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수첩 - 진실의 목격자들
PD수첩 제작진.지승호 지음 / 북폴리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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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한민국, 오늘도 안녕하신가?




        PD수첩이 올해로 20년째란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탐사보도프로그램으로 명성이 높다. PD수첩이 현재의 모습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지난한 역사의 현장과 동행했다. 권력의 치부, 소외된 이들의 아픔, 부조리한 현실, 왜곡된 사회구조적 모순 등 전 방위로 넘나드는 PD수첩의 아이템은 공론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가려지고 버려진 것들에 고민하고 자성하는 시간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PD수첩의 오늘이 순탄치 않았다는 사실은 아픔으로 남는다.




        권력은 언제나 균형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 균형이라는 것이 조화를 이룬 상태가 아닌 편중된 힘의 집중을 의미한다. 따라서 권력에 도취된 광기는 이성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제도적 폭력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제도적 폭력은 어느 정권이고를 가리지 않았다. 우리 사회를 형성하는 수직적 계급사회의 틈을 파고드는 권력을 향한 비열한 생리구조이자 기득권 사회의 엄혹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권력에 맞서고 비위를 파헤치는 언론의 역할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매우 중요한 함의를 담는다.




        <PD수첩>, 20주년의 발자취를 되돌려 보며 엮은 이 책은 드러난 PD수첩의 만들어진 모습 외에도 숨겨진 속내를 보여준다. PD수첩을 만든 핵심PD9명의 소회를 전문인터뷰어 지승호의 날카로운 시선과 통찰력으로 그 뜨거웠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PD수첩은 우리나라 방송사에 획기적인 탐사보도프로그램으로 기억될 재료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PD수첩이 있었기에 우리의 삐뚤어지고 왜곡된 시선이 어느 정도 교정되고 유연성을 장착할 수 있는 계가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하기에 우여곡절 많고 바람 잘 날 없던 PD수첩의 거침없는 질주의 순간을 토해내며 제작자로서의 그들의 생각과 이야기를 반추하는 현장을 기억해 두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PD수첩이 처음 방영되었을 때만해도 전문방송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어색했다. 읽어 내리는 말투와 경직된 표정은 생소하기도 하였고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한 회 한 회 쌓이면서 그들의 긴장은 금세 소멸하였으며 위험한 순간을 구르고 내던지는 동안 단련되고 무장된 강인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아무도 가지 않던, 아니 갈 수 없었던 성역 없는 언론의 본분에 충실했기에 생생한 현장의 열기를 생산하고 전달하기에 분주했다. 그 열기는 고스란히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이슈가 되었던 문제가 터지며 불거지는 동안 우리는 이 땅의 인권이 자라는 것을 목도했다. 그러므로 PD수첩의 탄생은 희망을 생산해 내는 우리 사회의 영원한 파수꾼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며 광우병 문제를 다층적인 시각으로 분석하였으며 황우석 박사의 허위 줄기세포문제에도 부침과 치우침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지금껏 PD수첩의 소신과 명분을 지켜냈다. 솔직히 PD수첩에 출연하고 제작한 PD들의 실명을 오롯이 기억하고 떠올릴 만큼 기억력이 좋지를 못하다. 하지만 황우석 사태와 쇠고기수입문제를 대하면서 최승호PD, 송일준PD, 한학수PD의 이름 석 자는 분명하게 각인되었다. 95%의 적과 제도화된 폭력을 앞세운 서슬 퍼런 공권력 앞에 흔들리지 않고 국민의 알권리와 진실을 수호하는 언론의 소임을 다 했다는 것은 절대적인 두려움을 넘어서야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이 PD수첩의 지난 역사를 통해 자축하는 자리로서의 의미만을 담지는 않는다. PD들의 공통된 생각과 제작되는 순간의 시선들을 통해 신뢰라는 건강한 항체를 수혈 받는다는 사실이다. 권력의 주구 노릇을 자청하는 언론기관의 작금의 행태와는 체급이 다르고 성질이 다르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PD저널리즘의 재정립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열망하는 희망을 담는다. <생각의 좌표>를 쓴 홍세화 선생은 물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이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자기성찰의 끊임없는 주문처럼 PD수첩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도리와 위치를 깨우치게 해 주는 분명한 자극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나는 우리 사회의 건강성의 항체를 자신할 수 없다. 현재처럼 후퇴된 언론자유의 상황에서라면 더 더욱 불온하다. 좌와 우를 나누는 대립의 편제는 이 나라만의 특성이라고 돌려 세우고는 하지만 진보와 보수를 이념의 스펙트럼으로 구분하는 권력층의 횡포에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그래서 PD수첩의 지난 발자취를 회고해 보면 철옹성으로 둘러 쳐진 그들의 베일을 벗기고 또 벗기는 탈피의 과정으로 불러도 좋지 싶다. 치부를 드러내고 까발려지는 부조리의 주인공들을 보며 나는 무너진 사회의 복원을 향한 일말의 전율을 느끼고는 하였으나 이내 냉소적인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언론을 틀어막고 국민의 귀와 눈을 가두는 오늘날 권력의 작태를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혹자는 PD수첩이 좌빨에 물든 긴장의 진원지라고도 한다. 아니면 PD수첩은 이념에 물든 삼류시사프로그램이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PD수첩이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으며 세련되고 구미에 맞는 나긋나긋한 외형은 없다고 일축하는 반대론자들도 있으나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진실이 함께 했다.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정제되지 못한 거친 표현이 생채기를 내는 빌미는 될 수 있으나 실체를 바꾸는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랬다. 백번을 잘 해도 한 번을 잘 못하면 이제까지의 공은 물거품이 된다. 이 책의 PD들도 입을 모아 말하는 사실의 정확성, 보도의 명확성은 언론의 생명이다. 기실 따지고 보면 PD수첩의 깎아 내림 현상은 이런 사소한 오류에서 출발했다.




        이처럼 오류의 정화는 PD수첩의 롱런을 보장하는 필요조건이다. 200회 특집 PD수첩 콘서트에서 진중권 교수는 취재과정의 정확성과 균형을 강조했다. 결국 탐사보도프로그램으로 살아남는다는 존재성보다 우리 사회의 건강한 파수꾼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주문이다. 나 또한 이 책을 통해 PD수첩을 만들고 제작하는 그들의 프로정신에 희망을 건다. 그들이 바라는 사회처럼 PD수첩이 더 이상 존치할 필요 없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가 구현된다면 좋으련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이제껏 PD수첩이 다루어 왔던 우리 사회의 왜곡되고 구부러진 현실을 바로 잡는 교정의 작업이 계속되어야 한다. PD수첩은 인권, 불평등, 교육, 경제, 소외, 정치, 종교 등의 스펙트럼을 통해 다양한 문제와 부정부패의 현장을 파헤쳐 왔다. 이러한 모든 아이템들은 시청률에 연연해서는 제대로 소화할 수 없는 긴장과 알력이 유발되는 문제들이기에 보다 더 냉철하고 분명한 눈과 귀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러기에 앞서 일반의 의식이 깨어나고 확고한 자기성찰을 통해 다양성을 인정하며 여유와 관용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PD수첩의 어제와 현재, 내일을 바라보는 그들의 생각의 총체가 반갑고 읽혀져야 할 가치의 도량이라 할 만 하다. PD수첩의 건승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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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인공존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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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도 도락이 있다는 것을 새삼 절감한다. 기지가 번뜩이고 시류에 적확하게 들어맞는 이야기를 접할 때면 매번 알 수 없는 즐거움에 빠진다. 판에 박혔다거나 식상한 이야기가 진부해서 싫다는 것이 아니라 매력이 없다는 것이 이유다. 바야흐로 구매자가 판매자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지는 시장, 즉 바이 마켓Buy's market시대가 아닌가. 문학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눈에 확 띄지 않으면 변변한 기회도 없이 아웃당하는 게 대세다. 물론 독점자본에 의해 왜곡된 공급현상과 여론몰이에 의해 수요를 창출하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문학을 담보하는 주된 동인은 감동과 재미다. 하지만 문학은 이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




        문학은 진리와 가치를 추구하며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본질이다. 또한 문학은 자본주의의 논리로 포섭하기 이전에 그 시대의 창을 대변하는 가늠좌다. 그러므로 문학이 인류의 역사에 당당하게 굳건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이유도 책이 없다면 곧 죽은 사회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문학적 본질의 심오한 패러다임을 떠나서 기존의 관습으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대면하면 인간의 상상력의 끝은 어디인가 하는 근원적인 의구심에 휩싸이게 한다.  




        배명훈 작가는 괜한 엄살을 부리지만 떠오르는 플레이메이커 감이다. 이야기의 소재를 끄집어내는 능력도 그렇고 펼쳐 보이는 재주 또한 절묘하다. 생활인의 채취를 풍기다가도 이내 우주로 날아가고 신을 영접하는 극단을 오고가는 서커스단처럼 현란하다. 그는 상상력이라 추켜세우는 신형철 평론가의 극찬은 괜한 공치사가 아니다. 그를 퍼뜩 알아채지 못한 한국문단을 나무라고 신소리를 뱉어도 이제라도 배명훈 작가를 발굴해 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할 일이겠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10년 문학 동네 젊은 작가상 모음에서다. 이 책의 타이틀인 <안녕, 인공존재!>로 접했더랬다. 그때 기록한 리뷰를 발췌하여 인용한다.







        배명훈 작가의 <안녕, 인공존재>는 외계에서 기록되었다는 신경숙 작가의 표현은 적확하다. 실존하는 물질에 대한 관념을 가볍게 드라이브하며 부드럽게 존재를 녹여 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기지가 번득이며 아이디어가 빛난다. 데카르트가 규명한 존재의 근원을 조약이라는 돌멩이에 얹어 이렇게 잘 빚어 낼 수 있다니 그의 상상력이 부럽다. 난해한 소재를 이끈다는 것은 작가의 변辯처럼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한다. 작가는 더듬을 수 없는 위치를 감정의 혼합물을 통해 적절하게 배합하고 첨가하여 순도의 완성체로 만들어 낸다.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추출해 낸 결과물이다. 존재의 대폭발처럼 몰입은 한 템포 빠르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내가 배명훈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 또한 몰입의 완급이 주는 현상에 노출되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배명훈 작가의 이 글은 괴물의 탄생을 알리는 전조가 아닐까?




        당시의 감동처럼 배명훈 작가의 다른 글에서도 유사한 맥락을 더듬었다. <크레인, 크레인>에서는 인간의 나약함과 존재의 출현에 대한 독특한 시선을 맛보았다. 크레인이 당최 신이라니 누가 할 수 있을까. 가벼움 속에 천착한 심오한 물음은 돌발적이다. <누군가를 만났어>는 판타지장르를 보는 긴장감을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을 통찰한다. 고고심령학회라는 비현실적인 연구와 공룡발굴단, 폭발물제거반의 기형적인 만남을 적절하게 배합해고 어울리게 만드는 것은 배명훈 작가의 알싸한 필력이리라. 이러한 신묘한 이야기는 <매뉴얼>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사고로 부모를 잃은 어린 조카의 눈에만 펼쳐지는 휴대폰설명서에 기록된 비서秘書같은 상상력은 보이는 것을 부정케 의심케 만드는 힘이 깃들어 있다. 두 작품에서 배명훈 작가는 규명되지 못한 이전의 세상을 보았는지 모른다.




<코스모스>의 칼 세이건은 과학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가 우리의 생존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했다. 아마 배명훈 작가의 모든 글은 이에 부합하며 일맥상통한 의미를 갖는다. <엄마의 설명력>이나 <안녕, 인공존재!>는 천문학과 과학의 프리즘을 통해 펼쳐진 화려한 영상을 들여다보는 심정이다. 지동설과 천동설의 대립, 존재에 대한 물질현상 등은 날카로운 지식이 자양분이 되었다는 반증이겠다. 논리 정연하고 개념이 반듯한 배명훈 작가의 이야기가 쉬운 구어체를 기폭제로 날아오른데 장애는 없다. 가볍게 날아 오른 이야기는 어느새 나의 감정과 뒤엉키고 고스란히 내려앉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믿기 힘든 것이든 밝혀지지 않은 것이든 허무맹랑하든 상관없다. 상상은 곧 현실이 된다는 명제처럼 그 속에서는 모두 가능하지 않겠는가.




<얼굴이 커졌다>는 킬러의 불협화음 같은 현실의 에피소드는 짧지만 임팩트가 강한 이야기다. 반대로 <변신합체 리바이어던>은 뉴질랜드 작가 버나드 베켓의 <2058 제너시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다.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에 대해서는 묻는 두 책의 공통점은 뉴웨이브하며 철학적이다. 리바이어던은 철학자인 괴물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진다. 또한 제너시스에도 그리스철학을 빗대어 진화를 이해하는 척도로 사용되는 것은 상당부분 닮았다. 또한 대화체로 이어가는 기교마저 비슷하다. 하지만 풀어내는 방식과 이해하는 폭도 각자의 개성을 마음껏 살린 실험적인 이야기다. 52만 명의 조종사가 로봇을 움직이고 합체하지만 실제 299명의 주조종사만 지배한다는 가상의 현실이 그냥 나오지는 않았지 싶다. 299명은 우리나라 국회의원 수를 의미한다는 사실.




이 밖에도 <마리오의 침대>는 우화를 통한 사랑의 해석을 엿 볼 수 있다. 사랑을 위해서는 불편도 감수하며 아내의 코골이를 참기 위해 침대를 넓히고 우주로 이주한다는 내용이다. 다소 엉뚱한 발상이지만 참신한 이야기는 상식을 허무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한다. 동전의 앞과 뒤처럼 보편적인 생각을 뒤집다보면 전혀 뜻밖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논리다. 요즘 시류가 그런 것도 이유가 되겠으나, 배명훈 작가의 글은 올레, 생각을 뒤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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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종료] 6기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평소 책을 즐겨 읽는 터라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을 거라 가볍게 생각했던 게 화근이다. 책이라는 게 그렇다. 변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자기와 궁합이 맞는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도 어찌 보면 편식의 달콤함이 몸에 배어 버린 것처럼 그런 지 모르겠다. 그러니 억지로 구겨 넣은 책이 소화가 됐을리가 없다.  책은 느려지고 덮쳐 오는 이야기는 살처럼 박혀와 콕콕 쑤셔댔다. 그 고통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고 왜 이런 짓을 자초했는지 나 자신이 책망스럽고 그랬다.  

삶이란 게 그런가 보다. 어떤 일이든 폭풍처럼 몰아치고 지나가면 그제사 해답이 눈에 보인다. 미련해도 이럴 수는 없다. 의무든 책임이든 지켰어야 했다.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공으로 받는 것에 안 그래도 모자란 판단력이 흐려 졌었나 보다.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데, 죽이 되었든 밥이 되었든 긴장의 시간을 통과하고 나니 조금은 후련하다. 물론 제 때에 맞춤맞게 글을 올리고 생각을 정리했으면 더 좋았게지만 말이다. 그래도 귀가 가려운 건 사실이다. (아마 알라딘지기님의 원망이 하늘에 닿았을 수도.^^) 

돌이켜 보건데, 내가 무모한 짓을 획책한 경위는 아무래도 명분없는 위기감이 컸던 모양이다. 더 다양한 생각거리와 이야기를 접해야 한다는 개념없는 위기감 말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분투했다는 것에는 위안을 삼는다. 앞서 말했듯 내게 맞지 않는 편견의 높은 벽으로 인해 책 한페이지가 마치 콘크리트더미처럼 무겁게 느껴지던 것들을 집어 삼키기는 했으니 말이다. 아직 젊음으로 소화는 잘 한다. 때로 고장도 나고 게워 내기도 하지만 현재로서는 쌩쌩하다. 그러므로 집어 삼킨 이 모든 생각의 집합들이 언제일지 모르겠으나 화학작용을 일으키고 변화를 거듭해 아주 미진하나마 변신을 하지 않겠는가. 

잡설이 길었다. 남은 숙제라도 깨끗하게 마무리 해야지 면이라도 살지 싶다.

신간평가단 활동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개인적으로 <소현>과 <별궁의 노래>가 좋았다.  비운의 세자 소현세자를 주제로 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내외의 이야기를 다층적인 시각에서 버물렸다는 것이 눈에 쏙쏙 비쳤다. 김인숙 작가의 <소현>은 단어와 문장의 조련이 기가 막혔으며, 김용상 작가의 <별궁의 노래>는 서정적인 가운데 스며드는 아련함이 사뭇쳤다. 무딘 역사의식에 대해 시종일관 의문을 던졌고 고착화되고 경직된 가치관에 신선한 공기를 채운 기분이다. 알게 모르게 지배했던 경쟁의 역사, 미화된 역사에 현기증이 났었던 것도 타성에 길들여진 허약함이 원인이었다. 어둠 속에 있을 때는 몰랐던 진실이 햇빛을 받으면 고스란히 들어나는 것처럼 역사는 균형감이 생명임을 절감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불변의 진리처럼 말이다.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베스트를 뽑는 것만큼 작위적인 행위는 없지 싶다. 호불호에 따라 갈리는 것도 다양성이나 관점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의 알량한 주장을 모태로 삼아 태클을 걸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므로 그냥 아주 지극히 주관적인 베스트를 좌에서 우로 나열한다. 선정의 변은 생략..^^ 

 

 

 

 

 

 

 


신간평가단 도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정복자의 세상, 정복자의 세월이었다. 세자가 문득 어금니를 물고 생각했다. 부국하고, 강병하리라. 조선이 그리하리라. 절대로 그 기다림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나의 모든 죄가 백성의 이름으로 사하여지리라. 아무것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 [ p.316 소현 중에서 ]
 

끝으로 미흡한 나에게 커다란(?) 중책을 맡겨 주신 알라딘에게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건강까지 상해 가며 고생하신 그분, 문학담담지기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으나 단단히 무장하고 나서야 되겠다. 그 힘든 시간이 지나갔음에도 이렇게 다시 기웃거리는 이유는 은근히 중독성이 강하다.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은 분, 읽고 쓰는 것에 자신 있는 분 언제든 도전해 보라. 스펙타클한 긴장이 그대를 유혹하리라.(아..뻘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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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7-09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 평가단 잘 마치신 것 축하드려요...기웃대긴 했었는데 저는 책을 막상 읽어야 한다고 앞에 딱 쌓아 놓으면 부담감이 막^^ 곡우님이 추천해 주신 책들을 보니 꼭 소현을 읽어야 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문학담당자님이 건강까지 상하셨군요. 안타까워요. 책과 관련된 분들은 다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곡우님!

穀雨(곡우) 2010-07-09 16:17   좋아요 0 | URL
민망합니다. 게으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는...^^ 제가 책을 너무 느리게 읽는 것도 있지만 그 기간동안 우째 일이 자꾸 생기던지. 모임도 갑자기 수시로 생기고...ㅋㅋㅋ
블랑카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알라딘신간평가단 2010-07-10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 너무 민망해 마십시오. 실은 저도 자신 없는 일, 그저, 건강 걱정해주신 저희 평가단 분들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흑.

고생 많으셨습니다. 리뷰만큼이나 맛깔난 변(?) 잘 읽었습니다. 건강 유의하시고요.

穀雨(곡우) 2010-07-12 10:15   좋아요 0 | URL
알라딘신간평가단님, 이렇게 직접 댓글 달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라도 마음을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요. 혹 다음에 또 도전하더라도 내치시지는
말아 주시기를....^^
 
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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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사랑을 정의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본다. 나고 살면서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하지만 사랑은 때로는 열병처럼 때로는 아련한 사랑에 빠져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랑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영향력의 범주에는 인류가 진화하고 축적한 세월만큼의 시간에 비례한다는 생각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존재했기에 인류도 존재의미를 더욱 가능케 한다. 그런데 어느 심리연구에 의하면 사랑의 유효기간을 대개 1년 8개월 정도로 본단다. 그 기간이 지나면 시들시들해 져 이내 무심해진다는 다소 서글픈 연구내용이지만 무시하고 넘길 조사는 아니다.




        사랑에 눈멀고 마음 아파하고 애 태우는 시간이 영겁처럼 채워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에 목말라 한다. 그렇다. 사랑은 인간을 추동하고 움직이는 존재가치인지 모른다. 아무튼 그 유효기간이 설득력 있다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러한 공식을 실제에 대입해 보면 사랑에 눈멀고 변함없이 지속 가능한 상태를 평생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떻게 보면 사랑은 쉽고도 어려운 행위겠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그러한 노력 뒤에 사랑을 획득하였다할지라도 충만한 기쁨의 상태로 여생을 함께 순항해 간다는 것은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사랑이 타성에 젖어 건성으로 흉내 내는 것과 같아서 마치 물구나무로 서서 외줄을 걷는 것처럼 매우 어렵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그 허술한 진심이 드러날 것이며 유효기간 내에 태워 없애 버린 말라버린 감정의 빈약함에 사랑의 밑천은 금세 바닥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정의를 분류 가능한 상태로 묶어 내기 이전에 사라지지 않는 상태, 즉 불멸의 사랑은 존재할까? 영원토록 변치 않는 감정으로 인해 상대방의 모든 것에 애틋한 사랑의 의미를 부여하고 정체성을 발견하는 그런 사랑을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는 영원불멸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로 인해 서로의 존재다움을 증명하고 삶을 경건하게 만든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의 사랑은 인간의 삶에 언제고 존재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위대하다고 우리는 말한다. 영원처럼 순결한 사랑을 노래하는 이야기에 우리는 감동받고 삶의 희열감에 벅차올라 오염된 영혼을 정화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지는 않는다. 모두들 사랑의 시작은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실상은 다른 것에- 애증으로 산다든지 - 기대 사는 경우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 <순수 박물관>에서 발견한 사랑의 언어는 개념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 이전의 우리가 경험한 사랑이 평면적인 상태였다면 오르한 파묵이 추출한 사랑은 입체적이다. 각자의 안목으로 사랑을 재단하더라도 이 보다 치밀하고 농도 짙을 수는 없다.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책 뒤표지 중에서)




        책 전편을 감싸오는 사랑의 대서사는 순간을 지배하고 시간을 멈춘다. 오르한 파묵은 치밀하고 정교하게 다듬고 닦아 낸 집념의 이야기를 마치 자신이 경험한 일처럼 영혼으로부터 불러내 썼다. 그러하기에 이 책의 주인공 케말의 생애 전체를 조망하는 대 파노라마는 삶의 완경을 조밀하게 더듬는다. 아울러 터키의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격변하는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상류층 사회의 가식적인 모습을 샅샅이 보여 주는 파묵의 복원력은 이 책의 완성도를 더욱 뛰어나게 이끄는 견인차다. 그러므로 케말의 사랑은 상류사회에서 벌어지는 위선과 허위와는 견줄 수 없는 것으로 인간의 위대함을 논하여야 할 경지에 다다른 것인지 모른다.




        진정한 사랑은 고난을 딛고 자기희생을 전제로 자란다. 그러나 그 대상이 마주보기를 위한 것이 아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기만을 위한 행위는 강박관념의 일환으로 치부되거나 미성숙한 심리가 표출된 행동으로 스토킹으로 조롱당할 수 있다. 그러나 케말의 사랑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감정과 관계를 아우르며 통찰한다. 지적이고 교양 있는 약혼녀 시벨을 포기하고 불꽃처럼 찰나에 만나 영겁의 탑을 쌓아 올린 퓌순과의 진정한 합일은 얼핏 불온하고 위험하다. 그렇지만 순수함은 진흙 속 진주처럼 퇴색되는 법이 없다.




        오르한 파묵의 이 작품은 순수의 의미를 되새긴다. 읽는 이로 하여금 감정이입을 통해 주어진 상황을 몰입하게하고 공감을 유도하는 힘이 강력하다. 오랜 세월동안 퓌순을 향한 사랑의 시간을 분절하고 다시 포개는 행위를 통해 하나하나의 순간들이 더 이상 나눌 수 없음을 파묵은 케말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케말은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 퓌순을 기억하는 상징적 존재들을 끌어 모으고 훗날 그녀만을 위한 박물관에 전시하며 그가 걸어 온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듬는 과정을 통해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된다. 또한 케말은 퓌순의 상징물들을 통해 비워 진 영혼의 충만함을 채우고 환희와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이처럼 오르한 파묵은 층위를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의 깊이를 다층적으로  창조해 냈다. 감미롭고 로맨틱한 사랑과는 거리가 먼 <순수박물관>은 관념도 환상도 거부한다. 오로지 사랑에 심취한 한 남자의 삶을 다층적인 시각으로 그려냈다. 인간을 바라보는 세밀한 시선은 우리에게 순수의 진정한 의미를 각인하는 신선한 이야기다. 아마 이 책은 오래도록 읽혀질 젊은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않을까 나는 예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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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중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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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읽어 낸다는 것은,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상태와 맞설 때가 있다. 그것의 원인이 무엇이든 나로서는 대략 가늠하기 힘든 감정과의 낯선 대면에서 연유한다. 소설은 허구라는 외피로 단단히 무장하였음에도 그 치밀한 메트로놈의 정형성을 따라 실재의 경계를 무시로 넘는다. 허구는 더 이상 그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로 바뀌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치 않는다. 그것은 이미 잰 걸음으로 빠르게 온몸으로 전이되고 나의 삶에 올라탄다. 한 치의 오차도 흐트러짐도 없다.  




        소설은 이렇게 나를 지배한다. 소설은 서사를 비켜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잿빛으로 물든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비집고 솟은 무한한 감정들의 총체이자 가면이 수시로 바뀌는 복마 술인지 모른다. 현실과 상상이 용해될 수 없는 성질임에도 이미 감정을 송두리째 빼앗기기 일쑤다. 어디에선가 있을 법한 일이 아닌 그것은 있었거나 있음을 예정한 일로 흐려진다. 그러므로 나에게 소설은 숨겨둔 감정을 허락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만화경처럼 신기하다. 그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엇비슷한 세대의 눈에 비친 이야기라면 연대감은 더욱 공고해 진다.





        2010년 제1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타이틀이 거창하다.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신선한 피를 지속적으로 펌프질하겠다는 사뭇 진중한 취지다. 물론 읽는 자의 특권을 오롯이 거머쥔 독자인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나 고답적임은 피할 수 없다. 나에게는 작가를 괴롭히는 쥐어짜는 창작의 고통과 솎아 내야 하는 인생의 카테고리도 필요치 않는다. 읽고 받아들일 최소한의 시간만 있으면 언제든 접속이 가능하다. 접속이 고르지 못하면 쉽게 끊기고 아웃당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과 검증의 단계를 거친 묶음 형태의 책을 쥘 때면 선입견이나 가벼움도 동시에 따라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어찌 보면 기대에 못 미치는 당혹감을 추스르기 위해 경험했던 축적의 관성이 만든 결과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잘 빠진 글은, 어수룩한 나로서는,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데자뷰를 보듯 기시감에 빠지기도 혹은 모종의 동질감에 연민하며 글은 마음껏 나의 마음을 유영한다. 밀고 당기는 사이 울림은 커지고 정서적 유대는 소통으로 번진다. 어느 새 수상작으로 뽑힌 7명의 글이 문장과 문장을 넘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다다르게 한다. 삶에 지쳐 고독의 숲으로 뒤엉켜 음습해진 나의 마음을 청량한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다. 나는 갓 구워 낸 책의 채취가 이와 같다고 믿는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묻고 정체성에 대해 끝없이 반문하는 피할 수 없는 불안한 자아를 위무하기에 소설은 더 없이 적합하다. 고독과 번민은 불안에서 유발되었으나 타자의 이해와 인정을 바라는 사회적 욕망의 한 형태다. 그러므로 소설은 범위 내의 현실이 된다.

 




        김중혁 작가의 <1F/B1>은 기발함이 조합한 퍼즐처럼 기묘하다. 어떤 형태나 현상이 상태를 지배한다는 음모이론의 지배적 의사(疑似)의 심리적 표출장치가 신선하다. 숱해 보고 지나치는 층과 층을 나누는 슬래시를 기점으로 표류한 현상은 단락을 지나 우리 사회가 안은 치명적이고 소외된 문제에 정박한다. 실제 집단공동체 생활의 한 형태인 아파트나 주상복합에 거주하는 현대인의 취약함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부실하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건물관리자연합, 일명 슬래시메니저(SM)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룬다. 자본에 매수되고 문명의 이기와 편리에만 철저하게 희생당하는 부패하기 쉬운 재물처럼 공간은 쉽게 변질되고 오염된다. 매수당한 통제는 이미 제어력을 상실한 무방비 상태다. 하지만 김중혁 작가의 상상력은 무방비에 대처하는 현란한 내러티브다.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는 시스템을 구비한 신식건물이라도 관리자의 익숙한 손놀림이 없이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과 연결된다. 거미줄처럼 꼼꼼히 얽히고 지하통로로 이어진 관리자연합의 탄생은 소멸할 수 없는 몸부림의 표현이다. 그 속에서 관리자인 그는 세상을 꿈꾸고 현실을 다독이는 갈망의 표현인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한다. 선과 선이 만나는 소실점 위에서 <1F/B1>은 트위터처럼 너의 일을 실어 나른다. 값비싼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 한 자리를 차지한 우리는 모두 비합리적이라고.




        구애(求愛)의 사전적 의미는 이성의 마음을 얻는 행위다. 문장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열망하는 마음이 기본이다. 이와는 반대의 대척점에 선 상태는 실연이다. 구애는 위험을 내포한 갈등의 경합상태를 뜻한다. 순조롭거나 험난하다.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는 불안한 감정이 유발하는 긴장의 순간을 매끄럽게 포착해 냈다. 고립된 상태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마음은 본성인지 모른다. 이 책에서 등장한 김은 애도와 축하를 전달하는 화환을 배달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편혜영은 그를 통해 죽음을 분해하고 구애를 해체한다. 구애의 완성은 서로의 결핍된 순간이 충만해 진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죽음 또한 누군가로부터 잊히는 상태를 뭉개 버리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한다. 그래서 편혜영은 어색한 감정 선이 충돌하는 순간을 긴장의 대립과 표출로 끄집어냈다. 어찌 보면 인생은 미완성의 연속이다. <저녁의 구애>를 덮은 후 나는 갓 우려낸 우동의 개운함보다 통조림의 텁텁함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나를 속이고 살아갈까?

        




        변희봉은 입 언저리 어느 부위에서 맴돌기만 할 뿐 낯설기만 하다. 뱉어 내지 못한 말이 날것처럼 울대를 자극한다. 물론 존재감만으로 묵직한 실존배우다. 윤인호 감독의 <더 게임>에서 변희봉의 연기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으며 관객을 장악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변희봉이 이장욱에 노출되어 포위당한 것은 우연일까? 변희봉이 삶에 구속당한 연극배우의 눈에 비치게 된 순간부터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한편으로는 그 상황이 익살스럽기도 하고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다. 변희봉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을 통해 이장욱은 모험을 감행하였는지 모른다. 이야기 속 배우는 삶의 극단까지 밀려난 위태로운 상태다. 아내는 오사카로 공예를 배운다는 명분으로 이혼을 감행하며 아버지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아들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고달프기만 하다. 삶은 이처럼 지독하고 부조리하다. 하지만 상황은 역전을 꿈꾸듯 아버지로부터의 가냘픈 동조는 삶의 활력으로 작용한다. 고단한 세월을 닦아 내는 보상이다. 희망은 절망에서 핀 우아한 꽃처럼 말이다.




        배명훈 작가의 <안녕, 인공존재>는 외계에서 기록되었다는 신경숙 작가의 표현은 적확하다. 실존하는 물질에 대한 관념을 가볍게 드라이브하며 부드럽게 존재를 녹여 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기지가 번득이며 아이디어가 빛난다. 데카르트가 규명한 존재의 근원을 조약이라는 돌멩이에 얹어 이렇게 잘 빚어 낼 수 있다니 그의 상상력이 부럽다. 난해한 소재를 이끈다는 것은 작가의 변辯처럼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한다. 작가는 더듬을 수 없는 위치를 감정의 혼합물을 통해 적절하게 배합하고 첨가하여 순도의 완성체로 만들어 낸다.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추출해 낸 결과물이다. 존재의 대폭발처럼 몰입은 한 템포 빠르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내가 배명훈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 또한 몰입의 완급이 주는 현상에 노출되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배명훈 작가의 이 글은 괴물의 탄생을 알리는 전조가 아닐까?




        다문화 가정과 불법체류문제는 더 이상 우리 사회가 감출 수 없는 문제다. 특히 지리적인 거리가 인접해 있는 중국인들의 불법체류는 대립과 갈등이 뒤엉킨 채 웅크린 상태다. 매번 불거 터지는 문제의 출현에 나는 정의(正義)에 의문을 갖는다. 규범과 현실을 매조지는 문제의 대처방법은 살벌하다. 분명 명분을 위시하여 처리되었음에도 나의 눈은 불신으로 물든다. 냉혹한 소외의 그림자는 더욱 맹위를 떨치고 위세는 연민을 쓰러트린다. 김미월 작가의 <중국어 수업>은 심란한 무대를 짧은 단문으로 밀어냈다. 짜임이나 틀이 빈틈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중국어 “짜이젠(다시 만나요) “의 은유적 비유를 통해 희망을 쏘아 올렸다. 희망은 곧 동기가 될 터이며, 동기는 움직임을 바꾸는 행위가 될 것이다. 눈물샘을 자극하게 만드는 준비되어 분출된 정소현 작가의 글에 설익은 응원, 한 자락을 날려 보낸다.




        가족은 이따금 내게 평안한지를 묻는다. 범주에서 벗어난 위태로움을 토로하기도 하며 맞설 수 없는 아픔을 토해내기도 한다. 그래도 내게 가족은 -유치한 발상인지 모르겠으나- 언제고 내 편이 될 것 같은 그런 존재다. 나는 그 중심에 집을 연상한다. 집은 회귀할 생물적 본능처럼 돌아갈 보루다. 기약 없는 소식이 제비처럼 넘나들기를 소망하며 봄꽃처럼 따뜻하기를 기대한다. 정소현 작가의 <돌아오다>는 내게 그렇게 읽힌다. 비록 해체되고 부서진 가족이지만 정상의 기능을 염원하였는지 모른다. 페이소스를 자극하는 이야기의 실체는 헛것 또는 유령이 되어 방황하다 가슴을 이내 후벼 판다. 하지만 정교하게 설계된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반전의 순간을 통해 침전된 마음을 위무한다. 단절되고 소외된 가족을 용서와 사랑으로 채워 나가는 이 글은, 강한 임팩트를 남기는 인상 깊은 이야기다.


        나는 개그맨을 볼 때면 감정을 조절하는 기술에 감복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직업적으로 웃겨야 하는 강박관념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현실을 떠 올린다면 웃긴다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 깊이를 당최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김성중 작가의 <개그맨>을 처음 대한 나의 인상은 진부한 역설보다는 아픔이 먼저 전해져 왔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의 편차만큼 사회는 빠르고 간결한 즉각적인 배출을 요구한다. 웃기지 못하면 철저히 외면당하고 존재감은 사라진다. 하지만 이야기는 스무 살 젊음이 어우러져 풋풋함 가득한 시절 만나 결합되지 못한 사랑의 궤적을 뒤쫓는다. 다소 실험적인 뉘앙스를 흩뿌리는 김성중 작가의 <개그맨>은 쉽게 산화되어 소멸될 성질이 아니다. 곰삭혀 묵힐수록 풍부해지는 홍어처럼 글맛이 강하다. 보트피플을 희망한다는 이 작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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