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독서본능 - 책 읽기 고수 '파란여우'의 종횡무진 독서기
윤미화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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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사람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한다는 믿음에 나는 변함이 없다. 책을 통해 간접경험을 쌓기도 하고 지식의 층위를 넓히는 계기가 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평등한 소통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칼 세이건은 인간이 창조한 모든 것들 중 전체를 아우르는 것을 책이라고 했다. 하나의 글쓰기가 모여 견해가 되고 견해는 사실로 바뀌는 순환작업의 다른 모습이 바로 책이다. 책의 소중함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진리는 결코 허언이 아니다. 그래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의해 설립된 알렉산드리아도서관에서도 현재를 연결해 주는 변함없는 커넥터는 책이다.

 책에 대한 즐거움은 읽는 자의 몫이다. 책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경험칙에 따라 상호소통하며 그려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이다. 그러므로 그 파장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이러한 즐거움을 누구보다 잘 소화해 내는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파란여우 윤미화를 꼽는다. 그녀가 책의 렌즈를 통해 조망한 세상은 허접한 글귀와는 차원이 다르다. 장르를 불문하고 넘나드는 그녀의 책 가이드를 받다 보면 절로 동화되어 몰입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녀가 구부다 보는 세상은 유쾌, 상쾌, 통쾌하다.  올레!

 책을 야금야금 갉아 먹던 이런 그녀가  책을 냈다.  거침없이 편리함을 던져 버리고 소로우의 삶을 동경하며 과감히 염소농장지기가된 그녀가 책을 밀어서 써 냈다. 그녀의 책 이야기는 푹 고와 삭힌 홍어처럼 탁 쏘는 맛이 일품이다. 허투로 읽어 내던 개념의 중추를 지속적으로 자극하고 경락해 주며 시원하게 긁어 주는 손맛이 김훈선생의 스트레이트로 뻗어 나가는 연필심공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5년 동안 천권의 책을 섭렵해 냈던 너른 지식의 바탕이 기저에 온전히 깔려 있기에 무엇을 보아도 전체를 장악하는 깊이의 원형이 대단함을 감출 수없다. 

 이 책 <깐깐한 독서본능>은 말 그대로 서평을 모은 책이다. 한낱 독자에 불과한 이가 써 낸 서평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겠는가하고 의구심을 갖는다면 그것은 편견에 불과하다. 텍스트를 생산해 내고 조합하는 것은 작가의 영역이겠으나 그 이후의 너머를 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무한 상상이 가능한 열린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기술의 발달과도 무관하지 않다.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은 소통의 매개를 글쓰기로 돌려 세운 것도 그 이유겠다. 글쓰기는 이제 생활이다. 문자를 날리고 지식을 검색하고 트위터를 하는 세상. 이것이야말로 21세가 만든 텍스트의 해빙시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책이 여느 서평과 다른 주된 이유는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로 회귀한다는 것이다. 넘쳐나는 텍스트의 홍수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시대에 책을 취사선택하고 수용하는 것 또한 어렵고도 난해한 문제다.  그러하기에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은 더 없이 고맙다. 아울러 그녀는 전문가가 아닌 전문가다. 비평이나 서평을 업으로 삼고 있지 않기에 가차 없이 칼칼한 비판을 던지고 호통을 질러 던질 수 있는 것은 생활인의 모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한 거리에 서 있는 정도의 거리감이 일종의 연대의식을 발동하게 만든다는 단순하고도 일차적인 이유다.

 그래서 이 책은 성큼성큼 읽는 것보다 서서히 녹여서 읽어 내는 것이 좋다. 이 책을 읽어 내다보면 그녀가 주구장창 읊조리는 '고구마 줄기 법칙'이 숱하게 나온다.  한국문학, 외국문학,고전ㆍ해석, 인문사회, 인물평전, 환경생태, 문화예술, 역사기행, 만화아동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독서편력은 올라운드 플레이어다. 서평계의 두 개의 심장을 단  산소탱크 박지성이다.  이 속에는 오늘날 그녀를 세운 모든 것이 보태거나 모자람 없이 담겨 있다. 독서력의 원천이 된 장정일 작가에서부터 인식의 패러다임을 바꾼 조지 오웰, 직선의 미학이 살아 움직이는 김훈 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가들이 그녀와 함께 춤을 춘다.

 그녀는 전 방위의 독서를 통해 사회의 부조리에 분개하고 모순을 날카롭게 솎아 내는 분별력과 통찰력을 장착했다. 누구나 책의 길을 통해 득템할 수 있는 흔해 빠진 아이템은 아니라 할지라도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현실을 움직이는 동인이기에 불가능은 없다. 이러한 사고의 확장은 책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오늘도 그녀는 책을 통해 움직인다. 상상과 현실을 바지런히 왕복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귀를 쫑긋 세운다. 독서의 완성은 계속 움직이고 나아가는 것이라는 그녀의 칼칼한 글감은 어김없이 가동된다. 깐깐한 독서의 향연에 목마른 자라면 일독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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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2-04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계의 두 개의 심장을 단 산소탱크 박지성^^
잘 어울리는 닉에네요, 우리 파란여우님에게요.
곡우님의 리뷰 잘 읽고 갑니다.

穀雨(곡우) 2010-02-04 08:46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파란여우님에 대해 제가 저렇게 쓸 자격이 있는 지
조금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보았답니다. ^^
 

살다보면 불가피한 경우를 자주 종종 만난다. '불가피'란 인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나 피할 수 없는 현상을 이름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가피한 이유를 아는지 모르는 지 그 쓰임새가 두루두루 쓰임을 발견하곤 한다.  확고부동한 진실처럼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음을 묵시적으로 과시하며 불가피함을 연실 남발해대니 말이다.  불가피의 틈바구니에서는 개념도 상식도 이미 소용불가다. 불가피하다는  무적의 괴물만 잘 이용하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아주 쓸모가 넘치는 유용한 단어다.  과연 불가피를 회피나 주장의 관철을 위해 통용되는 부연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C팀장은 평소 자기주장이 강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성격이 일방적이다 보니 충돌이 잦은 것은 다반사다.  C팀장은 의견이나 견해를 상대에게 전달할 때 상황의 불가피성을 자주 들먹인다.  자꾸 듣다보면 그 불가피란 단어가 주는 의미에 대해 모종의 적개심마저 솟구친다. 윗사람이다 보니 부하 직원에게 궁색한 설명이나 중언부언은 자존심에 상처를 줄 것이 뻔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입에 붙은 것이 불가피애찬론이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이처럼 갑갑한 상황을 한번 즈음 겪지 않은 사람이 드물지 않을까.

 

소통은 상대방과의 사이를 연결하는 상호교류다. 의견이나 주장이 대립될 때 조율과 이해를 통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의견이 도출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비록 상대가 자신의 지위보다 낮거나 경험이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누가 봐도 최선의 결과를 얻을 답안이라면 수용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인지 모르겠다. 인간관계의 가장 난제는 바로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깨우치는 것이 우선이니 말이다.

 

2010. 2월의 첫 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는 2명의 수장이 출근하는 웃지 못 할 기현상이 벌어졌다. 초유의 사태다. 세상에 이런 일에 제보해도 될 일이다. 이것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 주소라면 확대비약일까. 누가 뭐래도 이 사태의 주인공은 유인촌 장관의 불가피한 선택의 결과다. 유인촌 장관의 입장에서는 그랬을 터다. 누가 봐도 속이 훤히 내비치는 전형적인 코드인사의 수순이다. 그렇다고 인사권을 거머쥔 권력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포장하기에는 이미 수위를 넘어섰다. 노무현 정권에 맞는 코드인사를 잘라 내 버리고 싶은 것이 당연했을 것이나 해임에 상당한 사유 없이 내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업의 연속성과 일관된 방향성을 위해서도 그렇고 이렇다 할 재론의 여지가 없다. 금번 법원의 판결이 해임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의미이기 이전에 상식의 눈으로 판단해 보면 그 해답은 자명하다. 이제 문제는 해임 효력정지에서 복귀한 돌아온 탕아 김정헌 위원장과 현재 오광수 위원장의 손을 떠나 유인촌 장관의 결자해지로 상태로 회귀한다.

 

권력이 오만해지고 위선을 일삼으면 민심은 금세 알아챈다. 권력을 무소불위의 만능쯤으로 치부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결과를 야기하는 화약고에 다름 아니다. 한비자는 권력과 능력을 혼동하지 말 것을 이야기했다. 마부 제치고 말을 모는 리더는 이미 소명을 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리더로서 문제의 불가피함을 강론하기 전에 외부의 목소리에 경청해야 한다. 경청은 상호소통을 위한 첫 번째 단추이며 그 출발점이다. 제 아무리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을 일삼을지라도 상대방의 사정을 이해하고 감안한다면 그 간극의 폭이 절로 보인다. 그 이후에 더 나은 개선방향을 찾는 것이 온당한 처사지 불가피함에 기대어 권력의 발톱을 숨기는 것은 위선이다.

 

인간관계라는 맥락에서 보면 불가피는 상대방의 소통과 의견을 차단하는 단절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상황을 통해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인지상정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불가피의 범위를 확대해석해서는 곤란하다는 의미다. 불가피의 영역을 넓히면 넓힐수록 개선되거나 바뀔 수 있는 상태도 고착화되고 불가변의 영역으로 스스르 빠져 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불가피한 상황은 스스로 만드는 인위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자존심을 구기고 체면에 조금 오점을 남기더라도 교묘한 속임수보다 서투른 진실함이 더 기억에 오래 남는다. 진실함은 상황을 개선하는 관계의 연결통로다. 변화의 시작은 이처럼 사소한 용기에서부터 출발해 서서히 전이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불가피함보다 가능함으로 바꿔야 되지 않을까. 결국 긍정의 힘이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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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사생활 ㅣ 아이의 사생활 시리즈 1
EBS 아이의 사생활 제작팀 지음 / 지식채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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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다 보면  사소한 일들에 놀래거나 난감할 때가 있다. 누가 일러주는 것도 아니고 짜인 틀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처음의 소박한 바람과는 달리 정작 아이의 고민이 무엇인지,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뒷전이고 주위의 열기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하기 때문이다.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이라면 얼마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못된다. 사회가 분화되고 더욱 전문화될수록 이러한 양육의 조건이나 환경이 나눠지는 것도 큰 이유다. 그렇다고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붙들어 매고 재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막막하기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해서 부모로서의 역할과 아이와의 상호관계를 기술한 책들이 날개 돛인 듯 팔리고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 아이를 제대로 잘 키워보자는 바람이다. 잘 키운다는 것의 의미가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고 그것을 자양분 삼아 아이의 학습적 성취를 높이고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깔려있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와의 관계 혹은 양육의 어려움을 겪게 만드는 상황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는지 모른다. 결국 아이에게 주입된 바람은 부모의 희망의 다른 모습이다. 그 바람에는 아이의 희망과 인성, 재능은 암묵적으로 배제되었으며 단절된 절름발이 희망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불편한 진실에 대해 많은 육아전문가, 아동심리학자, 소아심리학자, 소아정신과 전문의 등이 연신 충고하고 잘못 꿰어 진 단추를 제대로 맬 것을 당부하여 왔지만 우리는 잊어버리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았는지 모른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 책 <아이의 사생활>은 어떤 책보다 훨씬  현실적이며 직설적인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소재의 특성 상 지식의 전달, 문제의 해결, 사고의 전환 등을 차치하고라도 이 책의 가치는 아이의 시각과 어른의 시각의 어긋남을 교정해 주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하며 사회적 요구에 부합하는 책이다. 이 책의 사례 내지 TV에서 방영된 갖은 문제 상황의 검증에서 예기치 않은 결론과 사실에 엄청난 여파의 충격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언제부터인가 일등에만 치우친 나머지 우리의 아이들을 주변인으로 내모는 제도와 관념의 허상의 결과다 이러한 왜곡되고 삐뚤어진 현실을 거름망 없이 반영해 주는 불편한 거울에 비친 진실은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이처럼 아이를 제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믿음으로 부터로의 시작을 통해 끝을 예측할 수 없는 기나긴 여정이다. 그래서 아이의 숨은 재능을 발굴하고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 해법을 안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바로 이러한 물음과 필요에 의해 기획된 것이 <아이의 사생활>이다. 얼마나 아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무지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부모로서의 권위만을 앞세웠는지를 바로 보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은 전체 5장으로 나뉘어 아이의 정체성, 성별에 따른 차이, 다중지능, 도덕성, 자존감을 카테고리로 연결시켜 올바른 양육관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 여기에 제시된 모든 해법이 정답은 아니다. 단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에 의해 설정된 통념의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 개개인의 상태와 환경, 조건 등을 따져 아이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부모의 믿음과 신뢰가 정답이다. 이러한 믿음과 신뢰를 형성하는 의문과 실수 내지는 왜곡현상을 바로잡고 도움을 주는 수단으로서 이 책의 필요성이 부각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아이는 우리 사회가 만든 제도, 관념, 문화, 규범 등을 배우고 익혀 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 별 거부감 없이 흡수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뒤쳐지고 거부반응을 보이는 아이가 공존하기 마련이다. 다양한 개성인자의 조합은 인간의 사회성을 공격하는 위협적인 요인처럼 비쳐지기 쉽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은 타고난 기질적 특성과 환경적 조건에 따라 천양지차로 변한다. 그러한 인간의 차이는 뇌의 기능적 차이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다중지능으로 연결된다.  아이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소화해 낼 수 없다. 어떤 아이는 인간친화력이 뛰어나 사교성이 우월하고 어떤 아이는 음악지능이 특출나게 뛰어난 경우를 흔히 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워드 가드너가 창시한 8개 지능이론인 다중지능이론이다. 다중지능은 아이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는 키워드로 유전자에 각인된 강점지능을 깨우는 선결작업이다.

 

그렇다면 다중지능의 발견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지도 의문으로 남는다. 자신에게 걸맞은 강점지능을 찾고 효율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하더라도 이것이 아이의 행복과 연결되는 전제조건은 아니다. 이 책에서 끊임없이 던지는 화두 또한 이론적인 지식의 기저에 숨겨진 공감, 경청, 신뢰, 지지 등이 한데 뭉쳐 옹골지게 버무려져야 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인간의 뇌를 자극하는 외부적 환경과 내부적 요인의 특성과 차이를 아는 것 보다 어쩌면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진심으로 대하고 눈높이를 맞추어 바로 보는 것이 아이의 미래를 행복하게 설계하는 출발점인지 모른다. 우리의 행복과 아이의 행복이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말이다.

 

때문에 아이의 역할모델은 부모라는 말이 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 책의 4장, 도덕성, 작지만 위대한 출발은 그러한 의미를 각인 시켜주는 내용이다. 책은 사회가 요구하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갖추어야 할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한다. 실험을 통해 드러난 흥미로운 결과는 충격을 넘어 아이를 어떠한 시각으로 대하고 있었는지를 되묻게 된다. 성인을 대상으로 약속한 금액보다 더 많은 금액을 건네주고 이를 받아들이는 피실험자의 상태를 관찰한 실험이다. 결과는 우리의 도덕성이 유혹에 쉽게 흔들리고 나약한 본성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이처럼 어른의 언행불일치의 생활태도와 성공일변도의 위험한 결과지향주의에 대해 아이는 고스란히 흡수하고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작용했다. 아이는 어른이 한 행동을 그대로 모방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진실처럼 알면서도 받아들이기에는 거부감이 앞선다. 하지만 진실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처럼 깊이 각인되어 우리의 아이는 위협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 책이 찾은 양육의 필수조건은 아이의 자존감, 즉 자아존중감을 찾는 것으로 귀결한다. 자존감은 아이를 긍정적으로 만들고 실패와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지지대로 행복에 다가서는 소중한 발걸음이다. 그 속에서 부모의 역할은 아이를 보듬고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이다. 믿음은 아이의 숨은 재능을 찾게 한다. 칭찬은 아이를 춤추게 하고 밝은 아이로 만든다. 그러므로 아이는 부모의 사랑으로 자란다는 말처럼 아이는 사랑으로 키운다는 것이다. 사랑은 아이를 격려하고 심지가 굳은 아이로 만드는 자양분이다. 이러한 아이를 향한 사랑은 우리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고 어느 곳 막힘이 없이 소통하는 사회로 만드는 초석이 된다. 이처럼 아이의 생활은 알고 보면 어른의 생활을 본 뜬 우리의 다른 모습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이를 소유하려고 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다. 만약 아이를 귀찮아하거나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는 부모가 있다면 이미 부모이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지금처럼 아이의 출산이 하향세를 이어가는 현실을 반영한다면 아이의 존재가치는 무엇으로 산정할 수 없다. 저 출산 사회에서 아이의 미래는 불투명한 미래와 위협받는 내일의 암울한 모습을 지우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이것을 구실로 아이를 성공의 틀로 재단하거나 밀어 넣을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의 미래를 행복하게 만드는 작업은 어른의 몫이다. 아이의 자존감을 높이고 아이의 숨은 능력을 신뢰한다면 지금과 같은 편협된 학업성취주의에 치우친 흔들리는 양육방식은 사라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상식과 건전함이 통용되는 높은 수준의 사회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첫 단계가 아니겠는가. 이 책에서 드러난 부모의 자세는 치우친 양육태도에 경종을 울리는 자성의 목소리에 다름 아니다. 아이의 사생활은 아이만의 것이며 공감은 아이를 높이 날아오르게 하는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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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0-01-28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심리치유서 위주로 책 읽을 때 이 책 목록에 넣었다가 뺀 것인데, 곡우님 리뷰로 만날 줄 알았으면 읽어둘 걸... 한결 같이 정돈된 글을 쓰시는 걸로 보아 어디 연재하시는 것 같아요. 그저 경외감을~

穀雨(곡우) 2010-01-29 08:48   좋아요 0 | URL
느와르님, 경외감을 이렇게 남발하시면 안됩니다. 전 그저 읽고 쓰는게 좋아서 하는 일이지,
밥벌이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ㅎㅎㅎ

후애(厚愛) 2010-01-29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가끔씩 곡우님 서재에 와서 글만 읽고가는데 제 서재에 댓글남겨 주셔서 용기를 내었어요.^^
정말 리뷰 잘 쓰세요! 부럽습니다~

穀雨(곡우) 2010-01-29 11:03   좋아요 0 | URL
전 게으른 블로거라 댓글 남기에 인색했던 모양입니다.
아직 인터넷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함이니려니 해주세요.
리뷰는 그저 흉내만 내는 것이라 실체는 없습니다.
그래도 좋게 봐 주시니 기쁠 따름이지요..^^
 
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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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남겨진 자에 의해서 기술되고 현재의 흔적을 통해 과거를 더듬는 추적의 지난한 과정이다. 드러난 사실이나 결과도 현장성이 부재한다면 과정의 중추를 제대로 읽어 내릴 수 없다. 사실과 결과의 상호연관에서 우리는 모종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과거가 기억한 현장을 현재에 부쳐 사실로 믿게 되며 기록이 된다. 그러므로 역사는 객관성이 전제된 주관적 해석이 박혀 있는 필요의 모순인 셈이다. 어제까지 굳건히 믿어 왔던 가치의 진실이 하나의 사소한 오류로 다시금 해석되고 베어 나가고 살아나가는 현장을 보면 태생적 모순의 환경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역사를 드려다 보는 해석 작업은 다변적 변수를 이용한 하나의 객관적 과정으로 팩트와의 인과적 연결관계를 되살리는 작업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하기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기록된 사실을 토대로 뼈대를 맞추며 살을 붙이고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힘겨운 작업임에 틀림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욱 심오한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모른다. 그것은 동일한 결과가 어떤 지점에서 연유하여 흘러 나왔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과정의 인과관계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 <칼의 노래>는 역사소설의 축을 따르지만 전혀 뜻밖의 곳에서 의도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과감함을 생생하게 여쭌다. 마치 경험하지 못한 자를 위해 현장의 살아 움직이는 숨결을 한 움큼 끄집어 와 소중히 들쳐 향유케 하는 그런 수고스러움이 전체를 아우른다. 따라서 팩션은 사실을 배제하고는 힘을 얻지 못한다. 사실과 재창조가 조화를 이룰 때 하나의 새로운 사실로 인식되는 바탕이 되는 것이며 상황을 제대로 보는 얼개에 다름 아니다.

 

이순신은 그 유명함을 언급할 필요조차 없이 우리나라의 얼이자 기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순신의 업적은 뛰어난 전략적 전술로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대승을 이뤄 낸 것을 필두로 그의 리더십, 통솔력, 강인함 등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남다름을 보였다.  이러한 사실은 글을 지어 만드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자칫 편향된 방향으로 흐르면 돌이킬 수 없는 비판과 통속소설의 한계를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훈 선생은 이 책을 통해 성웅 이순신의 새로운 면모를 부각시키는 작업을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 냈다. 바로 인간 이순신의 모습과 정체성의 다각적 분석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경계에서 산다. 또한 드러난 사실과 드러나지 못한 사실에서, 보이는 것과 드러난 것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 고뇌와 번민을 보듬기보다 그 공과에 더 열광하는지 모른다. 베지 못하는 적과 벨 수 없는 적의 차이를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완전하게 연결시키는 김훈 선생의 글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이순신 장군은 어느 영웅과 단 1g으l 차이도 없는 역사가 기억한 인물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지우고 쓰기를 무던히 반복하며 각고의 시간을 통해 완성된 노작가의 노고가 가득 담긴 작품이다. 한 줄 한 줄 읽는 이로 하여금 보이는 것의 오류를 치유하는 역동의 에너지로 충만하다. 절제된 언어의 사용과 조화로운 문장력은 글에 날개를 달고 창공을 나는 디딤돌이 된다. '버려진 섬에도 꽃은 피었다.'로 시작하는 책의 서두는 시대적 상황, 계절적 변화, 화자의 심정 등을 그 어느 것보다 잘 대변해 준다. 이와 같은 사물에 의한 상징적 상황설명은 이순신의 번민의 순간을 통해 적절하게 부각됨을 볼 수 있다. 번민은 누구나에게 있는 지극히 대중적이며 인간적인 본성이다. 상황적 지배를 해소하려는 인간적 노력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김훈 선생은 청정수를 애타게 갈구하던 이순신 장군의 갈증상황을 통해 갈등을 일시에 해소하려는 희망과 바람을 포개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이순신장군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결상황에서 고뇌하며 표리부동하는 현실에서 갈등한다. 구국을 위한 충정과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에서의 갈등과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으로 둘러싸인 숨 막히는 순간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이러한 무한 압력이 지속되는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극복하였기에 이순신 장군이 더욱 우러러 보이는 인물인 것은 모두 아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정의 던적스러움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나 감성적으로는 그다지 교류하지 못한다. 김훈 선생은 지독한 안개와 같이 온몸으로 퍼지는 이순신 장군의 몸 속 깊이 스며든 아픔의 후유증을 간결한 형상화를 통해 심경을 적절하게 대변해 준다.  이처럼 전기소설의 형식을 표방하며 유지하는 이 책은 더 나아가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보듬는 성격소설에 가깝다.  그래서 김훈 선생의 글은 더욱 빛을 발한다. 노을이 쓰러지고 일어나는 현상의 다채로움을 통해 인간적 변화를 형상화에 가 닿는다는 것은 세밀하게 구구절절 읊어 나가는 상황적 설명보다 더욱 힘을 얻는다. 굳이 일러 주지 않아도 통한의 아픔과 나아가지 못하는 자의 슬픔을 몰입하여 전달해 준다. 이러한 모든 문장들이 합해지고 더해져 비로소 인간 이순신으로 대면하게 되는 순간의 기쁨을 우리는 접하게 되는 것이리라.

 

이처럼 장면 장면 펼쳐지는 인간적인 모습은 이순신 장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밑바탕이 된다. 자신의 셋째아들 면의 안타까운 죽음에서 드러내지 못하는 슬픔을 통해서도 그렇고 가뭄과 적의 약탈로 굻어 죽는 이가 속출하는 과정에서도 자신들의 주린 배를 채우는 역설적인 상황에서도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이해할 수 있다. 비록 가설적 상황이 주는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충분히 짐작 가능한 대목이기에 공감의 효과는 더욱 극대화된다. 이순신 장군이 왕(선조)의 정치적 상황에 춤추는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끼고 명나라의 간교한 참여를 통한 탐욕적인 속내에 혐오를 공유하게 만든다. 또한 김훈 선생은 후각적 채취의 정서적 교류를 극대화시키는 작업을 잊지 않았다. 아들 면의 비릿한 젖내음과 연민의 정으로 품었던 여진의 젖국냄새, 아궁이처럼 솎아 붙은 어미의 채취를 통해 인간미를 더욱 진하게 우려낸다.

 

벨 수 없는 것과 벨 수 있는 것의 경계는 삶과 죽음의 변주다. 전쟁의 상황은 오직 죽음과 삶만이 교차한다. 이순신 장군은 필사즉생이면 필생즉사의 심정으로 극한의 순간을 견뎌냈다. 적에게 다가 서지 못하는 번민의 심경을 칼에 새겨 오염된 조국의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려는 염染의 절박함은 겪어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생경함이다. 긴장의 고삐를 놓을 수 없는 순간을 마치 그 계통의 무모함을 이해하려는 포용의 심정이다. 이렇듯 이 책을 아우르는 인간적 채취는 인간을 매료시키고 실존적 고뇌를 이해하는 대작임에 틀림없다. 칼의 몸부림을 통해 '징징징' 울리는 서슬 퍼런 소리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오롯이 담겨 숨 쉰다. 인간의 유약한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를 푸는 열쇠를 찾기 위해 무단히 고뇌하던 성웅 이순신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상념하게 된다. 그러하기에 이 책,<칼의 노래>는 남겨진 자가 먼저 간 이에게 바치는 노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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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0-01-28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전, 칼의 노래 이 첫 문장을 저~얼~대 잊을 수 없습니다. 소설 문장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라는 충격을 받은 이래 김훈이라면 누가 뭐래도 신뢰합니다. 그가 마초든, 허무주의자든, 방관주의적 밥벌이주의자든...
그나저나 코스모스 배달되어 왔던데 기겁할 뻔 했어요. 엄청난 두께더군요. 토론용으로는 무리이겠고, 덕분에 혼자 야금야금 파먹겠습니다.

穀雨(곡우) 2010-01-28 08:57   좋아요 0 | URL
김훈 선생님의 저 첫문장이 모두를 사로잡았더군요. 언어의 미학의 경지, 뭐 그런...^^
마치 시로 소설을 쓴 것처럼 말이지요. 전 학창시절 배운 김수영 시인의 <풀>을 대하는
느낌처럼 그렇더군요.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이야기 속 곳곳에 배치된 김훈선생의 필력이 무엇인지, 이번에 새삼 느꼈지요.

아, 코스모스가 두께감이 있다는 말씀을 제가 드리질 못했군요. 제가 괜히 일만 번거롭게 만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번은 읽어봄직하기에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시길....^^

 
코스모스 - 특별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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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의 깊음을 흠모하고 그 알 수 없는 존재감에 빠져 들지 않은 이가 있을까? 점점이 매달리 듯 박힌 억겁의 별들 사이로 상상을 쫓던 기억이 아득하기만 하다. 인간이 어디서부터 생겨났든 어디로 흘러가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의 힘은 인간을 우러르게 한다. 그런 광활한 우주를 이제야 보았다. 카오스의 격렬한 몸부림으로부터 촉발된 코스모스의 거대한 힘을 나는 이제야 보았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있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될 존재이며 나 또한 코스모스로 돌아 갈 가이아, 어머니의 품처럼 말이다. 

 

칼 세이건은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천문과학자다. 그가 이 책 <코스모스>를 통해 보여 준 업적은 베일에 싸인 우주의 비밀과 인간의 존재의미를 전 세계로 전파시켰다.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열기가 식을 기미조차 없다. 마치 수소의 핵융합반응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통해 남은 재에서부터 인류가 기원되었다는 진실처럼 놀라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칼 세이건이라는 석학의 손을 통해 인류는 우주를 향한 발걸음을 진일보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코스모스>는 지난 1976년 텔레비젼 프로그램으로 기획되어 전 세계 60개국, 6억 명의 시청자를 끌어 모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우주개발이라는 시대적 사명에 부흥했던 것도 이유겠지만 우주의 발생에서부터 인류의 기원에 이르기까지 전 방위의 학문적 제 영역을 넘나들며 아우르는 방대함에 열광했던 것이 주효했다. 실제 당시의 미국과 구소련의 우주프로젝트는 정치적, 경제적 함수를 포함한 외부적 압력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군비경쟁을 위한 구실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우주개발계획은 일정부분 정치적 압력아래 있었다. 이러한 외부변수에 의한 변질된 상황을 획기적으로 바꾸고 인식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게 된 큰 길라잡이가 바로 <코스모스>다. 인간을 이해하고 우주를 경영할 책을 꼽는다면 단연 이 책이다.

 

코스모스는 카오스의 반대어다. 질서와 혼동은 양날의 검처럼 공세와 수세를 함께 도모한다. 명멸할 듯 꺼지는 별의 최후는 초신성으로 분해 신명의 빛을 토해 낸다. 유는 무로 바뀌고 무는 다시 유로 변환한다. 힌두교의 진언처럼 영원한 억겁의 순리처럼 순환되고 반복되는 체계적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 곧 코스모스다. 이처럼 지극히 완벽한 상태를 추구하려는 코스모스를 칼 세이건은 힌두교의 사상에서 해답을 구했다. 아무것도 없던 암흑의 저 편에 대한 추적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진다.

 

때문에 인간은 하늘을 경외하고 신의 영역으로 격상하려는 노력을 현재도 진행 중이다. 칼 세이건은 종교를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으나 우리가 모르는 차원의 존재의미를 열어 두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유물론의 기저 또한 미답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넘기는 윤활유 역할을 해 주며 우리를 끝없는 우주의 바다로 인도한다. 이에 더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더욱 매력적인 이유는 유려한 글쓰기에 있다. 영혼에 호소하고 인간이 밝힌 모든 것들에 겸손함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글쓰기는 천부적 능력에 다름 아니다.

 

책은 전체 13부로 나뉘어 TV시리즈물과 궤를 같이 하였다. 우주의 시원(始原)을 통해 천체의 모습, 행성과 별의 식별, 태양계의 생성, 생명의 출현, 우주의 진행, 별의 생애 등을 상세하고 유기적으로 풀어 차근차근 나열하여 알기 쉽게 설명하였다. 책을 통해 칼 세이건은 과학하기의 존재의미를 부각시키고 인간을 향한 계몽의식을 제고하기를 강력하게 희망하며 호소한다. 케플러의 법칙을 통해 견고하기만 하던 우주의 빗장이 스스로 풀려 버린 것처럼 칼 세이건은 인간이 코스모스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알려진 유일한 존재에 감사하고 겸허함을 도모하기를 바란다.

 

인간이 진화의 대변혁을 거쳐 완성된 유일무이한 종임에는 틀림없다. 그 근본이 어디에 가 닿든 현재의 인간이 미래의 또 다른 진화의 시계에 어느 종보다 앞서는 것은 사실이다. 우주력에 비한다면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겠으나 그동안 인간이 폭발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현재를 이룩한 성과는 주목할 만한 결과치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인간이 앞으로 밝혀 내야할 영역 또한 무한하다는 것도 미래를 불가해한 영역으로 내모는 미지의 영역과 같다. 이러한 심연과도 같은 인간의 미래를 칼 세이건은 이제 시작된 인간의 무한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우리는 더욱 전문화되고 체계적인 접근과 방법으로 미지의 세계를 정복해 나갈 것이며 그 중심에 인간의 뇌가 촉수처럼 가동되는 우주선의 사령탑이 될 것이다.

 

칼 세이건은 과학자이기 이전에 민주주의의 신념을 믿고 환경의 소중함을 부르짖던 철저한 환경주의자였다. 인간이 코스모스로부터 발견하고 발명한 기계화로 인한 지구 온난화를 치유하는 길이 급선무임을 설파하였다. 또한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극단을 치닫는 위험천만한 행동을 누구보다 우려하였다. 그러한 우려를 반증하듯 2001. 9. 11. 테러사건은 인류의 삶을 벼랑으로 몰고 그 상황을 악용하는 정치적 시도는 지금껏 쌓아 온 성과를 무참히 짓밟는 행위임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불을 다스리고 빛을 넘어서며 중력을 극복하는 과학의 혜택도 인간을 향하는 무자비한 살육도구와 뿌리가 같음을 칼 세이건은 염려하였다.

 

어찌 보면 인간은 자신이 만든 제도와 규범 속에서 지리멸렬한 투쟁을 계속 이어 나가는지 모른다.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를 통해 드려다 본 진실의 정체도 인간의 이중성에 방점을 찍는다. 인간이 수천 년을 이어 온 압력과 탐욕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었던 것도 인간이기에 가능했다. 우주 혼돈의 순간에 심연을 떠돌던 티끌이 모여 터지고 식기를 반복하면서 탄생된 지구도 그 숙명의 과업을 시나브로 이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인류가 지워져 버린 무지의 천년을 극복하고 일보후퇴 이보전진의 기치를 이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수천억 개가 넘는 별을 거느린 우주에서의 정체성을 찾을 날이 오지 않겠는가. 이 모든 순간을 칼 세이건은 바랐고 이 책이 앞으로도 생명력을 잃지 않을 원동력이다. 

 

이 책을 과학도서로 묶어 두기에는 그 가치나 위용이 너무도 찬란하다. 우주를 이해하기를 원하고 인간이 무엇인지를 되새기기 위해서는 이 책에게 묻는 것이 선답(先答)이겠다. 그리하여 시대착오적인 색깔론으로부터 하루 빨리 벗어 나는 길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급선무다. 해서 인류의 대승적 통합과 융합을 통한 상생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21세기를 살아 가는, 방향이자 지향점이다. 이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이 책에 해답이 있음은 중언부언임은 두말할 나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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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0-01-21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 글쓰기 굉장히 정제되어 있어서 볼 때마다 부럽습니다. 그나저나 이 책 토론도서로 활용해도 될까요? 주부들 상대로 부담스러울까요?

穀雨(곡우) 2010-01-21 23:03   좋아요 0 | URL
정제되어 있다는 말씀이 왜 이렇게 낯선지요. 어느 늙은 작가가 그러더군요. 쓰고 뭉개기를
골백번을 더해도 미덥지 않은 것이 자기의 거친 글이라고 말이지요. 전 여태껏 제 글에 잔뜩
묻은 무거움을 빼려 노력하지만 너무 힘이들더군요.

그리고 이 책이 어느 단체, 누가 선정한 우수도서라서이기보다 접근대상의 호응도가 더욱
중요할 것이라 보이는데요. 주부이기 이전에 인간을 탐구하고 배운다면 전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7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속에 먼 별나라 이야기만 가득하다면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흥미를 반감시킬겁니다. 그러나 이 책은 물리학, 기하학, 생물학, 유전자학,
인류학, 천체학, 화학 등 두루두루 그 깊이를 넘나드는 옹골짐이 좋습니다.

아울러 세이건의 탐나는 글쓰기의 전형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에 읽는 재미도 더욱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전 천천히 아주 꼭꼭 씹어서 읽었습니다. 제겐 좋았습니다.

2010-01-22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2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