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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스펙터클, 민주주의 - 새로운 광장을 위한 사회학
김정환 지음 / 창비 / 2025년 6월
평점 :
요즘같은 때 무슨 계엄이야, 하는 말이 곧잘 들려왔다. 교과서나 영화같은 미디어에서 보던 계엄을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 MZ세대들이 직접 경험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물론 한쪽에서는 그들이 그런 짓을 저지르리라는 예상을 했던 근거도 있었지만, 더욱이 극우화가 가속화 되어가는 국제 정세를 보면 그만큼 무도한 자들이 또 나오지 않으리란 법도 없지만. 어느 한가로운 밤 텔레비전 아무 프로그램이나 틀어둔 화면 아래 계엄을 선포했다는 속보를 발견하는 당혹과 급격히 돌아가는 상황이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새벽은 여전히 충격을 준다.
"마치 극장에서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이 그러하듯 공통의 스펙터클을 바라보면서 역사에 대한 특정한 감각을 배양한다. 119"는 내용처럼 123 이전까지의 계엄과 독재같은 단어들은 20세기와 21세기를 나누는 세기적인, 마치 영상물을 보듯 혹은 인쇄된 단어로 존재하는 차원의, 바다와 국경을 넘어 구역이 나눠진,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23의 현장은 그 거리감이 순식간에 시간과 차원, 구역을 좁혀 실제가 되어 중계되었다. 속보와 갖은 중계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면서 느껴지는 혼란과 분노, 어지러움은 장갑차 앞을 홀로 막아선 한 시민의 뒷모습과 함께 인간이 '언제든 두부처럼 썰릴 수 있다는 폭력 앞에 놓여진(113)' 과거를 소환했다.
처음엔 어려울까봐 책을 앞에 두고 고민했다면 읽는 동안에는 마주하기가 어려워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다. 초반 도입부를 정립해나가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광주의 참상을 반복적으로 게시하고 있는 텍스트 사이에서 참담, 분노, 슬픔의 감각을 넘어선 실제적 고통을 느끼는 경험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경로로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증거 자료와 영상물, 창작물 등을 접해왔지만 '몸, 스펙터클, 민주주의'에서 민의 몸으로 다시금 증언된 과거의 폭력 앞에서 현기증과도 같은 구토감이 밀려왔다. 더 솔직하자면 어떤 증언들은 더 읽어내지 못했다.
책의 인상적이었던 내용 중 하나는 과거에는 정보를 외부로부터 고립시켜 그들의 입맛대로 이용해왔다면 123의 순간들은 SNS로 실시간 공유되어 민의 연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24년 12월 21일 남태령 고개에서 고립된 농민들의 곁으로 2030 여성들이 향했던 일명 '남태령의 기적'에서 폭력과 강제 연행없이 행진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경험은 처음이었다는 농민들의 고백이 있었다. 과거의 진압이 고립 안에서 대상을 향한 의도된 '전시(66)'로 은밀히 폭력을 사용해왔던 반면, 수백의 지지와 수천의 도움, 수만의 관심 아래 정보의 흐름이 있었다는 점이다.
123 이후의 시간동안 거리로 나온 시민들과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이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한 시민들의 움직임은 " 6월항쟁에서도 물품과 식량의 공유는 결집한 민의 활력을 북돋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명동성당 인근에 위치한 계성여고의 학생들은 도시락을 걷어서 농성단으로 가져왔고, 근처의 빌딩에서는 빵, 우유, 속옷, 현금 등을 전해 주었다. 286" 는 과거와 일치한다. " 죽음을 목격한 민이 슬픔과 공포의 정서 속에서 몸이 굳고 위축되었다면, 거리로 나와 한곳으로 향해 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함께 동원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민은 희망과 확신, 환희, 등 기쁨의 정서 속에서 활동력이 증대된다. 259" 이는 음악과 응원봉이 함께한 거리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들과 같다.
지금의 '정보'는 이처럼 중요한 구심점이 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혐오와 갈등을 퍼뜨려 세대와 성별, 외부(미중)로 시선 돌리기에도 이용되고 있다. 80년대의 시선 돌리기가 컬러화면의 등장과 에로티시즘(125)으로 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방법을 사용했다면 2000년대의 시선 돌리기는 시각보다 더 원초적인 자극을 도구로 한다. 이 갈등은 대학이라는 공간의 변질로도 이어진다. MB정부에서 키워낸 일베키즈들에게 과거의 정보와 정치는 조롱과 굴절된 분노를 표출할 재미, 자극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저항의 공간을 대학에서 거리와 인터넷(128)으로 변화 시키는 역할도 한다.
다른 하나는 토머스 제퍼슨의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63)'는 말처럼 과거부터 민주주의가 위기의 순간에 다시 회복되는 과정에서 항상 민의 죽음, 희생이 그 계기가 되어 왔다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폭군이나 독재자가 아니라 그 반대편에 선 이들, 특히 수많은 민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흡수하며 무럭무럭 자랐다. 64" 여전히 탄핵된 대통령을 부모로 부르는 집단과 이 균열을 이용해 갈등과 혐오를 조장하는 세력이 존재하지만, 계속될 재판을 통해 수감번호 3617이 그 댓가를 치룰 차례가 왔음을 보여주길 희망한다.
책속에서 과거 광주의 자료를 마주하며 민주주의를 빚진 부채감이 송곳처럼 불거졌다. 그러나 지역에 대한 차별과 비하, 조롱이 이어지는 무도함은 여전하다. 불균형과 외면, 기만은 어디에서 오는가. 갈등과 혐오를 경계해야 함을 말하면서도 민주주의를 기만하는 자들 역시 그 볕과 그늘 아래에 있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지도록 마음이 좁아졌음을 느꼈다. 책을 읽는 동안 카페에 간 적이 있는데 그 공간 안에 이어폰 없이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보던 영상의 내용은 123 주체자인 수감번호 3617을 옹호하는 내용이었다. 한 공간 안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각자의 매개체로 세상과 사건을 돌아보고 있는 동안 저자가 던진 질문을 다시 찾아보았다.
" 민주주의를 마지막 순간에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도록 미리미리 고치고 수선해나갈 수는 없는 것인가? 박근혜와 윤석열을 탄핵시키는 것이 아니라, 뽑지 않을 수는 없던 것일까? 329" 그 카페 안에서의 시간은 질문에 대한 답이 됨과 동시에, 그와 한 공간에 있는 불편함과 블랙유머나 다름 없는 아이러니를 곱씹는 동안 "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지지하는, 민주시민이라 생각해왔던 나는 과연 어떤 민주주의를 만들어온 어떤 종류의 민이었던가? 그런 나는 과연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다른 민주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53" 하는 물음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되어 주었다. 논문에 뿌리를 둔 내용이라 다소 읽기 까다로울지 모르나 123의 시간을 함께 보내온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