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SQM, 챕터투, 알부스(연남 홍대)

 + 씨알(25까지 끝), 연희아트페어 얼마 전까지 했고, 전쟁과 인권박물관 추천


갤러리조선(북촌)

 + 국현미, 학고재, 국제, 바라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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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트사이드, 아트스페이스(서용선의 단종 4.22 시작), 프로젝트사루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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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늘 화가 난다. 십 몇 년 째다. 주간지 뉴요커를 읽을 때마다 글을 오밀조밀 맛있게 잘 써서 화가 난다. 질투로 인한 분노다. 왜 이렇게 잘 쓰는거지? 얼마나 잘 썼는지 우리말로 일일히 설명하는 것도 짜증나고 하여튼 마음이 좀 그렇다.


NYT나 더 코리아 타임즈(특히 박한솔 기자)를 읽을 때 이정도는 아닌데 뉴요커는 솔직히 특별한 점이 있다. 작문의 최정점이라고 할까.


23년부터 The Art World 외부 필진에 Zachary Fine가 합류했다. 

23.11, 24.6, 25.6과 9, 이렇게 1년에 1번 정도 투고되다

25년 11월 이후로 매월 한 꼭지씩, 2월부터는 두 편씩 올라오고 있다.


이 저자가 내 홧병의 근원이다. 뉴욕대 학사, 옥스포드대 박사로 웨슬리언에 포닥으로 있다. 저세상의 셰익스피어나 제인 오스틴을 질투할리는 없다. 동시대의 특출난 재능을 부러워하지


뉴욕 메트에서 하는 라파엘로전에 대한 리뷰다


르네상스의 문제아(runt)는 라파엘로였을까?



Was Raphael the Runt of the Renaissance?


제목에서도 보면 r 두음 삼단콤보를 위해 일부러 runt를 선택했다. 사전적 의미는  (한배에서 태어난 새끼들 중) 제일 작고 약한 녀석이다.


supposedly traded truth for beauty 진실을 버리고 아름다움을 택했다고 여겨지고


obedient daydreams of antiquity 고대에 대한 순종적인 몽상들


볼 부위의 짧고 촘촘한 해칭 선이 얼마나 절제되어 있는지, 그리고 바로 옆의 머리카락에서는 그 선이 얼마나 느슨해지는지 보라. 마치 건물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다.


얼굴의 어두워진 가장자리는 마치 종이 위에 파내어진 것처럼 보여...


이렇게 좋은 표현 다 쓰긴 좀 그렇고 복붙해서 채선생에게 우리말로 번역해달라고 했다. 우리 인공지능 선생께서 모든 글을 번역하지 않으셨고 문체에도 번역투를 남기긴 하셨는데 어쨌든 저작권 이슈가 있어 원문을 게시할 수는 없다.



https://share.google/b7VG3EyJoe6kDoMsa


르네상스의 문제아는 라파엘로였을까?


많은 이들이 그를 지루하다고, 단순한 아름다움을 파는 장사꾼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메트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는 그의 위상을 다시 세운다.


역사가 문화적 쇠퇴를 이렇게 명쾌하게 진단해주는 경우는 드물지만, 유럽 미술이 몰락으로 향하기 시작한 정확한 순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비평가 존 러스킨에 따르면, 그 재앙의 이름은 라파엘로였다. 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와 함께 한숨 섞인 찬사 속에 언급되던 이 거장은, 진실을 버리고 아름다움을 택했고 결국 둘 다 파괴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따분하고 공허하며 “맛없는 독”이었다고 러스킨은 말했다. 텅 빈 성모상들, 구조적으로 완벽한 구도, 고대에 대한 순종적인 몽상들—현대인의 눈은 거기서 화가다운 기이함이나 개성의 흔적을 찾아내려다 결국 지쳐버린다.


나 역시 메트에서 8년에 걸쳐 준비된 전시 “Raphael: Sublime Poetry”를 보기 전까지 이런 반감을 조금은 품고 있었다. 수백 점의 작품과 세기에 한 번 있을 법한 희귀성이 결합된 이런 대형 전시는, 관람자를 변화시키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저항이 더 단단해지거나, 혹은 천재성 앞에서 무너진다. 그런데 이번 경험은 훨씬 기묘했다. 그는 다른 양식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다른 예술가들에게 영향은 널리 퍼져 있으며, 위상은 신화적이라, 오히려 또렷한 초상을 잡아내기 어려운 화가였다.


라파엘로의 신화는 대칭으로 가득하다. 그는 1483년 성금요일에 태어나 1520년 같은 날에 죽었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중심에서 이는 결코 사소한 우연이 아니었다. 서른일곱에 사망했지만, 과도한 성생활 때문이었다는 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가 예수와 같은 서른셋에 죽었다고 믿고 싶어 했다. 그의 주요 전기 작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어머니가 유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젖을 먹인 것이 그의 재능에 기여했다고 썼다. 현대 전기 작가도 이를 지지한다. “그 따뜻한 모유 수유는 분명 미래의 예술가를 형성한 요소 중 하나였다.” 물론, 그럴지도.


보다 구체적인 정황도 결코 덜 길하지 않았다. 라파엘로의 아버지 조반니 산티는 우르비노에서 평판이 좋은 화가이자 시인이었고, 우르비노는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의 궁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궁정 도시였다. 예술을 사랑한 이 공작은 15세기 회화의 두 흐름을 자신의 영지로 끌어들였다. 하나는 이탈리아식 양식의 기하학과 구조적 지성인데, 이는 라파엘로가 태어나기 얼마 전 이 도시로 와 선원근법에 재능을 펼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대표한다. 다른 하나는 플랑드르식 양식의 세밀한 관찰 집착인데,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과 얀 반 에이크가 그 예다. 라파엘로의 아버지는 이 두 전통을 모두 흡수했고, 가족의 집과 연결된 건물 안에서 번성하는 화가 공방, 곧 보테가를 운영했다. 어린 라파엘로는 버드나무 가지로 숯을 만드는 법이나 멧돼지 털로 만든 붓을 다루는 법만 배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보테가의 엄격한 위계도 보았을 것이다. 누가 물을 길어오고, 누가 자포르 석에 안료를 갈고, 누가 그림의 구도를 구상하며, 서로 다른 성격들이 어떻게 하나의 목표를 향해 조율되는지를 말이다. 라파엘로의 아버지는 아래 사람들을 관리할 줄 알았고, 동시에 페데리코 공작의 생애와 업적 전체를 다룬 서사시까지 쓴 궁정인으로서 위 사람들을 치켜세울 줄도 알았다. 그는 이 두 재능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라파엘로를 칭찬하는 가장 호의적인 평가들조차도 그의 다중적 천재성—화가, 드로잉 작가, 건축가, 시인, 고대 유물 조사자—을 찬양하면서, 그가 지닌 절묘한 사회적 감각과 출세 능력을 함께 언급한다. 그는 단지 뛰어난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는 고(高)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공손한 관료형 인간이었다.


전시에서 우리가 만나는 라파엘로는 모자를 쓴 어린 소년이다. 1500년경의 드로잉,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그의 눈에 약간의 강인함을 담아 보여준다. 그는 종종 드로잉가로서 먼저, 화가로서는 나중으로 여겨지는데, 여기서 그 이유를 잘 보여준다. 볼 부위의 짧고 촘촘한 해칭 선이 얼마나 절제되어 있는지, 그리고 바로 옆의 머리카락에서는 그 선이 얼마나 느슨해지는지 보라. 마치 건물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다. 얼굴의 어두워진 가장자리는 마치 종이 위에 파내어진 것처럼 보여, 원래라면 가볍고 달콤했을 드로잉에 더 흥미로운 인간적 무게를 부여한다. 열두 살 무렵 라파엘로는 부모를 모두 잃었고, 열일곱 살에는 이미 마지스테르, 곧 정식 화가가 되어 제단화 개인 주문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배움은 끝나지 않았다. 도제 시절이 지난 뒤에도 그는 스승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서 계속 일했다.


페루지노는 오늘날 가정 이름은 아니지만, 15세기 말에는 이탈리아 최고의 화가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라파엘로가 1504년경 피렌체에 도착해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사고가 재조정되기 전까지, 페루지노는 그의 북극성이었다. 전시에는 스승의 회화와 드로잉이 여러 점 있어, 바사리가 말한 라파엘로의 “세밀한 양식”을 그가 어떻게 익혔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페루지노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형제단원들”(1500년경)에서는 신자들의 손가락이 유난히 또렷하고 작게 묘사되는데, 이는 중앙의 커다란 아우구스티누스, 인상적으로 갈라진 수염을 가진 인물 앞에서 그들의 중요성이 낮다는 뜻이다. 페루지노의 구도는 대체로 좌우 대칭이 어설프다. 왼쪽에 두 사람, 오른쪽에 두 사람 식이다. 피부는 흔히 양초 왁스처럼 보인다. 16세기에 들어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점점 시들하게 보기 시작했다. 의사이자 작가였던 파올로 조비오는 페루지노의 상상력을 “불모하다”고 불렀다. 미켈란젤로는, 원래 점잖은 말을 잘 하던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그를 그저 “서툴다”고 했다.


페루지노를 라파엘로의 대조항으로 삼는 것은 쉽지만, 라파엘로가 스승의 인물들에게서 그 경직성을 완전히 걷어냈다고는 나는 확신하지 않는다. 특히 얼굴이 그렇다. 마치 양초 왁스가 피부 아래로 스며든 것 같아서, 피부는 더 부드럽고 우아해졌지만 그 안에 어떤 내적인 경직성이 숨겨져 있다. 라파엘로의 찬미자들은 종종 그가 “자신이 그린 남녀의 영혼을 드러낼 수 있었던 세대 유일의 화가”였다고 말하거나, “심리적 현존감”을 전달하는 데 탁월한 마법사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과장하고 있거나, 다른 화가의 작품을 보고 있는 것이다. 라파엘로는 분명 신체의 구조와 무게의 분배에서 감정을 끌어낼 수 있었지만, 대다수 얼굴, 심지어 가장 인위적으로 표현적인 얼굴조차도 심리학이라 부를 만한 것에는 짓눌려 있지 않다. 이것만 들으면 나쁜 회화의 공식처럼 들릴지 모른다. 이상하게도, 그렇지는 않다.


메트 전시를 보는 한 가지 방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며 라파엘로와 그 주변 인물들의 작품 237점을 꼼꼼히 훑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전시를 뼈대만 남기듯 더 과감하게 잘라, 맥락을 위한 여백을 건너뛰고 라파엘로 작품 175점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세 번째 방법은—이건 큐레이터들에게는 말하지 말아 달라—전시 한가운데 있는 팔각형 방으로 곧장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에는 라파엘로의 사교 초상화 다섯 점이 있고, 모두 걸작이다. 가는 길에 “알바 성모”(1509~1511년경)를 잠시 경배하듯 바라보아야 한다. 목가적 달콤함이 완벽한 원을 이루는 작품이다. 눈에 띄는 드로잉도 마음껏 흡수하되, 일정이 빠듯하다면 초상화들에 집중한 한 시간이 전시의 나머지 부분에 흩어진 한 시간보다 훨씬 값지다.


팔각형 왼편에는 두 점의 그림이 있다. “La Muta”(1503~1505년경)와 “유니콘을 든 젊은 여인”(1505~1506년경)이다. 둘 다 매우 흥미롭다. “La Muta”, 즉 “벙어리 여인”은 검은 공허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그녀를 “벙어리”라 부를 타당한 이유는 없지만, 레오나르도는 화가가 인물의 정신을 포착하려면 “손짓과 팔다리의 움직임”을 통해야 하며, 이런 것은 “벙어리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다고 썼다. 여인은 무릎 위에 손을 포개고 있는데, 이 자세는 라파엘로가 “모나리자”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와 레오나르도는 모두 1504년부터 1508년 사이 피렌체에 있었다. 하지만 이 그림의 초점, 즉 전체 구도가 빨려 들어가는 지점은 손가락 하나다. 그 손가락은 캔버스 아래쪽과 이어져 있어, 마치 의자가 보이지 않는 버튼을 누르고 있는 듯하다.


그 인물은 아마 조반나 다 몬테펠트로 델라 로베레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 나이는 약 마흔이었고 최근 과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지닌 심리적 무게 전체는 그 하나의 긴장된 손가락에 응축된 셈이다. 그림의 윗부분을 손으로 가려 보라. 그러면 조반나의 무표정한 얼굴이 사지의 움직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얼굴을 심리의 무대로부터 제거함으로써, 라파엘로는 그림의 나머지 요소들에 감정을 전달하고 만들어내라는 비정상적으로 큰 압력을 가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테일은 조반나의 오른쪽 어깨에 달린 붉은 리본이다. 소매를 드레스에 고정하면서 어둠 위로 떠 있다. 왠지 그것은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의 그림 속 그리스도의 속옷을 떠올리게 한다. 색면에 맞서 물결치던 그 천 말이다. 이 작품에는 감탄할 만한, 네덜란드풍이고 초현실적일 정도로 사실적인 세부가 많다. 조반나 목걸이의 그림자, 십자가 장식의 에나멜, 머리카락의 잔솜털 같은 곱슬거림까지. 하지만 그 리본에는 마치 비탄의 깃발 같은 것이 있다. 얼굴 표정을 비워 내고도 라파엘로는 몇 가지 장식만으로 슬픔의 아픔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팔각형에 걸린 라파엘로의 초상들은 모두 꽤 다르다. 색조도 에메랄드 그린과 진사색에서 흙빛 갈색과 뼛빛 검정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이상한 일관성 하나가 있다. 르네상스가 좋아한 형태인 피라미드형으로 삼사분신 몸통을 재구성하기 위해, 라파엘로는 어깨뼈를 반복해서 다듬어 내리고 그 지지 근육을 목에서 팔로 곧장 떨어지는 긴 경사선으로 바꾼다. 이론상으로는 인그레스가 누드의 등에 척추뼈 몇 개를 더 끼워 넣는 식의 표준적 미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단축 원근을 어설프게 처리하고 왼쪽 승모근을 과장해 더 가까워 보이게 만든다. 그 결과는 인터넷에서 유행한 “크룩드 맨”을 조금 닮았다. 왼쪽 승모근만 운동하고 나머지는 전혀 하지 않는 사람 말이다. 찾아보지는 말라. 이 상황은 특히 “유니콘을 든 젊은 여인”에서 심하다. 나는 그녀의 승모근에 너무 시선을 빼앗겨, 그가 아기 유니콘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렸다.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에서 옮겨온 이 초상은 전시에서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기이한 작품이며, 현대인의 눈에 아주 잘 맞는다. 제목은 모든 것을 말해준다. 다만 유니콘이라기보다 뿔 달린 무릎 위 강아지에 가깝고, 그 젊은 여인이 실제로는 라우라 오르시니 델라 로베레라면 나이는 열세 살쯤이어서, 이 작품은 그녀의 아름다움과 지참금을 과시하려는 약혼 초상화였을 가능성이 크다. 2세기 넘게 이 그림은 성녀 카타리나로 덧칠되어 있었고, 유니콘은 고문용 바퀴 아래 가려져 있었다. 이제 유니콘은 다시 돌아와, 귀엽게 울부짖는다. 입은 라우라의 닫힌 입처럼 열려 있다. 이것은 미덕과 악덕, 순결과 무시된 쾌락의 양날적 상징일 수도 있고, 라우라의 가문 관계를 부각하기 위한 문장 문양일 수도 있다. 적외선 반사 촬영으로 본 밑그림은 라파엘로가 마지막 순간에 그녀의 얼굴을 이상화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La Muta”에서도 그랬듯, 최종본에서는 이중턱이 사라진다.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가 이미 금발, 푸른 눈, 창백한 피부를 지닌 벨라 도나의 르네상스적 환상을 빚어 놓았다. 라우라 오르시니는 그 전형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라파엘로는 분명 금발머리에 집착이 있었던 듯하다. 라우라의 머리칼도 화려하게 처리되었지만, 나는 라파엘로의 빈도 알토비티 초상화(1515~1516년경)만큼 화가가 자신을 과시한 예를 본 적이 없다. 잘생긴 젊은 은행가인 빈도는 금빛 곱슬머리가 목 아래로 흘러내리는데, 그 부드러움과 정교함이 터무니없을 정도다. 조반나와 라우라보다 10년 뒤에 그려진 이 초상에서, 빈도는 정면을 환하게 마주하고 있지 않다. 라파엘로는 그를 오른쪽 어깨 너머로, 그림자에서 빛 쪽으로 돌아보게 만들었다. 이 그림은 앞의 두 초상보다 백 배쯤 더 에로틱하고, 적어도 라파엘로가 잠자리를 함께했을지도 모를 벌거벗은 여인을 그린 “라 포르나리나”보다도 두 배는 더 에로틱하다. 머리카락이 갈라져 드러난 목, 솜털 같은 구레나룻, 도톰한 입술, 초록빛 눈을 보라. 나는 여러 차례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중앙에 있는 빈도의 오른쪽 눈과 묘한 초자연적 경험을 했다. 오래 바라볼수록 그 눈은 더 외눈거인처럼 변해, 마치 보석처럼 그림 밖으로 떠오르는 것 같아진다. 떠오르는 눈알 때문에 이 작품은 내게 전시 최고의 작품이 되기도 하고, 혹은 내가 피해야 할 작품이 되기도 한다.


1508년, 라파엘로가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갔을 때 그는 완벽한 타이밍에 도착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영원한 도시를 제국적 화려함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희귀 고미술 애호가였던 교황은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에게 일을 맡겼고, 브라만테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로마 유적을 재는 것을 즐겼다. 브라만테 역시 우르비노 공국 출신이었고, 같은 우르비노 사람인 라파엘로를 교황청 아파트의 한 방, 세냐투라의 방에 그리는 프레스코 프로젝트에 추천했다. 존 러스킨에 따르면, 바로 이 프레스코들에서 근대성의 괴저가 시작되었다. 한 벽에는 그리스도를, 다른 벽에는 아폴론을 놓고 둘 다 예쁨의 차원에서 동등하게 다루는 식으로 종교미술과 세속미술을 한데 섞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이 라파엘로가 수 세기 동안의 타락을 촉발했다는 주장이다. 물론 그것은 하나의 견해일 뿐이다. 다른 사람은 세냐투라의 방을 인문주의의 정점으로, 교부 신학보다 고대 철학을 찬미하는 공간으로 볼 수도 있다. 라파엘로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아테네 학당”처럼 말이다.


움직일 수 없는 이 그림들은 바티칸이 아닌 곳에서 열리는 라파엘로 전시에 늘 문제를 만든다. 메트가 이를 해결한 방식은 바티칸 프레스코를 옆방의 네 벽에 프로젝터로 띄우는 것이었다. 이미지가 스크린세이버처럼 천천히 회전하기 때문에, 내 조언은 준비 드로잉과 카툰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크고 아름다운 기계가 튀겨낸 불꽃 같은 것이다. 나는 “아테네 학당”의 느긋한 공사판 같은 분위기—소크라테스와 동료들이 아치형 천장들의 연속 아래서 하릴없이 누워 있고, 하늘이 열려 있는 장면—도 좋아하지만, 나는 바티칸의 한 방 건너편에 있는 “보르고의 화재” 쪽에 더 끌린다. 이 구도는 순수한 혼돈이다. 고전적 절제에 너무 많이 둘러싸인 뒤에 와서 그런지 오히려 반갑다. 라파엘로는 적어도 다섯 개의 중심 행동 축에 걸쳐 40명 넘는 인물을 배치하면서, 기둥, 아치, 계단, 로지아를 동원해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자르고 나눈다. 847년에 교황 레오 4세가 축복으로 화재를 멈췄다는 기적을 담은 이 이야기를 포괄하려고, 라파엘로는 고통받는 여인의 맨발을 통해 관람자를 프레스코 안으로 들여보내고, 아주 뒤쪽의 작고 평온한 레오 4세 곁에서 내보낸다. 라파엘로가 바람—머리카락과 옷 속의 바람—을 보이지 않는 끈처럼 사용해 서로 다른 부분을 묶는 방식을 보라. 이 프레스코의 완성 카툰은 없지만, 메트에는 가장 애처로운 순간을 그린 작은 적색 석필 드로잉이 있다. 한 아들이 불길 속에서 아버지를 끌어내는 장면이다.


태피스트리


“물고기의 기적의 그물잡이”, 15세기 40년대 또는 50년대. Jan van Tieghem / Frans Gheteels가 라파엘로를 바탕으로 제작 / Patrimonio Nacional 제공


전시의 마지막 크레셴도는 맥락이 없으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것은 라파엘로가 자신의 공방 도움을 받아 설계한 거대한 태피스트리 세 점, 정확히는 태피스트리의 2차 판본이다. 양모와 비단, 금도금 금속실로 짜인 첫 세트는 시스티나 성당의 벽을 장식하기 위해 주문되었고, 비용은 천문학적이었다. 이것은 로마 교황청의 파산에 기여했고,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에 기름을 부은 셈이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라파엘로와 같은 해에 태어났고, 1510년 로마를 방문해 교황의 사치에 경악했다. 이 태피스트리들의 예술적 가치는, “보르고의 화재”와 마찬가지로, 라파엘로가 시각적 서사를 기막히게 조직하는 예술가였음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물고기의 기적의 그물잡이”에서는 새들이 하늘을 선회하고, 배경의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오르지만, 그 한순간 안에서 여러 겹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그물을 던지라 말하고, 사도들은 물고기를 끌어올리며, 베드로는 그리스도 발앞에 엎드린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원형 영화 같은 방식으로 라파엘로는 몇 초를 몇 분으로, 몇 분을 하루로 접어 넣고, 물 위의 반사를 통해 그 장면을 자기 자신과 겹쳐 보이게 한다. 이 모든 것이 실로 포착된다.


라파엘로가 죽었을 때, 화가들이 장례식에서 횃불 백 개를 들었다고 하며, 그는 판테온의 원형실에 묻혔다. 사람들은 그의 유해를 숭배하려 너무 열망한 나머지 그의 두개골이 마법처럼 여러 개로 불어났다고 한다. 괴테는 로마에서 그중 하나를 보고 그 잘생긴 두개골 구조에 넋을 잃었다. 그는 그것이 “아름다운 영혼이 편안히 거닐 수 있을” 것 같은 두개골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물론 그것은 라파엘로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웅 숭배는 결국 거품이 빠졌고, 19세기에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 예술 천재의 쌍두마차가 되었다. 마지막 못을 박은 것은 프리라파엘파였다. 라파엘로는 자신보다 앞선 시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이름이 붙은 미학 운동을 가진, 드문 예술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라파엘로를 감상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의 가장 위대한 재능들이 어떤 면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뛰어난 구도는 근육이 파문치는 한 몸이나 귓불의 스푸마토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것은 부분들의 상호관계다. 미술사가 어윈 파노프스키가 라파엘로의 “폴리뇨의 성모”(1511~1512년)를 두고 “균형 잡힌 2차원적 패턴과 3차원 공간에 배분된 입체적 몸체들의 조화로운 배치”라고 열변을 토할 때, 그는 결국 구조공학자처럼 들린다. 사물 사이의 공간이 지닌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일은 어렵다. 게다가 라파엘로는 작업실 속 인물들을 그림 속 인물들만큼이나 잘 다뤘다고 전해진다. 그는 쉰 명이 넘는 화가들을 거느리고 다녔고, 그의 존재만으로도 분위기가 풀리고 사람들 안의 최선을 끌어냈다고 한다. 그런 종류의 인기와 빛나는 선량함은 예술가의 계보를 만들지만, 비행기를 발명하거나 대리석 덩어리에서 17피트짜리 조각을 끄집어내는 고독한 천재의 군중적 매력만큼은 아니다.


러스킨은 라파엘로의 구도에서 분명한 것은 오직 “모두가 서로를 가리키고 있는 듯 보이며, 내 생각에는 그 누구도 가리킬 만한 가치가 없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의 성취를 잘 짚은 말이기도 하다. 하늘을 향한 시선들을 떠올려 보라. 예컨대 오디 제단화(1503~1505년경) 중앙의 남자처럼, 올린 턱 하나가 그림 속 어딘가로, 혹은 그 위쪽 어딘가로 이동하는 매개가 될 수 있다. 혹은 감정을 버린 뒤 손가락 하나나 리본 하나에 그 감정이 옮겨붙는 텅 빈 얼굴들을 떠올려 보라. 이것은 장식적 쉼표와 미세한 뉘앙스, 그 사이와 다른 곳들을 다루는 예술이다. 라파엘로의 유산은 하나의 걸작이 아니라, 스케치와 설계도, 유화와 프레스코에 흩어진 수많은 수수께끼 같은 위대함의 부스러기다. 그것들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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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의 자하와 목석원이 모든 전시장 중 걸어올라가기 가장 어렵다. 경사도 높은 오르막길이 꼬불꼬불 이어져 사실상 등산로다. 남산 등산길은 쉬운 편이다. 물론 택시타고 오르거나 자차로 가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차량에 과부하가 걸려 서스펜션 소모가 심할 것이다. 비슷한 경사로는 평창 가나아트-아트자인까지의 길이 있다. 공교롭게도 '자'씨다. 


자하와 목석원을 걸어올라가 보지 않았다면 진정한 전시러버라고 하기 힘들다. 만약 꼭 가야만 한다면 날씨 좋은 4-5월과 10월의 봄가을 밖에 없다. 전시러버 뱃지취득을 위한 유일한 기간이다.


목석원은 소장품전을, 자하에서는 민중미술의 신학철(83세)전을 하고 있다. 그의 소는 생동하니 살아있어 이중섭같고, 목탄에선 탄공의 탄내와 연필에선 농촌의 흙내가 나며, 민중의 얼굴이 제각기 캐릭터가 살아있다. 2층이 더 좋았다.


현대사조의 뜬구름 잡는 사변성에 신물이 나 70년대 AG를 탈퇴하고 민중미술의 외길을 걸었다. 옛 영어사전이 뜯어져있는 작품이 그 궤적을 반영한다



목석원으로 꼭두와 석상을 보며 함께 피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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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현미 과천을 방문할 최적의 타이밍은 5월 14일 이후다. 이때 가면 풀방으로 하루종일 관람할 정도겠다.


일본 요코하마 미술관 리뉴얼 기념전으로 먼저 개최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항상 옆에 있기 때문에 일본과 한국, 예술의 80년(いつもとなりにいるから 日本と韓国、アートの80年)전>이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기념 로드 무비: 1945년 이후 한·일 미술>전이라는 이름으로 열린다. 


5.14부터 9.27까지 하는데 작가는 곽인식, 이우환, 박서보, 서승원, 이불, 이우환, 정연두 등이 있다. 갔다 온 사람의 기록을 보니 백남준도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백남준은 APMA에서도 하고 있고, 중앙홀에 다다익선(1988)이 있다.


준비 중인 이 전시는 1층을 차지할 것이다. 1층의 명당을 차지한 이전 타임 전시는 신상호의 도자기, 그 이전에는 젊은 작가전, 또 그 앞에는 와엘 샤키 등이 포함된 뉴미디어 아더랜드전이 있었다.


지금은 2층은 한국근현대미술2, 3층은 한국근현대미술1, 원형전시실은 해외소장품전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2026년에 한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3층은 한국근현대미술을 공부하기 좋은 공간이다. 같은 4호선 라인에 위치한 두 뮤지엄(해외에서 뮤지엄은 미술관이자 박물관이다)에, 이촌역 국립중앙박물관은 고대부터 조선을, 과천역 국립현대미술관은 개항기~개화기 광학카메라와 산수화전통으로부터 시작하는 한국근현대를 공부하기 알맞은 공간이 되겠다.


물론 둘 다 해외도 없지는 않다. 국중박 3층 한 켠에 중국 그리스로마 이슬람 등이 있고, 국현미 과천 원형전시실엔 모네의 수련도 있다. 보테로는 예술의 전당에서 오늘 크게 전시가 열렸있고, 김환기는 환기미술관, 류경채 박서보 이우환 등은 S2A에서 볼 수 있다.


한국근현대미술1,2도 4.22에 25% 리뉴얼되어 사실 새 전시다. 오지호는 이인성으로 이중섭은 박수근으로 바뀌었지만 아예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일부는 자리이동을 했다. 바뀐 부분도 충분히 유의미해서 2025년에 방문했던 이도 재관람을 추천한다.


그리고 임군홍의 작품이 있는데 창동 서울시립사진미술관 2층에 함혜경 작가가 25분짜리 커미션 영상으로 작가의 생애를 로드무비 형식으로 조명했다.



파블로 피카소는 국현미 과천 1층 원형전시실에도 있긴 있지만 경남미술관에 도기전시 하러 대규모로 순회가 있다. 이전에는 광주ACC에서 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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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작한 예술의 전당 페르난도 보테로전에 다녀왔다.

평면성에서 입체성으로 이행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콰트로첸토)이라는 고전 회화사에서 착안해 양감(volume)과 관능미(sensuality)를 부각시킨 콜롬비아 미술가다. 토실한 하체비만형 스타일로 대중에게 각인되어있다.

덕수궁에서 2009년에, 예술의 전당에서 2015년에 작품이 내한했었고 작가 사후(2023년) 올해 전시 열렸으니 꽤나 조명을 받고 있다 할 수 있다. 2015년 이후 작품은 수채화인 마티스를 따라 그린 오벨리스크(2022)와 술마시는 남녀(2019)가 있고 유화로도 기존 모티프인 축제와 투우수와 기마투우사(2019)와 목욕하는 사람(2018)가 있었다.

오전에 갔지만 널널했다. 좋게 보면 스타일이 일관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사실 자기복제적인 작품이기 때문에 뒷쪽 섹션으로 갈수록 관객의 걸음이 빨라지고 더불어 회전율이 빨라져 전시는 북적이지 않는 편이다. 카라바조전이라든지 최근 서양미술사전공자인양정무 교수마저도 무한반복 인상파전 그만두라 일갈했지만 이미 정해진 스케쥴을 지금 바꿀 수 없어 우후죽순 진행되는 서로 다른 인상파 전시 다섯 군데에서 관객들이 작품을 세밀하게 감상해 시간을 많이 소비하는 탓에 병목현상이 두드러지는 것과 대비된다.

전시는 벨라스케스 등 미술사의 유명 작품을 어떻게 양식변환했는지 톺아보는 일고여덟 작품으로 포문을 열고 그의 지역성과 뿌리를 탐색하는 라틴아메리카 섹션을 지나 기법이 정물화에서 수채화로 전환되는 기법체인지를 살펴본 후 세부 주제로 넘어간다.

변주 지역 수채화 조각 종교 정물 투우 서커스의 순서다. 관객이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직관적인 전시다. 비율의 변주play of proportions이자 불가능의 시학poetry of improbable인 기법의 시각적 특징은 살집을 늘리기 위해 세로대비 가로를 확대하고 주름과 접힌 살집의 곡선을 부각시킨다. 비율 변화의 디폴트값 고정전으로 눈 코 입 등을 작게 만들어 이목구비 대비 늘어난 차이가실감된다. 한 번 이 스타일을 확립한 후 50년간 꾸준히 그려왔다. 호주 감독 에덤 엘리어트의 클레이 애니 달팽이의 회고록(2024)에선 뚱뚱한 여성에게 페티시가 있는 인물을 그리는데 보테로도 그러한가? 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뚱뚱한 알몸의 여성 그림이 많기 때문이다. 작가의 대답은 볼륨 입체성 감각성을 돋우기 위한 의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이렇게 대사질환자처럼 그릴 수 있지만 동물이나 무생물도 가능할까? 입체조각에 보년 새나 고양이나 말에서도 구현했다. 회화에선 낙타 사자 소도 보인다. 눈 코 입이 없는 바나나 오렌지 수박에서도 실현했다. 얼핏 불가능한 대상에서도 같은 양식을 적용했다는 점이 흥미롭고 창의적이며 선구자로서 존경받을 도전성이라 생각한다.

다만 세 가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리면 안되었을 파트다. 혹은 그 결여 혹은 양식복제의 맹점, 자기복제하는 작가가 어느 순간 멈춰야하는 부분 드러내기 위해 반례로서 보여주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개중둘은 바로 자전거 드로잉과 서커스의 공연 원숭이다. 관객의 흥미와 집중도가 많이 떨어지고 어디가서 뭘 먹을까가 뇌리에 가득 찬 전시장 마지막에 있어 자세히 보는 사람은 드물지 모른다. 보테로는 심지어 만돌린이나 기타(작품은 전시장에 없고 영상에서 순간 지나간다)도 같은 방식으로 뚱뚱한 볼륨감을 만들 정도인데 자전거 휠과 원숭이의 모습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원숭이는 다시 그린 흔적마저 있었는데 수정하다 실패한 것 같다.

이를 통해 그는 해부학적 이해도가 높지 않고 살에는 강하지만 뼈에는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전거 휠과 안장 같은 구조체를 그리고 원숭이의 섬세하고 조그마한 뼈의 움직임에는 장점이 부각되지 않았다. 나아가 그의 표현법과 삶이 합치된다고 묘사 대상과 제작 유통 방식이 닮았다고도 생각을 확장해볼 수 있다. 같은 방식의 작품만 평생 창작한다는 것과 탄수화물과 당만 섭취한 고도비만 대사질환자로서 근육이 아닌 살집만 늘리는 방식은 비슷한 점이 있다. 실제 사람이잘못되었다는 게 아니고 다양한 경로로, 특히 유전으로도 대사질환자가 되긴하나 이는 구체적 사람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방식에 대한 구조적 분별이다. 살을 늘리는 것과 양산하는 방식이 흡사하다

마지막 세 번째 불가능했던 지점은 앞 섹션에 있는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서 거울 반사면이다. 반사된 뒷모습은 과장된 비율확대의 고정점인 눈코입이 없고 어안렌즈형식이라 이미 비율이 왜곡되어있어 추가 왜곡이 어려웠나보다. - × - = +이듯이 왜곡에 왜곡은 정상으로 귀결된다. 이 세 작품은 글에 대한 시각보조를 위해 사진을 찍었다 걸어가면서 쓰고있어서 인용은 추후에

이런 과장된 스타일은 풍자적인 면이 있고 풍자와 위트는 기득권이나 시대정신을 꼬집을 때 잘 수용된다. 안정적 희극은 없고 늘 당대 권력을 비틀 때 카타르시스가 생긴다. 보테로는 50년대는 라틴아메리카의 성직자 주교를 80년대는 학살을 테마로 삼았다. 지금 그렸다면 어떤 금발의 백인 노년남성 두 명을 그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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