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금 대신 보석을 산다 - 취향과 안목이 부가 되는 희소성의 경제학
윤성원 지음 / 김영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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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석을 살 때 가장 위험한 순간은 눈앞의 화려함에 마음이 앞설 때다. 277" 

예전에 다이아몬드에 더이상 예전과 같은 가치가 없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뒤로도 비슷한 전망은 계속되었고 금 시세가 끝도 없이 오르는 최근 흐름에 비해 다이아의 가격은 랩다이아의 품질 상승으로 하락 방어선 없이 가치가 계속적으로 하락할 것이라는 평이 주기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작은 보석함 안에 놓아둔 그보다 더더욱 작은 나의 다이아가 떠올랐다. 보증서까지 알뜰살뜰하게 잘 보관하고 있는 그 다이아가 살때는 손이 떨리게 만들더니 사고나니 마음이 떨리게 한다. 금 가치는 오르고 보석의 가치는 떨어진다는 세상의 말과 달리 금 대신 보석을 산다는 제목의 책을 보고 한동안 가만히 작고 작은 나의 다이아를 생각했다. 기다려, 저 책을 읽어보고 너의 가치를 드높여(?)줄게. 

" 지금 놓치면 다시는 손에 넣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소유를 통한 과시,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본능... 이것들이 진짜 가격이었다. 88" 

나의 작고 작은 다이아의 가치를 높일 방법은 소유주인 나의 서사를 쌓는 방법 외에 달리 없다는 사실을 초장부터 깨닫고 들어가야 했다. 이건, 이 방법은 틀린 것 같아. 보석에 이야기가 쌓이고 그 내력이 분명하다면 같은 값어치의 보석보다 더 가격이 높아진다는 것은 언뜻 매력적이었다. 어떤 유명인이 수십억을 들여 경매에서 샀다거나, 왕실이니 황실이니 하는 곳에서 가지고 있었던 내력(프로버넌스 provenance)을 가진 보석 이야기를 읽다보면 재밌기도 하다. 사라졌다가 우연한 계기로 수집가의 눈에 띄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는데, 8년 동안 주방 찬장에 들어있던 러시아 황실 달걀(48) 이야기를 읽다보니 한편으로는 이 가치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고물상이 그 달걀을 벼룩시장에서 샀을 때 그의 눈에 달걀은 금값 500달러쯤의 현실적 가치가 매겨졌을 뿐이다. 그러니 값을 좋을대로 부풀리기 마련인, 그것도 우리와 먼 시장의 역사와 선호에 치중된 결과물이 아닌가 의심과 회의도 들었다. 

게다가 감정 기관마다 산지 판정이 갈리고 어느 기관의 감별서인지에 따라 가격도 달라진다(100)고 한다. 일반인이 진입하기에는 좀 어려운 구석도 있고 그 가치를 어떻게 보는지는 고무줄처럼 늘었다가 줄어드는 미심쩍은 면도 있어 보였다. 심지어 어떤 상자(티파니의 블루박스 162)에 담기냐에 따라서도 그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가. 그러고보니 작고 작은 다이아를 살 때 우신에서 감정을 받은 것을 살지 GIA 감정서가 있는 것을 살지 잠깐 고민했던 기억이 났다. '나중'을 고려해서 GIA 감정서가 있는 것을 선택했는데 글쎄, 수십 수백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영원한 다이아가 내게 소유될 짧은 기간동안 나중을 고려할 일이 있을까 싶어진다. 그나마 다이아의 경우는 국제 기준가가 되는 '라파포트 가격표(108)'가 있지만 유색 보석에는 그도 없다고 하니 보석이 아니라 사람(역사, 사건, 운, 타이밍)을 사는 것과 비슷하다 느껴지기도 한다.  

" 드비어스가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라는 문장을 세상에 던진지 80년이 넘었다. 이제 그 '영원'의 의미가 달라졌다. 누군가에게는 수십억 년의 지질학적 시간이고, 누군가에게는 그 반지와 함께할 삶의 시간이다. 200" 

처음 이야기했던 랩그로운 다이아몬드에 대한 이야기를 책의 4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다이아의 가치 하락에 대한 불안을 드러냈지만 투자 시장에서의 보석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금 대신 보석을 산다'를 읽으며 오해했던 부분이 있다면 고치고, 새롭게 알게 되는 세계가 있으리라 기대되었다. 이런 막연한 불안과 궁금증이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니었던지 강연이나 방송, 인터뷰 등의 자리에서 랩그로운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 떠올렸던 랩그로운과 천연 다이아와의 경쟁은 '상업용 시장(171)'에 국한된 정보였고 '희소 시장'은 이와 분리해서 봐야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상업용 시장이 전체로 대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두고 이제 다이아의 가치는 하락한다/할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일반 소비자에게 가까운 시장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실구매를 고려한다면 흐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172)고 책은 조언한다. 

이 아름답고 한정적인 욕망의 시장을 우리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이 5장에서 나온다. 투자에 있어 자연스레 따라오는 금을 살 것인가, 보석을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249)도 나오고, 고맙게도 그렇다면 과연 보석은 어디서 살 수 있는가를 알려주기도 한다. 예전에 이베이같은 온라인 사이트로 원석을 구매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애정과 열정을 가진 사람의 길에도 " 산지 시장은 낭만적인 직구 현장이 아니라, 프로들이 칼을 품고 마주하는 판에 가깝다. 68"는 경고가 떠오를만큼 사건과 사고와 사기가 많았다. 감별서의 보증에도 허점을 이용한 기망(266)이 있으니 보기엔 재밌지만 뛰어들기엔 두려운 세계였다. 보석을 고를때 피부톤이 웜톤인지 쿨톤인지 따지는 내용도 나오는데 한참 MBTI가 유행할때는 아마 MBTI별 맞춤 보석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 재밌었다. 소장과 투자로써의 보석을 고려하고 있다면 5장 내용을 눈여겨보면 도움이 되겠다. 

보석의 가치를 높이는 것 중 하나로 그 안에 담긴 내력이 주요하게 작용한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보석이 인류사에서 어떻게 그 가치를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3장의 내용이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보석의 내력이 가치를 더한다는 것에 잠시 의문을 품기도 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의 힘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보석에 사랑의 약속이나 인어의 눈물같은 별칭도 붙이고 브랜드에도 왕의 보석상이나 로마의 관능(163)같은 정체성을 내세우는가 보다. 서사와 의미가 이렇게 물질의 가치를 올리기도 하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하는 것을 보니 재미있기도 했다. 어린시절부터 반짝반짝 하는 것들을 홀린듯이 바라보길 좋아했던 까마귀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고,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매력적인 책이었다. 

" 마젤 우 브라하** 79" 

* 다이아 원석 가격 1년새 40% 급락…"인조 다이아 수요 급증 영향" 20230904 금융소비자뉴스 기사
** Mazal u'Bracha 행운과 축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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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 국립국어원 상담실 연구원의 365일 노동기
이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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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는 곧 세상의 이치를 비추는 거울인 것만 같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작동하는 문법과 어휘에 대한 훌륭한 식별 능력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다. 스스로는 그 하나하나의 근거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언어를 구사하지만, 개개인에게 잠재된 언어 구조는 거대하고 정교한 성과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중략... 자세히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사람들의 언어 사용 구조는 당사자도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대단한 짜임새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45" 

최근 신발을 사러 한 매장에 들렀을 때 재밌는 표현을 들었다. 사이즈를 물어보니 직원이 '해당 제품 사이즈는 5단위가 아닌 10단위로 전개가 된다'고 답해온 것이다. 사이즈의 전개라니 문학적이다. 그런데 이 낯선 표현은 맞는 것일까 틀린 것일까?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고객과의 괜한 갈등 상황을 피하기 위해 생각지도 못한 쿠션어와 존대(존칭의 인플레이션198)를 만들어 사용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긴 했지만, 사이즈의 전개라는 표현은 간만에 신선하게 느껴졌다. 저자 역시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107)라는 질문을 받고 문법적으로는 교정이 필요한 이 완곡한 의문형 표현이 실생활에서는 어떻게 쓰이고 받아들여지는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매번 새로운 표현이 나오고, 새로운 말의 뜻이 암묵적으로 이해되어 퍼져나가는 것을 보니 언어가 살아있다는 것 말고는 다른 감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가장 먼저 놀래킨 것이 '돼지고기미나리찜'이다. 처음 듣는 메뉴 이름이기도 한데, 이것이 방송 자막일 때와 교재에 쓰일 때(18)에 따라 정확한 답변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인가? 돼지고기미나리찜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듯이 낯선 단어들이 튀어나온다. 생세일(24)이라니 뭘 판다는 건 줄 알았다. 여러분이 알고리즘이라고 쓰는 단어가 사실은 알고리듬(31)으로 발음되어야 하고 이는 혼용 가능합니다,라는 말 없이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알고리듬은 또 어떤가. 재밌는 점은 국립국어원에서 매일 맞춤법 상담을 하며 연구해도 아밀라아제가 아밀레이스(47)가 됐다는 사실은 낯설다는 것이다. 읽다보면 이게 그렇게 중요한가 싶은 아주 작은 차이 띄어쓰기 한 번, ㅅ이 들어가느냐 마냐의(160) 일, 미묘한 의미 차이같은 것들이 아주 맹렬한 토론 주제가 되는데 듣다보면 정말 이렇게 중요한 일이 맞구나 싶어진다. 

" 언어의 요소가 문장이나 글 전체의 의미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확인하기보다, 더 정확한 표현을 찾아 교정하는 일에 익숙해진 탓이겠지. 우리는 일종의 기술자가 된 것 같다. 그런데 기술이 지나치게 정교해지면, 오히려 시야를 좁히기도 한다. 92" 

짜장면(67)을 짜장면이라 부르지 못하고 자장면이라 불러야 했던 때가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를려면야 자장면이든 짜장면이든 부를 수 있지만 짜장면이 틀렸다고 옳고 그름이 퍼져나가던 때가 있었다. 그때 닭도리탕도 닭볶음탕이 되어서 한동안 여러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도 하고 아직도 알쏭달쏭하게 혼용되고 있다. 그런데 로브스터가 랍스터도 된다(132)는 사실은 왜 아직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일까! 상대적으로 덜 소비되기 때문에 알려질 기회도 적었던 것일까? 이 단어들이 논의가 되고 논란이 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품어지는 과정을 지켜봤던 것을 떠올려보니 역사의 산증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새삼 재밌었다. 책을 읽다보니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은 '어머니, 민수를 1시까지 어머니 댁에 데려다 드릴게요(84)'의 소제목으로 시작해서 본문의 내용에는 '어머니, 제가 민성이를 어머니 댁에 1시까지 데려다줄게요/드릴게요.(85)'로 되어 있는 것이다. 세상에 별 걸 다 전화를 해서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으니 덩달아 갑자기 민수가 왜 민성이로 바뀌었는지 물어보고 싶어졌다. 

이처럼 '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를 읽고 갑자기 '우리말 365'에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생기는 것 같고 전화를 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들 독자들이 있을텐데, 책의 중간중간 무례한 상담자들이나 예상 외의 질문을 하는 독특한 상담자들, 화장실 문제처럼 어찌할 수 없는 생리적 욕구 앞에서도 순번부터 고려해야 하는 솔직히 열악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상담 환경 등도 등장하며 그런 호기심을 자제하도록 해준다. 맞춤법에 대한 정보만 담은 내용이 아니라 노동 환경에 대해서도 함께 접할 수 있어 읽다보면 고생하십니다,하고 절로 위로를 보내게 된다. 저자가 직접 조언한 것 중 가장 유용한 '우리말 365' 이용팁은 하루에 다섯 개까지 질문할 수 있다(158)는 것이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팁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갖추고 통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핸드폰 너머에 사람이 있으니까.  

" 문장은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며, 우리가 어디에 시선을 두고 어떤 길로 뜻을 전하느냐에 따라 그 움직임의 방향도 완전히 달라진다. '더 잘 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더 분명하게 전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2" 

종종 어떤 사람이 좋고 싫은지 꼽으라는 질문에 맞춤법 잘 못 쓰는 사람이 싫다고 밝히는 사람들이 있다. '싫다'고 할 수 있는 그들의 과감함이 부럽고, 때로 무섭고, 종종 서운하고, 가끔 공감된다. 잘못된 단어나 문법 없이 글을 잘 쓰면야 참 좋겠지만 솔직히 쉽지 않다. 일부러 무시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잘 쓰기를 추구는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상심하지 않을 정도의 마음을 가지는 동안 가장 많이 배운 것은 자신의 부족함이었다. '낉여오다(173)'는 유행어나 '보리꼬리'같은 틀린 단어가 불쾌함 대신 유쾌함을 주는 것처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얼마나 이해하냐에 따라 잘못 쓴 단어나 문장도 정 떨어지는 무식함이 아니라 실수나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어차피 모두가 바른 문장을 쓸 수는 없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실수를 할 텐데 그때마다 창피를 주고 그거 몰라도 잘사네 못사네 싸울 수도 없다. 그러니 웃음과 이해로 품고 살며시 고쳐나갈 수 밖에. '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를 읽은 기념으로 격조했던 친구에게 "너 나 안 본 지 두 달 다 돼 감"(113) 안부를 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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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 육아 번역기
임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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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의 영역은 낯설다. 절대적으로 나와 거리가 멀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환경과 자신의 아이를 육아한다는 것은 천지차이일 것이다. '상상하지 못한 다른 세계(9)'는 나와 타인의 삶이 만나는 모든 순간 부딪힌다. 그래서 갈등도 있고 예상치 못한 즐거움도 있겠지.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세계를 엿보고 싶어서 책을 읽었다. 얼마나 치열하게 다투고 따뜻하게 이해하려 했을까 읽기 전부터 기대되어 웃음이 나왔다. 

이 세계는 두 개의 문화가 서로 섞여들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뭐가 더 낫다 아니다를 따질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성적으로. 하지만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익숙한 것에 기울지도 모른다. 책이 한국에서의 생활에 완벽에 대한 추구, 타인에 대한 의식, 외모에 대한 압박 이야기로 시작할 때, 반박하고 싶어지곤 했다. 한국스럽게 사는 일에 아무 비판도 불만도 없이 절여져있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맞아, 우리 사회의 병폐야.'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하지만 외국이라고 해서 더 낫기만 한 것은 아닐텐데? 갈등이 일었다. " 과연 우리는 자유롭게 육아 철학을 '선택'할 수 있을까. 아니면 결국 각자의 성장 배경과 문화에 묶여 있는 것일까. 당연하고 옳다고 믿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각자의 문화 안에서만 통용되는 기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우리 각각의 방식을 보편적인 기준이라 착각한다. 나 역시 그렇다. 107" 이와 비슷한 고민이 이 가족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조금 마음이 풀어졌다. 

" 살림에서 깔끔함과 정리에 대한 서로 다른 기준은 좀체 타협을 보기 쉽지 않다. 67"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한영 육아 번역기'라기보다는 영국식 육아 적용기에 더 가깝지 않았나 싶다. 기존의 생애 과정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영국의 생활과 문화에서 느낀 장점과 새로움을 긍정적으로 느끼고 많이 받아들인 티가 났다. '화이트 인테리어(191)'에 대해서 말할 때도 그게 유행이라서, 되팔기좋으라고가 아니라 확실히 집이 밝고 넓어보이고 더 깨끗해보이기 때문이라는 장점을 말하고 싶었다. 옅은 녹색, 연분홍색, 캐릭터벽지, 포인트벽지 많은 디자인을 거쳐왔지만 크림과 흰색은 가장 질리지 않고 안정감을 주는 선택이었다. 육아서를 읽고선 왜 인테리어 한 마디에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이야기를 하냐고 할 수 있지만, 읽는 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말이었다. 획일적이고 지나치게 기준을 세워둔 듯해 답답하게 여겨졌을지 모르지만, 고심해서 효율이 가장 좋은 길을 요령껏 가려는 노력이 그 안에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흙에서 뒹굴고 놀아도 좋고, 유아용 세제를 구분해서 쓰지 않아도 좋다. 무균의 상태로 배양하듯 자라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집안에서 신발을 신는 문화에서 아이가 기어다니는 것(83)은 넘기 힘든 장벽이었다. 이것만큼은 '영국식 돌봄'이 유연하고 하는 수식도 아무 소용없이 양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했다. 밖에서는 바닥도 굴러다니고 강아지랑 뒹굴고 놀 수 있지, 하지만 신발을 신고 다니는 집안에선? 안된다. 

" 일터로 향하는 엄마들은 매일 아이들과 작은 이별을 한다.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하더라도 이 두 세계를 넘나드는 데는 끝없는 고민이 따른다. 하지만 내가 나의 엄마를 향해 가졌던 생각을 떠올려보면 일을 계속 할 이유가 선명해진다. 나도 엄마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날 위해 너무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엄마의 삶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으니까. 95" 

K 할머니 육아에 대해 예찬하는 저자이면서 자신의 삶과 가정의 균형을 조절하고 있는 여성으로서 황혼육아, 돌봄 노동을 부모 세대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다. 산후우울증이 여성의 전유물이 아님(154)을 이야기하면서 그 결말이 친정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156)으로 맺어진 것은 현실적이면서도 남자 화장실에 기저귀 갈이대가 없는 현실에 대해 말할 때 순간적으로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쉽긴 할텐데 싶었다. 그리고 곧 자신이 무지했음을 깨달았다. "육아하는 아빠들이 아이와 둘이 외출을 했을 땐 어떻게 해야 하나, 혹은 싱글 대디라면 매번 이런 상황을 마주하진 않을까. 44" 사실 영국 펍에 아기 의자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썩 괜찮게 다가오진 않았다. 영국의 펍은 그 의미나 기능이 다른 부분도 있겠지만, 한국식으로 생각하기에 술집에 아기를 데리고 가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개인의 판단에 맡길 일이지만 우리 음주 문화를 생각했을때 그건 그리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마저도 육아를 하면서 잠깐 압박감을 해소하고 저녁시간의 여유를 즐기고픈 마음을 몰라주는 고리타분한 생각일 수 있다. 현실을 몰라서 하는 말일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현실을 담은 조언을 남겨주길 바란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내밀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져있어 그 점이 재밌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게 읽었다. 중반이 지나면서는 연애와 가족 이야기의 비중도 높아지면서 전체적으로 이들이 어떻게 가족이 되었고, 되어갔는가를 관람하듯이 읽었다. 전문적인 비교나 분석은 없었지만 저자가 굉장히 유연하고 열린 태도로 한국과 영국의 생활을 받아들이고 반영하여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결혼과 육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영 육아 번역기'라는 제목이 재미있고 의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와 엮인 해프닝은 씁쓸했다. 소중한 누군가의 책에도 어쩔 수 없는 사건이 가끔은 끼어드는 법이다. 생활기반과 문화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조금씩 닮은 넷이 되고,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행복한 과정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지지를 얻으며 읽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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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스토리보드북
박찬욱 지음, 이윤호 그림 / 을유문화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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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과 만나 근처 서점에 들렀다가 어쩔수가없다 스토리보드북이 매대에 놓여진 것를 보고 반가웠다. 솔직하자면 지인에게 자랑하고픈 마음이 들어 괜히 책을 들어 이리저리 들춰보고 있었는데 몇걸음 떨어진 서가에서 나타난 지인이 나보다도 먼저 반갑다는 듯 나도 방금 그거 보고 있었어 하고는 사실 헤어질 결심을 더 좋아하긴 하는데 어쩔수가없다 스토리보드북이 새로 나온 것을 보니 스크린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의 디테일을 다시 살펴보고 싶어 한번 쭉 넘겨보고 온 참이라고 한다. 그 기세에 눌려 나 이 책 있다고 자랑하려다 삼키고 그래 마침 나도 확인하고픈 요소들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이상하지, 책상 위에 올려놓은 내 책보다 서점 매대 위에 올려진 책은 어째서 더 탐이 나는 것일까. 애착은 내 책에 가기는한데 매대 위의 책은 갑작스러운 욕망을 자극한다. 집에서 확인해보면 될 것을 당장이라도 들춰 방금 떠오른 궁금증을 해결해버리고 싶어진다. 얼마든지 시간을 들여 편안히 읽어볼 수도 있는데 그 자리에 선 채로 살짝 틈만 내어 궁금한 페이지의 내용을 재빠르게 확인하고 덮어두고 싶다. 지금 당장 읽고싶다. 그 순간 경험한 욕망의 자극, '어쩔수가없다'와 잘 어울렸다. 결국 이 영화는 사람의 욕망을 말하고 있으니까. 그때 확인하고 싶었던 장면은 치위생사로 일하던 미리와 환자로 온 지인이 만나는 부분이었다. 

스토리보드북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의 장점 중 하나는 영화적 기법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카메라가 어떻게 이동하는지, 그 순간 어떤 장면을 만들고 싶었는지, 그걸 무엇이라 지칭하는지. 이를테면 만수가 정원에서 새벽 동안 삽질을 하는 장면에 " 1) 매직아워. 만수, 쉼 없이 삽질하다가- 멈추고 하품. 카메라 전진- 만수 프레임아웃시키면서 틸트업- 별빛이 스러진 하늘, 희붐하다. 디졸브- (358)" 이 설명이 마치 화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컷 그림과 함께 디테일을 잡아 준다. 무엇을 봐야하는지, 왜 찍었는지. 이 영화를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참고서처럼 친절하다. 

순서, 장소, 시간, 내용, 그림, 설명까지 스토리보드북 안의 구성은 영화의 모든 장면들과 다름없이 세세하다. 얼마나 세세한지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장면마저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과 목소리로 다시 재생되는 듯하다. 다 이해하지 못하고 넘겼던 장면들도 종이 위에서는 어느 하나 예사롭지 않다. 특히 손예진 배우가 분한 미리라는 인물을 볼수록 스스로가 무의식 중에 미리의 비중을 작게 축소했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놓쳤던 부분이 많았다. '설마'하고 생각했던 지점들이 하나씩 충격을 주며 다시 끼워맞춰지는 과정을 겪고 나니 인물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스크린 위에서 찰나의 장면으로 흩어진 것을 종이 위에서 다시 더듬어본다. 이때 느꼈던 묘한 위화감, 의심, 질문이 의도되었던 것인지 혹은 그를 위해 안배된 것들을 놓쳤던 것인지, 지나친 억측인지 어떤 장면들은 몇번이고 돌아보았다. 그렇게 보고서도, 지인과 한참을 이야기하고서도 '아, 결국은 잘 모르겠다'고 털어내고만 부분들도 있지만 지난 2025년의 기대작이자 문제작이었던 '어쩔수가없다'를 덕분에 끝까지 곱씹어 볼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천천히 감상을 정리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만한 즐거움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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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무시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법
유상우 지음 / 넥서스BOOKS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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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으로 보면 거절은 단순한 선택처럼 보인다. '할 수 있다' 혹은 '어렵다'를 말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거절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마음속에서는 여러 감정과 생각이 동시에 밀려오고, 그 사이에서 우리는 자주 자기 뜻과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15" 

길을 걸으면 무슨 판넬에 스티커를 붙여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눈을 빛내며 따라오거나, 멀리서부터 짝을 이룬 사람들이 마스크를 쓴 얼굴에도 복이 많다며 말을 걸어오는 이른바 만만한 인상이라 세상을 살아오면서 피곤한 일들이 없지 않았다. 자신의 기분이나 성별이 태도가 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언제는 정말 간절히 내가 마동석같은 체격의 남자였다면 얼마나 세상 편했을까 바랐던 적도 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만만해보이는 외면에 내면까지 갖춘 물렁한 사람이었고 이따금 마주하게 되는 '덜 교육된 사람들' 앞에서 정신적 고통을 받을 때면 그 고통이 신체적 고통으로까지 번지지 않도록 피하는 방법을 골몰하는 쪽이 더 익숙하고 필요했다. 

'아, 저 잠깐 올리브영 좀 들렀다가 가려구요.' 라는 말을 해본 적 있을까, 혹은 이 말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요즘은 제의, 부탁에 대한 거절을 자신에 대한 거절로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아 거절이 무섭다. 아주 사소한 거절이나 거부의 표현에도 불같이 화를 내고 폭력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종종 뉴스에 나오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어려운 거절, 저 사람이 이 거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어 발전된 돌려말하는 기술을 두고 쿠션어라는 표현도 생겼다. 그냥 솔직히 말하면 되지 왜 싫다는 말을 못해서 답답하게 하냐는 사람도 분명 있을테지만 거절을 말하기 힘든 사람도 최선을 다해 당신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방식을 '올리브영' 같은 쿠션어로 만들어낸 것이다.  

" 거절은 누군가를 밀어내는 행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관계를 오래, 그리고 건강하게 지켜 내기 위한 중요한 기술이다. 19" 

하지만 언제까지 에둘러 말하는 방법만으로 답답해지는 속을 풀지도 못하고 쌓아가면서 살 수는 없다. 그렇기때문에 '나를 무시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법'이 좀 더 성숙하게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이 궁금하고, 필요한 사람을 위한 도움이 되어 줄 것 같아서 읽어보게 되었다. 

나는 왜 거절이 어려운가를 생각했을때 떠올랐던 이유들을 책에서도 세가지로 나눠 제시하고 있었다. '첫째, 관계가 끊어질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둘째, 나쁜 사람으로 보일까 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셋째, 갈등을 피하려는 성향 때문이다. 16' 두서없이 생각했던 이유들이 차례로 정리된 것을 보고 내면에 가라앉아 있던 약한 면과 욕망이 드러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 "나는 나를 존중하는가?" 43" 책을 읽다 찌르듯이 다가온 질문과 함께 사실은 그리 필요하지도 않은 상대의 호감을 얻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압박하고 괴롭게 만들었던 적은 없었을까 되짚어보았다.  

" 자존감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기록으로 남지 않아도, 나 자신에게는 분명히 축적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를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존감은 멀리 있는 목표가 아니다. 이미 오늘 아침,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에서 조용히 시작된다. 226" 

이 자신에 대한 질문은 4장에서 답으로 돌아온다. '나를 무시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법'에서는 남을 똑같이 무시해주는 방법을 말하기 전에 나를 존중하는 것에 대해 몇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스스로가 단단하지 않으면 그만큼 타인에 의해 영향을 받고 휘둘리기 쉽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니 나를 무시하는 남에게 대응하기 전에 나를 무시하는 나부터 개선하도록 조언한다.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보기, 나를 칭찬하기, 피곤해도 밥을 잘 챙겨먹기, 환기를 해보기 같은 일상 속의 작은 실천을 통해 쌓이는 변화를 어렵지 않게 제안해준다.   

사실 책을 펼치면 이렇게 못된 사람한테는 저렇게 쏴주고, 이렇게 나쁜 사람한테는 저렇게 들이대버려라 하는 맞춤형 사이다식 대응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남에게 어떻게 하기 이전에 자신부터 바라보라는 조언이 먼저 나와 이제부터 세상과 싸우는거야, 하고 화부터 장전했던 마음이 한풀 가라앉았다. 물론 일단 나보다는 저 사람 왜 저러나가 궁금한 사람들은 2장부터 읽는 것을 추천한다. 솔직히 대부분 나 자신에 대한 반성과 땅굴을 충분히 파봤던 사람들이 이 책을 집어들었을테니 일단 2장부터 읽기(2-3-1-4)를 추천한다. 심지어 집착형(93)의 내용을 읽으며 혹시 내가 집착과 통제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점검해보기도 했으니 이런 성향에게 1장에서 마주하는 자신에 대한 점검은 투지를 살짝 꺾는 일이 되니 나중에 읽어도 좋을 듯 하다.  

가장 중요한 실전 활용편은 3장에 있는데, 그래서 3장의 내용이 가장 흥미진진했다. 대응하기보다 질문하는 편(137)이 더 강력한 전략이 된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똑같이 무례해지거나 불쾌한 기분을 드러내지 않고도 상대방이 생각없이 가볍게 한 말을 되돌아보도록 만들면서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라 현명하고 성숙한 태도로 여겨졌다. 또하나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도 관계에서 피로를 가져온다고 짚어준 점(친밀성 피로 151)도 의미있었다.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면서 함께 살때보다 더 사이가 좋아졌다는 얘기를 가끔 본 적이 있었다. 오랜시간 함께 살아온 가족 사이에서도 이 거리 두기가 필요할 때가 있는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더더욱 이 거리감을 잘 유지해야 함을 느꼈다.  

남탓을 해보려고 기세등등하게 책을 들었다가 사실은 남보다 내탓을 더 많이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나는 왜 거절이 어려운가, 왜 나에게 무례한 사람에게 단호하게 대처하기 어려웠나를 먼저 생각하고 건강한 관계맺기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주는 도움이 되었다. 책의 곳곳에 동영상 자료를 볼 수 있는 큐알코드가 있어 좀 더 궁금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리브영에 들러야 했던 사람이라면, 누워서 잠들기 전 그날 들은 누군가의 배려없는 말에 이렇게 대답해줄걸 이불을 걷어차 본 사람이라면, 거절을 하기 어려워 빠져나오고 싶은 단톡방에 영원히 갇혀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의 실수에는 위로를 하면서 자신의 실수에는 자책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를 무시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법'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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