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셋째 밤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3
일월명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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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난 겁쟁이다. 아직도 가끔 집에 혼자 있는 밤이면 무서워서 불을 켜놓고 잔다. 미신도 잘 믿고 대신 허세도 잘 부린다. 믿는다고 무서워하면 얕잡아보일까봐 안믿고 안 무서운 척 한다. 공포영화, 소설, 만화도 한번 보면 잊어버릴 때까지 무서워서 머리감을때 노래 불러야 하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보고싶어 한다. 가끔 눈을 가려가면서, 보다 말고 멈춰서 귀여운 동물 영상으로 마음을 달래면서도 소름 쫙쫙 돋아가면서도 기어이 본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러니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셋째 밤'을 앞에 두고 또 어땠을까? 아니 왜 벌써 셋째밤이냐며 첫째, 둘째밤엔 왜 날 안불렀을까, 솔직히 요즘 진짜 무서운 공포 소설 읽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허세를 부리며 호기롭게 자원했다. 

책을 읽기 전 '호러 심청'과 '괴담-방 탈출 카페 제작 중에 생긴 일', '창포꽃을 세 번 접으면' 제목을 가장 인상 깊게 봐뒀기 때문에 기대도 컸다. 예상하기로는 '호러 심청'은 고전 소설인 심청 얘기를 잔혹동화 방식으로 비틀었거나 현대판 생활고를 겪는 소녀 가장의 분투기를 다뤘으리라 싶었다. '괴담...'은 영화 <백룸>이나 <8번 출구>처럼 요즘 유행하는 리미널 스페이스를 이용한 공포물이 아닐까 싶었고, '창포꽃...'은 어렴풋이 사랑 이야기가 얽혀 있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과연 공포물 짬밥 nn년차의 예상은 맞았을까? 

가장 무서웠던 건, '괴담...'이었다. 사람마다 뭘 가장 무서워하는지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귀신을 가장 무서워하는 겁쟁이에게 '괴담...'은 진짜였다. 독백 형식으로 된 전형적인 괴담풀이라 '괴담...' 도입부쯤에는 솔직히 좀 유치하겠네, 생각했다가 점점 무서워져서 의외였다.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구조를 따르는 것 같은데(계속되는 허세) 읽다보면 몰입이 되면서 어디를 향한지 모르는 반성을 하면서 읽었다. 알겠지만 겁쟁이들은 무서우면 일단 잘못을 빈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야!'였다. 제목부터 강렬한 이 소설은 가장 첫 번째로 '단편들...셋째 밤'을 여는데, 어쩌면 이 소설을 가장 무섭게 여길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괴담인 것 같으면서도 또 그 아는 맛에 빠져들게 되는 소설이었다. 사람이나 사건을 무서워하는 편이 아닌데도 인상깊게 읽었으니 현실적인 공포를 잘 살리지 않았나 싶다. 또 다른 단편 '우리 안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읽으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창포꽃...'이었는데, 아! 이 단편을 수십년만 빨리 읽었어도 나도 써먹어보는거 였는데 그걸못해봤네 싶어 아쉬웠다.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반드시 잘 기억해두겠다. 그러니 다른 독자들은 이 단편을 읽기 전에 꼭 종이와 펜을 준비해두세요. 요즘은 핸드폰에 적어두면 되려나. 만약 나라면을 여러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N 입장에서 즐거웠다. 성향이 F인지 T인지에 따라 가장 감상이 갈릴 수 있는 단편이 아닐까. 근데 일단 나라면 고소할거임. 당할 확률이 더 많지만. 

SF요소가 있는 단편들도 있었는데, 트럼프가 망쳤다. 이제 은하연방 같은 단어를 보면, 트럼프가 달은 미국 땅*이라며 담당 우주군 유니폼까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게 떠올라 웃음이 터지게 되었다. 연임에 성공한 미국 대통령이 이렇게 제 정신이 아니라는 걸 전세계에 공표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 공포이자 웃지만은 못할 코미디다. 어쨌든 덕분에 마지막 단편인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현실의 달리 방법이 없는 인물에 의해 제압되었다. 

원래 예고를 하는 콘텐츠는 그만큼 기대를 불러 모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감상자를 준비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려워진다. 공포물입니다,하면 얼마나 무서운지 한번 두고 보자 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고, 추리물입니다,하면 범인이 누구인지 트릭이 뭔지 밝혀내겠다 마음으로 보게 되는 것처럼. 그런 기대와 준비에도 충분히 무섭게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셋째 밤' 읽었다. 재밌었다고 말하며 책을 덮을 수 있었는데, 무서웠던만큼 읽는 시간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남은 감상이었다. 공포를 즐길 줄 아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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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 소통 불가능성의 인문학
정희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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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늘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매번 대화 주제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맞춘 주제를 만날 때마다 반복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김과 만나면 건강 이야기를, 박과는 가족 이야기를, 최와는 취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처음엔 대화 주제가 바뀌지 않고 그 내용 마저도 매번 비슷하게 이어진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대화할 때 중간에 길을 잃어 다른 이야기로 흘러갔거나, 결말이 나지 않을 주제여서 못다한 이야기를 마저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의 대화가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의 대화가 반복되는 건 어쩌면 말이 통하지 않아서,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토론을 하거나 시비를 가리는 것도 아닌, 일상적인 대화 안에서조차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낀 뒤로 처음엔 실망감이 들었다. 왜 내 말을 안 들어주지? 그리고 이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도 용케 서로 만나서 대화를 하고 못다한 이야기는 다음에 마저 하자며 헤어졌구나. 지금은, 그냥 그렇구나 한다. 이 책의 소박한 목표가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소통이란 원래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소통의 실패를 나의 성격이나 태도 문제로 돌리지 말자" 23
원래도 힘든 것이 너와 내가 같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나서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위로가 되었다면 그것으로도 괜찮아졌다.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를 보고 처음엔 분명한 갈등들을 떠올렸다. 요즘은 각자 자신이 속한 집합 안에서 그 밖의 모든 집합들과 다툼을 벌이고 있다. 정치적 성향, 성별, 지역, 직업, 성향, 종교, 심지어 복숭아는 딱복이 좋은지 말복이 좋은지, 탕수육 소스를 붓는지 찍는지로도 첨예하게 갈라진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아무리 대화해보았자 차이와 갈등만 깊어지고 달라지는 일이 없다. 웃으며 시작해도 비난과 비하로 갈라지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순간 차이가 차별이 되고, 갈등이 혐오가 되어 극단적인 분열과 다툼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을 뿐 이를 풀어나가기 위한 시도와 의지는 미약하고 그조차 점점 단절되고 있다고 느껴졌다. 이대로 괜찮은걸까, 어떻게 해야할까 궁금했다. 

책은 냉철했다. 타인과 '완벽한 소통'을 하는 것은 평화롭고 평범한 방식으로는 불가함(35)을 명료하게 밝힌다. 나와 남이 다른 존재라는 사실에서 오는 다름은 생활, 사고, 공감의 배경에 영향을 끼친다. 보라색을 말할 때 각각 떠올리는 보랏빛이 서로 다르듯, 그러나 서로 같은 색을 말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정리해서 알려주고, 이 모양인 세상과 그보다 더한 사람들에 맞서 더 잘 싸우는 법을 알려주거나, 대신 욕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저자는 독자를 설득한다. 이 책을 읽어보겠다고 선택한 당신, 소통을 위한 의지와 준비가 되어 있군요. 소통의 어려움을,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세요. 그리하여, 설득되었다. 

물론 이 책에서도 소통법을 알려주고 있다. 다만 저자가 알려주는 소통법은 하나같이 침묵하기, 적당한 선에서 대화를 멈추기, 설득하려 하지 않기, 자리를 피하기 같은 방법이다. (3장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소통법 161) 이기는 법을 잔뜩 기대하고 눈에 힘을 주었다가 어쩐지 힘이 빠지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읽고나서 생각해보니 싸움의 고수도 어찌할 수 없는, 무기를 든 상대 앞에서는 무조건 도망치라고 조언하지 않는가. 36계 줄행랑이 그 비법인 것처럼 이기려고,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거나 소통의 어려움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고수의 비법이라면 비법이 맞는 셈이다. 

처음엔 문장이 명료하고 딱딱해서 어색하게 느껴졌었다. 생각해보니 '소통'하기 위해, 가급적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문장으로 썼구나 싶었다. 혹은 강의를 기반으로 한 내용을 책으로 정리하였기 때문에 전달하는 방식을 바꾸면서 생긴 틈이 느껴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소통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바꿔 화를 가라앉히고 상처를 줄일 수 있도록, 밖이 아닌 내부를 향한 조언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세상과 싸우는 것 같고 사람들과 단절되어, 사는 게 살아남는 일이 되어 외로운 섬(57)처럼 느껴진다면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를 읽어보자. 긴장과 무게를 덜어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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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
김영민 지음 / 김영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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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소설집을 읽기에 아직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자신에 대한 불신. 그리고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한쪽만의 탓이 아니라는 변명에 기대어 저자에 대한 미약한 의심을 피워내며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를 읽었다. 제목만 보고 달달하게 단맛만 맛보려고 이 책을 집어들었다간 큰 혼이 날 것이야, 책 표지가 아니더라고 책등이나 날개에라도 경고해 두었어야 페어플레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 조교없이는 자살할 능력조차 없는 것이 교수 아닌가! 교수가 자살 같은 것을 할 리가 없다! 197" 

첫 단편 제목이 [이웃집 개에게 쓰는 편지]였을때부터 예감했어야 마땅하다. 그 어떤 비유가 아닌 진짜 이웃집 개에게 편지를 쓰는 사람의 글을 읽게 되리란 것을. 가끔은 화가 나기도 했다. 이렇게 말장난 같은 문장들 사이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밝히라고, 괜히 울화통이 터질 것 같기도 하고, 남들은 다 여유롭게 눈짓을 주고받으며 낄낄 웃으면서 책을 읽고 있을 것 같아 초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만 웃지 못하고 있을까봐 포모*를 느끼게 하는 소설이라니. 

" 무슨 '주의자'가 될 시간에 내향인은 차라리 자기반성에 몰두한다. 내로남불 태도를 거부한다. 오히려 내불남로 태도로 살아간다. 내로남불을 하느니 생불이 되겠다는 것이 내향인의 인생관이다. 90" 

이미 다 우려낼대로 우려내 맹물밖에 남지 않은 MBTI 얘기도 듣다보면 어느새 집중하게 만드는 언변이 매력적이다. 그러니 체력과 집중력 저하로 인해 따라가기 버거워져도 정신차리고 다음장으로 따라붙게 만드는 힘이 있다. 때로는 좀 과하게 나간다 싶기도 하고, 너무 멀리 퍼져나간 갈래를 적당히 갈무리해줬으면 하다가도 '뇌절은 뇌절이다.'* 하고 포기와 인정을 하게 된다. 

" 완성된 사람은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미완성이기에, 결함이 있기에, 상대를 찾아 나서고 그 상대가 그를 완성하려 들 때 사랑이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결함을 포함합니다. 아니, 결함이 필요합니다. 결함이 없으면 사랑하고 싶지도 않고, 사랑이 가능하지도 않겠지요. 215" 

여유롭게 문장을 다루며 글을 요리해나가는 모습이 약이 오르게 만들기는 하지만, 확실히 '대체 뭐야?' 하고 흰눈으로 보기엔 날카로운 문장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기강을 잡고 있었다. 비슷한 느낌을 어디서 받았더라 한참을 생각했는데, 예전에 플라시보 시리즈로 읽어본 적 있었던 초단편 장르의 개척자 호시 신이치였다.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에서 즐거움을 느꼈다면 호시 신이치도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웃긴 것 같은데 우습진 않고, 아무말이나 늘어놓는 것 같은데 그 안에 예리하게 벼려진 침이 하나 숨어있어 읽다보면 묘한 책을 하나 읽어보고 싶다면. 가진 재능을 왜 이렇게 휘두르는지 궁금해지는 글빨을 가진 작가를 만나고 싶다면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를 읽어보길 추천한다. 차마 더 풀지 않고/못하고 쌓아둔 글이 분명히 더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다음이 궁금해지는 만남이었다.


*FOMO (Fear of Missing Out) 놓치는것에대한두려움
*[동어 스님전]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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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쓸모없다 - 사노 요코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이소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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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마음도 있었어. 이제 저마다의 인생이 시작된 거니까. 그 친구도 나도 그걸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104" 

어른이 되고 난 뒤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일이 참 힘들구나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어렸을 때는 함께 놀 상대가 매일 주변에 있었고, 좀 더 자라서는 학교에 가면 항상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잘 몰랐다. 요즘은 학급인원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친구 사귀는 일이 조금 더 압박감이 있겠지만, 예전에는 많은 인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가까운 무리가 생기고 어느정도 여유롭게 무리를 오가며 지내는 일이 보통이었다. 그때는 번화가만 나가도 길을 걷다 금방 인사를 나눌 친구를 마주치기도 하고, 막 성인이 되어선 어울릴 사람도 챙길 친구도 많아 바쁘기도 했었는데, 정신없이 눈 앞을 살아가다보니 곁에서 같이 걷고 있었던 것만 같던 친구들이 각자의 길로 걸어나가버린 뒤였다. 어느새 누군가와 함께 노는 것보다 혼자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에 더 익숙해졌구나, 문득 스스로가 어른이 되긴 했구나 새삼스러웠다. 

이런 자신의 상황에 비추어 '친구는 쓸모없다' 제목을 보고, "좋아하고 미워하면서도 자꾸 연락하게 되는 사람들"이란 부제를 보고, 어른이 되어 찾아오는 '친구 기근'과 연관된 내용이겠거니 어림 짐작하며 봤는데, 의외로 시작은 최초의 놀이 친구에 대한 기억부터였다. 어린시절 열심히도 손윗동기를 따라다녔던 기억이 났다. 하필이면 자랐던 동네에 손윗동기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댓명이 넘게 있었는데 나와 나이가 같은 아이는 없었다. 혹은 그보다 한두살 더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라 나는 혼자 놀거나 이들이 노는 자리에 금붕어 똥처럼 졸졸 따라붙어 깍두기 노릇을 했다. 

" 그렇게 하루를 시작해서 온종일 오빠를 쫓아다녔어. 지루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25" 

우리는 사이가 좋았던터라 집에서 둘이 같이 놀 때도 어지간히 잘 맞고 재밌기는 했지만, 손윗동기 입장에선 제 또래랑 놀러 다닐 나이가 되었을때 늘 봐줘야하는 혹을 하나 달고 다니는 일이 제법 성가셨을 것이다. 한번은 그날만은 나를 떼어놓고 싶었는지 몰래 나가려다 들켜서 따라가겠다며 떼를 쓰는 나를 이불에 돌돌 말아서 방에 넣어두고 가버린 적도 있었다. 그 뒤로 몇 해 지나지않아 각자의 친구와 놀게 되면서 그 시절은 끝나버렸지만, 어른이 된 이제는 함께 쌓아온 추억, 취향이 맞는 서로 의지하는 친구같은 사이가 되었다. -고 하고 싶지만, 아직도 나만 더 같이 놀고 싶어한다. 동생들은 공감할텐데, 아직도 지루해지지가 않는다. 

" 우정이라는 건 중학생쯤 되어 자아가 생기고 부모에게서 독립하려 할 때가 되어서야, 절실히 원하게 되는 것 같아. 부모가 아니라 타인이 필요해지는 시기인 거지. 그렇게 친구를 원하고 찾아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어른이 되는 거야. 53" 

얼레벌레 주변의 놀이친구와 어울리게 되는 어린시절이 지나고 중학생이 되면서 '친구'에 대한 갈망이 생기고 슬슬 처음 기대했던 재밌는 내용, 인간관계라 할 만한 것이 시작된다. 이렇게 상세하게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로 당시 어떤 생각을 했고, 또 누구와 어울렸는지 적혀있어서 저자에게 친구가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저자의 말에 공감이 되는 것이, 나 역시 친구와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끊는데 신경을 쓰게 된 시기가 중학생 무렵부터 였던 듯 하다. 같이 어울릴 무리와 친한 친구가 있다는 것은 그 시기의 증명서같은 것이라 이를 원만히 만들어놓지 않으면, 다른 무리와도 쉽게 어우러지지 않고 혼자 튀어나온 것처럼 겉돌게 되는 일도 생긴다는 걸 알게 됐었다. 

좀 다르게 느껴진 것은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에 대한 인상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성숙한 상태로 상대를 알아갈 수 있으나 사귐에 있어 계산이 적고, 감수성이 민감한 시절이라 이 무렵 마음을 터놓고 사귀게 되는 친구는 평생 가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일본은 그런 인식이 없는 것인지 개인의 경험이 달랐던 것인지 궁금했다. 

" 이 책은 청소년을 위해 쓰기로 한 책인데, 왜 어른이 되고 난 뒤의 친구 이야기를 이토록 길게 하는지 알아? 우정은 지속된다고 믿기 때문이야. 163" 

회고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에세이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대부분이 사노 요코와 다니카와 슌타로의 대담으로 되어 있다. 이런 형식의 글은 익숙하지 않아서 처음엔 조금 당황했지만 묘한 리듬감과 친구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편안한 분위기에 동화되어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나 이 둘은 성인이 되고 난 후에 친구가 된 관계로, 일로 만나게 되었다가 2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알고 지내면서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고(194) 한다. 읽으면서 부럽단 생각이 들었는데, 이들도 자신들과 같은 경우가 흔치 않다는 것으로 봐서 어른이 되고 난 뒤에 친구를 새로 사귀는 일은 모두 쉽지 않게 여기는구나 싶었다.  

일본 특유의 정서가 짙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종종 있었는데 "전학생은 당연히 괴롭힘을 당혔어. (61)"라던 어린시절이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대로 된 회사에 들어가기는 어렵겠구나."(119) 같은 이야기가 나왔던 것, "나는 평생 한 번도 치한을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 애가 부럽더라."(130) '부럽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 어떤 생각에서 나오는 것인지 상황에 맞는 표현이 아닌 것 같아 때로 어색했다. 더불어 전쟁에 관한 이야기(48)가 나올 때는 자신도 모르게 예민한 눈으로 몇번이나 살펴서 읽게 되기도 했다. 

제목은 다소 파격적이지만, 알고보면 친구를 너무나 중요하게 여기는 내용이라 '쓸모를 염두에 두고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인다. 청소년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기획된 책이라고 하지만 성인 독자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면이 더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시기와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보다 조금 지나서 벗어나고 난 뒤에 보면 더 자세히 보이는 것이 있는 것처럼, '친구 관계'에 대해서도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시기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이제는 알 것 같아서다. 책을 읽고 난 뒤인 지금도 새 친구를 사귀는 것은 여전히 어렵겠다고 생각하지만, 곁에 남아있는 친구들에게 '홋카이도의 라일락과 우리 집에 핀 민들레가 이어져 있(201)'는 것처럼, 언제든 가볍게 안부를 묻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그래도 별로인 면이 있다는 걸 서로 알고도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더 안심되지 않아?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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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월드 - 교유서가 소설
오선영 지음 / 교유서가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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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스무 살 넘으면 꼭 가자. 138_스페이스 월드

 한동안은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책들의 맨 위에 '스페이스 월드'를 올려놓을 것 같다. 오선영 작가의 '스페이스 월드'는 좀처럼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른다. 하고픈 말을 위해선 적나라한 인물과 클리셰나 다름없는 익숙한 사건들을 가져와 고스란히 펼쳐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솔직함이 재미있고 익숙하게 다가오는 점이 좋지만, 한편으로는 독자를 한걸음 더 그의 안으로 혹은 세계의 예상치 못한 골목 안으로 이끌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남는다. 

 익숙한 피곤함을 안겨준 '어니언마켓'이 첫 시작이어서 책을 읽는 동안 그런 인상이 더 강하게 남았는지 모른다. 이름만 살짝 바꾼 당근마켓 소재부터, 영어유치원 레벨테스트니, 엄마들 브런치 모임이니,하는 여왕벌 얘기는 소설,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니까. 이렇게 판에 박힌 인물과 사건을 끌어다놓을 수 밖에 없었나. 아이 엄마들 모임은 다 저렇게 서로 눈치만 보고, 어딘가 한둘씩 정상적이지 못한 구석을 드러내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경쟁하고 남 욕이나 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틀 안에 또 한 번 찍혀나와야 했을까. 기대가 컸던만큼 섭섭했다.

 특히 '아직 오지 않은 말'처럼 관계 속에 깊이 파고든 균열의 정체가 이렇게 긴 시간동안 사이를 가르도록 방치할만한 것이 맞을까 의문이 들 때도 그 한 걸음이 아쉬웠다. 각 단편들 안의 인물과 사건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기에서 허구로 한 걸음 더 나아가줬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오히려 안평이라는 공간에서 '순자'를 통해 두 세계가 엮이는 것을 보며, 선주가 놓쳤던 안평마을의 마지막 날을 이렇게라도 보게 되었구나 안도했다. 어쩌면 그래서 이들은 어떻게 되는걸까, 그 이후가 걱정되는 마음이 아쉬움으로 쌓였는지도 모른다.

 읽어가며 아쉬움을 지워내는 재미도 쌓여갔다. 익숙하고 단편적이라 치부하고 말아버리기엔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묘한 끌어당김이 있었다. 이런 느낌을 어디서 느껴봤더라? SNS를 하다 자극적인 내용의 사연 콘텐츠를 우연히 보고 결말이 궁금해져 계정까지 찾아가보게 되는 그 느낌이었다. 마치, '중고거래에서 사간 내 물건 플미 붙여서 판 사기꾼 참교육 썰' 같은 제목이나 '남직원만 따로 챙기면서 꼬리치는 회사남미새 썰' 같은 제목이 떠오른다. 유치하고 뻔하다고 거부하기엔 어려운 재미와 공감대가 있다. 그렇다면 이 또한 이 책의 매력이 된다.

 곁에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그런 자신의 내면을 어쩔 수 없이 모른척 삼켜내고 멀쩡한 얼굴로 버텨내야 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그 나약하고 비겁한 이중적이고 평범한 모습들이 주변에 흔하고, 흔한만큼 공감되는 스스로를 깨닫는다. 보증금을 가지고 도망가버린 도영에 대한 원망보다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배경을 가진 은하에 대한 불쾌감이 종종 더 짙게 느껴졌던 '안평', 여자친구와 회사동료 사이에서 혼자 줄을 타던 '카페인 랩소디', 자신의 인생으로 걸어나간 친구에 대한 애정과 원망이 오가는 '스페이스 월드', 보낼 수도 품을 수도 없는 '임시보호자'처럼.

 처음엔 작가의 색과 힘이 조금만 더 보였다면 어땠을까 싶었는데, 어쩌면 결말이 좀 더 닫혀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영된 아쉬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것 역시 생각하기를 작가에게 외주 주려는 챗지피티 시대의 영향일까. 이미 결말이 열린 채 마무리지어진 책을 앞에 두고 생각이 미치는대로 여러번 다시 보니 멈춰있던 그 지점에서 직접 인물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처음은 가벼움으로, 그 다음은 궁금함으로, 그리고 좋았는지 싫었는지 구분하기 어려운 모호한 마음으로 자꾸만 펼쳐보게 되는 면이 있다.

 선주가 너무 미워서 나쁜 년이라고 열번씩 욕해주고 싶었던 건 누구였을까, 종종 책을 읽다가도 멈추고 궁금해하곤 했다. 그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그대로 담아내려고 노력한 결과물이 흔하고 뻔한 모습들이라 그리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아쉽게 여겼던 것일까 뒤늦게 곱씹어보게 된다. 나는 왜 이렇게 느꼈을까, 왜 좋은가, 왜 싫은가 이유를 갖기 위해 계속해서 다시 읽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 묘한 인상을 남긴다. 책을 읽고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을 카드에 적어 다른 사람과 서로의 이유를 나눠보고 싶은 책이다. 그럼 한 걸음씩 더 가까워지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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