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불가피한 경우를 자주 종종 만난다. '불가피'란 인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나 피할 수 없는 현상을 이름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가피한 이유를 아는지 모르는 지 그 쓰임새가 두루두루 쓰임을 발견하곤 한다. 확고부동한 진실처럼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음을 묵시적으로 과시하며 불가피함을 연실 남발해대니 말이다. 불가피의 틈바구니에서는 개념도 상식도 이미 소용불가다. 불가피하다는 무적의 괴물만 잘 이용하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아주 쓸모가 넘치는 유용한 단어다. 과연 불가피를 회피나 주장의 관철을 위해 통용되는 부연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C팀장은 평소 자기주장이 강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성격이 일방적이다 보니 충돌이 잦은 것은 다반사다. C팀장은 의견이나 견해를 상대에게 전달할 때 상황의 불가피성을 자주 들먹인다. 자꾸 듣다보면 그 불가피란 단어가 주는 의미에 대해 모종의 적개심마저 솟구친다. 윗사람이다 보니 부하 직원에게 궁색한 설명이나 중언부언은 자존심에 상처를 줄 것이 뻔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입에 붙은 것이 불가피애찬론이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이처럼 갑갑한 상황을 한번 즈음 겪지 않은 사람이 드물지 않을까.
소통은 상대방과의 사이를 연결하는 상호교류다. 의견이나 주장이 대립될 때 조율과 이해를 통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의견이 도출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비록 상대가 자신의 지위보다 낮거나 경험이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누가 봐도 최선의 결과를 얻을 답안이라면 수용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인지 모르겠다. 인간관계의 가장 난제는 바로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깨우치는 것이 우선이니 말이다.
2010. 2월의 첫 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는 2명의 수장이 출근하는 웃지 못 할 기현상이 벌어졌다. 초유의 사태다. 세상에 이런 일에 제보해도 될 일이다. 이것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 주소라면 확대비약일까. 누가 뭐래도 이 사태의 주인공은 유인촌 장관의 불가피한 선택의 결과다. 유인촌 장관의 입장에서는 그랬을 터다. 누가 봐도 속이 훤히 내비치는 전형적인 코드인사의 수순이다. 그렇다고 인사권을 거머쥔 권력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포장하기에는 이미 수위를 넘어섰다. 노무현 정권에 맞는 코드인사를 잘라 내 버리고 싶은 것이 당연했을 것이나 해임에 상당한 사유 없이 내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업의 연속성과 일관된 방향성을 위해서도 그렇고 이렇다 할 재론의 여지가 없다. 금번 법원의 판결이 해임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의미이기 이전에 상식의 눈으로 판단해 보면 그 해답은 자명하다. 이제 문제는 해임 효력정지에서 복귀한 돌아온 탕아 김정헌 위원장과 현재 오광수 위원장의 손을 떠나 유인촌 장관의 결자해지로 상태로 회귀한다.
권력이 오만해지고 위선을 일삼으면 민심은 금세 알아챈다. 권력을 무소불위의 만능쯤으로 치부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결과를 야기하는 화약고에 다름 아니다. 한비자는 권력과 능력을 혼동하지 말 것을 이야기했다. 마부 제치고 말을 모는 리더는 이미 소명을 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리더로서 문제의 불가피함을 강론하기 전에 외부의 목소리에 경청해야 한다. 경청은 상호소통을 위한 첫 번째 단추이며 그 출발점이다. 제 아무리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을 일삼을지라도 상대방의 사정을 이해하고 감안한다면 그 간극의 폭이 절로 보인다. 그 이후에 더 나은 개선방향을 찾는 것이 온당한 처사지 불가피함에 기대어 권력의 발톱을 숨기는 것은 위선이다.
인간관계라는 맥락에서 보면 불가피는 상대방의 소통과 의견을 차단하는 단절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상황을 통해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인지상정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불가피의 범위를 확대해석해서는 곤란하다는 의미다. 불가피의 영역을 넓히면 넓힐수록 개선되거나 바뀔 수 있는 상태도 고착화되고 불가변의 영역으로 스스르 빠져 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불가피한 상황은 스스로 만드는 인위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자존심을 구기고 체면에 조금 오점을 남기더라도 교묘한 속임수보다 서투른 진실함이 더 기억에 오래 남는다. 진실함은 상황을 개선하는 관계의 연결통로다. 변화의 시작은 이처럼 사소한 용기에서부터 출발해 서서히 전이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불가피함보다 가능함으로 바꿔야 되지 않을까. 결국 긍정의 힘이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