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노래 - 나무는 말하고 그녀는 듣는다
진재운 지음 / 생각의힘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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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저 길을 다시는 걷지 못하겠구나."
매일 오가던 길이었다. 시간이 없다고 서둘렀고, 신호가 바뀌기 전에 건너려고 뛰기도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아 주변을 제대로 바라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다시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자 평범했던 길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삶이 겨우 이것이었구나 싶었어요. 무엇을 하겠다고 그렇게 허둥대며 살았을까.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주 조용해졌어요."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 오히려 세상의 소음이 멎었다. 극장도, 건물도, 연구도,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멀어졌다. 자신이 이루었다고 믿었던 것들이 죽음 앞에서 한꺼번에 힘을 잃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 뜻밖의 걱정 하나가 남았다. 35" 

"인간이 나무를 구하는가, 나무가 인간을 구하는가 251" 

여기에 마치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있다. 사람의 마음으로 보면 다 담아내기 어려운 이 사람의 이야기는, 잠시 자신의 존재를 내려놓고 그보다 더 넓은 곳으로- 나와 바깥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어나가야 조금씩 들리는 듯 하다. 어쩌면 당신은 이 이야기를 끝까지 허풍과 거짓이 섞인 환상쯤으로 치부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꿈결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책 속에 담긴 니카라과 숲의 넓고 푸른 풍경만은 진실로 전해질 것이다. 바로 그 숲의 풍경 앞에서 시작해보면 좋겠다. 그게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면 좋겠다. 조금 이상하고,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부분까지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결국 감동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 그녀는 숲을 소유하는 사람이라기보다 그곳에 잠시 그림을 그리는 사람처럼 자신을 설명했다. ...중략... 새와 곤충, 바람과 시간이 함께 그리는 그림이었다. 그녀가 떠나면 다른 사람이 그 땅을 돌보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은 나무를 더 심을 수도 있고, 길을 바꿀 수도 있다. 그녀가 그린 그림 위에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질 수도 있다. 204"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지만, 그에 대한 소개가 굉장히 독특해서 관심이 간 것도 있었다. 황실의 후손이라는 혈통, 그를 두고 '공주님'이라 부르는 것이 사실 마땅한 호칭이라는 점도 재밌고, 에이즈의 원인을 규명한 생물학자였다는 점도 놀라웠다. 그런데 그의 삶 6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시작한 나무 심기가 가장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시작된 새로운 삶과 새로운 세상의 첫 시작이 되었다고 하니 여러 생각이 오간다. 거기에 온전히 자신이 일구어낸 숲에 대해서도, 성공과 배경마저도 자신의 것은 없다(200, 204)며 잘라낸다. 그저 자신의 할 일을 계속해나가는 것, 오늘의 묘목을 심어나갈 것(237)을 말한다. 벗어나고 내려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 사람들은 남은 시간을 대개 해로 계산한다. 그녀는 달로 셌다. 한 해라는 말에는 아직 많은 날이 남은 듯하지만, 보름달은 한 달에 한 번뿐이다. 한 번 놓치면 다음 달까지 기다려야 한다. 104" 

사실 몇년 전부터 가끔 평범하게 보내는 날이 문득 너무나 좋을때면 나에게 남은 이 보통의 하루가 몇 번이나 될까 헤아려보게 되었다.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다가, 길에 쌓인 낙엽을 밟다가, 부드럽게 뭉그러지는 햇빛을 쬐다가도 갑자기 찾아오는 그 순간을, 어릴 때는 세어볼 생각을 못했는데 언제부턴가 계절의 한 가운데에 있다고 느껴질 때면 이 계절을 이렇게 온전히 보낼 수 있는 때가 얼마나 남았을까 싶어졌다. 더우면 덥다고 불평하며, 황사나, 추위, 혹은 나뭇잎의 푸르름과 단풍, 떨어지는 꽃잎과 눈 사이를 걷고, 햇빛이 부서지는 것을 보고, 계절의 냄새를 맡는 일이 당연한 듯 하면서도 하나하나가 아쉬워졌다. 그래서 시간을 달로 셈하는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보고 느끼고 해야하는 것들이 있다. 마치 다시 없을 것처럼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의 삶이 그렇다. 

" 그러고 보니 나는 실제로 닥치지도 않은 너무 많은 일을 미리 두려워하며 살아왔다. 죽음이 두렵다는 것과 잃을 것을 미리 두려워하는 일은 조금 다르다. 죽음은 한 번 오지만,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은 살아 있는 동안 여러 번 찾아온다. 재산과 이름, 사랑하는 사람, 건강과 젊음, 아직 보지 못한 미래를 잃을까 두려워하며 오늘 누릴 수 있는 자유까지 미리 내어 주기도 한다. 110" 

백 그루의 나무를 심어도 스무 그루밖에 남지 않(63)더라도 꾸준히 나무를 심는 일을 계속해나간 그 굳은 심지에는 존경이라는 말 외에 다른 표현이 필요치 않았다. 열에 두번 밖에 완성되지 않더라도, 때로 그동안 해온 것들이 모두 망가지고 사라진대도, 다른 누가 방해를 해도 그는 자신이 이루고자 한 바를 계속해나가는 묵묵함, 한결같은 의지가 결국 목표를 향한 길을 낸다. 나무가 숲이 되고, 숲은 자연이 되어 그 안에서 다시 생명이 살아가게 되는 변화가 찾아온다. 가끔 우리는 목표로 삼은 일을 향해 나아가다 포기하게 된다. 매일 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하루 빼먹어서, 실력이 곧잘 늘지 않아서,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같은 이유로 실패했다고 여기고 이어가길 멈춘다. '나무의 노래'를 통해 멈추지 않고 계속해나갈 이유를 본다. 매번 첫 발을 떼는 것 같아도 똑바로 걷지 못했더라도 잠시 멈췄더라도, 다음 발을 다시 떼기만 한다면 결국 뭔가를 이루는구나, 그게 멈추고 포기할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 한 그루의 나무가 살아나면 그 주변에 또 다른 삶의 자리가 생겼다. 다른 나무가 함께 자라고, 새와 곤충이 깃들며, 그늘 아래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225" 

이상한 일이다. 나무와 대화를 한다는 말, 곰에게 쓴 편지, 환상같은 사건들은 여전히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기인같기도, 괴짜같기도 한데 그가 해온 일들, 땅을 사서 그 땅에 그저 나무를 심어 두었다는 말은 어쩐지 눈물이 난다. 그가 샀다는 니카라과의 땅(48-49)을 그저 사진으로 보기만 했는데도 마치 그 곳이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희망이자 쉼터로 느껴졌다.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나누는 이의 숭고함, 자연의 경이로운 생명력과 회복력에 대한 경탄이 어우러져 감동을 받았는데 이와 비슷한 감동을 전에도 느낀 적이 생각해보니 <나무를 심는 사람>*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수수하고 다채로운 색감의 그림과 함께 되살아나는 자연의 힘이 담긴 내용에 크게 감동을 받았었다. '나무의 노래'를 인상적으로 읽은 독자라면 <나무를 심는 사람>도 함께 접해보면 좋을 것이다. 
꿈같은 이야기를 환상처럼 하는 것을 보며 열심히 찍어놓은 사진을 보지 않고서는 소설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거대한 나무 앞에서 자신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72)고 했는데, 다 이해하지도 따하지도 못할 상대 앞에서 솟구치는 의심과 의문을 스스로 무너뜨려야 하는 동안 비슷한 느낌을 곱씹어야 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라는 명언을 실천하는 삶이라니. 생의 가치를 되짚어보게 만드는 삶에 대한 긍정, 자연을 향한 새로운 감각과 영감을 전해주는 책이다. 머리 속을 비우고 마음을 채우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책을 읽으며 중간중간 짧은 글이 손글씨로 담겨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책의 마지막 부분에 글과 삽화를 함께 담아놓은 부록(267)을 실어놓은 것이 이 책의 백미였다. 이 점도 놓치지 않기를!


*<나무를 심는 사람> 동명의 소설(장 지오노 1953)과 애니메이션 작품(프레데리크 백 1987)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 애니메이션 작업을 한 감독 프레데리크 백 역시 일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은 환경운동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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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나간 세상에서 아픈 사람들 -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정신과 의사의 생존 가이드
조애나 치크 지음, 제효영 옮김 / 심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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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쓰레기 같아?
근데, 가끔 좀 쓰레기처럼 굴면 안 되는 거야?
그러게, 쓰레기가 될 수도 있지.
안 그런 사람이 있을까? 184" 

영화 <더 드라마>에서 결혼을 앞둔 커플이 친구들과 저녁을 즐기다 자기 인생 최악의 비밀을 하나씩 밝히기로 한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상처주고 거짓말을 한 과거의 잘못을 하나씩 고백하는 그들 사이에선 약간의 경멸, 비밀스러운 눈짓과 웃음이 오간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조금 더 은밀하고 얄팍한 유대가 한겹 더 쌓인다. 안 그런 사람이 있을까,하는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평범해보이는 선량한 이웃의 모습을 한 영화 속 인물들에게도 쓰레기같은 비밀이 하나씩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가끔 쓰레기가 되며 산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며 살지만 그래도 가끔은 쓰레기가 되고 만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꾸만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 같은 순간을, 하루를 보내고 난 뒤에 자책에 빠지곤 하는 우리에게 '정신나간 세상에서 아픈 사람들'은 쓰레기가 될 수도 있지, 해버린다. 그리고 가끔 당신이 쓰레기가 되는 이유는 당신이 분리수거도 안되는 쓰레기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불운하게도 쓰레기통 같은 세상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풀어놓은 비밀이 관계를 망치는 방아쇠가 되지만,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중에도 당신이 하려고 했던 그 나쁜 행동이 반드시 당신이 사이코패스라는 의미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빈번하게 벌어지는 사건들을 접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아, 그것을 자신의 의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어린 시절엔 더욱. 그러니 자신에게도 그런 비밀이 있다해도, 쓰레기통 속의 쓰레기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해도 너무 자책하지 않기로 하자.
사실 나 역시 책의 목차를 보자마자 5장부터 읽었다. 5장의 제목은 <인간쓰레기가 되지 않는 법>이다. 비록 책이 인간쓰레기가 되지 않는 확실하고 명료한 방법을 소개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지 않는 법을 말해준 것에 가깝지만 그래서 더 좋다. 지금은 그래 뭐 쓰레기면 어때, 하거나 쓰레기가 아니라 쓰레기통 구역을 잠깐 지나고 있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 뿐이야 생각하기로 해본다. 

" 사는 건 힘든 일이다. 부처가 깨닫고 가르친 고귀한 진리의 첫 번째가 인생은 고통이라는 것이고, 프로이트의 가장 큰 열망은 환자 개개인의 절망을 공통의 불행으로 전환하는 일이었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인류의 진화가 행복하거나 평온한 삶이 아닌 생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18" 
다행히 너무나 평범하고 나약한 우리만이 아니라 대단해보이는 사람들마저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공표해놓았다는 것이다. 나만 힘들거나 특별히 더 나쁜 선택만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이 고통은 모두에게 속해있다. 그러니 때로 나쁘게도, 약하게도, 흔들리며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SNS를 보면 다른 삶들의 하이라이트만 모아놓은 것임을 알고도 비교하게 되곤 하는데, 인류의 모든 걸음은 비하인드를 통해 추진력을 얻었음에 다시 위로를 받게 된다. 

 "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이 불안과 우울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건, 생각을 중시하는 게 당연시되는 환경에서는 괴로움이 지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건강한 감정 경보인 두려움, 수치심, 죄책감, 분노, 슬픔, 저조한 기분을 없어져야 할 감정으로 여기며 스스로 자기 몸에 두 번째 화살을 쏜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지 자꾸만 곱씹고, 기분이 나아지는 게 정상이라고 가정하고, 혹시 과거에 저지른 잘못이 이런 나쁜 기분의 원인은 아닌지 찾으려고 하고, 이렇게 안 좋은 기분으로 영원히 살면 어쩌나 294"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은 생각을 했던 부분 중 하나인데 여기서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우리가 반복해서 두번째 화살(237)*을 자기자신에게 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번째 화살은 불교 경전에서 전해지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가르침이라고 한다. 나쁜 사건은 단 한 번 일어났을 뿐인데 우리는 그 사건을 계속해서 곱씹으며 그 때의 부정적인 감정을 이어간다.
세상은/상대는 한 번 화살을 쐈을 뿐인데 그것에 얽매여있으면 스스로 자신에게 또 다른 화살을 꼽는 것과 다름없다. 이 불필요한 감정에 부림 당하지 않고 멈추고자 하는 것이 두번째 화살을 피하는 방법이다. 이와 싸워 이기거나 회피하거나 매몰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끌려다니지 않아야 함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우리는 일이 잘 안풀리거나,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날 때 심지어 아플 때도 반사적으로 자기자신을 살핀다.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상황이 이렇게 되기까지 뭐가 문제였을까 자신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나 때문일까, 나는 왜 이럴까 같은 자책과 점검, 반성을 하려한다. 이 두번째 화살을 자신에게 겨누기 전, 타인이 이런 상황에 처해있다면 어떻게 대해줄 것인지 생각해본다(209).
타인이 실패를 겪거나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자신을 탓하던 생각을 그대로 할 수 있을까?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속으로 생각할지언정 차마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타인에게 보이는 위로와 친절을 같은 상황에 처한 자신에게도 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쉽게 잊는다. 가장 잘 대해주고 아껴줘야 할 자기 자신에게 남보다 못한 대접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또 하나 우리가 머리속에 잘 기억해두어야 할 것은, 완벽함에 대한 추구, 영원한 지속은 없다는 것이다. 저자 역시 "영원한 것은 없다는 깨달음을 통해 도리어 위안을 얻게 되었다 234"고 했는데, 우리-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이미 그 깨달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 없다. 이미 지드래곤이 말하지 않았던가, 영원한 건 절대 없다고. 케이팝이 오늘도 1승을 했다.
더불어 영원하지 않음은 완벽함에 대한 환상을 단념시킬뿐 아니라, 우울과 불안이 우리를 잠식하는 때마저도 일시적임을 말한다. "우울하고 불안할 때 떠오르는 생각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모두 기분이나 감정을 일시적으로 나타낼 뿐이다. 338" 그러니 그늘 아래에 있을 때 잠시 자리를 피하라고 조언한다. 그늘에서 벗어나고 보면 가득했던 구름들이 걷히는 순간이 온다. 
세상이 혼란하고 험난해질 수록, 나와 다른 사람을 나누고 서로를 탓하고 싶어질수록 연민과 공감을 통한 인간성의 회복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선함과 악함을 구분짓고 싶고 나와 남을 나누고 싶겠지만, 우리는 어느 한 가지 역할만 하며 사는 것이 아니고(146) 우리의 행동은 서로 연결(221)되어 다른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더욱 위로가 되는 것은 남과 나를 구분짓고 나누는 것보다 타인에 대한 호기심과 연민에서 비롯된 낯선 사람과 나눈 작은 호의 같은 것들이다. 

" 이런 세상에서 스트레스 받고 괴로워하는 건 어디가 망가진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놓이면 괴로워하도록 만들어졌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생존을 도와주는 경보장치가 작동한 결과다. 세상은 붕괴 직전이고, 모두의 경보가 크고 또렷하게 울려야 시스템이 다시 균형을 찾을 수 있다. 17" 

'정신나간 세상에서 아픈 사람들'을 읽는 것은 삶이 레드레드 신호를 주는 딱 그만큼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거기서 벗어나야 하거나 괴로움에 부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 삶은 원래 힘든 것이다. 가끔 힘들고, 남과 같이 살아가야 하는 게 부담스러운 정신나간 세상에서 우리는 때로 아프다. 다만 어떤 가치를 선택하고 따르며 사느냐(378)를 스스로 정해 행동하며 살 수 있다. 단순히 세상 탓을 하고 개인에게 위로만 건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책이라 의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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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셋째 밤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3
일월명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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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난 겁쟁이다. 아직도 가끔 집에 혼자 있는 밤이면 무서워서 불을 켜놓고 잔다. 미신도 잘 믿고 대신 허세도 잘 부린다. 믿는다고 무서워하면 얕잡아보일까봐 안믿고 안 무서운 척 한다. 공포영화, 소설, 만화도 한번 보면 잊어버릴 때까지 무서워서 머리감을때 노래 불러야 하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보고싶어 한다. 가끔 눈을 가려가면서, 보다 말고 멈춰서 귀여운 동물 영상으로 마음을 달래면서도 소름 쫙쫙 돋아가면서도 기어이 본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러니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셋째 밤'을 앞에 두고 또 어땠을까? 아니 왜 벌써 셋째밤이냐며 첫째, 둘째밤엔 왜 날 안불렀을까, 솔직히 요즘 진짜 무서운 공포 소설 읽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허세를 부리며 호기롭게 자원했다. 

책을 읽기 전 '호러 심청'과 '괴담-방 탈출 카페 제작 중에 생긴 일', '창포꽃을 세 번 접으면' 제목을 가장 인상 깊게 봐뒀기 때문에 기대도 컸다. 예상하기로는 '호러 심청'은 고전 소설인 심청 얘기를 잔혹동화 방식으로 비틀었거나 현대판 생활고를 겪는 소녀 가장의 분투기를 다뤘으리라 싶었다. '괴담...'은 영화 <백룸>이나 <8번 출구>처럼 요즘 유행하는 리미널 스페이스를 이용한 공포물이 아닐까 싶었고, '창포꽃...'은 어렴풋이 사랑 이야기가 얽혀 있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과연 공포물 짬밥 nn년차의 예상은 맞았을까? 

가장 무서웠던 건, '괴담...'이었다. 사람마다 뭘 가장 무서워하는지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귀신을 가장 무서워하는 겁쟁이에게 '괴담...'은 진짜였다. 독백 형식으로 된 전형적인 괴담풀이라 '괴담...' 도입부쯤에는 솔직히 좀 유치하겠네, 생각했다가 점점 무서워져서 의외였다.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구조를 따르는 것 같은데(계속되는 허세) 읽다보면 몰입이 되면서 어디를 향한지 모르는 반성을 하면서 읽었다. 알겠지만 겁쟁이들은 무서우면 일단 잘못을 빈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야!'였다. 제목부터 강렬한 이 소설은 가장 첫 번째로 '단편들...셋째 밤'을 여는데, 어쩌면 이 소설을 가장 무섭게 여길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괴담인 것 같으면서도 또 그 아는 맛에 빠져들게 되는 소설이었다. 사람이나 사건을 무서워하는 편이 아닌데도 인상깊게 읽었으니 현실적인 공포를 잘 살리지 않았나 싶다. 또 다른 단편 '우리 안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읽으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창포꽃...'이었는데, 아! 이 단편을 수십년만 빨리 읽었어도 나도 써먹어보는거 였는데 그걸못해봤네 싶어 아쉬웠다.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반드시 잘 기억해두겠다. 그러니 다른 독자들은 이 단편을 읽기 전에 꼭 종이와 펜을 준비해두세요. 요즘은 핸드폰에 적어두면 되려나. 만약 나라면을 여러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N 입장에서 즐거웠다. 성향이 F인지 T인지에 따라 가장 감상이 갈릴 수 있는 단편이 아닐까. 근데 일단 나라면 고소할거임. 당할 확률이 더 많지만. 

SF요소가 있는 단편들도 있었는데, 트럼프가 망쳤다. 이제 은하연방 같은 단어를 보면, 트럼프가 달은 미국 땅*이라며 담당 우주군 유니폼까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게 떠올라 웃음이 터지게 되었다. 연임에 성공한 미국 대통령이 이렇게 제 정신이 아니라는 걸 전세계에 공표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 공포이자 웃지만은 못할 코미디다. 어쨌든 덕분에 마지막 단편인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현실의 달리 방법이 없는 인물에 의해 제압되었다. 

원래 예고를 하는 콘텐츠는 그만큼 기대를 불러 모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감상자를 준비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려워진다. 공포물입니다,하면 얼마나 무서운지 한번 두고 보자 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고, 추리물입니다,하면 범인이 누구인지 트릭이 뭔지 밝혀내겠다 마음으로 보게 되는 것처럼. 그런 기대와 준비에도 충분히 무섭게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셋째 밤' 읽었다. 재밌었다고 말하며 책을 덮을 수 있었는데, 무서웠던만큼 읽는 시간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남은 감상이었다. 공포를 즐길 줄 아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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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 소통 불가능성의 인문학
정희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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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늘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매번 대화 주제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맞춘 주제를 만날 때마다 반복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김과 만나면 건강 이야기를, 박과는 가족 이야기를, 최와는 취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처음엔 대화 주제가 바뀌지 않고 그 내용 마저도 매번 비슷하게 이어진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대화할 때 중간에 길을 잃어 다른 이야기로 흘러갔거나, 결말이 나지 않을 주제여서 못다한 이야기를 마저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의 대화가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의 대화가 반복되는 건 어쩌면 말이 통하지 않아서,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토론을 하거나 시비를 가리는 것도 아닌, 일상적인 대화 안에서조차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낀 뒤로 처음엔 실망감이 들었다. 왜 내 말을 안 들어주지? 그리고 이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도 용케 서로 만나서 대화를 하고 못다한 이야기는 다음에 마저 하자며 헤어졌구나. 지금은, 그냥 그렇구나 한다. 이 책의 소박한 목표가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소통이란 원래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소통의 실패를 나의 성격이나 태도 문제로 돌리지 말자" 23
원래도 힘든 것이 너와 내가 같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나서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위로가 되었다면 그것으로도 괜찮아졌다.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를 보고 처음엔 분명한 갈등들을 떠올렸다. 요즘은 각자 자신이 속한 집합 안에서 그 밖의 모든 집합들과 다툼을 벌이고 있다. 정치적 성향, 성별, 지역, 직업, 성향, 종교, 심지어 복숭아는 딱복이 좋은지 말복이 좋은지, 탕수육 소스를 붓는지 찍는지로도 첨예하게 갈라진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아무리 대화해보았자 차이와 갈등만 깊어지고 달라지는 일이 없다. 웃으며 시작해도 비난과 비하로 갈라지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순간 차이가 차별이 되고, 갈등이 혐오가 되어 극단적인 분열과 다툼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을 뿐 이를 풀어나가기 위한 시도와 의지는 미약하고 그조차 점점 단절되고 있다고 느껴졌다. 이대로 괜찮은걸까, 어떻게 해야할까 궁금했다. 

책은 냉철했다. 타인과 '완벽한 소통'을 하는 것은 평화롭고 평범한 방식으로는 불가함(35)을 명료하게 밝힌다. 나와 남이 다른 존재라는 사실에서 오는 다름은 생활, 사고, 공감의 배경에 영향을 끼친다. 보라색을 말할 때 각각 떠올리는 보랏빛이 서로 다르듯, 그러나 서로 같은 색을 말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정리해서 알려주고, 이 모양인 세상과 그보다 더한 사람들에 맞서 더 잘 싸우는 법을 알려주거나, 대신 욕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저자는 독자를 설득한다. 이 책을 읽어보겠다고 선택한 당신, 소통을 위한 의지와 준비가 되어 있군요. 소통의 어려움을,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세요. 그리하여, 설득되었다. 

물론 이 책에서도 소통법을 알려주고 있다. 다만 저자가 알려주는 소통법은 하나같이 침묵하기, 적당한 선에서 대화를 멈추기, 설득하려 하지 않기, 자리를 피하기 같은 방법이다. (3장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소통법 161) 이기는 법을 잔뜩 기대하고 눈에 힘을 주었다가 어쩐지 힘이 빠지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읽고나서 생각해보니 싸움의 고수도 어찌할 수 없는, 무기를 든 상대 앞에서는 무조건 도망치라고 조언하지 않는가. 36계 줄행랑이 그 비법인 것처럼 이기려고,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거나 소통의 어려움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고수의 비법이라면 비법이 맞는 셈이다. 

처음엔 문장이 명료하고 딱딱해서 어색하게 느껴졌었다. 생각해보니 '소통'하기 위해, 가급적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문장으로 썼구나 싶었다. 혹은 강의를 기반으로 한 내용을 책으로 정리하였기 때문에 전달하는 방식을 바꾸면서 생긴 틈이 느껴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소통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바꿔 화를 가라앉히고 상처를 줄일 수 있도록, 밖이 아닌 내부를 향한 조언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세상과 싸우는 것 같고 사람들과 단절되어, 사는 게 살아남는 일이 되어 외로운 섬(57)처럼 느껴진다면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를 읽어보자. 긴장과 무게를 덜어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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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
김영민 지음 / 김영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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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소설집을 읽기에 아직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자신에 대한 불신. 그리고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한쪽만의 탓이 아니라는 변명에 기대어 저자에 대한 미약한 의심을 피워내며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를 읽었다. 제목만 보고 달달하게 단맛만 맛보려고 이 책을 집어들었다간 큰 혼이 날 것이야, 책 표지가 아니더라고 책등이나 날개에라도 경고해 두었어야 페어플레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 조교없이는 자살할 능력조차 없는 것이 교수 아닌가! 교수가 자살 같은 것을 할 리가 없다! 197" 

첫 단편 제목이 [이웃집 개에게 쓰는 편지]였을때부터 예감했어야 마땅하다. 그 어떤 비유가 아닌 진짜 이웃집 개에게 편지를 쓰는 사람의 글을 읽게 되리란 것을. 가끔은 화가 나기도 했다. 이렇게 말장난 같은 문장들 사이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밝히라고, 괜히 울화통이 터질 것 같기도 하고, 남들은 다 여유롭게 눈짓을 주고받으며 낄낄 웃으면서 책을 읽고 있을 것 같아 초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만 웃지 못하고 있을까봐 포모*를 느끼게 하는 소설이라니. 

" 무슨 '주의자'가 될 시간에 내향인은 차라리 자기반성에 몰두한다. 내로남불 태도를 거부한다. 오히려 내불남로 태도로 살아간다. 내로남불을 하느니 생불이 되겠다는 것이 내향인의 인생관이다. 90" 

이미 다 우려낼대로 우려내 맹물밖에 남지 않은 MBTI 얘기도 듣다보면 어느새 집중하게 만드는 언변이 매력적이다. 그러니 체력과 집중력 저하로 인해 따라가기 버거워져도 정신차리고 다음장으로 따라붙게 만드는 힘이 있다. 때로는 좀 과하게 나간다 싶기도 하고, 너무 멀리 퍼져나간 갈래를 적당히 갈무리해줬으면 하다가도 '뇌절은 뇌절이다.'* 하고 포기와 인정을 하게 된다. 

" 완성된 사람은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미완성이기에, 결함이 있기에, 상대를 찾아 나서고 그 상대가 그를 완성하려 들 때 사랑이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결함을 포함합니다. 아니, 결함이 필요합니다. 결함이 없으면 사랑하고 싶지도 않고, 사랑이 가능하지도 않겠지요. 215" 

여유롭게 문장을 다루며 글을 요리해나가는 모습이 약이 오르게 만들기는 하지만, 확실히 '대체 뭐야?' 하고 흰눈으로 보기엔 날카로운 문장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기강을 잡고 있었다. 비슷한 느낌을 어디서 받았더라 한참을 생각했는데, 예전에 플라시보 시리즈로 읽어본 적 있었던 초단편 장르의 개척자 호시 신이치였다.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에서 즐거움을 느꼈다면 호시 신이치도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웃긴 것 같은데 우습진 않고, 아무말이나 늘어놓는 것 같은데 그 안에 예리하게 벼려진 침이 하나 숨어있어 읽다보면 묘한 책을 하나 읽어보고 싶다면. 가진 재능을 왜 이렇게 휘두르는지 궁금해지는 글빨을 가진 작가를 만나고 싶다면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를 읽어보길 추천한다. 차마 더 풀지 않고/못하고 쌓아둔 글이 분명히 더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다음이 궁금해지는 만남이었다.


*FOMO (Fear of Missing Out) 놓치는것에대한두려움
*[동어 스님전]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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