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센티멘탈 밸류 보았다. 감독의 두 번째 장편에서 젊은 레나테 레인스베를 등용해 이전 작품으로 여우주연상, 이번 작품으로 심사위원상을 받으며 번갈아가며 동반 깐느입성했다.
영화는 아버지와 딸의 화해, 자매간 우정, 감독과 배우로서 전문가의 고독을 연극무대와 스크린의 관계 속에 녹여낸다. 가족의 굴레에 고통받고 책임의 무게를 어릴 때부터 견뎌 와야했던 K-장녀 이야기를 북유럽 디자인 세팅에, 느릿한 테이크가 특징인 인디영화의 문법에 계승한 것 같기도 하다.
지지난 주에 개봉하고 바로 본 다음 대중교통에서 끄적인 글을 계속 스레드 임시저장본에 묵혀두었는데 이러다간 정말 글을 마무리하지 못하겠구나 싶어서, 빨래 시간이 조금 뜬 김에 얼개만 마무리해 본다. 앨페닝이 분한 레이첼 캐릭터가 체호프같다 생각했고 책을 재독해서 더 좋은 글을 쓰려고 했다가 계속 묵혀두고 있다. 늘 이런 식이다. 국보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몇 천 자 쓴 노트가 석화되었다
영화는 극장에서 메데이아의 고전연극무대 시작해 넷플 현대가족극 촬영지로 수미쌍관을 맺는다. 가족 관계도 연극치료의 일환이고, 서로가 서로의 입장에서 배역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네모지고 각진 시각적 프레임을 매체적 특징으로 하는 연극무대와 스크린에 서려있는 애증어린 관계가 읽히기도 한다.
헨릭 입센을 닮은 긴장어린 실내극, 안톤 체호프 모티프의 주변적 캐릭터, 스웨덴의 거장 잉마르 베르만이 잘 구사했던 의도된 신학적 침묵 같은 레퍼런스가 오슬로의 차디찬 공기와 과묵한 스칸디나비안의 얼굴을 통해 전해진다. 감독은 가족이라는 사적제도를 해체하면서 해부학자의 냉정함과 정서적 유대감을 유지하는 불가능한 묘기를 선보인다.
노년의 영화감독 구스타브 보르그를 연기한 스카스가드(Stellan Skarsgård)는 마블에선 천문학자, 듄에선 냉정하고 뚱뚱한 귀족(여기서 인사이트를 얻었나?), 캐리비안의 해적에선 저승귀 선원을 연기했다. 이번 작품에선 명성과 실패, 즉 페임과 페일류어를 얼굴에 드러낸다. 경력은 화려하나 가정은 처참하다. 공적 자아는 단단하지만 사적 자아는 균열되었다. 아버지로서 상합하고자 하나 딸은 이해할 수 없다. 왜 이제와서 돌아온 것인지 설명을 원하나, 그냥 각본을 읽어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한다. 서로 욕망이 미끄러지는 순간이다. 얼굴을 마주하는데 말은 어긋난다. 조준경을 벗어나 잘못 발사된 말들이 난사될 뻔하다, 감정이 응결되고 설명은 침묵으로 전환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레이첼이 과연 서사에서 필요한 캐릭터였는지 고민했다. 어차피 엔딩에서 같은 시공간을 살아왔어도, 동생에겐 언니가 있어서 엄마 역할을 해주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것이라면 레이첼은 왜 필요했을까? 각본에 흥분하다가 이 감정을 살릴 수 없을 것이라 비관해 제풀에 지쳐 때이른 퇴장을 하는 레이첼. 체호프에서 많이 보이는 주변적 캐릭터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레이첼은 가족을 파괴하는게 않니다. 되려, 집의 크랙으로 상징되는 이미 균열이 가 있는 가족관계를 더 선명하게 보이도록 하는 조연이다. 레이첼은 메인 네러티브의 사건을 폭발시키기보다 침묵을 증폭시킨다. 누가 누구를 필요로 하는지, 누가 누구를 대체할 수 있는지, 그리고 사랑이 어디까지 연기 가능한지, 등등 관객이 으레 품을만한 질문이 레이첼을 통해 또렷해진다.
비노르웨이인 외국배우로 영화제에서 잠깐 만난 관계이기에 직업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혹은 국가적으로도 외부자다. 그런데 아버지 구스타브와 두 딸이 기억과 원망, (할머니 자살로 상징되는) 세대를 잇는 상처의 악순환 속에 갖혀 소리없는 절규를 지르는 가운데 레이첼이 아무런 정서적 채무가 없는 자로 등장했다가 기존 부녀관계를 강화하고 퇴장한다.
제목으로 비유하면 정서적 가치가 없는 자가 등장해 기존 딸들에 대한 정서적 가치를 환기한다는 것이다. 마치 어머니 유품 정리할 때 동생에게 아무런 감정적 가치가 없는 화분을 언급하니 언니가 냉큼 낚아채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같다. 레이첼이 계속 좁히지 못한 거리감은 역설적으로 부녀가 스스로 보지 못하는 균열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드라마투르기적으로 읽으면 체홒프 소설의 방문자를 닮았다. 이미 고정된 듯 보이던 인물간의 관계성을 재배열한다. 은밀하지만 결정적으로, 확실하게.
구스타브가 딸 노라를 염두에 두고 화해의 제스처 일환으로 각본을 썼다. 어렸을 때 차녀는 연극무대에 올려준 적이 없는데 장녀는 그렇게 해주지 못했고 직업도 연극배우 아닌가. 겸사겸사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딸은 제안을 거부한다. 그래서 쿨하게 수긍하고 레이첼로 배우교체를 시도하나, 딸은 대체불가능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창작물로서 연기자는 대체할 수 있으나 가족은 대체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의 가족사를 토대로 쓴 극본의 딸도 레이첼로 치환할 수 없다. 레이첼은 이런 치환가능성이라는 불편한 질문을 전면화하는 캐릭터다.
이 포인트가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인 이유는, 만약 다른 여성이 딸을 연기할 수 있다면 사과와 화해 역시 진정성 없이 연출가능한 장면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레이첼은 가족간 화해를 교체 가능한 캐스팅의 문제가 아님을 드러낸다.
유일무이한 모녀관계에서 벌어진 사건과 그에 수반되는 감정, 그리고 그 집에 살았던 선조의 계보가 있는 역사성을 경계선 위에 서있는 주변적 인물이 얼마나 대리할 수 있을까? 실제 상처를 공유 않았는데 상처가 있던 것처럼 연기할 수 있는 존재는 얼마나 나약한가? 가족의 고통이 예술로 가공될 때 이것이 온전한 치유가 될 수 있을까? 최소한 유의미한 전유라도 될 수 있을까?
치유도 전유도 불가능하다고 느낀 레이첼은 울며 퇴장하고, 이때부터 스토리가 비로소 진전되고, 인물들은 진정한 화해를 향한 걸음을 뚜벅뚜벅 그러나 조심조심 걸어나간다.
초반에 차녀보다는 장녀와 부친의 충돌이 더 심각해보였다. 그래서 초반에는 관계가 이항대립적으로 보였는데, 레이첼이 등장함으로써 관계의 구도가 삼각구도로 확장했다.
모녀간 정면충돌만으로는 고착될 법했던 감정선이 제3자의 등장으로 흔들린다. 다른 맥락에서 비유하면 로맨스소설에서 여주와 남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주는 매오(매력적인 오답)으로서 주변인물이다. 레이첼을 거치며 쿨하지 못한 질투심, 허장허세, 무의미한 자존심, 서로간 직업적 야망, 갈마드는 인정욕이 상호교차해 부녀가 정말 닮았다고 느끼게 된다. 감정이 불안정하게 요동치기에 드라마가 살아 생동하는 듯 느껴진다.
요컨대 레이첼 캠프를 거쳐 사적 비극이 공적 행위로서 전환된다. 덕분에 작품은 화해서사를 낀 진부한 신파극이 아니라 친밀성이 어떻게 예술로 번역되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영화로 승화된다. 사건은 격렬하지 않고 프레임 안에 등장하는 희뿌연 먼지처럼 감정이 정체된 공간 안으로 스며든다. 일종의 미세한 교란이다. 보통 일반적 네러티브였다면 외부에서 도착한 인물이나 오랜만에 귀환한 인물이 등장해 변화를 추동하는데, 폭력적 전환은 일어나지 않고 대신, 기존에 있던 욕망과 좌절감을 가시화한다. 사건의 변화를 촉발하는 외부자가 아니라, 주변적 방문자인 이유는 레이첼이 등장함으로써 변화의 가능성을 암시하지만, 동시에 인물들이 얼마나 변화하기 어려운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반 모험서사에서 나오는 저기 보물이 있으니까 우리 떠나자, 혹은 느와르에서 등장하는 계획을 깨트리는 스파이가 아닌 것이다.
거의 빨래가 끝나가서 급마무리해야겠다.
정리하면 체호프적 방문자로서 레이첼은 이런 기능을 수행한다.
잠복된 감정의 촉발자
인물들이 애써 눌러온 감정을 표면으로 끌어 올리는 제자.
허영, 질투, 미련, 권태, 자기 기만을 매게하고, 노출하는 캐릭터
메인 인물이 스스로 구축해온 서사를 흔들고 허구성을 드러내는 존재
변화가 판타지적이면서 불가능하다고 제시하고 때맞춰 퇴장하는 자(그리고 감독은 후반부에 변화가 가능하다 보여주기에 화해가 숭고해진다.)
영화는 값싼 화해로 쉬이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후반부까지 최대한 버틴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남길 수 있는 상처를 냉정하게 직시하고 돌이키지 못하는 시간을 어설프게 소급하지 않으며 화해의 가능성을 낭만화하지 않는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가능한 마지막 최선의 노동으로서 화해다. 이 화해 없이는 세대간 파국이 반복될 것이다
감독은 미장센을 보석세공인처럼 맑게 제련한다. 수정처럼 다듬어진 프레임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변화와 몸짓을 기다린다. 정교하게 조율된 대사는 정적이고 과시적이지 않다. 순간의 시선, 식탁 위에 놓인 손, 문을 닫는 속도 같은 사소한 제스처가 서사의 중력이 된다. 예술과 삶, 연극과 영화가 교차하듯 서로 감정과 역할도 교차한다. 관객은 관계의 복잡성과 감정의 깊이를 가랑비에 옷 젖듯 시간이 흘러 자각한다.
가족제도는 깨지기 쉬운데 또한 쉬이 끊어지지 않는다. 사실상 이미 깨졌는데 붙잡고 있다. 영화는 집이라는 무성명사를 주어로 시작했다. 균열된 집 속에 지속되는 보이지 않는 유대, 그 불편하고도 단단한 끈이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