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배반 - 선비의 그늘에 감춰진 조선 정치의 진실
박성순 지음 / 고즈윈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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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계승범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에 이어 두번째로 읽는 조선시대 선비에 대한 비판 서적이다. 기존의 통설이나 교과서적 지식을 비판하고, 우리가 당연시 여기고 있던 역사의 사실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던 선비들은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들은 진정 왕을 보좌하고 학문을 탐구하여 백성들을 보살핀 사람들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든다. 물론 그리한 선비들도 많았음을 한다. 여기서 말하는 그 개별적인 선비들이 아니라 전체의 선비들이 그런 의식을 가졌느냐 하는 것이다. 요즘 갈수록 회의적이다. 이런 연유에는 조선시대사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내 눈에 자리잡고 있다.

<선비의 배반>은 <心經>이란 책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의 선비, 특히 사람파들이 정권을 쟁취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심경>의 핵심 내용은 ‘경(敬)‘인데, 욕심을 없애고 잃어버린 본성을 되찾아 군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경계의 문구들이 담겨져 있다. 남송대 주자학자인 진덕수에 의해 쓰여진 이 책은 조선 시대 들어와, 특히 사림파들에 의해 애독되었고 그들은 왕의 경연 때 강독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대체 왜 그랬을까?

사림파들은 <심경>을 경연 과목으로 지정함으로써 겉으로는 군주의 성학을 돕겠다고 표방하였다. 이를 통해서 인간의 심성을 최고 덕목으로 하는 도학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사림파들은 군주에게 <심경>을 권유하는 차원을 넘어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사림파들이 진정으로 <심경>을 통해 도덕적 이상사회의 건설을 꾀했는냐는 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문제는 없었을까? 저자가 제목을 ‘선비의 배반‘으로 지은 것도 바로 이 기대치에 못미치는, 그리하여 배반에까지 이르렀다고 강변하는 것 같다. 정확히 말해 선비의 배반이라기보다 사림파의 배반이라 해야 옳겠다.

책의 저자는 <심경>을 강조한 사림파를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임진왜란의 실상, 광해군의 민생정치 실패, 정인홍과 소현세자의 죽음, 서인정권의 위선, 송시열의 활동 등에서는 매서운 어조로 사림파들을 비난한다. 현실을 도외시한 공리공담으로 문약해 빠진 나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체 <심경>의 강요를 통해 사람파들이 얻고자 한 것을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정권의 쟁취라고 저자는 말한다. 민생이 어찌 되던 외적의 침입 앞에서도 단합하지 못하고, 아니 그 외적이 물러간 이후에도 세상의 변화에 둔감하고 자신의 목소리만 높인 저들을 어찌 시대의 지도자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저자는 후기에서 이 책을 쓴 속내를 밝히고 있다. 사림파의 집권의 시대는 개발독재 시대와 많은 면에서 겹치고 있다. (책이 출간될 당시) 새로 집권하게 될 노무현 정권의 사람들이 다시 역사의 오류를 범하지 않게 이 책을 참고해달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충정이라 했다. 믿어야지......^^

나는 조금 다르게 읽었다. 성리학 이외의 것을 사문난적이라 배척하던 그때를 읽으며 왜 서양의 중세가 떠올랐을까? 그리고 문약했던 중국의 송나라가 연상되었을까? 송은 몽골족에서 넘어갔고 조선은 일본에게 넘어간 사실이 묘하게 연결되었다. 다행히 서양 중세는 새로운 세상을 꽃피웠지만 송과 조선은 나라를 통째로 잃지 않았던가. 역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 책에도 한계는 있다. 인용이 많아 보이는 데 출처를 달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을 붙이긴 했으나 그래도 부족해 보인다. 또한 수 백년간 명맥을 이어간 조선을 <심경>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끊이지 않는다. 사림파의 복잡한 관계와 활동도 <심경>으로 간단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책은 내게 역사를 보는 눈을 하나 제공했다. 작은 주제 하나로 보는 시대사가 그렇다. 배움과 지식이 부족한 내가, 나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방법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다 읽고나니 조선사와 사림파에 대한 시각이 풍부해졌다. 아니 솔직히 말해 너무 복잡해서 갈피를 잡기 힘들다해야겠다. 나름의 주관을 가져야 할 때인데 저자들의 사관에 내 역사관이 덩달아 흔들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어떤게 진실인지 모르겠다. 결국 공부를 더해야겠다는 생각뿐. 그래서 재밌나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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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4 0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knulp 2017-03-04 08:23   좋아요 1 | URL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아무튼 선비들의 당당치 못함에 화가 좀 낳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종교 살림지식총서 383
유흥태 지음 / 살림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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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읽은 문고본. 술술 익히는 느낌이 좋다.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더구나 길지도 않아 편하다. ㅎㅎ 하지만 좋은 문고본을 만나는 것은 좋은 사람 만나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그만큼 문고본의 특성상 내용이 소략하고 깊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페르시아의 종교>는 내가 거의 무지한 분야의 책이라 실망감보다 기대가 컸다. 역사를 가르치며 교과서 내용만을 떠벌인다는 것에 많은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느껴왔는 데, 이 책을 통해 페르시아의 종교,특히 조로아스터교나 마니교에 대해 약간이나마 설명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조로아스터(혹은 짜라투스트라)에 의해 시작된 조로아스터교,태양신을 믿지만 조로아스터교와 관계가 깊은 미트라교, 조로아스터교 사제가 만든 마즈닥교, 조로아스터교.기독교.불교가 융합된 마니교. 페르시아라는 국가가 지금의 이란에서 서아시아 지역을 지배하던 시절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이 종교들은 지금의 우리와 깊은 관계가 없다. 그러다보니 연구도 연구자도 드문 실정이다(저자 유흥태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독특한 이력의 존재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지금의 이란이 과거 페르시아의 후예란 점을 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페르시아는 아리안족(인도와 페르시아의 선조)의 후예로, 1935년 팔레비 왕조는 수천 년간 사용하던 페르시아라는 국호를 이란으로 바꾼다. 이란은 아리안족의 후예라는 뜻이다. 이 이란에게서 대한민국은 약 10% 가까운 석유를 수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란은 시아파의 핵심 국가로 이슬람권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란을 깊이 알기 위해 그들의 원류이자 바탕인 페르시아의 종교에 대한 기초 상식을 쌓는 일도 나름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종교를 일일이 축약해 쓰자니 얇은 문고본을 너무 길게 소개하는 것 같아 이번에는 그 작업을 생략했다. 혹 읽으려는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배려이자 쓸데 없는 오해를 삼가기 위해서 말이다. 페르시아의 종교를 단순히 소개하는 책이기에 깊은 감동이나 울림은 없다. 다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약간의 갈증은 해소되리라 본다.

이 책을 읽다보니 인도인들만큼이나 이란인들도 종교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금이야 이슬람교를 거의 대부분 믿고 있지만 과거에는 수많은 신들을 섬겼고 그 신앙심이 지금에도 이어져오기 때문이다. 이란에 대한 많은 궁금증이 차오른다. 그러자니 의사가 독서량을 줄이라던 말이 떠오른다. 힘든 일이다. ㅎㅎㅎ

TIP - 영어 mania의 어원이 마니교의 mani란다. 첨 알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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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은 암흑시대였는가? - 중세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3
박용진 지음 / 민음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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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게 들어와 마치 그것이 사실인냥 인식하고 있는 것은 없는가? 혹은 너무나 당연해 의심조차 하지 않는 일은? 가령 북한은 진짜 (마르크스가 주장한)공산주의식 국가일까하는 문제와 같은... 이런 문제의식과 비슷한 형태로 이 책은 내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중세의 서양은 어두컴컴한 암흑기였는지. 내가 고등학생 때 외웠던... 그런데 정말 이게 사실일까???

인간은 유아기나 청소년기 없이 청년기나 장년기로 넘어갈 수 없다. 대부분의 인간은 특정한 발달 단계를 거치면서 성장해 간다. 이는 그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를 시기구분이라 이름한다면 이해하기 쉽겠다. 성장의 속도가 사람마다 다르듯이 사회도 성장의 단계나 속도에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발달 단계를 거쳐야만 한단계 도약하는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따라서 서양에서 근대라고 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중세의 역할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나름의 의미가 있었던 셈이다. 마치 청소년기의 어떠한 경험이 청장년기의 누군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서양에서 중세는 대체로 400~500년부터 1400~1500년 사이의 약 천년을 말한다. 솔직히 이 1000년 동안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중세에 대한 비판은 일정부분 수긍할만하다. 기독교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인간과 이성의 약화를 불러왔고 신 중심의 세상을 만들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숨막히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호이징가의 <중세의 가을>이란 책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당시에는 성행위를 불결한 것으로 간주하여 심지어 부부관계도 하지 않도록 계몽하였다고 한다. 이는 일종의 야간 통행금지를 만들었고 당국에서는 순찰조를 만들어 야간에 불켜진 집을 단속하였다고 한다. 이 얼마나 웃기고 어이없는 일인가. ㅎㅎㅎ

그런데 중세의 속살을 약간만 뒤집어 보면 미처 알지 못했던 흥미진진한 장면들도 나온다. 우선 백년전쟁을 살펴보자. 우리에게 잔다르크의 등장으로 유명한 이 전쟁은 중세 봉건제가 가진 한계에서 나온 전쟁이다. 즉 프랑스에 자신의 땅(봉토)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 출신의 영국왕은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할까 하는 데서 이 전쟁은 시작된다. 여러가지 복잡한 사정에 의해 결국 두 나라는 100년이 넘는 기간을 전쟁에 매달려야 했다. 이 전쟁 기간 동안 영국와 프랑스에서는 자국에 대한 인식(혹은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싹 텃으며 중세적 무기(갑옷을 입은 기병)에서 근대적 무기(장궁, 대포)로 군사적 변화를 경험했다. 이런 과정을 거처 지방 분권적 중세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 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또한 현재 대학과 의회의 모델이 되는 스콜라(성당학교)나 신분의회가 성립되어 근대로의 이행을 준비했다. 십자군 전쟁은 또 어떤가? 종교적 열정으로 시작된 이 국제전은 비록 완전한 실패로 끝났지만 상업의 발달을 견인해 지중해 무역이 부활되고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상업 중심의 사회로 중세를 이끌었다. 그리고 르네상스까지.

위와 같은 몇 가지 예를 통해 중세는 죽은 사회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잠재력을 가진 시대였음이 명백해 보인다. 이를 통해 근대는 이미 예비되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책에 나오지는 않지만 중세는 왜 어두운 시대가 되고 말았을까? 바로 이어 나온 르네상스와 근대의 지식인들이 중세를 좋지 않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시대를 강조하기 위해 앞 시대를 저평가했고 이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런 전통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서양 중세를 무조건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다. 어쩌면 내가 보기에 두 시대는 두 가지 면이 모두 공존했던 시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혼란스러울 수 있다. ^^

<중세 유럽은 암흑시대였을까>는 명확한 정답(혹은 결론)을 독자들에게 주지 않는다. 마이클 샌댈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했던 것처럼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라고 한다. 단지 저자는 여러가지 증거를 내세울 뿐이다. 그렇다고 결론 내리기가 어렵지는 않다. 책 속에 정답이 다 녹아 있으니까. 하지만 나처럼 모범답안을 찾는 독자들에게는 답답한 노릇이다. 정답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서 속이 후련하니까 말이다.

책은 아주 쉬운 필체로 쓰여졌다. 역사학 전문용어가 거의 없으며 있다해도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게다가 얇기까지 해서 읽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주제별로 편찬되는 책이라 내용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보다 깊이가 있으며 전문학술서적보다는 훨씬 다가가기 쉽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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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정신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 르네상스 시대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6
장문석 지음 / 민음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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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어지고 있는 독서의 주제는 중세와 르네상스이다. 올해 들어 유난히 이 주제에 눈이 확~ 박힌다. 그래서 연속 선상에서 대체 근대 정신 혹은 개인주의라는 것은 언제쯤부터 생겨났을까 하는 점이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으나 구체적인 사례는 보지 못했던 터이다. 그래서 이 책을 골랐다.

집단이 아닌 ‘나‘, 신이 아닌 ‘나‘를 인식하게 된 것은 언제인가. 대체 인간은 어떻게 ‘나‘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인간‘중심의 사고를 하게 되었을까. 바로 그 시점이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이고 상업의 발달 덕분이라고 하겠다. 여기에는 인본주의(휴머니즘)와 예술의 발달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내 눈을 끈 대목은 이 르네상스가 근대의 시작(혹은 봄)이 아니라는 점이다. 호이징가의 책 제목이기도 한 ‘중세의 가을‘ 이 르네상스에 적합하다는 주장이다.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탁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여전히 중세이기는 하지만 이제 서서히 저물고 근대를 잉태하고 있는 그런 계절이 바로 르네상스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근대 정신은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위의 이야기는 다분히 서양 중심적 세계관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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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
이광수 지음 / 푸른역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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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공격적인 책이었다. 저자 이광수 교수는 설화와 허구가 뒤섞인 허왕후 이야기에 대해 가차없었다. 특히 그가 비판하는 논자들에 대해서는 실명과 그의 저작들을 거론하여 날을 세웠다. 가끔 읽는 이도 부담스러워지긴 했으나 저자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한국에서 ‘인도에서 온 허왕후‘이야기를 주도한 인물은 한양대 고고학 교수 김병모였다. 물론 <삼국유사>를 통해 접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피상적인 것이었다. 그의 화려한 언론플레이를 통해 비전문가들은 허왕후가 어떠한 이유와 경로를 통해 가야에 오게 되었는지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주장에 허구가 많다. 두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하나, 그는 허왕후가 고대 인도의 아유타국(아요디야)에서 왔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의 인도에는 아유타국이 없었다. 둘, 수로왕릉의 쌍어문이 인도와의 교류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수로왕릉의 쌍어문은 그려진지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쌍어문은 불교만이 아니라 힌두교에서 주로 사용하며 인도 전역에서 사용된다(아유타국만 아니라). 심지어 동남아 국가에서도 그려진다고 한다.

김병모 교수에게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허왕후 설화의 최대 작사가는 사원이었으며, 그 다음은 양천 허씨 가문이었다. 먼저 전자는 사찰 비즈니스를 위해, 후자는 가문의 현창을 위해 설화를 날조하고 왜곡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있는 신화의 전부다. 아니 지금도 그 신화는 확장되고 부풀려지고 있다. 허왕후가 인도에서 올 때 파사석탑을 가져왔다거나, 오빠(혹은 남동생) 장유화상을 데리고 왔다거나, 아들 열 둘과 딸 둘을 낳았다거나, 그중 딸 하나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을 지배했다거나, 남방불교를 가져왔다거나, 아들 중 두 명은 허씨 성을 쓰게 했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후대로 갈수록 설화에 살이 덧붙여져 그녀는 신비로움이 더해지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양상의 허왕후 이야기가 국경을 넘어서까지 왜곡이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십 수년 전부터 허왕후 설화는 한국에서 인도로 수출되고 있다. 극우 보수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두 나라 정부(혹은 두 이익세력)는 허왕후 설화를 매개로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했다. 아울러 사이비역사학이 창궐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화는 장구한 시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모여 있는 장이다. 신화는 특정 시대의 사람이 어떤 시건을 두고 비이성적으로 해석해놓은 이야기들을 모은 것이다.˝ 따라서 신화의 역사화는 위험이 따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단군신화나 고구려건국신화는 쉽게 믿지 않으면서 허왕후와 관계된 설화는 큰 의심없이 받아들인 경향이 있다. 저자는 이를 한 학자와 황색언론(조선일보) 탓으로 돌린다.

이 책을 읽으며 역사학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역사의 역할이 무엇일까?

단! 이 책이 완벽한 해설서가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한국고대사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관련 사료가 너무 없기 때문에 저자의 추론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글을 읽다보면 저자의 합리적인 듯하지만 무리한 추론도 제법 나온다. 그것은 사이비역사학자들와 사찰 설화에는 더 강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명료한 대답을 내놓기 힘든 한국고대사의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진 제목
1. 허왕후와 김수로왕
2. 김수로왕릉(납릉)의 쌍어문
3. 파사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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