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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주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평점 :
" 무언가를 강렬히 원하면 그 반대의 것이 온다는 것. 희망을 원하면 절망이 찾아오고 부를 원하면 가난이 닥쳐올지어다. 사랑을 갈구하면 할수록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마주하게 될 지어다. 아이들 앞에 선 아버지 선생님은 영적 의지의 시험대였다. 218"
'파사주'를 읽으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모르겠다,였다. 그 뒤를 가장 자주 쫓아나온 것은 만약 내가 종교가 있었다면,과 이 둘은 정말 길을 떠나고 있는 게 맞나,였다.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듬더듬 읽어나가다보니 최근 읽은 책들 중에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려 읽은 책이 되었다. 사실 다 읽고 난 지금도 잘 모르겠다는 감상은 지워지지 않았다. 조금 말을 부풀려서 표현하자면 '파사주'만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읽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작가는 이 책을 어떻게 풀어낼까 궁금해지는 책은 또 없을 것이다.
하나의말씀
'신의 군대(61)'. 무려 일곱곳이나 된다는 벽돌집의 조직적인 체계와 사회 여러 계층의 비리가 연결되어 있는 듯한 하나원의 모습은 단순한 사이비같은 종교시설을 넘어 군사정권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종교시설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안에 비밀스러운 공간들이 있고 거기서 사람들은 계약서를 주고 받으며 서로를 접대한다. 해수와 유림의 불분명한 시선과 대화로 그 안에서 벌어지던 불온이 언뜻 들춰지다 감춰진다. 그 둘의 존재마저도 불확실하게 느껴지는 순간순간 그들의 증언도 함께 점멸한다. 정말 뒤뜰을 지켜보다 보면 사라진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는지, 계단 아래에 있는 것은 연구소인지 수련당인지 혹은 감옥인지(230) 보고도 알 수 없고, 알아도 말할 수 없고, 알려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더욱더 생생해지는 것은 " 사람 하나 죽고 사는 게 말씀과 관련 있어, 없어? 사람 하나 다치고 상하는 게 말씀과 관련 있어, 없어? " 을러대던 소리였다.
가인과 아벨(17)
(81)*'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카인은 자신의 첫 수확 농작물을 아벨은 자신의 가축 중 가장 처음 난 새끼를 제물로 바쳤다. 자신의 것이 아닌 아벨의 제물만 반겨하자 이를 시기한 카인은 아벨을 불러내 잔인하게 살해하고, 이로인해 카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어 땅에서 버려져 유랑하며 살게 된다. [창세기 4:1-16]'
가인이라는 표현으로 사용해서 명확한 비유와 설명이 나오는데도 해수가 당당히 스스로를 가인이라고 부르는 통에 카인으로 대표되는 '악, 폭력, 탐욕'같은 키워드들이 흐려졌다. 해수가 가인이라면 대체 아이들을 착취하고, 서로를 감시하고 때리며 학대하고, 비리와 향락에 취한 벽돌집 안의 사람들은 무엇일까, 내가 모르는 숨겨진 의미가 더 있을지도 몰라 의심하며 읽었다. 역할은 누가,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는지에 따라 뒤바뀌는 것이었다. 가인의 불신과 유랑은 해수와 유림으로 인해 긍정으로 바뀐다.
길을 떠나는 아이들
어디선가 아이들은 끊임없이 흘러들고, 자라나던 아이들이 소리없이 사라진다. 사라지기 전에 소리를 내려고, 모두가 아벨인 그 공간 안에서 스스로 가인의 이름을 가져온 아이들은 유랑 길에 오른다. 길과 벽돌집이, 과거와 현재가 어지러이 뒤섞이는 동안 그 안에서 믿음도 합쳐지고(122), 생존자(166)는 착취자가 되었다. 아이들의 여정이 현실감없는 환상처럼 보여져 산 자의 탈출인지 이미 죽은 자의 황천길을 따르는 것인지 헷갈렸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방향도 불분명한 길 위에서 해수와 유림은 못마땅히 건네진 사과를 받아든다.(21) 아마 이들은 더이상 깨달을 것이 없기 때문에 이 과실을 먹어보라는 유혹 없이 오히려 마땅치 않다는 듯한 태도로 건네진 것이 아니었을까.
파사주
게임(200)이자 통로 그리고 궁합. 파사주라는 단어를 두고 사실 대형 쇼핑몰 같은 공간을 먼저 떠올렸다. 가장 일상적인 접근이 아닐까 싶었는데 이 때문에 '파사주'의 내용을 좀 더 현대적이고 세속적인 배경일 것이라 잘못 짐작했었다. 책에서는 이를 두고 게임으로 풀어냈지만 나중에 읽어보니 사주팔자를 깨뜨린다는 뜻의 破四柱,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운명을 풀어보는 궁합의 의미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무인 유림과 물인 해수가 만나 함께 자신들의 운명에 저항해 생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관계성을 그대로 상징하는 제목이었다. 읽기 전보다 읽고 난 뒤에 훨씬 제목이 더 마음에 들어왔다.
" - 우리 지-지금 어디로 가?
유림이 물었지만 해수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뒤를 돌아봐도 앞쪽과 똑같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고 불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림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건 이 길이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언젠가는 끝이 보일 터널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계속 걷다 보면 환한 빛을 마주하리라는 작은 희망이 유림의 발걸음을 앞으로 이끌었다. 171"
어둡고 질척이는 통로를 헤매는 것 같은 소설이었지만 그 안에 희망이 있어 그 희미한 것을 붙들고 같이 헤매며 읽어 내려간 기분이었다. 이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독자라면 아마 좀 더 수월하게 읽고 많은 것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을 여는 소설로 사람 사이의 관계과 운명을, 세상의 굴레와 저항을 음미해 볼 수 있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