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정영환 지음, 임경화 옮김, 박노자 해제 / 푸른역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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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상당히 도발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 정영환은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나아가 일반 국민들에게 화해를 강요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본은 아직 명확히 그것도 공식적으로 식민지배나 전쟁 범죄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한일간의 식민지배 처리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해결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본 정부나 사법부의 공식 입장인 듯하다. 하지만 한국의 헌법재판소나 일반국민들은 이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당시 위안부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으며 불합리한 점이 많은 조약이었기에 개인 청구권은 남아 있다고 보는 편이다. 여기에 박유하는 강하게 반발하며 전후 일본은 꾸준히 사죄하며 세계적으로 우수한 사례를 남겼다고 평한다. 서로 만나기 쉽지 않은 평행선을 달리는 듯한 역사관을 가진 것이다.

그렇다면 박유하는 왜 그리고 많은 비난을 받는 것일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개개인의 이름을 들고 구체적인 사례를 지적하며 이러한 `목소리`도 있었다고 소개하는 데 그쳤다면, <제국의 위안부>가 이렇게까지 피해자들의 격분을 샀을까. `위안부`의 `본질`에 대해 일반화해서 말했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스스로의 명예와 존엄이 침해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결국 박유하가 몇몇 사례를 통해 조선인 위안부는 위안을 통해 애국하고 사랑을 나누었으며, 일본군과는 동지적 관계였다고 선언함으로써 생존자들의 존엄을 깨뜨린 것이다. 여기에 나눔의 집 할머니들은 적법한 절자를 거쳐 고소했음에도 논점을 오도하는 일본의 미디어나 지식인들이 `언론탄압`의 가담자라는 오명까지 쓰게 되었다. 이런 점들이 쌓여 박유하는 보호받을 가치조차 없는 부도덕한 지식인으로 내몰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책에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소개한 사료들을 박유하가 어떻게 곡해했는지 잘 보여준다. 가령 그녀가 ˝위안소는 병사와 위안부가 함께 울 수 있는 `눈물의 공간`˝이었다고 하지만, (박유하가) 그토록 찬양한 센다 가코의 책에는 이런 부분도 나온다. ˝후방에 오니 정말로 `공동변소` 취급인 거야. 장교나 하사관들 중에는 대놓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 하지만 그녀는 이같은 대목을 빼버린다. 분명 그녀가 읽었을 부분인데도 자신의 주장에 맞지 않는 것은 지나가버리는 것이다. 연구자의 윤리에 맞지 않는 대목이다. 이런 부분이 수없이 나온다는 것이 정영환의 주장이며 따라서 이렇게 문제 많은 책을 높이 사는 일본 사회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어 저자는 작년 12월의 한일 양국 간 위안부 합의는 이런 문제점을 안고 있는 박유하 식의 주장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일본 사회와 지식인들은 이 합의를 열렬히 환영한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저자는 서승 교수의 글을 인용하며 면을 이를 일본 지식인과 언론계의 퇴락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한다. 솔직히 저자의 이 주장에 억지로라도 절반만 동의하고 싶다. 일본에도 제대로 된 지식인들이 상당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험을 통해 안다.

후련한 듯하면도 답답한 심정이다. 한국과 일본은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지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십 수년 간 교류해온 한 일본 지인과도 이런 차이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오던 지식인인데 말이다.

나의 말과 글이 무조건 옳다고 치부하지는 않는다. 논리적 결함이 있을 것도 안다. 다만 피해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외면하고 `반일 민족주의` 운운하며 비판하는 것은 옳지 못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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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13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knulp 2016-09-13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cyrus님도 즐건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