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길이 바뀐다는 것은 몸이 먼저 알고 흡수한다. 의식하지 않아도 바람은 변한다. 태풍이 오겠다는 기별 뒤에 스스로 제 몸을 낮춰 소멸한 말로의 남겨진 꼬리가 여름을 데려갔다. 밤새 바람이 다르다. 끈적하게 타고 흐르던 눅진한 바람이 이제 몸집을 줄인 모양이다. 둔중하게 고여 있던 느낌은 오간데 없고 바람은 가볍다. 가볍다 못해 중력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한들 거리는 5월의 봄바람은 아닐지언정 가을을 재촉하는 바람은 상큼하다. 밍기적 뒤채다 늦은 여름의 끝자락도 소슬한 바람 앞에서는 위력이 없다. 송글 송글 맺혀 비져 나오던 땀자락도 바람 앞에서는 무혹(誣惑)할 수 밖에 없다. 

 

바람은 때론 곁가지를 달고 온다. 내가 사는 곳은 바람에서 소금기가 퍼진다. 살짝 부딪히는 바람에도 진한 소금 내음은 코끝에서 시작해 온몸으로 전률한다. 분명 짧은 바람이었음에도 강렬한 감각이다. 그가 몰고 온 소금기는 파도에 실려 세상을 순회했을테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는지는 모를 일이다. 바람에게 나이가 있다면 지구의 나이와 엇비슷하겠다. 부정합으로 퇴적된 지층을 뭉치고 덮고 단단하게 만드는 동안 바람은 제 모습을 계속 변하고 변했을테니. 어찌보면 바람에게 시간의 관념은 의미가 없다. 인간이 만든 시간의 기록은 바람에게 껍데기에 불과하므로 어떤 형태로든 어떤 자리에든 바람은 바람일 뿐이다. 단지 변화의 정도에 따라 힘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 외에는 바람에게 시간은 사치다. 

 

변화는 이렇듯 소리없이 다가온다. 기약하지 않아도 예정대로 흐른다.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감지한 뒤에는 저만치 앞 서 나간 후의 일이다. 시작은 바람이다. 바람이 해의 길도 바꾸고 달의 모자란 기울기도 채워준다는 착각마저 분다. 바람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것이 이 뿐이겠는가. 손으로 꼽아 세울만큼 의식화하지 못한다. 다의적인 바람의 영향은 자연을 회전하고 사람의 기운도 탈피하듯 바꾼다. 무의식중에 느낀 그 가벼운 바람이 상념으로 몰고 가는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자연으로부터 배운다는 상생의 말, 틀림이 없다. 

 

하지만 바람의 변화가 무슨 대수겠냐는 물음을 던진다면 딱히 돌려 줄 말이 없다. 그저 바람이 바뀌었으니 여유를 찾고 주위를 좀 더 돌아보자는 정도지 애면글면할만큼 선후를 다투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람의 변화는 잠시나마 정체되어 둔해진 탁한 공기를 신선한 공기로 대체해 주는 역할만큼 중요한 일이다. 변화의 순간은 사소하고 미묘한 것에서부터다. 빠름에 익숙해진 일상에 바람은 충분히 윤활유가 된다. 살갗에 감기는 바람의 촉수에 마음도 분명 변화의 가운데에 선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시간이 되면 바람 맞으러 가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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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0 0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9-09 09:14   좋아요 0 | URL
바람~하니까 예전에 제가 썼던 시가 생각나서 올려봤어요.
푸히히~~유치하지만...
'바람의 제자'라는 태그도 붙였었죠.

穀雨(곡우) 2010-09-09 09:36   좋아요 0 | URL
마기님, 시가 제 부족한 글과 잘 어울리네요.^^
채움과 비움, 어제와 오늘.....
가을입니다. 건강, 유의하시기를.....^^
 

 
1. 

걱정한 만큼 일은 대개 맥없이 끝난다. 기대도 마찬가지다.

2.

신새벽부터 비가 흩뿌리는 역사를 뒤로 하고 몇시간을 나아가기만 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른 아침의 기차는 고요한 물 속처럼 정지된 듯 움직임이 둔하다. 표정이 정지한 상태다. 그네들의 사정들이야 각기 다르겠지만 몸짓은 닮았다. 그것도 주말을 끝낸 월요일 이른 아침의 기차칸이라면 평소보다 더 성마르다. 아마 식사도 평소보다 빨랐을테고 리듬이 흔들려 불안정한 상태에 겨우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모른다. 매번 이 시각에 출발하는 기차는 바닥처럼 가라앉는다. 날씨마저 을씨년스러웠으니 더 더욱 그랬는지도......


어떻게 보면 생체시계는 해를 따라 움직인다는 생각에 미친다. 해가 사라지면 몸은 활동을 멈추고 의도적인 경직상태로 돌입하고 그로 인해 누적된 피로를 몰아내는 반복된 살기 위한 진화의 작업을 꾸준히 이어나가는지 모른다. 그것은 살아가기 위한 필요충분작용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주기적인 리듬과 규칙을 메트로놈의 정형화된 순서에 맞춰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이 구속이 될 수도 있거니와 갑갑함이 발목을 붙든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 한켠에는 새로움을 찾는 물질이 다량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어쨋든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는지 구부려져 얽히는지 움직이고 나아간다. 리듬이 얼만큼 벌어진 사람들을 태우고 기차는 목적지에 격한 숨소리를 내 쉬며 멈추기를 반복한다. 사람들은 기차 속 풍경과는 다른 사뭇 잰걸음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날아갈 듯 이동한다. 하지만 표정은 이전과 다름이 없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사람들의 눈빛은 밤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밤의 지배는 마법처럼 서서히 해가 제법 떠오랐을 즈음에나 풀리리라. 


어지럽게 뒤엉키던 사람들을 뒤로 하고 서울역의 끈적하고 탁한 공기는 갈라진 간극의 틈입처럼 아득하다. 널부러진채로 간밤 도시의 혹독한 냉기와 오염된 시간을 버텨 냈을 노숙자들에게는 이 도시는 지겨울테다. 아니, 영혼을 붙잡혀 벗어날 수 없는 지옥경처럼 두렵다는 게 적확할지 모르겠다. 그들에게 서울역은 죽음의 광기와 삶의 집착이 들짐승처럼 배회하는 섬뜩한 곳일테니 말이다. 그들에게서는 원시의 공기가 느껴진다. 인간이 만든 도시화의 한 가운데에서 원시의 태고적 내음이 섞여 흐른다는 것은 지독한 아이러니다. 더 이상 밀려날 곳 없는 그들의 굴곡같은 삶, 보이는 대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락적인 허기를 채우는 그것보다 인간적인 위로가 더 필요할테니 말이다.


3.
 
마음은 실체가 없으되 취약하기 짝이 없다. 아침 나절 분주하게 펼쳐지는 이동에 위압당하고 덩그마니 찌를 듯 솟은 콘크리트에 짓누를 듯 무겁다. 파고드는 것은 현기증 뿐만 아니라 붙들 곳 없는 불안이다. 그래도 마음은 호기심이 앞선다. 별반 다를 것 없는 그들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은 언제나 생동감있다. 가벼운 접촉사고로 뒷목을 끌어 잡고 바닥에 나뒹구는 택시기사와 그악스러운 아주머니와의 신랄한 몸싸움을 구경하는 재미와 같다. 뭐, 달리 재미라는 감정외에는 구체적으로 형용할 말이 없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 대해 "불안은 삶의 조건이다. 삶은 하나의 욕망을 또 다른 욕망으로 하나의 불안을 또 다른 불안으로 바꿔가는 과정이다."라고 했다. 보통의 말을 풀이해 보면 하나의 불안이 해소되면 또 다른 불안으로 이동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말이 된다. 


돌이켜 보면 불안은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재료다. 불안이 마음과 엉키면 평온은 부서지고 긴장은 고조되며 동요는 버무려진다. 불안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일정한 패턴을 가진다. 그것이 기쁨으로든 슬픔으로든 바뀌는 것은 불확실한 불안의 재료의 배합이다. 그렇다면 불안을 적절하게 조절 가능할까? 레시피에 맞춰 요리를 하 듯 불안을 몇 스푼만 첨가하면 최적의 상태, 즉 행복을 만드는 재료가 될까하는 거다. 그러므로 보통이 불안의 출현이 마음의 결핍, 사랑에서 온다고 했는지 모른다. 사랑은 불안을 중화시키고 희석시키는 최고의 첨가제다. 


나를 사랑한다면 불안의 통제를 통해 삶의 만족, 행복을 얻는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걱정은 일의 경중, 익숙함의 정도, 환경, 주위영향에 다분히 관계를 맺는다. 걱정이 커지면 불안이 된다는 이치는 분명하다. 사소한 걱정이 불안으로 바뀌기 전에 유쾌한 긴장을 위한 평정의 상태로 바꾸는 것이 불안을 통제하는 수문통제소가 되는 셈이다. 이런 과정을 나는 빈번하게 반복한다. 걱정하고 긴장하며 불안해하고 믿고 통제하는 과정. 때로는 믿는 객체를 더욱 넓혀 신의 영향력에 기대는 것도 이와같은 의미와 같다. 마음은 앞서서 보았듯 실체가 없으나 형태는 다양하다. 마음을 드려다 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의 마음을.
 

 

p.s) 늦게 내려 온 밤, 말로의 위용에 놀라고 쓴 맛을 본 리뷰소식에 아쉬웠다.
       마음은 또 안정보다 살아있음을 내비친다. 그래도 아쉽다. 결과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 단지 민망한 기대를 한 나 자신에게 아쉬울 따름이다.


p.s 2) 단연 최고라는 머쓱한 어느 님의 위로가 없었다면 아쉬움은 진하게  

         머물렀을지 모르겠다. 그 님의 진심이 담긴 말. 마음에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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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9-07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의 묘사 한 줄 한 줄이 들어와 박힙니다. 어휘력이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저는 예전에 송혜교가 어느 드라마에서 했던 대사를 참 의미심장하게 들었어요. 작은 걱정만 하며 살고 싶다,는 말. 이 말 살수록 너무 와닿아요. 불안의 경중도 그게 너무 커서 불안이라는 말 속에 담을 수도 없을 만한 것을 대면했을 때 자잘한 걱정과 불안이 있던 일상을 그리워 해 본적도 있어요. 결국 삶은 곡우님 말씀처럼 불안을 통제하는 기술의 연마 과정인 것도 같아요.

리뷰를 곡우님 리뷰를 안뽑아 주면 대체 누구를 뽑아 주나요? 최고 맞아요^^

穀雨(곡우) 2010-09-07 15:18   좋아요 0 | URL
아, 블랑카님. 작은 걱정만 하고 살면 좋겠다는 말, 콕콕 와 닿네요.
음...호사다마란 말도 그런 뜻이니 그것도 어찌보면 같은 뜻이겠어요.
불안을 떨쳐 버릴 수는 없으니 불안을 통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리뷰소식은 다른 곳에 대회가 있었거든요. 근데 미역국만 잔뜩....ㅋㅋ
이제 괜찮아요. 분명 글이 산으로 갔으니 제 자리는 없는게 당연해요...
그것보다 블랑카님의 위로가 더 고맙고 살가워요....^^

비로그인 2010-09-07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불안이 해소되고 다른 불안으로 이동된다기 보다 하나의 불안이 또 다른 불안을 낳고 그렇게 꼬리를 물고가는 과정은 아닐까 싶은데...
나 예전에 이거 읽다가 스탑했는데...다시 읽어봐야 겠어요.^^

穀雨(곡우) 2010-09-08 16:31   좋아요 0 | URL
아...저도 그 뜻으로 적은 거예요. 불안이 꼬리를 문다는 의미로....
보통의 이야기는 마음이 허할때 읽으면 좋아요.
전 언제든 내키면 꺼내 읽거든요...^^

비로그인 2010-09-08 15:46   좋아요 0 | URL
언제든 내키면 허하시다는?
푸히히~~
허한 느낌이 자주 든다는 건...나이가 먹어가고 있다는 거.
오늘 이곳은 글루미한 하늘이예요.
부산은 어떤가요?

穀雨(곡우) 2010-09-08 16:33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아무래도 제가 조증이 있는 모양입니다.^^
부산은 바람이 따뜻해졌어요. 밤새 바람길이 바뀌었는지 선선하다 못해
약간은 긴장이 되는 바람이더군요.
지금은 찌뿌둥한 구름사이로 간간히 해가 보였다 말았다 그러네요.
하지만 바람과 햇빛 사이에 소금기는 여전해요.
어디서부터 온 바람인지는 몰라도....^^

비로그인 2010-09-08 19:25   좋아요 0 | URL
소금기가 있는 바람이니 바다에서 왔겠네요.
ㅎㅎ갑자기 '남쪽으로 튀어'에 배경이 되었던 오키나와가 생각이 나요.
읽는 동안 완전히 빠져설랑 오키나와같은 곳에서 살고 싶다...한참을 그랬거든요.
'이웃집 토토로'의 그 시골도 좋구.
허하거나 좀 생활이 무료하다 싶을 때는 저렇게 공기가 신선한 곳에서 깨끗한 맘으로 사는 꿈을 꾸곤 했는데...
곡우님은 알랭 드 보통의 '불안'으로 달래시네.ㅎㅎ
빈 곳을 채우는덴 책이 최고져 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에게 소설이란 있을 법한 이야기로 이해된다. 소설은 상상이라는 재료를 주원료로 삼고 작가의 오감(五感)이라는 부재료를 투입해서 잘 버무려 숙성시켜 부풀린 빵과 같다. 그러므로 소설에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사실적인 무대가 펼쳐지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소설이 촉수를 가진 생물체처럼 감각적이라는 사실도 비슷한 논리다. 이렇게 소설은 인간을 닮는다. 더 자세히 말하면 인간관계를 투영한다. 인간관계는, 삶이라는 보편적이고 개별적인 요소의 총합이다. 삶의 속성은 대체로 불가해성의 영역이다. 복잡 미묘하며 예측하거나 속단할 수 없다. 누구나 삶은 불완전하며 완벽하지 못하다. 이와 같이 삶과 소설은 동일한 범주에 있으나 소설은 보다 더 자유롭다. 따라서 소설의 무대는 가변적이며 전지전능한 실험의 대상이 된다. 그 속에서 나는 세상을 본다. 그러하기에 소설은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고 오르가즘을 재촉하는 해방구가 된다.

 

 

김영하. 나는 그를 우연한 기회에 만났다. 그가 한국문단에 센세이션의 돌풍을 몰고 다니며 엄청난 인기몰이를 할 동안 나는 그를 몰랐다. 그와 맞닥뜨리게 된 기회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의 한 부분이다. 동사무소에 들렀다 주민 편의를 위해 대여문고를 운영하던 책꽂이와 근접한 거리에 있었고 그날따라 민원을 해결하기 위한 사람들로 붐볐다. 시간은 정지된 듯 지루했으며 고압적인 흐름은 불편했다. 상황은 내가 원하는 방향의 궤적으로부터 비켜 나가기 시작했으며 어느새 손끝은 그를 만났다. <퀴즈쇼>. 빠르게 눈은 흘렀으며 마음은 뒤쫓기에 분주했다. 인생은 퀴즈다.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이십대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가장 아름다운 자들이 가장 불행하다는 역설. 그들은 비극을 살면서도 희극인 줄 알고 희극을 연기하면서도 비극이라고 믿는다.(퀴즈쇼. 작가의 말 중에서) 그의 문장은 사실적이었으며 상상력은 기발했다. 그의 오감에 걸려든 인생은 나를 위로했으며 인생은 퀴즈처럼 선택의 순간이라는 역설을 이해했다. 나는 그렇게 그의 책을 섭렵했다. <빛의 제국>,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검은 꽃>, <오빠가 돌아왔다>.

 

 

그렇게 그가 돌아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를 여유롭게 들고 특유의 마술로 세상을 홀렸다. 그의 이번 작품은 전작의 속성은 닮고 있으나 전에 비해 짧은 단편으로 묶였다. 단편소설의 특성상 템포와 강약의 완급조절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번 작품은 그의 실험적 본령을 이어가는 또 다른 결과물인 셈이다. 나는 그의 이번 작품에서 안톤 체호프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를 연상했다. 러시아의 대작가 안톤 체호프는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현상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 내려 갔다. 그의 글은 특별히 놀라운 사건을 도입하기보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설정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 사건이 있더라도 그 자체의 외부적인 측면보다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다양하고 모순된 반응에 주목한다는 점, 대체로 매우 느슨한 플롯인데다가 그 결말이 미결정의 상태로 끝나고 주인공들도 이에 대해 어리둥절하고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는 점, 등장인물들 간의 의사소통의 단절 등 현대 단편소설의 기틀을 확립한 천부적인 자질을 갖춘 문호였다.(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p-191~192 인용) 이 책의 총 13편의 단편은 체호프의 토질을 자양분 삼아 성장한 열매로 인식된다.

 

 

실제 이 소설의 플롯들의 다양성, 소재의 기발함, 삶의 보편적 편린 등은 그 차별적 시도가 매혹적이다. 사실(寫實)이라 할지라도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삶의 보편적 특성은 어느 순간 존재의 가치 앞에 무력해진다. 이 작품의 명제(命題)가 대변하여 주 듯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르거나 알 수도 있다는 가정적 현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작품의 알고리즘을 분해해 본다면 모노레일의 궤적과는 달리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처럼 비정형적이며 일정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삶은 때때로 자신을 속이고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이른바 삶의 불가해성이다. 앞서 전술한 바와 같이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나 관찰없이는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의 이번 작품은 차후 작품의 패턴을 넓히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로봇의 삼원칙을 세운 아이작 아시모프는 <아이로봇>의 저자다. 그의 소설은 윌 스미스가 주연한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흥행 또한 크게 성공했다. 아시모프는 칼 세이건과 더불어 천재과학자이자 작가다. 김영하가 아시모프의 로봇을 빌려 온 것은 모방이 창작의 주춧돌이 된다는 경험적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김영하의 <로봇>은 아시모프의 그것과는 닮은 점이 없다. 로봇은 더 인간적이며 인간의 마음을 시종일관 뒤흔든다. 섹스를 하고 사랑을 나누지만 로봇의 3원칙에 복종하는 딜레마에 빠진 로봇. 그래서 사랑하지만 떠나야 하는 로봇. 김영하는 이에 더해 ‘라고 치고 게임’을 주 무기로 공략하며 패를 유리하게 이끈다. 이 작품에서 나는 딜레마에 갇혔으며 험난한 암초에 좌초되었다. 로봇의 존재이유를 묻게 되었고 그 로봇이 인간에게 쾌락을 안겨주었으며 그 쾌락의 종말이 로봇의 파괴로 이어진다면 로봇이 인간을 제거의 대상으로 판단하게 될 것인가라는 구조적 모순에 이르렀다. 따지고 보면 모순된 현실은 어디서든 비일비재하다. 비이성적인 해답이 차지하는 경우는 허다하며 이성은 상실된 지 오래인지 모른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아직 로봇을 모른다.

 

 

<여행>은 현대인의 고독을 해체하고 재구성했다. 결혼을 앞 둔 수진과 과거 애인이었던 한선과의 어색한 만남과 무모한 여행이 발단이 되어 불편한 진심을 토해내며 가식의 가면을 벗는 인간의 위선적 행위를 관찰한 작품이다. 사랑과 현실은 다르다는 차이를 우리는 진리처럼 되새긴다. 현실 앞에서 사랑은 허무하고 냉소적이다. 한선의 그 무모한 만용도 짧은 쾌감을 유발하지만 영화에서나 볼 법한 상황은 낙관적이지 못하다. 배를 태워주겠다는 험상궂은 사내의 시비와 폭력으로 이어지는 낭자한 현장은 수진의 마음을 흔들지만 현실은 그녀의 미래 앞에 비굴해졌다. 포스트잇같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뒤끝 없는 관계라고 믿던 그녀에게 미래가 불투명한 시간강사의 그는 이미 거세당한 만남이었다. 아이러니한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너무도 흔하게 일어난다. 외면 권하는 세상, 사랑을 위한 납치도 이제는 관용의 자리는 없다. 인생은 사막보다 더 삭막하기 때문에.

 

 

<악어>는 포식자의 매정한 눈물이 떠오른다. 한 남자에게 우연히 찾아든 천상의 목소리. 그를 성공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로 이끌던 목소리가 어느 날 갑자기 없어졌다면. 남자는 우연히 들른 클럽에서 무명의 보컬에게 끌리고 그의 노래를 듣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거대한 파충류 악어, 목소리는 꿀꺽. 그는 악어가 되었다. 박제가 되어 동물원에 전시된 후 그의 노래는 전설이 되었다. 모든 동물들이 우는 비현실적인 상황. 박제된 악어의 노래는 위선처럼 슬픔을 지배하였고 악어는 위선에 능욕당하지 않았다. 결국 세상은 악어의 위선처럼 거짓에 취약하며 보이는 것에 집착한다. 신기루처럼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면 그만인 것을.

 

 

<밀회>는 작품 속 나를 따라가며 관찰하는 시선이 인상적이다. 그 시선 속에 숨어든 반전은 이 작품의 주제가 숨은 최고의 걸작이다. 시간의 흐름을 유영하고 타국의 일상을 탐구하며 때로는 나른하게 때로는 흥미롭게 서술하는 경어체는 고백처럼 들린다. 소설 속 나는 세심하게 사물을 더듬고 그녀를 만나는 동안 펼쳐지는 정경을 하나라도 빠트리면 큰일이라도 날것처럼 고백한다. 그 고백은 자성의 소리로 이어지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 사물의 구체성에 대해 논하며 윤회를 들먹인다. 그는 해파리를 꿈꾸고 그녀와의 부적절한 만남을 회의(懷疑)한다. 아주 가까운 사람을 낯선 사람처럼 느끼는 그녀의 남편과 그로 인해 복잡한 죄책감과 증오, 친밀감에 대한 희구가 뒤섞인 그녀는 소설 속 나의 예상 밖의 죽음에 현실로 빠르게 빨려 들어간다. 김영하는 이 작품에서 그가 면밀하게 관찰하고 느낀 사유의 총아를 모두 집결해 놓았다는 느낌을 나는 강하게 받는다. 삶은 불가해한, 알 수 없는 현상의 연속이며 정형과 비정형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든다. 이처럼 이 작품은 아무도 모른다는 미지의 영역의 경계에서 실존적인 물음을 구체적으로 던짐으로써 인간의 내밀한 본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사유하게 하는 내용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삶의 근원이 믿음에서 비롯되고 나아간다는 본질에 보다 더 가깝게 접근하는 계기가 된다. 마치 밀회하듯 스릴 넘치게.

 

 

<아이스크림>은 누구나 한번쯤은 해 봤을 법한 상황을 표현한다. 아이스크림이라는 자동화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일정한 질량과 성분으로 조합하여 만들어진 기성품, 그 속에 산입된 불순물은 신뢰의 영역이다. 나는 만들어진 음식을 먹을 때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정말 안전한 지, 믿을 수 있는 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암묵적 합의에 의한 결과다. 내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은 제 값을 치르고 갈증을 해갈시켜 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불순물이 첨가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불순물은 제조자와 고객을 불편한 관계로 만들고 기선을 잡기위한 모종의 심리게임은 시작된다. 상황은 어지럽게 번진다. 소설 속 부부의 상황처럼 고객책임자의 비일상적인 만남의 기록은 낯설지만 눈에 익는다. 손해배상금이라도 한 몫 챙기겠다는 윤리적 경계에서의 유혹은 오히려 인간적이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 또한 인생이다. 고객책임자의 너무도 성실한 태도에 압도당하고 패스트푸드로 넘쳐나는 현실 속으로 되돌아온다. 이 작품은 세속적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오는 간극을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통해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준다. 반드시 신문에서나 보는 거액의 손해배상금을 받는 행운(?)처럼 같은 결과는 이루어 질 수 없는 법이라고.

 

 

<조>는 타락한 형사다. 백화점을 드나드는 뜨내기 잡범을 잡아 장물을 빼돌리며 이익을 챙긴다. 그에게 있어 백화점은 경계와 보호의 대상이 아닌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공간이다. 조는 포식자의 인내를 가지고 먹이를 좁혀 가 듯 표적을 유린한다. 반면 백화점 시계코너 정은 살기 위한 몸짓으로 육신을 타락시킨다. 타락은 공공연화되고 일상화된다. 어쩌면 우리에게 타락은 허용된 제스쳐이다. 경계를 조금 넘었다고 해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경계를 탐하는 타락은 변하는 것에 대한 무감각이 지배하고 우리는 그렇게 타락한다. 조가 정으로 인해 타락하는 과정은 흡사 중독성 강한 마약성분처럼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우리 삶에서 타락은 바람처럼 가깝고도 은밀하다. 언제든 유혹할 태세를 갖춘 팜므파탈의 유혹처럼.

 

 

<마코토>는 현대 여성의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했다. 훈남의 일본인 유학생을 사이에 두고 새침떼기 후배와의 줄당기기는 읽는 이의 애간장을 태운다. 상황이 역전되고 후배의 교활한 속임수에 마코토가 넘어가 버리는 가련한 현실은 애틋하다. 하지만 인생은 역전이 가능하다. 일본 도쿄에서 우연히 만난 마코토와 후배와의 이별을 듣고 지난날을 회상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바람은 믿는 그대로 일어나지 않는 법. 머피의 법칙처럼 민망한 상황, 허무개그처럼 뻘쭘함이 밀려온다. 유쾌한 암전, 읽는 이는 즐겁다.

 

 

<퀴즈쇼>는 그의 장편과 얼개가 유사하다. 하지만 또 다른 맛이 난다. 소설 속 주인공 정동국과 조은이의 만남 그리고 관계를 적절히 배합하고 섬뜩하기도 한 장면을 삽입하여 몰입을 유도한다. 기능적 결손가정, 성공일변도의 가치관, 물질만능주의사회에 대한 다양한 문제에 대하여 경쾌하게 탁탁 끊기는 스타카토처럼, 시원하고 차가운 맥주처럼 텁텁함을 깔끔하게 잡아주는 바삭한 맛이 일품이다. 인생은 퀴즈처럼 선택의 순간이다. 선택은 홍수통제소에 날아든 긴박한 상황이 파도를 타고 이어진다. 그 물결이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 예측은 빗나가고 상황은 암울하다. 하지만 인생은 정동국의 헛물처럼 잡념을 남긴다. 내가 그때 그랬다면.

 

 

<명예살인>, <바다이야기 1, 2>, <오늘의 커피>, <약속>은 짧지만 임팩트가 강한 소설이다.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절단하여 벌려진 채로 속살을 그대로 드려 낸 실체를 비틀어 보고 매달아 보고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꼼꼼하게 분석한 뒤, 콘트라스트 강한 흑백사진처럼 직설적으로 직관적인 서술이 인상적이다. 어디서든 부딪히는 상황, 사회면 한 곳을 오롯이 장식하는 사건·사고, 불행은 이어진다는 속설, 어이없는 만남 등 이러한 단면들은 확률의 법칙을 무시하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이렇듯 김영하의 이번 작품은 상상력이라는 펜으로 현실을 섬세하게 스케치한 마스터피스masterpiece다. 그의 문장은 모던함 속에 감춘 마력이 강한 자성을 발산한다. 한번 붙으면 떨어질 줄 모르는 쇠붙이처럼 생각을 흡수당하고 관성을 상실한다. 나는 소설이 현실을 떠나서는 공상에 그친다고 믿는다. 소설은 현실에 충실해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온전히 작가의 몫이다. 그러하기에 소설은 작가의 밀어내고 내어 쓴 사유의 흔적을 따라 독자는 그들의 언어로 이해하고 흡수하며 상호작용을 통해 정화작용을 일으킨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김영하는 오래도록 간직할 삶의 도피처이며 위안이 되는 소통의 장이다. 그러하기에 그의 이번 작품, 반갑고 또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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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8-3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추천만해야지 어려워서 원~~ㅋㅋ
소설을 읽을 땐 뭐 나의 인생도 같이 읽혀지니까요...도피하고 싶어도 자꾸 현실이 곱씹어지곤 해요.
멋진 리뷰...즐감합니다^^

穀雨(곡우) 2010-09-01 08:59   좋아요 0 | URL
어렵다는 생각, 제 글의 최대의 약점입니다.
보다 더 쉽게 쉽게 써야 할텐데 말이지요. 글쓰기 어렵습니다.^^

yamoo 2010-09-02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김영하 작가 좋아해요..최근 나온 신간을 제외하고는 다 읽었습니다..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김영하의 신작은 천천히 구입해야 겠습니다^^

穀雨(곡우) 2010-09-03 09:28   좋아요 0 | URL
이번책은 단편선 모음집이라 생각보다 분량이 작습니다.
한나절이면 충분한 분량, 하지만 김영하의 스타일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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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을 규정짓는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청춘은 이미 훌쩍 자라버린 어색해진 제 껍데기를 끌어안은 채 붙박여 멈춰 서 버린 낯선 느낌이며, 갈피를 잃은 정신을 가다듬는 혼란의 숨 가쁜 상태로 그려지곤 한다. 누구나 청춘의 뜨거움에 질식하고 때론 그 청춘이 죽을 만큼 힘겹게 덮쳐 오는 불편한 정경에 목말라 한다. 그런데도 지나고 보면 그때 그 시절만큼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때도 없다. 이처럼 청춘의 열병은 젊음을 시샘하는 삶의 통과의례처럼 빗나간 육신과 마음을 다듬고 깎아 제자리에 맞추는 조탁의 과정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청춘은 홧홧한 열정의 에너지를 쉼 없이 발산하고 방황도 때로는 동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래서 일까? 세상을 향한 청춘의 몸짓은 서툴고 어색하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삶에서 결락된 무언가를 찾는 여정이 지상과제인양 삶의 이상理想이 되기도 하는 것을 빈번하게 목격한다.




        그렇기에 청춘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꽃처럼 화려하기도 눈꽃처럼 시리기도 하다. 세상은 무언가 정체모를 이물감이 어딘가에 탁 걸려 그 답답함으로 인해 온몸으로 번지는 막연한 불안처럼 냉소적이고 허무하다. 어쩌면 청춘이 이방인의 고독에 어울리는 멜랑콜리의 입맞춤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청춘은 푸르른 몸짓만큼 회복도 생기도 충만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이별, 사랑, 연민, 상처는 새살이 돋고 아물기를 반복하다 보면 그 젊음에 후회가 될지언정 습관처럼 회고하고 읊조리는 시절이 찾아든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과 타협이 될 수도 포옹이 될 수도 있겠으나 누구나 거쳐 야 할, 건너야 할 통과제의가 아니겠는가.




        신경숙 작가의 이 책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내게 그렇게 읽힌다. 존재의 상실을 통한 아픔과 부재에 대한 허망한 교태가 합작한 청춘의 출발선에 선 가녀린 영혼들의 절규와 같이 살처럼 콕콕 날아 와 박힌다. 오염된 세상의 파편에 쓰러지고 울부짖는 청춘의 뜨거운 몸부림은 위태롭다. 세대의 접경지대에 선 청춘은 오르페우스적 욕망에 사로잡히고 교차된 혼돈의 무게에 힘겨워한다. 성장의 순간은 아픔을 딛고 일어선다고는 하지만 산화되지 못한 슬픔은 미래의 시간마저 과거의 자리에 포위당하고 말 것처럼 고통스럽다. 그러므로 설계된 대로 흐르지 못하는 삶의 불가해성으로부터 이어지는 정체성의 혼란은 현기증이 난다. 그것이 누구나 짊어진 원죄에 대한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처럼 처참하고 가혹하다면 청춘은 또한 아련해진다.




        신경숙 작가는 사랑을 통해 청춘을 위무했다. 긴장이 도처에 떠돌고 아픔이 곳곳에 지뢰밭처럼 묻혀 있던 그 독재의 시절, 청춘을 노래했다. 작가의 눈을 통해 재단된 청춘은 문장의 행간을 이어주고 공감을 유도한다. 이미 전작 <엄마를 부탁해>로 눈물샘을 말려 버린 그녀의 필력이기에 달리 썰을 풀어낸다는 것은 중언부언처럼 민망하다. 그래서 온전히 나는 그녀의 시선을 쫓아 생각이 머무는 곳에 안주하기로 했다. 그녀가 설정한 젊은 영혼들의 외침에 동참하고 세파의 부침에 맞서고 싶은 충동이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2000. 민음사.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에서)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껍질을 벗어야 한다. 청춘은, 누구에게나 겪고 방황하고 또 상처받는 시기가 있다. 청춘의 기록은 그래서 치열하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신경숙 작가의 글은 페이소스처럼 정열적이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p.291)




        소설은 화두를 던진다. 청춘에 대해. 신경숙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던진 화두는 크리스토프의 명제에 오롯이 담겼다. 소설 속 인물인 윤, 단, 명서, 미루를 가로지르며 관통해 나가며 깃든 삶의 무게는 크리스토프를 통해 인식된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짊어진 어깨 위 아이의 무게를 홀로 감내하는 우리의 모습이자 고독의 항체처럼 질긴 운명인지 모른다. 오늘을 잊지 말자는 자조 섞인 희망에서 슬픔을 극복해 낸 순간의 떨리는 윤의 바람처럼 나는 그들과 연대감으로 묶였다. 이따금 삶은 날 선 세상에 아프고 뜨겁다. 고통은 삶을 무두질하며 신열이 열꽃처럼 번져 오르기도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흡수되고 소실된다. 역설적이게도 고통은 삶의 좌절과 절망을 구분 짓는 힘이 되기도 한다. 힘은 아름다움으로 승화되고 희망이 된다. 타성에 젖지 않은 순수의 청춘이 사무치게 아름다운 것은 이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크리스토프의 메타포는 세상에 맞서는 자세이며 자아를 찾는 과정의 일환이다. 




        소설 속 윤은 어머니를 잃었다. 아픔이 오래도록 침전되어 빛을 상실했다. 존재의 상실에 대한 아픔은 윤에게 트라우마다. 도시에 나와 옥탑 방에 기거하면서부터 걷기 시작한 행위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의 그림자를 뒤쫓는 과정을 통해 번민하고 슬퍼함으로써 결국에는 그것을 끌어안는 행위로 새겨진다. 걷는다는 것은 목적지를 염두에 두고 가늠하게 된다. 누군가를 만나든 어딘가로 이어지든 길은 걷기를 동행하는 벗이다. 윤에게 걷기는 씻김과 떠나보내기의 과정쯤으로 보아진다. 그러므로 명서가 윤에게 이어지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인간은 감정이 침잠하고 가라앉을 때 방심한다. 방심은 긴장을 놓고 의지하려는 마음이 앞서며 아픔을 나누고픈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렇게 윤에게는 명서와 아픔을 연대하고 서로의 틈입 사이로 밀어 넣는 관계로 발전한다. 반면 미루는 언니를 잃었다. 미루에게 언니는 세상이었고 존재 그 자체였다. 그 옛날 외할머니 댁을 찾았다 닥쳐든 뜻밖의 사고로 인해 무릎을 다친 언니의 추락을 지켜보는 것은 미루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일로 인해 빛을 잃어 버린 별처럼 침몰하기만 하던 언니는 어느 남자를 만나고 서야 안정과 행복을 되찾게 된다. 그런데 행복은 길지 않았다. 남자의 실종, 사회적 타살 소식에 언니는 분신자살로 맞서고 미루의 손에 지울 수 없는 상실의 기억을 아로 새기게 된다.




        윤에게 단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이어주는 길목에서 만난 풋풋한 관계다. 윤이 어머니를 잃은 아픔으로 방황할 때 단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단은 먼발치에서 윤을 지지하고 윤의 앞에 나서 길을 가는 방해물을 제거하고 등불이 되어주는 역할을 자청했다. 하지만 윤과 단은 친구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단이 불합리한 제도에 맞서 방황할 때 윤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단은 내성적이었지만 굳건했고 순수했다. 그러나 단의 순수는 오염된 현실에 내 버려진 가녀린 존재에 불과했으며 이방인으로 내모는 구실이 되었다. 단의 내몰림은 그렇게 총기자살을 가장한 도피로 이어지며 청춘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이렇게 단과 윤의 관계는 비이성적인 영역에 머문다. 기다리는 사랑은 피를 말리고 허파를 타들어가게 하는 아픔이다. 나는 단과 윤이 맺어지기를 은연중에 바랬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가 던진 화두를 푸는 키워드는 아님을 또한 일찌감치 알아챘다. 이 또한 삶의 단면임을 말이다.




        다시 돌아가서 명서와 윤의 관계가 낙관적이지 못했음은 그 시대의 비릿한 울분과 상황이 만든 아픔임을 비로써 인식하게 된다. 또한 윤에게 미루는 거울과 같은 존재였다. 미루가 언니의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실종된 언니의 남자를 찾아 헤매는 것도, 윤이 걷는 것도 닮았다. 그들의 이동은 회피의 수단이라기보다 맞서서 찾는 본성의 감정에 충실한 흔적이다. 작가의 의도적인 설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아픔을 연대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랑의 오묘한 진실을 찾는 여정은 어딘지 모르게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그 마음과 닿아있다. 그래서 윤과 명서는 서로에게 다가가기를 바랐으며 명서가 미루를 잃은 절박한 심정을 위로하고 제 것인 양 끌어안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가 그쪽으로 갈게. 건너간다는 의미는 피안과 차안의 경계를 연상케 한다. 따라서 그쪽으로 간다는 말은 고독 속에 뒹구는 영혼을 끌어안겠다는 포용의 시도처럼 들린다. 더불어 희망 섞인 바람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크리스토프를 언급한 윤 교수의 존재는 젊음을 인도하는 길잡이처럼 그려진다.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 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p-354)  원망도 미움도 열정도 시간 앞에서는 허무하고 부질없다. 윤 교수를 통해 작가는 내면의 변화를 관찰하고 보다 깊이 있게 삶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마치 한 순간 암전 후 찾아드는 광명처럼 윤 교수의 말은 새록새록 마음으로 새겨진다. 이러한 가르침은 참된 자아를 찾는 탈출구가 되며 충실한 삶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삶은 어디서든 계속된다는 말처럼 별빛처럼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경숙 작가의 이 소설은 성장소설을 표방한 세태소설이다. 어두운 시절을 통과한 젊음 이들의 사랑을 간결하게 빗어 낸 문장들은 읽는 이의 마음을 공명하게 한다. 윤과 단, 명서와 미루를 통해 세상이 할퀴고 간 트라우마의 흔적과 극복의 과정을 공감하게 되고 하나의 지향점을 만들며 성장해 간다는 이치를 배우게 된다.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처럼 희망이 울려 퍼지고 기쁨과 환희가 커져가기를 작가의 프리즘을 통해 드려다 보았다. 슬픔보다는 기쁨에 저울추가 기울어지기를 바랐다는 신경숙 작가의 바람은 이 책을 통해 충실한 성공작이 되지 않을까 한다. 누구나 쓰리고 아픈 기억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안고 살기 마련이므로 세상과 용서하는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소망해 본다. 작가의 여명의 바람처럼 모두 뜨겁게 달궈 굳어진 손 위의 돌을 내려놓고 낙관의 희열을 만끽하게 되기를 말이다. 용서는 자신과 하는 약속이며 삶을 바로 세우는 균형추에 다름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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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8-30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민과 용서를 지나야 성장이 오는걸거예요.^^

穀雨(곡우) 2010-08-30 09:54   좋아요 0 | URL
마기님, 오랜만이네요.
이제 수면위로 나오신건가요...^^

연민과 용서를 지나야 성장이 온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yamoo 2010-08-30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신경숙 작가의 작품은 읽지 않습니다만...이 리뷰는 추천을 안하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요~
넘 잘 봤습니다~

穀雨(곡우) 2010-08-31 00:01   좋아요 0 | URL
야무님, 추천 감사합니다.
소설은 안 읽으시나 봅니다.^^

yamoo 2010-09-02 10:12   좋아요 0 | URL
소설은 그리 자주 읽는 편은 아니지만 꽂히는 작가 위주로 읽습니다.. 신경숙 작가 작품은 멀리합니다..ㅎㅎ
 
마법천자문 단어마법篇 1 (본권 + 워크북 + 카드) - 몰아쳐라, 돌개바람! 돌풍(突風) 마법천자문 단어마법篇 1
김현수 지음, 호야 그림, 파프리카 채색, 김창환 감수 / 아울북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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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글을 읽고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 신비롭다는 생각이 앞선다. 언어에 대한 배움은 요식 화된 절차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마냥 신기하다. 불과 몇 마디에 불과하던 단어를 하나둘 내 뱉더니 어느새 문장이 되고 글이 된다. 가만 생각해 보면 학습은 반복에 의한 산물임을 몸으로 기억하는지 모른다. 미국의 유명한 자기 계발작가 말콤 글래드웰은 1만 시간의 법칙을 발견했다. 성공의 키워드는 반복된 연습이라는 이치다. 그러니 개념을 익히고 뜻을 터득하기 전에 아이는 이미 반복된 노출과 학습에 의해 몸으로 깨우쳤다는 소리겠다.




최근 몇 해 들어 학습과 일러스트를 결합한 학습만화가 범람한다. 만화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보다 자칫 나무만을 보다 산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까 싶어 일부러 밀쳐 두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아주 우연찮은 기회에 서점 나들이에 아이가 집어 든 한자만화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이는 한자의 음과 훈을 카드를 통해 연상하고 기억하더니 일러스트의 화려한 그래픽과 이미지에 결부되어 오래도록 빠져 들었다. 1차적인 학습의 고무적인 현상인 몰입의 효과는 극대화한 셈이다.




뒤이어 한 권 두 권 시리즈물이 발간될 때마다 손에 거머쥐고 틈날 때마다 들춰 보더니 급기야는 카드놀이로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카드에 적힌 한자의 음을 말하고 훈을 알게 되고 어떻게 적용되는지도 주도적으로 장악했다. 이 책이 잘 알려진 아울북의 <마법천자문>시리즈다. 마법처럼 깨우친다는 것은 반복을 전제로 하지만 아이의 반짝이는 눈과 오물거리는 입에서 튀어 나오는 한자의 향연은 천자문을 깨우친 그 옛날 아이의 감흥과 일치하지 싶다.




이렇게 한자를 통해 단어를 유추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즈음 <마법천자문 단어편>이 출시되었다. 예상한 대로 전편에 등장하던 내용을 연계해서 손오공과 해왕 족과의 한자승부를 겨룬다는 스토리다. 실제 <마법천자문>시리즈가 계속해서 인기를 이어가는 비결 중의 하나가 탄탄한 스토리텔링이다. 분명한 권선징악의 대립적 구조, 모험심을 심어주는 판타지 요소 등이 적절하게 가미되어 아이가 생각주머니를 채워주기에 충분하다. 아울러 별첨으로 소개된 워크북을 단계에 맞게 활용하면 학습효과가 배가되기는 하겠으나 괜한 구속으로 이어질까 사용하지는 않았다.




전체적으로 잘 만들어진 책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탄탄하고 알찬 책이라도 아직 개념이 무른 아이에게는 부모의 관심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일일이 암기하고 외우기를 강요하기 보다는 재미를 붙이게 해서 자연스럽게 개념의 틀을 익힐 수 있는 토양을 배양시켜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흥미는 곧 재미를 몰고 오며 재미는 배움으로 돌아온다. 주도적인 학습과 창의적인 사고에 직접적인 학습만화가 부정적인 의견이 지배적인 것이 사실이나 흥미와 재미를 키우는 데 만화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아이의 독서습관은 부모가 만든다는 말은 명심한다면 습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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