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낭만 사랑니 ㅣ TURN 4
청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2월
평점 :
" 겨우 찾은 이직처였지만 도망치는 곳에 낙원은 없다더니 진실로 그러했다. 인격적으로 무시당했고, 월급은 크게 줄었다. 스트레스는 서로 간에 어찌나 끈끈한지 매번 손을 잡고 단체로 찾아왔다. 누가 내 마음 좀 알아줬으면 좋겠네, 좆같은 세상. 속으로 욕만 할 뿐 꾹 참으며 사는 탓에 좆같은 세상은 매일매일 좆같기만 했다. p43 "
처음, 책 두 권이 있었다. '플라스틱 세대'와 '낭만 사랑니' 뭔가 반대 느낌의 두 제목을 보고 있다가 아무래도 낭만은 뭔가 나랑 안 맞을 것 같아 순서대로는 아니지만 '플라스틱 세대'부터 읽었다. 사랑니는 이미 다 발치하고 난 뒤라 없기도 했고. '플라스틱 세대'를 기대 이상으로 재밌게 읽어서 '낭만 사랑니'를 읽으려니 영 집중이 안됐다. '플라스틱 세대'는 사건이 끊임없이 벌어져서 순식간에 다음 전개로 나가게 만드는데 '낭만 사랑니'는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염라와 나한이 나오고, 치위생사의 이름이 천직이면서도 불길하게도 이시린이고. 잠깐 보려다가 다 읽어버린 '플라스틱 세대'와는 다르게 '낭만 사랑니'는 읽어보려고 앉았다가 몇 번 딴짓하게 됐다. 결국에는 이렇게 감동하게 될 줄 모르고. 이 두 책이 동시에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더라 비교하게 되었던 것이 " 이처럼 우주만물은 상호작용을 하며 인연을 쌓고, 서로를 느끼고, 공명하며, 아름다운 개성을 얻는다. p101"는 것 아닐까.
"못난 자들은 자기만큼 못난 자도 견딜 수 없기 마련이라 과장은 오만한 자를 보면 혐오감을 이기지 못해 구역질했고, 지금은 위기 상황이었다. p81 " 아, '낭만 사랑니'의 장점이자 단점은 시린의 직장생활이 너무 안좋은 방향으로 진짜 같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자면 뭔가 떠오른다. 넓지도 않은 한국 땅 어딘가는 두 번 다시 근처도 가고 싶지 않은 지역이 있는데 '거지같은 전직장 구역'이다. 밥만은 맨날 갈수있는 한 가장 맛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먹어서 근처 맛집이 어디있는지 잘 꿰고 있지만 그 맛집 두 번 다신 안가도 괜찮을 그곳. 책을 읽다 문득 세상이 왜 이러냐며 성토하고 싶어지는데, 그럴때마다 심호흡을 하며 과거의 어딘가에서 밥벌이를 하다 겪은 일들을 줄줄이 펼쳐놓고 싶은 마음을 잘 갈무리한다. 시린의 일상과 주변인들이 너무 진짜 같아서 답답하고 피곤한데 공감도 됐다. 나와 다른사람 사이의 거리감이나 관계같은 것들을 생각해보며 읽었다. 서로에게 칼날같은 말을 내뱉으면서도 그 안에는 염려, 사랑, 불안, 관심, 슬픔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인물들에게서, 나는 걱정이라고 이름 붙인 것들로 도리어 남에게 생채기를 낸 일들은 없었던가 떠올렸다. 속마음이 그대로 상대에게 전해지도록 노력하는 일도 용기가 필요하다.
"평소에는 사방이 암흑이라 본인이 꺼진 줄도 몰랐지만 환하게 타오르는 불을 목격하는 순간이 오면 어쩔 수 없는 조바심이 들었다. '혹시 나만 꺼져 있는 걸까?'하고. 목구멍 언저리가 아릿했다. p35" 청소년소설을 읽는 걸 좋아하는데 그 안에 야무지게 공감과 갈등, 극복, 성장같은 것을 넣어놓은 점이 마음에 든다. '낭만 사랑니'는 그 못지 않은 의미들을 꾹꾹 눌러담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흔들리는 어른들을 위한 성장소설이 아닐까 싶다. 어릴땐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은지 고민하는데, 어른이 되고 나면 속도가 신경쓰인다. 방향은 이미 돌릴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저마다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 남들이 가는만큼은 가고 있나 뒤쳐진 건 아닐까 불안해지고 만다. 나란했던 것 같은 사람들의 등만 보이는 것 같고, 내 등을 보고 있을거라 생각되는 사람들보다는 앞서있고 싶은 시기와 교만에 익숙해지는 것을 '어른이 됐다'고 핑계삼는다. 그러지말아야지.
" 그녀는 늘 일어나지 않은 일을 고민하며 살았다. 눈앞에 실체 없는 장막을 두고 사는 그녀에겐 앞으로 나아가는 일보다 제자리에 멈춰 있는 일이 편했다. 남들에게는 손끝으로 가벼이 밀어내는 문일지라도 그녀에게는 부딪칠 엄두가 나지 않는 벽이었다. 시린은 콧잔등을 간질이는 강아지풀 같은 고민 하나로도 온 세상의 파멸을 상상했으니, 매사가 무서웠다. p133 " 주인공 시린의 나약함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었다. 망했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실수가, 막힌 길이 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상황, 그 일의 과정이나 결과일뿐 나의 시간은 계속된다. 막상 상황 앞에서는 그게 전부인 것 같지만 과정 속에서는 한 순간일뿐이고 내가 나아가고자 하면 나는 망하지도 끝나지도 않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한때는 몰랐다는 걸 곱씹으며 읽었다.
아쉬운 것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을 소개하려면 내용이 너무 많이 드러나게 될까 피해야한다. 처음에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었던 시작을 나처럼 어렵게 여기거나 진부하거나 지루한 소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갈수록 관계와 세상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감동을 주는 좋은 책이었으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특히 수보리와 나호라의 이야기에서 감동했다. 이 둘의 갈등은 이미 결말을 어느정도 예상했음에도 사건을 풀어내는 말들이 깊이있는 울림을 준다. 언젠가부터 책 선물도 취향이 타는 조심스러운 선택지가 되었지만, 이 감동을 전하고 싶어 친구에게도 책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벗이여. 그대를 보고 나는 내가 되고, 그대 또한 나를 보아서 그대가 된다네. p222" 읽고나면 떠오르는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어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