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1인용 식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1인용 식탁
윤고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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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경하다. 그런데도 전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뭘까? 만약 고독의 층위가 분절되고 나뉘어져 있다면 누구든 그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 고독은 누구나 공감하고 부정할 수 없는 교집합의 공통분모다. 소외든 고립이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어김없이 깊은 나락으로 빨려 들어 가 버릴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흔히 고독한 섬에 붙들어 매곤 한다. 대중 속의 고독, 아이러니컬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완강히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또한 누구나 소통에 목말라 하며 해갈되지 못하는 공감의 목마름에 허덕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일인용 식탁>은 고독을 노래한다. 옴니버스로 단락과 장을 구분 짓지만 공통된 메타포는 고독이다. 고독을 이토록 보기 좋게 버무려 낸 젊은 작가 윤고은의 글발은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어디서 이런 고소한 팝콘처럼 아삭하게 톡톡 튀겨 볶아진 글이 나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총 9편으로 구성된 이야기는 나름의 아우라를 뽐내며 사뿐사뿐 도도한 시선을 내 지르는 힘에 금세 압도당하고 매료된다. 여태껏 이 생각을 왜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가 만든 상상력은 현란하다. 하지만 글과 글 사이에 들어앉은 행간에는 어떠한 기교도 없다. 건조하게 엮어진 문장만이 스미듯 여미듯 관통한다. 이것이 그미의 필력일까? 무언가를 기대하고 따라간 그곳에는 텅 빈 허무만 존재하는 느낌이랄까? 긴 일탈 후 무겁게 짓누르는 허무함이 이와 같을지도 모른다.




        <일인용 식탁>은 도시적 삶의 코드를 통해 매몰되고 소실된 인간을 그린다. 그 자장의 범위 내에서는 혼자서 당당히 식사하는 법을 터득하고, 꿈도 대신 꾸어 주며, 달콤한 휴가 내내 빈대에 굴복당하고, 퍼즐을 맞추듯 인베이더 그래픽을 찾으며 일탈을 꿈꾸는 누군가의 모습이 투영된다. 그녀는 주인공들의 성 정체성을 체계적이며 의도적으로 뭉개 버린다. 이를 통해 중성적 대상, 즉 모두를 향해 누구나 그러하리라는 내밀한 공감을 이끌어 내며 원하는 종착점으로의 유인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결국 소설 속 화자들이 곧 당신일수도 아니면 작가 자신일수도 있으리라는 든든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함께 오롯이 만끽해 보자는 심산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에 더해 저자의 발칙한 상상력은 당신 안에 잠자던 감성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작가의 문화코드 짚어 내기는 터를 제대로 잡았으며 주춧돌이 튼실하다. 정이현 작가의 <달콤한 나의 도시>가 현실의 모습을 반영하며 거울에 비쳐 퍼진 영상을 복기하는 것과 같다면 저자의 글은 현실과 상상이라는 이스트가 황금비율로 첨가되어 숙성되고 부풀려진 빵처럼 입체적이다. 하지만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공갈빵처럼 쉽게 오그라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홍도야 울지 마라>의 박홍도가 베어 문 솜사탕의 자괴감과 허무함이 오래도록 여운으로 입 안 가득 퍼지는 연유와 무관하지 않다.




        고독은 현실 속을 점령한 빈대처럼 상상만으로도 불쾌해 진다. 불쾌감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벗어나고 이성은 빠르게 부유물처럼 떠내려가 버린다. 비단 이러한 현상은 도무지 믿기 어렵지만 현실에서도 종종 일어나곤 한다. 그러니 그녀의 상상이 허무맹랑한 가십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텁텁함에 거북스럽다. 아픔으로 뱉어 내기에는 사소하고 보편적이다. 그것은 광범위하게 퍼진 삶에 무게라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때문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배이고 아프기 마련이다. 상처는 시간이 보듬고 무뎌지게 하지만 고독이 훑고 지나간 자리는 피어싱의 날카로운 단말마처럼 차가운 냉소가 자리 잡는다.




        폭설이 쏟아지던 날 삶에 치이고 더 이상 추락할 곳 없는 성인용품 플라토닉 러브 자판기 판매상의 이야기는 상상과 공상의 어느 경계에서 솟아 난 것처럼 가뭇없어 보인다. 냉소 가득한 현실의 절규에 비례해 짜부라지는 화자의 모습과 현실 속 우리가 짊어진 삶의 무게와 동일시되는 것은 치열한 경쟁이 낳은 산물이리라. 고립되어 벗어나지 못하는 속박된 삶의 그늘처럼 야생의 거친 숨소리만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인지 인간미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절규하는 것인지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혼자서 폼 나게 식사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학원이 등장하고 메트로놈에 맞춰 음식을 주문하고 부지런히 먹는 법을 습득하는지 모른다. “나 홀로식사“의 지존은 뭐니 뭐니 해도 삼겹살 공략이다. 그것은 일정한 규칙을 허용하지 않는다. 고립된 쇼 윈도우에 갇힌 존재처럼 쏟아지듯 내리 꽂히는 눈길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견뎌야 하는 살벌한 영역이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과 멀지 않게 존재한다. 숨이 막히고 호흡이 가빠지는 일이 무시로 일어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곳의 경계는 우리를 필요 이상 긴장하게 만든다. 연결된 장면이 끊어지기를 반복하며 상황을 건너뛰고 고립된 상황의 재현이라면 우리는 쉽게 궤도에서 이탈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누군가와 함께 라는 심리적 담보에 의해 무탈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혼자는 여전히 민망하다.




        상상이 이처럼 지독하게 현실을 외면한다면 기대한 바와 다르다. 상상은 그저 꿈처럼 말랑말랑하고 블링블링하기를 원한다. 그래야 몽상가의 설렘처럼 조금은 허무하지만 도탑게 다독여주고 위무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작가의 상상은 현실 비틀기를 통해 날것 보다 더 생생하게 버무렸다. 오히려 무게에 눌려 분출된 억압의 잔재를 두텁게 덮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므로 생경한 상상은 현실과 유리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상상력이 현실과의 적절한 균형을 통해 희망을 읊조렸다면 더욱 유연해지지 않았을까. 결국 상상은 현실을 담보로 시작된 형체 없는 바람에 불과하며 소멸을 예정한 신기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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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8 제너시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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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풀리지 않는 명제命題가 무수히 존재한다.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심오한 철학의 문제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의 미제다. 과학의 출현이 명제를 점령하고 인간을 이해하는 도구는 될지언정 근본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은 항상 불온해진다. 이처럼 인간이 증명할 수 있는 모든 인식의 범주는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기댄 상상에 불과한지 모른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사이보그처럼 조립과 결합의 과정을 통해 창출된 기계에 담긴 정신의 사유는 어디까지나 무의해진다. 하지만 무의미에 대한 증명은 오롯이 인간의 현재의 범주로 재단한 논거다. 존 코너가 세계를 구원하고 무자비한 터미네이터가 존재하는 그 세계처럼 기계를 벗어난 또 다른 증명되지 못한 정신의 총아가 존재하지 말란 법도 없지 않겠는가.




        이 책 < 2058제너시스>은 미래의 가능성을 들여다 본 허구가 빚은 이야기다. 인간의 탐욕과 배타성으로 세계가 몰락하고 지구의 귀퉁이 어느 한 작은 섬에 살아남은 인간들에 의해 기록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책의 특징은 상상력의 탄탄한 토대위에 세운 과학철학에세이에 근접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진화의 종착역을 과학의 프리즘을 통해 펼쳐 보이며 고대철학의 관념을 결부시켜 분절하고 다듬었다는 사실이다. 저자 버나드 베켓은 경제학 전공에 과학 교사라는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의 인문학적 통찰력과 과학의 실증성, 철학의 확증성이 결합하여 탄생한 이 책은 결론을 뒤집는 놀라운 반전만큼 시선을 잡아 끌어매는 매력이 넘쳐나는 이야기다.




        실제 미래의 사실은 예측이라는 확률의 무대 위에 서 있다. 파생가능한 모든 개연성이 현재와 결합하여 빚어 낸 것이 미래다. 그러므로 저자가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 추출해 낸 미래의 현실이 공상에만 그치란 법은 없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실현가능한 상태인지를 논하기 이전에 그 속에 담긴 실체의 이면을 이해하는 것이 이 책을 보는 또 다른 맛이다. 아울러 이 책의 얼개는 대화체를 통한 관점의 유연한 이동이 현실성을 증강하는 요인이 된다. 액자의 틀에 솟아 난 구멍처럼 바깥과 안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며 자연스럽게 몰입을 유도한다. 몰입된 관점은 관념을 위무하고 본성을 통찰하게 된다.




        또한 저자는 아낙스라는 대상을 통해 아담이라는 인물을 평하고 사이보그에 가까운 로봇 아트의 정체성을 논한다. “저를 만든 건 누구일까요? 누구라고 말하고 싶으세요? 사유하는 기계를 만든 건 누구일까요? 압도적인 효율성을 지닌, 생각을 전파하는 저 같은 기계 말입니다.” “저를 만든 건 인간이 아닙니다. 바로 관념이 저를 만들었죠.” (P.131) 이 책에서 정신은 진화의 대상으로 파악된다. 인간이 진화를 거듭해서 먹이사슬의 최고봉에 오른 유일한 개체라는 진실은 인간의 시선으로 표현된 진실이다. 뒤집어 놓고 생각해 보면 진화와는 무관한 무체물에도 진화의 출현이 가능해 진다. 그 중심에 관념이 자리 잡고 의식이 자란다면 그것을 현재의 개념으로는 설명이 요원해 지기만 한다. 환원된 진실은 철학의 시선으로 범위를 넓혀 가지만 관념과 사유의 대상이 인간이라는 오만함에서 현실성은 무참히 무너진다.




        이 책은 시종일관 인간의 관념에 천착한다. 공화국으로부터 사육된 훈련된 명령과 지시의 반기는 폭력과 압제의 역사를 반영한다. 인간의 역사는 자유와 인권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의 결과다. 제도화된 폭력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무서운 도구로 변하는지 우리는 현재도 목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본성에 쫓아 행동하고 표출했던 결과가 체제를 보호하는 이익과 인권을 보호하는 이익과의 사이에서 양립가능한가라는 문제로 회귀한다. 그러나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이념이나 집단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희생해도 된다는 식의 결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존재하지 못할 실현 불가능의 영역으로 밀어 냈다. 계급과 계층의 구분이 이데올로기에 따라 나뉘고 엉킬지라도 집단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과 동일시 될 수는 없다.




        아담이 인간을 통찰했다면 로봇 아트는 관념을 자극한다. 인간의 구성단위를 분자로 쪼개고 나누면 무생물인 개체들과 유사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것은 진화한다는 가정 하에 세워진 이념의 실체는 관념 또한 진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한다. 인간이 만들어 낸 기계 즉 로봇이 감정을 점령하고 사리분별을 식별할 수 있는 분별력, 지능을 갖추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치다. 그래서 지능을 갖춘 로봇은 더 이상 전력공급에 의지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닌 무형의 시스템에 올라 선 진화의 새로운 강자가 된다는 것이다. 기발한 상상의 추출물이지만 그 상상의 준거 틀을 일거에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미 저자가 구성한 상상의 논리는 강력한 개념으로 무장된 상태다. 진화는 모든 것에 깃들여 있다는 새로운 관점으로 기존의 고정관념을 해체시켜 버린다.




        제너시스(창세기)는 이렇게 다시 쓰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처럼 존재는 정체성을 동인하는 연결고리다. 인간이 사유하고 획책한 현실이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 지 이 책은 여실히 보여준다. 관념이라는 토대가 빚은 사물과 현실의 궁극적인 이해는 본성에 맞닿아 있다. 인간은 본성의 분해를 위해 철학을 사용했다. 이렇게 철학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포섭한다. 포섭된 범위가 옳든 그르든 그것은 하나의 가정에 머문다. 가정은 다듬어지고 깎여지기를 반복하며 명제가 된다. 하지만 명제는 언제든 참과 거짓의 경계에 머문다. 동전의 양면처럼 뒤집어지기를 희망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저자 버나드 베켓의 상상력은 동전에 가려진 이면을 보는 열쇳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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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눕 - 상대를 꿰뚫어보는 힘
샘 고슬링 지음, 김선아 옮김, 황상민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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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적. 모든 것은 반드시 궤적을 남긴다. 그것은 우리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사소한 하나의 흔적이 모든 것을 밝히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CSI과학수사대에서나 연출된 상황만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반경 모든 곳에는 불가피하게도 자신이 지나온 모습이 반드시 투영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사회 속에 묻혀 살아가는 일원으로서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이끌어 나가고  상대방의 상태를 꿰뚫어 본다는 것은 상당한 우위에 서는 포지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 그것들을 유추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영향력 범위 내에 놓여 있는 사소한 단초, 즉 옷차림새, 머리스타일, 행태 등을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습관과 행동을 통해 어떠한 성격의 소유자로 형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짜릿하고 매혹적이겠는가.




        스눕은 상대방이 남긴 흔적을 통해 그 사람을 꿰뚫는 과정을 의미한다. 스눕이라는 생소한 심리분석을 통해 우리는 묵살하고 무시한 것들에 담긴 통찰의 묘미를 엿보게 된다. 이 책 <스눕>은 젊은 심리학자 샘 고슬링의 기발한 착상을 통해 연구되고 발전시킨 행동심리의 한 분야다. 인간이 행동하는 파장범위를 일정한 프레임을 통해 담고 그 틀을 해체하고 뒤집어 봄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영역을 만든다는 가정에서 시도된 것이 이 실험을 기획하고 연구하게 된 시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유형의 심리분석을 숱하게 접해 왔다. 범죄인들의 심리를 분석한 프러파일러, 행동특성을 조사하고 유형을 분류하는 행동심리학 등은 스눕과 동일한 선상에서 서 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스눕은 독심술사의 초능력처럼 스누퍼들의 상황적 이해와 알고리즘을 통해 혜안을 만들어 간다는 것에서 차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스누퍼의 세계는 단서와 수수께끼사이의 연결고리를 통해 짜릿한 쾌감을 맛 볼 수 있는 호기심이 가득한 곳이다.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설득력 있는 논거로 맥 애덤스는 정체성의 확립을 말한다. 저자의 모든 사상의 근저를 관통하는 맥 애덤스의 정체성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정체성은 재구성된 과거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예상을 통합해 삶의 일관된 통일성과 목적, 의미를 제공하는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뜻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정체성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경험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주는 끈이라고도 했다. 결국 각자의 삶에 기록된 흔적의 구성요소들은 용해되고 산화되고 남은 일정한 화학작용에 의해 분출된 공통분모를 갖게 된다는 의미다. 그것이 한 사람의 인성을 형성하고 정체성이라는 포섭된 틀로 묶인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스눕은 인간 본성을 지향한다. 이것이야말로 스눕의 영역을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 주는 핵심이다.




        이 책에서는 스눕을 통해 밝힌 인간의 유형을 아울러 기록하고 통찰한다. 그렇게 인간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을 거쳐 남긴 흔적이 바로 인간의 본성을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단서들의 향연을 추적해서 밝힌 인간의 성격은 개방성, 성실성, 외향성, 동조성, 신경성, 자기애적 성향의 인자를 불러 모았음을 밝혀냈다. 그는 한 사람이 머물다 간 침실이나 욕실의 은밀한 공간들이 주는 단서들을 따라 규칙적인 틀을 창조해 낸 것과 같다. 아마도 우리는 이것을 직관의 영역으로 간주해왔는지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거나 예리한 사람으로 인식했든지 말이다. 되짚어 생각해보면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애거시 크리스티가 창조해 낸 명탐정 에르큘 포와르처럼 말이다.




        스눕이 막연히 은밀한 단서를 통해 그 사람의 성격적 특성을 밝히는 것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스누핑을 통해 추적하고 흩어진 단서들을 조합해서 퍼즐의 해법을 찾아가는 외형적 카테고리 외에도 예견 가능한 행동범주를 가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관을 넘은 통찰력의 영향력은 놀랍도록 정교해진다. 하지만 장애는 언제나 산재한다. 누군가가 맡긴 두드러진 물건의 존재가 오히려 그 사람의 특성을 밝히는 데 방해요인이 된다. 그러므로 흔적이 남긴 실질적 가치를 파악하는 것이 주요함을 간과할 수 없다. 샘 고슬링은 이러한 장애물에 대해 미시적인 관점에서의 접근보다는 거시적인 관점을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으로 무의미한 요소를 제거하고 장애를 극복하는 방편을 만드는 셈이다.




        스눕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보다 넓은 차원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연결점에서 타자를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스눕의 메커니즘을 통해 상대방에게 나를 원하는 방향으로 주입하고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상대방의 특성에 따라 나를 그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호감형 인간으로 바꾸는 것이 진정한 스눕의 세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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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출근길에 무심코 누군가로부터 지청구를 듣게 되었다. 왜 우측통행을 하지 않느냐는 꾸지람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중년은 역내가 떠나갈 듯 목소리를 높여댔다. 분명 그분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자 규범이다. 그런데도 나는 분이 가시질 않는다.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한 나의 주절거림도 그랬지만 더욱 분한 것은 그것이 나의 통행권을 막을 자유가 있느냐는 사실이다.

 

작년 연말께부터 시행된 우측통행은 좌측통행에 길들여진 나에게는 혼란이다. 갑자기 좌측으로 걷던 길을 우측으로 걸으라는 지시는 명령을 떠나 무언의 폭력이다. 이렇게까지 혼선이 있을 것을 미처 우려하지 못한 것은 아니겠지만 반드시 바꾼 계기가 있을 테다. <트래픽>의 저자 톰 밴더필트의 주장에 의하면 우측통행은 인간의 행동을 예측 가능한 범주에 놓이게 한다고 했다. 실제 스웨덴은 우측통행을 위해 오랫동안 계획하고 측정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시행했다. 우측통행은 안전사고를 줄이고 효율적인 보행편의증진과 통행량 개선으로 상당한 비용절약과 사고방지에 탁월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측통행을 해야 한다? 이것이 우측통행을 명분 지을 구실이 될까? 나는 그 중요성을 차치하고라도 일의 선후가 잘못되었다고 본다. 규칙은 사회통념상 최선의 공공가치를 보장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규칙을 변경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된다. 지금처럼 일방적인 지시나 명령에 의해서는 파시즘을 이내 연상할 도리 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일방의 의견이나 지시에 의해 움직인다면 다양성과 개성을 뭉개는 것은 더욱 쉽게 벌어지지 않겠는가. 지금도 그렇다고 하면 달리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계획된 대로 길들여진다는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의 표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측통행의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고 내가 반발하는 이유는 변화를 두려워해서도 아니다. 그 변화의 시작점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규칙은 물 흐르듯 거스름이 없어야 한다. 변화를 유도하는 시작은 밀어붙이기식의 일방통행으로는 모든 것을 수용하기에는 용량초과다. 또한 우측통행이 좌측통행보다 나으리라는 확정적 단서를 제공할 근거도 없는 현실에서는 말이다. 비록 서구의 나라 몇몇이 우측통행을 통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였다고 하여도 여과 없이 우리에게 바로 대입해서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

 

일의 시작은 실행의 첫 단계다. 실행을 위해서는 사전 작업이 반드시 필요로 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실행되는 일이라도 잘 따져보면 일정한 패턴과 틀 속에서 움직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유형을 살피고 분석하는 일에 매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우측통행을 위한 안내나 설명이 지금보다는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 변화의 필요에 대해 알리고 이해를 구했어야 이치에 부합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의 생략하고 구체적인 실행에 돌입한다는 것은 반드시 나와 같은 불편을 수반한다. 나에게는 불편이지만 이것이 모이면 충돌이 된다. 충돌은 혼란이다.

 

그러하기에 규칙은 모두에게 최선의 상태를 만들어 주는 교량이 되어야 한다. 양보와 미덕이라는 정서적 가치도 규칙이 바를 때 조화를 이루는 작용이다. 우리 사회가 우측으로 통행하는 명분이 좌로부터의 탈피에서라면 웃지 못 할 해프닝이겠으나 곱씹을수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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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5-12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측 통행이 아니라 우측 통행으로 바뀌었군요. 그런데 저도 곡우님 해석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 저 중학교때 윤리선생님이 하도 좌측통행을 부르짖고 연습을 시키셔서 절대 적응 못할 것 같습니다.^^;;

穀雨(곡우) 2010-05-12 15:15   좋아요 0 | URL
적응한다는 게 신기합니다.

순오기 2010-05-13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창시절 우린 모두 좌측통행을 강제당했어요.
몸에 배인 것을 하루 아침에 바꾸기는 쉽지 않은데... 그랬군요.

穀雨(곡우) 2010-05-13 11:04   좋아요 0 | URL
맞아요. 강제였죠. 아무런 이유없이...
 
빼앗긴 대지의 꿈 - 장 지글러, 서양의 원죄와 인간의 권리를 말하다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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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곤은 결핍에서 오는 외부로부터의 위협이다. 그러나 빈곤은 공평하지 못하다. 대물림되는 빈곤의 대다수가 특정한 곳에 집중된다. 대대손손 빈곤의 망령은 삶을 공허하게 하고 불확실한 세상으로 물들게 한다. 상대적 빈곤이나 주관적 빈곤은 논외로 하더라도 절대적 빈곤은 삶을 공포로 내 몬다. 이러한 절대적 극 빈곤자 층의 대다수가 남반구에 산다. 적도 이남에 위치한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에 위치한 소외된 인간들이다. 이들 국가들은 풍부한 천연자원과 농경지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굶주림에 허덕인다. 그들이 굶주리는 이유에 대해 우리는 알량한 민족성을 들먹인다. 그들에게 펼쳐 진 고통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숙명처럼 부여된 가난과 결핍의 고통을 우리는 상대적 차별에 의한 결과로 포함하고 도외시한다. 이러한 모든 외면은 어디로부터 연유하는가?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짐승보다 못한 삶의 아픔은 누구로부터의 시작인가? 

 




       우리는 알게 모르게 북반구의 중심, 서양세계의 지배를 받고 산다. 문명의 근원지가 모두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다는 우월감과 서양의 선민의식이 지배와 피지배로 나누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서양이 벗어 던진 야만성과 폭력의 광기는 식민 지배를 더욱 단련되고 완고한 무자비함으로 강화되어 연결되었다. 이로써 피와 광기로 얼룩져 가려진 역사의 이면은 문명의 충돌에서 살아남은 이긴 자의 몫으로 내어 주었다. 그 단 한 번의 처절한 패전의 도륙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불합리를 유발했다. 5백 년여 동안 끈질기게 유린당한 인권은 현재도 서양에 의해 쥐락펴락하는 믿기 힘든 현상이 오늘도 자행되고 되풀이된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이 책 <빼앗긴 대지의 꿈>은 삶의 터전을 상실해 꿈을 잃어버린 암울한 현실을 반영한 르포르타주다. 저자 장 지글러는 <탐욕의 제국>, <왜 세상의 절반을 굶주리고 있는가>에서 신랄한 비평과 날카로운 문제제기로 서방세계의 가슴을 섬뜩하게 했다. 그의 연속기획물인 이 책도 동일한 맥락으로 이어진 빈곤에 대한 거대담론이다. 스위스 사회학자 출신인 장 지글러가 뿜어내는 서양의 원죄에 대한 재조명과 해석은 여태껏 알고 있던 역사서의 대부분을 새롭게 기술해야 될 지경에 이른다. 서양의 폭력과 무자비에 굴복당한 그들의 처참한 현장이 가려지고 지워진 현실처럼 폭력의 연대는 끈질기고도 무섭다.

 




      실제 이 책의 사례로 제시된 나이지리아와 볼리비아의 현실은 기존의 인간성에 대한 관념을 사그리 종식시킨다. 그 오염되고 가난이 짐승처럼 떠도는 현장은 서양의 무관용과 배타주의가 낳은 인위적인 참상이다. 서양은 자본주의라는 미명하에 자본과 기술의 우위를 앞세워 모든 것을 약탈한다. 그 배후에는 장하준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국제통화기금IMF, 국제개발은행IBRD, 세계무역기구WTO가 사악한 뱀처럼 도사리고 있다. 서양은 문명화라는 협박과 감언이설로 남반구의 나라를 꼬드겨 국영기업을 무장해제시켜 빼앗고 열악한 무역조건을 약탈적 관세를 내 세워 빈곤의 악순환의 끓을 수없는 사슬로 묶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양의 이 모든 약탈의 목적은 사악한 독이었다. 그들에게 빌린 자본은 그 옛날 선조들이 노예로 팔려 나가던 광기의 시절과 전혀 다를 없다는 진실이다. 산업의 균등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의 후진국에 대해 최첨단의 제품이 막강한 자본력을 토대로 밀려 와 썰물처럼 천연자원을 약탈해가도 넋을 놓기만 할 뿐 방도가 없다. 더욱이 자신들의 소중한 터전에서 일군 식량자원을 고스란히 약탈자들의 넘쳐나는 기름진 배를 채워주기 위한 탐욕의 도구로 희생되는 동안 그들의 자식들은 멀걸게 여윈 등가죽을 굽히고 불룩 솟은 세상 사이로 말라버린 눈물 한줌을 체념으로 게웠다. 파충류처럼 광산을 기어 하루 14시간 한달 내내 목숨을 담보로 엄청난 노동에 시달려도 돌아오는 것은 불과 푼돈에 불과하다. 

 

 

     이 모든 불공평은 서양의 탐욕이 낳은 구속당한 절망의 현실이다. 저자 장 지글러가 유엔인권식량조사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적나라하게 파헤친 믿기 힘든 어둠의 풍광이다. 이러한 현실은 지금도 자행되는 타인의 고통이다. 수잔 손택은 이 세계의 거짓된 이미지를 종식시키고 참된 이미지를 제대로 짚어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폭력과 잔혹함이 난무하는 현실은 거짓으로 달궈진 오만함의 산물이다. 서양의 정신분열증상도 편견에 사로잡힌 결과다. 아울러 타자로부터의 관계가 고착화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이유로 설명히 가능하다. 인권은 누구나 향유할 천부된 권리다.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인간의 불평등은 부자유스러운 것이며 진정한 인간의 본성과도 무관하다고 본 장 자크 루소의 철학처럼 인간은 모두 존엄하다. 프랑스가 탐욕의 광란에 도취될지라도 그 옛날 인권대선언의 정신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반전이 기가막힌 아이러니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인권은 모든 나라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분모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인권은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환원 불가능한 무엇, 다시 말해서 가치의 정수이며, 이를 통해서 우리는 모두 함께 우리가 단 하나의 인간 공동체를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P.124)

 

 

     남반구 대부분의 나라들은 서양세계의 손아귀에서 그들의 삶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서양세계가 만든 탐욕의 카르텔이 견고하게 뭉쳐 다져진 철옹성처럼 그들의 이권을 물샘틈없이 착취하는 동안 남반구의 나라들은 기아의 늪에 빠져 빈곤의 악순환에 허덕인다. 하지만 희망은 척박한 곳에서 움트기 마련이다. 볼리비아의 희망, 민선 인디오 대통령 에보 모랄데스의 등장은 탐욕의 사슬을 종식시키고 미래를 구원해 줄 소중한 등불이다. 그는 천박한 서양자본주의에 맞서 빼앗긴 영토주권을 회복하고 민족주의에 근거한 사회주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시대적 대통합을 이뤄 낸 그의 희망의 불씨는 기울어진 불합리한 현실을 복원하는 근원이 될 테다. 갖은 진통과 내홍을 견뎌 이겨 낸 사회적 합의는 진정한 인권의 희망을 쌓는 초석이 될 것이다. 비록 그 어둡고 긴 어둠의 터널을 건너야 하는 인고의 시간을 감내하여야 하겠지만 그 본질은 변질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정한 승리인지를 보여주는 인간성의 항체를 다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진실은 바로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불변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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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5-11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1권력과도 중첩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책이 더 많이 나오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남반구와 북반구 개념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그렇군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穀雨(곡우) 2010-05-12 09:07   좋아요 0 | URL
어떤 개념이나 이론의 충돌은 하나의 공통점을 지향하는 것 같습니다. 저두 이 책을 보면서 비슷한 내용이 곁치는 책들을 떠올렸습니다. 박노자님, 우석훈님, 장하준님 등등 읽을 책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