역 아시아프 1부에 출품한 작가 중 몇 명만 글로 다뤄보자(5)


1. 이래, 비가 담긴 저녁, 장지에 채색, 2024

2. 이래, 비가 남긴 아침, 장지에 채색, 2024.


형광색과 무채색, 녹색과 주황의 대조, 빛나는 노란 태양과 검푸른 하늘은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황홀한 꿈속 풍경 같다. 셀링 포인트를 잘 아는 것 같은 작가다. 일상에서 초현실적 마법세계를 느끼게 해주며, 장식적이고 만화적이면서 치유와 명상이 느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지갑도 열 수 있을 그림이다.


땅거미 무렵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대의 색채가 하늘에 스펙트럼으로 묘사되어있다. 보라, 파랑, 핑크가 층을 이루는 이 그라데이션은 저녁노을의 감각을 전달하며, 원경의 마을을 암시하는 전기 불빛과 함께 호수에 반사된 달빛은 화면의 중심을 고요하게 고정한다.


수직적인 나무의 가느다란 가지들이 세밀한 필체로 신경망처럼 얽혀있는 반면, 하단의 잎은 만화적으로 도형화 되어있어 단순과 세부라는 두 화풍이 병치되어 있다. 낮의 나무도 마치 볼테로풍으로 그려져있어 재밌다.


상단 하늘에는 구슬처럼 떠 있는 김창열 화풍의 극사실적 물방울들이 흩뿌려져 있는데 이는 풍경과 관객 사이에 창문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로 인하여 그림에 수공간의 평안함이 부여되고 과한 데코나 몰딩같은 프레임 없이 베일처럼 장식적 효과를 준다. 장식적이면서 아름답다.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림에 묻어있는 유리창의 비중력적 물방울은 시공간적 확장을 제안하는 회화 내 장치다.


풍경과 동물이 친근하지만 물방울이나 빛이나 형광 아우라 처리나 색채 사용이 어딘가 오묘하게 초현실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일종의 비현실적 일상성,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다. 보르헤스적인 감각이다.


태양과 달이 선명한 광원으로 억압적인 존재감을 주기보다는 화면 전체의 명도를 높이며 은은한 반사광을 주며 볕뉘처럼 부드럽게 스며든다. 물감이나 색채 스펙트럼에서 보았을 때 재료값이 꽤나 들었을 것 같은 유복한 그림이다


고양이 모티프는 특이하다. 낮 그림의 검은 고양이와 밤 그림의 황금빛 고양이는 좌우에서 대비된다. 제목도 비슷하거니와, 모티프 측면에서 두 그림이 한 세트, 한 쌍, 쌍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낮과 밤, 태양과 달, 검은 고양이와 황금 고양이는 세계의 두 얼굴이자 시간의 이중성으로, 시리즈 전개도 가능할 것 같다.


고양이는 관람자에게 감정 이입의 통로가 되며, 의인화된 동물은 작품의 서사성을 강화하는 장치다. 두 마리 고양이가 모녀처럼 호수 앞에 앉아 서로를 따스하게 응시하는 좌측의 그림은 안온한 저녁을 상징하며, 우측의 그림에서 아침녘의 고양이는 씩씩하게 홀로 길을 떠난다. 길 위를 걷는 데이타임 냥이와 앉아 쉬고있는 나잇타임 냥이모녀는 관람자를 대신해 풍경과 대면하는 대리자 역할로, 보는 이를 화면 속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치유적이고 명상적이다.


고양이의 잔털을 표현한 세필붓 스트로크는 예민함을 요한다. 거대한 나무마저도 거친 필법이 아니었다. 작가는 세심한 사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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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에 압구정 로이갤러리에서 양현모전이 있었다. 오늘 사진과 리플렛 정리하다가 생각의 실타래를 정리해본다.


비정형과 기하학 사이에서 유연한 형태를 그리는 <일렁이는 오늘>전이다. 감각과 기억 사이에서 복잡한 상념을 흐르는 대기와 번지는 빛으로 표현했다.


인스타와 사이트에는 내가 유심히 본 작품에 대한 정보가 없다. 아무리 사진이 공개적으로 오픈되어있어도 직접 전시를 가야하는 이유다. 이번 전시의 메인 테마 연작은 인터넷에서 거의 그대로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윗층에 있는 <어느 날의 파편 No.1-4>(2025)와 위 아래에 하나씩 있는 <고대의 나침반 No.1-2> 시리즈는 정보가 없다. (아래 사진 확인) 이 연작들을 보고 나서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어느 날의 파편은 혼합재료다. 사진을 찍은 뒤 갈갈이 찢고 다시 이어붙였다. 본디의 사각형 형태가 아니라 비정형으로 섞인 형태에 스테인리스 스틸같은 테두리를 더하고, 저녁밤 아파트의 불빛과 하늘의 별빛을 오묘하게 섞었다. 약간 시간을 두고 응시하며 명상해야 그림이 비로소 내게 말을 건다.


야경을 볼 때 카메라 렌즈의 사각프레임안에 찍히는 형태로만 광경을 기억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망막에 맺히는 상 가운데 일부만 선택적으로 뇌리에 저장한다. 그런 아이디어를 토대로 자기에게 의미있는 풍경만 시각적 클러스터로 모아 콜라주했다. 무엇보다 추억은 그때 그 장소에 함께 했던 사람 혹은 기분과 함께 남는다 점을 시각화한 것 같다. <어느 날의 파편> 연작을 통해 <일렁이는 오늘> 연작의 감성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


고대의 나침반은 풀밭 강아지풀 느낌의 실보풀이 제기처럼 스커트형태로 나침반에 붙여진 작품이다. 이 설치작품이 메인 테마 회화의 앞에 있음으로서 작품이 어쩐지 더 완성되는 느낌이다. 선이 구부러지고 흐르는 방향과 각도가 회화와 닮았다.


https://www.roygalleryseoul.com/exhibition/whispering-curr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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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에 있는 하나은행 미술품 개방수장고에 다녀왔다. 2층에 약 110여 점 소장 중이다.


한남동 두아르트 스퀘이라에서 올해 5-6월에 했던 톰 하우스Tom Howse의 작품이 보인다. 그때 전시장에서 봤던 작품은 아니다. VIP 기관 관계자용 그림이 따로 있거나 다른 데서 구입했거나 했을 것 같다. 구매경로는 정확히는 모르겠다.


작품을 찬찬히 보니 매년 정기적으로 구매하는게 아니라 초과 이윤이 있을 때 사는 것 같다. 프레임이나 작가군을 보았을 때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면 팔릴 작품은 적절할 때 팔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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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의 건축가 아들로 태어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활동한 Oskar Laske (1874-1951)




Ansicht von Positano (1921)



Begräbnis des Wiener Bürgermeisters Dr. Karl Lueger (1910)


건축가 출신에서 비롯된 구조적 공간 감각을 읽어낼 수 있다. 수채라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매체로 사회적 리얼리티와 집단적 서사를 그린다는 점에서 이응노의 군중과 비슷한 점도 있다.


이탈리아 남부 아말피 해안의 포지타노 풍경을 담은 그림은 건조한 공기를 투과하는 지중해의 쨍한 햇빛에 반사된 석조 건물과 구불구불한 언덕길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의 네러티브를 다룬다는 점에서 관광의 풍경이라기보다 도시 민속화에 가깝다.


수채화의 투명함을 살린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분홍빛과 주황빛 벽과 녹지의 연두색과 산악의 짙은 청색이 조화롭다.. 허나 그와 동시에 붓질은 꽤 빠르고 단호해 즉흥적이면서도 생동하는 시각적 리듬을 준다


하얀 돌담이 빛을 강하게 반사해 길을 관객의 시선과 함께 위로 끌어올리는 듯하다.


라스크의 포지타노 풍경은 전통적 원근법 구도와는 다르게 길의 곡선을 중심축으로 설정한 회전 원근법이 인상적이다. 시선은 하단에서 시작해 돌담을 따라 위로 상승하는데 공간이 곡선적 리듬 속에서 서서히 확장된다. 이는 르네상스의 정적이고 수학적인 소실점 구도와 달리 동적 시점 이동을 유도한다.


아울러 투명수채를 중첩해 건물의 입면이 빛을 부유하듯 반사해 유화보다는 빛이 산란하는 듯하다. 수채의 번짐 효과를 통해 노후된 벽면과 풍화의 흔적을 암시한다.


인상주의 화풍에서 두드러지는 순간적 시각 효과와 유사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라스크는 광학적 인상보다는 건축적 구조와 사회적 서사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같은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던 빈분리파의 구스타프 클림트나 에곤 쉴레가 주관적 내면과 장식적 양식을 탐구한 것과 달리 라스크는 도시적 삶과 집단적 행위를 사실적이면서도 리드미컬하게 포착했다. 


어디에서 무엇이 보이길래 그런 점을 엿볼 수 있을까?


도시와 인간을 별개의 대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리듬을 풍경 속에 녹여냈다. 인물은 개별적 행동이 강조되기보다 행동 단위로 배치된다. 예컨대 길가에 모여 앉은 세 인물은 미시적 세부가 강조된 초상화적 묘사보다는 집단적 행위성을 통해 사회적 리듬을 시각화한다. 이는 풍경-인물 통합적 서사라는 라스크만의 회화적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군중 묘사 방식은 2번째 사진 성 슈테판 대성당 첨탑 아래의 장례 행렬에서 더 두드러진다. 원피스처럼 모든 인물에게 각기 다른 표정을 묘사하는 세부 묘사 대신 집단이 덩어리화 되어있다. 화면 전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인파는 점묘와 파편적 붓질로 묘사되는데 이는 시각적 재현보다는 사회적 에너지의 추상화를 의도한 것 같다.


상단의 성 슈테판 대성당 첨탑은 엄격한 수직축으로서 도시의 정신적 권위를 상징한다. 전경 좌우의 검은 장막과 깃발은 수직이 수평과 유동적 형태로 교차하여 수직적 권위와 수평적 대중성의 긴장을 시각화한다.


집단 의례를 상징하는 검은 유기체 군집은 파토스적 음영에 가라앉아 있어 도시 전체가 애도라는 집합적 감정에 잠식되는 풍경을 드러낸다. 그러한 점에서 사회적 풍경화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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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뮤지엄 옥승철전

게임 시나리오나 챕터 선택하듯이 교차로에서 세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재밌는 동선이다. 팝아트와 애니작화풍의 작가의 전시테마와 맞닿아있다.

이스터섬 모아이 조각상같은 4m 크기의 대형 여성군상은 얼굴만 있고 긴 머리칼이 몸과 팔을 대신한다. 으레 그런 대형상들이 얼굴만 강조하듯이. 목이 없다.

옛날 만화 고기덩어리의 나이테 모양 마블링 절단면같은 잘린 목 그림과 넘어져 있는 두상 조각도 목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사람 형상에 얼굴만 강조되고 목이 없다는 게 공통된 모티프다.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현대인을 상징할 수도.

원색의 캐릭터 얼굴, 무채색의 눈동자가 없는 얼굴 아웃라인도, 피규어풍 조각도 목이 없다

고글 쓴 변신 만화풍 페이스들은 남자는 화내고, 여자는 맹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도시인의 감정상태일지도 모른다.

분노하고 싸우려는 얼굴의 눈동자는 갈라져있는데, 이런 번개형 선처리가 녹색 광자포(작품제목은 spike)쏘는 장면에서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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