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듣기 -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완성하는 사랑
유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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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맞추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때로는 속눈썹 개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상대에게 애정을 품는 일. 나에게 잘 듣는 일이란 구체적으로는 그런 것이다. 쓸모를 증명할 수 없으나 그 증명할 수 없음으로 인해 무가치해지지는 않는 일. 그것은 잠시나마 '나'를 넓혀가는 일이다. 내가 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아는 일이다. 116" 

'심장 듣기'를 앞에 두고 열심히 들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나는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저 열심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독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내면에서, 또 이웃에서, 세상에서 들어온 이야기는 내밀하고, 익숙하고, 낯설고, 어려운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함께 듣는 동안 내게도 뭔가 채워지는 것들이 있는 기분이 들었다. 

임보 중이었던 밤이를 입양해 온 이야기는 언뜻 흔하디 흔한 이야기면서 매번 특별하게 여겨지는 구원 서사다. 12키로 까지 클 것으로 예상된다던 6킬로그램의 밤이가 21키로의 중형, 아마도 진도비빔일 강아지로 성장하게 되면서 보호자인 그가 겪는 산책길 시비 경험담은 너무나 예상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중대형견 보호자들은, 특히 진도의 핏줄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거기다 여성이라면 더욱더 수많은 시비와 싸움에 휘말린다. 
" 날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라는 아주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서 있을 때는 아무도 괜한 시비를 걸지 않았다. 반면 아침저녁마다 하는 산책을 그런 마음으로 할 수는 없었다. 169"
내 개는 안물지만 나는 뭅니다 싶은 전투력과 산책 상황을 영상으로 기록해놓을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입마개와 중대형견 분류 조항 등을 눈만 마주쳐도 쏟아낼 수 있을 정도의 준비를 한 채 하루에도 몇 번씩 내 강아지의 행복한 산책을 위해 집을 나서는 보호자들이 많다. 산책 뿐이랴 애견동반시설 등에서도 중대형견 특히 진도의 핏줄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이용이 불가하다는 거절을 당하기도 한다.
이 남일같지 않은 분투에 웃기도 하고 공연히 혼자 더 화도 내다가, 입양한지 몇 년이 지났어도 강아지를 이해하는데 실패하고 언젠가 더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올까봐 두렵다(40)고 고백하는 두려움에 깊이 공감하기도 했다. 반려동물을 버리는 것은 그들을 집으로 들였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 그 무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버린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니 부디 이해할 수 없는 그 간극마저도 오래도록 사랑하는 반려인이 되길. 

" 나는 2021년의 미얀마를, 2022년의 우크라이나를, 2023년의 팔레스타인을 떠올렸다.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라는 건 대체 누가 결정하는 거야? 76" 

123의 밤을 듣는 일은 새삼스러웠다. 불행하게도 텔레비전을 보던 어느 평범한 밤에 갑자기 쏟아져나온 속보를 무방비하게 목격할 수 밖에 없던 충격과 무력함이 다시 찾아왔다. 미처 준비도 각오도 없이 현장으로 가야만 했던 저자의 생생한 그날밤을 들으며 이것 역시 상처로 남았구나 깨달았다. 그 밤을 지나왔으면서 어떻게 아직도 그 짓을 저지른 사람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을까.
왜 시간과 이익은 모든 잘못을 덮어버리는데 충실히 쓰일까. 비단 그 밤 뿐 아니라 아주 오래도록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81번째 광복절을 앞두고 터져나왔다. '세월이 자신들의 편'이었다던 매국 집안이 쌓아올린 부와 명성을 자랑하던 부조리 앞에 다시금 터져나온 분노가 길게 이어지는 요즘이다. 둘 사이에서 닮은 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를 옹호하고 덮어두자고 말하는 사람들 역시 같은 이익을 바라고 있다. 
온갖 정당화와 거센 몰이 앞에서 때로는 무력하고 이대로 저들이 원하는대로 세상이 굳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주워야 할 말은 주워서 '기억'하기 위해(103)" 애쓰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린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그저 잠시 귀를 기울이고, 몸을 기울이고, 그곳에 나의 몸을 존재하게(97)"함으로써 힘을 보탤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안에서 나와 타인과 사회를 연결하기 위한 사랑을 느꼈다고. 

" 대체 그것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이라 생각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에, 심지어 자신에게 그다지 호의적이도 않았을 사회에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이라고. 79"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저자와 겹쳐졌다가 다시 나로 떨어져나오기를 반복했다. 열심히 듣다보면 내가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소리들이 있었다. 저자 역시 말하거나 듣는 일을 오갔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심장을 듣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었는데, 의미를 파악하려 애쓰지 않아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우리 사이에 공감하고 나눈 것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 당신이 확장되어 나와 연결되는 특별한 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인상적인 듣기였다. 


* 152 백화점에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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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다이아를 사랑해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김선미 지음 / 우리학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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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진다이아를 사랑해'? 

"챌린지요? 지금 이 상황에요?" 아주머니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알고리즘을 타잖아. 슬픔도 유행이 되어야 사람들이 안 잊어. 잊히는 순간 우리 다이아는 정말로 죽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33 

아름다운 외모로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십대 유명 인플루언서 진다이아의 갑작스러운 부고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진다이아의 동생 진루비와 진다이아의 부계정을 운영하던 팬 김세정의 친구인 이다니는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는다. 진다이아의 죽음은 자살로 결론 지어져가지만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다니는 진다이아의 죽음에 묘한 위화감을 느낀다. 혼자 빈 건물에서 자살했다고 알려진 다이아의 눈에서 누군가 비춰주었으리라 여겨지는 조명빛이 보이고, 유서 역시 그가 썼을 법한 문장이 아니었다. 유서 내용과 경찰의 발표대로 진다이아가 자살한 것이 맞을까? 

다니는 진다이아의 추모식에 사용할 추모영상 인터뷰가 필요하다는 세정의 부탁에 진다이아의 주변 인물들을 하나씩 만나게 된다. 인터뷰를 하면서 진다이아의 가까운 지지자들이라 여겼던 사람들과 그의 관계가 엉망으로 망가져있었음을 알게된다. 모두가 사랑하고 선망했던 모습으로 알려진 진다이아, 하지만 SNS 바깥의 모습은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고 이용하려 했던 사람들로 얽혀있었다. 진다이아의 삶이 품었던, 죽음으로 덮어버린 비밀은 무엇일까. 그의 죽음은 정말 자살일까, 아니면 타살일까?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사람의, 관계의 진짜 모습을 하나씩 목격하게 된다. 

" 걔 인생은 진짜 실시간으로 파멸해 가고 있었어. 하루 종일 폰만 붙잡고 살 면서 좋아요 수 조금만 떨어져도 손을 벌벌 떨던 애야. 화려한 껍데기 유지하겠다고 속은 이미 다 갈려 나가고 없었다고. 73" 

세상 다정한 커플로 알려진 남자친구 한서준과는 이미 헤어져 서로의 약점을 잡고 돈벌이를 위해 커플 연기를 하고 있었고, 그가 보이고 싶지 않은 사생활까지 팬/세정에게 찍혀 SNS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가족도 진다이아의 유명세를 이용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고, 이를 이용한 사업은 각종 부작용이 불거져 금방이라도 논란이 터져나가기 직전이었다. 게다가 본인 역시 남에게 보여지는 나, 실시간으로 보여지는 좋아요, 팔로워 숫자 등 사람들의 관심에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얽매여있었다. 이들 중 진다이아가 죽은 날 마지막 SNS를 올린 장소에 누군가가 그와 함께 있었다. 진다이아가 보여주지 않았던 진짜 모습을 하나씩 찾아가며 그날의 비밀을 풀어가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었다. 

" 핵심은 초반 3초다. 사람의 뇌는 철석같이 믿고 있는 상식을 정면으로 부정당할 때 도파민 반응을 보인다. 이 반응을 유도하는 요소를 극초반에 배치해 영상을 끝까지 보게 만든다. 거기에 뇌가 한 번에 처리할 수 없을 만큼 정보를 빽빽하게 넣는 게 재시청을 유인하는 데 효과적이다. 자막 속도를 빠르게 만들면, 사람들은 미처 읽지 못한 문장을 확인하려고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볼 수밖에 없다. 끝까지 보고, 멈춘 후 반복해 보는 영상. 바이럴은 이렇게 시작된다. 100" 

진다이아를 통해 보여지는 것에 집착하고 자기자신의 모습과 일상을 남들에게 보여지기 위해 '관리'해야 하는 SNS의 거짓됨과 과잉에 대해 꼬집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가까이에서 그러나 거리를 둔 채 친구의 언니인 진다이아의 인간적인 모습, SNS 안의 인플루언서 활동을 지켜봐왔던 다니가 항상 자신을 괴롭혀왔던 과잉기억증후군을 통해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을 통해서도 성장을 보여준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항상 지나치게 체력을 소모하게 되는 과잉기억증후군을 불편해했던 다니가 스스로의 개성을 인정하고 나아가는 모습은 긍정적인 신호를 준다. 

다만 전개가 점점 흥미로워진 것에 비해 후반부에 이르러 사건이 급물살을 타듯 금방 풀려나가는 점이 아쉬웠다. 모든 사람의 욕망과 애증, 거짓이 뒤섞이는 때에 좀 더 복잡한 비밀이 얽혀있는 것이 아닐까 기대될 무렵 갑자기 사건이 순식간에 풀려나간다. 이 아쉬움을 느낄 때 문득 나 역시 한 인물의 죽음을 사건의 재미로 보고 있구나 싶어졌다. 그저 독자입장에서 좀 더 극적이고 정교한 사건의 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을 뿐이라고 덮으려해도 묘한 가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죽음마저도 관심으로 소비되어야 하는 진다이아의 상황이 책 밖에서도 이어지는 듯 했다. 

언젠가부터 억지 유행을 만들어내기 위해 챌린지가 유행하는 것 같아 피로해졌다. 어쩌면 모두가 즐거워하는 때에 혼자 그 흐름에 따라가지 못할만큼 피로해진 어른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모두를 열광하게 하고, 줄서게 만드는 유행이라는 것은 뭘까? 유명인, 인플루언서로 사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무엇을 좋아하고 따르는 것일까? 어른인 나조차도 그게 무엇일지, 또 그 안에서 삼켜지고 감당해내야 할 것이 뭔지 알 수 없는데, 누구나 자신을 드러내고 그를 이용해 판매할 수 있는 세상에 놓여진 아이들은 이 자극 앞에서 어떤 것들을 보고, 느끼게 될까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 지긋지긋한 현실에 다시 로그인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를 팔로우했던 모든 이들이, 적어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내 진심을 바라봐주길. 모두들 안녕. 이제, 로그아웃합니다. 6"



*과잉기억증후군 hyperthymestic syndrome 학습 능력이나 암기력과는 관련 없이 자신에게 일어난 거의 모든 일을 기억하는 증상으로, 일종의 기억장애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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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멈추지 못할까 - 애착으로 읽는 중독의 심리학
주세진 지음 / 흐름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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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날 지하철에서 한 여자를 보았다. 30대 초반쯤 됐을까.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는데, 화면을 보는 게 아니었다. 그냥 '들고' 있었다. 역에서 내려 걸으면서도, 계단을 오르면서도, 환승 통로를 지나면서도. 가방에 넣으려다 어느샌가 다시 꺼냈다. 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손에 있어야 한다는 듯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23" 

시작하는 문장을 읽자마자 단어 하나하나가 나를 찔러왔다. 책을 읽는 순간에도 기억에 남을만한 문장을 따로 정리해두기 위해 스마트폰 화면을 옆에 켜두고 있었다. 사실 거의 모든 순간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있거나, 종종 화면을 켜서 의미없이 한번 둘러보거나, 스마트폰을 하고 있다. 이상한 사람은 아니지만 스마트폰을 손에서 떼지 않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술과 담배, 약물, 도박 같은 심각한 것에 중독되지 않았다고 해서 방심한 채로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책이 술과 약물만이 아니라 당신의 손 안에 있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 전반을 다루(34)"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새삼스럽다. 꼽아보면 스마트폰, 커피, 당분, 탄수화물, 활자, 그리고 미처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사소한 습관 같은 것들도 중독으로 이름붙일 수 있는 것들이 더 있을 것이다. 커피를 마시는 것을 습관으로 슬쩍 옮겨보려해도 건강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 하루이틀 커피를 마시지 않았을 때 두통을 느끼거나, 피로감을 줄이기 위해서 더 많은 양의 카페인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의존에 가깝게 보였다. 몰입과 중독은 다르다고 하지만 몰입이라고 믿고 있는 중독인 것은 아닌지 잘 구분짓기도 어렵다.
'왜 우리는 멈추지 못할까'는 내가, 우리가 중독되어 있는 모든 것들.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대신 보상해주고, 감각을 마비시키며, 시간을 지탱해주는 모든 쾌락들, 술, 음식, 게임, 스마트폰, 일, 관계, 카페인 같은 이름의 대체품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다시 연결짓고 회복에 이르기까지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연결되고 싶다는 인간의 가장 간절하고 근본적인 욕구(49)"에서 비롯된 공백을 제대로 바라보고 채워나가는 길을 틔워준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최근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터놓고 이야기할 곳이 없어 AI를 이용해 상담했다는 말을 했다.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과 함께 AI가 정말 좋은 대화 상대가 되어줄 수 있었을까 의문이 남기도 했다. 요즘은 단순히 정보를 얻거나 상담을 AI로 대체하는 것 뿐 아니라, '콜 포비아(전화 통화에 대한 불안 93)'를 AI가 대신 전화를 받아 누가 어떤 용건으로 전화했는지 확인하고 통화 여부를 결정하는 '통화 스크리닝'으로 확장되었다. 불예측성이 주는 불안을 기술이 해결하는 동안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내면을 성장시킬 수 있을까.
5장에서 다루는 반복과 보상 회로에 대한 내용은 스스로 고민하고 있던 문제 행동이 그대로 나와 있어 공감하며 읽었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의미없는 검색을 하고,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충동구매하거나,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수면 지연 행동이 다음 날의 피로를 가중시켜 일상생활에 부담을 주는 요인이 되는 것까지 사례로 나온 지훈의 상황과 닮아있었다. 피곤했던 하루를 마감하기 전 조금만 놀고 싶다는 마음, 불편한 대면을 피하고 싶다는 회피 앞에서 저자는 "모든 것이 빠르고 편리해지는 세상일수록 우리는 일부러 불편함을 선택해야 한다. 89"고 말한다.
쉽고 빠르고 달콤한 보상에 배부르게 되면 몸도, 뇌도 그대로 굳어진다. 자극만을 좇느라 일상의 다른 관계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이와 반대로 느리고 불편할지라도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카페인, 당분을 절제하고, 운동하고, 명상하는 지난한 시간들을 거쳐야 한다. 익숙하고 편리한 것에 매몰된 사고와 감각은 반복으로 깔린 고속도로를 내달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회복을 위한 절제와 노력은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새롭고 건강한 길을 내준다. 

책은 중독과 개인 뿐 아니라 가족 관계 안에서의 구조화 된 역할분담과 고통을 짚어나간다. 상담을 통해 당사자만 치료하면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가족 모두가 각자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가족 구성원 안에서 고정된 역할을 반복하며 중독 상황을 유지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회복하기 시작하면, 개인의 습관보다 관계의 균형이 가장 먼저 흔들(159)"리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한다.
우리가 무언가에 중독되고, 의존하게 되는 것과 회복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 쉽게 실패하게 되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기 때문이라는 공통점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했다. 불편함, 이전과는 다른 상태, 불안을 견디지 못해 쉬운 자극을 선택하고 '끊기'를 실패하게 되는 것을 참 많이 경험해왔음 역시 깨닫는다.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고,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은 새롭게 조정할 수 있다. 회복은 의지의 승리가 아니라 반복이 만든 재학습의 결과이다. 뇌는 배운다. 131"
이때 어떻게 흔들림을 극복해야 하는가를 오디세우스의 여정 중 세이렌의 노래를 견디겠다고 스스로를 배의 기둥에 묶는 부분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유혹 앞에서 자신이 약해질 순간을 예상하고 대비한 오디세우스의 자세가 "흔들리기 전에 누구에게 연락할 것인지, 무엇을 피할 것인지 무너질 때 누가 나를 붙들어줄 것인지 정해두는 회복의 구조(220)"를 보여준다. 과정에서 흔들릴 수 있으나 이에 어떻게 대비하고 이어나가는가를 회복의 중요한 바탕으로 강조한다. 

책은 천천히 독자를 인도한다. 각 장의 첫 시작에는 앞선 장에서 읽은 내용에 대한 정리와 함께 새로 읽게 될 장에서 어떤 내용을 접하게 될 것인지 소개하며 시작한다. 생각이 많아져 주의가 흐트러지거나 잠시 시간을 두고 다시 책을 읽게 됐을때 이런 짧은 안내가 부담을 줄이고 계속 읽어나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책을 읽으며 직접 해볼 수 있는 <성인 애착 유형 검사 111>, <가족 역할 자가 진단 190>, <회복 구조 자가 점검 250>등의 검사와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남긴 부록 256"으로 실용성도 챙겨 도움이 될만하다.
무엇에 의존하고 있었는지, 왜 그런 행동을 반복하는지 자신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책이자, 중독을 함께 극복해나가기 위한 밑받침이 되어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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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조절 - 안전하지 않은 사회에서 나를 지켜 내는 방법
권혜경 지음 / 을유문화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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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 조절'. 제목을 앞두고 말 그대로 나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운, 이를테면 더위 때문에 더 민감하게 짜증이나 화를 내게 되는, 사소한 일이라도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기분이 상하고 불만을 표출하게 되는 감정조절장애에 대한 내용일 것이라 추측했다. 막상 앞에 두니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더 넓었다. 감정 조절의 개념에 대해 내 안에 있는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성장하며 겪어온 경험과 나를 둘러싼 세상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도록 도왔다.
들어서며 1장에서는 나와 같이 오해가 있었을지 모를 독자들에게 감정 조절의 개념을 설명해주고, 3장에서는 개인의 경험-유아기와 성장 과정이 끼친 영향을, 4장은 사회 문화적 배경과 사건이 끼친 영향을 살펴볼 수 있으니, 만약 자신 내면의 불안정함이나, 사회의 갈등과 불안이 어디에서 기인했는가에 대해 이해해보고 싶다면 3, 4장의 내용이 흥미로울 것이다. 
마무리하는 5장에서는 감정 조절의 해결책, 트라우마 극복과 내면의 치유를 돕는다. 이론적인 설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호흡과 신체의 이완, 명상, 수면 등 직접 실천하며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하고 있어 실용적이다. 마지막 장 뿐 아니라 각 장의 마지막(56, 113, 201, 311)엔 명상 실습을 실었는데, 저자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육성으로 해당 내용을 들으며 명상을 할 수 있다고 안내(65)되어 있다. 
저자는 '안전/안전하다고 느끼는 감각'이 감정 조절에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겪은 경험과 우리 사회의 불안 요소가 몸과 마음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한다. 사람은 안전한/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고, 상대방의 감정도 조절할 수 있는 상호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다고 여겼다. 

사실 처음 책을 손에 들고 목차를 살펴보았을때 가장 궁금했던 내용은 '안전하지 않은 사회는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드는가'란 부제를 단 4장이었다. 우리사회가 겪어야 했던 사건들을 떠올려보면 전쟁이나 군부 독재 같은 수십수만의 죽음과 사상의 분열과 갈등 뿐 아니라, 자연재해나 각종 사고들로 인한 피해가 있다. 그중 안전과 관련된, 충분히 예방이 가능했을 사건들이 남긴 트라우마가 사회 안전과 더 관련이 있다고 여기고 의식과 무의식에 무엇을 남겼는가 궁금했다.
책에서도 언급하는 대형사건들 삼풍백화점, 대구지하철, 세월호, 이태원까지. 특히나 저자가 '감정 조절'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228)는 세월호 참사는 보도가 이어지는 동안 수많은 아이들의 생명이 희생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좌절감, 분노와 슬픔, 사회에 대한 불신, 이마저도 이용하고 조롱하려 하는 부류에 대한 경멸 같은 것들이 얽힌 무력함과 세상에 대한 긍정을 소진해버린 듯한 탈력을 남겼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이 상처는 우리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가. 이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과 가해자 및 관련자 처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피해자와 연대하는 시민의식도 더 고양되어야 할 것이다. 238"
우리사회에 부재하는 것은 진상 규명과 가해자 및 관련자 처벌이 아닐까. 강점기 이후 매국노에 대한 완전한 처분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그들이 기득권이 되어 쌓아올린 사회의 틀은 과연 잘못된 일을 끝까지 고쳐 처벌과 반성이 뒷받침하도록 되어 있을까.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는다. 그들을 대신한 보여주기 식 처분을 통해 덮이고 졸속으로 정리된다. 시간이 지나 사람들의 공분과 관심이 사그라들고 난 뒤에 '냄비근성'이라며 비웃고 스스로를 자조하도록 조장한다. 혹 잊지 않고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 보상을 얻으려 한다, 이용하려 한다며 매도해 넘긴다.
" 세대 간의 저주는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전대에서 누군가 잘못하면 그 죄가 자손 대대로 이어진다는 의미로, 다양한 문화에 걸쳐 통용되는 개념이다. 문자 그대로 보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전대의 잘못이라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부모의 역할이 가정에서 매우 중요하고 자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말로 풀어 볼 수 있다. 239"
마찬가지로 요즘 사회를 시끄럽게 만든 친일매국노 집안에 대한 공분이 거세지자 이를 두고 현대판 연좌제를 운운하며,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아무것도 모르는 후손에게 묻는다며 옹호하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마찬가지로 본질을 흐리고, 드러난 과거를 다시 덮으려는 의도를 가진 행위이다. 한 개인의 자만이 스스로 일본인을 자처하며 매국 행위를 한 선대가, 타인의 신체와 생명을 가지고 비윤리적인 실험을 자행하는 후대로, 부정으로 쌓은 집안의 부로 만들어낸 거짓된 명예를 뒤집어 쓴 후대로 이어짐을 증명했다.
또 하나 4장의 내용 중에 눈에 띄었던 것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남아 선호 사상 및 남성 중심 사회에서 고착화되어 있었던 성관념이 깨어지며 나타나는 진통이 여성을 향한 폭력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부 남성들은 사소한 좌절과 거절에도 과한 수치심과 분노 반응을 보이는데, 이 "자기애적 분노란 자기를 대단하다고 믿는 사람이 그 믿음에 위협당했을 때 보이는 폭발적 분노(298)"라는 설명에 '이들은 왜 이럴까'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풀리게 되었다.

애착 유형에 따른 성격 형성에 대해 알아보는 3장의 내용도 기대이상으로 흥미로웠는데, 유형별로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구분을 짓고 예시가 될만한 상황 설명도 있다. 덕분에 읽으면서 자신의 성향을 비교해서 맞춰보게 되고, 이런 사람을 주변에서 본 적은 없었나 떠올리며 읽게 된다. 성인 애착 유형 검사(175)를 해볼 수 있는 문항도 있으니 자신이 어떤 유형인지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철수와 영희의 사례(186)가 너무나 전형적인 관계의 불화여서 뻔한 내용이지 않은가, 관계에 있어 굳이 이런 것들(결혼기념일 날짜, 식당 예약, 편의점을 다녀오거나 서재에 머무는 등의 사소한 일정, 애정표현)을 상대에게 설명해주고 알려줘야 하는 걸까 싶었지만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모른다>는 사실 앞에서 수긍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요즘 우리사회가 갈수록 서로에게 날카롭고 상대의 작은 잘못이나 실수, 자신에게 끼치는 손해 같은 것들에 더욱 예민하고 과한 보복을 하려 드는 분위기를 띄고 있음을 공감할 것이다. 
" 이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사람, 아주 사소한 스트레스도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싸우기 방어기제가 반사적으로 또 극단적으로 일어나는 사람의 뇌는 일반 사람의 뇌와 해부학적으로 다른 경우가 많다. 대개 이들은 오랫동안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온 경우가 많다 보니 위협을 감지하는 뉴로셉션이 지나치게 작동하고, 그 결과 편도체가 과잉 활성화되고, 지나친 스트레스 호르몬 방출의 결과로 해마의 크기가 줄어들어 경험을 처리하고 소화하기가 남들보다 더 힘들어진다. 그러면 남들보다 더 민감하게 위협을 감지하고, 또 이에 과하게 반응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89"
책을 읽으며 어린시절부터 또래와 경쟁하며 성장하는 한국 사회의 스트레스가 물질만능주의, 결과 지상주의 같은 가치와 함께 사회적으로 지키고 배려해야 할 도덕과 윤리를 무너뜨리고 혐오와 분열이 심화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살펴보니 개정증보판을 통해 다룬 세대 간 트라우마 대물림, 남녀 갈등과 여성 폭력 등의 내용에 특히 많은 공감을 하며 읽었다. 새로 다룬 주제들이 공교로운 시의성을 띄고 있는 것을 보아 저자가 초판 출간 이후에도 10년의 시간동안 끊이지 않고 사회 현상과 개인 내면의 불안에 대해 연구해 책임과 애정을 가지고 새로 담아내 독자 앞에 선보였음이 느껴져 충분한 응원과 감명을 얻었다. 위협과 불안에서 회복하는 일, 현상을 위협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자신을 더 잘 다루는 일,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감정에 압도되지 않는 일을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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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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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뜻한 시월의 이날,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나의 할아버지는 애국지사다. 한국이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에 일본의 지배에 맞서 싸운 자유의 투사다. 보수적인 양반 지주 가문에 수치를 안긴 장본인이 아니라 영웅이자 순교자이다. 44"

공교롭게도 요즘 세상은 한 엘리트 집안의 친일행적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선대부터 좀 산다고 하는 집안들이 대체로 나라 팔아먹고 돈받고 땅받고 입씻은 사람들이 아니던가.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청산이 없이 효율을 따져 빨리 성장하고자 했던 부작용이 아직도 여전하다. 선대가 쌓은 죄값으로 부유히 자라 유명인이 된 후대가 방송에 나와 몇대를 이어온 자신의 집안에 대해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장면은, 그 개인으로서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자랑하는 것에 급급해 짧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냈고, 우리사회에는 심각한 역사의식 부재와 물질만능적 사고의 천박함을 경고했다. 피로해진 눈을 씻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마주한 '비밀의 들판'은 드러내고 자랑하지 않은,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말하고 있었다. 부유함과 위명으로 화려하게 덮어씌운 거짓 대신, 조용하지만 끈질기게 이어져 증명하는 가족의 역사이자 개인의 삶이었다.

 '나-주혜'로 인해 시작된 것이라 여겼던 기록은 사실 그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 갑작스런 폐수술(4년의 수감 생활 이후 결핵을 앓은 할아버지로부터 감염된 오랜 지병으로 인한) 이후 기억력이 감퇴하고 무기력해진 아버지의 일상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고, 전에 할아버지에 대해 찾아 기록하려 했으나 멈춘 채 두었던 계획이 다시 수면 위에 오른다. 그는 전화통화 조차 응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에 대해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전부 글로 써달라 요청한다.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의 존재는 인생 전반에 걸친 수치와 멍에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수감생활을 했었다는 사실만을 알고 왜 수감되었는지는 알지 못했고, 자신이 범죄자의 아들이란 생각에 제대로 웃지도 말을 하지도 않고 지내왔다. 아버지가 범죄자가 아니라 잊혀졌던 애국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아내조차 다른 사람처럼 달라졌다고 평(224)할 정도로 영향을 받아왔던 것이다.
 역사,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누가 기억하는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지만 그와 그 자신에게서 이어져나간 이들에게 전해질 것이라는 걸 보여준다. '비밀의 들판'에서는 아버지-은설의 기록도 함께하고 있으니, 언젠가 나 역시 아버지의 이야기를 청해 듣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졌다. 비록 그의 삶에 비장한 저항이나 사상, 운동 같은 것은 없었을지라도 내가 그를 알고 기억하기 위해서. 굉장히 세세하고 때로는 늘어지거나 돌아가고 있다고 여겨질만큼 자세했는데도, 누군가의 삶을, 가족의 역사를 담아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짧고 간명했다. 

 " 할머니는 애국지사의 아내였다. 평생토록 남편을 잊으려고 애쓴 뒤에, 결국 영원히 남편 곁에 눕게 되었다. 354"

 더불어 가족의 기록은 오랜 시간동안 침묵해온 할머니의 증언이기도 하다. 처음엔 할머니의 침묵이, 남편과 관련된 자료를 전부 없애버린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며 인터뷰가 계속될수록 살아남고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버텼구나 받아들이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삶이 명예로웠을지라도 가족들에게 남긴 상처는 적지 않았다. 원치 않는 결혼이었다며 아내는 고향 가족의 집에 남겨두고 훌쩍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남자, 사업 자금을 모으기 위해 첩을 들이려는 남자, 수감되어 있던 동안의 일을,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남자, 자신의 아내 뿐 아니라 두 아이도 책임지지 않고 죽은 남자이기도 하다.
 사실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느낀 것은 역사 속에서 고통받은 민족이나 애국같은 비애와 의기 넘치는 큰 뜻이 아니었다. 어린시절 나의 할머니에게 들었던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 누가 묻지도 않고, 어디에 말할 곳도 없어 어리고 철없는 손녀 옆에서 옛이야기 들려주듯 풀어내던 그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이었다. 오봉이니 쓰메끼리 같은 사소한 일본어들을 섞어서 쓰던, 전쟁의 잔인함과 피난길의 공포를 기억하던, 시집살이의 설움을 지워내지 못했던 내 할머니의 이야기는 제자리에 얌전히 있는 소녀(69)라는 이름을 가진 금순 할머니의 삶과도 닮아있었다.

 저자가 완전한 미국인이라는 사실에 가끔은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다. 한국인 가족을 가지고 있지만, 그 틀을 제외한 모든 것을 미국에서 채워넣은 사람. 둘 다 가지고 있지만 '어디에서 왔는지("넌 어디 출신이야?" 14/387)' 끊임없이 대답해야 하는 사람이며, 존재의 한가운데에 난 구멍에 대해 들여다보아야 하는 사람의 고백이 함께했다. 두 나라 어디에서도 편하지 않다던 그의 내면이 불편할수록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음을 느꼈다. 처음엔 잊혀진 독립운동가였던 자신의 뿌리를 바로 세워 다시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과정을 겪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되돌리고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가족의 역사 안에서 이어져 온 상실을, 자신이 누구인지, 왜 관계 속에서 고통받고 실수하는지, 스스로도 이유를 찾기 위해 고뇌해야 하는 방황을 끊고자 한 사람의 노력이 더 크게 보였다. 과거와 역사가, 가족으로 이어지는 경험과 삶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비밀의 들판'은 말하고 있다. 이번 주말 읽기 좋은 책이다.

 " 나는 너희가 알았으면 해. 너희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 될지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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