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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파도 ㅣ 트리플 35
이서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6년 3월
평점 :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고 오는 길이었다. 주인공은 아주 오래 전에 먼 미래의 지구를 구했던 영웅이었다. 근 30년만에 스크린에서 마주한 그는 중년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영화 속에서 군인으로 살아오면서 마주한 수많은 죽음을 두고 그는 질문한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죽음의 대상은 나일수도 있고 내 옆의 누군가일수도 있다. 죽고 사는 일은 우연에 가까운 순간에 좌우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살아남은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선을 넘은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의 죄책감, 그리움, 신을 흉내 내는 놀이 같은 불온하고 불경한 경계를 그려내는 '방랑, 파도' 역시 비슷한 질문을 한다. 예측하기 어렵고, 통제할 수 없으며, 확고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생에 대하여 기꺼이 바다에, 땅 위에, 하늘의 이 편과 저 편으로 선을 그어가며 생과 몰의 간극을 가늠한다. 긴 시간에 걸쳐 이어진 인연과 갚지 못한 해원, 사는 것처럼 묶여있고 자유로운 것처럼 죽은 사람들이 오래된 마을에 얽혀있다.
" 나는 묻고 싶었다. 종종 굽어살피시는지. 이곳을, 이 어둑한 곳을. 그러나 거대한 존재는 내 슬픔을 주워주지 않는다. 거둬 가주지도 않는다. 보살펴주지도 않는다. 슬픔은 전적으로 내 몫이다. 51"
세 이야기가 마치 순서가 흐트러진 한 이야기나 다름없이 얽혀있었다. 담요 위에 늘어놓은 패를 이리저리 섞어 세 몫으로 나눠놓은 것 같은 이야기를 읽다보면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아무렇지도 않았던 사람이 달리보이기도 하고, 끊어진 것 같았던 흔적이 이어져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백이나 반이나, 혹은 지애나 지환이나, 향자나 미자나, 혜란이나 소녀나, 최씨나 최형원이나 모두가 그 위에서 섞였다 짝이 되었다 다시 흩어져나가는 화투패처럼 알 수 없는 손길에 따라 이리저리 한 판 놀려졌다. 어떨 때는 서로 묶여 점수가 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맞지 않아 나동그라지기도 하고, 뜻밖에 어그러져 그대로 묶인 채 멈춰있기도 하면서. 바닷가 마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리 배워도 모를 규칙 앞에서 이렇게 뒤집힌 내 패도 언젠가 날 수 있을지 자꾸만 묻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판이 어떻게 끝이 날지 숨죽이며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 불행한 사람은 불행으로 인해 고통받고, 불행한 사람이라는 사실로 인해 한 번 더 고통받는다. 불행한 사람이라는 낙인은 고약한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은 가지각색의 이유로 각자 불행함에도 불구하고 모두 한마음으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신의 불행을 능숙하고 훌륭하게 감추는 요령을 고요히 단련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을 고백하지 않고 공유하지 않으며 고급 도자기처럼 집 안에 고이 모셔두고 아주 정성스럽게 갈고 닦는다. 누군가 이걸 알아채거나 눈치채지 않도록 비밀스럽고 신중하고 교묘하게. 106"
한 동네 안에서 어느 집 사정이 어떤지 들여다보듯 알고 지내던 시절부터 오래도록 자라왔던 탓에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듯 해도 다 알고, 소문이 비밀보다 더 빠르다는 것이 갑갑하고 싫었던 때가 있었다. 바닷가의 작은 마을에서 산다는 것도 그것과 비슷해보였다. 요즘은 옆집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 내 집에 어떤 불행을 도자기처럼 모셔두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두지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는 곳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전보다 더 자유롭고 편하냐고 하면 그보다는 어딘지 섭섭하고 심심한 마음이 더 잦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누구와도 인사를 나누지 않는 곳에서 누구도 모르는 불행과 아무도 관심없는 낙인 마저도 혼자서만 감당해야 하는 단절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우리 생은 서로가 얽혀 한 판 위에서 이리저리 섞여 패가 맞듯 부딪혀가며 싸우고 놀아야 그제야 점수도 나는 것 같다. 문구점 노인의 부인에게서 향자에게 그리고 소녀에게로 전해지는 이 놀이는 이렇게 계속 이어지게 될 것이다.
'방랑, 파도'를 읽으며 인상 깊었던 또 다른 점은, 방금 스스로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나갈 수 없게 되는, 점차 과거의 기억만 남기고 가까운 것들은 잊어버리는, 평생 사방이 물인 곳에서 한번 물안으로 들어가보지 못했던 것을 후회로 남기지 않기 위해 기꺼이 그 안으로 빠져들어가는, 소중히 하던 것을 기꺼이 '너 가져라'하고 내주어도 괜찮을 시간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부는 바람에 긴 치마폭이 흔들리는 것, 구름이 바다 위를 지나가는 것, 해초가 비밀스럽게 흔들리는 것, 모래가 바닷물에 적셔드는 것, 우리가 늙어가는 것. 99"처럼 자연의 여상한 흐름 안에서 당연한 이치에 따라 늙어가고 또 죽는 일을 자연스럽게 상상해보게 만든다. 삶이라는 것이 이렇게 우릴 흔드는 파도 같기도 하구나, 위를 타고 휩쓸리면서 사는구나. 시간의 흐름 위에 올라서 생을 지나보낸다는 것이 이럴 수도 있구나, 이 이야기를 위해 '사람은 누구나 노인이 된다(163)'는 것을 그토록 오래 속으로 쌓아왔을까 생각하며 읽었다. 짧지만 삶에 대한 울림을 남기는 깊이 있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