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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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네트워크 전문가들은 지금의 시대를 인간중심의 세계라고 일컫는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시간 중 가장 번영한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는 중이다. 전 세계를 하나로 묶고 발생 가능한 정보의 획득과정이 만천하에 오픈된 사회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문화적 변화를 추동하는 동인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정치적 지각 판까지 흔들어 바꾸기는 계기가 되었다. 바야흐로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뉴욕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지구 반대편에서 생생하게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사건에 대한 각양각색의 반응이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세상이다. 대개 팩트에 대한 평가는 가치판단의 문제다. 가치를 구성하는 요인은 목적의식을 설정하고 자아의 기준점을 관념이라는 거름망을 통해 개별화된다. 이러한 가치판단의 문제는 철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철학은 인간이 집단화되고 사회를 구성하며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될 무렵부터 긴밀한 상관관계를 맺어 왔다. 그것은 가치관으로, 삶의 준거점으로 인간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시금석이 되어 왔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 즉 관념의 틀은 기술의 발달과는 별개로 변화의 속도에 둔감하다. 사회의 분화적 발달의 속도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며 근래에 와서야 개인의 권리와 자유, 행복, 평등에 대한 가치판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상대적 차별과 권리 상호간의 충돌에 대한 내재화된 문제를 잉태하고 있다. 토마스 홉스는 자연 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판단하고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야지 시민사회로 이행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반면 존 로크는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정은 자유이며 이러한 상태에 대한 타자와의 충돌, 즉 불편한 상태 혹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부에게 권리를 양도하여 국가를 창설하였다는 사회계약론으로 요약되는 그의 사상은 중세철학의 위대한 업적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가 다분화되고 가치충돌에 대한 문제가 다양화되면서 일차적인 기준점으로 모든 문제를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산업혁명을 거치고 인쇄술의 발달로 교육의 평준화로 인해 지식의 보편화는 그 자신의 권리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도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철학적인 접근, 미시적인 윤리의 보편화에 대한 판단은 유동적인 상황을 보편타당한 가치로 바꾸는 터전이 됨은 당연한 이치겠다. 마이클 샌던이 정의를 논하고 다시 도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문제의 출발선이 바로 개별화된 판단의 문제를 인식가능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것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다. 그는 이미 정의에 대해 불편한 환부를 드러내며 우리를 향해 핏대를 세웠다.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는 옳은 일은 하는 것이라고 했다. 옳은 일은 좋은 일에 선행하며 무연고적 자아, 즉 자율의지의 주체만이 인간을 감각적 존재보다 더 높은 존재로 격상시켜 준다고 했다.

 

마이클 샌던의 확고한 믿음의 원천은 옳은 일에 있다. 그의 논점은 임마뉴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의 핵심가치인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지향한다. 공리주의자들의 쾌락에 근거한 행복에 대한 오류를 수정하고 점검하는 방향틀로 그는 칸트를 택했다. 목적에 대한 견고한 신념, 그것은 윤리를 일으켜 세우고 이 시대의 딜레마를 무찌르는 힘이 된다. 기실 자유주의에 대한 접근은 앞서 언급한 존 로크의 사회계약론의 이념처럼 정부에 대한 역할의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다. 정부는 모든 권리를 이양 받아 개개인의 권리형평에 맞게 적용하여야 한다. 하지만 마이클 샌던이 이 책 <왜 도덕인가?>의 1부에서 언급한 동성애자, 낙태에 대한 가치충돌의 문제에서 볼 수 있듯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옳다는 관념의 총합은 인간의 도덕적 판단의 튼실한 자원이 되며 나아가 보편타당한 정치의 틀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는 믿음이다.

 

그가 자본주의에 점령당한 인간 본성의 문제를 푸는 키워드로 철학과 윤리의 카드를 꺼내든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의 창이기 때문이다. 속임수가 횡행하고 무관용이 판을 치는 이기적인 행동을 치환하는 방편이 될 것이다.  마이클 샌던이 주장하는 철학의 문제는 비단 미국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미 글로벌화되고 웹 2.0시대를 사는 우리 사회에 그의 명징한 통념은 화두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의 전작 <정의란 무엇인가>의 문제와 연결되는 도덕성 결여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현재 위치를 제대로 보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물론 철학은 고민과 고민의 시간이 응집된 가치의 총체다. 공감의 문제와 밀접하다. 공감은 역차별이나 상대적 반사이익을 옳은 것으로 유지하는 근거가 된다.

 

이처럼 마이클 샌던이 던지는 이 시대의 화두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자신의 권익과 자유의 근원적인 뿌리가 되는 윤리에 대한 진중한 문제다. 우리 사회가 정의와 윤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 또한 불편한 상태가 지속되기 때문인지 모른다. 누구에게나 인식 타당한 가치의 얼개를 구축하는 사회적 합의의 출발점에 바로 정의와 윤리가 존재한다. 이것은 완전한 상태의 이상理想, 그 너머가 아닌 현실의 내재된 이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치열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가 될 것이며 다원주의를 극복하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는 존재의 판단이 아닌 현상을 이해하는 목적이 될 것이며 인간을 한 차원 높은 상태로 이끄는 정신적 진화의 도화선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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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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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쌍성(雙星)의 밀고 당기는 힘처럼 자연의 법칙이다. 음과 양, 사물의 겉과 속, 어디든 존재한다. 듀플렉스처럼 상호 독립하여 병존하지만 불가분이다. 인식이 스치는 모든 곳, 더블이 지배한다. 획득가능한 모든 것에 더블의 관념이 기운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인간에게 실현가능한 변수의 조합은 더블의 관념에서 발현하는지 모른다. 박민규 작가의 더블에 담긴 그 의미, 행과 불의 경계이다. 상상과 현실의 테두리를 넘나들며 마치 우주의 언어나 미래의 언어로 기록된 그의 문학세계는 자연법칙을 담고 있다. 자연은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말한다. 이는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를 가리킨다. 때론 섭리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섭리는 인간의 관념을 고착화하기도 한다. 당연한 인과율의 법칙, 그 속에 지배된 인간의 불완전한 의식은 새롭거나 기이한 상태를 두려워한다. 따라서 박민규의 이 책 <더블>의 단편은 연역적 관계를 차단하는 존재의 반항을 오롯이 천명한다. 그의 생각의 틀 속에서 짜여 나온 이야기의 실재는 기존 관념의 존재를 포섭과 파괴의 양립된 현상으로 병존하며 평행선을 내달리는 가히 더블의 연속이다. 그의 이러한 시각은 중어의 반복을 통해 공고히 다져지고 흡입된 관념의 거름망 속으로 박민규式의 언어로 재해석된다. 그의 이야기는 그로테스크한 상상의 변주다. 현실이 존재한다면 상상이 존재한다는 실체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21세기를 사는 동시대의 인류에게 전하는 공감의 또 다른 코드라고 할만하다.

 

<더블>은 총18편의 단편 선으로 두 권의 양장본으로 묶였다. 형태는 디스크자켓처럼 작품의 본질을 적확하게 제시하는 일러스트와 작가의 소회로 구성되었다. 박민규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생각, 흔적 등을 특정의 누군가에게 헌정하는 방식으로 틀과 형태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의 시도는 규격의 틀에 재단된 눈과 마음을 유연하게 해 준다. 기실 18편의 단편에 담긴 각양각색의 에피소드를 구성한 그의 방대한 창작력에 경의를 표하게 되지만 겉과 속에 담긴 각기의 본질을 은연중에 시각화시켜 주는 그의 배려가 더욱 도탑게 다가선다. 생각이 곧 문화가 된다는 사실처럼 그의 이야기 속에는 범 글로벌문화를 표방한다. 지역과 우주를 가르는 광활한 무대배경, 도시인의 고독한 삶, 인간의 존재의미를 다루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펼쳐지는 반전과 허무의 일상 등이 고스란히 차오른다.

 

트렌드나 문화의 일종이라면 <더블>은 지구의 언어가 해석가능한 모든 언어로 표현되고 공감할만한 소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견고한 상황을 가볍게 무너트리는 공력, 그의 필력이다. 인류가 탐욕에 의해 멸망하는 절체절명의 암흑의 상황을 층간소음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일상과 포개는 그의 상상력의 빚어낸 이야기 <끝까지 이럴래?>. 인간에게 더 시급한 문제는 사소한 불편의 해결일지도 모른다는 불변의 진리인지 모른다. 이러한 사실은 BC1700년전 한반도를 무대로 한 <슬>을 관통하는 관념과 일맥상통한다.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욕망의 해갈의 근원적인 물음도 사소하거나 단순한 지점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박민규의 이야기에 걸려든 관념의 거름망은 인간의 의식을 양분하는 갈래의 커다란 경계를 해체하고 분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관념은 18편의 전편을 지배하는 공통의 메타포이다.

 

그래서 더블의 중첩적인 시선으로 이 책에 담긴 이야기 지도를 따라가다 보면 박민규의 관념에 포위당하고 공감의 마법에 어김없이 걸려들게 된다. 치명적인 유혹이거나 감미로운 선율이든 시나브로 젖어드는 그의 이야기의 깊이에 지구의 해저 끝까지 압력의 밀도가 차오르는 <깊>에 주억거리게 되고 <아치>에 올라선 현대인의 불일치에 동조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더블>의 안에 담은 이야기를 동일한 패턴으로 구동시키지는 않는다. 생각의 엔진을 가동하고 가열되고 분사된 에너지로 가속의 변속을 폭발하듯 그는 우주로 날아가고 시공을 넘나든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크로만, 운>이다. 묵시록적인 소설인 이야기는 뉴질랜드의 작가 버나드 베켓이 쓴 <2058 제너시스>와 궤를 같이 한다. 박민규의 이야기가 인간의 존재의미를 고찰한다면 버나드 베켓의 이야기는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를 철학적인 시선으로 묻는다. 이러한 박민규식 해학은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에 보다 정확하게 드러난다. 스나이프, 동성애, 무차별 처단, 배설, 섭취의 일련의 행위들에 따라 전혀 어울리지 않을법한 조합의 인자를 상대로 엉뚱한 곳에 불시착한 느낌처럼 낯선 감각을 토해낸다.

 

때로는 이렇게 낯설고 거친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더 자연스러운지 모른다. 그가  생뚱맞은 상황을 현란하게 주무르고 고정된 퍼즐조합을 이것과 저것의 지칭을 혼합하는 작업을 선행한 것처럼 뒤따르는 결과물 또한 자연과 부자연의 경계를 구획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독자의 예상을 빗나가는 반전이나 재미의 요소를 가미하기 위해 조합의 재구성을 시도하였다는 결론은 성급하다. <루디>의 냉혹하고 인과관계가 단절된 행위를 보면 미루어 짐작이 가능해 진다. 절벽의 끝, 폭풍 같은 질주로 마감하는 장면은 인간의 욕망이 브레이크 없는 전차와도 같다는 무지한 현실에 다다른다.  따라서 박민규가 그의 단편 하나에 실은 의미의 총합은 여지 혹은 공백을 통한 공감의 유도나 해석으로 가능케 한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보이는 세계, 보지 못한 세계, 다다르지 못한 세계, 정복하였으나 오류로 점철된 세계를 무시로 경험한다.

 

과연 인간이 가 닿을 수 있는 경험의 거리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박민규의 이 책에서 하나의 답을 보았다. 우문현답이 아닌 현문우답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상상력의 뭉치에서 무엇을 만들지는 개별의 몫이다.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에 등장하는 잘 나가던 세일즈맨의 비극적인 현실처럼 붙들 곳 없는 현실에 매달려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기운다. 화성으로 자동차를 팔러 가고 그 곳에서 만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흑인 세일즈맨과의 동질의 교감, 황망한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하기에 나는 <더블>의 세상에서 희로애락의 4중주를 만끽했다. 진실과 거짓의 양면 외투처럼 세상은 그렇게 움직인다. 스테파니 아가씨가 보았던 그 <별>이 곱디 고왔다면 박민규식 <별>에 쏟아진 풍광은 현실이다. 결국 세계는 양면, 듀플렉스의 반영이며 더블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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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17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민규 다른 책 주문했더니,소책자가 왔더라구요.
다른 분 서재 글 보고 망설이고 있었는데,이 리뷰 보니 읽고도 싶어지는 걸요~
별의 해석도 재밌구요~
요즘은 양면,더블이 대세인가 봐요,하루키의 1q84도 그렇담서요~^^

마녀고양이 2010-11-1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리뷰 보면서 입 벌리고 감탄 중입니다.

곡우님께서 별 다섯개를 주셨다니, 어쩐지 믿음이 갑니다. 최근 들어
국내 작가에게 너무 많은 실망을 했던터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만...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저도 리뷰를 보면서 1Q84를 연상했는데, 나무꾼님두 그렇게 보셨나보네요.
세상의 양면, 또는 현실과 이상, 선과 악,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곳들, 데미안도 생각나구요.

좋은 하루되셔요.

穀雨(곡우) 2010-11-1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철나무꾼님..더블이란 제목이 주는 인상, 전 양면성으로 보았어요.
자웅동체처럼 늘 붙어 다니는 자연적인 법칙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1Q84의 구조와 비슷하게 나아간 모양입니다.

마녀고양이님...박민규의 책을 드문드문 접했지만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구조가 흡족하더군요. 이야기에 따라 달리 해석가능하겠지만
제게 그 네러티브가 맞았던 모양입니다.^^

비로그인 2010-11-18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쯤되면 본 책보다 리뷰의 심도가 더 깊다고 봐도...^^
곡우님의 넓고 깊은 감상이 더블과 함께 따따블로 버무려진 감동 그 자체입니다.
얼른 읽어야 하는데, 어흑~~밀린 책들이...^^

穀雨(곡우) 2010-11-19 13:19   좋아요 0 | URL
아~~박민규 작가님이 읽으면 웃겠습니다.^^
그래도 기분 좋은데요..ㅋㅋ
 
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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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2.0 시대를 사는 요즘, 글은 생활이다. 때로는 말보다 글이 편할 때가 있다. 글은 음절과 음절을 이어 단어를 만들고 다시 문장을 형성하는 동안 생각은 다듬어진다.  비록 상황에 따라 글은 퇴색되고 왜곡되는 경향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반해 글이 가진 파급력은 무차별적이리만큼 크고 넓다. 그러므로 어디서든 글을 잘 쓰는 재능 혹은 자질을 가진 이를 부러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동일한 상황을 해석하는 힘, 능력이 남다르다면 그 또한 축복이겠다. 계절이 피고 짐에 따라 감정의 중추가 미묘하게 반응하는 상태를 문장으로 복기하듯 옮겨 내는 능력은 부럽고 또 부럽다. 정수리로 떨어지는 햇살의 양태를 마치 감촉이 손끝으로 전달되어 짜르르 퍼지게 하는 감각의 전이는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의 드넓은 세계로 안내하는 훌륭한 길라잡이가 된다는 사실이다.

 

글은 누구나 쓰지만 마음을 요동치게 하기는 어렵다. 그러하기에 창작을 뜯어 먹고 사는 작가의 고통과 독자의 즐거움은 반비례한다고 했다. 읽거나 보거나 듣거나 그 결과는 냉혹하다. 진심으로 짓겠다는 흔해 빠진 광고처럼 간결한 진심은 궁즉통이다. 이 책 <라이팅클럽>의 저자 강영숙 또한 그런 동질의 감정에서 출발한다. 작가가 되기 위해 어마 무시한 시간을 인내하고 마치 소믈리에가 최적의 와인을 선별해 내 듯 문장을 끄집어낸다. 그렇게 선택된 문장은 감정의 틀 속에 숙성을 해야 비로소 글이 된다. 그러므로 잘 된 글은 진심이다. 진심이 결여된 글은 형식에 불과하다. 유행에 휘둘리듯 흘러가는 부유물이다. 누에로부터 실을 추출해 내는 그 사소하고 반복적인 행위들이 모여 윤기 나는 비단이 되는 것처럼 잘 된 글에서는 윤이 난다. 읽는 자는 귀신처럼 알아본다. 무엇이 잘 된 글인지에 대해.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강영숙의 문장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 조각에 불과한 미묘한 상황 변화에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힘이 탁월하다. 그래서 같은 문장으로 쓰인 글이라도 상황의 가변성에 적확하게 어울린다. 보기에 따라 기교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겠으나 그것은 강영숙의 색깔임에 분명하다. 이 책의 소주제인 설명하기와 묘사하기의 형식처럼 작가는 이 책의 중심 배경인 계동의 모습과 인물의 상호 연관성에 대해 온기를 불어 넣어 준다. 실제 이 글을 읽는 동안 창작을 한다는 것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구하게 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절묘하게 버무려 내는 작가의 글에 감탄하고 또 공감한다.

 

라이팅클럽과 계동 글짓기 모임, 양극단의 문장이나 같은 내용이지만 질감은 다르다. 작가를 자칭하는 엄마를 둔 사생아 딸과의 이야기다. 둘은 견원지간처럼 사이가 벌어져 있지만 동일한 지점을 지향한다. 바로 글쓰기다. 글을 쓰기 위한 몸부림을 토해 내기 위해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라이팅클럽과 글짓기 모임이다. 그래서 책은, 두 여자의 글쓰기를 추적하며 글을 잉태해 내는 과정을 뒤쫓는다. 구르고 뒹구는 삶의 파란만장한 편린들에 대해 작가는 글쓰기로 묘사하며 집중한다. 간결함 속에 강렬한 색감이 뒤섞여 튀어 나오는 느낌이다. 무덤덤해지기 쉬운 혹자의 인생을 호기심으로 뒤채는 능력이 결부되었기에 있을 법한 이야기가 된다. 또한 강영숙의 이 글 속에는 다양한 시각들이 혼재한다. 무기력하고 나른한 인생을 살아가던 주인공 영인과 관계를 맺는 인물들의 다양성은 광각의 확장처럼 파노라마로 꿈틀댄다.  정체성의 혼란, 질풍노도의 시기와 같이 누구에게나 지나쳐 가는 통과의례처럼 인생의 그렇고 그럼에 대해 작가는 관조적인 언어로 대응해 준다. 음각과 양각처럼 감정의 기복이 심한 어머니는 대척점에 가 선다. 수평의 균형을 맞추듯 이야기는 내용의 독특함에 반해 안정감이 느껴진다.

 

돈키호테의 무모함이 때로는 자신의 꿈을 향해 걸어 나가는 커다란 견인차가 되기도 한다는 과정을 용기라는 의미로 교차시키며 시몬느 베이유의 <노동일기>와 잭 플로베르의 <통상 관념 사전>의 문장들을 슬쩍 슬쩍 삽입하며 글쓰기의 고통을 노동의 직접적인 대가, 진정성에 비유한 전개는 인생을 조망하는 관점의 일치감을 형성하는 모티브가 된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어제와 오늘의 생활이 달라진다 할지라도 여전히 글은 간결하다. 영인이 엄마의 히스테리를 혐오하며 닮기를 거부하지만 어느새 닮아 있는 두 여자의 모습이 오히려 능청스럽다. 결국 둘은 의도하고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자신만의 언어와 시선으로 세상을 향해 소리쳤던 셈이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처럼 맴돌기만 하던 이야기의 끝이 하나의 합일을 이루어 내며 계동을 감싸주던 햇살처럼 공감을 이룬다.

 

공감의 언어는 글쓰기의 존재의미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간절히 바라는지에 대한 밀접한 관계다. 누구에게나 2박3일을 꼬박 지새울 사연 하나쯤은 있듯 개별적인 삶은 다르나 본질은 같다. 그 속에서 스며든 사연의 흔적은 우여곡절이 만든 삶의 침전물이다. 토해내지 못하고 삼킬 수밖에 없었던 각자의 사연을 글은 갈무리하고 단정하게 변화시켜 준다. 강영숙의 글쓰기, 라이팅 클럽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농밀한 언어로 정제된 문장을 선보인다. 글을 단순히 관계를 매개하는 수단이 아닌 자신을 투영하는 하나의 성숙한 감각의 무엇으로 활용하는 길을 보여준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라이팅클럽>에 모인 그들 모두는 사실 우리 각자의 모습이다. 글은 그렇게 읽히고 퍼져 나가며 공감하게 되며 관계를 묶는다. 만약 글쓰기에 목말랐다면 망설이지 말고 이 책을 보시라. 울고 웃는 사이 묘사와 설명이 절로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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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17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 몰라서 망설였는데...이 책 조용히 회자되더군요~^^

穀雨(곡우) 2010-11-18 13:14   좋아요 0 | URL
여성 특유의 감각이 착 감기는 책이지요.
촉감의 시각화라고나 할까요?^^
 
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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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은 옹색하고 투박스럽다. 또한 불편은 익숙해지면 무기력해진다. 우리 사회에서 불편의 자리는 지천으로 널렸다. 그런데도 불편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매우 상대적이다. 불편에 대한 시선이 불협화음을 퍼트리는 불잉걸처럼 홧홧한 뜨거움이기도 하지만 무섭도록 시리고 차갑기도 하다. 이러한 불편의 이중성은 사회문화적 현상과 밀접하다. 불편을 조장하고 당위성을 부여하는 내밀한 속내는 권위, 계급, 신분, 지배의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부속물과 같다. 불편이 곧 차이라는 등가공식이 성립하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엄청난 괴리감을 발견하곤 한다. 관계로부터 오는 차이의 존재적 필연성을 의식하되 엄연한 경계는 구분짓겠다는 논리다. 시쳇말로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편중된 논리처럼 바꿀 수 없는 차이 또한 불편의 범주로 내몬다.

 

이러한 불편의 이중성에 대해 나는 가식과 허위가 조장한 비뚤어진 관계망이라고 본다.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의 근원적인 차이를 고려할 때 불편의 개념은  지배와 피지배, 즉 종속관계에서 기인한다. 이 책 <불편해도 괜찮아>의 김두식 교수의 생각의 거름망도 엇비슷하다.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뭔가 다른 요소들이 개입되면 어김없이 되돌아오는 용수철처럼 불편의 완고함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실제 우리 사회의 곳곳에 스민 갈등과 알력의 문제 또한 불편을 예고하는 전주에 다름 아니다. 김두식 교수가 불편의 패러다임을 비추는 도구로 우리 사회를 가장 밀접하게 투영하는 영화를 소재로 다루며 이 책을 이끌어 가는 방법도 실상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익숙해져 묻혀 버린 색다른 시선의 세상을 탐색하고 활로를 찾아 드려다 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기까지 하다.

 

기실 이 책에서도 언급이 되지만 영화에 대한 일차적인 정보는 미디어가 생산해 내는 정보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다 보면 제작자의 방향성과 배급자의 실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병합되어 왜곡되는 정보를 재상산해 내게 된다. 영화를 고르고 선택하는 권리는 소비자에게 있지만 여론의 조장, 정보의 독점성, 제작자의 상업성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상당한 정보의 어그러짐에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책의 기본 얼개가 된 영화를 통한 인권의 실상을 드려다 보는 도구로서의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소위 검열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제다. 단지 김두식 교수가 통념의 잣대를 버리고 색다른 시각의 틀을 부여하는 시도와 노력이 읽는 이에게 더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김두식 교수가 이 책을 통해 공감대를 발화시키는 힘의 원천은 말로 꺼내기에는 불편하고 오염될 것 같은 미적거림의 경계에서 오는 과감한 용기와 도전이 아닐까 한다. 인권의 사각지대를 헤아리고 우리 사회에 소외된 삶을 보듬는 사회 통합적인 의식의 무장은 때론 좌파나 이념의 희생양으로 지목될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는 집단의식에 의해 쉽게 고무되고 휩쓸리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그러한 심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김두식 교수가 이 책에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금세 이해된다. 영화 "밀양"은 기독교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포장하고 왜곡하는 과정을 사실적인 묘사와 미장센이 돋보이는 유명짜한 영화다. 인물 한명 한명이 마치 어느 곳에서나 흔히 대할 수 있는 종교인의 행동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주인공으로 분한 전도연의 신들린 연기가 완벽하게 일치하여 짜임새있게 돌아 가는 잘 만들어진 영화다.  

 

 

그런데도 인권의 왜곡문제는 이곳에도 예외일수는 없다. 이 영화가 광주학살사건을 소재로 영화화한 것이라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이 책에서는 불편의 존재를 인정하는 비현실적인 시선에 머문다. 기독교의 교리와 인권을 유린당한 이해관계는 합리적인 시선을 요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되려 무리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이치와 대동소이하다는 것은 기정 화된 사실로 이해된다. 이와 같이 인간적인 권리를 포기하게 하고 굴복시키는 차이를 생산해 내는 우리의 고착된 시선을 향해 이 책은 진중한 물음을 던진다. 이미 타성의 틀에 구겨져 불편의 범주에 포섭되지 않는 불편의 불인식 내지는 비현실성에 대해 김두식 교수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통찰한 흔적과 마주친다.

 

이렇듯 왜곡된 시선의 향방을 김두식 교수는 우리 사회의 전 방위적인 공간에서 찾았다. 그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통해 편안한 어조의 높임체로 유쾌하게 포문을 연다. 사춘기를 통과하는 아이들의 질풍노도의 시기에 대해 살가운 묘사로 점화하여 제도권 교육의 인권차별에 대한 문제를 예리한 시선의 칼날로 어둡고 음습한 문제의 치부를 곧잘 드러내 보인다.  책은 교육문제, 성소수자차별문제, 여성폭력문제, 장애인인권문제, 노동자문제, 종교와 양심의 자유문제, 검열과 표현의 자유문제, 인종차별의 문제를 대중성 짙은 영화 혹은 실험영화나 드라마를 연계해서 여태껏 인식하지 못했던 가려진 문제의 진실에 대해 인도한다. 끝으로 인권의 종착역, 제노사이드(대량학살)의 문제를 밀도 있게 다룬다.

 

인권의 문제를 이해하는 방법에는 인식의 전환 또한 중요하겠으나 행동의 문제가 우선이다. 이성적인 사고와 길들여진 관습의 타성과의 간극이 멀고 높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양극화문제에 대해 미디어의 웅변적인 호소도 실제는 부러움이 유발하는 욕망에 뒤쳐지고 만다. 물질만능주의의 세상에서 인권의 문제를 해결하기란 어렵고 또 어렵다. 그러므로 인권을 대하는 상대성에 대해 태도가 변해야 한다. 기존의 문제를 푸는 해결책으로 다양하고 개성있는 목소리들을 하나의 틀에 가두어 일원화시키려는 획일성이 문제였는지 모른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인권의 보장을 위한 핵심은 자유와 책임의 조율이 관건이다. 자유가 지나치면 방종이 되고 책임이 지나치면 구속이 된다. 그러므로 이 책에 소개된 인권이야기는 마른 땅에 단비처럼 달게 느껴지며 부끄럽게 만든다.  김두식 교수의 인권감수성에 대한 올바른 시선이 행동의 중심을 곧추 세워 줄 다양한 채널이 될 것이기에 더 반갑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인권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는 명제를 떠올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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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1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1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10-22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뜻 불편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몸의 불편함을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리뷰를 읽다보니 마음의 불편함이 더한 문제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구석에서 옳다는 것을 알지만,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왜면하고,
왜면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더 왜면하고.... 그런거겠지요?

지난번 타서재에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봤었는데, 오늘 다시 보니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穀雨(곡우) 2010-10-22 17:13   좋아요 0 | URL
마음의 불편을 잊고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책을 통해 보았습니다.
다름에 따른 차별을 나누는 시선의 편견이 거만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진실도 함께 보았구요. 좋은 책입니다.

2010-10-22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2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을이 깊다. 계절의 변화에 예민해지면 나이를 먹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가을이라는 특정 계절의 질감에 대해, 변화에 대해 시나브로 생각의 메카니즘이 작동하는 것이 해가 바뀔수록 다르다. 그런데 요며칠 정신이 어디로 밀려 났었나보다. 지난 주말께 집안 대소사로 인해 바빴던 탓도 있었겠지만 건망증이 번졌다. 나는 아주 사소한 정경을 정확하게 기억해 내곤 했다. 심지어 아침 출근길에 매일 그 시각 그 장소에서 부딪히는 낯선이의 실루엣까지 저장해 놓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건만 지금은 방금 떠올리고 뱉은 생각조차 깜깜할 지경이다.  

세월의 흔적이 지나간 영향이겠지만 이번 일은 지독했다. 열감기를 앓은 후의 몽롱한 상태가 줄곧 이어진 느낌이랄까. 어쨋든 나는 휴대폰을 잃어 버렸다. 최신의 성능을 자랑하는 휴대폰은 아닐지라도 그 속에 담긴 많은 이들의 손전화가 한순간 증발하는 순간이었다. 며칠을 뒤지고 또 뒤졌다. 행적을 뒤 쫓아 과거로 소멸한 시간을 추적했다. 추적은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히고 그때마다 건망증은 기승을 부렸다. 드디어 나에게도 건망증의 시간이 보태어지는구나! 가을과 건망증이 어울릴까? 계절의 변화에 심리 상태가 기억의 전조를 잃고 방황하는 역학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학계에 보고된 내용을 뒤적여 본 적은 없건만 무관하지 않은 쪽으로 마음은 이내 기운다.  

괜시리 건망증으로 인해 짜증은 사방으로 튀었다. 옆지기는 채근하듯 말을 썪어 오지만 눈치를 보기에 급하다. 덩달아 장모님까지 온 집안을 뒤지고 또 뒤진다. 감정의 변화는 기필코 생채기하듯 공기의 흐름을 바꾼다. 냉랭하거나 혹은 무겁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어색한 상황이 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안다. 도망칠수도 부인할 수도 없다. 이미 건망증이 유발한 소득없는 흔적찾기를 시작하였으므로 이제와서 무효로 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아니, 자존심이 허락치를 못한다.  

아닌 것을 알면서도 부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 그것은 자존심과 밀접하다.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휴대폰처럼 나는 상실의 위기에 몰린 자존심을 거머쥐기로 작정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무위로 끝날 것을 알면서도 눙치듯 흔적찾기를 종용하고 재촉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결과는 이미 명백하다. 마치 머피의 법칙에라도 걸린 것처럼 허망하게 끝난다. 그날 나는 가을 양복을 갈아 입고 상의 안주머니에 넣은 뒤 나서려는 것을 옆지기의 조언으로 다른 옷으로 갈아 입으면서 재차  옷장으로 직행했던 모양이다. 분명 옷장 속, 옷 속까지 낱낱이 파헤쳤건만 당연 그 곳에는 없을 거라는 만용이 부린 단정은 건망증의 덫에 걸린 결과다. 

한차례의 소동 끝에 나의 부서진 자존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헛헛한 기운만이 안겨왔다. 그것도 나이를 탓해가며 객적은 실소만을 날리며. 그렇게 시작된 해프닝은 득실을 논할수는 없지만 요즘 시류의 대세인 스마트폰으로 갈아 탈까하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도 이 때문이다. 애꿎은 옆지기만 숨 막히게 하였으니 나름의 보상기제가 발동하여야 한다는 괴상한 논리다. 아직 젊다 생각한 나이에 밀려난 성큼 다가 선 세월의 위력에 실은 겁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건망증으로 시작한 해프닝이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비정형한 연결고리에 나 또한 황망하지만 탐이 난다. 성능과 휴대성에 비해 고가의 비용과 유지비용이 적지않게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시간 접근성과 편의성을 따진다면 만족감이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자기최면식 합리화로 치닫는다. 이미 마음의 8할을 빼앗겼다. 물론 아직까지 목하 고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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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1 09: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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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1 11: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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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0-21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에 스마트 폰으로 바꾸신 분들 보니, 멋지더라구요.
작은 노트북 같은 느낌으로 스케줄 관리며 인터넷 검색이며.
저야... 전자기기 썩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버팁니다만. 아하하.

저도 참 사소한 기억 좋고, 생활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이 좋았기에
남들의 건망증 이해 못 했는데...... 스트레스에 받치는 만큼 점점 단기 기억 상실증이 찾아오더군요. ㅎㅎ
이제는, 아 맨날 까먹고 민폐끼쳤던 모모양이 고의로 그런건 아닌갑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穀雨(곡우) 2010-10-21 11:09   좋아요 0 | URL
지나고 보니 건망증이 심한 사람들의 심정을 알겠더군요.
사람은 그 입장이 되지 않고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나 봅니다.^^

2010-10-21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1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1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1 14: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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