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두렁에서 사이언스파크로 상전벽해를 겪은 마곡나루에 위치한 서울 식물원에 초등학교 교실 마냥 빼곡히 심어져있는 이국식물 사이로 장한나 작가의 뉴 락을 발견했다.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이 파도, 바람, 태양열에 의해 풍화되어 자연의 돌처럼 변해버려 새로운 돌과 진배없다는 아이디어를 담은 뉴 락. 식물원이라는 완벽한 자연의 공간에 침투시켰다. 근데 애초에 식물원이란 박물관, 박람회 등과 마찬가지로 자연상태에선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는 여러 소재를 인공적으로 배치한 것 아닌가. 자연을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인간의 위대하고도 어리석고 헛된 욕망이 자리잡은 곳. 플라스틱 시대와 인류세를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뉴 락을 식물 사이에 배치한 전시 디스플레이는 그간 환경문제를 다뤄왔던 고발형 예술이나 친환경 캠페인의 구조를 전복해, 쓰레기를 줄이자고 목소리 높여 외치는 대신, 인간인 우리가 만든 인공물이 이미 자연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깊숙이 지구와 한 몸이 되었다, 라는 거대한 공존의 네트워크를 역설적으로 증명해냈다고도 볼 수 있다. 자연(식물원) 속에 숨겨진 인공의 의사(쑤도pseudo)-자연, 혹은 유사-자연인 셈.
쓰레기 매립지의 퀴퀴한 전경, 오염된 해안가에서 녹조와 뒤엉킨 어망이 하얗게 비어 있는 화이트 큐브 갤러리에서 이게 문제야! 하면서 고발의 형태로 제시되었던 전형적 환경예술 전시 디스플레이는 흡사 평창 서울시립아카이브에서 오윤이 판화로 척박한 노동현실을, 국현미 안국 올해의 작가상에서 홍진훤이 사진으로 시위와 데모를, 혹은 일민이나 경기도미술관에서 수 년 전 임민욱이 재개발을 다루는 방식과 비슷하다. 현장을 있는 그대로, 그러나 극적으로 묘사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문제가 되는 현실을 드러내 자본주의가 제공한 편리한 일상을 살고 있는 일반 관객을 불편하게 할 것.
그러나 장한나 작가의 방식은 드러내는 고발이 아니라 정반대로 숨바꼭질과 같다. 인간이 돌도고 정성스럽게 가꾼 순수하고 이상적인 자연(이 자체가 형용모순이긴해)의 공간인 온실 내부를 선택해 진짜 식물과 천연석들 사이에 뉴 락을 은밀하게 숨겨뒀다.
관객으로 하여금 무엇이 진짜 돌이고 무엇이 플라스틱 돌인지 단번에 구별하기 어렵도록
윌리를 발견한 순간은 슬그머니 시각적 충격으로. 무균실처럼 아름답게 관리된 식물원에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허연 돌이 사실은 인간이 버린 쓰레기의 최종 형태? 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인지부조화가 발생하는 까닭. 아 이게 플라스틱이라고? 새로운 시대의 돌이나 마찬가지라고?
전시 설명문 왈. ˝정답을 맞히는 것보다 구별이 어렵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진짜 돌과 플라스틱 돌이 서로를 닮아가는 풍경 앞에서, 우리는 지금의 자연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맞는 말이다.
외면하고 싶고 얼른 치워버리고 싶은 쓰레기가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의미마저 도출해볼 수 있는데 이는 가치 판단을 유보하고 선악 구도를 넘어선 새로운 지질학적 현실을 인정하는데까지 이른다.
사실 인간은 악하고, 파괴되는 자연은 보호해야 한다는 고루한 이분법적 구도는 왠지 도덕적 부채감을 자극해왔던 게 아닐까. 반대로 작가는 뉴 락의 발생을 비난하거나 애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수집한다. 다큐멘터리 작가같은 태도지만, 선택과 배치는 애초에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탈정치적인 태도도 하나의 태도를 취한 것,
한편 돌은 무엇을 말하는가? 에에올. 도가도 비상도. 자연은 말하지 않고. 않기에 자연의 무심한 수용력을 보여줄 뿐이다. 플라스틱이 지구에서 사라지지 않고 결국 자연의 일부로 동화되어가는 자연의 적응은 곧 새로운 진화. 자연은 인간의 선악 판단과 관계없이 쓰레기마저 자기 품으로 끌어안아 풍화시킨다. 몇 천 년이 걸린다고 하나 시간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편.
뉴 락을 박물관의 광물 표본처럼 정교하게 분류하고 배치해 지층에 영원히 새겨질 신암석 유형으로 선언하는 한편 인간이 소멸한 이 땅에 남을 미래의 화석은 바로 인공 플라스틱이라는 담담한 경고를 발신한다
역설적으로 추한 쓰레기에서 콜렉팅한, 수석을 닮은 플라스틱은 더러운 기피대상이라기보다 기묘하고 아름다운 질감과 색채를 지녀 아이러니하게도 미의 관조대상이 된다. 역설적인 예쁨이다. 모순적인 감각을 느끼는 이는 환경문제를 지루한 의무나 정언명령이 아닌 매혹적이고도 섬뜩한 미적 탐구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될지도 모르겄다,
현지에선 냄새 좋은 풀, 감기에 잘 듣는 풀, 빨강이 초록이로 불렸을지 모르는 식물이 라틴어 학명으로 어렵게 브랜딩되어
입에 올려 외우기도 힘들지만 과거에도 지금도 현지에서도 누구는 아이폰 모델명 외듯 외우고 이것도 몰라! 하며 애들 쿠사리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 혀가 꼬이는 이름을 지닌 여러 사막 지중해 열대 식물 사이로 철제 조형물이 숨겨져 있는데 이것은 전시의 일부일까? 의도된 것일까? 페인트칠이 보이는데...
수련을 보면서 모네는 백내장의 눈으로 물에 비친 반사면에 집중했겠구나 생각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