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이 본 역사 속의 한국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73
나카쓰카 아키라 지음, 이규수 옮김 / 소화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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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나라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낸 근대일본사 전문가 나카쓰카 아키라 교수. 내겐 두 가지 이유로 뚜렷이 기억되고 있다. 하나는 일본 정부와 사회를 위해 역사 문제에 있어서 바른 말 잘하는 원로 지식인으로, 다른 하나는 가까이 지내는 일본인 지인의 대학 스승이란 점에서다. 후자가 뭐 대단한가 싶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다. 그 지인은 일본 중학교 역사교사였던 분으로 한국의 근현대사에 상당히 해박하고 퇴직하고 한국어 공부를 위해 한국으로 유학까지 온 지한파 일본인이다. 스승과 제자 모두 한일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고 자국의 역사 문제에 상당히 비판적이란 점이 똑같다. 그 스승의 그 제자였다. 지인을 알게 된 이후부터 나카쓰카 교수를 좀 더 의식하게 되었다.

이 책은 비교적 쉬운 책이다. 고등학생 수준의 역사 지식이 있으면 책 내용을 거뜬히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인이 자국의 역사 속에 그려진 한국을 쉬운 언어로 설명해 준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의 근거를 한국의 자료보다 일본측 자료로 많이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 천왕봉에 오를 때 노고단에서 출발하는 것과 백무동에서 출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같은 산 정상에 오르지만 등반의 강도와 즐거움은 같지 않다. 하나의 역사 속 주제지만 그것을 어느 쪽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해석된다. 아니 같이 해석된다고 해도 그 증거 자료가 다르면 묘한 느낌마저 든다. 예쁜 모델이 한복을 입고 있을 때와 양장을 입고 있을 때 분위기가 다르지 않은가. 역사 해석도 그렇다.

저자는 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을 위해서 일본 정부나 일반인들이 역사 이해를 바로 하기를 바란다. 신화 속 인물인 진구천황 때부터 이어져온 허구의 임나일본부설과 여기서부터 파생되어 한반도 남부는 일본땅이어서 그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의 문제점을 파헤친다. 또한 요시다 쇼인, 사이고 다카모리, 후쿠자와 유키치처럼 정한론이나 혐한론의 기원이 된 인물들이 어떻게 이웃 나라를 괴롭혔는지 지적한다. 이외에도 근대 일본이 행했던 저열하고 치졸했던 침략 행위들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특히 일본측 사료들을 이용해서. 물론 이런 와중에서 일본의 이런 행태를 비판하고 아무런 잘못 없는 이웃과 잘 지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이런 이들은 그야말로 극소수였음도 말한다. 근대 일본의 지식인들이나 사무라이, 정부 인사들에게 조선은 침략의 대상이자 없어져도 무방한 이웃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분노가 스멀스멀 쳐올라온다.

이미 아흔이 넘은 저자는 <동학농민전쟁과 일본>이라는 책을 통해서 일본군의 잔악하고 비인간적 행위를 크게 비판한 바 있다. 수 십 만명을 학살한 것은 물론 농민군을 머리를 베어가 일본에 가져간 일도 있다(지금도 일본의 대학에 보관중임). <일본인이 본 역사 속의 한국>에는 귀무덤을 비롯하여 일본이 한국에 잘못한 일들이 일일이 열거되어 있다. 특히 이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숨기거나 심지어 왜곡하는 일본의 행태에 대해 저자는 극렬이 비판한다. 이미 일본에서 소수파가 되어버린 저자의 노력에 안타까움마저 든다. 그의 저자인 나의 지인마저 연로한데.

이 책은 2003년에 발매된 제법 오래된 책이다. 나의 게으름 탓에 이제서야 읽고 독후감을 쓴다. 가까이 있는 이웃을 가벼이 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이들은 존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자기가 존중받으려면 남을 먼저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느 한쪽이 아니라 한일 쌍방 모두에게 해당된다. 잘못은 용서하되 잊지 않는 자세를 우리는 갖출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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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저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마이크 니콜스 감독, 줄리아 로버츠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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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 속의 문장이 눈길을 끈다. ˝당신은 ‘거짓 없는‘ 사랑을 하고 있나요?˝, ˝If you believe in love at first sight, you never stop looking.˝ 두 문장은 영화를 본다면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서로 사랑하는 듯했지만 상대에게 진실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첫눈에 반한 사랑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다른 사랑을 찾았다. 사랑의 달콤함은 이별의 아픔을 쉽게 잊게 한다. 늘 그렇듯 시작하는 연인들은 사랑이 영원하길 바라지만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한다. 결국 사랑은 영원하지 못하고 끝내 파국은 찾아온다. 영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식 아닌가 싶다. 한국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주드 로가 연기한 댄은 참 밉상이다. 언뜻 사랑스러워 보이지만 사랑에 있어 그의 자세는 그렇게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두 여자의 사랑을 얻었지만 결국 그들로부터 버림 받는다. 그는 상대에게 늘 진실을 알기 원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진실되지 못했다. 그의 연인 앨리스는 동거하는 4년동안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 그의 두번째 연인 줄리아 로버츠는 결혼 후에도 계속 그와 만남을 이어간다. 그리하여 영화 속 4명의 관계는 불안하고 불편하다. 이런 식의 관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들의 면면은 자신을 드러내기 힘들어하는 현대인의 민낯인지 속물들의 젼형인지 나는 모르겠다. 나와는 너무 다른 이들의 모습이기에...

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어딘가 긴 여운을 남기는, 때로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들이 재밌다. 그런 영화들은 머리에, 가슴에 남아 자꾸 생각하게 만들고 삶을 되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 <클로저>는 그런 면에서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나는 진실한 사람이었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대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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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쉬 페이션트 (2disc) - 일반킵케이스
안소니 밍겔라 감독, 줄리엣 비노쉬 외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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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영화에 집착하고 있는 요즘 잊고 지내던 옛 영화를 다시 보았다. 이젠 내게 그 이름만으로도 설레고 가슴 아픈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 당시 감독도 출연 배우도 거의 모르고 무심한 가운데 봤던 이 영화는 씻기 힘든 큰 여운을 남겼다. 아니 남겼다기 보다 내 스스로 각인을 시켰다. 잊지 말아야 한다고. ㅎㅎ 대체 그시절의 나는 왜 그랬을까?
〈잉글리쉬 페이션트〉에는 크게 두 가지 멜로드라마가 병행된다. 하나는 영국인 환자인 알마시 백작(랄프 파인즈)의 회상 속에서 벌어지는 알마시와 유부녀인 캐서린 클리프튼(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의 사랑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알마시 백작을 간호하는 한나라는 간호사(줄리엣 비노쉬)의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영화의 중심 멜로는 알마시와 캐서린의 사랑 이야기이고 한나의 이야기는 조금 부차적이다. 알마시와 캐서린의 사랑은 분명한 불륜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 아름다워서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절절한 아픔과 비극의 생생함을 잘 느끼게 만든다. 알마시의 눈물을 마치 곁에서 보고 느끼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죽어가는 여인을 살리기 위한 그의 처절한 노력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고나면 불륜으로 이 영화를 평가할 수 없음을 느낀다. 그건 그냥 사랑이었다.

내게 인상적었던 장면은 영화 초반의 사막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내용을 캐서린이 알마시를 비롯한 사람들 앞에서 인용하여 들려준다. 리디아 왕국의 왕비 이야기는 무척 극적이면서 많은 내용을 암시한다. 특히 나중에 나오는 캐서린과 알마시의 사랑을 예고하기도 한다. 그 내용에서 재밌는 것은, 왕비가 남자를 선택하여 왕을 죽이게 만들고 자신이 그와의 사랑을 주도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당대의 일반적인 도덕과 윤리로 따진다면 분명히 불륜이고 반역 행위인데, 그들 두 사람은 결과적으로 행복하게 살았다. 어쩌면 그런 스토리는 현재에나 있을 법한 것이지만 당시나 현재나 파격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캐서린과 알마시의 사랑은 리디아 왕비와 달리 비극적으로 끝난다. 내게는 이런 장치가 너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마치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인양 그 아픔을 느끼고 비극에 동참하는 사실이 웃긴다. 그만큼 이 영화는 내게 실감나게 다가오고 쉬 잊혀지지 않는다.

이 영화만큼이나 영화ost를 사랑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듣고 있다. 너무 좋다. 이번에 보면서 캐서린의 남편으로 나온 배우가 <킹스맨>의 콜린 퍼스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도 이런 배역을 맡을 때가 있었구나 생각하니 웃음이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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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Letters From Iwo Jima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Warner Home Video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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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는 싸우는 영화에 열광했었다. 때리고 부수고 폭파하는 장면을 보면 속이 다 시원해졌다. 커서는 전쟁 행위 자체보다 전쟁이 가지는 의미를 다각도로 분석하는 영화들에 끌렸다. <플래툰>이 그랬고 <디어 헌터>도 그랬다. 감독의 남다른 시선이 영화를 조금은 다른 길로 인도해 주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영화감독에 끌리기 시작했다. 곁들여 영화음악까지.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2006년 개봉작으로 미국의 대배우이자 대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미국인의 시선이 아닌 일본인의 입장에서 본 전쟁을 그리고 있다. 배우의 대부분이 일본인들이고 대사도 다 일본어다. 전쟁의 비극을 그리고 있지만 미군의 죽음보다 일본군의 죽음이 더 아프게 그려지고 있다. 물론 오해는 금물이다. 이것은 단지 시각의 차이일 뿐 호불호의 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이다. 불가항력인 상황에서 미국의 본토 상륙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장군의 노력은 눈물겨우면서도 무모하다. 결국 소모품처럼 모든 부하들은 죽게 되어 있으니까. 대체 ‘덴노 반자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살고 나는 죽는 데, 내가 왜 그런 구호를 외치고 허망한 죽음 앞으로 돌격해야 할까 하는 걸까?

일본식 죽음을 상징하는 ‘자결‘. 과연 군인은 적과의 대결에서 패배할 때 자결해야 하나? 그러면 나만 죽을 것이지 왜 부하들에게도 죽음을 강요하는 것일까? 이것이 전통이요 올바른 길인가? 내게 이런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명장이라 할 수 있을 주인공 쿠리바야시 장군은 본토의 지원도 없을 것을 알면서도 거대한 미군 앞에서 항복하지 않고 최대한 시간을 끄는 작전을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다. 비록 미군의 상륙 시간이 늦춰지고 미군의 피해가 늘 것이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아마 장군도 알았을 것이다. 실제 전쟁 통계를 보면 2만 2천 명의 일본군 수비 병력 중, 1만 7천573명이 전사했다. 피해율은 80%였고, 미군은 전사자가 6,821명, 부상자가 2만 1,865명으로 집계되었다. 태평양 전쟁 중 미군이 입은 최악의 피해였다. 이런 전투를 두고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내 입에서는 그 어떤 수식어나 형용사가 나오질 않는다. 그거 살육전의 대표라는 느낌 밖에. 물론 영화를 보면 쿠리바야시 장군의 인간적 면모가 나온다. 나도 공감하며 인정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인류 전체로 봤을 때 그 역시도 전범이다. 이런 전투를 두고 일본의 대본영은 3월 17일에 이오지마 섬에 있던 일본군이 ‘옥쇄‘(玉砕)했다고 발표했다. 옥쇄란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으로, 크고 올바른 일을 위해 명예를 지키며 깨끗이 죽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개죽음에 너무 멋진 말을 붙였다. 이것이 당시 일본의 전쟁에 대한 인식이었다.

다만 영화는 일본 소시민들의 다른 의식도 보여준다. 모든 일본군이 전쟁광이라거나 살인기계라는 의식은 과장된 것이며 일본인들 중에도 죽음을 두려워하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있다는 점이 영화 속에 잘 드러난다.

좋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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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
이준익 감독, 설경구 외 출연 / 인조인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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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조선시대 후기의 정씨 삼형제를 잘 알 것이다.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모두가 남다른 재능을 가졌지만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불운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영화는 그 중 맏이 약전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에는 그의 유배 이유, 유배지에서 약용과의 교류, 유배지에서의 생활들이 그려졌다. 특히 책 <자산어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잘 그려졌다.

영화에는 많은 명대사들이 나오지만 그 중 아래의 구절은 내 머리를 때렸다. 문제는 약전이 지적한 질문 안하고 달달 외우는 공부법이 200년이 지난 지금도 광범위하게 교육 현장에는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교사나 학교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교육이 필요하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특히 입시라는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암기가 효과적이다. 이런 결과 질문 못하는 기자, 질문 안하는 기자가 나타나게 된 것 아닐까?

질문이 곧 공부야.
외우기만 하는 공부가 이 나라를 망쳤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이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 장창대에게 주목했다. 흑산도의 어부였던 그는 자신이 공부하고 배운 것이 그대로 사회에 적용되기를 바랐다. 성리학 경전의 내용이 머리 속에서만 이해되는 죽은 지식이 되어서는 안되면, 목민관이 이를 공부하여 실제 적용하고 사회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세도정치 하의 조선은 비리가 넘치고 가렴주구는 일상화되어 있었다. 학정의 말단에는 아전이 있지만 그들은 수족에 불과했다. 진짜 몸통과 머리는 그들의 직속 상전이거나 한양에 있는 높으신 나리들이었다. 그럼에도 정부와 사회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외우고 공부했던 창대의 경전은 약용의 <목민심서>였지만, 그 저자는 당시로서는 유배 죄인이었다. 거기에 비해 스승 약전은 차라리 현실적이었다. 제자가 꿈꾸던 세상보다 그는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그 결과가 <자산어보>다. 약용의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는 당대에는 의미 없는 종이더미에 불과했다. 영화를 슬프게 읽은 것은 조선 후기의 사회 현실에 분노해서가 아니라. 창대에게서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원칙을 중시하고 현실과 타협하기 힘들어 하는 그런 모습을.

영화를 잘 그린 이준익 감독이 새삼 훌륭해 보였다. 좋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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