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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바바라 몰리나르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게 아주 중요하다. 171-택시"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앞에서 당혹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이 사람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을, 어쩌면 그 자체가 지나친 욕심이고 공감이라도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을 수는 있을까 막막했다. 여느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을 때와는 달리 일단 읽어나가기로 했다.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다시, 몇 차례 앞뒤로 돌아가는 동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여러 번 겹을 쌓아올려 만드는 섬세한 결의 디저트를 맛보는 것처럼 '바바라 몰리나르'의 세계도 여러 겹으로 쌓아 보이는 것을 의미로 이어내는 과정을 겪었다.
이야기 속의 세계는 적대적이다. '적대적이고 불친절한 도시(70)'는 내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의 세계이다. 나는 그 안에서 헤매고 다른 이들 안에서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특히 타인의 시선을 강조하고 하고 있는데 벽에 난 구멍(159), 자신을 엿보는 수천 개의 눈들(92),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느낌(51), 백미러 속 나를 살피는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눈(172)처럼 외부 세계를 '나'를 감시하고 적대하는 위협으로 묘사한다. 대부분의 글들에서 보이는 이 외부의 위협, 사람들 뿐 아니라 사물들까지 자신을 적대적으로 대한다(181)는 고백은 불안정한 심리, 피해의식과 망상의 그늘을 느끼게 한다.
외부의 적대는 가장 가까운 인물들마저 부정하도록 만든다. 자신 곁의 사람, 아내/남편의 존재가 갑자기 낯설고 멀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등장한다. 연인이라고 믿었던 이가 낯설어지고, 사랑이 벼락처럼 내리쳐 완벽했던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욕실 커튼 뒤에서, 문 틈 사이로 지켜보는 중상과 적의를 향한 저항은 폭력과 자기 파괴의 형태로 대상의 상실, 나의 죽음을 낳는다. 이 적대적인 세계를 피해 인물들은 자신을 찾는 부름, "와줘(70)" 에 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계속해서 늦을까 봐, 혹은 가는 방편을 놓치게 될까봐, 기회를 잃을까봐, 기다리게 만들까봐 초조한 두려움 속에서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언제?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중(170)"인지 모르지만 인물들은 어디론가 가려하고, 가고 있다. 이 편집증적인 지향점은 '죽음(223)'이 아닐까 싶다.
이야기 안에서 세계를 상대로 저항한 반격은 실패와 좌절로 반복되는데 독특하게도 '행복' 안에서는 이 결말이 부정적이지만은 않게 그려진다. 그래서 '행복'을 '짐승 우리'와 함께 가장 친절한, 먼저 읽어보도록 권해주고 싶은 단편으로 꼽는다. '짐승 우리'는 느끼기에 가장 완성도가 높은 단편이다. 작가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읽는 것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흐름이 있다. 다른 글들을 거쳐오며 이 독특한 서술 방식에 익숙해진 덕분에 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모호함, 난해함이 적고 기승전결이 담겨 있다. 초반 글들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면 '짐승 우리'를 먼저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독특하다'는 말이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와 가장 잘 어울리는 감상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으며 이 독특함을 이기는 매혹을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를 읽고 어떤 것들을 느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어떤 감각을 공유하고 감응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을테고, 그러니 거의 잊혀져가던 바바라 몰리나르의 글이 다시 출간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게 나는 아니어서 약간은 아쉽고 궁금한 마음이다. 자신의 독특함, 남다른 취향이 어디까지 뻗어나가는지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 많은 독자들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