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만큼 성실하게 - 교유서가 소설
이소호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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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의 내가 24개월 동안 매달 조금씩 도살당할 거라는 사실 같은 건 내 명석한 두뇌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저 총액을 24로 나누면 나오는 그 가벼운 숫자, 한 달에 밥 몇 번과 커피 몇 잔 값을 아끼면 되니까. 그 만만한 금액이 내 눈앞에 선명한 마법처럼 떠올랐을 뿐이다. 당장 내 수중에는 십 원 한 장 없어도 세상을 24조각으로 쪼개서 살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완벽하고 경이로운 경제학인가. 41" 

아, 이 얼마나 날카롭고 지저분하고 잔인한 이야기인가. 

어떤 이야기는 마치 쓰는 사람의 생을 적나라하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겁이 나서 마음이 불안해질 때가 있다. '이자만큼 성실하게'가 그런 이야기였다. 수진이라는 인물의 속내와 행동, 배경을 고스란히 봐도 어떻게 왜 이럴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수진을 책 속에 담아냈을까, 뭘 알아야 써도 쓸 것 아닌가. 혹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자만큼 성실하게' 역시 한번에 쭉 써내려간 글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저자와의 만남이 있다면 한번 쫓아가서 손을 들어 질문을 해야할까, 바보같은 생각이지 그럼 추리소설 작가들은 다 지하실 있는 집에 살게?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를 샅샅이 둘러볼 수 있는 구글맵을 켠 것처럼,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누군가의 삶도 검색해볼 수 있었을거야. 불안을 잠재우며 읽었다.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생생해서 재미있는데 재미를 느낄 수 없다니. 그런데 작가님 정말 아니죠, 덮인 책 표지를 보다 어딘가를 향해 괜히 간절한 눈빛을 보내본다. 너무 몰입해서 생긴 부작용이다. 

항상 주인공에게 가장 이입하고, 좋아하는 인물을 고를 땐 주인공을 선택하곤 하는데 수진이는 글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미워할 수도 없었지만, 복잡한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인물인 것만큼은 맞다. 너도 잘못하긴 했는데 세상도 너한테 나빴던 것 같기도 하고, 안아주고 싶다가도 뺨을 때리고 싶어지기도 했다. 수진이를 볼 때면 예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도박중독자의 가족>*이라는 웹툰이 떠올랐다. 아주 예전에 조금씩 연재가 될 때 봤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상식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만큼 부담이 됐던 기억이 있다. 계속해서 도박을 하고 빚을 내고 또 도박을 하고 가족들의 돈까지 끌어다 쓰고 울고 고통받고 화내고 반성하다가 또 도박을 하는 지독한 굴레가 수진의 쇼핑 중독에서도 보였다. 게다가 자꾸만 빚을 갚아주고 돈을 보내주는 가족들마저 같았다. 중독자 본인이 아닌 가족/주변인의 입장에서 중독된 삶을 보고 싶다면 <도박중독자의 가족>도 추천한다. 

" "100걸음당 1캐시."
사람들은 이 숫자를 비웃겠지. 고작 1원을 위해 무릎 연골을 소모하는 나를 비천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보라,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그토록 갈구했던 힘에의 의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지금 1원을 줍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노동을 수치화하고, 그 비루한 수치를 다시 예술적 숭고함으로 치환하는 모든 가치의 전도를 수행중이다. 138" 

읽으면서 자꾸만 돈쓰고 다니는 수진이도 싫었지만, 돈을 갚아주는 엄마도 싫고, 수진이를 까내리면서도 지금 연애하고 있을 때가 아닌 애를 데리고 결혼은 못하겠고 연애나 하자는 도윤은 더 싫었는데, 잘난 것도 없는 내가, 다를 것도 없으면서 그래도 수진이보다는 내가 낫지, 하고 걱정을 담은 척 수진이라는 인물을 평가하고 있는 것도 싫었다. 수진이는 정말 열심히 성실하게 살기라도 했지. 돈을 쓰는 일에도, 남들 앞에 서는 일에도, 글을 쓰는 일에도, 1원씩 10원씩 앱테크도 하고, 강의며 원고청탁이며 과외에 심사까지 일도 다, 열심히했다. 수진이란 인물은 그래, 연탄재. 마치 그만큼 뜨거웠던 적 없으면 함부로 차지도 말라던 연탄재*같았다. 불같이 타올랐던 흔적이 가득하지만 글쎄 가까이하면 검댕도 묻을까 굳이 차내버릴 생각도 들지 않는 연탄재였다. 차서도 안되고, 찰 생각도 안드는. 

현실적이고 자극적일수록 소설은 재밌었다. 그런데 그래서 오히려 점점 마음이 술렁이고 불안해지는 소설은 처음 만났다. 너무 적지도 또 많지도 않은 "60만 5,000원 때문에(7)". 괜히 카드어플에 들어가 이번달엔 얼마 썼지, 훑어본다. 혹시 나도 뭐 사는게 중독 아닌가, 가끔 보면 필요없는 걸 보상심리로, 때로는 싸다고 그냥 사버리는 것 같은데 'KCP-NHN링크' 결제 항목이 너무 많아 초조했다. 진짜 망하고싶지만은 않은데 망하지 않고 버티는게 평균 이상은 되어야 가능할 것 같은 세상이니까. 이 초조함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수진의 것이기도 하고 또 어딘가의 누구의 것이기도 한 것 같단 생각이 자꾸만 찾아왔다. 수진을 보다가 너무 남 욕하고 살지 말아야지 한다. 한문철 역대급 갱신이 떠도, A씨의 녹취록이 폭로 되어도, SNS 공론화가 올라와도 한번쯤은 스스로도 자기 자신을 어쩔 수 없었을 순간이 있었을거라 생각해보기로 한다. 

망하지말라는 말은 늦은 것 같고. 죽지는 마, 망할년아. 욕은 하지 않기로 했으니 욕같은 응원을 한다.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돈이 나가는 어른의 삶, 소득과 소비 사이를 험난하게 넘나드는 밥벌이의 험난함을 같이 버텨내는 묘한 연대를 느끼며 이 이상한 소설 '이자만큼 성실하게'를 추천한다. 돈을 벌어도 빚을 지는, 열심히 살수록 막막해지고, 싫은데 안타깝고, 재밌는데 씁쓸한, 반대의 마음을 바쁘게도 오가는 동안 나의 추는 어디로 기울어져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는 이야기다. 


*이하진 작가 카카오웹툰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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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도킹 스테이션 교유서가 시집 8
윤다미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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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앞에 두고는 종종 꿈을 꾸곤한다. 꿈을 바라는 마음으로 시집을 대하기 때문이다. 시가 현실과 분리되어 있으리란 법은 없지만 시를 읽으며 현실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현실을 꿈에 이어붙였든, 꿈을 현실에 엮었든 '신세기 도킹 스테이션'은 꿈 같았다. 어느날 새벽 마그네슘을 먹고 이리저리 옮겨간 생생한 꿈의 조각이 씹혔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꾸며 어른이 되었던가. 과거의 나에게 연결해 현재의 나를 만들어낸 것들이, 숫자를 거꾸로 세어 바쁘게 되감더라도* 이미 낡은 내가 열셋에 죽었었을지도* 모른다고 예감하면서도, 턱시도 가면 없이도 언니들을 따라 카드를 모으고, 손톱에서 빛이 나는 마법소녀*가 되어 세상과 싸우게 되었음을, 곱씹는 시간이었다. 

 3분 미트볼과 용가리치킨, 토마토 소스로 꾸며낸 파스타 접시 사진을 두고 친구는 그래, 너가 좋아하게 생겼다고 했다. 바싹 구운 베이컨과 계란후라이를 욕심껏 올린 하울정식을 보여줬을 때도 같은 반응이었다. 비싸다는 이유로 식탁에서 멸종을 맞이한 용가리치킨*이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 믿는 것처럼 우리는 자라서 당근같은 것은 빼버린 카레를 만들고, 약국에 가서 텐텐을 한가득 사버리는, 어른이 되었다. 
 '신세기 도킹 스테이션'에서 하나둘 제외시킨 항목들을 골라낸다. 콜렉트콜 안내가 끝나자마자 외쳐야했던 한마디*, 부루마불 판 위에 세웠던 호텔*, 한쪽눈을 감고서 들여다보았던 만화경*같은 것들을 후숙이 잘 된 망고를 갈라 먹기 좋게 칼집을 내 건네는*, 퀴즈쇼 상금으로 적금을 넣겠다는*, 넷플릭스를 보는* 능숙함으로 바꿔 끼웠다. 이 교묘한 세계의 교체와 확장을 지우고 채우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낡고 낡은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헤아릴 숫자가 서른개도 채 되지 않아 그래도 아직은 사랑이니 나중을 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셈을 하는 것보다 성숙은 더 가까이 있을지 모르나 자꾸만 시선이 좋아한다는 게 무엇인지, 터무니 없는 사이즈의 사랑을 감상하는 마음으로 향하는 것을 보니 더욱 그렇다. 그러니 너무 빨리 멀리 가 있지 않기를, 조금 천천히 22세기를 꿈꾸기를 바라며 만남을 마무리했다. 

 시집을 읽는 일은 어떻게 해서든 익숙해지지 않고, 같은 극의 자석끼리 붙여놓은 것처럼 늘 일정한 거리감을 끼고 있는 기분이다. 가까워질 방법을 몰라 혼자서라도 좋아하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고양이라도 만난 양, 서로 닿지 않는 언어로 하고싶은 말을 늘어놓으면서, 그래도 너는 내가 싫지 않지, 어쩌면 우리 통했는지도 몰라, 착각같은 순간을 공유한다. 남겨둔 빈칸*을 암호처럼 채우면서 그런데 정말 우리 통했을지도 몰라, 기꺼운 마음으로 읽었다. 밥을 먹을 때면 짱구와 무한도전을 친구삼는 사람에게 가깝게 다가갈만한 시집이 아닐까 싶었다. 아직은 어설프게 남아있는 풋풋함이 매력적이었다. 


*169 시네마토그래피
*168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가기
*152 girlish
*15 신세기공룡생활지침서
*118 1541
*116 랜드마크
*81 Linked Contemporary Lovers
*108 망고를 아세요?
*130 루비 썸머의 실종 
*136 소녀...신세기
*98 노상관찰학의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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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의과학사 - 그림으로 읽는 의과학 혁명의 순간들
유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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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short, Art is long -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26)'
히포크라테스가 남긴 이 경구를 아시나요? 우리가 예술이라 이해했던 이 문구의 Art는 사실 전체적인 문맥을 파악해서 해석하면, 예술이 아닌 의술을 뜻한다고 한다. 예술의 위대함을 찬미하는 문구가 아니라 '인생은 짧고, 의술은 길다'로 시작하는 공부 열심히 하라는 잔소리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히며 '비주얼 의과학사'는 시작된다. 

'비주얼 의과학사' 라는 제목을 몇번이나 되새겨도 매번 비주얼의 과학사라고 읽게 되는 함정에 빠졌다. 의과학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익숙하지 않아도 괜찮은걸까. 의과학의 역사를 비주얼적으로 풀어낸다는 시도는 어떻게 하게 되었을까? 해부학자인 저자는 클림트의 <키스>를 감상하다 그림 속 무늬들이 정자와 난자 그리고 수정의 순간을 암시한 그림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한다. 가장 자리가 진한 도넛 모양을 한 적혈구의 전형적인 형태를 띈 무늬(101)를 통해, 당시 지식인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의과학의 발전- 현미경을 통한 혈액의 구성 요소, 순환에 대한 발견이 작품에도 영향을 끼쳐 흔적을 남겼다고 본 것이다.
신기한 마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설명을 읽고서도 일반인의 눈으로 보기엔 그림 속 무늬들은 여전히 꽃이나 화려한 패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예술작품이 그 시대를 품고 있다는 점, 의과학이 가시적인 자료들을 통해 발전/기록 되어 왔다는 점엔 공감할 수 있었다. 책에 담긴 그림, 도표, 사진 등의 기록들을 통해 의학이 어떻게 시작되어 발전해나갔는지 파악해나간 저자의 시도는 자연스럽게 시각적 자료가 되어 의과학의 역사를 살펴보기 시작하는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하지만 과거의 인물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의과학 지식의 층까지 멀쩡히 정답으로 가는 길만을 걸어온 것은 아니라,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시도를 했을까 싶은 일들도 있다. 가장 엉뚱한 시도는 체중계 의자를 만들어 그 위에 올라가 먹은 것의 무게와 배설한 것의 무게를 재고 실제 증감한 체중 사이의 손실을 발견한 17세기 초의 의사 산토리오 산토리오(65)가 등장한다. 하지만 우리 현대인들의 계산은 여기서 더 나아가 저울에 감자칩 하나를 올리고 그 무게가 여전히 0에서 변동이 없음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섭취하면 한봉지를 다 먹어도 살이 안 찐다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독특한 형태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표지의 그림(97)은 라에네크가 만들어낸 최초의 청진기였다. 지금의 것과는 형태가 다르지만 더 잘 듣기위한 도구를 이용해 심장과 폐에서는 일정한 규칙음이 있고, 특정 소리가 특정 병리와 연관되어 있음을 밝혀낸 성취의 기록이다. 이밖에도 이걸 다 채울 수 있을까와 이걸 다 어디에 쓸 것인지 감도 오지 않는 중세 요검병(111) 크기에 놀라게 되기도 하고, 인슐린 치료 전후 환자의 변화(331)를 통해 현재와과 과거의 건강함과 보기 좋은 상태에 대한 관점 변화를 생각해보게 되기도 한다. 

'비주얼 의과학사'의 시도는 생소하고 독특하게 여겨지면서도 어찌보면 당연하게 수긍된다. 우리가 저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41)를 생각하면 떠올릴 수 있는 스케치인 <인체 비례도> 역시 그림으로 생물학의 영역을 표현해 낸 작품인 것이다. 그 외에도 다빈치가 남긴 인체 해부 스케치들은 예술가적 관점에서 시작되었으나 생물학과 해부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공헌을 했다. 그러니 이 두 분야의 연결을 낯설다고 착각하는 것일뿐, 오랫동안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보아왔던 예술이자 기록물, 발전의 과정인 것이다. 
클림트의 <키스>를 통해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저자는 본격적으로 비주얼적 자료에 담긴 시대의 기록, 의학 발전의 흔적을 찾는다. '비주얼 의과학사'에는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라는 책의 권두화(44)가 실려있다. 과학과 예술이 만난 르네상스 해부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책으로, 16세기 해부학자 베살리우스가 예술가인 제자 얀 반 칼카르와 협업해 완성한 것이다. 한 시대 안에서 모든 분야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 그럼으로써 더 나아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자극이 된다는 것이 잘 담긴 인상적인 예시였다. 
'비주얼 의과학사'는 저자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발견해 낸 결정적인 의학사적 순간들이 '봄/보는 것'으로서 어떻게 정립, 반박, 증명되어 왔는지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앞으로도 이어질 의학사의 여정을 함께 가도록 이끈다. 생각보다 재미있고, 기대 이상으로 유용한 내용으로 채워져있어 다양한 연령층의 독자들이 부담은 덜고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 읽어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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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충 사육 준수 사항 안전가옥 오리지널 48
김혜영 지음 / 안전가옥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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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발..."
입안에서 무언가 터졌다. 혀에서, 식도에서, 폐에서, 간에서, 온갖 내장과 창자가 뒤꼬이듯이 울부짖는 감정이었다. 도망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그 말만이 몸속의 피처럼 맴돌았다. 241" 

최근 개봉한 영화 <호프>에 너무나 많은 씨발이 나온 것마저 화제였다. 대체 그 욕설에는 무엇이 담겨있길래 한국인들은 모든 상황에 '씨발'을 쓰는 것일까. '빵충 사육 준수 사항'에서도 터져나오는 진실된 그 '씨발'이 있다. 갓 뜯은 루꼴라의 신선함 뒤로 담백 고소함이 가득한데다 깔끔한 뒷맛을 자랑하는 부드럽고 폭식한 빵충이야기에 대체 왠 씨발의 등장인가. 숫자 이야기로 환산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난 26년 국제도서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꼽히는 '빵충 사육 준수 사항'의 비밀과 인기비결이 궁금해서 기대를 안고 읽어보았다. 아니 근데 진짜 이 책 꼭 한 번 읽어봐야만 해! 빵충 맛을 봐야만 해! 그래서 반드시 영화로 나와야만 해! 

창업은 들어봤는데 창농은 생소하다. 

정한. 정한은 익숙하지만 거리를 두고 싶어지는 인물이다. 서른쯤 됐으면 뭐라도 됐어야지 하기엔 요즘은 서른도 어리다 생각하기에, 그저 뭐가 안됐다는 것 만으로 정한에게서 거리를 두고 싶어지는게 아니다. 정한과 타바콬 사이에 쌓아온 서사를 보면 뭐가 되기 위해 끝까지 가려고 해본 적 없다는 것, 지지부진한 관계들을 유지한채 끌고만 갔다는 것, 그 와중에 대마는 열심히도 키우고 피웠다는 것, 아직 서른이면서도 내가 옛날엔 잘 나갔는데 한다는 것이 초면부터 질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마 재배도 재능의 영역이었을까, 전여친이 남긴 마지막 배려인 취업지원센터를 통해 청년 농부가 되길 권유 받는 순간 역시 사람은 뭐든지 해봐야 경험이 되고 계기가 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정한아, 진짜 너 계속 이럴거니, 싶어질 때 쯤 드디어 창농의 꿈을 안은 정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얼레벌레 땅을 사고 기적같이 대출이 나오고 그래, 뭐라도 하니까 일이 되긴 되는구나 싶어지는데 그냥 일이 잘 풀리면 니가 정한이가 아니지. 마을발전기금이니, 길을 막고 버티는 트랙터니, 응애는 없애고 꿀벌은 살려야하는, 밭을 침범하는 멧돼지 뿐 아니라 동네사람들도 쫓아내야 할 판인 실전 귀농의 현실감도 지나치게 생생한데, 기껏 키운 딸기의 판로조차 미리 마련해두지 않은 정한의 어설픔에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답없던 정한마저 "남자 혼자 귀농하면 3년도 못 가 빤스런한다는 말이 있던데 내가 딱 그 꼴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도망갈 곳이 하늘에 있다는 점이랄까. 63" 내가 진짜 망했구나 깨달았을때, 문득 의문이 든다. 그런데 대체 딸기가 어떻게 빵충이 되는거지? 
대출 받은 3억이 고스란히 갚을 길 없는 빚으로 남아 정한의 눈 앞에 절망이 들이밀어졌을때, 드디어 이장님의 품 안에서 '청년스마트팜 신개발유용곤충육성 분양지원사업(64)', 줄여서 빵충*이 등장한다. 갓구운 소금빵맛이 나는 빵충 설명을 읽다보면 벌레라고는 해도 먹어볼까? 솔깃해진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메뚜기도 튀겨 먹고, 번데기도 삶아먹는데다가 밀가루, 초콜릿 등 식품을 가공할 때 어쩔 수 없이 포함되는 경우를 고려하면 모르는 채로 먹게되는 벌레의 양도 상당하다고 하지 않나. 빵순이라서가 아니라, 그동안도 맛있어서 혹은 모르고도 곤충을 먹어왔다면 맛있어서 빵맛이 나는 곤충이라는 사실을 알고 먹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맛있겠다.
정한이는 빵충 덕분에 평화롭고 행복하고, 처음으로 인생을 만끽하게 됐다(91)고 하고, 읽는 독자는 그저 빵충 맛이 궁금해서 침을 삼키며 책을 읽다가도 문득 아, 정한이 인생이 이렇게 잘만 풀릴리가 없는데 싶어진다. 서른 중반에 이르러 월 천을 벌게 된 정한의 성공이 배아파서가 아니라 빵충을 절대, 절대 변태시켜 성충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강력한 의지가 담긴 "13. 빵충 사육 준수 사항(74)"이 자꾸만 레드 레드 경고를 날리는 기분이 드는 탓이다. 나폴리탄 괴담과도 같은 빵충 사육 준수 사항은 대체 무엇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일까? 정한이의 빵충 농사 성공시대 이대로 쭉 이어지는 게 맞을까? 두둥-

어른이 되어서 일을 시작하고 난 뒤로 가끔,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사람의 민낯을 볼 때마다 실망하고 충격받고 더불어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게 될 때가 있었다. '빵충 사육 준수 사항'에서도 항목을 어기게 되는 것은 부주의와 불운 때문일 것이라 예상했지, 욕망 때문에 고의적으로 어기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나올 줄은 몰랐다. 암튼 사람이 문제고, 만악의 근원이다. 
소율 나는 이걸 견딜 수 없다. 293
경혜 저것만이 내 존재를 알아봐주었다고. 264
주원 성공이 눈앞에 있는데 여기서 도망치는 바보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298
언주 "나는 사냥꾼이여." 305
정수 애초에 남을 믿은 게 잘못이었다. 337
영돈 감히 세상이 자신에게 배신을 안겨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357
미주 "날 꺼내줘요." 167
정한 "나 정말 최악이네..." 308
인물들이 돈 앞에서 성공과 실패를 오가고, 욕망이 들끓게 되는 때에 이야기의 흐름도 한번의 변태를 겪게 된다. 그것이 완전하든 불완전하든, 의도적이든 자연스럽든, 어찌되었든 이 이야기는 재밌다. 김혜영 작가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반드시 만나보길 바란다. 나중에 '원작 소설' 찾아 읽으려면 바쁠테니 올 여름 미리 읽어두자.



*빵충이 metamorphoptera목 panisformidae과 라길래 찾아보려 노력해보니 변태목 빵개미과를 만들어낸 듯하다. 변태목 찾다 19금 제한 자꾸 걸려서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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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
앨리슨 데이밍거 지음, 전경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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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본능적이거나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방식으로, 또는 '나다운' 방식으로 행동할 때조차도, 우리는 또한 성별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29" 

언젠가 결혼 생활의 현실 혹은 남편에게 심부름 시키면 벌어지는 상황이라는 제목으로 본 이야기다. 
아내가 남편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아내 : 우유 하나 사 와. 계란 있으면 6개 사 와.
남편은 우유를 6개 사왔다. 아내가 물었다.
아내 : 왜 우유를 6개나 사왔어?
남편 : 계란이 있길래 6개 사왔지.
웃으라는 의도도 있겠지만 차마 웃음이 나오지도 않는다. '남편, 심부름' 키워드를 넣어 검색하기만 하면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쏟아진다. 냉장고에 있는 감자 반만 까서 삶아놓으라는 말에 총 양의 절반이 아니라 각 감자알의 절반씩만 껍질을 깎아서 삶아놓은 것 같은 이상한 일들이 국가와 인종을 불문하고 일어난다. 이들에게 '제대로 된 명령어'를 입력하는 법 마저 공유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멀쩡히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연애와 결혼까지 한 성인이라는 것이다. 가사노동을 나눠야하는 아내와 남편이 되기 전까지 아마 이들의 취약함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이들 대부분은 사회에서 자신들이 다른 여성노동자들보다 더 일을 잘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고 단단히 믿고 있다. 이들이 우월하다고 믿는 사고와 능력은 왜 가사노동의 범위에서만 이토록 퇴화되는 것일까?
저런 상황들은 유머일 뿐이고 일부의 극단적인 예시이며, 요즘은 반반결혼, 노동과 경제 관리를 반씩 나눠 부담하는 방식이 유행하면서 가사노동의 불평등에 대한 인지와 개선,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에서는 항목과 시간으로 다 계산되지 않은 '인지노동'의 존재와 불평등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 여러 세대에 걸친 페미니즘 활동가들과 사회과학자들이 가치 있는 사회적 기여와 여성이 짊어진 과도한 부담으로서의 집안일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운동을 벌였고 지금도 계속 벌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싸움에서 비롯한 한 가지 유감스러운 부작용은 가사노동이 시간 계랑으로 드러나는 육체적 요소로 단일하게 축소되었다는 사실이다. 52"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진행되는 인지노동은 생필품이 얼마나 남았는지, 어떤 제품을 얼마에 구매해야 하는지, 가족모임, 병원 예약을 관리하거나, 저녁 메뉴와 냉장고 안의 식재료를 가늠하는 것처럼 사소하고 빈번하며 반복적인 가사노동부터 육아, 돌봄처럼 책임이 크고 장기간에 걸친 의사결정과 노동을 아우른다. 가정에서 이 인지노동을 주로 하게 되는 것은 누구일까? 왜 '여성'들이 인지노동의 대부분을 맡게 되는 것일까?
'엄마가 우리집 대장'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것처럼, 가사노동/인지노동은 확고하게 여성들의 몫이 크다. 가정의 대소사를 여성 파트너가 주관하면서 여성들은 초인/관리자로 묘사되고, 남성들은 허당/서투른 보조자로 묘사되곤 한다. 표면적으로는 여성을 치켜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별 차이의 관념을 강화하고 인지노동을 불균형하게 부담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이 차이를 성별 불균형이 아닌, 개인 성격 차이로 계획적이고 꼼꼼하고 더 잘 챙기는 사람이 맡아서 분담하는 것이란 인식 때문에 "커플 다수가 인지노동 배분 방식이 최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깨부술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293)"해 변화의 가능성을 축소(283)해왔음을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를 통해 밝힌다.
 때문에 이 책을 권하는 것은, 이를 통해 그저 남성 파트너들이 여성에게 가사노동의 대부분을 전가하려는 행태를 보인다고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동의 범위로 채 인식하지 못했던 '인지적 가사노동'이란 무엇인지 파악하고, 가정 내에서 어떻게 부담되고 있는지,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떻게 접근하고 시도해야 하는지 알아보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반'으로 정해진 가사노동의 분배에도 불구하고 불균형과 부담을 느끼고 있는 여성 파트너들에게도 이 책을 추천하지만, '일부러 제대로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일부 남성 파트너들과 '균형적이고 공평하게 가사노동을 분담하고 있'다고 자신하는 일부 남성 파트너들에게 이 책이 어떻게 느껴질지 의견이 궁금해진다.
 책을 통해 어떤 '실전(노동, 불평등, 불만요소)'들이 가정 내에 존재하고 있는지 책을 통해 새롭게 깨닫고, 그동안 의식하지 못한 채로 수행했던 인지노동이 어떤 배경을 통해 이루어져 왔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완벽한 평등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는 가시적인 목록과 시간으로 반영되지 않았던 회색지대를 발견하고 이를 더 나은 방식으로 풀어가기 위한 받침이 되어주는 좋은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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