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대지의 꿈 - 장 지글러, 서양의 원죄와 인간의 권리를 말하다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빈곤은 결핍에서 오는 외부로부터의 위협이다. 그러나 빈곤은 공평하지 못하다. 대물림되는 빈곤의 대다수가 특정한 곳에 집중된다. 대대손손 빈곤의 망령은 삶을 공허하게 하고 불확실한 세상으로 물들게 한다. 상대적 빈곤이나 주관적 빈곤은 논외로 하더라도 절대적 빈곤은 삶을 공포로 내 몬다. 이러한 절대적 극 빈곤자 층의 대다수가 남반구에 산다. 적도 이남에 위치한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에 위치한 소외된 인간들이다. 이들 국가들은 풍부한 천연자원과 농경지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굶주림에 허덕인다. 그들이 굶주리는 이유에 대해 우리는 알량한 민족성을 들먹인다. 그들에게 펼쳐 진 고통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숙명처럼 부여된 가난과 결핍의 고통을 우리는 상대적 차별에 의한 결과로 포함하고 도외시한다. 이러한 모든 외면은 어디로부터 연유하는가?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짐승보다 못한 삶의 아픔은 누구로부터의 시작인가? 

 




       우리는 알게 모르게 북반구의 중심, 서양세계의 지배를 받고 산다. 문명의 근원지가 모두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다는 우월감과 서양의 선민의식이 지배와 피지배로 나누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서양이 벗어 던진 야만성과 폭력의 광기는 식민 지배를 더욱 단련되고 완고한 무자비함으로 강화되어 연결되었다. 이로써 피와 광기로 얼룩져 가려진 역사의 이면은 문명의 충돌에서 살아남은 이긴 자의 몫으로 내어 주었다. 그 단 한 번의 처절한 패전의 도륙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불합리를 유발했다. 5백 년여 동안 끈질기게 유린당한 인권은 현재도 서양에 의해 쥐락펴락하는 믿기 힘든 현상이 오늘도 자행되고 되풀이된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이 책 <빼앗긴 대지의 꿈>은 삶의 터전을 상실해 꿈을 잃어버린 암울한 현실을 반영한 르포르타주다. 저자 장 지글러는 <탐욕의 제국>, <왜 세상의 절반을 굶주리고 있는가>에서 신랄한 비평과 날카로운 문제제기로 서방세계의 가슴을 섬뜩하게 했다. 그의 연속기획물인 이 책도 동일한 맥락으로 이어진 빈곤에 대한 거대담론이다. 스위스 사회학자 출신인 장 지글러가 뿜어내는 서양의 원죄에 대한 재조명과 해석은 여태껏 알고 있던 역사서의 대부분을 새롭게 기술해야 될 지경에 이른다. 서양의 폭력과 무자비에 굴복당한 그들의 처참한 현장이 가려지고 지워진 현실처럼 폭력의 연대는 끈질기고도 무섭다.

 




      실제 이 책의 사례로 제시된 나이지리아와 볼리비아의 현실은 기존의 인간성에 대한 관념을 사그리 종식시킨다. 그 오염되고 가난이 짐승처럼 떠도는 현장은 서양의 무관용과 배타주의가 낳은 인위적인 참상이다. 서양은 자본주의라는 미명하에 자본과 기술의 우위를 앞세워 모든 것을 약탈한다. 그 배후에는 장하준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국제통화기금IMF, 국제개발은행IBRD, 세계무역기구WTO가 사악한 뱀처럼 도사리고 있다. 서양은 문명화라는 협박과 감언이설로 남반구의 나라를 꼬드겨 국영기업을 무장해제시켜 빼앗고 열악한 무역조건을 약탈적 관세를 내 세워 빈곤의 악순환의 끓을 수없는 사슬로 묶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양의 이 모든 약탈의 목적은 사악한 독이었다. 그들에게 빌린 자본은 그 옛날 선조들이 노예로 팔려 나가던 광기의 시절과 전혀 다를 없다는 진실이다. 산업의 균등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의 후진국에 대해 최첨단의 제품이 막강한 자본력을 토대로 밀려 와 썰물처럼 천연자원을 약탈해가도 넋을 놓기만 할 뿐 방도가 없다. 더욱이 자신들의 소중한 터전에서 일군 식량자원을 고스란히 약탈자들의 넘쳐나는 기름진 배를 채워주기 위한 탐욕의 도구로 희생되는 동안 그들의 자식들은 멀걸게 여윈 등가죽을 굽히고 불룩 솟은 세상 사이로 말라버린 눈물 한줌을 체념으로 게웠다. 파충류처럼 광산을 기어 하루 14시간 한달 내내 목숨을 담보로 엄청난 노동에 시달려도 돌아오는 것은 불과 푼돈에 불과하다. 

 

 

     이 모든 불공평은 서양의 탐욕이 낳은 구속당한 절망의 현실이다. 저자 장 지글러가 유엔인권식량조사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적나라하게 파헤친 믿기 힘든 어둠의 풍광이다. 이러한 현실은 지금도 자행되는 타인의 고통이다. 수잔 손택은 이 세계의 거짓된 이미지를 종식시키고 참된 이미지를 제대로 짚어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폭력과 잔혹함이 난무하는 현실은 거짓으로 달궈진 오만함의 산물이다. 서양의 정신분열증상도 편견에 사로잡힌 결과다. 아울러 타자로부터의 관계가 고착화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이유로 설명히 가능하다. 인권은 누구나 향유할 천부된 권리다.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인간의 불평등은 부자유스러운 것이며 진정한 인간의 본성과도 무관하다고 본 장 자크 루소의 철학처럼 인간은 모두 존엄하다. 프랑스가 탐욕의 광란에 도취될지라도 그 옛날 인권대선언의 정신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반전이 기가막힌 아이러니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인권은 모든 나라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분모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인권은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환원 불가능한 무엇, 다시 말해서 가치의 정수이며, 이를 통해서 우리는 모두 함께 우리가 단 하나의 인간 공동체를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P.124)

 

 

     남반구 대부분의 나라들은 서양세계의 손아귀에서 그들의 삶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서양세계가 만든 탐욕의 카르텔이 견고하게 뭉쳐 다져진 철옹성처럼 그들의 이권을 물샘틈없이 착취하는 동안 남반구의 나라들은 기아의 늪에 빠져 빈곤의 악순환에 허덕인다. 하지만 희망은 척박한 곳에서 움트기 마련이다. 볼리비아의 희망, 민선 인디오 대통령 에보 모랄데스의 등장은 탐욕의 사슬을 종식시키고 미래를 구원해 줄 소중한 등불이다. 그는 천박한 서양자본주의에 맞서 빼앗긴 영토주권을 회복하고 민족주의에 근거한 사회주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시대적 대통합을 이뤄 낸 그의 희망의 불씨는 기울어진 불합리한 현실을 복원하는 근원이 될 테다. 갖은 진통과 내홍을 견뎌 이겨 낸 사회적 합의는 진정한 인권의 희망을 쌓는 초석이 될 것이다. 비록 그 어둡고 긴 어둠의 터널을 건너야 하는 인고의 시간을 감내하여야 하겠지만 그 본질은 변질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정한 승리인지를 보여주는 인간성의 항체를 다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진실은 바로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불변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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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5-11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1권력과도 중첩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책이 더 많이 나오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남반구와 북반구 개념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그렇군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穀雨(곡우) 2010-05-12 09:07   좋아요 0 | URL
어떤 개념이나 이론의 충돌은 하나의 공통점을 지향하는 것 같습니다. 저두 이 책을 보면서 비슷한 내용이 곁치는 책들을 떠올렸습니다. 박노자님, 우석훈님, 장하준님 등등 읽을 책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손석희 스타일 - 우리 시대 모든 프로페셔널의 롤모델
진희정 지음 / 토네이도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손석희, 그로부터 세상을 본다.




        중국사기史記에 보면 현사가 세상에 처함에는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 같이 곧 그 인격이 알려지게 된다고 했다. 이는 낭중지추를 뜻한다. 감출 수 없는 예리함과 명민함. 우리 사회의 저명인사 중 부합되는 인물을 떠올린다면 단연코 손석희 교수를 나는 떠올리게 된다. 그의 차분하고 흐트러짐 없는 아우라에 이따금 압도되고는 한다. 그는 룰을 아는 사람이다. 게임의 법칙을 알고 사람을 조화롭게 하는 묘한 힘을 발산한다. 그가 주관하는 토론장은 물 흐르듯 완급이 절묘하다. 그래서 우리는 손석희를 추종하는지 모른다.




        이 책 <손석희 스타일>은 평전이 아니다. 손석희가 가진 역량과 일정한 틀에 집중하고 연구해서 하나의 패턴을 찾은 인물담론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미디어에 의한 영향력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의 됨됨이나 행동습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보편화된 현상이다. 이러한 인물탐구는 그 대상인물이 만들어 내는 강점에 주력하기도 하지만 사소한 하나의 행동들이 모여 패턴을 형성하는 과정을 찾는 작업이므로 쉽게 만나기 힘들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책을 본다면 손석희 교수에 대한 패턴분석 즉, 스타일은 우리 사회의 깨어 있는 지성인으로서의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하며 기준점이 되는 지침이 된다고 하겠다.




        실제 손석희는 알려진 바와 같이 허점이 없다. 허점이 없다는 사실은 냉철하게 보여 인간미를 반감시키게 하지만 그에게서의 완벽함은 다르게 해석된다. 일에 대한 정열이 스스로를 매진하게 만든 것이 주효한 이유다. 한편으론 재미없고 고리타분하게 비춰질지 모르지만 그는 흔들림 없는 목표의식이 분명하다. 그를 불태우고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바로 이러한 목표의식에서 나온다. 그것이 완벽함으로 이어지고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손석희가 깎고 다듬은 패턴에 대해 청량감 있는 문구로 시원스레 해갈시켜 준다.




        물론 손석희를 좋아하고 하지 않고는 개인의 취향이다. 그를 일정한 틀로 재단하고 규정하는 작업 또한 모순일지 모른다. 그는 지금도 변하고 나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가치는 블루오션과 같다. 그가 걸어 온 삶을 반추해 보아도 롤모델로서 손색이 없다. 불혹을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유학길에 올라 학문적 완성을 추구하는 결단력은 어지간한 의지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시간이 형성하는 무게감과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결정하기에 앞 서 시기와 때를 저울질하고 논한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손석희교수가 감당했을 무게감은 상당했으리라. 현재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변화를 추구하는 그의 강단한 용기와 소신이 그를 우리에게 영원한 엘리트로 인식하며 포스트 손석희를 만드는 원형이겠다.




        손석희 교수는 ‘적당히’를 거부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적당주의에 일침을 가하는 그의 분명한 의식의 바탕은 Here&Now,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 한다는 일관된 자세다. 또한 잘 하는 것에 역량을 쏟았기에 강점이 분명하다. 선택과 집중은 거창함이 아닌 사소함에서 부터다. 부유하는 무리 속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찾고 집중하는 그의 면면은 청정한 선비정신처럼 다가온다.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비판세력에게서도 구실이나 명분을 제공하지 않는 것도 이와 같은 연유에서다.




〈100분 토론〉의 경우, 방송 400회를 넘기면서 많은 시청자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토론’이라는 포맷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되도록 물 흐르듯 진행할 수 있도록 노력해 온 손석희의 노력이 클 것이다. 시청자들은 토론 참가자들이 자신의 의견을 대변해주길 바라기도 하고, 때로는 참가자들의 말에 설복되기도 한다. 결국 토론 역시 커다란 의미에서는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소통의 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 24 토론의 팔 할은 경청이다 중에서 >




        이렇듯 손석희 교수로부터 세상을 본다.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잡는 오뚝이처럼 카리스마가 넘치는 그의 스타일에 매료된다. 끊어 넘치는 열정이 무엇인지, 일에 대한 프로페셔날리즘이 무엇인지 그로부터 찾을 수 있다. 어김없는 시각에 하루를 명쾌하게 열어 젖혀주는 그의 당당한 진행으로부터 막힌 가슴이 시원하게 뚫린다. 그의 건강하고 살아 움직이는 칼칼한 비판을 통해 우리 사회는 점 점 더 좋아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는 소외받은 자들의 대신해서 소통해 주는 영원한 대변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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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 - 자라지 않는 아이 유유와 아빠의 일곱 해 여행
마리우스 세라 지음, 고인경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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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편적인 것은 때론 사물을 둔감하게 만드는 성질의 집합이다. 어찌 보면 나와 너와의 외형적인 차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인간으로서의 본질적 위안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타자의 불편을 고스란히 함몰시키고 마는 부조리를 생산한다. 누구나 그러하리라는 무모한 믿음으로부터 말이다. 만약 분신처럼 여겨지는 자신의 아이가 선천적인 장애나 기이한 질병을 타고 나 기한부의 삶을 살게 된다면? 그 충격은 어떠할까?




        체험하지 못한 상상은 현실과는 판이하고도 처절하게 다르다. 그들의 고통과 내가 처한 고통의 비교는 차원이 다르며 교차점이 없다. 오로지 평행선이다. 건너지 못한 강 저편에 남겨진 자들에 대한 연민이나 불편한 슬픔만이 남는다. 그렇지만 사람에게는 절망에 굴복당하지 않는 힘이 내재되어 있음을 나는 믿는다. 나의 아이가 남과 다른 삶을 살지라도 그 아이는 바로 나의 사랑이다. 사랑은 체념을 희망으로, 아픔을 기쁨으로 만들어 주는 오직 사람에게만 천부된 특권의 산물이다. 사랑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유일한 처방약에 다르지 않다. 




        이 책의 저자 마리우스 세라는 유유를 소명과 헌신으로 키웠다. 자전적 소설로 바꾸어 놓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실화에 근거한다. 직접 경험하였다는 사실은 독자와의 유대감을 높이는 구실이 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작가가 겪었을 지워지지 않는 시간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 공유하게 하는 일종의 커다란 연대의식으로 뭉치게 하는 작용을 한다. 이와 같이 작가의 두 번째 아이, 유유는 병명을 진단할 수 없는 선천적 난치병을 앓다가 바람처럼 하늘로 갔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부모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얼마나 시리고 아팠을까?




        유유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하고 걷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를 못하며 전신이 뒤틀리는 고통에 힘겨워 해도 숨을 들이 마시고 쉰다는 의미는 같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은 변함이 없다.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희로애락이 빗은 감정의 중추를 유유라고 다르겠는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다. 차별은 나와 다르다는 드러난 현상을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재로 바꿀 때 위험해 진다. 이것은 착각이라는 헐거운 사실로 포장할 수 없으며 존재가치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비록 다르다는 것으로 그들의 자유와 행복이 밀려나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행정 용어로는 85퍼센트의 장해를 지닌 장애인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이런 모든 꼬리표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누가 뭐라 해도 유이스는 나의 둘째 아이다. 그 애한테는 조금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몸이 약한 아들을 돌보는 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매달린다는 뜻이다. 우리 부부와 딸아이는 유이스가 15퍼센트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절대 포기하지 않고 돕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항상 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대개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서문 中에서)




        하지만 세상은 어딜 가나 부조리한 현실의 반영이다. 이 책의 배경이 되고 작가의 터전인 스페인의 까탈루나 지방 또한 다르지 않다. 장애에 대한 배려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그 자체로만 인식되지 못하는 불합리에서부터다.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지언정 차별의 시선은 원치 않는다. 이 책에는 이러한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고착화된 현실을 바라보는 보편적 관점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유유에게 자유로이 이동할 권리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세상을 품고 소통한다는 자체가 투쟁이었다. 오죽하면 반복되는 지독한 간질증상을 통해 자유를 꿈 꿨겠는가. 그 속에는 자유를 갈망하는 한 생명체의 바람이 오롯이 녹아있다. 이처럼 유유의 꿈과 바람은 드러날 수 없는 장애로 뒤덮였다. 그러나 아버지 마리우스 세라는 평행한 다른 세상에서 아이의 장애를 제거했다. 바로 폴리스코프를 통해서. 폴리스코프는 손으로 넘기며 영상의 프레임을 구축하는 단순한 작업의 반복이다. 하지만 유유에게는 차원이 다른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다. 1차원에서 2차원으로 넘어서는 차원의 이동이다.




        가만히 조용히 폴리스코프를 뒤적이며 유유를 떠올리는 유쾌한 상상은 부모로서의 무력감을 치유하는 힘이다. 이러한 힘은 이 세상에 위대한 삶의 한 줄기 흔적을 남긴 유유의 궤적을 더듬는 기원이 될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유유는 나의 멋진 아들이었음을 상기시면서. 또, 아버지로서의 담대한 용기는 체념에도 굴하지 않는 숭고한 정신으로 생을 지배하는 근원이 될 것이다. 움직일 수 없는 유유와 함께한 세계여행은 손과 발이 되어 동행한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유유는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엄마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나는 아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나는 누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기에 나는 아무것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폴리스코프 中에서)





        기억은 시간 속으로 소멸되기 마련이다. 시간 속에서 벗어 난 기억은 불멸이 된다. 유유가 남긴 기억이 이로써 우리의 기억 속에는 불멸이 될 것이다. 천사와 같은 아이를 잠시 품었던 아버지 마리우스 세라와 그의 가족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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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세상 - 위기의 시대를 좌우할 열쇳말
박성민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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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에 경계는 불안이다. 불안의 징후는 어디에든 존재한다. 불안의 골이 깊을수록 세상은 더욱 비열해진다. "불안은 삶의 조건이며 삶은 하나의 욕망을 또 다른 욕망으로, 하나의 불안을 또 다른 불안으로 바꿔가는 과정이다."라고 말하는 유쾌한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불안은 욕망의 또 다른 존재인지 모른다. 이처럼 불안은 인간의 삶과 함께 뒹굴며 껴안고 살아가는 객체이다. 더욱이 21세기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념도 정치도 과학도 문화도 모두 불안하다. 마치 심연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둘러싼 불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더 나아가 불확실함을 추동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이 책은 이러한 물음에 답한다. 불확실한 것의 개념을 확실의 범주로 끌어내려 원인이라는 씨줄과 결과라는 날줄로 치밀하게 엮었다. 정치, 사회, 경제, 종교, 과학의 인식 있는 건강한 생각의 총합이 이 책으로 귀결된다. 결국 불확실을 통해 확실로 나아가는 지혜를 찾는 대항해에 비유된다. 이러한 각기 다른 제 분야의 공통점을 하나의 요소로 묶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념의 중추를 이끄는 알고리즘이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작용하지 않는 이상 그 전제는 취약해 진다. 그래서 10명의 각 분야의 석학들이 모여 불확실성을 치유할 키워드를 찾고자 생각을 모았다. 그들이 고민하고 숙고한 흔적의 결과물이 바로 이 책 <불확실한 세상>이다.

 

        현대 사회에서 한 개인의 사회적 지위는 그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가, 그리고 그의 돈이 얼마나 많은 권력을 보장해주는가로 측정되어 진다. 그래서 권력은 계층을 생산하고 계층은 또 다른 계급을 만든다. 이러한 계급화 사회는 우리 사회를 누르는 압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책은 우리의 정치현상을 꼭 이와 같이 그린다. 우파와 좌파에 대한 본질, 이해관계에 얽힌 집합체, 명분을 중시하는 오염된 정치세력 등 정치의 오랜 불신을 모두 담는다. 아마 파벌현상은 인간이 사회를 만든 그 시점부터 생겼으리라. 그것이 건전한 견제와 건강한 이념을 유도하는 교집합이 된다면 이상적인 모습이겠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어디 그럴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 사회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주범으로 이 책이 지목한 정치의 혼탁은 본질에 대한 정체성과 직결된다. 정체성은 우리의 존재가치를 일깨우는 방증이자 체제를 유지시키는 견인차가 된다. 그것은 또한 불평등을 제거하는 평등의 산물이며 인간답게 하는 삶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박성민 대표가 말하는 가시거리의 이론은 실로 적절한 비유다. 정치의 출발이 무엇인지 절로 묻게 된다.

 

        경제 또한 서양의 자본주의의 압력에 정치만큼 불확실하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통제된 경제시스템은 다수의 노동을 통해 소수가 착취하는 기현상을 낳았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면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이 발판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그것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제국주의의 폭압과 식민화를 통해 일궈진 부의 기틀을 서양은 오롯이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발주자로 뛰어든 우리 경제가 그들과의 경쟁에서 불확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그것에 있다. 그들이 주창하는 경쟁의 미덕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며 비열함을 감춘 부정의 소치다. 결국 저자들이 지적하는 정보화를 통한 분배의 양극화, 비효율성, 경제테크놀로지는 이미 그들로부터 비롯된 체제의 오류와 다르지 않다. 브랜드화를 부추기고 소비를 미덕이라고 삼는 기회의 개방은 유리 막처럼 차단된 모두를 서민화시키는 첩경인지 모른다. 이러한 위험으로부터의 안전판이 바로 공공복지다. 복지는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누릴 사회적 담보장치다. 그러나 우리 현재 복지정책은 역주행을 신나게 한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전차처럼 말이다.

 

        아울러 우리 사회는 종교에 대한 배려나 너그러움이 혼재이다. 맹목적인 광신도나 종교근본주의자가 희박한 토양에서 이러한 현상은 국제적으로도 이례적이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사회와의 밀애는 그 어느 곳보다 뜨겁게 달아 오른 곳 또한 우리 사회다. 종교의 본질은 차치하고라도 종교가 하나의 기업화로 관변단체로 이행한다.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종교는 성스러움을 최고 가치로 삼고 불안한 인간을 보듬는 안식처와 같은 존재다. 무신론자가 넘쳐나는 현재의 한국사회에 그들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는 이념의 물경화다. 물신주의가 만연하는 세상에서 종교적 선을 추구하기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더욱이 종교의 본질이 위협받는다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종교는 인간의 불확실성을 근접한 거리에서 위무하는 유일한 개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끝으로 세계화가 되면서 나타난 현상 중 과학의 대중화와 정보기술의 발달을 꼽을 수 있다. 그 중 과학과의 연계는 직접적이고 빠른 전이가 특징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변화에 인간은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흡수되거나 도태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다. 세기말부터 지속된 바이러스의 전파는 그러한 사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질병의 과학적 불확실성이라는 특성은 양날의 칼과 같다. 따라서 어떠한 원칙을 가지고 위험에 대처하느냐가 공중 보건의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는  강양구 기자의 지적처럼 우리는 정보의 비대칭성과 싸워야 하는지 모른다. 정보의 독점화로 인해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고 다국적 제약회사와 결부된다면 신종플루나 조류독감의 위험성마저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21세기가 생산한 우경화는 집단 무의식 속에 위험을 담보로 우리는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또 이밖에도  지구 온난화의 실체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 불확실성을 포섭한 과학과 수학의 관계에 대한 논제는 우리 모두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의 눈과 귀를 통해 추적된 불확실은, 궤적의 평행선을 뚫고 그려 나아가 그 선상의 대척점으로부터 순항하며 영원불멸의 뫼비우스의 띠처럼 긴박하게 우리를 향한다. 그들이 바라 본 세상의 불확실은 다름 아닌 모두의 불확실로, 어김없는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확실의 요체는 확실이라는 상태를 통해 단련되어 지며 긴장의 순간은 더욱 바싹 고삐를 조여 옴을 알게 된다. 집단최면으로 얼룩진 불안한 이념의 동요가 계몽된 이성의 지각위에 우뚝 서는 그날까지 우리는 희망하는지 모른다. 타락한 천민자본주의가 세상을 취하게 하고 어지럽게 하여도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현재의 가치로 변함없다. 맨틀의 거대한 움직임처럼 나아가고 움직인다는 만고의 진리처럼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돌고 돌며 불확실이 확실로 확실히 불확실로 바뀌는 역전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을 동력삼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불확실성으로 뭉친 확실성의 길을 나아간다. 오늘도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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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로부터 곡우는 24절기 중 양력 4월 20일을 말하는 데, 이 날은 청명과 입하 사이에 있어 곡우에 비가 내리면 백곡을 기름지게 한다는 조상들의 기원의 염원이 담긴 소중한 날입니다.

 



                                        출처 : 문화저널 21 그림 이무성 

        제가 블로그 닉네임으로 곡우를 사용한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엄혹한 자연의 힘에 선조들은 조화와 상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슴으로 알았습니다. 한낱 제의적 성격을 담은 소망의 분투이지만 절기로 나누어 일의 시작과 끝을 한결같이 하고자 하였던 소박하지만 너른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 중 곡우는 곡식을 뿌리고 대지가 품은 생명의 기운에 단비를 내려 보우하는 희망이 잉태하는 첫 시발점과 같다고 여겨집니다.

 

        따지고 보면 사람 사는 것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닮았나 봅니다. 그 때나 시기에 맞춰 해야 할 도리와 갖추어야 할 인격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것이 모자라거나 넘쳐도 안 됨은 일러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과유불급이라는 말은 돋을 새긴 글씨처럼 우리의 마음을 돌보게 하는 경구입니다. 아울러 사람은 품은 마음이 무엇이냐에 따라 세상도 바뀌고 모양도 변하는 것이 꼭 자연을 빼어 닮았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뜻하지 않게 부딪히는 고난의 순간도 한 순간 순간 마다 내디딘 발자국의 의지만큼 나아갈 용기를 부여하는지 모릅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에 있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풍파 없는 항해! 얼마나 단조로운가?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뛴다."라고 인생을 조망했습니다.  

 

        때로는 매너리즘에 빠져 때로는 고통에 허덕일지라도 인생은 살아 볼 가치가 더 있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곡우의 참뜻인 풍년을 기원하던 소박한 농부의 마음처럼 세상을 좀 더 여유롭게 보는 마음을 가져 보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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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4-20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곡우님! 오늘 다이어리 보다가 곡우라고 적혀 있어 곡우님께 축하드려야 겠다고 생각하고 들어오니 이 글이 있군요. 축하드립니다. 절절한 기다림끝에 단비. 기다림도 그 자체로 의미를 간직할 수 있어야 하는게 인생이겠지요. 올 한해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穀雨(곡우) 2010-04-21 09:43   좋아요 0 | URL
ㅎㅎㅎ 타인의 축일에 꼽사리 하는 것 같군요. 블랑카님도 행복하시기를...^^

순오기 2010-04-24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의 '곡우'가 이거였군요.^^

穀雨(곡우) 2010-04-26 09:11   좋아요 0 | URL
네, 제 곡우가 바로 그 곡우...^^

비로그인 2010-08-06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곡우님~~
제가 태어난 날이 '곡우'입니다.
이런 기막힌 우연이!
ㅎㅎ달력엔 '장애인의 날'이 늘 붙어다니죠.
그런 단비같은 사람이 되려 늘 노력합니다만 성정이 의욕에 못미칩니다.
즐건 하루 보내세요^^

穀雨(곡우) 2010-08-06 13:12   좋아요 0 | URL
와우, 좋은 날 태어나셨네요. 노력하는 것만한게 있을까요...^^
그 마음만으로도 벌써 단비같은 사람입니다. 마기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