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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노래 - 나무는 말하고 그녀는 듣는다
진재운 지음 / 생각의힘 / 2026년 9월
평점 :
" "내가 저 길을 다시는 걷지 못하겠구나."
매일 오가던 길이었다. 시간이 없다고 서둘렀고, 신호가 바뀌기 전에 건너려고 뛰기도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아 주변을 제대로 바라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다시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자 평범했던 길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삶이 겨우 이것이었구나 싶었어요. 무엇을 하겠다고 그렇게 허둥대며 살았을까.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주 조용해졌어요."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 오히려 세상의 소음이 멎었다. 극장도, 건물도, 연구도,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멀어졌다. 자신이 이루었다고 믿었던 것들이 죽음 앞에서 한꺼번에 힘을 잃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 뜻밖의 걱정 하나가 남았다. 35"
"인간이 나무를 구하는가, 나무가 인간을 구하는가 251"
여기에 마치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있다. 사람의 마음으로 보면 다 담아내기 어려운 이 사람의 이야기는, 잠시 자신의 존재를 내려놓고 그보다 더 넓은 곳으로- 나와 바깥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어나가야 조금씩 들리는 듯 하다. 어쩌면 당신은 이 이야기를 끝까지 허풍과 거짓이 섞인 환상쯤으로 치부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꿈결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책 속에 담긴 니카라과 숲의 넓고 푸른 풍경만은 진실로 전해질 것이다. 바로 그 숲의 풍경 앞에서 시작해보면 좋겠다. 그게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면 좋겠다. 조금 이상하고,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부분까지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결국 감동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 그녀는 숲을 소유하는 사람이라기보다 그곳에 잠시 그림을 그리는 사람처럼 자신을 설명했다. ...중략... 새와 곤충, 바람과 시간이 함께 그리는 그림이었다. 그녀가 떠나면 다른 사람이 그 땅을 돌보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은 나무를 더 심을 수도 있고, 길을 바꿀 수도 있다. 그녀가 그린 그림 위에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질 수도 있다. 204"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지만, 그에 대한 소개가 굉장히 독특해서 관심이 간 것도 있었다. 황실의 후손이라는 혈통, 그를 두고 '공주님'이라 부르는 것이 사실 마땅한 호칭이라는 점도 재밌고, 에이즈의 원인을 규명한 생물학자였다는 점도 놀라웠다. 그런데 그의 삶 6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시작한 나무 심기가 가장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시작된 새로운 삶과 새로운 세상의 첫 시작이 되었다고 하니 여러 생각이 오간다. 거기에 온전히 자신이 일구어낸 숲에 대해서도, 성공과 배경마저도 자신의 것은 없다(200, 204)며 잘라낸다. 그저 자신의 할 일을 계속해나가는 것, 오늘의 묘목을 심어나갈 것(237)을 말한다. 벗어나고 내려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 사람들은 남은 시간을 대개 해로 계산한다. 그녀는 달로 셌다. 한 해라는 말에는 아직 많은 날이 남은 듯하지만, 보름달은 한 달에 한 번뿐이다. 한 번 놓치면 다음 달까지 기다려야 한다. 104"
사실 몇년 전부터 가끔 평범하게 보내는 날이 문득 너무나 좋을때면 나에게 남은 이 보통의 하루가 몇 번이나 될까 헤아려보게 되었다.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다가, 길에 쌓인 낙엽을 밟다가, 부드럽게 뭉그러지는 햇빛을 쬐다가도 갑자기 찾아오는 그 순간을, 어릴 때는 세어볼 생각을 못했는데 언제부턴가 계절의 한 가운데에 있다고 느껴질 때면 이 계절을 이렇게 온전히 보낼 수 있는 때가 얼마나 남았을까 싶어졌다. 더우면 덥다고 불평하며, 황사나, 추위, 혹은 나뭇잎의 푸르름과 단풍, 떨어지는 꽃잎과 눈 사이를 걷고, 햇빛이 부서지는 것을 보고, 계절의 냄새를 맡는 일이 당연한 듯 하면서도 하나하나가 아쉬워졌다. 그래서 시간을 달로 셈하는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보고 느끼고 해야하는 것들이 있다. 마치 다시 없을 것처럼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의 삶이 그렇다.
" 그러고 보니 나는 실제로 닥치지도 않은 너무 많은 일을 미리 두려워하며 살아왔다. 죽음이 두렵다는 것과 잃을 것을 미리 두려워하는 일은 조금 다르다. 죽음은 한 번 오지만,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은 살아 있는 동안 여러 번 찾아온다. 재산과 이름, 사랑하는 사람, 건강과 젊음, 아직 보지 못한 미래를 잃을까 두려워하며 오늘 누릴 수 있는 자유까지 미리 내어 주기도 한다. 110"
백 그루의 나무를 심어도 스무 그루밖에 남지 않(63)더라도 꾸준히 나무를 심는 일을 계속해나간 그 굳은 심지에는 존경이라는 말 외에 다른 표현이 필요치 않았다. 열에 두번 밖에 완성되지 않더라도, 때로 그동안 해온 것들이 모두 망가지고 사라진대도, 다른 누가 방해를 해도 그는 자신이 이루고자 한 바를 계속해나가는 묵묵함, 한결같은 의지가 결국 목표를 향한 길을 낸다. 나무가 숲이 되고, 숲은 자연이 되어 그 안에서 다시 생명이 살아가게 되는 변화가 찾아온다. 가끔 우리는 목표로 삼은 일을 향해 나아가다 포기하게 된다. 매일 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하루 빼먹어서, 실력이 곧잘 늘지 않아서,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같은 이유로 실패했다고 여기고 이어가길 멈춘다. '나무의 노래'를 통해 멈추지 않고 계속해나갈 이유를 본다. 매번 첫 발을 떼는 것 같아도 똑바로 걷지 못했더라도 잠시 멈췄더라도, 다음 발을 다시 떼기만 한다면 결국 뭔가를 이루는구나, 그게 멈추고 포기할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 한 그루의 나무가 살아나면 그 주변에 또 다른 삶의 자리가 생겼다. 다른 나무가 함께 자라고, 새와 곤충이 깃들며, 그늘 아래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225"
이상한 일이다. 나무와 대화를 한다는 말, 곰에게 쓴 편지, 환상같은 사건들은 여전히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기인같기도, 괴짜같기도 한데 그가 해온 일들, 땅을 사서 그 땅에 그저 나무를 심어 두었다는 말은 어쩐지 눈물이 난다. 그가 샀다는 니카라과의 땅(48-49)을 그저 사진으로 보기만 했는데도 마치 그 곳이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희망이자 쉼터로 느껴졌다.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나누는 이의 숭고함, 자연의 경이로운 생명력과 회복력에 대한 경탄이 어우러져 감동을 받았는데 이와 비슷한 감동을 전에도 느낀 적이 생각해보니 <나무를 심는 사람>*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수수하고 다채로운 색감의 그림과 함께 되살아나는 자연의 힘이 담긴 내용에 크게 감동을 받았었다. '나무의 노래'를 인상적으로 읽은 독자라면 <나무를 심는 사람>도 함께 접해보면 좋을 것이다.
꿈같은 이야기를 환상처럼 하는 것을 보며 열심히 찍어놓은 사진을 보지 않고서는 소설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거대한 나무 앞에서 자신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72)고 했는데, 다 이해하지도 따하지도 못할 상대 앞에서 솟구치는 의심과 의문을 스스로 무너뜨려야 하는 동안 비슷한 느낌을 곱씹어야 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라는 명언을 실천하는 삶이라니. 생의 가치를 되짚어보게 만드는 삶에 대한 긍정, 자연을 향한 새로운 감각과 영감을 전해주는 책이다. 머리 속을 비우고 마음을 채우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책을 읽으며 중간중간 짧은 글이 손글씨로 담겨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책의 마지막 부분에 글과 삽화를 함께 담아놓은 부록(267)을 실어놓은 것이 이 책의 백미였다. 이 점도 놓치지 않기를!
*<나무를 심는 사람> 동명의 소설(장 지오노 1953)과 애니메이션 작품(프레데리크 백 1987)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 애니메이션 작업을 한 감독 프레데리크 백 역시 일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은 환경운동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