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 국립국어원 상담실 연구원의 365일 노동기
이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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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는 곧 세상의 이치를 비추는 거울인 것만 같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작동하는 문법과 어휘에 대한 훌륭한 식별 능력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다. 스스로는 그 하나하나의 근거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언어를 구사하지만, 개개인에게 잠재된 언어 구조는 거대하고 정교한 성과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중략... 자세히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사람들의 언어 사용 구조는 당사자도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대단한 짜임새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45" 

최근 신발을 사러 한 매장에 들렀을 때 재밌는 표현을 들었다. 사이즈를 물어보니 직원이 '해당 제품 사이즈는 5단위가 아닌 10단위로 전개가 된다'고 답해온 것이다. 사이즈의 전개라니 문학적이다. 그런데 이 낯선 표현은 맞는 것일까 틀린 것일까?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고객과의 괜한 갈등 상황을 피하기 위해 생각지도 못한 쿠션어와 존대(존칭의 인플레이션198)를 만들어 사용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긴 했지만, 사이즈의 전개라는 표현은 간만에 신선하게 느껴졌다. 저자 역시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107)라는 질문을 받고 문법적으로는 교정이 필요한 이 완곡한 의문형 표현이 실생활에서는 어떻게 쓰이고 받아들여지는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매번 새로운 표현이 나오고, 새로운 말의 뜻이 암묵적으로 이해되어 퍼져나가는 것을 보니 언어가 살아있다는 것 말고는 다른 감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가장 먼저 놀래킨 것이 '돼지고기미나리찜'이다. 처음 듣는 메뉴 이름이기도 한데, 이것이 방송 자막일 때와 교재에 쓰일 때(18)에 따라 정확한 답변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인가? 돼지고기미나리찜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듯이 낯선 단어들이 튀어나온다. 생세일(24)이라니 뭘 판다는 건 줄 알았다. 여러분이 알고리즘이라고 쓰는 단어가 사실은 알고리듬(31)으로 발음되어야 하고 이는 혼용 가능합니다,라는 말 없이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알고리듬은 또 어떤가. 재밌는 점은 국립국어원에서 매일 맞춤법 상담을 하며 연구해도 아밀라아제가 아밀레이스(47)가 됐다는 사실은 낯설다는 것이다. 읽다보면 이게 그렇게 중요한가 싶은 아주 작은 차이 띄어쓰기 한 번, ㅅ이 들어가느냐 마냐의(160) 일, 미묘한 의미 차이같은 것들이 아주 맹렬한 토론 주제가 되는데 듣다보면 정말 이렇게 중요한 일이 맞구나 싶어진다. 

" 언어의 요소가 문장이나 글 전체의 의미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확인하기보다, 더 정확한 표현을 찾아 교정하는 일에 익숙해진 탓이겠지. 우리는 일종의 기술자가 된 것 같다. 그런데 기술이 지나치게 정교해지면, 오히려 시야를 좁히기도 한다. 92" 

짜장면(67)을 짜장면이라 부르지 못하고 자장면이라 불러야 했던 때가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를려면야 자장면이든 짜장면이든 부를 수 있지만 짜장면이 틀렸다고 옳고 그름이 퍼져나가던 때가 있었다. 그때 닭도리탕도 닭볶음탕이 되어서 한동안 여러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도 하고 아직도 알쏭달쏭하게 혼용되고 있다. 그런데 로브스터가 랍스터도 된다(132)는 사실은 왜 아직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일까! 상대적으로 덜 소비되기 때문에 알려질 기회도 적었던 것일까? 이 단어들이 논의가 되고 논란이 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품어지는 과정을 지켜봤던 것을 떠올려보니 역사의 산증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새삼 재밌었다. 책을 읽다보니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은 '어머니, 민수를 1시까지 어머니 댁에 데려다 드릴게요(84)'의 소제목으로 시작해서 본문의 내용에는 '어머니, 제가 민성이를 어머니 댁에 1시까지 데려다줄게요/드릴게요.(85)'로 되어 있는 것이다. 세상에 별 걸 다 전화를 해서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으니 덩달아 갑자기 민수가 왜 민성이로 바뀌었는지 물어보고 싶어졌다. 

이처럼 '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를 읽고 갑자기 '우리말 365'에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생기는 것 같고 전화를 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들 독자들이 있을텐데, 책의 중간중간 무례한 상담자들이나 예상 외의 질문을 하는 독특한 상담자들, 화장실 문제처럼 어찌할 수 없는 생리적 욕구 앞에서도 순번부터 고려해야 하는 솔직히 열악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상담 환경 등도 등장하며 그런 호기심을 자제하도록 해준다. 맞춤법에 대한 정보만 담은 내용이 아니라 노동 환경에 대해서도 함께 접할 수 있어 읽다보면 고생하십니다,하고 절로 위로를 보내게 된다. 저자가 직접 조언한 것 중 가장 유용한 '우리말 365' 이용팁은 하루에 다섯 개까지 질문할 수 있다(158)는 것이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팁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갖추고 통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핸드폰 너머에 사람이 있으니까.  

" 문장은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며, 우리가 어디에 시선을 두고 어떤 길로 뜻을 전하느냐에 따라 그 움직임의 방향도 완전히 달라진다. '더 잘 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더 분명하게 전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2" 

종종 어떤 사람이 좋고 싫은지 꼽으라는 질문에 맞춤법 잘 못 쓰는 사람이 싫다고 밝히는 사람들이 있다. '싫다'고 할 수 있는 그들의 과감함이 부럽고, 때로 무섭고, 종종 서운하고, 가끔 공감된다. 잘못된 단어나 문법 없이 글을 잘 쓰면야 참 좋겠지만 솔직히 쉽지 않다. 일부러 무시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잘 쓰기를 추구는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상심하지 않을 정도의 마음을 가지는 동안 가장 많이 배운 것은 자신의 부족함이었다. '낉여오다(173)'는 유행어나 '보리꼬리'같은 틀린 단어가 불쾌함 대신 유쾌함을 주는 것처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얼마나 이해하냐에 따라 잘못 쓴 단어나 문장도 정 떨어지는 무식함이 아니라 실수나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어차피 모두가 바른 문장을 쓸 수는 없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실수를 할 텐데 그때마다 창피를 주고 그거 몰라도 잘사네 못사네 싸울 수도 없다. 그러니 웃음과 이해로 품고 살며시 고쳐나갈 수 밖에. '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를 읽은 기념으로 격조했던 친구에게 "너 나 안 본 지 두 달 다 돼 감"(113) 안부를 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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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 육아 번역기
임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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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의 영역은 낯설다. 절대적으로 나와 거리가 멀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환경과 자신의 아이를 육아한다는 것은 천지차이일 것이다. '상상하지 못한 다른 세계(9)'는 나와 타인의 삶이 만나는 모든 순간 부딪힌다. 그래서 갈등도 있고 예상치 못한 즐거움도 있겠지.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세계를 엿보고 싶어서 책을 읽었다. 얼마나 치열하게 다투고 따뜻하게 이해하려 했을까 읽기 전부터 기대되어 웃음이 나왔다. 

이 세계는 두 개의 문화가 서로 섞여들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뭐가 더 낫다 아니다를 따질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성적으로. 하지만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익숙한 것에 기울지도 모른다. 책이 한국에서의 생활에 완벽에 대한 추구, 타인에 대한 의식, 외모에 대한 압박 이야기로 시작할 때, 반박하고 싶어지곤 했다. 한국스럽게 사는 일에 아무 비판도 불만도 없이 절여져있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맞아, 우리 사회의 병폐야.'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하지만 외국이라고 해서 더 낫기만 한 것은 아닐텐데? 갈등이 일었다. " 과연 우리는 자유롭게 육아 철학을 '선택'할 수 있을까. 아니면 결국 각자의 성장 배경과 문화에 묶여 있는 것일까. 당연하고 옳다고 믿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각자의 문화 안에서만 통용되는 기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우리 각각의 방식을 보편적인 기준이라 착각한다. 나 역시 그렇다. 107" 이와 비슷한 고민이 이 가족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조금 마음이 풀어졌다. 

" 살림에서 깔끔함과 정리에 대한 서로 다른 기준은 좀체 타협을 보기 쉽지 않다. 67"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한영 육아 번역기'라기보다는 영국식 육아 적용기에 더 가깝지 않았나 싶다. 기존의 생애 과정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영국의 생활과 문화에서 느낀 장점과 새로움을 긍정적으로 느끼고 많이 받아들인 티가 났다. '화이트 인테리어(191)'에 대해서 말할 때도 그게 유행이라서, 되팔기좋으라고가 아니라 확실히 집이 밝고 넓어보이고 더 깨끗해보이기 때문이라는 장점을 말하고 싶었다. 옅은 녹색, 연분홍색, 캐릭터벽지, 포인트벽지 많은 디자인을 거쳐왔지만 크림과 흰색은 가장 질리지 않고 안정감을 주는 선택이었다. 육아서를 읽고선 왜 인테리어 한 마디에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이야기를 하냐고 할 수 있지만, 읽는 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말이었다. 획일적이고 지나치게 기준을 세워둔 듯해 답답하게 여겨졌을지 모르지만, 고심해서 효율이 가장 좋은 길을 요령껏 가려는 노력이 그 안에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흙에서 뒹굴고 놀아도 좋고, 유아용 세제를 구분해서 쓰지 않아도 좋다. 무균의 상태로 배양하듯 자라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집안에서 신발을 신는 문화에서 아이가 기어다니는 것(83)은 넘기 힘든 장벽이었다. 이것만큼은 '영국식 돌봄'이 유연하고 하는 수식도 아무 소용없이 양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했다. 밖에서는 바닥도 굴러다니고 강아지랑 뒹굴고 놀 수 있지, 하지만 신발을 신고 다니는 집안에선? 안된다. 

" 일터로 향하는 엄마들은 매일 아이들과 작은 이별을 한다.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하더라도 이 두 세계를 넘나드는 데는 끝없는 고민이 따른다. 하지만 내가 나의 엄마를 향해 가졌던 생각을 떠올려보면 일을 계속 할 이유가 선명해진다. 나도 엄마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날 위해 너무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엄마의 삶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으니까. 95" 

K 할머니 육아에 대해 예찬하는 저자이면서 자신의 삶과 가정의 균형을 조절하고 있는 여성으로서 황혼육아, 돌봄 노동을 부모 세대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다. 산후우울증이 여성의 전유물이 아님(154)을 이야기하면서 그 결말이 친정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156)으로 맺어진 것은 현실적이면서도 남자 화장실에 기저귀 갈이대가 없는 현실에 대해 말할 때 순간적으로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쉽긴 할텐데 싶었다. 그리고 곧 자신이 무지했음을 깨달았다. "육아하는 아빠들이 아이와 둘이 외출을 했을 땐 어떻게 해야 하나, 혹은 싱글 대디라면 매번 이런 상황을 마주하진 않을까. 44" 사실 영국 펍에 아기 의자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썩 괜찮게 다가오진 않았다. 영국의 펍은 그 의미나 기능이 다른 부분도 있겠지만, 한국식으로 생각하기에 술집에 아기를 데리고 가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개인의 판단에 맡길 일이지만 우리 음주 문화를 생각했을때 그건 그리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마저도 육아를 하면서 잠깐 압박감을 해소하고 저녁시간의 여유를 즐기고픈 마음을 몰라주는 고리타분한 생각일 수 있다. 현실을 몰라서 하는 말일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현실을 담은 조언을 남겨주길 바란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내밀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져있어 그 점이 재밌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게 읽었다. 중반이 지나면서는 연애와 가족 이야기의 비중도 높아지면서 전체적으로 이들이 어떻게 가족이 되었고, 되어갔는가를 관람하듯이 읽었다. 전문적인 비교나 분석은 없었지만 저자가 굉장히 유연하고 열린 태도로 한국과 영국의 생활을 받아들이고 반영하여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결혼과 육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영 육아 번역기'라는 제목이 재미있고 의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와 엮인 해프닝은 씁쓸했다. 소중한 누군가의 책에도 어쩔 수 없는 사건이 가끔은 끼어드는 법이다. 생활기반과 문화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조금씩 닮은 넷이 되고,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행복한 과정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지지를 얻으며 읽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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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사치 - 가족을 이루는 삶이 특별해진 시대의 가족
진미정 지음 / 김영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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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한 삶도, 결혼하지 않은 삶도 눈총받는 사회. 그게 바로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8" 

티비 프로그램 시청 목록이 겹치는 바람에 가끔씩 재밌고 민망했다. 아이돌 서바이벌을 봤던 중년인이라 저자의 고백과도 같은 책의 시작을 깊이 공감하며 읽었다. 게다가 아이돌 서바이벌을 보면서 떠올리는 것이 군부대 예능이라니 대체 얼마나 옛날 사람이고, 뜬금없지만 또 납득이 되는 연계인지. 생각해보니 한국사람에게 이 가족관계, 관계성은 꽤 큰 매력 요인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한 아이돌 서바이벌에서 가족과 전화통화를 할 때 오가는 대화가 얼마나 친근하고 재미있는지*에 따라 보는 이들의 호감도가 놀랍도록 달라진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이 시청률과 투표에 양심과 영혼을 팔아버린 제작진이 '가족서사' 요소를 넣은 이유가 있겠구나 의심하던 차에 책에서도 통계와 함께 합리적 근거를 내놓았다. 무서운 방송국놈들. 

거기다 '나는 솔로(103)'라는 프로그램이 언급되니 비슷한 세대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연애 프로그램들은 모르겠지만 '나솔'은 연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실험이나 다름 없어서 인기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저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연애를 관찰함으로써 설렘, 썸, 낭만, 오글거림을 대리 체험(108)"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 저런 사람이 실제로 있다고? 아니 저런 사람이 또 있다고? 저런 상황에? 저런 언행을 한다고? 를 대리 체험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연프를 보고 대리만족을 한다는 추측으로 "결혼, 출산을 물론 연애와 섹스까지도 거부하거나 피한다는 청년세대 담론은 다시 읽힐 필요가 있다.(115)"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 생각했다. 오히려 내가 벗어난 리그에서 벌어지는 각종 인간군상을 관조하는 것에 더 가깝지 않을까,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도 희망을 찾는다는 것보다는. 

  "흔히 가족은 정서적 단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생산과 재생산의 단위다.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니 가족 전반의 기반이 흔들리고, 공고하다고 생각했던 핵가족 모델도 흔들리게 되었다. 60" 

흥미로웠던 사실 중 하나는 IMF 이후 늘어난 가족해체이다. 지금 유례없는 비혼과 저출생의 시대에 단군 이래 처음으로 부모세대보다 못 사는 첫 세대가 등장했다는 기사가 나오는 것이 영 우연만은 아닌가보다. 흔히 결혼을 하려는 이유 중 하나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를 꼽는데 요즘은 그 심리적 안정보다 개인의 생존이 더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니,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부터 챙기기를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혼하고 아이 낳고 소박하게 안정적으로 사는 것이 소망(87)"이라고 하면 전에는 평범한 삶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요즘은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평범함과 남들처럼 산다는 것의 기준이 보통 이상으로 조정된 듯 하다. 

통계의 허점을 들어 이혼율과 한부모가정, 1인 가구의 어마어마한 증가 지표로 사용되는 통계의 오류와 잘못된 인식을 지적하고 있다. 그동안 꽤나 이건 아니다 싶어 담아두고 있었던 주제였는지 어조가 강했다. 조목조목 예를 들어 잘못된 점을 짚어주는데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정말 이혼 많이들 하던데,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끼어들어서 그동안 접했던 잘못된 통계의 해석이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81)"는 만큼 스스로의 사고도 굳어 있구나 깨달았다. 명확한 근거를 들어 설명해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답답할만 하다. 그동안 왜 이렇게 착각하기 쉬운 통계를 발표하고 이를 바탕으로 위기를 논해도 방치되었던 것일까, 이를 본 사람들의 인식에 무의식적으로 동조 의식이나 부정적인 견해가 생기기 쉬운데 적극적으로 정확한 연령, 시기별 통계를 반영하지 않았나 궁금해졌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저자와 비슷한 세대라 생각도 비슷하게 전개되는 것은 아닐까 예상했었는데 각자의 경험과 환경이 다르다는 것이 크게 느껴진 것이 "'3대 등골 브레이커'라는 말이 유행이라는데, '드림 렌즈, 치아 교정, 성장 주사'(157)"라며 언급한 내용이었다. 듣고보니 그럴 수 있겠구나 싶기는한데 처음 듣는 유행어였다. 저자는 결혼하지 않은 삶은 결혼한 삶보다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의구심이 들었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비혼의 길로 접어든 사람은 남은 생애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결혼과 출산이 안정된 삶으로 등치되는 것은 생애과정을 예측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95)" 니, 오히려 결혼과 출산이야말로 '등골 브레이커'처럼 예측할 수 없는 변칙적 요인들로 점철된 길이 아닌가. 혼자의 삶은 오직 자신의 문제만으로 삶을 끌어가면 되지만 타인과 함께하는 삶은 내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타인의 문제가 내 삶에 함께 끼어들 수 밖에 없다. 이는 기존의 생애과정 모델일 뿐 새로운 생애과정의 모델과 비교했을때 안정된 삶으로 등치되는 것이라 확언할 수 없다.  

또 하나 "패드립이 반칙34"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세대 구분을 해야하는 변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이 무너지면서 혹은 조롱과 저급한 문화가 빠르게 어린 세대에 흡수되면서 패드립을 더이상 선을 넘는 행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확장해 받아들이지 않는 세대가 생겨난 것이다.** 딸과의 일화(47)를 통해 젊은 세대의 가족 구성 형태에 대한 민감도를 새롭게 인지했던 경험을 풀어낸 바 있지만, 저자가 이 또다른 변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친구'의 존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삶의 어느 순간을 지나오면서 친구라는 관계를 경시하게 되기도 하는데, 생존에 아무 필요도 없는 이 관계가 생존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C.S. 루이스(191)***의 말을 인용하면서 친구의 중요함, 필요성을 다시 보게 만들고, 가족의 형태를 더 넓게, 다르게 본다는 것이 이렇게 확장될 수 있구나 깨달았다. "자신이 선택한 관계로, 관계의 의미와 지속이 자발적 의지에 달려 있는 이 관계가 생의 후반으로 갈수록 중요해진다(190,191)"고 강조한다. 많이 공감가기도 하고 깨닫는 바도 있는 내용이었다. 

" 내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굳이 다른 사람의 경험을 깎아내릴 필요 없다. 11" 

어떤 내용엔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고, 어떤 내용은 모로 기울인 채 이런저런 생각을 늘여보기도 하며 읽었다. 모두 다 같은 마음이지 않아서 오히려 더 재밌게 읽고 더 많이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처음 마주하고 끝까지 책을 읽으면서 내내 맨 앞에 적어두었던 문장인데, '내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굳이 다른 사람의 경험을 깎아내릴 필요 없다'는 우리 사회의 많은 부딪힘들을 완화시킬 한 문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를 기준으로만 생각해서, 타인을 인정하지 않고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다름을 틀림으로 두려고 해서 필요치 않은 다툼과 문제들이 확대되고 재생산되고 있지 않은가. 세상과 사람들의 변화를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좋은 계기를 주는 책이었다.  

*나 하루 다섯 끼 먹잖아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저희 가족은
** [창간 기획-혐오를 넘어](1) ‘엄마’를 욕하며 노는 아이들…교실이 ‘혐오의 배양지’가 되었다. 경향신문. 20171010
'고인 능욕' '패드립' 넘치는 교실···언제까지 "어쩔 수 없다"고만 할 건가. 한국일보. 20250909
*** 우정은 생존에는 아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정은 생존에 가치를 부여한다. C.S.루이스 <네 가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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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출근합니다 - 식물과 함께 쓰는 나무의사 다이어리
황금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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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되자마자 짐을 챙겨 며칠간 여행을 다녀왔다. 분명 짧은 기간이었던 것 같은데 돌아와보니 그 사이 성큼 봄이 와 있었다. 이미 흐드러지게 피어 곧 떨어져내리는 일만 남은 여린 분홍빛 꽃잎이 비처럼 날리는 것을 보며 내가 없이도 기어코 꽃이 피었구나 섭섭하기까지 했다. 그보다 먼저 온 산을 뒤덮을만큼 흐드러져 절경이었다던 진달래며 밤에 볼 때 유독 탐스럽고 하얀 목련이 피어나던 것을 다 반기지 않았으면서 며칠 사이에 놓쳐버린 것만 같은 봄을 괜히 아쉬워할때 '숲으로 출근합니다'를 만났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 이렇게 해박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그래도 식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항상 동경하듯 바라보게 된다. 어릴 때는 나무며 꽃들이 그리 궁금하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초록의 이름이 궁금해지곤 했다. 이름을 아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해졌는지 잘 외워지지 않는 얼굴들에 스마트렌즈를 들이밀고 모야모*를 찾아보며 다음에 만나면 또 까먹을 이름을 몇번이고 되뇐다. 지난하긴 해도 싫어지지는 않는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중대한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그동안 자목련과 자주목련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백목련은 우리가 흔히 아는 하얀 꽃이고, 자주목련은 꽃잎 밖이 붉은색, 안쪽이 흰색, 자목련은 안과 밖이 모두 붉다고(16)한다. 그동안 그저 붉은빛이 있으면 모두 자목련이라고 알고 있었다. 이 충격은 아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나같은 얄팍한 독자이자 식물구경꾼은 교과서를 펼쳐 시험범위를 공부하듯이 책을 읽게 되는데, 어설프게 알고 있다는 점은 때로 아예 모르는 것보다 더 약점이 된다. 이를테면 모감주나무와 꽈리를 구분하지 못하게 될까봐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작년 대전의 어느 골목에서 빨갛게 물든 꽈리를 보고는 꽈리랑 비슷한데 이름이 뭘까 했던 전적이 있는터라 더욱 쫄았다. 물론 큐슈곤약처럼 생전 처음 보는 식물도 만나게 된다. 그 전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익숙한 식물들이 등장해서 방심하고 있었는데 이때부터 언뜻 할미꽃인가 싶은 '야고'나 나팔꽃인가 싶은 '플록스'같은 낯선 식물들과 인사를 나누게 된다. 이 낯선 식물들이 느슨해진 식물구경꾼의 기강을 잡긴 했지만, 소개되는 식물 대부분이 '다 한번씩 안면은 튼 초록이들이군' 싶은 친근한 식물들이다. 세세히 톺아보거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는 즐거움이 있는 편이라 적당히 반갑게 적당히 귀동냥하듯 배울 수 있다. 

우리의 저자인 나무의사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인간이 멸종한다면 지구의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58)"임을 밝혀 굉장히 솔직하다고 웃었는데, 이어지는 후박나무 껍질 도둑 사건(59)을 접하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진짜 후박나무 껍질을 벗겼는지 일본목련의 껍질을 벗겼는지 모를 일이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인간이 미안할 일이 너무나 많다. 게다가 후박나무는 이 사건 말고도 나를 놀라게 만들었는데 울릉도 호박엿으로 잘못 알고 있는 그 엿의 진짜 재료와 이름이 후박나무의 껍질 진액으로 만든 후박엿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오인되다 못해 진짜 호박엿으로 변형되기까지 한 울릉도 호박엿과 과거의 울릉도 후박엿 중에 뭐가 더 맛있을까, 한번도 진짜 후박엿을 먹어본 적이 없는 듯해 후박나무 껍질 도둑이 벗겨간 그 껍질을 압수해서 어떻게 했을지 뒤늦게 궁금해졌다. 

책에서 소개된 많은 나무들 중에 어린시절의 기억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꽃 중 하나인 무궁화(89)가 있었다. 그때만해도 무궁화는 꽤 흔한 꽃이었는데 학교나 공원같은 곳 화단의 한 자리는 무궁화 밭이 꼭 차지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피었다지기를 오래도록 하던 그 꽃은 질 때 말려드는 독특한 꽃봉오리 뿐 아니라, 씨앗 마저도 보들한 털을 두른 독특한 모양이라 '우리나라 꽃'이라는 특수성이 아니고서도 인상적인 식물 중 하나였다. 요즘은 국내에서보다 해외에 나갔을 때 히비스커스 친구들을 더 많이 마주쳐서 반갑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다. 반대로 최근의 기억 속에 가장 많이 남은 것은 화살나무(182)다. 서울로 7017**를 걷다보면 커다란 화분에 독특한 줄기를 가진 나무가 심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게 뭘까 너무 궁금해서 찾아보니, 과연 생긴대로 이름이 화살나무였다. 하도 이름값을 하는 생김이라 그 뒤로 잊혀지지 않고 보는 족족 이름이 떠올라 마찬가지로 이게 뭘까 궁금해하는 주변인들에게 잘난 척 이름도 알려준 적이 몇번인 탓에 책에서 보니 반갑고 새로웠다. 

'숲으로 출근합니다'와 같이 식물을 이야기하는 책들의 공통점은 읽을수록 겸손해지고 어딘지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책을 읽기만 하는데도 마치 숲을 산책한듯한 효과를 함께 얻는 듯 하다. 아마 인자요산***이라 했으니 식물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의 글은 그와 닮아서 저절로 피톤치드가 나오는 산림욕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내 뇌가 나를 속이는 걸지도 모르고. 책을 읽는 동안 삼색참죽나무 새순의 고아함 36, 포엽을 마치 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산딸나무의 영리함 44, 노루오줌이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몽글히 피어난 청순함 82, 태산목 꽃의 거대함 109, 큐슈곤약 꽃과 열매의 기이하고도 개성적인 독특함 133, 목서 특유의 향긋함 166, 팜파스그래스의 풍성함 194, 낙우송 공기뿌리의 신비함 253 같은 다양한 매력들을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마침 곧 '4월 말에서 5월 중순까지, 나무에 새순이 나기 시작하는 아주 잠깐의 시기(33)'가 온다. 저자의 취향이 반영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문가에게 수목원이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시기로 꼽혔으니 '숲으로 출근합니다'를 들고 수목원으로, 숲과 공원으로 가보자. 책에서도 소개한 가로수들이 있는 거리도 좋다. 이 책과 함께라면 어디든 초록과 함께하는 봄을 보내고 싶어질 것이다.


* 식물이름찾기/케어/커뮤니티/쇼핑을 할 수 있는 식물 관련 어플
** 기존의 서울역 고가 도로를 공중정원으로 바꾼 것으로, 2017년 5월 20일 첫 개장했다. 일자로 뻗은 길을 따라 50과 228종, 2만 4000여 개의 꽃과 나무가 심겨져 있다.
***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 공자 『논어』 옹야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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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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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가가 평생 그린 소재 중에서 요아르가 가장 어려웠다. 그가 그의 친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화폭에 담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해 여름의 그 날, 해가 지기 시작하자 요아르가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너는 이 좆같은 마을에서 좀 떠나야 해." "그런 말 하지 마." 화가가 애원하자 요아르는 화를 냈다. "아니, 넌 떠나야 돼. 우린 이미 망해서 상관없는데 넌 아니거든? 씨발, 넌 존나 대단해서 전 세계가 인정하는 화가인데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것뿐이라고. 다른 새끼들이 너 대단한 거 알아봐도 그전에 우리가 먼저 알아챘으니까 그것만 까먹지 마." 43" 

  프레드릭 배크만. 이 이름이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이름을 앞에 두었을 뿐인데 어디선가 '탕 탕 탕 탕 탕' 베어타운의 하키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실제로 들어본 적 없는 퍽을 날리는 소리를 마치 일상처럼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이야기꾼과의 재회가 반갑고 기뻤다. 기대를 품고 책을 읽기 전에 어플을 하나 눌러 앤 마리의 노래를 찾았다. 어쩐지 십대시절의 풋풋한 한 때를 담은 노래를 들으며 읽어야겠다 싶었다. 경쾌한 리듬을 따라 튀어오르던 마음이 점차 다르게 두근거렸다. 어른에 대한 미움과 분노로 가득한 시작을 읽으며 나는 왜 어른이 되어버렸을까 안타까웠다. 십대의 내가 읽었다면 루이사의 마음이 어떻게 다가왔을까. 지금의 나는 안타깝게도 작품이 주는 충격과 감동에 빠져들기보다는 인테리어와 사진, 가격, 샌드위치의 만족감과 더 가까운 것이 확실한 어른이었다. 루이사와 이렇게 멀리 떨어진 채로 괜찮은걸까. 이 예리하고 불완전하지만 순수한 감성 앞에서 얼마나 마음을 열고 부딪혀 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이번에도 프레드릭 배크만이 열어줄 따뜻하고 감동적인 휴머니티가 살아있는 세계로 무사히 빠져들 수 있을까. '탕 탕 탕 탕 탕' 들어본 적 없는 퍽 소리를 속으로 따라하며 바다로 뛰어들듯, 새로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기로 한다. 기꺼이. 

우연하고도 운명적인 부딪힘으로 시작된 루이사와 화가/크리스티안/킴킴의 만남은 마치 두 사람의 생이, 두 우주가 온 존재를 다해 부딪혀 공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루이사와 화가의 만남은 마치 비슷한 색을 가진 영혼이 서로를 알아보고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듯이 자연스럽게 얽힌다. 그저 한 그림을 아주 오래도록 소중히 바라고 사랑해왔을 뿐인데, 그 안에 담긴 모든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었던 것처럼 이들의 닮아있음은 서로의 마음을 울린다. 이들의 짧은 공명은 피스켄의 죽음이 루이사에게 커다란 상처와 온 생을 통틀어 어찌할 수 없는 깊은 흔적을 남긴 것처럼, 소중한 이의 상실이라는 공통의 상처를 가진 테드와 연결된다. 서른 아홉, 마흔이 되어서 다시 열네살 시절이나 다름없는 열여덟, 날 것의 루이사를 상대해야만 하게 된 테드에게 몇번이나 위로와 응원을 보내야 했다. 두 사람이 점점 가까워지는 동안 어느새 "팔이 하나뿐이 남자를 나무에서 떨어뜨리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133)" 묻는 농담이 재밌어졌다. 그리고 루이사에게서 요아르며 알리가, 지나가버린 열네살의 날들이 느껴지는 때면 어쩐지 눈물이 났다. 

테드, 요아르, 알리, 크리스티안. 열네살들은 저마다의 고통을 버겁도록 안고 있음에도 서로를 너무나 사랑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아낄 줄 모른다해도 어쩔 수 없으리라 여길 수 밖에 없는 학대와 방치를 당하면서도 이들은 사랑과 관심을 나눈다. 받아본 적 없는 애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면서 아낌없이 표현했고, 온 힘을 다해 서로를 지키고 붙잡고 싶었으면서 어쩌지도 못하고 놓쳐버려야 했다. 가장 어두운 시기를 지나고 있기에 그럼에도 서로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가장 반짝이던 시절에 나누던 시덥지않은 농담과 말다툼에 웃음이 나다가도 그 반짝임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박제되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씁쓸했다. 가끔 이들이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너무나 깊게 느껴질 때면 당황하곤 해야했다. 이렇게 열렬히 누군가와 이어져있던 때가 있었던가? "나이를 먹으면 기억하지 못하는 심장의 두근거림(22)"처럼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그것마저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이런 관계도 '경험해 본 사람만이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경험하지 못한 경우라면 설명할 도리가 없이(22)' 모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은 꼬박 하룻밤이 전부였고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 사랑에 그보다 더 미친 듯이 빠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느낌을 절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522" 

이 웃기고, 씁쓸하고, 가끔은 어이없는 친구들의 이야기는 때로 너무나 달아서 놀랍기도 했다. 사랑을 쏟을 곳은 오직 서로 뿐이라 그들이 가진 가장 부드럽고 달고 상냥한 마음을 거칠고 날카로운 유머안에 녹여냈는데 그래도 문득문득 그 마음이 너무 달아서 이보다 달고 간질이는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최근에 달리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을 정도다. 치마를 입기 싫어하는 알리를 위해 세 친구 모두 치마를 입고 공연장에 온다. 가장 힘들어하고 피하고 싶어하는 일을 함께 해주는 마음, 치마를 입은 소년들을 상상하며 웃음이 날 지언정 따뜻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봄날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기대할 때 추천해주어도 될만큼 사랑으로 가득하다. '나의 친구들'은 장편을 장편으로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흡입력과 실없는 농담에 점차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게 되는 친근함, 빛이 나던 열네살의 어느 바다에 함께 뛰어들었던 것 같은 반짝임을 선사하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프래드릭 배크만을 너무나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싶지 않기도 하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세계에서 인물들은 힘껏 저항한다. 살아가기 위해 애쓰면서도 유머와 따뜻함을 잃지 않는 인물들을 응원하고 사랑하게 만들면서, 어딘지 모르게 감도는 슬픔의 그림자를 한 구석에서 조용히 품고 있게도 한다. 베어타운 삼부작의 마지막을 기꺼운 마음으로 읽지 못한 이유도 거기있다. 너무나 좋은 사람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의 안온을 빌게 되는 것처럼, 이야기 안으로 빠져들어가면서도 이면의 그늘을 느끼게 되는 것이 지워지지 않고 남은 얼룩처럼 마음에 걸렸다. 처음엔 슬픔이 너무나 크게 다가와 웃으며 읽으면서도 괴로운 마음이 컸는데, 삶이 누구에게나 공평히 안배해놓은 저마다의 굴곡 또한 어쩔 수 없는-때로는 필요했을지도 모를 과정이었음을 천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슬픔과 괴로움 마저도 프레드릭 배크만의 세계 속 인물들을 만나면 그 안에서 제 소임을 다 한다. 

누군가에게 기대를 품는다는 것은 깨어지기 쉬운 믿음이다. 하지만 '나의 친구들'은 그 믿음을 더욱 굳게 다지며 기대 이상의 감동을 보여주었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운, 오래도록 아끼게 될 만한 또 하나의 '나의 친구'가 되어준 책이다. 온 세상을 봄에 한걸음 더 가깝게 만들도록 내린 봄비처럼, 독자의 마음을 온통 감동과 따뜻함으로 물들일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 '나의 친구들'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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