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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 - 자라지 않는 아이 유유와 아빠의 일곱 해 여행
마리우스 세라 지음, 고인경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보편적인 것은 때론 사물을 둔감하게 만드는 성질의 집합이다. 어찌 보면 나와 너와의 외형적인 차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인간으로서의 본질적 위안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타자의 불편을 고스란히 함몰시키고 마는 부조리를 생산한다. 누구나 그러하리라는 무모한 믿음으로부터 말이다. 만약 분신처럼 여겨지는 자신의 아이가 선천적인 장애나 기이한 질병을 타고 나 기한부의 삶을 살게 된다면? 그 충격은 어떠할까?
체험하지 못한 상상은 현실과는 판이하고도 처절하게 다르다. 그들의 고통과 내가 처한 고통의 비교는 차원이 다르며 교차점이 없다. 오로지 평행선이다. 건너지 못한 강 저편에 남겨진 자들에 대한 연민이나 불편한 슬픔만이 남는다. 그렇지만 사람에게는 절망에 굴복당하지 않는 힘이 내재되어 있음을 나는 믿는다. 나의 아이가 남과 다른 삶을 살지라도 그 아이는 바로 나의 사랑이다. 사랑은 체념을 희망으로, 아픔을 기쁨으로 만들어 주는 오직 사람에게만 천부된 특권의 산물이다. 사랑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유일한 처방약에 다르지 않다.
이 책의 저자 마리우스 세라는 유유를 소명과 헌신으로 키웠다. 자전적 소설로 바꾸어 놓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실화에 근거한다. 직접 경험하였다는 사실은 독자와의 유대감을 높이는 구실이 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작가가 겪었을 지워지지 않는 시간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 공유하게 하는 일종의 커다란 연대의식으로 뭉치게 하는 작용을 한다. 이와 같이 작가의 두 번째 아이, 유유는 병명을 진단할 수 없는 선천적 난치병을 앓다가 바람처럼 하늘로 갔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부모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얼마나 시리고 아팠을까?
유유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하고 걷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를 못하며 전신이 뒤틀리는 고통에 힘겨워 해도 숨을 들이 마시고 쉰다는 의미는 같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은 변함이 없다.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희로애락이 빗은 감정의 중추를 유유라고 다르겠는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다. 차별은 나와 다르다는 드러난 현상을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재로 바꿀 때 위험해 진다. 이것은 착각이라는 헐거운 사실로 포장할 수 없으며 존재가치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비록 다르다는 것으로 그들의 자유와 행복이 밀려나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행정 용어로는 85퍼센트의 장해를 지닌 장애인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이런 모든 꼬리표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누가 뭐라 해도 유이스는 나의 둘째 아이다. 그 애한테는 조금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몸이 약한 아들을 돌보는 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매달린다는 뜻이다. 우리 부부와 딸아이는 유이스가 15퍼센트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절대 포기하지 않고 돕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항상 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대개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서문 中에서)
하지만 세상은 어딜 가나 부조리한 현실의 반영이다. 이 책의 배경이 되고 작가의 터전인 스페인의 까탈루나 지방 또한 다르지 않다. 장애에 대한 배려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그 자체로만 인식되지 못하는 불합리에서부터다.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지언정 차별의 시선은 원치 않는다. 이 책에는 이러한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고착화된 현실을 바라보는 보편적 관점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유유에게 자유로이 이동할 권리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세상을 품고 소통한다는 자체가 투쟁이었다. 오죽하면 반복되는 지독한 간질증상을 통해 자유를 꿈 꿨겠는가. 그 속에는 자유를 갈망하는 한 생명체의 바람이 오롯이 녹아있다. 이처럼 유유의 꿈과 바람은 드러날 수 없는 장애로 뒤덮였다. 그러나 아버지 마리우스 세라는 평행한 다른 세상에서 아이의 장애를 제거했다. 바로 폴리스코프를 통해서. 폴리스코프는 손으로 넘기며 영상의 프레임을 구축하는 단순한 작업의 반복이다. 하지만 유유에게는 차원이 다른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다. 1차원에서 2차원으로 넘어서는 차원의 이동이다.
가만히 조용히 폴리스코프를 뒤적이며 유유를 떠올리는 유쾌한 상상은 부모로서의 무력감을 치유하는 힘이다. 이러한 힘은 이 세상에 위대한 삶의 한 줄기 흔적을 남긴 유유의 궤적을 더듬는 기원이 될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유유는 나의 멋진 아들이었음을 상기시면서. 또, 아버지로서의 담대한 용기는 체념에도 굴하지 않는 숭고한 정신으로 생을 지배하는 근원이 될 것이다. 움직일 수 없는 유유와 함께한 세계여행은 손과 발이 되어 동행한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유유는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엄마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나는 아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나는 누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기에 나는 아무것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폴리스코프 中에서)
기억은 시간 속으로 소멸되기 마련이다. 시간 속에서 벗어 난 기억은 불멸이 된다. 유유가 남긴 기억이 이로써 우리의 기억 속에는 불멸이 될 것이다. 천사와 같은 아이를 잠시 품었던 아버지 마리우스 세라와 그의 가족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