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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삶 사이에서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평점 :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리고 동시에 숨기고 있던 의문, 부끄러움을 낱낱이 드러내놓은 기분이었다. 일터 앞에 있는 대로는 대부분의 시위자들이 향하는 목적지로 이어져있어 큰일이 있을 때에는 거의 항상, 그리고 때때로 이러저러한 문구가 새겨진 깃발과 조끼를 갖춘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며 지나가곤 했다. 길고 지리한 사람들의 행렬과 소음, 물이나 화장실을 찾아 들어오는 방문객들을 창 밖으로 바라볼때면 옆에서 불평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화장실을 찾아 어디까지 들어와서 불편하다거나, 하루종일 너무 시끄럽다거나, 퇴근할 때 길이 막힐 것 같다는 그런 작은 불편이었다. '바깥의 저 사람들이 하나씩 달고 있는 '노동'이라는 단어, 우리가 그거잖아요. 우리 휴가가 보장되고, 연봉이 오르고, 고용이 보장되는 게 저 불편에서 왔어요.' 그들과의 사이를 벌릴 용기도 없어 속으로 웅얼거리고는 "소시민"답게 오늘 퇴근하고 어떤 일정이 있느냐며 말을 돌리곤 했다. 이런 자신의 비겁함이나 그나마 선하고 싶다는 욕망을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드러내도 될까 그런 복잡함을 품고 책을 읽었다.
칼럼으로 연재되었던 글들이라 한편의 분량이 길지 않고 대체로 명확한 주제가 드러나 읽기 편하다.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나도 알고 있는 우리 세상의 이야기를 한번쯤은 도마 위에 올려놓아 보자고 건네는 듯 하다. 그만큼의 가벼움으로 읽고 넘기기만 해서는 안되겠지만, 확실히 부담은 덜했다. 트렌스젠더나 돌봄노동, 다문화와 난민, 미얀마 민주화 운동과 난민 문제, 동물보호법, SPC 제빵공장 노동자의 죽음 같은 사회와 개인 문제에서 123사태, 부정선거 논란, 부동산 대책, 코인과 주식 같은 정치와 경제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가 다뤄진다.
" 여성 노동자들은 파업 기간 내내 '떴다, 아지메 부대'를 자처하며 치열하게 싸우고 먹였다. 그러다 희생양이 됐다. 정리해고 후 노조에 직고용됐는데 같은 일을 하는데도 임금이 줄고 신분도 열악해졌다. 함께 해고된 남성 노동자들은 복직됐다.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복직을 노사 협의에서 다뤄달라고 노조에 요청하자 노조 대의원대회는 거부했다. 107"
읽는동안 여성의 문제가 많이 눈에 띄었다. 책 안에서도 김장 버티기, 제사 폐지를 주장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나 살림 밑천으로 쓰인 수많은 여성들의 삶, 그리고 돌봄노동의 현실까지 다양한 여성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언제고 대체될 수 있고 가장 변화가 없는 환경과 조건에서 여성들의 노동은 계속되고 있다. 어느 건물에나 있는 화장실을 청소하는 노동자들에게 휴게 공간이 없어, 화장실 한 칸을 막아 그 안에 청소도구를 두고 청소노동자 역시 그 화장실 칸 안에서 쉬고, 밥을 먹는다. 매일 화장실을 이용하면서도 타인의 상황을 눈여겨보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문제가 공론화되기 전까지 눈치채지조차 못했다. 거기다 노동 투쟁의 현장에서조차 지워지고 배제되는 여성의 권리가 암담했다. 투쟁을 하면서도 동료들의 밥을 차려먹어야 했던 이들은 가정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집안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하고 당연스러운 노동을 또 해내야겠지. 거기서 우리는 또 얼마나 벗어났을까.
" 한 여성이 '바깥일'을 하려면 다른 여성의 돌봄노동이 필요하고, 누군가 김치 담그기에서 해방되자면 누군가의 고단한 노역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되새긴다. '엄마표 김치'라는 그리운 말이 실은 "넙죽 받아먹기만 하는 자들이 계속 받아먹기를 염원하는 말"이라는 걸 깨우쳐준다. 303"
사투리에 대한 이야기(116)가 나왔을 때 예전에 나도 경상도 출신 사람들 특유의 사투리에 의문을 품었던 것이 생각났다. 다른 지역 출신 사람들은 직접 물어보지 않는 한 말투로 고향을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유독 경상도 출신의 사람들은 사투리를 그대로 사용하는 비율이 높았는데 그 의문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관심있게 읽었다. 전에는 왜 그럴까에만 생각이 그쳤다면 요즘은 사투리를 쓰거나 쓰지 않는 것에 관심을 두는 일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서울과 가까운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서울 중심적인 행태가 불편하다고 여겨지는데, 고작 억양이나 말투같은 것으로 왜 고치지 않을까 왜 고칠까 생각하는 것조차 그 배경이 어떠하든 불필요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어떤 기준에 대한 잣대가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 게 과연 옳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우리가 과거에 당연시했던 가치들이 지금은 잘못이었고 무지였음을 깨닫곤 한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다고 하더라도 아주 나중에 세상의 판단 앞에서 어떻게 해석될지는 알 수 없는 것 아닐까. 솔직하자면 어떤 주제들은 반발심과 같은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분명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변화의 흐름에서 갑자기 멈춰서서, '이 방향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어' 하고 깨닫게 되는 일도 있었다. 오히려 그때는 미숙했고 지금의 전환이 더 맞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불과 10여년 전 쯤만 해도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결혼도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 미래가 이렇게 가깝게 다가올지 몰랐다. 인간의 모든 역사에서 당연한 본능이라고 여겨졌던 큰 줄기 하나가 서서히 말라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나아가기로 한 방향이 맞다고 어느 누가 정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의문 앞에서도 결국 나아가야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변화를 손에 넣을 수 있음을 알지만 요즘의 진통을 떠올려보면 이 앞이 가려던 곳이 맞을까 의문을 떨칠 수 없게 된다.
" 문학의 쓸모는 타자에 대한 공감이라고 믿었지만, 어느 순간 젠더나 섹슈얼리티의 타자, 심지어 비인간 타자에게는 관심이 가도, 계급적 타자에게는 그러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내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만 진보적이며, 약간의 기부로 부채감을 퉁치고 마는 패션 좌파가 된 것은 아닐까 자문하고 있었다. 261"
스스로를 좌파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이 문장에 이르러 큰 공감을 했다. 처음엔 바로 앞을 막아서고 집요하게 눈을 마주하는 낯선이를 상대하는 기분이 들어 어쩐지 불쾌하고 피하고 싶었다. 이게 당신의 모습이라고, 티비 앞에서는 세상이 어쩌려고 그러냐며 말을 얹다가 다른 사람들 앞에선 글쎄요,하고 말을 뭉개고 생각나면 가끔 이리저리 기부를 했다가도 길에서 서명을 받는 사람들 앞에서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기는 일이 망설여졌다. 공감은 하지만 실천은 어려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들킨 기분으로 문제 앞에 서는 일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선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에 나름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만 하는 약함을 꼬집는 것 같았다. 잘한 것이 없어도 잘하고 있다고 위로받고 싶은 욕심까지 들킨 기분이었다. 그 나약함과 욕심 덕분에 어떤 주제 앞에선 공감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하는 사람과 자신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과연 언제까지 이 흐린 구역에서 있는 것이 가능할 것인지 마음 속에 의문과 불안을 품어보았던 사람이라면 '앎과 삶 사이에서'가 거울과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답을 구하는 길을 가자고 말을 건네오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