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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 소통 불가능성의 인문학
정희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평점 :
언젠가부터 늘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매번 대화 주제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맞춘 주제를 만날 때마다 반복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김과 만나면 건강 이야기를, 박과는 가족 이야기를, 최와는 취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처음엔 대화 주제가 바뀌지 않고 그 내용 마저도 매번 비슷하게 이어진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대화할 때 중간에 길을 잃어 다른 이야기로 흘러갔거나, 결말이 나지 않을 주제여서 못다한 이야기를 마저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의 대화가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의 대화가 반복되는 건 어쩌면 말이 통하지 않아서,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토론을 하거나 시비를 가리는 것도 아닌, 일상적인 대화 안에서조차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낀 뒤로 처음엔 실망감이 들었다. 왜 내 말을 안 들어주지? 그리고 이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도 용케 서로 만나서 대화를 하고 못다한 이야기는 다음에 마저 하자며 헤어졌구나. 지금은, 그냥 그렇구나 한다. 이 책의 소박한 목표가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소통이란 원래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소통의 실패를 나의 성격이나 태도 문제로 돌리지 말자" 23
원래도 힘든 것이 너와 내가 같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나서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위로가 되었다면 그것으로도 괜찮아졌다.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를 보고 처음엔 분명한 갈등들을 떠올렸다. 요즘은 각자 자신이 속한 집합 안에서 그 밖의 모든 집합들과 다툼을 벌이고 있다. 정치적 성향, 성별, 지역, 직업, 성향, 종교, 심지어 복숭아는 딱복이 좋은지 말복이 좋은지, 탕수육 소스를 붓는지 찍는지로도 첨예하게 갈라진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아무리 대화해보았자 차이와 갈등만 깊어지고 달라지는 일이 없다. 웃으며 시작해도 비난과 비하로 갈라지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순간 차이가 차별이 되고, 갈등이 혐오가 되어 극단적인 분열과 다툼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을 뿐 이를 풀어나가기 위한 시도와 의지는 미약하고 그조차 점점 단절되고 있다고 느껴졌다. 이대로 괜찮은걸까, 어떻게 해야할까 궁금했다.
책은 냉철했다. 타인과 '완벽한 소통'을 하는 것은 평화롭고 평범한 방식으로는 불가함(35)을 명료하게 밝힌다. 나와 남이 다른 존재라는 사실에서 오는 다름은 생활, 사고, 공감의 배경에 영향을 끼친다. 보라색을 말할 때 각각 떠올리는 보랏빛이 서로 다르듯, 그러나 서로 같은 색을 말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정리해서 알려주고, 이 모양인 세상과 그보다 더한 사람들에 맞서 더 잘 싸우는 법을 알려주거나, 대신 욕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저자는 독자를 설득한다. 이 책을 읽어보겠다고 선택한 당신, 소통을 위한 의지와 준비가 되어 있군요. 소통의 어려움을,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세요. 그리하여, 설득되었다.
물론 이 책에서도 소통법을 알려주고 있다. 다만 저자가 알려주는 소통법은 하나같이 침묵하기, 적당한 선에서 대화를 멈추기, 설득하려 하지 않기, 자리를 피하기 같은 방법이다. (3장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소통법 161) 이기는 법을 잔뜩 기대하고 눈에 힘을 주었다가 어쩐지 힘이 빠지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읽고나서 생각해보니 싸움의 고수도 어찌할 수 없는, 무기를 든 상대 앞에서는 무조건 도망치라고 조언하지 않는가. 36계 줄행랑이 그 비법인 것처럼 이기려고,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거나 소통의 어려움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고수의 비법이라면 비법이 맞는 셈이다.
처음엔 문장이 명료하고 딱딱해서 어색하게 느껴졌었다. 생각해보니 '소통'하기 위해, 가급적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문장으로 썼구나 싶었다. 혹은 강의를 기반으로 한 내용을 책으로 정리하였기 때문에 전달하는 방식을 바꾸면서 생긴 틈이 느껴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소통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바꿔 화를 가라앉히고 상처를 줄일 수 있도록, 밖이 아닌 내부를 향한 조언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세상과 싸우는 것 같고 사람들과 단절되어, 사는 게 살아남는 일이 되어 외로운 섬(57)처럼 느껴진다면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를 읽어보자. 긴장과 무게를 덜어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