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평 116호 - 2016.가을
역사문제연구소 엮음 / 역사비평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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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여름과 가을호에서 `새롭게 보는 정조와 19세기`라는 주제로 기획 특집을 다루었다. `정조`라는 주제는 예나 지금이나 핫이슈임에 틀림없다. 세월이 흘러도 그에 대한 평가만 달라질뿐 그는 여전한 역사 연구의 중요 주제다. 그런 면에서 조선사에 큰 자국을 남긴 그의 역사성을 의미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근래 들어 정조에 대한 찬양일변도 주장들이 줄어들고 그 시대를 냉철하게 다시 보려는 시각들이 증가하고 있는 듯하다(백승종,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푸른역사, 2011이 대표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재밌는 현상으로 본다. 역사를 다양한 시각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흠없는 인간이 어디 있으리!

오늘 읽은 대목 중 다음 부분이 눈에 깊이 들어왔다.
˝정조가 일관되게 추진한 재상권의 강화는 그 시기에 정부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공헌하였겠지만, 높고 낮은 관인들이 서로 견제한다는 조선 정치체제의 전통을 변화시켜 고위 관원들에게 권한을 집중시킨 것이었다. 19세기 권세가들이 측근인 고위 관원들과 함께 권력을 독점하던 구조는 정조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의 재상권 강화정책에 연결된다. 그러한 정조의 정책 속에서 당하관이 공론을 조정에 반영하던 구조와 삼사의 언론 활동은 매우 침체되었다. 19세기에도 외척 가문들이 권력을 집중시킨 배경에는 공론과 언론의 현저한 퇴조가 자리잡고 있다. 19세기 세도정치를 가능하게 한 언론의 퇴조 역시 정조의 본래 의도에 관계없이 그의 정책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오수창, <오늘날의 역사학, 정조 연간 탕평정치 및 19세기 세도정치의 삼각대화>, <<역사비평>>116, 224~225쪽에서 인용)

결국 정조의 죽음과 연이은 세도정치의 출현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즉 정조가 추진한 정책의 결과라는 점이다. 바로 여기서 정조 정치의 한계를 찾을 수 있겠다. 비록 정조의 위대함이 깍일 수 있겠으나 한 개인의 치열한 노력만으로 역사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음도 깨닫게 된다. 나는 이런 점에서 역사가 재밌다.

글을 읽으며 다시 이런 생각도 든다. 언젠가 이 주장들도 다시 재해석되고 뒤집힐 날이 올 것이라는 점 말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글은 다시 쓰여지고 역사의 논쟁은 심해지리라. 답이 정해진 역사만큼이나 재미 없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나의 노년에 다시 정조 부활의 역사를 읽을지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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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심재훈 지음 / 푸른역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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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엄밀히 말해 전문 연구서라기보다 역사학자의 (역사)수필에 가까워 보인다. 자신이 전문 연구자가 되기까지의 내력과 경험담을 재밌고 서술하고 있다. 인연일지, 운명일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이들과의 만남 그리고 성장에 대한 이야기글. 수필이 반드시 전문 글쟁이들의 소유물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신의 소중한 인생담과 진솔한 감정이 수필의 중요한 덕목일테니.

대체로 책의 전반부는 위와 같은 내용들이지만 후반부는 내용을 달리해 저자의 연구 영역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룬다. 중국 선진(先秦)시대나 청동기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고대 중국사를 연구하며 알게 된 고대 한국사와 일본사들을 쉬운 글로 풀어내고 있다. 사실 저자는 이 글로 인해 적잖은 심리적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의 글은 학부 시절 스승이었던 윤내현 교수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인터넷으로 검색해 봐도 밑도 끝도 없이 그를 배신자라고 주장하는 경우들이 많다. 소위 말하는 유사역사가들이나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저자의 심재훈 교수의 주장에 동의할까? 이유는 하나다. 즉 역사는 문헌과 유물이 일치할 때 믿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백제가 중국 요서 지방을 공격해 점령했다고 중국 문헌에 남아 있으나 그와 관련된 유물이 없다. 그것은 다시 말해 중국 북조에 반대한 남조의 세력이 역사를 위조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진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글쓴이의 의지가 들어간 이야기(담론)이기 때문이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유물만으로는 정확한 역사를 쓰기 힘들다. 언제든 조작이 가능하다. 작금의 고조선 연구가 바로 그 상황이다. 그럼에도 유사 역사가들은 고조선의 영역을 자꾸만 넓히더니 급기야는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했다고 하는 허무맹랑한 주장들을 늘어놓고 있다.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다.

특히 저자의 주장 중 나의 머리를 때린 것은 중국 문명에 대한 것이다. 유럽 각중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공유하며 자신들의 문화를 발전시켜 나간 것처럼 우리 역시도 고대 동북아 문화의 요람이었던 중국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것은 민족적 우열도 아니고 문화의 주도권 전쟁도 아니다. 그저 고대 문화의 흐름을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나는 이에 긍정한다. 한반도 문화의 대부분이 중국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우리식대로 소화하기는 했지만.

마지막으로 그에게 공감을 한 것은 비주류 역사학자라는 그의 넋두리다. 나의 개인적 성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늘 비주류를 자처해왔다. 그가 느낀 학계와 사회의 모순들을 나는 심정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동종교배만이 살 길 인양 자기 끼리 어울리는 그들의 모습에 비웃음만 날리던 나. 이런 사회와 학계에 맨 몸으로 부딪히는 저자의 도전 정신에 나는 감동한다. 그가 더욱 분발해 좋은 글과 활동을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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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05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독자평점이 낮은 이유가 그거였군요. 안 그래도 많이 궁금했었어요. 운 좋게 크눌프님의 리뷰 덕분에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knulp 2016-11-05 16:48   좋아요 0 | URL
책의 절반이 개인시여서 일반 독자들에겐 그다지 와닿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같은 역사전공자에게나 도움이 되었겠죠^^...ㅋ
 
전망 좋은 방 열린책들 세계문학 28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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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하여 읽은 모든 책이 독자와 궁합이 잘 맞는다면 환상이겠으나 사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기대했던 내용과 달리 수준이 낮거나 엉뚱한 경우도 있고 저자의 글쓰기에 심히 낙망할 때도 있다. 나의 경우에는 고전문학이 특히 그랬다. 오늘 독후감을 쓸 전망 좋은 방이 내게 특히 그랬다. 장편소설이라고는 하나 읽기 버거울 만큼의 두께도 아니고 내용도 아닌 것을 나는 왜 그리도 힘들게 읽었단 말인가!

 

주인공인 루시와 조지의 사랑에는 강렬함이 없다. 그들이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이 부족하다. 급작스런 첫키스와 영국에서의 재회는 너무나 어색하다. 루시와 결혼할 뻔했던 이탈리아 신사 세실은 너무 외떨어진 존재다. 남들은 테니스 치는 데 혼자 소설을 읽어주고 있다. 대체 왜? 물론 이것들이 20세기 초반의 영국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이해한다. 그래서인지 책표지에 이런 소개가 있다. ‘영국 사회의 계층 갈등과 가치관의 충돌을 날카롭게 지적해 낸책이라고. 세실이 그 대표 인물이기는 하지만 나는 답답함만 느꼈지 작가의 그런 의도를 눈치 채지 못했다. 내가 너무 무딘 걸까?

한편 이 책에 대한 역자의 평에는 아이러니가 넘치풍부한 유머를 담고 있다고 하지만 아둔한 나는 전혀 그런 점을 느끼지 못했다. 대체 나는 무엇을 읽었을까? 고전을 제대로 읽으려면 당시 사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텐데 내가 그런 점에서 무지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본다. 20세기의 영국 사회를 너무 몰랐기에 소설의 맥락을 제대로 잡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루시의 자유의지도, 청춘의 사랑 이야기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쁜 일상에서도 짬짬이 읽은 소설의 뒤끝이 너무도 허무하다. 사두고 한참을 묵힌 뒤 읽은 책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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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권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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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선호하는 작가가 있듯, 비선호하는 작가도 있기 마련이다. 내게 코엘료도 그렇다. 뭔가 나의 경험이나 가치관과는 조금 다른 듯하여 그의 글들이 어색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글을 꾸준히 읽고 있다. 나란 사람 참...

이번에 읽은 <브리다> 역시 나에게 울림을 주지 못했다. 호기심 있는 국가인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을 빼면 마녀 전승이나 그와 관계된 서술들이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책의 말미로 갈수록 조금 집중도가 높아졌다. 그건 주인공 브리다가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극복해 나가려는 자세, 두 남자를 사랑해야 하는 운명, 마녀 집단에 대한 호기심 등이 특히 그랬다. 그 중에서도 브리다 엄마가 들려주는 사랑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꾸준히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편이 있지만, 우연과 기회가 닿아 잠시 만나 운명적 사랑을 나눈 남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복선이라도 되는냥 브리다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브리다는 현실의 남자와 스치는 운명의 남자(소설에서는 `소울메이트`라고 부른다) 사이에서 잠시 갈등을 하지만 결국 현실을 선택하는 쪽으로 마감된다. 나라면? ㅎㅎㅎ

소설을 읽는 것은 삶과 인생에 대한 고민을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브리다>역시도 그렇다.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자신이 가야할 길을 찾아 나서며 각종 역경과 어려움을 헤쳐나간다. 비록 내게는 다소간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나라면 어떻게 살아갈 건지 하는 고민을 던져준다. 또한 현실의 사랑과 운명적 사랑 중 어떠한 것을 선택할 것인지 하는 것도 잠시 상상해 본다. 그래서 소설은 눈은 아닌 가슴으로 읽는가보다.

가을인가보다. 이렇게 소설이 땡기는 것을 보면. 가볍게 읽히는 책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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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6-09-20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연금술사와 브리다 사 놓고 읽지 않고있습니다. 불행하게 <불행>까지 샀습니다. 읽지 않으면서도 왜 사 모으는지 저도 알길이 없습니다. 평이 좋습니다. ˝결국 현실을 선택하는 쪽으로 마감된다. ˝에선 그럴 수 밖에 없는 주인공의 마음이 어떨지 찹찹합니다. 현실에 안주해야 하는...

knulp 2016-09-20 11:41   좋아요 0 | URL
방문 감사합니다. 저 역시도 읽지 않고 잔뜩 쌓아두고만 있네요. ㅎㅎ 자꾸만 사들이고 있고... 오늘 또 지르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정영환 지음, 임경화 옮김, 박노자 해제 / 푸른역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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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상당히 도발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 정영환은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나아가 일반 국민들에게 화해를 강요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본은 아직 명확히 그것도 공식적으로 식민지배나 전쟁 범죄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한일간의 식민지배 처리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해결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본 정부나 사법부의 공식 입장인 듯하다. 하지만 한국의 헌법재판소나 일반국민들은 이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당시 위안부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으며 불합리한 점이 많은 조약이었기에 개인 청구권은 남아 있다고 보는 편이다. 여기에 박유하는 강하게 반발하며 전후 일본은 꾸준히 사죄하며 세계적으로 우수한 사례를 남겼다고 평한다. 서로 만나기 쉽지 않은 평행선을 달리는 듯한 역사관을 가진 것이다.

그렇다면 박유하는 왜 그리고 많은 비난을 받는 것일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개개인의 이름을 들고 구체적인 사례를 지적하며 이러한 `목소리`도 있었다고 소개하는 데 그쳤다면, <제국의 위안부>가 이렇게까지 피해자들의 격분을 샀을까. `위안부`의 `본질`에 대해 일반화해서 말했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스스로의 명예와 존엄이 침해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결국 박유하가 몇몇 사례를 통해 조선인 위안부는 위안을 통해 애국하고 사랑을 나누었으며, 일본군과는 동지적 관계였다고 선언함으로써 생존자들의 존엄을 깨뜨린 것이다. 여기에 나눔의 집 할머니들은 적법한 절자를 거쳐 고소했음에도 논점을 오도하는 일본의 미디어나 지식인들이 `언론탄압`의 가담자라는 오명까지 쓰게 되었다. 이런 점들이 쌓여 박유하는 보호받을 가치조차 없는 부도덕한 지식인으로 내몰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책에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소개한 사료들을 박유하가 어떻게 곡해했는지 잘 보여준다. 가령 그녀가 ˝위안소는 병사와 위안부가 함께 울 수 있는 `눈물의 공간`˝이었다고 하지만, (박유하가) 그토록 찬양한 센다 가코의 책에는 이런 부분도 나온다. ˝후방에 오니 정말로 `공동변소` 취급인 거야. 장교나 하사관들 중에는 대놓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 하지만 그녀는 이같은 대목을 빼버린다. 분명 그녀가 읽었을 부분인데도 자신의 주장에 맞지 않는 것은 지나가버리는 것이다. 연구자의 윤리에 맞지 않는 대목이다. 이런 부분이 수없이 나온다는 것이 정영환의 주장이며 따라서 이렇게 문제 많은 책을 높이 사는 일본 사회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어 저자는 작년 12월의 한일 양국 간 위안부 합의는 이런 문제점을 안고 있는 박유하 식의 주장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일본 사회와 지식인들은 이 합의를 열렬히 환영한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저자는 서승 교수의 글을 인용하며 면을 이를 일본 지식인과 언론계의 퇴락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한다. 솔직히 저자의 이 주장에 억지로라도 절반만 동의하고 싶다. 일본에도 제대로 된 지식인들이 상당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험을 통해 안다.

후련한 듯하면도 답답한 심정이다. 한국과 일본은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지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십 수년 간 교류해온 한 일본 지인과도 이런 차이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오던 지식인인데 말이다.

나의 말과 글이 무조건 옳다고 치부하지는 않는다. 논리적 결함이 있을 것도 안다. 다만 피해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외면하고 `반일 민족주의` 운운하며 비판하는 것은 옳지 못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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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13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knulp 2016-09-13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cyrus님도 즐건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