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위안부 -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실로 어렵게 초판본을 구하여 읽었다. 법원에 의해 강제로 절판된 책이라 공식적으로는 판매되지 않아서 중고서점을 열심히 뒤져야만 했다. 어느 순간에는 2013년에 왜 이 책을 안 사뒀던가 자책하기도 했다. 논란이 되었을 때도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이후에도 무관심한 채로 있었다. 그러다 정영환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가 푸른역사 출판사에서 출간되며 대립되는 두 의견이 내 눈을 확 끌어, 이참에 나도 위안부 공부를 해야겠다는 욕심마저 들었다. 그리하여 손에 쥔 이 책.

 

대학원 졸업한 이래로 제국의 위안부만큼 꼼꼼히 읽고 밑줄 긋고 필기한 책이 또 있을까 싶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왜 이 책이 논란의 중심일 수밖에 없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으니까. 전문가들이 놓친 부분은 없는지 내가 하나라도 더 찾아야겠다는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우선 서문에 내 눈을 끈 대목이 나온다. 우리 안의 위안부는 그저 가녀린 소녀가 아니면 노구를 이끌고 투쟁하는 투사일 뿐이다. 그러나 그건 실은 그녀들 자신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원한 위안부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언제부터 투사였던가? 그런데 그게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었다? 순간 이건 아닌데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한국인들은 위안부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을까? 이게 맞다면 한국인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책에는 정대협이나 일부 정치인들이 그들이라고 하지만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한국인들 모두가 이런 혐의를 받을 것이다.

 

이런 의구심은 첫 장에도 이어진다. 저자는 위안부를 끌고 간 것은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인)업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구조적인 강제성(일본군)과 현실적인 강제성(업자)의 주체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일본군이 구조적 강제성만 띄었을까? 오히려 이들이 현실적 강제성의 주도자들 아닐까? 즉 군부가 악의 몸통이고 업자는 기생충들인 것이다. 악의 몸통이 움직임으로 기생충들이 날뛴 것이다. 기생충이 아니라 몸통을 잡아야 문제는 해결된다. 아니 결국 이 둘은 공범인 셈이다.

 

위안부들은 창녀였다고 박유하는 말한다. 그래서 일본인 위안부와 비교한다. 그렇다면 조선인 위안부들은 창녀가 되어 돈을 벌기 위해 그 위험한 전쟁터로 갔을까? 이때 박유하는 또 말한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업자들에게 속아서 온 것이며, 일부 일본군의 경우 이런 위안부를 집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예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 대부분의 일본군들은 이런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업자들에게 귀국을 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병을 우려하고 소독하고 관리한다. 이렇게 되면 슬슬 일본군의 책임이 드러나지 않나?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으니 안가도 된다고 반문할 것인가?

창녀가 된 위안부들은 애국하고 간호도 하고 일본군과 사랑하며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전쟁터라고 하는 극단의 상황에서 함께 어깨를 기댈 수 있는 그런 관계를 가지며 어려움을 나누는 좋은 사이였단다. 그래서일까? 전쟁 후에는 귀국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고.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왜 그렇게 와 닿지 않았을까? 내가 여전히 기존의 위안부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의구심마저 들었다. 위안부들은 정말 자신의 의지대로 애국, 간호, 사랑했을까? 하물며 저자 자신이 강조하듯이 기지촌에서 미군에게 매춘한 행위를 우리 정부도 애국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사실 정부에 의한 폭압 아닌가. 기지촌 여성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폭력. 이 둘만 비교해서 군과 정부의 불법적 비호 아래 일상적 강간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부인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위안은 가혹한 먹이사슬 구조 속에서 실제로 돈을 버는 이들은 적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수입이 예상되는 노도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강간적 매춘이었다. 혹은 매춘적 강간이었다.” 이건 학자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강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는다. 어떠한 수식어가 붙더라고 강간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루에 수 십 명의 남자를 받아야만 하는 현실을 어찌 업자들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는가. 그건 명백히 관리자인 일본군의 문제이다. 저자는 베트남 전쟁 때 한국군의 행태를 비교한다. 그건 맞는 말이다. 한국군이 만약 일본군처럼 강간적 매춘을 했다면 당연히 역사적 법적으로 처벌 받아야 할 것이다.

 

이어 박유하는 왜 그 많은 위안부들이 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 의심한다. 그러면서 그 대부분이 우리가 생각하는 비참함과는 조금 다른 상황에 있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즉 위험하거나 강압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 대단한 아전인수 아닌가? 그렇다면 위안부의 증거들은 어디에 쓸 것인가? 일본에서 보상금을 받은 위안부들이 아직껏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란다. 그래서 나눔의 집이 불편한 공간이며 사랑의 기억(?)을 품어주는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놀라운 해석이다. 저자는 나눔의 집의 역할에 대해 착각 내지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곳은 위안부의 경험으로 인해 고통 받고 힘들어 했던 분들을 돕고 위로하는 쉼의 공간 아닌가. 그러니 당연히 피해의 기억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 곳에 사랑과 같은 개인적, 예외적 경험들은 섞이거나 제거되지 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힘의 논리라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순전히 개인의 자유의지다. 일본 정부가 제공하는 위로금을 수령할지 말지 판단하는 것처럼. 위안부를 사랑하고 돌봐준 착한 일본군의 미담은 개인의 역할이지 일본군의 공식적 역할이 아니다. 지금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일본군의 공식적 역할이다. 강제성이 없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상금을 받은 위안부도 그것으로 개인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녀들은 일본 정부의 사과(정확히는 수상 개인의 사과)와 위로금을 수용함으로써 과거의 일을 용서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녀들을 비난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남겨진 자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한편 박유하는 위안소가 일본 전통의 유곽, 공창 제도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때문에 일본이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위안소를 고안해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이는 너무나 지극히 일본적인 생각이다. 그렇다고 위안소로 인한 강제성, 폭력성, 반인권성도 이해해야 하나? 특히 이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산실인 야스쿠니 신사도 이해해야 한다. 일본의 우익과 정치인들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추도하는 것은 일본 고유의 전통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가해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수용해야 하나? 그래야 그들과 손잡고 그들의 진정한 사과를 받아 미래지향적 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가?

 

최근 위안부를 지칭하는 용어로 국내외에서는 성노예를 주로 사용하는 듯하다. 이에 박유하는 “‘성노예라는 측면만 집착하는 것은 가까스로 자신의 몸과 마음의 주인이고자 했던 위안부의 노력을 짓밟는 일이 된다.”고 했다. 진짜 그럴까? 내가 보기에 이것은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성노예였기에, 소비되는 물건으로 취급되었으며, 자신들 일본군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관리하지 않았는가. 아마도 일본 측의 입장에서는 이 성노예라는 표현이 마뜩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위안부의 역할만 보면 이보다 더 정확한 용어가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오로지 이 책만 읽고 독후감을 쓴다. 관련 신문기사와 책을 읽으며 선입견 가득한 채로 논란의 중심에 선 제국의 위안부를 읽을 게 뻔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완벽히 객관적이지도 않다. 나 역시 이미 기존의 위안부상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도중에 나는 내내 중심을 잡지 못했다. 박유하의 논리를 수용하지 못하니 오히려 거부감이 강해졌고 책의 구석에다가 나름의 반론을 적어둬야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강요받은 숙제도 아닌데 나는 왜 이렇게 어렵게 책을 읽어야만 했을까?

 

사람이기에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이 다른 생각을 법의 잣대에 의해 처벌하는 것도 반대 입장이다. 다만 생존해 있고 직접 피해를 입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이 책은 분명 가혹한 것이다. 이를 학문의 영역에서 풀자고 외치지만 아직 사회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모양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아직 적어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일본의 공식적 사과와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65년의 한일협상과 같은 졸속, 밀실 협상은 없어야 한다는 데 국민적 공감대가 있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20151228일 또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2차 한일협상을 타결했다. 당사자이 동의하지 않는데 왜 3자가 나서서? 이게 진짜 외부인 아닌가? 정부가 하고 있는 짓거리가.

책이 나온 지 3년이 넘어서야 이런 잡소리를 늘어놓는다. 이제 정영환의 책,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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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나도 알라딘 서점을 그냥 지나칠 수 없구나.
더위를 피해 그곳에서 책을 또 몇 권 샀다.
지난 시엠립 여행의 잔상이 남아 있어 결국 앙코르와트에 관한 것 책으로 구매했다.
아직 국내에 캄보디아나 앙코르와를를 정확하고 다양하게 소개하는 책들이 부족한 것 같아 이제서야 아쉬움을 느낀다.
가기 전에 공부했어야 하는 데, 갔다온 지금에서야 이렇게 난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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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11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부하고 싶은 것이나 제대로 알고 싶은 주제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 같아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거들떠보지 않은 책이 어느 순간에 읽고 싶어져요. 운이 없으면 그 책을 구하기 힘들어요. 참으로 그지같은 타이밍입니다. ㅎㅎㅎ

knulp 2016-08-11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절대공감입니다. 읽고픈 책은 절판인 경우가 참 않았습니다. 지금도 절판된 헌책을 웃돈 주고 사서 읽고 있거든요. 그래서 읽고픈 책이 생기면 온오프라인 서점을 찾을 때까지 집착하게 되네요. 바보처럼...
 
피아노 치는 여자 - 2004 노벨문학상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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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영화화(영화명 `피아니스트`) 된 소설인데다,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글이라 제법 큰 기대감으로 읽기 시작했다. 한동안 고전 소설만 읽어왔던터라 현대소설을 읽고픈 마음도 강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의욕을 가지고 첫장을 넘겼다.

주인공 에리카는 음악원 피아노 교사다. 피아니스트가 되려다 날개가 꺽인 그녀는 사회와 사람과의 관계를 끊고 오로지 어머니와 고립된 채로 살아간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은 에리카의 자발적 선택이락보다 어머니의 오래된 기획이었다. 돈버는 기계가 되어버린 그녀는 어머니와 한 침대에서 자고 개인의 삶을 잃어버린다. 문제는 그로인해 그녀의 내면이 일그러지게 된다. 특히 이성과의 관계가 정상적인 길을 벗어나 자신을 파괴하고 비이성적 행동을 하게 만든다. 클레머라는 연하의 제자와 사랑을 나누고자 하지만 정상적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에리카는 결국 영혼과 육체의 고통만 겪게 된다.

책을 읽으며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왜 에리카는 독립된 객체로 성장하지 못했냐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머니의 기획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성장해가며 어머니에게 제대로 맞서지 못했을까 의문이 든다. 확실히 그녀는 독립할 의지가 약했고 그러한 방법을 알지 못했다. 결국 나는 저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부모의 역할에 집중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자신을 위해서만 딸 에리카를 키웠다. 딸에 대한 존중이나 애정은 남달랐다. 그것은 어머니의 욕심이 채워질 때만 가능했다. 에리카는 철저히 어머니에게 이용되었다. 결국 그녀 주위에는 친구도 친척도 없게 된다. 아버지도 정신병원에서 죽는다. 대체 정상적인 사랑과 관계라는 것이 없는 삶은 어떤 것일까? 에리카를 보며 내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를, 아니 이 아이들이 스스로 잘 성장해가도록 도울지를 고민했다.

사실 이 책은 심리묘사가 깊고 넓다. 그래서 주인공의 감정 표현이 길게 묘사되고 있다. 이 대목이 개인적으로는 소설의 흥미를 반감시켰다. 문학적으로는 어떤 평을 받는지 모르지만 뒤로 갈수록 책장을 넘기기 힘들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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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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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는 소설들은 신간이 거의 없다. 주로 출간된지 서너 해가 지나 눈에서는 사라졌지만 가끔 인구에 회자되는 그런 책들을 고른다. 물론 그 기준은 다분히 주관적이겠지만. 오늘도 난 그런 철지난 책 한 권을 읽었다.

전작이던 <눈먼자들의 도시>가 주던 묘한 흥미와 관점이 이 책을 고르게끔 만들었다. 그런데 뭐할까. 이 책을 펼치자마자 뭔가 이상했다. 어느 책에나 있는 `문단 나눔`이 없는 게다. 또한 인물들의 대화를 따옴표 등으로 구분하기 마련인 데 이 책에는 아예 없는거다. 즉 한 장이 끝날 때까지 거의 하나의 문장으로 연결되어 있다. 대화를 포함하여. 허거거.....

<눈먼자들의 도시> 이후의 4년을 이 책은 무대로 하고 있다. 그런데 상황이 좀 웃긴다. 선거 결과 83%의 시민이 백지 투표를 한 것이다. 이를 놓고 정부는 일종의 `불순세력`이 사주했을 거라며 시민들을 의심하고 뒷조사를 실시한다. 그래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자 정부를 옮기고 수도를 포위한 다음 각종 사고들을 일으킨다. 정부가 주도하여 폭탄테러 등을 일으킨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정부는 전작의 여자 주인공을 이번 사건의 희생양 삼아 암살해버린다.

이 책을 읽는내내 작금의 한국 현실과 대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 정부가 벌이는 공작 정치가 소설 속의 정부와 닮아 있다. 총리 마음대로 인사를 하고 테러를 지휘하는 모습도 윗동네 지도자랑 똑 같아 보인다. 우리네 한반도는 그런 곳인가보다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 책은 결정적으로 전작에 비해 재미가 없다. 몰입하기 힘든 구조다. 그 이유는 첫문단에 밝힌 바다. 현실의 한국을 비판하는 도구로 읽다 (솔직히) 지겨워서 얼른얼른 책장을 넘겼다. 즉 크게 강추하는 책은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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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내 페이스북 타임라인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다. 아니 실은 격렬해 눈을 가리고 읽고 싶을 정도였다. 내 견해는 주로 역사학자들의 주장과 비슷하지만 지인 중에는 박유하 교수를 지지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두 진영에서 논의(혹은 싸움)가 깊어질수록 나 혼자 난감해지기도 한다.

이참에 나도 본격적으로 공부해보고자 정영환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와 <황해문화>를 구매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PDF파일로 읽기로 했다. 사려고 하니 왠지 꺼려지는...ㅎㅎㅎ 중립적 입장에서 읽으려 했는데 벌써 진영의 논리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양진영의 대립이 격화되는 것을 보며, 특히 페이스북을 통한 설전은 상당히 놀라울 정도인데, 내 생각을 다시 정리해보기로 했다. 과연 나같은 개인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학교에 근무하는 나는 어떠한 사건이든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려고 노력한다. 학교폭력이 가장 대표적이다. 가해자의 주장은 참고하는 수준이다. 위안부 문제 역시 그렇다.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그분들의 삶이 중요한 것이지 일본 정부의 상황을 고려해서 그들의 사과나 배상을 수용하는 것은 2차적인 문제라고 본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수용을 거부한다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 현실은 어떤가? 작년 12월 정부는 할머니들에게 귀 기울이지 않고 일방적 논리로 일본의 사과를 수용하고 할머니들에게는 통보만 해주었다.

박유하의 책은 아직 읽고 있는 중이라 언급은 피한다. 다만 이미 너무나 많은 비판 기사와 논문을 읽을 탓에 선입견이 생긴 듯하여 조금은 걱정이 된다.

학문이 현실을 떠난 존립할 수 없다면, 학문은 분명 현실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학문이 정치색을 띠어 어느 일방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경우 그 학문은 반쪽의 진실에 그칠 위험을 안게 된다. 권력의 힘에 기대 자신의 반경을 쉽게 넓히려 한다면 반대편의 강력한 저항에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 과연 누가 그 위험한 배를 탔는지 나는 조사하러? 감독하러 간다. ㅎㅎㅎ

이런 독서 역시도 즐겁기만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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