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스펙터클, 민주주의 - 새로운 광장을 위한 사회학
김정환 지음 / 창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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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같은 때 무슨 계엄이야, 하는 말이 곧잘 들려왔다. 교과서나 영화같은 미디어에서 보던 계엄을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 MZ세대들이 직접 경험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물론 한쪽에서는 그들이 그런 짓을 저지르리라는 예상을 했던 근거도 있었지만, 더욱이 극우화가 가속화 되어가는 국제 정세를 보면 그만큼 무도한 자들이 또 나오지 않으리란 법도 없지만. 어느 한가로운 밤 텔레비전 아무 프로그램이나 틀어둔 화면 아래 계엄을 선포했다는 속보를 발견하는 당혹과 급격히 돌아가는 상황이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새벽은 여전히 충격을 준다.  

 "마치 극장에서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이 그러하듯 공통의 스펙터클을 바라보면서 역사에 대한 특정한 감각을 배양한다. 119"는 내용처럼 123 이전까지의 계엄과 독재같은 단어들은 20세기와 21세기를 나누는 세기적인, 마치 영상물을 보듯 혹은 인쇄된 단어로 존재하는 차원의, 바다와 국경을 넘어 구역이 나눠진,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23의 현장은 그 거리감이 순식간에 시간과 차원, 구역을 좁혀 실제가 되어 중계되었다. 속보와 갖은 중계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면서 느껴지는 혼란과 분노, 어지러움은 장갑차 앞을 홀로 막아선 한 시민의 뒷모습과 함께 인간이 '언제든 두부처럼 썰릴 수 있다는 폭력 앞에 놓여진(113)' 과거를 소환했다. 

 처음엔 어려울까봐 책을 앞에 두고 고민했다면 읽는 동안에는 마주하기가 어려워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다. 초반 도입부를 정립해나가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광주의 참상을 반복적으로 게시하고 있는 텍스트 사이에서 참담, 분노, 슬픔의 감각을 넘어선 실제적 고통을 느끼는 경험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경로로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증거 자료와 영상물, 창작물 등을 접해왔지만 '몸, 스펙터클, 민주주의'에서 민의 몸으로 다시금 증언된 과거의 폭력 앞에서 현기증과도 같은 구토감이 밀려왔다. 더 솔직하자면 어떤 증언들은 더 읽어내지 못했다. 

 책의 인상적이었던 내용 중 하나는 과거에는 정보를 외부로부터 고립시켜 그들의 입맛대로 이용해왔다면 123의 순간들은 SNS로 실시간 공유되어 민의 연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24년 12월 21일 남태령 고개에서 고립된 농민들의 곁으로 2030 여성들이 향했던 일명 '남태령의 기적'에서 폭력과 강제 연행없이 행진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경험은 처음이었다는 농민들의 고백이 있었다. 과거의 진압이 고립 안에서 대상을 향한 의도된 '전시(66)'로 은밀히 폭력을 사용해왔던 반면, 수백의 지지와 수천의 도움, 수만의 관심 아래 정보의 흐름이 있었다는 점이다. 

 123 이후의 시간동안 거리로 나온 시민들과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이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한 시민들의 움직임은 " 6월항쟁에서도 물품과 식량의 공유는 결집한 민의 활력을 북돋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명동성당 인근에 위치한 계성여고의 학생들은 도시락을 걷어서 농성단으로 가져왔고, 근처의 빌딩에서는 빵, 우유, 속옷, 현금 등을 전해 주었다. 286" 는 과거와 일치한다. " 죽음을 목격한 민이 슬픔과 공포의 정서 속에서 몸이 굳고 위축되었다면, 거리로 나와 한곳으로 향해 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함께 동원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민은 희망과 확신, 환희, 등 기쁨의 정서 속에서 활동력이 증대된다. 259" 이는 음악과 응원봉이 함께한 거리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들과 같다. 

 지금의 '정보'는 이처럼 중요한 구심점이 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혐오와 갈등을 퍼뜨려 세대와 성별, 외부(미중)로 시선 돌리기에도 이용되고 있다. 80년대의 시선 돌리기가 컬러화면의 등장과 에로티시즘(125)으로 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방법을 사용했다면 2000년대의 시선 돌리기는 시각보다 더 원초적인 자극을 도구로 한다. 이 갈등은 대학이라는 공간의 변질로도 이어진다. MB정부에서 키워낸 일베키즈들에게 과거의 정보와 정치는 조롱과 굴절된 분노를 표출할 재미, 자극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저항의 공간을 대학에서 거리와 인터넷(128)으로 변화 시키는 역할도 한다. 

 다른 하나는 토머스 제퍼슨의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63)'는 말처럼 과거부터 민주주의가 위기의 순간에 다시 회복되는 과정에서 항상 민의 죽음, 희생이 그 계기가 되어 왔다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폭군이나 독재자가 아니라 그 반대편에 선 이들, 특히 수많은 민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흡수하며 무럭무럭 자랐다. 64" 여전히 탄핵된 대통령을 부모로 부르는 집단과 이 균열을 이용해 갈등과 혐오를 조장하는 세력이 존재하지만, 계속될 재판을 통해 수감번호 3617이 그 댓가를 치룰 차례가 왔음을 보여주길 희망한다.  

 책속에서 과거 광주의 자료를 마주하며 민주주의를 빚진 부채감이 송곳처럼 불거졌다. 그러나 지역에 대한 차별과 비하, 조롱이 이어지는 무도함은 여전하다. 불균형과 외면, 기만은 어디에서 오는가. 갈등과 혐오를 경계해야 함을 말하면서도 민주주의를 기만하는 자들 역시 그 볕과 그늘 아래에 있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지도록 마음이 좁아졌음을 느꼈다. 책을 읽는 동안 카페에 간 적이 있는데 그 공간 안에 이어폰 없이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보던 영상의 내용은 123 주체자인 수감번호 3617을 옹호하는 내용이었다. 한 공간 안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각자의 매개체로 세상과 사건을 돌아보고 있는 동안 저자가 던진 질문을 다시 찾아보았다. 

 " 민주주의를 마지막 순간에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도록 미리미리 고치고 수선해나갈 수는 없는 것인가? 박근혜와 윤석열을 탄핵시키는 것이 아니라, 뽑지 않을 수는 없던 것일까? 329" 그 카페 안에서의 시간은 질문에 대한 답이 됨과 동시에, 그와 한 공간에 있는 불편함과 블랙유머나 다름 없는 아이러니를 곱씹는 동안 "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지지하는, 민주시민이라 생각해왔던 나는 과연 어떤 민주주의를 만들어온 어떤 종류의 민이었던가? 그런 나는 과연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다른 민주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53" 하는 물음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되어 주었다. 논문에 뿌리를 둔 내용이라 다소 읽기 까다로울지 모르나 123의 시간을 함께 보내온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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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윤혜정의 예술 3부작
윤혜정 지음 / 을유문화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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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으로도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린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그 존재만으로도 이틀의 시간을 방황하도록 만들었다.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의 간극에는 대상을 얼마나 이해하는가 역시 포함되어 있기에, 그저 좋아하는 마음으로 예술의 주위를 맴도는 이 헛된 움직임조차 때로는 버거운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저 너머에서 건네오는 초록의 불빛, '독자는 오직 저 초록색 불빛만을 믿*'고 책장의 이편에서 끝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책을 읽는 동안 그동안 짧게 접했던 다양한 작품과 전시를 떠올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데, 다리 한 쪽을 염색한 개 '휴먼'에 대한 내용(312)에 이르렀을때 비슷한 작품을 본 기억이 어렴풋 떠올랐다. 어디서 봤는지 누구의 작품인지는 전혀 생각이 나질 않는데 다리 한쪽을 선명한 분홍색으로 염색한 개의 사진만이 기억 속에 강렬했다. 심지어 다리 염색을 비건 염료로 했다는 tmi도 생각이 났는데 다른 정보가 안 떠올라 한참을 찾았는데 찾고보니 기억하고 있던 그 사진이 바로 피에르 위그의 이 전시였다. 위그를 놓고 위그를 몰라봐서 헤매다니, 아마 이제는 못 잊지 않을까 싶어 우스우면서 씁쓸했다.** 

 " VR 헤드셋을 낀 사람이 천천히 움직이며 한창 어딘가를 '탐험 중'이었는데, 그/그녀를 바라보며 순서를 기다리는 다른 관람객들이 사뭇 흥미로운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대비되는 상태에 놓인 관람객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이 공간을 일종의 무대로 탈바꿈시킨다. 관람객이 의도치 않게 돌연 퍼포머가 되거나 퍼포머를 구경하는 또 다른 관람객으로 변신하는 형국이다. 37" 

 이 부분에서 [갤러리옳]에서 진행되었던 '멍미전(06.24~07.25)'이 떠올랐다. 관람객이 그림 앞에서 일정 시간동안 '멍을 때리는 챌린지'가 진행되는데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이어지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전시장의 작품 앞에는 수많은 멍 챌린지를 위한 장소가 놓여져있고, 이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습도 전시 소개에서 함께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들의 뒷모습은 마치 '리히터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객[6 인생 전시 중]'의 모습 같다. VR을 통한 차원의 변화와 같은 분리도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 심지어 어느 순간에는 감상조차 배제되는 순간에 이 행위는 자연스럽게 그 의미를 전달받은 작품이 된다. 

 스티브 맥퀸의 <베이스> 2024. 비아 비컨 전시의 공간(184-186)은 경주에서 찾았던 작은 체험 공간***을 떠올리게 했다. 좁은 공간에  미디어 폴이 몇 개 세워져 있는데 여러 불빛들이 점멸하는 어둡고 화려한 방에 방문객의 얼굴이 여러 이미지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빛의 잔상과 소리의 잔향을 공감각적으로 담아내는 초현실적인 공간, 그 안에서 완전히 젖어 드는 관람객은 회화이기도 하고 조각이기도 한 <베이스>를 몰입형 설치 작품으로 격상시키는 존재가 된다. 183"는 의도가 그 안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나. " "어떻게 아닐 수 있겠어요?" 192" 

 " 반투명한 점을 온전히 렌즈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작품에 다가가야 한다. 반면 작품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울 경우에는 각각의 점만 눈에 들어올 뿐 외려 전반적인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어진다. 그림과의 최적의 거리를 찾기 위해 나는 계속 앞뒤로 몸을 옮겨야 했다. 의미 있는 지각은 인간의 여러 자극을 하나로 엮어 내는 능력을 통해 발생한다고 했던가. 나와 작품, 그리고 전시장에 부재한 작가와 물리적. 심리적으로 적정한 거리감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관람객들은 '적극적 주체'가 되는데, 애초에 작가가 면밀히 의도한 것처럼 모든 과정이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369" 

 다르지만 같은 것처럼 느껴져 신선했던 대목이다. 처음 다니엘 보이드의 그림을 보았을때 화폭 가득히 찍힌 점들을 보고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보이드가 영감을 받은 글리상의 '불투명할 권리'에 대해서 곱씹으며 한 번 더 다리안 메데로스의 극사실주의 그림들을 연상했다. 예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음에도 메데로스의 그림을 떠올린 데에는 잊히지 않는 독특함이 있기 때문이다. 보이드의 점은 렌즈가 되지만 메데로스의 그림은 우리가 뽁뽁이로 부르는 투명한 비닐포장에 덮여 있는 시각적 장애가 된다. 하지만 이 불투명함은 마찬가지로 관객과 작품 사이의 거리감을 만들어주며 의미를 던진다.    

 컬렉팅(4 소유하고 공유하고 사랑하라 130)에 대한 이야기는 스스로의 경험으로는 알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문틈 같았다. 아인스타인 부부의 이야기 중 '어떤 작품이 좋은지 알고 싶다면 매우 좋은 걸 선택해서 그 옆에 두어 봐라 (137)'는 조언을 예술의 어법을 모르는 나는 가까스로 이어붙인 미식의 단어로 이 낯선 외국어를 번역한다. 왜 예술인가 묻는 작품, 좋아할 확신이 서지 않는 작품, 그렇기때문에 봐야 한다고 독려하는 작품을 구입하라는 조언 앞에서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미슐랭 스타를 받은 한 레스토랑에 대한 아쉬움으로 모두가 좋아할만한 맛을 냈다고 한 적 있는데, 불편함이 없는, 익숙함을 뛰어넘지 못하는 접시를 내왔다는 평이 바로 이것이구나,싶었다. 

 " 작가 부재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단서이자 상상 여행의 주인공 노릇을 하는 가짜 얼굴은 실로 기묘했다. 이상야릇한 이런 느낌을 두고 흔히들 '언캐니uncanny'라 한다. '언캐니'의 독일어인 'unheimlich'는 '내 집이지만 어딘가 친숙하지 않은 데에서 오는 기이함'의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그의 가면이 정확히 '언캐니'의 느낌을 자아내는 것 역시 나(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내(작가)가 아닌 낯섦 때문이다. 30" 

 언젠가 친구가 긴 여행을 다녀오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낯선 곳에서 잠을 청하는 날이 많아지니까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는데, 집에 돌아와 내 방 침대에 누웠는데도 자꾸만 집에 가고 싶었'단다. 이미 집에 있는데 마음은 자꾸만 집에 가고 싶어 수런수런했다는 말을 들으며 이상하게 내 마음도 불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 기분을 표현하는 단어가 독일어에 있었다. 독일어에는 세상 모든 표현에 대한 단어가 있다고 하던데 과연, 싶으면서 그 막막한 기분에도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안다면 조금은 위안이 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길가에 버려진 녹슨 병뚜껑에서조차 누구든 어느 순간 가슴이 뭉클한 보임이 있을 때가 있다. 108"는 이우환의 문장에서 오래 전 과거를 떠올린다. 어린 나의 오빠를 위해 특별하고 깨끗한 병뚜껑을 발견하면 기뻐했던 더 어렸던 나, 어쩌다 유리구슬 몇 알을 얻게 되면 자랑스레 오빠의 구슬통에 더해 넣었던 나.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름****'을 무상히 읊던 싯구와 함께 지금 현재의 우리들이 지나온 시간이 함께 떠오른다. "누군가에게 예술은 삶의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단편이 된다 125"는 말처럼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안에서 삶을 더불어 음미할 수 있는 순간들이 참 좋았다.   

 " 이제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습하고 무더운 바람을 싫어할 수가 없습니다. 내게 여름은 어떤 경험과 기억을 통해 완연하게 다른 계절이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여름 바람이 훅 하고 불어오는 날, 여러분도 이 책을 통해 한 번도 가닿지 않은 낯선 그곳에 잠시나마 다녀오시길 청합니다. 혹여 거기서 내내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를 만난다면 짧은 소식이라도 전해 주십시오. 언제 들어도 몹시 좋을 겁니다. 예술의 자리에서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14" 

 수많은 공간들을 오가는 동안 멀고, 유명하고, 내밀한 공간들 사이에서 시차같은, 미술관 피로(60)같은 압박, 유리됨을 느낄 때도 있었다. 글에서 전달되는 특유의 현장감도 좋았지만 어쩐지 닿을 수 없는 세계에서 부유하고 있나 싶은 느낌이 들 때, 서울 명동의 한 영화관이나 익숙한 카드회사의 이름, 의정부 미술도서관 같은 익숙한 지명들이 현실로 붙잡아왔다. 닿을 수 있는 곳들이 있고 그 공간 안으로 직접 찾아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 독자를 관객으로 변화시킨다. 

 덕분에 책을 읽는 동안 새로운 전시를 몇군데 살펴보고 마음에 드는 곳-'칸딘스키 같은 진짜 예술품을 보러(255)' 가는 한계 안에 머물러 있지만-은 표를 예매해두었다. 가는 길, 그날의 날씨와 계절의 풍경마저 감상을 위한 도입부로 열어두었던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를 읽으며 흘러가는 마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가서 마주해야 한다는 열망과 저자의 다정한 독려가 어우러져 발자국이 되었다. 그 앞에 서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걸음을 옮긴다해도 영혼과 내면에 스쳐갈 티끌을 말하는 흐릿한 부추김을 타인에게도 전달하고 싶어졌다. 이 책도 좀 읽어보세요. 

 풀 한 포기의 생을 앗아가는 일도 버거워 화분 하나조차 들이지 않는 실용주의적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를 읽으며 우리 삶의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에 시대를 초월하는 영원함에 더 많은 곁을 내어주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찰나의 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예술적인 하루가 되길.


* 위대한 개츠비 - 스콧 피츠제럴드
** 피에르 위그 '휴먼'의 영상과 전시에 대한 정보는 @artiel.art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볼 수 있다. 
*** 경주 감포 송대말등대 빛체험전시관
**** 제망매가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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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길 따라 열두 달 여행 - 사진작가 위드선샤인이 추천하는 국내 여행지 90
박선영(위드선샤인) 지음, 박선영(위드선샤인) 글.사진 / 푸른향기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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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를 먹을수록 꽃과 자연이 좋아진다. 왜 이런 변화가 생기는지 모르겠지만 사진첩에 하나둘 늘어가는 꽃사진을 보며 실감한다. 또 하나 주말이면 가까운 어디론가 나들이를 다녀오고 싶어진다. 번화가로 나가 늦은 밤까지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주변이 트인 강이나 바다를 찾거나 산에도 가본다. 봄에는 꽃이 폈다고, 여름엔 날이 더워서, 가을엔 단풍이 들고 겨울엔 눈이 내려서 자연을 찾게 된다. 이럴 때 마침 '꽃길 따라 열두 달 여행'이 반갑게 나타났다. 아직 우리나라 구석구석 어디를 언제가면 좋을지 잘 모르는 초보 여행자에게 희소식이었다. 

 책에서는 열두 달 동안 계절의 변화와 함께 국내에서 찾아가 볼 만한 아름답고 특별한 여행지 90곳을 소개하고 있다. 여행을 기념할 수 있는 사진은 필수인데 '꽃길 따라 열두 달 여행'을 따라찍기만 해봐도 제법 멋진 추억을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소개된 곳들 중 내가 가본 곳이 있을까 헤아려보는데 생각보다 많지 않다. 가본 적이 있는 곳들도 다른 계절 다른 풍경을 보게 되니 낯설었다. 한번 다녀왔다고 해서 그 장소를 알게 된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예쁘고 좋은 곳이 많구나 또 깨닫는다. 

 읽다보면 짧게 곁들여진 글을 읽는데 집중하기보다는 계절과 자신을 눈여겨보면서 어디를 가보면 좋을까 세세히 살펴보는데에 눈이 더  바쁘다. 의외의 장소들도 만난다. '충남 당진 합도초등학교 127'에 가득히 늘어진 등나무꽃의 청량한 빛은 어쩐지 동심과 어울렸다. 다음 봄에 가보고싶었지만 꽃을 보고 사진을 찍고 싶다고 초등학교에 함부러 들어가도 되나 싶기도 했다. '경기 시흥 관곡지 211'의 연꽃은 때마침 7월에 가까운 거리이기도 하니 주말에 나들이 다녀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사진작가인 저자가 책 안에 담아낸 사진들을 보다보면 국내 여행이나 집밖으로 나가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던 사람이어도 분명 눈길이 가는 장소가 생길 것이다. 장소와 계절에 따라 어찌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옷차림까지 갖추고 예쁘게 사진을 찍었는지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특히 가을에 친구들과 함께 "경북 경주 대릉원 312"에서 찍은 사진들은 가을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낸 듯해 인상적이었다. 커다란 은행잎 사진(경기 여주 강천섬 300)도 보는 재미가 있었다. 

 특별한 순간이나 일상에서도 사진을 종종 찍지만 가끔은 사진으로 남기는 것에 너무 매몰된 것은 아닐까 싶어질 때도 있다. 오늘은 옷을 대충 입어서, 얼굴이 피곤해보여서 같은 이유로 사진을 안찍을 때도 있고. 그런데 '꽃길 따라 열두 달 여행'을 살펴보다보니 순간을 더욱 특별한 기억으로 남겨둘 수 있는 가깝고 쉬운 수단 중 하나가 사진 아닐까 싶다. 우리가 늘 가지고 다니는 핸드폰에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능이 충분히 있으니 조금만 더 신경 쓴다면 이렇게 멋진 추억으로 남길 수 있겠구나 싶어졌다. 

 표지의 수선화(충남 예산 추사고택 100)를 바라보다 문득 서산(충남 서산 유기방가옥 104)에 갔던 날이 떠올랐다. 서산은 그리 멀지 않아 사람들이 많이 간다던 소문을 듣고 찾아갔었는데 주차장부터 어쩐지 한적해 뭔가 이상하더라니 이미 끝물이라 방문객이 줄어든 시기였다. 그리하여 꽃도 사람도 적은 한적한 수선화 군락지였던 산책로를 돌아보니 조금은 섭섭했지만 그 자체가 추억이 된 여행이었다. 

 저자처럼 예쁘게 차려입고 꽃이 만발한 멋진 장소에서 사진을 남겼어도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어도 떠남은 어떤 형태로든 남아 간직된다. 그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이제 '꽃길 따라 열두 달 여행'을 손에 들고 다시 멋진 여행을 도전해볼 수 있어서 더 좋을 것이다. 책 말미에 더 많은 장소들을 함께 소개하고 있으니 가까운 곳, 더 궁금한 곳들을 잘 살펴보고 모든 계절을 꽃으로 채워보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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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2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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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정치 못하다고? 그 애 엄마나 할 법한 말이었다. 루앤의 엄마가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그 애가 '단정치 못하다'라는 말 따위를 알 리가 없었다. 9" 

 어른은 아이의 거울, 아이 앞에서는 물도 함부러 마시면 안된다는 말이 있다. 요즘 아이들은 어디 사는지 물어볼 때 아파트인지, 주택인지, 자가인지 전월세인지 구분할 줄 안다고 한다. <어린왕자>에서도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고 꼬집은 것처럼 그때 어른들이 셈하던 숫자를 요즘은 아이들도 헤아린다.
 그 셈법이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해보면 주변 어른들의 말투와 행동을 그대로 따라 배우게 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조지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루앤이 조지나에게 상처를 준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아이들의 태도와 변화를 문제 삼으려거든 우리 사회와 어른인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던가 먼저 생각해보아야 겠다. 

 "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점점 커졌다. 이대로 두둥실 날아올라 천장을 뚫고 새파란 하늘로 떠오를 수 있다면. 나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 애들과 함께일 수 없다. 나는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모두들 팔목에 하나씩 두른 팔찌도 나에겐 없다. 이 아이들이 쇼핑몰을 구경하며 팔찌 등을 사는 동안 나는 월그린 할인 매장 화장실에서 내 속옷을 빨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리를 지키고 앉아 스파게티 가락을 돌리면서 윌리를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96" 

 지금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고, 가질 수 있는지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너무 큰 차이가 나는 사람은 오히려 그러려니 싶고, 비슷한 삶들 속에서는 어차피 사는게 다 비슷하겠지 싶다. 갑자기 누가 복권에 당첨됐다고 한다면야 부러우니 맛있는 밥이라도 한번 사주십사 하겠지만, 더 가졌다고 해서 거리감을 느낄 일도 없다.
 하지만 조지나처럼 어렸을 땐 다른 애들이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나 다양한 색의 파스텔 세트, 더 커서는 새 핸드폰과 신발, 겉옷 같은 것들도 '나도' 갖고 싶었고 꼭 '나만' 없는 것 처럼 생각하곤 했다. 같이 어울리려면 똑같거나 적어도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대화 소재도 빠지지 않고 분위기가 맞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고, 급식실에서 밥 혼자 먹는 일이나 이동수업 혼자 나가는 것, 조별 활동을 자연스럽게 짤 친한 무리들이 없는 것 같은게 아무렇지도 않고 그럴 수도 있다고 넘길 수 있지만 실제로 그 나이때는 그런 것들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어렵고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직장인이 잘 알아채지 못하는 우울감으로 회사를 가는 길에 사고가 나면 출근을 안해도 될테니 작은 사고가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경우가 있다.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조지나를 보며 씩씩하고 영리해보이는 아이의 마음에도 우울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조지나가 더는 차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엄마와 다투는 모습을 보며 처음엔 어려운 사정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엄마에게 떼를 쓴다고 여겨졌었다. 하지만 조지나의 불만은 그저 철이 없는 어린아이의 투정이 아니었다.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어린 조지나가 마땅히 받았어야 할 보호와 양육환경에 대한 요구였다.
 같은 장소에서 이틀 이상은 머물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차에서의 생활, 빨래나 샤워같은 개인 위생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낮시간 동안 어린 동생의 보호자 역까지 해야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결국 조지나가 비어있는 외딴 집에서 부랑자와 마주치게 되는데 어느 누구도 이를 알지 못한다. 
 무키 아저씨와 조지나가 빈 집에서 마주쳐 대화를 나누는 길지 않은 장면에도 책을 읽는 동안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동화같은 이야기 속의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염려했던 문제들은 없었지만,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 소녀와 성인남성이 주변의 시선이 닿지도 않는 장소에서 있는 장면은 긴장감을 주었다. 
 다른 하나는 조지나와 다투며 엄마가 감정적으로 크게 폭발하거나 지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이미 가족을 버리고 가정을 떠난 아빠는 엄마가 느낄 생활고와 책임감의 압박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아빠가 무책임한 짓을 할 수 있었다면 엄마 또한 자신도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조지나는 엄마에게서 불안을 느낀다. "아니, 아무래도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나가야 할 것 같다." 87", "나는 내심 불안해져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99" 엄마에게서 전해지는 절망과 우울을 민감하게 느끼는 조지나는 결국 자신의 완벽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가정의 위기가 사회로 옮겨오게 되는 것이다.  
 가정이 흔들렸다면 사회에서라도 어린아이들을 잠시 보호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어야 했다. 학교 선생님도 친구 로앤의 엄마도 조지나에게서 변화와 문제를 발견했다. 이들은 그저 조지나에게 괜찮은지 묻거나, 조용히 넘어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한 가정 내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을 때 타인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개입할 수 있을까.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 벤치 근처에 한 남자가 서 있다 이를 본 모텔 주인에게 끌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들은 평화롭게 놀고 있고, 성인 배우와 관객들만이 그 불온함을 느낀다. 아이들의 세계가 얼마나 순수한지, 때문에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쉽게 노출되는지 대비되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장면이었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에서도 엉뚱하면서 순수한 조지나를 중심으로 결핍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따뜻한 시선과 희망을 잃지 않고 마무리 된다. 그 점이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큰 장점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의 어두움을 더욱 강조하여 드러낸 대비가 되기도 한다고 여겨졌다. 
 책은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안고서도 각 인물들이 옳은 길로 나아가는 성숙과 고통 앞에서 멈추지 않는 나아감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읽고 감명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읽고 난 뒤에 깊이 생각해 볼 수록 동화같지 않은 현실을 동화처럼 풀어냈단 감상이 뒤따랐다. 
 '모든 학교 도서관에 반드시 꽂혀야 할 필독서'라는 소개가 있지만 어른의 시선으로도 아이와 함께 읽어야 할 책이다. 동명의 영화로 다시 한 번 감상한다면 더 즐거울 것이다. 미디어에 더 익숙한 세대는 영화를 먼저 보고 그 즐거운 감상을 책으로 확장해 접근해도 좋겠다. 읽고 난 뒤에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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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이름으로 (라울 뒤피 에디션) - 꽃과 함께 떠나는 지적이고 황홀한 여행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라울 뒤피 그림, 위효정 옮김, 이소영 해설 / 문예출판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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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을 가려둔 블라인드를 걷어 바깥의 푸르름을 바라보며 '봄의 이름으로'를 읽었다. 한참을 책만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을 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함께 공유하지 못해 안타까울 정도로 계절은 푸르르다. 빗방울이 떨어져 한층 짙어진 녹음 사이로 바쁘게 오가는 작은 새들의 움직임을 좇다보면 페이지가 멈춰진 채로 시간이 오래도 지났다. 라울 뒤피의 그림과 함께하는 '봄의 이름으로'의 아름다운 표지 그 자체가 서재 책장에 놓여져 시들지 않는 꽃이 되어줄 것을 기대했었는데, 그보다 더 자연으로 몸과 마음이 향하도록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콜레르의 문장 안에서 꽃은 그가 그리는 관념으로 피어난다. 어떨 때는 이름만 같은 다른 꽃을 말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독특하다. "라일락이 우리 침실에 너무 가까이 있으면 무례하게 청산가리 냄새를 풍기는 연인이 된다? (66)" 특히 향과 라일락에 대한 표현은 보는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길을 가다가도 멈추게 만드는 라일락 향에 대한 평이 너무 잔인하다. '자투리(104)'의 내용에선 한국인의 나물 사랑에 대해 알았더라면 얼마나 놀랐을까, 어떤 글을 썼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맛있는 쓰레기통'의 "무청을 무와 함께 생으로 씹어 먹기(105)"는 좀 잘못된 시도였던게 맞긴하다. 

 그동안 팬지를 너무나 과소평가 했던 것은 아니었나, '파우스트(54)' 검은 팬지의 장을 읽으며 생각했다. 비교적 흔한 꽃인 팬지는 작고 노란꽃의 모양이나 색감이 나비같기도 하고, 안에서 밖으로 퍼지는 무늬가 야생동물의 얼굴을 닮은 듯한 귀여운 꽃이지만 그리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부드러운 질감이 느껴질 듯한 꽃잎의 아름다움도 인정하지만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었는데, 팬지에 대해 찾아보다 식용꽃으로 자주 사용되는 종이라 그 이미지 때문이었던 듯 하다. 책에 나오는 검은 팬지는 처음 들어보기에 찾아봤더니 색이 다양하고 화려한 팬지들과는 결이 다르지만 굉장히 인상적인 화려함으로 돋보이는 꽃이었다. "오! 이 벨벳!" 

 책을 읽는 동안 낯선 꽃들의 이름을 찾아보느라 읽는 동안 바빴다. 몇 해 전부터 자꾸만 식물과 새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누구는 이런 변화가 나이듦이라고 하는데 세상은 볼수록 아름답고 경이로워 그 전에는 왜 자연에 무심했을까 싶게 좋고 귀해진다. 그러니 그동안 몰랐던 식물과 자연에 대한 책이 보이면 항상 반갑고, 궁금해진다. '봄의 이름으로'를 읽으며 정원과 들판으로 늘 자연과 가까이하며 지냈던 콜레트의 환경이 이런 독특한 에세이를 탄생시킨 거름이 되었으리라 생각하면 부러워다. 그는 이 모든 식물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고, 언젠가 박완서 작가가 이름 모를 꽃이란 것은 없다며 '작가는 사물의 이름을 아는 자'라고 했던 말이 아직도 깊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식물을 좋아하지만 키워낼만큼의 책임이 없기에 사랑까지는 아닌 것 같아, 사랑한다는 것에 필요한 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꽃에 대한 에세이를 앞에 두고 사랑이란 무엇일까 곱씹다니. 마침 유투브에서 찾아낸 '아침 봄 재즈' 플레이 리스트도 마음에 들던 비오는 날에,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것들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보냈다. 라울 뒤피의 흐드러지는 꽃들을 함께 감상하며 콜레트가 전하는 꽃다발을 가슴으로 안아보자.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여름의 푸르름 속에 향기보다 오래도록 남는 감성을 선사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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