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무시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법
유상우 지음 / 넥서스BOOKS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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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으로 보면 거절은 단순한 선택처럼 보인다. '할 수 있다' 혹은 '어렵다'를 말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거절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마음속에서는 여러 감정과 생각이 동시에 밀려오고, 그 사이에서 우리는 자주 자기 뜻과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15" 

길을 걸으면 무슨 판넬에 스티커를 붙여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눈을 빛내며 따라오거나, 멀리서부터 짝을 이룬 사람들이 마스크를 쓴 얼굴에도 복이 많다며 말을 걸어오는 이른바 만만한 인상이라 세상을 살아오면서 피곤한 일들이 없지 않았다. 자신의 기분이나 성별이 태도가 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언제는 정말 간절히 내가 마동석같은 체격의 남자였다면 얼마나 세상 편했을까 바랐던 적도 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만만해보이는 외면에 내면까지 갖춘 물렁한 사람이었고 이따금 마주하게 되는 '덜 교육된 사람들' 앞에서 정신적 고통을 받을 때면 그 고통이 신체적 고통으로까지 번지지 않도록 피하는 방법을 골몰하는 쪽이 더 익숙하고 필요했다. 

'아, 저 잠깐 올리브영 좀 들렀다가 가려구요.' 라는 말을 해본 적 있을까, 혹은 이 말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요즘은 제의, 부탁에 대한 거절을 자신에 대한 거절로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아 거절이 무섭다. 아주 사소한 거절이나 거부의 표현에도 불같이 화를 내고 폭력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종종 뉴스에 나오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어려운 거절, 저 사람이 이 거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어 발전된 돌려말하는 기술을 두고 쿠션어라는 표현도 생겼다. 그냥 솔직히 말하면 되지 왜 싫다는 말을 못해서 답답하게 하냐는 사람도 분명 있을테지만 거절을 말하기 힘든 사람도 최선을 다해 당신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방식을 '올리브영' 같은 쿠션어로 만들어낸 것이다.  

" 거절은 누군가를 밀어내는 행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관계를 오래, 그리고 건강하게 지켜 내기 위한 중요한 기술이다. 19" 

하지만 언제까지 에둘러 말하는 방법만으로 답답해지는 속을 풀지도 못하고 쌓아가면서 살 수는 없다. 그렇기때문에 '나를 무시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법'이 좀 더 성숙하게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이 궁금하고, 필요한 사람을 위한 도움이 되어 줄 것 같아서 읽어보게 되었다. 

나는 왜 거절이 어려운가를 생각했을때 떠올랐던 이유들을 책에서도 세가지로 나눠 제시하고 있었다. '첫째, 관계가 끊어질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둘째, 나쁜 사람으로 보일까 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셋째, 갈등을 피하려는 성향 때문이다. 16' 두서없이 생각했던 이유들이 차례로 정리된 것을 보고 내면에 가라앉아 있던 약한 면과 욕망이 드러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 "나는 나를 존중하는가?" 43" 책을 읽다 찌르듯이 다가온 질문과 함께 사실은 그리 필요하지도 않은 상대의 호감을 얻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압박하고 괴롭게 만들었던 적은 없었을까 되짚어보았다.  

" 자존감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기록으로 남지 않아도, 나 자신에게는 분명히 축적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를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존감은 멀리 있는 목표가 아니다. 이미 오늘 아침,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에서 조용히 시작된다. 226" 

이 자신에 대한 질문은 4장에서 답으로 돌아온다. '나를 무시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법'에서는 남을 똑같이 무시해주는 방법을 말하기 전에 나를 존중하는 것에 대해 몇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스스로가 단단하지 않으면 그만큼 타인에 의해 영향을 받고 휘둘리기 쉽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니 나를 무시하는 남에게 대응하기 전에 나를 무시하는 나부터 개선하도록 조언한다.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보기, 나를 칭찬하기, 피곤해도 밥을 잘 챙겨먹기, 환기를 해보기 같은 일상 속의 작은 실천을 통해 쌓이는 변화를 어렵지 않게 제안해준다.   

사실 책을 펼치면 이렇게 못된 사람한테는 저렇게 쏴주고, 이렇게 나쁜 사람한테는 저렇게 들이대버려라 하는 맞춤형 사이다식 대응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남에게 어떻게 하기 이전에 자신부터 바라보라는 조언이 먼저 나와 이제부터 세상과 싸우는거야, 하고 화부터 장전했던 마음이 한풀 가라앉았다. 물론 일단 나보다는 저 사람 왜 저러나가 궁금한 사람들은 2장부터 읽는 것을 추천한다. 솔직히 대부분 나 자신에 대한 반성과 땅굴을 충분히 파봤던 사람들이 이 책을 집어들었을테니 일단 2장부터 읽기(2-3-1-4)를 추천한다. 심지어 집착형(93)의 내용을 읽으며 혹시 내가 집착과 통제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점검해보기도 했으니 이런 성향에게 1장에서 마주하는 자신에 대한 점검은 투지를 살짝 꺾는 일이 되니 나중에 읽어도 좋을 듯 하다.  

가장 중요한 실전 활용편은 3장에 있는데, 그래서 3장의 내용이 가장 흥미진진했다. 대응하기보다 질문하는 편(137)이 더 강력한 전략이 된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똑같이 무례해지거나 불쾌한 기분을 드러내지 않고도 상대방이 생각없이 가볍게 한 말을 되돌아보도록 만들면서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라 현명하고 성숙한 태도로 여겨졌다. 또하나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도 관계에서 피로를 가져온다고 짚어준 점(친밀성 피로 151)도 의미있었다.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면서 함께 살때보다 더 사이가 좋아졌다는 얘기를 가끔 본 적이 있었다. 오랜시간 함께 살아온 가족 사이에서도 이 거리 두기가 필요할 때가 있는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더더욱 이 거리감을 잘 유지해야 함을 느꼈다.  

남탓을 해보려고 기세등등하게 책을 들었다가 사실은 남보다 내탓을 더 많이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나는 왜 거절이 어려운가, 왜 나에게 무례한 사람에게 단호하게 대처하기 어려웠나를 먼저 생각하고 건강한 관계맺기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주는 도움이 되었다. 책의 곳곳에 동영상 자료를 볼 수 있는 큐알코드가 있어 좀 더 궁금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리브영에 들러야 했던 사람이라면, 누워서 잠들기 전 그날 들은 누군가의 배려없는 말에 이렇게 대답해줄걸 이불을 걷어차 본 사람이라면, 거절을 하기 어려워 빠져나오고 싶은 단톡방에 영원히 갇혀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의 실수에는 위로를 하면서 자신의 실수에는 자책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를 무시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법'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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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붙게 해 주세요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95
이로아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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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지에 "20년 전 죽은 전교 1등이 나타났다"는 문장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공부 잘하고 싶어서, 전교 1등 하고 싶은 학생의 욕망이 금단의 비술까지 손대게 만들었다는 내용이겠구나 예상했다. 더 나아가 20년 전 전교 1등이면 지금이랑은 교과과정이 다를텐데, 20년 전이면 출제 경향도 다르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기억이 안날텐데! 하고 슬퍼졌다. 요즘은 요오드 아니고 아이오딘이라며 나트륨이 소듐이고, 아밀라아제는 아밀레이스, 부탄은 뷰테인이라며 그럼 부탄가스는 뷰테인가스야? 스티로폼도 스타이로폼이고 연필은 한 다스 아니고 한 타라며... 그래도 전교 1등 괜찮겠니? 이런 슬픈 생각을 품고 책을 펼쳤다. 

그런데 '귀신 붙게 해 주세요'를 앞에 두고 어리둥절해졌다. 이런 내용이었다니. 그래, 전교 1등이 필요하긴 한데 공부는 잘 모르겠고 전교 1등이랑 사랑 얘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책을 읽는 나도, 전교 1등 귀신이라도 강령해 낸 윤나도. '기순고'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학교를 앞에두고 정말 요즘 이런 학교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배경은 아닌 것 같아 의심이 들었다. 야간자율학습이나 두발, 용모 검사 같은 것들은 아무리 교칙이라고 해도 요즘 세상에 학생 인권 같은 문제가 얼마나 예민할 건데 대놓고 앞에서 창피를 주면서 강제할 수 있단 말이지? 20년 전의 학교와 요즘 학교의 모습을 섞어놓은 게 아닐까. 아이들 마음을 읽어주느라 훈육은 커녕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기사들만 접했던터라 더욱 그랬다.

이 아리송함은 기억 속에서 잊혀졌던 단어인 '이반'을 보았을 때 더욱 커졌다. 기순고의 20년 전에도 그랬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때에도 그런 단어를 본 적 있다. 한번 소문이 돈 대상을 향해 드러내놓고 배척하고 비웃기도 하던 분위기가 있으면서 동시에 별스럽지 않게 어울리고 신경쓰지 않던 분위기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그런 단어는 본지 오래되고 그냥 성소수자나 게이, 레즈비언 같은 단어들만 남은 줄 알았다. 지나가는 학생을 붙잡고 요즘도 이런 말을 쓰나요, 요즘도 학교에서 단속을 하나요, 물어볼 수 없어 조금 찜찜하던 차에 현실감있는 단어의 폭력적인 등장으로 할말을 잃었다. "기순고꼴페미박제계정 75" 이런 단어가 존재하고 사용된다는 것이 현실인데 다른 것들에서 위화감을 느낀다는 게 말이 되나. 

전교 1등 귀신과 교칙, 이반 이런 단어들이 왜 연결되는가는 '윤나'를 중심으로 퍼져간다. 윤나는 친구가 가장 좋고, 미용을 배우고 싶은 꿈이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다만 윤나의 가장 친한 친구 재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현서라는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어 서로 멀어져버리고, 교풍이 자유로웠던 학교가 갑자기 '정상화(14)'를 선언하면서 학생들의 외양과 사상을 통제하려 들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강제적으로 시행되는 야간 자율 학습에서 빠지려면 모의고사 1등급을 맞아야 한다는 조건이 생겨 미용학원에 등록하기 위해 윤나는 일주일을 투자해 공부 대신 강령술을 마스터 하기로 마음먹는다. 윤쪽아, 윤쪽아. 차라리 그 의지와 실행력으로 공부를 하지 그랬니, 싶지만 윤나는 성공한다. 예체능이라 그런가 재능있어, 너. 

" "최신 문제도 풀 수 있어요? 20년 동안 출제 경향이 많이 바뀌었을 텐데."
"네가 간절하다고 불러 놓고 나 테스트하겠다는 거니?" 
"아니, 확인할 건 확인하고 넘어가야 하니까." 
"기가 찬다 진짜. 요즘 애들은 하여튼. 문제 수준이 어떤데?" 59" 

윤나가 불러낸 20년 전 전교 1등 귀신 순지의 성능은 확실했다. 하지만 귀신은 귀신인 법, 순지이용권에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부작용이 존재했는데 순지가 윤나의 친구를 빼앗아간 현서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쯤되면 현서의 매력은 마성이라 해도 좋을만해진다. 친구 재이 때문에 현서를 미워했던 윤나는 순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현서와 가까워지는데, 마성의 여고생답게 현서를 알면 알수록 미워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윤나는 현서와 친구가 되어간다. 그리고 점점 광기로 치달아가는 학교 '정상화'의 물결 속에서 윤나, 재이, 현서, 순지는 흐름을 거스르는 반기를 들며 20년 전 학교에서 벌어진 전교 1등 학생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기대보다 흡입력 있는 전개에 단숨에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는데 촘촘한 관계의 얽힘에 집중하다가, 순지의 과거와 관련된 부분에서 주경이 등장하며 그동안 자꾸만 뒷장으로 인도하던 긴장과 재미의 균형이 살짝 힘을 잃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을 싫어하는 주경이 왜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는지, 과거 전달자가 아닌 주경 그 자신으로서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 무엇이었는지 조금 더 듣고 싶었다. 게다가 이렇게 쉽게 순지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준다니, 거짓말하지 말라거나 장난치지 말라거나 화를 낼 법도 한데 빨리 전개를 하기 위해서 신뢰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이 생략된 느낌이 들었다. 또 쌓아놓은 위기에 비해 결말이 너무나 설키게 봉합되어 끝나버린 듯해 전체적으로 뒷심이 약하다는 감상이 남아 조금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충분히 몰입해서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사실 요즘 청소년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보다는 마치 저자가 스스로의 과거에 남겨두었던 상처를 꺼내 지금 다시 들여다보고 치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여전히 세상은 다름을 오염과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마음은 소독하면 정상화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같은 고민이 남아있을까. 그런 투명한 시선앞에서 전교 1등이나 귀신 같은 키워드들은 어느새 소멸되어 버리고, 단단한 알맹이만 남아 고민이 많은 누군가의 마음에 소중히 심어 휩쓸려 쓰러지거나 좌절하지 않고 자라나도록 지지해주고 싶다는 따뜻함이 느껴지는 듯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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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 - 말보다 깊은 눈빛, 양조위의 삶·사랑·작품
주성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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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양조위일까. 책을 보고 가장 많이 떠올린 생각이다. 그는 항상 그로써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지금이 '마지막'이란 수식을 붙인 채 그에 대한 두툼한 책이 한 권 나올만한 어떤 기점일까 의아함이 깔렸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봄 햇살이 슬며시 새어 들어오(214)*'는 계절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 배경이 어떠하든 영상 속 그의 눈빛에 매료되어 빠져들 듯, 책장 사이를 읽어내리게 될 것이다. 

언제 이렇게 홍콩영화와 배우들을 사랑했었나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을만큼 익숙한 얼굴들을 만난다. 요즘은 중화권이라하면 주로 대만영화를 접하게 되는데 어린시절엔 아마 한국영화보다 홍콩영화를 더 많이 봤던 것도 같다. 명절이면 낮시간대에는 주로 성룡이 나오는 영화가 매번 배정되었던 것 같다. 주말 밤시간대에는 이연걸이나 장국영이 나오는 영화가 자주 등장했다. 이상하지, 양조위는 그보다 조금 더 자랐을 때 등장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가 가진, 더 나이가 든다해도 훼손될 것 같지 않은 소년스러운 웃음과 동시에 섹시함이 묻어나는 상반된 분위기를 소화할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그를 바로 보게 된 듯 하다.   

<아비정전>의 흥행 실패와 <동사서독>의 제작비 고갈로 후반 작업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두 달 만에 완성한 영화가 <중경삼림>(1994)이라니(173-6), 흥미로운 뒷 이야기를 읽으며 어떤 흐름 위에 선 사람을 보는 듯 했다. 특히나 '그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보기 위해 일부러 홍콩에 다녀와 본 적이 있던만큼, 그리고 '그 홍콩'이 이제 거의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끼는만큼 3부 8장의 이야기는 각별했다. 그때 당시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가 '두 인물이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어 내려오던 그 길의 시간을 단숨에 지워버린 기계장치(179)'로 편리함 이면의 상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지금은 네온과 함께 사라져가는 과거와의 길고 지난한 이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책은 재미있게도 양조위를 말하지만, 양조위보다 그 주변 인물들에 더 많은 이야기를 담는다. 그의 우상으로 꼽히는 주윤발(70)이나, 오랜 시간 동안 홍콩사람들의 도파민을 책임졌을 연애담, 친구이자 동료인 장국영,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자 기꺼이 페르소나가 되어 연기한 왕가위(71), 2000년 이후의 홍콩영화를 보여준 유위강 감독 등의 등장이 가볍지 않게 풀어진다. 거기다 시대와 영화를 읽는 저자의 시선마저 깊이 있어 그냥 흘러넘겼던 영화의 장면이, 이를테면 <화양연화>에서 분위기만으로 암시한 관계가 왜 <색, 계>에서는 파격적인 형태로 드러났는지(316), 97년 <해피 투게더>에서의 떠남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209) 먼 시간 속의 관객이자 독자에게 전달한다.      

문득 '마지막'이라는 수식이 마음을 찌른다. 저자 역시 "<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라는 제목으로 양조위와 멸종 위기에 처한 홍콩영화에 대해 쓰다 보니 괜히 비장해졌는데,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실의 양조위는 정작 이를 반길까 싶다.(396)"며 같은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요즘은 명절에 티비에서 방영해주는 특선영화 같은 것에 그리 관심을 두고 있지 않기도 하지만, 어린시절 처럼 홍콩영화가 편성되는 것도 드물어진 듯 하다. 그처럼 자연히 홍콩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헤아리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이렇게 우리가 사랑했던 영화와 배우, 그리고 지나간 과거의 편린이 흩어지지 않고 남아있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아두고 싶어진다. 아마 그 마음을 애정과 함께 담아 이 책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  

" 누군가 <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는 표지가 전부라고 얘기하면 기쁠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느낀다. 13" 

책의 표지를 두고 '이 책은 표지가 사기다. 어떻게 이 책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느냐'고 주접을 남겼던 기억이 있다. 가끔 이렇게 작가의 의도에 그대로 순응한 자신을 보면 놀랍고 재밌다. 저자는 그 시절 430 우주선에 탑승해 어른으로 가는 시간을 거슬러 온 홍콩사람인가 싶게 인물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수상하다. 하지만 그만큼 세세하고 친절한 인도자이다. 없던 사연도 짐작하게끔 만드는 눈빛을 가진 잘생긴 배우를 적당히 흠모해왔다면 책을 읽으면서는 점점 더 궁금하도록 만든다. 자신이 사랑하는 배우를 향한 관심을 모을 수 있다니 성공한 팬은 행복할 것이다. 정말이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그**'에 대한 긴 팬레터였다. 덕분에 읽는 동안 즐거웠다.


*춘광사설(1997) 영제 Happy Together(해피 투게더)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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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 시대의 귀환 -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과 무한 각축의 시작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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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미국의 패권이 쇠락해가고 있다는 말은 묘한 감상을 준다. 미국과 별 상관도 없는데 아주 어린시절부터 가져온 어떤 이미지, 크리스마스 라고 하면 90년대 미국 중산층 가정을 보여주는 <나홀로집에> 같은 영화가 떠오르거나 늘 지구의 재난과 멸망 위기에 펄럭이는 성조기와 함께 등장해 세상을 구하는 미국이 주인공인 영화를 보며 자라와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메리칸 드림이 사라진 지금, 미국의 패권 말기는 어떤 의미와 현상을 가져올 것인가 <야만 시대의 귀환>과 함께 알아보고 싶었다. 

올림픽과 산불 같은 소식들도 있지만 미국의 상호관세 10퍼센트 부과 소식이 뉴스의 시작이었다. 미국의 행보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만큼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이전에 합의했던 상호관세와 투자 협상은 어떻게 될 것인지 긴 시간 다양한 방식으로 보도가 이어졌다. 트럼프의 영향 아래 예측불가능한 국제 정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라고 썼다가 자고 일어나니 관세를 15퍼센트로 조정했다는 뉴스가 속보로 올라와 있었다. 이쯤되니 우리가 무언가를 예측하고 대비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싶어진다. 

차례를 살피며 2장의 미국은 왜 그럴까와 3장 트럼프는 왜 이럴까를 가장 궁금하게 여겼는데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과 함께 패권의 중심이 중국으로 넘어갔음/넘어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어 위기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중국은 아직, 이라는 방심 혹은 방어적 생각과 약간의 경시가 내면에 잔존해있었기 때문이리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몇몇 중심이 되는 도시의 놀라운 발전과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흡수한 기술과 정보가 세계 최상의 수준이라는 사실이 경고처럼 전달되었다. 결국은 그 마저도 자원이 될 넓은 땅의 개발되지 않은 지역들을 꼬집으며 현실을 부정하려 해도 그 둘은 엄연한 진실이었다.  

" 높은 충성도를 전제로 하고 강력한 집단성을 특징으로 하는 그룹들의 경우에는, 일단 믿는 이에게 그 삶을 아주 간편하게 만듭니다. 세상만사를 설명할 수 있다 싶은, 만능의 설명틀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깥세계가 타자시되고 이질시되는 만큼, '우리끼리'는 더 강력하게 따듯한 정을 나눌 수 있죠. 내부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정 말입니다. 188" 

이 위기에서 미국의 선택은 또다시 트럼프였는데 이를통해 대중들이 무엇에 자신을 동일시하려하고, 현실의 이해관계를 파악하는데 어떤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두려움과 무지가 어떤 맹목을 낳는지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비단 미국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몇 차례의 선거와 집회, 심판과 분열로 드러나고 있다. 미국이 쥐고 있던 패권에 소요되던 부담을 전가하기 시작한 지금, 세계 패권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는 때 이에 영리하게 대처할 수 있는 대비가 필요한데 4년 뒤에 또 어떤 선택을 할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도 치명적이다. 

" 1990년대식 자유주의를 뒷받침하는 두 다리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였습니다. 한데 노동 인구의 다수를 경향적으로 빈민화시키는 신자유주의는 결국 노동자들의 상당수를 신자유주의 체제를 수용한 좌파로부터 떼어내 민족주의적 우파의 지지자로 만들었습니다. 285" 

지구촌과 세계화의 슬로건 아래 성장해 온 세대들에게 현재의 변화는 당혹스럽다. 세상이 더 확장된 평화의 그늘 아래 무한한 발전의 풍요를 얻으리라 여겼지만 오히려 불안과 긴장이 극대화되고 발전은 격차와 갈등으로 변모하여 위협이 되었다. 과도한 경쟁과 계층 사이의 간극을 일반적인 수단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는 좌절이 내부의 분노로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 다름을 이용한다. 보호주의와 고립주의, 인종주의적 이민 반대 등의 우파 레퍼토리를 이용해 우월심리를 자극해 심어진 극우 사상은 기득권과의 갈등을 교묘히 빗겨나가 대중들을 입맛에 맞게 결속시키는 수단이 된다. 

'야만 시대의 귀환'은 미국을 읽는 동시에 우리나라의 현 주소를 고민하도록 만든다. 세상은 약간의 속도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한 흐름으로 변화하고 있다. 한국이 특히 빠른 속도로 위기에 접근했던 고령화와 인구 감소라는 치명적인 약점(186)을 딛고, 이 혼란속에서 우리가 패권의 변동이라는 미중 사이의 힘 겨루기에도 균형을 유지하여 이 '생존 문제'에 대처해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며 읽었다. 쉽지 않은 문제이지만 어렵지 않게 풀어내어 좋았다. 솔직하자면 개인적으론 지금으로 이른 배경을 채우는데 더 도움이 되었지만 누군가는 이를 통해 앞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세상을 읽기에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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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중심 잡는 아이들의 비밀, 자기결정력
김효원.김현웅 지음 / 심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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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평가와 경쟁, 훈육이 아이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위축시킬까봐 교육 과정에서 배제해나가는 추세라고 한다. 너무나 달라진 교육 현장에 대해 가끔 뉴스를 볼 때면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는 옛 세대들이 있을 것이다. 사고 등의 문제가 생길까봐 이제는 학교에서 소풍도 가지 않는다는 변화가 며칠 전에도 뉴스에 나왔다. 그런데 어른의 의도는 분명 좋았는데 그 의도가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는 건 아니어서 경쟁과 성취의 즐거움을, 배움과 반성의 과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성장한 아이들은 도전과 좌절 앞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는 일이 왕왕 발생한다고 한다. 처음 경험한 벽 앞에서 극복의 경험 없이 지나치게 낙심하고 포기해버린다는 것이다. 한 아이라는 세계를, 우주를 키워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하고, 어떻게 해야할까? 요즘은 이렇다, 요즘 아이들은 이렇다고 하기 전에 어른과 사회구성원으로서 어떤 생각과 자세를 준비해야할지 '스스로 중심 잡는 아이들의 비밀, 자기결정력'을 통해 파악해보고 싶었다. 

차례를 눈으로 살펴보았을때 가장 궁금했던 내용이 4장 진짜 똑똑함과 가짜 똑똑함 중에 '엄마가 만들어준 똑똑함 130' 이었다. 어린시절에 비추어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하거나, 반장이 되거나 하는 뛰어남은 본인의 능력보다 어떤 뒷받침을 받느냐로 티가 나는 경우가 많았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그 효과가 초6 선우의 예시 뿐 아니라, 고2 학생의 예로 나오고 있었다. 타인이 만들어준 지도대로 길을 찾아가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지만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와 부합하는가, 스스로의 길을 갈 수 있는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가는 다른 문제의 이야기다. 남들이 다하는 것, 하라고 하는 것을 어영부영 따라가는 것도 벅찼는데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항상 깜깜한 문제였던 것이 생각났다. 모범적이거나 우등생으로 꼽히지 않더라도 하고싶은 것이 있었던 친구들이 얼마나 빛나보였던지, 그것이 남들과 다른 길이더라도 개의치않아 하는 모습이 얼마나 즐거워보였던지 모른다. 그게 중심/목표를 가진다는 것이었구나 싶다. 

요즘은 지식을 쌓는 교육 뿐 아니라 인격과 품성을 위한 윤리와 도덕에 대한 교육이 절실하다고 느끼는데, 특히 호주의 16세 미만 SNS 금지법에 대해 크게 공감하고 있다. 책에서도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가 공감 능력과 도덕성 발달에 미치는 영향(168)' 같은 단락에서 이 점을 짚어주고 있어 관심있게 읽었다. 우리도 호주처럼 인터넷에서 무분별하게 마주하는 혐오와 도덕적 해이가 그저 재미라는 말로 뭉그러진 채 아이들에게 노출되는 현실을 제대로 짚고, 다소 극단적일지라도 분리하고 교육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 이 점은 '개인의 윤리성은 사회 전체의 윤리성을 넘어설 수 없다(170)'는 말처럼 성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좀 더 강력한 처벌과 규제, 인식 개선이 필요함을 느끼게 했다. 결국 사회와 어른의 모습을 거울 삼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니, 요즘 애들은 하고 탓하기 전에 제대로 된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점검하는 것이 우선이었구나 반성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자꾸만 생각이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으로 옮겨갔다. 우리 삶에서 '관계'속에 생겨나는 문제의 대부분은 상대방을 통제하고픈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언젠가 한국식 연애 방식이 다른 나라에 비해 통제성이 강하다는 비판을 본 적이 있다. 하루에 연락을 몇번이나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그 시작이었는데 한국만큼 연락을 자주, 많이 하고 또 그 빈도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는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번씩 잘 잤는지, 밥은 먹었는지, 지금은 뭘 하는지 물어보고 답을 듣는 평범한 일이, 아무리 바빠도 잠시 짬을 내서 상대방에게 연락은 한 번 해줄 수 있지 않냐는 말이 과한 집착과 통제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 이것이 사랑과 관심의 표현이 아니라 상대방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욕구라고? 그런데 이 '통제'는 연인 뿐 아니라 가족간에서도 동일하게 보였다. 

'스스로 중심 잡는 아이들의 비밀, 자기결정력'을 읽을 때도 먼저 등장하는 것이 "과잉보호와 과잉통제(25)"에 대한 언급이었다. 아이가 원하는 태도를 보이도록 만들고 싶다는 부모의 보호와 통제가 아이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혼란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그래도 미성년 시기에는 어느 정도 통금이 필요한 것은 맞지 않나 통제에 동의하고 있는 자신이 있다. 어른의 시선으로 본다는 한계 때문일까. 같은 통제는 반대로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부모를 향해 그 영향을 끼친다. 부모님이 건강검진을 꼬박꼬박 받고, 운동도 하시고, 자잘한 것을 아끼거나 하는 오래된 습관같은 것을 바꾸시길 바라며 잔소리를 한다. 키오스크 같은 것의 사용법도 배웠으면 하고, 제사나 명절 음식 같은 것도 그만하고, 요즘은 책 잡히기 쉬운 옛세대 특유의 오지랖도 웬만하면 참으시라 하고 싶다. 내가 바라는대로 하면 더 편하고 좋을테니 바꿨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도 사실은 상대방에 대한 통제가 아니었나. 

교육서를 앞에 두고 너무 멀리 다른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이렇게 통제 받았던 청소년이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는 것이다. 이 통제가 이렇게 우리 삶과 관계 속의 전반적이고 고질적인 특성이자 문제라면, 이러한 경향을 해소해줄 수 있는 방법은 책에서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청소년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 교육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관계맺기에 있어 통제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생각된다면 함께 고민해보며 읽어도 좋겠다. 아이들이 자기만의 생태계를 가지고 성장해나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좋은 본보기가 되는 기준을 세워야하고, 그 기준을 강요나 압박이 아닌 방식으로 제시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렵다. 하지만 이 책이 고민을 하는 어른에게 든든한 받침이 되어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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