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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동네로 갈게 - 시-LIM 앤솔러지
강성은 외 지음 / 열림원(도서출판)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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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커왔던 동네는 그 끝에 민둥산이라 불리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었는데, 산부터 아래 도로와 천길에 이르기까지 뻗은 길을 따라 골목골목 집들이 들어찬 꼴이었다. 도로길에서 우리집으로 오르는 만큼 언덕 쪽으로 올라가면 좁다란 골목 안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다. 신자는 아니었지만 어린시절에 그렇듯 때때로 계란을 주거나, 성탄절 행사를 한다고 해서 따라가보았던 그 교회는 규모는 작지만 나름 첨탑도 올리고 예배당이 번듯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저녁이면 들리던 교회의 종소리, 정확하게는 알림음 같은 짧은 선율이었는데 그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 좋아 집안에 있다가도 일부러 시간이 되면 옥상 위로 올라가 해지는 풍경 속에서 퍼지던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곤 했던 기억이 있다.
표제작인 <너희 동네로 갈게 42 _김보나>에서는 '뎅, 하고 저녁 예불의 청동 종소리(43)'가, 오산하의 <모락>에서는 "저녁 예불 종이 울리(98)"고 "두부 장수의 요란한 벨 소리(99)"가 들려왔다는 오랜 동네안에서 잠들어있던 소리들이, 내 경우에는 교회의 종소리 같은 것으로 감각을 깨워냈다. 골목을 타고 멀어지던 딸랑이는 소리를 따라 심부름으로 두부를 사러 뛰어나가던 시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거기에 "판타지 세계관에서는 마을의 개념이 종소리가 들리는 곳까지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20"는 고명재의 <은혜와 사슴과 나란히 걷기>의 내용이 잊고 있었던 동네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동네 일기 :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이들과 멀어지기 위해 나는 이들을 알던 모두와 단절했다. 도시가 곧 동네였던, 나의 전주와도. 28 _고선경" 

종종 하는 말이지만 오래도록 자라온 동네가 갑갑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에서야 그 동네 안에서 끈끈하게 얽혀있던 이웃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떠나서, 느슨하게 변한 것이 도리어 아쉽고 안타깝지만 그때는 그랬었다. "서울에 산 지가 더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나에게 서울은 가깝고도 멀다. 14_강성은" 고 하는 것처럼 옛 동네를 떠난지 꽤 지났지만 새 동네의 편리함이 좋아도 어쩐지 좀처럼 정은 붙지 않는다. 오히려 이곳에선 어떤 것도 날 붙잡아두는 것이 없이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며 떠다니는 것만 같다. 옛 동네만이 여전히 꿈에도 나온다. 그런 마음이 고선경의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28>에 잘 나와 있어서 읽는 내내 마음이 참 먹먹했다. 떠나온 사람들만이 공유하는 떠났으나 나 역시 버려진 기분, 소중한 줄 모르고 가벼이 여겼던 것들이 그곳에 놓여져 조용히 낡아버린 상실감이 선명했다. 

재미있는 점은 옛동네의 거의 모든 길을 알고 있는 것과 다름 없었는데, -심지어 사람보다 고양이가 더 많이 다니는 길까지- 막상 다니는 곳은 한정적이었다는 것이다. "동네에서 나는 날 가는 곳만 간다. 55"는 것처럼, 어느날 놀러 온 친구가 너희 동네에서 유명한 맛집으로 소문난 곳을 아느냐며, 같이 가자고 한 곳을 도리어 나는 처음 가보았다. 굳이 이 작은 동네까지 사람들이 찾아와서 먹고 가는 음식을 동네 사람들은 코 앞에 오래두고서도 부러 찾지 않았던 것이다. 가서 먹어본 유명한 맛집의 음식은 맛있었고 친구는 동네에 살면서 그동안 왜 한번도 먹어보지 않았느냐며 놀랐다. 그러게, 너무 가까워서 그랬나봐. 하지만 그 뒤로도 굳이 이 음식점을 찾아 놀러오는 방문자들과만 가끔 가서 맛있게 먹고, 나는 다시 동네 사람 본연의 자세가 되어 부러 찾아가지 않았다. 동네 사람은 동네 사람만의 동네 이용법이 있는 법이다. 

반대로 동네 사람이 부러 찾아가는 동네 이용법도 있다. "피노키오 122" 분식집의 경우는 오랜 지인이 어린시절부터 드나들었다던 떡볶이집의 이름과 같아서 문득 눈에 걸렸다. 그 동네 아이들이 학교 앞 수많은 분식점 중에서 제일로 꼽아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못하고 찾아갔다던 '그 피노키오' 분식집은, 오천원 어치라며 족히 열 명은 먹을 것 같은 양의 말간 국물의 밀떡볶이를 자랑스레 포장해오던 지인 덕분에 알게 되었다. 과연, 피노키오 분식의 떡볶이는 맛있었고 때때로 포장해오기 너무 무겁다며 괜한 너스레를 부리는 지인을 졸라 결국에 분식점이 문을 닫기까지 종종 얻어먹었던 기억이 있어, 그럴 리 없겠지만 '그 피노키오'였던가 문득 남의 동네 초등학교 일대를 평정했던 전설의 떡볶이집을 입맛 다시며 추억하게 된 것이다. 

'동네'라는 주제가 특히나 마음을 건드리는 것도 있었지만, 열림원의 시-LIM 앤솔러지 "너희 동네로 갈게"는 시와 산문이 함께 실려 있어 작가의 감성과 시선에 좀 더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시를 통해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비추어 볼 수 있는 시간을 보낸 것 같아 아주 오랫동안 마음이 일렁였다. 늘 걷던 길을, 익숙한 공간과 스치는 배경같은 주위를 새롭게 바라보고 싶다면,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거나 낯선 동네에서 적응하며 버티는 시간을 보내왔다면, "너희 동네로 갈게"를 만나보길 추천한다. 공감할만한 이야기들이 구석구석에서 반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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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두가 적이라면 ㅣ 교유서가 시집 9
김개미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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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모두가 적이라고 말하는데 어째서 나는 나와 닮은 나를 볼까. 

언젠가 "침대 밑 침대 500mmx1800mm(18)"의 크기만한 공간에서 하루종일 먹고 자고 조금 움직이고 식판을 대신 옮겨놓고 빨대가 꼽힌 물컵을 가져다주고 이런 날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 헤아려보다가 숨을 참기도 하던 때가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온 하루를 같이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텅 빈 침대만 남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고, 금새 처음 만나는 사람과 다르지 않은 하루를 같이 살게 되는 곳. 불꺼진 병동 어두운 의자 여기저기에 흩어진 사람들이 서로 닿지 않게 듬성듬성 앉기로 약속이라도 한듯한 곳. 당신도 거기 어느 어두운 의자에 앉아 있었구나 알아차린다. 

우리는 어두운 곳에서만 흐릿하게 닮아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집으로 오면 나는 집에서도 외출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며, 당신이 오기도 전에 당신이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쳤다 말하는 '왜 집으로 온다는 거니(62)'를 보고선 웃음이 터졌다. 이제 아무도 묻지 않는 MBTI가 무언지 아마 시인은 분명 I로 시작하는 인프피일거야,한다.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시간에도, 평범하고 별볼일 없는 시간에도(나는 왜 자꾸 이 영상을 볼까 음악도 없고 말 한마디 없는 이 영상을 91 '부시크래프트')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형태로 도망친다. 

읽는 내내 서로 다른 삶을 살면서도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이 세상 모두가 적이라면' 나도 나의 적이 되는걸까 고민하게 만든다. 시인 역시 누군가의 뒷모습이 내 뒷모습 같아서 두려움에 떨고(48 '유랑'),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 나랑 똑같은 소녀를 보고(120 '드로잉북의 소녀') 비명을 지른다. 나와 남을 구분하지 못해서인지, 남에게서 나를 보아서인지, 나조차 남처럼 보아서인지 알 수 없지만 사람은 가끔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도 놀라게 될 때가 있다*는 말을 떠올린다. 그럴 때가 있지, 그럴 수도 있지. 나도 나를 가만히 두지 못하겠을 그런 때가(88 '부서진 방'). 

김개미의 시집 안에서 유난히 계절이 많이 흐른다. 달력의 한 귀퉁이에 그린 그림들을 손끝으로 눌러 빠르게 넘기며* 몇번이고 바뀌는 계절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여름, 칠월, 벌레와 낙엽, 토끼와 고양이, 초록 파도와 가을의 추수, 은행나무 그림자, 겨울의 제일 추운 날과 눈 오는 날, 마른 풀, 작은 새, 십이월 같은 것들이 천천히 그려졌다 사라지며 시간을 쌓는다. 도무지 키가 자라지 않아 오래도록 아이옷을 입고(41 '나의 집이 나뭇잎 뒤에 있을 때'), 인형의 나라(114)를 꿈꾸던 시인이 아무 일도 없는 것이야말로 특별한 줄 아는 어른이 되기까지(67 특별한 가을 되세요) 갈피를 꼽아둔 날들이 담긴 듯 하다. 

계절 속에서 시인이 자라는 동안 할머니에게서 엄마에게로 이어진 병명 없는 병(30 '엄마의 종교는 소금물'), 자기가 깨고 나온 알 속으로 들어가려는 오빠(26 '누가 이 여름을 발명했어'), 집을 나가는 아빠(26/139 '인형놀이'), 가장 추운 날 언니 집으로 돌아간 나보다 작아진 언니(83 '언니가 갔다'), 아직도 여기저기서 털이 묻어 나오는 고양이 칠리(134 '고양이 털').가장 가까운 것들을 사랑해 이들이 그의 삶에서 멀리 걸어나가고 난 자리를 채워낸 사랑이, 너무 가깝고 무거워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 여기저기 놓여있었다. 

토끼를 기르면 토끼 때문에 언젠가 마음을 다치게 되니까, 쉽게 죽고 무방비하게 공격 당하는 존재를 더는 들이지 않겠다던(24 '토끼 따위') 아이는 죽은지 3년이 지난 고양이 칠리의 흔적이 영영 사라지고 나면 오히려 섭섭할 것 같다(134)는 어른이 되었다. 그럼에도 사랑에 대해 용감하게 떠들고 싶다(5)는 그는 "날아갈 곳이 생각난다면 날개가 부러져도 좋다(107 '십자가에 앉은 새')"고 한다. 그리고 나는 그의 그런 점이 가장 좋았다. 내 마음에 깊이 남겨두고 싶은 책보단 다른 이의 손에 들려주고 싶은 책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적처럼 느껴질 때 위로삼기를, 바쁜 신 대신 당신의 집에 한 권 놓여있기를 바라게 된다. 


*영해향진(影駭響震)
*플립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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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도킹 스테이션 ㅣ 교유서가 시집 8
윤다미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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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앞에 두고는 종종 꿈을 꾸곤한다. 꿈을 바라는 마음으로 시집을 대하기 때문이다. 시가 현실과 분리되어 있으리란 법은 없지만 시를 읽으며 현실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현실을 꿈에 이어붙였든, 꿈을 현실에 엮었든 '신세기 도킹 스테이션'은 꿈 같았다. 어느날 새벽 마그네슘을 먹고 이리저리 옮겨간 생생한 꿈의 조각이 씹혔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꾸며 어른이 되었던가. 과거의 나에게 연결해 현재의 나를 만들어낸 것들이, 숫자를 거꾸로 세어 바쁘게 되감더라도* 이미 낡은 내가 열셋에 죽었었을지도* 모른다고 예감하면서도, 턱시도 가면 없이도 언니들을 따라 카드를 모으고, 손톱에서 빛이 나는 마법소녀*가 되어 세상과 싸우게 되었음을, 곱씹는 시간이었다. 

 3분 미트볼과 용가리치킨, 토마토 소스로 꾸며낸 파스타 접시 사진을 두고 친구는 그래, 너가 좋아하게 생겼다고 했다. 바싹 구운 베이컨과 계란후라이를 욕심껏 올린 하울정식을 보여줬을 때도 같은 반응이었다. 비싸다는 이유로 식탁에서 멸종을 맞이한 용가리치킨*이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 믿는 것처럼 우리는 자라서 당근같은 것은 빼버린 카레를 만들고, 약국에 가서 텐텐을 한가득 사버리는, 어른이 되었다. 
 '신세기 도킹 스테이션'에서 하나둘 제외시킨 항목들을 골라낸다. 콜렉트콜 안내가 끝나자마자 외쳐야했던 한마디*, 부루마불 판 위에 세웠던 호텔*, 한쪽눈을 감고서 들여다보았던 만화경*같은 것들을 후숙이 잘 된 망고를 갈라 먹기 좋게 칼집을 내 건네는*, 퀴즈쇼 상금으로 적금을 넣겠다는*, 넷플릭스를 보는* 능숙함으로 바꿔 끼웠다. 이 교묘한 세계의 교체와 확장을 지우고 채우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낡고 낡은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헤아릴 숫자가 서른개도 채 되지 않아 그래도 아직은 사랑이니 나중을 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셈을 하는 것보다 성숙은 더 가까이 있을지 모르나 자꾸만 시선이 좋아한다는 게 무엇인지, 터무니 없는 사이즈의 사랑을 감상하는 마음으로 향하는 것을 보니 더욱 그렇다. 그러니 너무 빨리 멀리 가 있지 않기를, 조금 천천히 22세기를 꿈꾸기를 바라며 만남을 마무리했다. 

 시집을 읽는 일은 어떻게 해서든 익숙해지지 않고, 같은 극의 자석끼리 붙여놓은 것처럼 늘 일정한 거리감을 끼고 있는 기분이다. 가까워질 방법을 몰라 혼자서라도 좋아하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고양이라도 만난 양, 서로 닿지 않는 언어로 하고싶은 말을 늘어놓으면서, 그래도 너는 내가 싫지 않지, 어쩌면 우리 통했는지도 몰라, 착각같은 순간을 공유한다. 남겨둔 빈칸*을 암호처럼 채우면서 그런데 정말 우리 통했을지도 몰라, 기꺼운 마음으로 읽었다. 밥을 먹을 때면 짱구와 무한도전을 친구삼는 사람에게 가깝게 다가갈만한 시집이 아닐까 싶었다. 아직은 어설프게 남아있는 풋풋함이 매력적이었다. 


*169 시네마토그래피
*168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가기
*152 girlish
*15 신세기공룡생활지침서
*118 1541
*116 랜드마크
*81 Linked Contemporary Lovers
*108 망고를 아세요?
*130 루비 썸머의 실종 
*136 소녀...신세기
*98 노상관찰학의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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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사랑을 데리고 온다
나태주 엮음 / &(앤드)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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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사는게 참 외롭단 생각을 한다. 그럴때는 가만히 타타타의 가사를 떠올린다. 우스운 것 같아도 그 가사가 얼마나 철학적인지. 문득 외로움도 납득하고만다. '바람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오면 비에 젖어' 산다는 가사가 마음을 채워주는데 문득 가사도 시구나 싶었다. 나태주 시인이 엮어낸 '시가 사랑을 데리고 온다'의 책머리에도 그런 말이 있다. '시가 사람을 살리는 좋은 약이라는 믿음을 나는 한순간도 놓아본 적이 없(6)'다는 고백이다. 노래 가사에 위로받는 것처럼 시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위로해줄 것이다.

 

 시 옆에 나태주 시인이 붙여둔 짧은 글들이 안정감을 준다. 아마 오롯이 시만 120편 소개되어 있었다면 다소 밋밋했을지도 모르지만, 옆에 놓여진 시인의 글귀를 함께 읽으니 훨씬 풍요로운 감상이 가능하다. 그냥 읽고 넘길 수 있는 시도 자신의 감상을 좀 더 확장할 수 있고, 때로는 이리저리 한정없이 퍼져나가는 감상을 갈무리하도록 돕기도 한다. 시집 '풀잎'의 서문(57)을 옮기며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함께 소개하기도 하고, 폴 베를렌의 시(174) 옆에는 어떤 상황에서 쓰여진 시인지 덧붙여 정보를 주기도 한다.


 가장 인상깊었던 시는 아우구스트 슈트람의 '해 질 무렵'(166) 이라는 시였다. 유명한 시인과 시들 사이에서 처음 들어보는 시인의 처음 보는 시였는데, 공간의 모든 감각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말없이 나를 '이상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너의 존재까지 따뜻하고 말랑한 느낌을 주는 시였다. 마침 데미안을 막 읽어낸 뒤에 시집에서도 헤르만 헤세의 시를 만나니 반가웠다. '어머니께(20)'라는 시나 '들을 지나서(232)'는 문득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의 느낌을 준다. 우리는 때로 객지에서도 혹 자신의 집 방 안에서도 집으로 돌아가고픈 느낌을 받는다. 내 방 천장이 아득히 낯설어질 때 왜 그런 느낌이 들까 싶었는데, 이 깊고 오래된 홀로됨을 어쩌면 어머니의 옆에서 치유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작년 가을 국내 명시 114편을 엮어낸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이후로 나태주 시인이 엮은 해외 명시들을 만나니 또 새로웠다. 다음에는 나태주 시인과 함께 또 어떤 시들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도 된다. 다가오는 봄과 어울리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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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스테이 - 세계 18개국 56명 대표 시인의 코로나 프로젝트 시집
김혜순 외 지음, 김태성 외 옮김 / &(앤드)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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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등의 아랫부분쪽으로 깊은 칼집같은 손상이 나 있는 책을 받았다. 약간의 구겨짐말고는 대체적으로 손상이 있는 책을 받아본 적은 드문데, 하필이면 이 책은 작지만 치명적이고 가려지지 않는 모습을 한 채로 도착한 것이다. 마음이 조금 울적했지만 어쩌겠나 싶었다. 이건 어쩌다 생긴 일이지 대체로 누구의 악의도 잘못도 아니다. 우한폐렴은 몰라도 코로나의 전파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조심조심 손상이 더 깊어지지 않도록 책장을 넘기면서 어쩌면 이 책은 그 자체로구나 싶었다.

 

 코로나의 흔적이 너무나 깊고 뚜렷해서 이와 관련된 컨텐츠들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코로나 프로젝트 시집'이라는 어색한 말들이 하나로 나란히 늘어서있는 책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18개국 56명의 '전 지구적 연대'를 통한 한 권이라니. 코로나로 인해 외국엘 가지 못하게 된 탓에 한국 바깥의 소식은 뉴스로만 접했는데, 화면으로 보여지는 것보다 누군가의 문장이 더욱 실감나는 현실로 다가온다. 개인의 삶으로 경험한 디테일과 감정이 녹아들어서 그런걸까.

 

 김소연의 '거짓말처럼'(24)이나 윤일현의 '거리 좁히기'(26)는 같은 경험과 정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인지 즉각적인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마스크를 사러 약국에 들렀던 봄과 여름, 혹시 몰라 하는 마음에 가족에게 보내 둔 누룽지 소포까지 어쩜 꼭 같은 사람 사는 모습에 그때 우린 다 불안했고 서로를 염려했구나 기억을 되살렸다. 반면 에드거 바서의 '히포콘더'(74)같은 시들은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아시아를 향한 차별적 시선이 어떤 식으로 드러났던가 민낯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던 모습에 전 지구적 연대라는 말에 냉담해진다.

 

 타미 라이밍 호의 열 가지 질문(153)의 내용이 가장 좋았다. 어떤 것들은 조금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고 어떤 것들은 전혀 상관없이 자신에 대해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그 몰입이 계속되는 우울이나 불안과 감정을 조금 분리시킬 수 있도록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인생의 마지막 60년을 서른살의 몸이나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은 통속적이면서 매번 흥미로운 선택이다. 저마다의 선택에 확고한 이유도 있을테고. 또 의미심장한 10번 질문도 독특했다.

 

 계속되는 확진자 발생과 연말임에도 더욱 강화되는 거리두기 단계로 피로감이 느껴지는 때다.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때에 읽었다면 위로의 의미가 더욱 컸겠지만, 현상황에서 '지구에서 스테이'는 위로도 되고 부담도 되는 내용이었다. 그때의 불안과 문제가 전혀 해소되지 않은 상황으로 20년이 마감되고 21년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현실이 새삼 느껴진다. 언젠가 이들이 다시 모여 회고 시집을 내는 날이 서둘러온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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