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세상 - 위기의 시대를 좌우할 열쇳말
박성민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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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에 경계는 불안이다. 불안의 징후는 어디에든 존재한다. 불안의 골이 깊을수록 세상은 더욱 비열해진다. "불안은 삶의 조건이며 삶은 하나의 욕망을 또 다른 욕망으로, 하나의 불안을 또 다른 불안으로 바꿔가는 과정이다."라고 말하는 유쾌한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불안은 욕망의 또 다른 존재인지 모른다. 이처럼 불안은 인간의 삶과 함께 뒹굴며 껴안고 살아가는 객체이다. 더욱이 21세기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념도 정치도 과학도 문화도 모두 불안하다. 마치 심연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둘러싼 불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더 나아가 불확실함을 추동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이 책은 이러한 물음에 답한다. 불확실한 것의 개념을 확실의 범주로 끌어내려 원인이라는 씨줄과 결과라는 날줄로 치밀하게 엮었다. 정치, 사회, 경제, 종교, 과학의 인식 있는 건강한 생각의 총합이 이 책으로 귀결된다. 결국 불확실을 통해 확실로 나아가는 지혜를 찾는 대항해에 비유된다. 이러한 각기 다른 제 분야의 공통점을 하나의 요소로 묶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념의 중추를 이끄는 알고리즘이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작용하지 않는 이상 그 전제는 취약해 진다. 그래서 10명의 각 분야의 석학들이 모여 불확실성을 치유할 키워드를 찾고자 생각을 모았다. 그들이 고민하고 숙고한 흔적의 결과물이 바로 이 책 <불확실한 세상>이다.

 

        현대 사회에서 한 개인의 사회적 지위는 그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가, 그리고 그의 돈이 얼마나 많은 권력을 보장해주는가로 측정되어 진다. 그래서 권력은 계층을 생산하고 계층은 또 다른 계급을 만든다. 이러한 계급화 사회는 우리 사회를 누르는 압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책은 우리의 정치현상을 꼭 이와 같이 그린다. 우파와 좌파에 대한 본질, 이해관계에 얽힌 집합체, 명분을 중시하는 오염된 정치세력 등 정치의 오랜 불신을 모두 담는다. 아마 파벌현상은 인간이 사회를 만든 그 시점부터 생겼으리라. 그것이 건전한 견제와 건강한 이념을 유도하는 교집합이 된다면 이상적인 모습이겠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어디 그럴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 사회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주범으로 이 책이 지목한 정치의 혼탁은 본질에 대한 정체성과 직결된다. 정체성은 우리의 존재가치를 일깨우는 방증이자 체제를 유지시키는 견인차가 된다. 그것은 또한 불평등을 제거하는 평등의 산물이며 인간답게 하는 삶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박성민 대표가 말하는 가시거리의 이론은 실로 적절한 비유다. 정치의 출발이 무엇인지 절로 묻게 된다.

 

        경제 또한 서양의 자본주의의 압력에 정치만큼 불확실하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통제된 경제시스템은 다수의 노동을 통해 소수가 착취하는 기현상을 낳았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면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이 발판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그것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제국주의의 폭압과 식민화를 통해 일궈진 부의 기틀을 서양은 오롯이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발주자로 뛰어든 우리 경제가 그들과의 경쟁에서 불확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그것에 있다. 그들이 주창하는 경쟁의 미덕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며 비열함을 감춘 부정의 소치다. 결국 저자들이 지적하는 정보화를 통한 분배의 양극화, 비효율성, 경제테크놀로지는 이미 그들로부터 비롯된 체제의 오류와 다르지 않다. 브랜드화를 부추기고 소비를 미덕이라고 삼는 기회의 개방은 유리 막처럼 차단된 모두를 서민화시키는 첩경인지 모른다. 이러한 위험으로부터의 안전판이 바로 공공복지다. 복지는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누릴 사회적 담보장치다. 그러나 우리 현재 복지정책은 역주행을 신나게 한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전차처럼 말이다.

 

        아울러 우리 사회는 종교에 대한 배려나 너그러움이 혼재이다. 맹목적인 광신도나 종교근본주의자가 희박한 토양에서 이러한 현상은 국제적으로도 이례적이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사회와의 밀애는 그 어느 곳보다 뜨겁게 달아 오른 곳 또한 우리 사회다. 종교의 본질은 차치하고라도 종교가 하나의 기업화로 관변단체로 이행한다.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종교는 성스러움을 최고 가치로 삼고 불안한 인간을 보듬는 안식처와 같은 존재다. 무신론자가 넘쳐나는 현재의 한국사회에 그들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는 이념의 물경화다. 물신주의가 만연하는 세상에서 종교적 선을 추구하기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더욱이 종교의 본질이 위협받는다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종교는 인간의 불확실성을 근접한 거리에서 위무하는 유일한 개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끝으로 세계화가 되면서 나타난 현상 중 과학의 대중화와 정보기술의 발달을 꼽을 수 있다. 그 중 과학과의 연계는 직접적이고 빠른 전이가 특징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변화에 인간은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흡수되거나 도태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다. 세기말부터 지속된 바이러스의 전파는 그러한 사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질병의 과학적 불확실성이라는 특성은 양날의 칼과 같다. 따라서 어떠한 원칙을 가지고 위험에 대처하느냐가 공중 보건의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는  강양구 기자의 지적처럼 우리는 정보의 비대칭성과 싸워야 하는지 모른다. 정보의 독점화로 인해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고 다국적 제약회사와 결부된다면 신종플루나 조류독감의 위험성마저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21세기가 생산한 우경화는 집단 무의식 속에 위험을 담보로 우리는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또 이밖에도  지구 온난화의 실체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 불확실성을 포섭한 과학과 수학의 관계에 대한 논제는 우리 모두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의 눈과 귀를 통해 추적된 불확실은, 궤적의 평행선을 뚫고 그려 나아가 그 선상의 대척점으로부터 순항하며 영원불멸의 뫼비우스의 띠처럼 긴박하게 우리를 향한다. 그들이 바라 본 세상의 불확실은 다름 아닌 모두의 불확실로, 어김없는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확실의 요체는 확실이라는 상태를 통해 단련되어 지며 긴장의 순간은 더욱 바싹 고삐를 조여 옴을 알게 된다. 집단최면으로 얼룩진 불안한 이념의 동요가 계몽된 이성의 지각위에 우뚝 서는 그날까지 우리는 희망하는지 모른다. 타락한 천민자본주의가 세상을 취하게 하고 어지럽게 하여도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현재의 가치로 변함없다. 맨틀의 거대한 움직임처럼 나아가고 움직인다는 만고의 진리처럼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돌고 돌며 불확실이 확실로 확실히 불확실로 바뀌는 역전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을 동력삼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불확실성으로 뭉친 확실성의 길을 나아간다. 오늘도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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