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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는 없어 ㅣ 꿈꾸는돌 45
김지현 지음 / 돌베개 / 2026년 1월
평점 :
" "뭔가를 진심으로 치열하게 하는 사람들은 티가 날 수밖에 없나 봐." 153"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어른이 되기 위해 나아가고 있는 청소년기도 특히 그렇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도 자신이 서야할 곳을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자각이 시작되면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지는 한편,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세계의 불확실성에 대한 긴장과 두려움을 품게 된다. 유자 또는 전교1등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지안, 학업중단숙려제 기간을 보내는 수영, 이름 대신 전학생이라 불리며 늘 혼자있는 해민, 어느 날 거제에 내려온 외지인 혜현을 통해 이들이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며 자리를 찾기 위해 쌓아올리는 시간을 조금씩 엿보게된다. 이들이 서로를 알아보도록 묶어주는 요소는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헤매고 있다는 공통점에 있다고 여겨지는데, 재밌게도 이들은 각자의 관계를 맺으며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을 나누기도 하고, 전혀 접점이 없었다가 어느새 가까워지기도 한다.
" 여름 휴가철이 지나고 나면 지역 유기 동물 센터엔 새로운 아이들이 등장했다. 처음엔 누가 여행까지 와서 키우던 동물을 버리고 갈까, 길을 잃고 실종된 거겠지, 짐작했는데 아이들을 찾아가는 보호자가 없는 것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31"
어느날 강아지를 데리고 동네에 등장한 혜현이 혹시 키우던 동물을 버리고 가는 사람일까봐 수영은 혜현에게 접근한다. 덩달아 혜현과 인사를 나누게 된 지안에게 혜현은 2013년 교지를 찾아봐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고, 지안은 편집부원인 해민에게 말을 걸게 된다. 이 자연스러운 연결을 통해 혜현이 찾고자하는 2013년의 교지에 담겨 있는 것이 뭘까, 아직은 어린 지안이 발작과도 같은 공황증세를 앓게 된 이유가 뭘까 혹시 내가 모르는 숨겨진 비밀이나 사건이라도 있을까 싶어 책을 읽다가 잠깐 검색창을 열어 2013년의 거제 사건 사고를 찾아보기도 했다. 천천히 풀려나가는 이야기는 검색창 같은 것에서 나오는 사건같은 것은 아니었다.
" 그렇게 이름이 바뀌어도 그 사람의 가장 진실한 부분은 어딘가에 각인처럼 남는다. 남들이 하는 말이 아닌, 오랜 시간 꾸준한 애정을 쏟으며 지켜 온 것들에 담겨 그 사람을 설명해 주는 진짜 '본질'이 된다. 그렇다면 나의 본질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163"
처음 지안이 별명을 신경 쓸 때, 수영이 개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중학교 때 전학 온 해민이 고등학교에서도 여전히 전학생이라고 불릴 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호칭이, 사실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하나의 의미를 담고 있었구나 깨닫게 된다. 유자빵을 파는 가게집 딸인 유지안의 별명이 유자가 되는 자연스러움, 전교 1등이라는 별명을 자신을 드러내는 장점으로 여겼던 만큼 잃을까봐, 잃었을 때 받게 되는 압박같은 것들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전학생이라는 별명이 주는 거리감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해민 역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뿌리내릴 곳을 찾고 싶어하는 허허로움이 느껴졌다. '유자는 없어'는 내가 어떻게 불리는지가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이름을 바꾼다는것, 바꾼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통해 어떻게 불리더라도 잃지 않을 고유한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 역시 중요함을 생각하게 해준다.
나는 주로 볼 것 없고 사람들은 오래된 심심한 동네에서 오래도록 지내왔다. 가끔 여름철 바다로 놀러가면 그 지역은 피서지니까 한껏 여름의 즐거움과 비일상의 자유를 만끽하는 가벼운 차림의 사람들을 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문득 여기서 사는 사람은 내 집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수영복만 입고 선글라스를 낀 채로 흥에 취해 돌아다니는 모습을 일상에서 마주할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들까 궁금해지곤 했다. '유자는 없어'에서는 여행자가 아닌 그 곳에 사는 사람의 시선을 느껴볼 수 있다는 점이 특별했다. 경험해왔던 것의 반대편에 선 시선을 경험해볼 수 있다는 것이 새롭고, 한편으로는 한 동네에서 오래 지낸 사람의 시선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 그날 나는 고래섬을 바라보던 김해민의 모습이 내심 거슬렸다. 유명한 관광지나 해수욕장도 아닌 그냥 동네 바닷가인데 저렇게까지 구경할 필요가 있나,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날 내가 느낀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바다를 보며 저렇게 감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겐 더 이상의 궁금증이나 기대가 일어나지 않는 이 도시에서 의미 있고 반짝이는 것들을 찾아내는 그 눈이 부러웠다. 111"
지안의 시선은 지역의 유명 맛집을 찾아가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방문자를 맞이하는 사람의 입장이기도 하고, 대도시의 수많은 학생 중 한명이 아니라 작은 동네의 전교생의 얼굴을 다 기억할 수 있는 학교의 학생 입장이기도 했다. 지안이 사는 거제는 떠나온 사람들이 찾는 도시라 외지인들이 찾아와 익숙한 동네의 면면을 새롭게 감상하는 모습이 종종 나오는데, 내가 자란 동네는 딱히 볼 것도 이름난 것도 없어 굳이 찾아와 새로움에 눈을 빛낼만한 것이 없다. 다만 오직 그곳에서 나고 자란 나만이 제가 쌓아올린 추억에 잠겨 사라져가는 것들을 덧새기듯 바라볼 뿐이다. 어쩌면 지안이 더 나이를 먹고 너무 멀고 온갖 좋은 것들이 가득한 서울이 고향만큼이나 익숙해지고나면 나와 같은 눈으로 무감했던 동네의 곳곳을 애틋히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이전에 바라본 적 없던 눈으로 보는 경험, 늘 들어왔던 부름에 문득 낯섦을 느끼게 되는 경험을 '유자는 없어'를 통해 접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익숙함과 새로움을 오가는 동안 지금의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 과거 어떤 곳에 발을 딛으며 지나왔는지 그게 무엇이 되어 나를 만들고 있는지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나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까, 무엇이 나의 본질이 되어줄까. 가능한 가장 좋은 패를 고를 수 있다면 좋을텐데, 때로 나쁜 카드(92)를 집더라도 그 순간에 멈추지 않는 사람이어야지. 내가 뽑은 카드 한 장이 아니라 다음 카드를 뽑기 위해 묵묵히 나아가는 과정이 나를 만들어줄 것이라 믿으며 어른이 되어야지 다짐한다. 자신의 자리를 찾는 사람, 나아갈 길을 찾는 사람에게 '유자는 없어'를 추천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