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행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무서운 것을 참 못보는 편인데, 날과 밤이 이렇게 무더워지는 시기에는 그래도 괴담이나 호러물이 떠오른다.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를 것을 잘 알면서도 두손으로 눈을 가리고 살짝 벌어진 손가락 틈새로 자꾸만 훔쳐보고 싶은 긴장감과 궁금함이 '야행' 안에서도 잘 버무려져 있었다. 얼마간은 영화나 드라마같은 직접 눈으로 보는 공포물 위주만 봤었는데 간만에 소설로 읽으니 또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구현해 낸 어떤 창작물보다도 무서운건 머리속에서 그려내는 가장 공포스러운 이미지인가 보다. 더위를 잠시 잊기 위한 여러 방법들이 있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무더운 여름밤에 잘 어울리는 책과 함께 보내도 좋을 것 같다.

 

 '야행'은 어딘지 모르게 스산한 느낌을 주는 동판화 작가의 작품들과, 갑자기 사라져버린 한 여자 사이에 맞물리는 공통점들이 교차되면서 독특한 불안감을 준다. 동판화 야행의 연작을 그려낸 기시다 미치오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인물 하세가와. 사라진 하세가와를 알고 있는 옛 친구들이 기묘한 체험을 하는 때엔 항상 기시다의 동판화 작품이 등장한다. 둘 사이에는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 걸까? 10년만에 다시 모인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자신의 경험을 풀어낸다는 설정도 좋지만, 원래 귀신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곳으로 모인다고 이야기를 읽을수록 주위 공기가 밀도있게 느껴지는 오싹함도 '야행'이 주는 묘미였다.

 

 '교토의 천재 작가'라 불리우는 모리미 도미히코의 신간으로 전작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가 줬던 강렬함이 다시 한 번 '야행'을 통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라 생각했던 작가의 신작 소식을 들으니 반가웠다. 막 일주일 전 일본에 다녀와서인지 온천장이 있는 여관이나 마을의 지역 축제의 분위기가 더 생생하게 느껴지게 읽었다. 한동안 여행의 여운에 빠져있었는데 '야행'을 읽으며 다시 또 그때의 느낌을 떠올리게 되었다. 읽고나서 갔으면 아마 여행지에서 좀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혼자 깨어있는 밤에는 읽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결국 밤에 다 읽어버렸다. 언뜻 무엇이 눈에 띄는 것 같아도 절대 보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책장을 놓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것도 아니야
얀네 텔러 지음, 정회성 옮김 / 현암사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책을 읽기 전에 당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 무리를 떠올려보자. 혹은 직장의 같은 부서 사람들, 학교의 같은 반 친구들이나 단 몇십분 만에 300개가 넘는 메세지가 와 있는 가장 많이 접속하는 단체 메신저 창 속의 사람들을 떠올려보자. 그 중 가장 가깝게 여기는 사람이나 혹은 누구든 상관없이 또는 가나다 순으로 내 이름 뒤에 오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삶에서 가장 의미있거나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보자. 가장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물건? 최근에 산 고가의 물건? 소중한 사람에게서 받았다는 선물? 기가 막힌 노래실력? 어렵게 들어갔다던 좋은 직장? 당신의 머리속에 떠올린 그것을 잘 기억한 채로 '아무것도 아니야'를 읽어보자.

 

 '아무것도 아니야'를 처음 읽으면서 느꼈던 충격이 아직 생생하다. 청소년, 미래, 존재의 증명 같은 키워드로는 감히 상상하지 못할 이야기가 펼쳐진다. 처음에는 안톤이라는 소년이 자기 자신과 사회 제도 같은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세상으로 뛰쳐나가게 되며 겪는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다. 같은 반 친구들도 동요하고, 여기저기 부딪히며 성장하게 되는 약간 전형적인 흐름을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가장 첫 장에서 마주하는 "의미 있는 건 없어. 나는 오랜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 나는 이제야 그걸 깨달은 거야."라는 안톤의 외침은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의 포문을 여는 단초에 지나지 않았다.  

 

 무리에서 벗어난 안톤의 외침은 남아있는 소년소녀들에게 균열을 일으켰다. 지금에서야 무의미를 강조하는 안톤의 외침조차 불안정처럼 느껴지지만, 중학생인 그들에게 쨍하고 날아온 한 소년의 돌출은 외면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어떤 것이 되려고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안톤의 말처럼 가치없는 발버둥이 아니라는 것을 안톤에게 - 스스로에게 알려 이해시켜야만 했다. 그렇다면 세상에 '의미'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그 문제에 대해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의미있는 것에 대한 작은 논의는 그들만의 비밀 공간에서 점점 몸집을 키우는 천연스럽게 잔인한 카니발리즘으로 발화한다.

 

 간만에 현암사의 신작을 읽었다. 책을 고르는 것은 이상하게도 출판사를 살피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암사의 목록은 늘 전보다 더한 만족을 주는 편이다. 책을 읽으면서 정신없이 몰입해가는 도중에 잠깐 책장을 덮고 어디까지 왔을까 살피면서 문득 개인적인 올해의 책으로 '아무것도 아니야'를 꼽게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절반정도를 지나오면서 여러 좋은 책들을 읽었지만 그중에 이만큼 강렬한 소설을 만났던가 싶었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들에게 책을 추천해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 타인의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탐색해보고 싶단 욕망도. 당신에게 가장 의미있는 것은 무엇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름답게 그려진 이별 이야기라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밝지만은 않은 감성들을 자극하는 내용이었다. 아직 한참은 남았다고 하지만, 우리의 수명이 100세를 예상하게 되었다하더라도 젊음은 20대에 절정으로 이르고 그 뒤로는 천천한 노화가 시작되는 것 같다. 100세를 산다는 것 치고는 젊음의 시기는 짧다. 관리하기 나름이겠지만 절정의 젊음에서 지나고 나면 전과 같지 않은 것들이 느껴진다. 건강이든 기억력이든. 점차로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을 읽고 있다보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두려움과 이전에 내가 잃었던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안타까운 기분이 되살아난다. 

 

 처음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 자신도 이야기의 어느 길목쯤에 와 있는 것일까 아리송해졌다. 할아버지와 노아노아가 어디에서 어떤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일까 살펴보려고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봐도 어딘지 모르게 모호했다. 판타지 세계인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일상적인 공간에서 길을 잠시 잃은 것 같기도 했다. 기억을 조금씩 잃어버린다는 게 어떤 것인지 간접적으로 느껴보게 된 것 같다.

 

 나이를 들어감에 따라 내 몸을 가득 채웠던 힘과 건강이 스러지고 그 자리에 어쩔 수 없는 노화와 병이 찾아든다는 것은 큰 괴로움이고 공포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건강을 유지하려고 운동하고, 식이를 조절하는 등의 노력을 하는 것일테다. 신체적으로 찾아오는 병들도 물론 고통스럽고 거동의 제약을 주는 불편함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머리속으로 찾아오는 알츠하이머의 경우가 가늠을 하기 어려운 상실감을 줄 것 같다. 곁을 지켜야 하는 가족들에게도 그렇고.

 

 어린시절부터 항상 뭔가를 배우고 기억하도록 훈련하며 지내왔는데 그 익숙함을 놓아야 하는 때가 온다면 익숙해질 수 있을까.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은 뒤라 웬만한 것들을 놓아버릴 준비가 된 후라 할 지라도. 삶이 영원하지 않지만, 그렇기때문에 더 오래도록 남기고 싶은 추억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느 장소를 여행가더라도 그 순간의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수백, 수천의 사진을 남긴다. 때로는 두눈으로 보는 것보다 렌즈로 담아두기 위해 렌즈를 통해서 보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은 아닌가 싶도록. 그토록 간절한 기억들인데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가 버려 남아있는 반짝임을 바라보며 저 반짝임이 무엇이었더라 의문스레 바라보아야만 하다니.

 

 생각보다 길지 않아서 그마저도 이별의 날들이 짧은 것만 같아 아쉬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망 독서 - 마음이 바닥에 떨어질 때, 곁에 다가온 문장들
가시라기 히로키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신동욱씨의 추천사를 받은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왜냐하면 내가 신동욱을 좋아하니까. 그렇다고해서 뭐 엄청나게 따라다니고 그런 건 아니고, 그가 나왔던 드라마를 하나 인상깊게 보고 좋아했던 것이 다다. 그랬던 그의 투병소식을 듣고 그것이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 마음속의 점으로 남아있는데, 최근 작가로 변신하여 돌아온 모습을 보며 왜인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졌었다. 딱히 절망에 빠져있지 않더라도, 그의 소식은 아, 이 사람 노력하고 있구나, 있었구나 싶은 흡족한 안도감과 반가움, 그리고 괜히 멀쩡히 있던 자신에게 건네는 채찍이 되었다. 야, 너도 잘 해. 하고. 그의 존재가 '마음이 바닥에 떨어질 때, 곁에 다가온' 무엇이 되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음, 정말 잘 어울린다. 그리고 추천사도 잘 썼다.

 

 딱히 절망을 겪어본 적이 없던 것 같다. 대단한 좌절이나 사건을 겪어야만 절망에 빠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되돌아 생각해봐도 절망의 순간이라 떠올릴만한 일이 기억나질 않는다. 요즘엔 타인을 위로하는 일에 대해서도 조심스러워야 하지 않는가, 우울증이란 병세가 수면 위로 올라왔을때 함부로 힘내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요지의 조언글을 본 적이 있었다. 힘내고 있는데 거기에 어줍잖게 위로한답시고 힘내라고 하면 더 우울하고 괴로워진다고. 내가 힘들 때 누군가 옆에서 들어주고 힘내라고 해주면 그저 고마웠던 단순이라 그럴수도 있겠구나 공감하면서도 아이고 맙소사 그럼 대체 뭐라고 위로해줘야 할까 막막해졌다.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눈치없는 자식이라 공연히 역성들어주다가 혹은 뻘소리나 주워섬기다가 실수나 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됐다. 그리고 내가 공감능력이 없어서 이러는 거 아닌가 싶은 의심도 들었다. 그래서 난 '절망 독서'를 차라리 이렇게 이용했다. 타인의 절망과 상심에 위로가 되어 줄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책으로.

 

 사실 이런 류의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마음속에 깊게 남기는 편도 아니다. 다만 다양한 작품들을 다른 관점에서 소개받거나 하는 일은 좋아한다. 그래서 1부보다는 2부를 더 흥미롭게 읽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의외로 1부에 있었다. '인생 각본'에 대한 내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를 살면서 지금 자신의 모습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인다고 한다. 예를 들면, 내가 지금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이건 그냥 잠깐 하는 거고 나는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할거야. 라고 생각한다. 지금 모습은 이렇지만 곧 살을 빼서 달라질거야. 라고 생각하거나. 지금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진짜 나의 모습은 따로 있다고 여긴다. 물론 저 생각을 그대로 이뤄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는 노력없이 저 생각만을 하며 똑같은 하루를 되풀이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의 나도 저런 모습으로 지낸 적이 있기 때문에 이 내용이 특히 공감이 많이 됐다. 지금은 오히려 '이야기'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안주하는 모습이 더욱 닮아있어서 그 점도 인상깊었다. 

 

 톨스토이, 카프카, 다자이 오사무, 그리고 토스토옙스키 초반에 나온 매우 유명한 작가들과 작품들 외에는 잘 알지 못하는 작가들과 작품이 많이 소개되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경우도 좋아하는 '인간실격'이 아닌 다른 작품이 소개되었다. 때문에 읽은 작품이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생소한 소개가 많았다. 가시라기씨 우리는 또 이렇게 갈리네요. 항상 건필하시고 건강하세요. '변변찮은 자신에게 실망할 때'라는 편의 자료를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듣기에 생소한 라쿠고라는 것이 추천되어 있어서 안타까웠다. 변변찮은 자신뿐만 아니라 하필 구할 수 없는 자료에 호기심을 가졌다는 것에도 실망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또 뭐가 있을까. 또 다른 책이겠지. 담담하게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기화된 거짓말 - 진실보다 감정에 이끌리는 탈진실의 시대
대니얼 J. 레비틴 지음, 박유진 옮김 / 레디셋고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동안 우리의 모토였다. 절실한 추구였다. 우리는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고 믿었고, 불의에 대적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무기라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절실히 저 모토를 외쳤던만큼 거짓의 힘은 커졌다. 인간은 하루에 10-200회 가량의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그것이 예사로운 것이던 큰 것이던 거짓말에 그만큼 익숙해져 있고 때로 의식하지조차 못한 채 거짓을 이용하는 것이다. 거짓은 여러 용도로 쓰인다. 때로 진실보다 간단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혹은 더 자극적이고 재미있기 때문에, 그리고 남을 해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대니얼 J.레비틴의 '무기화된 거짓말'은 사회적으로 거짓말이 어떻게 대중의 눈을 속이기 위해 사용되어져 왔는가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다. 우리가 접하는 매체의 정보들이 어떤식으로 거짓 정보를 전달하는지, 어떤 시각으로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정리이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하루에도 몇번씩 지지율 그래프가 뉴스에 올라왔다. 그때만큼 치열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도 꾸준히 나오고 있기는 하다. 지난 기간 동안 스스로 감시의 눈을 키우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에서 보여주는 그래프의 오점을 지적하기 바빴다. 전같았으면 아마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각 방송사에서 일부러 그러는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그래프 표기 실수?와 각 지수별 편차 표기 오류가 나왔다. (p87 기만적인 삽화의 내용과 유사하다.) 그것도 특정 후보에 관해서만 특히. 그렇게 빈번하게 시도되는 것을 보니 한 후보에 대한 지지율의 실제적인 변화에 있어 보는 사람의 눈을 교묘하게 속이는 일이 참 유용한가보다 싶었다. 거짓된 정보에 잦은 빈도로 노출 시키면 그게 진실이라도 되는 것마냥.

 

 물론 그러한 오점들은 매의 눈을 가지고 혹은 관심을 가지고 진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쉽게 속일 수는 없었다. 질타를 맞고 '어디서 장난질이여'라며 비꼼을 당하고 결국은 짧게 형식적으로 나마 자신들의 실수?를 사과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방송되는 정보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길건 짧건 그때 본 조작, 아차 실수를 그대로 믿었을 것이다. 거짓을 무기삼아 진실을 뒤흔들려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최근에야 완전히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던 의혹도 있던 것처럼. 거짓은 그저 아니면 말고,로 끝나는데 진실은 왜 자신의 결백을 힘겹게 증명해야만 했던 것일까. 우리가 너무 비대해졌을때 무엇을 위해서든 체중조절을 하듯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황색언론의 자극성을 좇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무기화된 거짓말'을 읽어보고 자신 나름의 관점을 가져보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