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걱정한 만큼 일은 대개 맥없이 끝난다. 기대도 마찬가지다.
2.
신새벽부터 비가 흩뿌리는 역사를 뒤로 하고 몇시간을 나아가기만 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른 아침의 기차는 고요한 물 속처럼 정지된 듯 움직임이 둔하다. 표정이 정지한 상태다. 그네들의 사정들이야 각기 다르겠지만 몸짓은 닮았다. 그것도 주말을 끝낸 월요일 이른 아침의 기차칸이라면 평소보다 더 성마르다. 아마 식사도 평소보다 빨랐을테고 리듬이 흔들려 불안정한 상태에 겨우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모른다. 매번 이 시각에 출발하는 기차는 바닥처럼 가라앉는다. 날씨마저 을씨년스러웠으니 더 더욱 그랬는지도......
어떻게 보면 생체시계는 해를 따라 움직인다는 생각에 미친다. 해가 사라지면 몸은 활동을 멈추고 의도적인 경직상태로 돌입하고 그로 인해 누적된 피로를 몰아내는 반복된 살기 위한 진화의 작업을 꾸준히 이어나가는지 모른다. 그것은 살아가기 위한 필요충분작용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주기적인 리듬과 규칙을 메트로놈의 정형화된 순서에 맞춰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이 구속이 될 수도 있거니와 갑갑함이 발목을 붙든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 한켠에는 새로움을 찾는 물질이 다량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어쨋든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는지 구부려져 얽히는지 움직이고 나아간다. 리듬이 얼만큼 벌어진 사람들을 태우고 기차는 목적지에 격한 숨소리를 내 쉬며 멈추기를 반복한다. 사람들은 기차 속 풍경과는 다른 사뭇 잰걸음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날아갈 듯 이동한다. 하지만 표정은 이전과 다름이 없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사람들의 눈빛은 밤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밤의 지배는 마법처럼 서서히 해가 제법 떠오랐을 즈음에나 풀리리라.
어지럽게 뒤엉키던 사람들을 뒤로 하고 서울역의 끈적하고 탁한 공기는 갈라진 간극의 틈입처럼 아득하다. 널부러진채로 간밤 도시의 혹독한 냉기와 오염된 시간을 버텨 냈을 노숙자들에게는 이 도시는 지겨울테다. 아니, 영혼을 붙잡혀 벗어날 수 없는 지옥경처럼 두렵다는 게 적확할지 모르겠다. 그들에게 서울역은 죽음의 광기와 삶의 집착이 들짐승처럼 배회하는 섬뜩한 곳일테니 말이다. 그들에게서는 원시의 공기가 느껴진다. 인간이 만든 도시화의 한 가운데에서 원시의 태고적 내음이 섞여 흐른다는 것은 지독한 아이러니다. 더 이상 밀려날 곳 없는 그들의 굴곡같은 삶, 보이는 대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락적인 허기를 채우는 그것보다 인간적인 위로가 더 필요할테니 말이다.
3.
마음은 실체가 없으되 취약하기 짝이 없다. 아침 나절 분주하게 펼쳐지는 이동에 위압당하고 덩그마니 찌를 듯 솟은 콘크리트에 짓누를 듯 무겁다. 파고드는 것은 현기증 뿐만 아니라 붙들 곳 없는 불안이다. 그래도 마음은 호기심이 앞선다. 별반 다를 것 없는 그들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은 언제나 생동감있다. 가벼운 접촉사고로 뒷목을 끌어 잡고 바닥에 나뒹구는 택시기사와 그악스러운 아주머니와의 신랄한 몸싸움을 구경하는 재미와 같다. 뭐, 달리 재미라는 감정외에는 구체적으로 형용할 말이 없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 대해 "불안은 삶의 조건이다. 삶은 하나의 욕망을 또 다른 욕망으로 하나의 불안을 또 다른 불안으로 바꿔가는 과정이다."라고 했다. 보통의 말을 풀이해 보면 하나의 불안이 해소되면 또 다른 불안으로 이동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말이 된다.
돌이켜 보면 불안은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재료다. 불안이 마음과 엉키면 평온은 부서지고 긴장은 고조되며 동요는 버무려진다. 불안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일정한 패턴을 가진다. 그것이 기쁨으로든 슬픔으로든 바뀌는 것은 불확실한 불안의 재료의 배합이다. 그렇다면 불안을 적절하게 조절 가능할까? 레시피에 맞춰 요리를 하 듯 불안을 몇 스푼만 첨가하면 최적의 상태, 즉 행복을 만드는 재료가 될까하는 거다. 그러므로 보통이 불안의 출현이 마음의 결핍, 사랑에서 온다고 했는지 모른다. 사랑은 불안을 중화시키고 희석시키는 최고의 첨가제다.
나를 사랑한다면 불안의 통제를 통해 삶의 만족, 행복을 얻는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걱정은 일의 경중, 익숙함의 정도, 환경, 주위영향에 다분히 관계를 맺는다. 걱정이 커지면 불안이 된다는 이치는 분명하다. 사소한 걱정이 불안으로 바뀌기 전에 유쾌한 긴장을 위한 평정의 상태로 바꾸는 것이 불안을 통제하는 수문통제소가 되는 셈이다. 이런 과정을 나는 빈번하게 반복한다. 걱정하고 긴장하며 불안해하고 믿고 통제하는 과정. 때로는 믿는 객체를 더욱 넓혀 신의 영향력에 기대는 것도 이와같은 의미와 같다. 마음은 앞서서 보았듯 실체가 없으나 형태는 다양하다. 마음을 드려다 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의 마음을.
p.s) 늦게 내려 온 밤, 말로의 위용에 놀라고 쓴 맛을 본 리뷰소식에 아쉬웠다.
마음은 또 안정보다 살아있음을 내비친다. 그래도 아쉽다. 결과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 단지 민망한 기대를 한 나 자신에게 아쉬울 따름이다.
p.s 2) 단연 최고라는 머쓱한 어느 님의 위로가 없었다면 아쉬움은 진하게
머물렀을지 모르겠다. 그 님의 진심이 담긴 말. 마음에 박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