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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붙게 해 주세요 ㅣ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95
이로아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26년 2월
평점 :
띠지에 "20년 전 죽은 전교 1등이 나타났다"는 문장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공부 잘하고 싶어서, 전교 1등 하고 싶은 학생의 욕망이 금단의 비술까지 손대게 만들었다는 내용이겠구나 예상했다. 더 나아가 20년 전 전교 1등이면 지금이랑은 교과과정이 다를텐데, 20년 전이면 출제 경향도 다르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기억이 안날텐데! 하고 슬퍼졌다. 요즘은 요오드 아니고 아이오딘이라며 나트륨이 소듐이고, 아밀라아제는 아밀레이스, 부탄은 뷰테인이라며 그럼 부탄가스는 뷰테인가스야? 스티로폼도 스타이로폼이고 연필은 한 다스 아니고 한 타라며... 그래도 전교 1등 괜찮겠니? 이런 슬픈 생각을 품고 책을 펼쳤다.
그런데 '귀신 붙게 해 주세요'를 앞에 두고 어리둥절해졌다. 이런 내용이었다니. 그래, 전교 1등이 필요하긴 한데 공부는 잘 모르겠고 전교 1등이랑 사랑 얘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책을 읽는 나도, 전교 1등 귀신이라도 강령해 낸 윤나도. '기순고'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학교를 앞에두고 정말 요즘 이런 학교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배경은 아닌 것 같아 의심이 들었다. 야간자율학습이나 두발, 용모 검사 같은 것들은 아무리 교칙이라고 해도 요즘 세상에 학생 인권 같은 문제가 얼마나 예민할 건데 대놓고 앞에서 창피를 주면서 강제할 수 있단 말이지? 20년 전의 학교와 요즘 학교의 모습을 섞어놓은 게 아닐까. 아이들 마음을 읽어주느라 훈육은 커녕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기사들만 접했던터라 더욱 그랬다.
이 아리송함은 기억 속에서 잊혀졌던 단어인 '이반'을 보았을 때 더욱 커졌다. 기순고의 20년 전에도 그랬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때에도 그런 단어를 본 적 있다. 한번 소문이 돈 대상을 향해 드러내놓고 배척하고 비웃기도 하던 분위기가 있으면서 동시에 별스럽지 않게 어울리고 신경쓰지 않던 분위기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그런 단어는 본지 오래되고 그냥 성소수자나 게이, 레즈비언 같은 단어들만 남은 줄 알았다. 지나가는 학생을 붙잡고 요즘도 이런 말을 쓰나요, 요즘도 학교에서 단속을 하나요, 물어볼 수 없어 조금 찜찜하던 차에 현실감있는 단어의 폭력적인 등장으로 할말을 잃었다. "기순고꼴페미박제계정 75" 이런 단어가 존재하고 사용된다는 것이 현실인데 다른 것들에서 위화감을 느낀다는 게 말이 되나.
전교 1등 귀신과 교칙, 이반 이런 단어들이 왜 연결되는가는 '윤나'를 중심으로 퍼져간다. 윤나는 친구가 가장 좋고, 미용을 배우고 싶은 꿈이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다만 윤나의 가장 친한 친구 재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현서라는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어 서로 멀어져버리고, 교풍이 자유로웠던 학교가 갑자기 '정상화(14)'를 선언하면서 학생들의 외양과 사상을 통제하려 들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강제적으로 시행되는 야간 자율 학습에서 빠지려면 모의고사 1등급을 맞아야 한다는 조건이 생겨 미용학원에 등록하기 위해 윤나는 일주일을 투자해 공부 대신 강령술을 마스터 하기로 마음먹는다. 윤쪽아, 윤쪽아. 차라리 그 의지와 실행력으로 공부를 하지 그랬니, 싶지만 윤나는 성공한다. 예체능이라 그런가 재능있어, 너.
" "최신 문제도 풀 수 있어요? 20년 동안 출제 경향이 많이 바뀌었을 텐데."
"네가 간절하다고 불러 놓고 나 테스트하겠다는 거니?"
"아니, 확인할 건 확인하고 넘어가야 하니까."
"기가 찬다 진짜. 요즘 애들은 하여튼. 문제 수준이 어떤데?" 59"
윤나가 불러낸 20년 전 전교 1등 귀신 순지의 성능은 확실했다. 하지만 귀신은 귀신인 법, 순지이용권에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부작용이 존재했는데 순지가 윤나의 친구를 빼앗아간 현서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쯤되면 현서의 매력은 마성이라 해도 좋을만해진다. 친구 재이 때문에 현서를 미워했던 윤나는 순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현서와 가까워지는데, 마성의 여고생답게 현서를 알면 알수록 미워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윤나는 현서와 친구가 되어간다. 그리고 점점 광기로 치달아가는 학교 '정상화'의 물결 속에서 윤나, 재이, 현서, 순지는 흐름을 거스르는 반기를 들며 20년 전 학교에서 벌어진 전교 1등 학생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기대보다 흡입력 있는 전개에 단숨에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는데 촘촘한 관계의 얽힘에 집중하다가, 순지의 과거와 관련된 부분에서 주경이 등장하며 그동안 자꾸만 뒷장으로 인도하던 긴장과 재미의 균형이 살짝 힘을 잃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을 싫어하는 주경이 왜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는지, 과거 전달자가 아닌 주경 그 자신으로서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 무엇이었는지 조금 더 듣고 싶었다. 게다가 이렇게 쉽게 순지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준다니, 거짓말하지 말라거나 장난치지 말라거나 화를 낼 법도 한데 빨리 전개를 하기 위해서 신뢰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이 생략된 느낌이 들었다. 또 쌓아놓은 위기에 비해 결말이 너무나 설키게 봉합되어 끝나버린 듯해 전체적으로 뒷심이 약하다는 감상이 남아 조금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충분히 몰입해서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사실 요즘 청소년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보다는 마치 저자가 스스로의 과거에 남겨두었던 상처를 꺼내 지금 다시 들여다보고 치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여전히 세상은 다름을 오염과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마음은 소독하면 정상화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같은 고민이 남아있을까. 그런 투명한 시선앞에서 전교 1등이나 귀신 같은 키워드들은 어느새 소멸되어 버리고, 단단한 알맹이만 남아 고민이 많은 누군가의 마음에 소중히 심어 휩쓸려 쓰러지거나 좌절하지 않고 자라나도록 지지해주고 싶다는 따뜻함이 느껴지는 듯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