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소설, 잇다 7
강경애.한유주 지음 / 작가정신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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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강경애와 한유주의 조합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장 많이 떠올리며 '바라건대'를 읽었다. 사실 이름만 들었을 때에는 전에 읽어보았던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던 '소금'과 '원고료 이백 원', '지하촌' 같은 단편들이 이 내용이 어떻게 기억에서 떠오르지 않았었지 싶게 어느 샌가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 전에도 그랬지만 강경애 작품 속에서 그저 살아나가는 것이 괴로움과 얽혀 고통과 매한가지나 다름없는 군상은 자잘한 충격과 짙은 불쾌감을 주었다. 보고있기에 괴로운 가난, 빈대와 파리가 들끓고 헐벗은 아이들이 고름과 오줌을 입에 넣는 집, 좌절과 압박을 못이겨 분풀이로 일삼는 폭력 그리고 태어나느니 죽는 것이 낫다며 너무나 쉬운 죽음들이 도처에 널린 삶은 세상에 대한 연민을 얼마나 더 쌓아야 거부감을 밀어내고 박애의 시선으로 공감할 수 있을 것인지 돌아보게 한다. 

몰래 애를 낳고도 미역국을 좀 먹어봤으면 하고 그도 아니면 끓인 물이라도 마셔봤으면 하는 본능적인 욕구, 생 파뿌리를 캐다 씹어내는 삶의 끈질김. 모든 것을 탁 놓고 죽고 싶을 생각이 들다가도 밥을 먹어야겠다, 밥을 먹고 나니 전과는 또 다른 기운이 돎을 깨닫는 모습은 욕구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이자 그 욕구로 인해 살아내는 삶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남편도 두 아이도 잃고 젖을 먹여돌보던 남의 자식이 그리워 울면서 죽지 못하고 살아가는 나약함이면서 동시에 죽지 않고 살아가는 강인함이 된다. 이 극복은 모든 것을 놓으려 할 때, 잃었다고 여겼을 때 매번 제 곤궁함을 알면서도 밥을 챙겨주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일자리를 챙겨 보살펴주는 이웃(용애 어머니)이 함께 돕는다. 

이웃의 극복을 위해 도와나서는 박애를 두고 강경애는 '원고료 이백 원'에서 좀 더 분명한 어조로 강조한다. 다만 부인이 벌어 온 원고료 이백원을 두고 뺨을 때리고 한밤에 부인을 쫓아내던 남편과 이 사람이 아니고서야 자신을 받아줄 데가 없을 것만 같아 마음을 고쳐먹고 잘못을 비는 부인의 모습, 물질의 쓰임을 가장 필요한 사람을 돕는데 쓰겠다는 그 숭고한 정신에 가장 가까운 이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없다는 것이 현재와의 단차가 느껴지는 점이 있다. 지금보니 그 불같은 화는 스스로의 무능력함에 대한 분풀이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버려질까봐 두려워 떨면서 돈 벌더니 남편을 우습게 안다며 손을 들었던 남편을 이해해주던 모습에선 전에 몰랐던 아쉬움도 있지만 과거의 사정을 현재의 기준으로 바라보았을 때 느껴지는 '피로함을 그에게 토할 것이 아니었다.(27)'* 

장애를 가진 탓에 동네 아이들에게 해코지를 당하고 동냥을 하러 다닐 밖에 달리 제 구실을 못하면서도 누군가와 가정을 꾸려보고자 노력하는 칠성 역시 수없이 꺾였어도 미래를 그리는 희망을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칠성의 희망은 때로 열망이 숨겨지지 않을만큼 강렬해서 보고있기 애처로와 불쌍한 마음과 앞날이 캄캄한(154) 생각이 들어 아무말 하지 않고 그저 두고 보는 것으로 호위(224)를 대신한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봉염네를 집에 들여주었던 호위(64)처럼. 강경애의 글이 삶에 지나치게 밀착되어 적나라하고 수치스러운 밑바닥을 몸에 들러붙은 것처럼 고스란히 드러내놓았다면 한유주의 글은 삶에 거리를 두고 관찰하듯 바라봄으로써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의 안위를 살피게 되는 마음, 마치 잠든 듯한 저 편의 여자를 지켜보고, 인천을 가야 하는데 수원행을 탄 아이를 신경쓰고, 가방을 든 채 휘청이는 여자에게 다가가 괜찮은지 묻는다. 

강경애의 인물들의 삶과 한유주의 인물들의 시선에는 시공간이 불러오는 단차가 어지러울 정도로 크게 가르고 있지만 사람과 삶에 대한 연민과 긍휼이 가진 온도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우리의 삶이 차고 각박한 냉소 위에 올려졌을때 어딘가에 있을, 있다고 믿으며 버티게 해줄 박애의 온도를 가리킬 이정표가 '바라건대'안에 담겨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강경애와 한유주의 세계가 만나게 된 것이 아닐까 답을 내리며 책을 덮었다.


* " 그 순간 봉염의 머리에는 선생님이 하던 말이 번개같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의 가슴이 터질 듯이 끓어오르는 불평을 어머니에게 토할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딸만 그르게 생각하고 덤비는 그의 어머니가 너무도 가엾었다. 그의 어머니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봉염이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없으면 딴 남은 그만 두고라도 제 속으로 낳은 자식들한테까지라도 저런 모욕을 받누나'하는 노여운 생각이 들며 이때까지 가난에 들볶이던 불평이 눈등이 뜨겁도록 치밀어 올라온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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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밖에서 비명 소리가 - 뉴 블랙 호러 앤솔러지
N. K. 제미신 외 지음, 조던 필 엮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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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람 심장을 보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내가 훔친 거 112 또 하나의 존재" 

서문에 나온 '토옥(oubliette)'의 개념이 나온 영화를 2024년에 즐겁게 본 기억이 난다. 이쪽의 상황을 감옥 안에서는 보거나 들을 수 있는데 감옥에서 지르는 비명은 외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에 영화 '히든페이스'가 떠올랐던 것이다. 조여정 배우만의 캐릭터 성과 매력이 잘 드러난 인상적인 영화였다. '겟 아웃'에 나오는 침잠의 방이라는 소재가 인상적이었다면 이 영화에서 사용되는 토옥과 같은 숨겨진 공간의 쓰임도 확인해보면 좋겠다. 

'아기 강탈자들의 침공'은 SF와 호러가 접목되었으면서 초반에 만난 단편들 중 가장 가독성이 좋았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단편들이 많았기 때문에 어떤 단편들은 불안정한 화자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반영해 이해하기 어렵거나 주어진 것들이 진실일까 의심하게 되는 면들이 섞여 있었다. 19편의 단편들 중 '아기 강탈자들의 침공'은 외계 존재들의 공격성이 드러나는 기괴하고 섬뜩한 장면들과 혼란스러운 대치를 속도감있게 전개하면서도 생생하게 표현해 '라시렌'과 함께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가장 많이 기대해 본 작품이었다. 

앞서 언급한 '라시렌'은 " 물속에 혼자 있는 여자를 믿으면 안 돼. 130" 같은 경고를 통해 우리에게도 익숙한 물귀신 같은 공포적 대상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인어라는 환상적 존재의 원형-디즈니가 꾸며낸 빨간머리의 공주가 아닌 사람을 꾀어내 홀리는 괴물, 사악한 존재-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환상적인 면모를 가진 이야기여서 이 기묘한 존재와 "하나를 주지 않으면 셋 다 가져간다(131)"는 경고이자 선언의 반복은 무섭다기 보다는 마치 동화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편 '건방진 눈빛'의 제목은 조던 필 감독의 영화 '놉'에서 주인공 OJ가 광고 촬영장에서 주의사항을 전달할 때 보이던 태도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었다. 백인 앞에서 흑인의 시선이 부적절해 보이지 않도록 눈을 내리떠야 한다는 인종차별을 역으로 흑인 경찰의 왜곡된 시선에서 보이는 환각처럼 활용하고 있다. 이 밖에도 여러 단편들 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마법(33 / 57 / 371 /476)'은 조던 필 감독의 '놉'에서 '나쁜 기적'으로 표현되는 불길하고 불온한 사건, 증표를 뜻하는 듯 했다. 마법을 주로 긍정적인 느낌으로 연상하게 되는 편이라 부정하고 불온한 것으로 쓰이는 차이가 독특하게 여겨졌다. 

" 존중하지 않을 나라에서 존중을 얻기 위해 그가 바친 희생을 알기 때문이었다. 세계 대전에서 싸움으로써 노블과 흑인들은 자신을 증오하는 세상에 애정을 구걸했다. 그러니 어쩌면 흑인 칸에서 그가 받는 시선과 묵례는 존경이나 경의가 아니라 동정일지도 몰랐다. 428" 

이 블랙 호러라는 장르는 조던 필의 영화가 신선한 방식으로 충격과 공포를 전달해주었던 것처럼 확연한 개성과 함께 또렷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최근 개봉을 앞둔 한 영화 안에서 동양인 캐릭터를 전형적인 인종차별적 요소를 담아 이용한 것을 두고 이들이 저지르는 혐오에 우리가 얼마나 관대하고 감수성과 인지가 부족한지 지적하는 경각의 목소리도 나왔다. 흑인들의 대응이 과하다고 말하는-그러나 양쪽 모두에서 혐오와 차별을 당하는- 아시안의 입장에서도 우리가 인정과 호의를 구걸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19편의 단편들은 저마다 불쾌함을 가지고 있다. 왜 불쾌함을 주는가 생각해보면 그 안에 자리한 폭력성, 혐오가 그늘 속에서 우리의 눈과 마주칠 때 본능적으로 드는 거부감의 영향인 듯 하다. 사람을 인격적 존재가 아닌 사물이나 가축처럼 다룰 때, 더이상 사람의 마음이 남아있지 않은 행동을 보이는 대상이 위장을 하고 있을 때. 블랙 호러 장르는 그들이 당해온 차별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인간성에 대한 메시지를 인상적으로 전달하고 강조하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기대가 된다. 단순히 파격적이고 잔인하기만 한 이미지로 점철된 공포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 밖에서 비명 소리가'를 흥미롭게 읽는 동안 조던 필의 영화 또한 다시 해석해 볼 만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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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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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가가 평생 그린 소재 중에서 요아르가 가장 어려웠다. 그가 그의 친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화폭에 담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해 여름의 그 날, 해가 지기 시작하자 요아르가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너는 이 좆같은 마을에서 좀 떠나야 해." "그런 말 하지 마." 화가가 애원하자 요아르는 화를 냈다. "아니, 넌 떠나야 돼. 우린 이미 망해서 상관없는데 넌 아니거든? 씨발, 넌 존나 대단해서 전 세계가 인정하는 화가인데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것뿐이라고. 다른 새끼들이 너 대단한 거 알아봐도 그전에 우리가 먼저 알아챘으니까 그것만 까먹지 마." 43" 

  프레드릭 배크만. 이 이름이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이름을 앞에 두었을 뿐인데 어디선가 '탕 탕 탕 탕 탕' 베어타운의 하키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실제로 들어본 적 없는 퍽을 날리는 소리를 마치 일상처럼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이야기꾼과의 재회가 반갑고 기뻤다. 기대를 품고 책을 읽기 전에 어플을 하나 눌러 앤 마리의 노래를 찾았다. 어쩐지 십대시절의 풋풋한 한 때를 담은 노래를 들으며 읽어야겠다 싶었다. 경쾌한 리듬을 따라 튀어오르던 마음이 점차 다르게 두근거렸다. 어른에 대한 미움과 분노로 가득한 시작을 읽으며 나는 왜 어른이 되어버렸을까 안타까웠다. 십대의 내가 읽었다면 루이사의 마음이 어떻게 다가왔을까. 지금의 나는 안타깝게도 작품이 주는 충격과 감동에 빠져들기보다는 인테리어와 사진, 가격, 샌드위치의 만족감과 더 가까운 것이 확실한 어른이었다. 루이사와 이렇게 멀리 떨어진 채로 괜찮은걸까. 이 예리하고 불완전하지만 순수한 감성 앞에서 얼마나 마음을 열고 부딪혀 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이번에도 프레드릭 배크만이 열어줄 따뜻하고 감동적인 휴머니티가 살아있는 세계로 무사히 빠져들 수 있을까. '탕 탕 탕 탕 탕' 들어본 적 없는 퍽 소리를 속으로 따라하며 바다로 뛰어들듯, 새로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기로 한다. 기꺼이. 

우연하고도 운명적인 부딪힘으로 시작된 루이사와 화가/크리스티안/킴킴의 만남은 마치 두 사람의 생이, 두 우주가 온 존재를 다해 부딪혀 공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루이사와 화가의 만남은 마치 비슷한 색을 가진 영혼이 서로를 알아보고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듯이 자연스럽게 얽힌다. 그저 한 그림을 아주 오래도록 소중히 바라고 사랑해왔을 뿐인데, 그 안에 담긴 모든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었던 것처럼 이들의 닮아있음은 서로의 마음을 울린다. 이들의 짧은 공명은 피스켄의 죽음이 루이사에게 커다란 상처와 온 생을 통틀어 어찌할 수 없는 깊은 흔적을 남긴 것처럼, 소중한 이의 상실이라는 공통의 상처를 가진 테드와 연결된다. 서른 아홉, 마흔이 되어서 다시 열네살 시절이나 다름없는 열여덟, 날 것의 루이사를 상대해야만 하게 된 테드에게 몇번이나 위로와 응원을 보내야 했다. 두 사람이 점점 가까워지는 동안 어느새 "팔이 하나뿐이 남자를 나무에서 떨어뜨리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133)" 묻는 농담이 재밌어졌다. 그리고 루이사에게서 요아르며 알리가, 지나가버린 열네살의 날들이 느껴지는 때면 어쩐지 눈물이 났다. 

테드, 요아르, 알리, 크리스티안. 열네살들은 저마다의 고통을 버겁도록 안고 있음에도 서로를 너무나 사랑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아낄 줄 모른다해도 어쩔 수 없으리라 여길 수 밖에 없는 학대와 방치를 당하면서도 이들은 사랑과 관심을 나눈다. 받아본 적 없는 애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면서 아낌없이 표현했고, 온 힘을 다해 서로를 지키고 붙잡고 싶었으면서 어쩌지도 못하고 놓쳐버려야 했다. 가장 어두운 시기를 지나고 있기에 그럼에도 서로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가장 반짝이던 시절에 나누던 시덥지않은 농담과 말다툼에 웃음이 나다가도 그 반짝임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박제되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씁쓸했다. 가끔 이들이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너무나 깊게 느껴질 때면 당황하곤 해야했다. 이렇게 열렬히 누군가와 이어져있던 때가 있었던가? "나이를 먹으면 기억하지 못하는 심장의 두근거림(22)"처럼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그것마저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이런 관계도 '경험해 본 사람만이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경험하지 못한 경우라면 설명할 도리가 없이(22)' 모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은 꼬박 하룻밤이 전부였고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 사랑에 그보다 더 미친 듯이 빠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느낌을 절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522" 

이 웃기고, 씁쓸하고, 가끔은 어이없는 친구들의 이야기는 때로 너무나 달아서 놀랍기도 했다. 사랑을 쏟을 곳은 오직 서로 뿐이라 그들이 가진 가장 부드럽고 달고 상냥한 마음을 거칠고 날카로운 유머안에 녹여냈는데 그래도 문득문득 그 마음이 너무 달아서 이보다 달고 간질이는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최근에 달리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을 정도다. 치마를 입기 싫어하는 알리를 위해 세 친구 모두 치마를 입고 공연장에 온다. 가장 힘들어하고 피하고 싶어하는 일을 함께 해주는 마음, 치마를 입은 소년들을 상상하며 웃음이 날 지언정 따뜻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봄날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기대할 때 추천해주어도 될만큼 사랑으로 가득하다. '나의 친구들'은 장편을 장편으로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흡입력과 실없는 농담에 점차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게 되는 친근함, 빛이 나던 열네살의 어느 바다에 함께 뛰어들었던 것 같은 반짝임을 선사하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프래드릭 배크만을 너무나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싶지 않기도 하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세계에서 인물들은 힘껏 저항한다. 살아가기 위해 애쓰면서도 유머와 따뜻함을 잃지 않는 인물들을 응원하고 사랑하게 만들면서, 어딘지 모르게 감도는 슬픔의 그림자를 한 구석에서 조용히 품고 있게도 한다. 베어타운 삼부작의 마지막을 기꺼운 마음으로 읽지 못한 이유도 거기있다. 너무나 좋은 사람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의 안온을 빌게 되는 것처럼, 이야기 안으로 빠져들어가면서도 이면의 그늘을 느끼게 되는 것이 지워지지 않고 남은 얼룩처럼 마음에 걸렸다. 처음엔 슬픔이 너무나 크게 다가와 웃으며 읽으면서도 괴로운 마음이 컸는데, 삶이 누구에게나 공평히 안배해놓은 저마다의 굴곡 또한 어쩔 수 없는-때로는 필요했을지도 모를 과정이었음을 천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슬픔과 괴로움 마저도 프레드릭 배크만의 세계 속 인물들을 만나면 그 안에서 제 소임을 다 한다. 

누군가에게 기대를 품는다는 것은 깨어지기 쉬운 믿음이다. 하지만 '나의 친구들'은 그 믿음을 더욱 굳게 다지며 기대 이상의 감동을 보여주었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운, 오래도록 아끼게 될 만한 또 하나의 '나의 친구'가 되어준 책이다. 온 세상을 봄에 한걸음 더 가깝게 만들도록 내린 봄비처럼, 독자의 마음을 온통 감동과 따뜻함으로 물들일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 '나의 친구들'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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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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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여사는 그렇게 살아?"
"나는 그러지 않고 살기가 힘들어. 너는 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고." 99 

세상에는 아주 독특한 사람들이 있다. 물론 사람에게는 각자 저마다의 개성이 있긴 한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개성이 주머니 속의 가시처럼 가려지지 않고 드러날만큼 도드라지고 어떤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내도록 쓸려 반질반질한 돌멩이나 다름없이 모나지 않게 다듬어져 있다. '너의 나쁜 무리'를 읽는 동안 이렇게 개성이 강한 인물이어야 이야기가 시작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평범성을 확인받는 기분이랄까.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와 이게 무슨 일이야? 를 오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저런 사람에게 관심이 가고, 저런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것이구나 싶었다. 

책을 읽기 전에 '너희 엄마가 훔친 금두꺼비'에 대한 전화를 받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짧은 추천 영상을 봤다. SNS에서 요약해준 내용이 뒷 이야기가 궁금해지게 호기심을 자극하다가 끝까지 설명하지 않고 끊어버린 것이 야속했는데, 그 책이 바로 '너의 나쁜 무리'였다는 것을 알고 단숨에 읽기 시작했다. 금두꺼비로 시작된 자극은 뒤로 갈수록 점점 더 강해져 나중에는 금두꺼비 같은 것은 생각도 잘 나지 않게 된다. "너희 할멈 아랫도리가 그렇게 저렴하단다(78)"며 할머니 남자친구의 아내가 쫓아와 머리채를 잡는다는데 금두꺼비가 다 뭐란 말인가. 

"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더럽고 내밀한 이야기들에는 이상한 중독성이 있어 점점 그런 이야기 없이는 살 수가 없어지고 결국 그 이야기의 생산자가 되며 다른 사람까지 그런 이야기의 세계로 끊임없이 포섭하게 된다는 것이다. 80 너의 나쁜 무리" 

책 자체가 '더럽고 내밀한 이야기들의 이상한 중독성'을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관계들은 남들이 보기에 아무 의미도 없고, 때로는 한심하고, 그래서 뭐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은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모두에게 그럴지 모르겠지만 이 나쁘거나, 아무런 사이를 지속하고 싶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꼭 생산적이고, 깊이 있고, 뭐가 되어야만 하지 않은 것이 주는 감각들. 어딘지 비뚤고, 불경하고, 분방한 데에서 오는 배덕하고 은밀한 즐거움이 여기 있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은 새로운 길티플레져를 찾은 듯 몰래몰래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듯 읽었다. 

과연 책 속의 인물들은 어딘지 불편하고 이상했다. 남들이 사서 놀다가 버린 메추리들을 주워다 파출소에 가져다주는 것으로 사명감을 대신(42)하던 중일이 친구의 목을 졸라 영구적인 신체 손상을 입힌(65), 그 작은 메추리를 사서 굶기고 옥상에서 떨어트렸던(70) 비인도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문화 시민으로서 걸맞지 않은 행동임을 알면서도 자전거를 탈 때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고 다니는 것(143)처럼, 방금까지 시터와 같이 화투를 치고 놀다가도 한겨울에 설거지나 빨래를 할 때 찬물만 쓰게 하는 것(198)처럼 뒤틀림을 경고하는 감각들이 오갔다. 

"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폐를 끼치고 누군가는 극도로 폐를 끼치지 않게 노력하고. 그건 어쩐지 좀 이상했다. 공평의 문제라기보다 경계의 문제에 가까운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이 아주 별일이라고 생각하는 무엇이 누군가에게는 그다지 별일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라는 게 발생하는 것이다. 167_소란한 속삭임" 

그러다 어느 순간 독특한 인물들만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던 생각이, 위험하고 이상한 감각이, 거리를 좁혀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처럼 다가오는 계기가 있었다. 제법 입소문이 난 영화를 보러 찾아간 극장은 평소보다 사람이 많고 복잡했다. 극장 내부의 불이 꺼지자 여기저기서 밝기를 조금도 줄이지 않은 핸드폰 불빛이 환하게 퍼져나갔고, 이따금씩 영화음악 대신 벨소리가 울렸다. 정적인 장면에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거야?"하는 대화 소리가 오가고, 상영 중간에 라이트를 켜고 자리를 찾아들어온 다른 영화 예매자의 등장까지 빌런들의 집합소였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이게 무슨 일이야?' 싶은 별일이 별일도 아닌 것처럼 2시간 동안 이어졌다. 영화를 보는 2시간여 동안 꼼짝없이 그 빌런들 사이에 앉아서 결국 눈을 치뜨고 다른 사람을 째려보며 불쾌해하기를 포기하면서 "불가피하게 한통속으로 얽히고 마는" 자신을 깨달은 것이다. 나 혼자 집에서 넷플릭스를 보는 것처럼 조용하고 어떠한 방해도 없는 환경 속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관객들로 가득한 극장 안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지,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함께 앉아있기를 선택한 이들을 이해하기로 한다. 

빌런들이 더이상 빌런이 아니게 여겨지게 되는 것, 다른 이의 모남을 내가 조금 이해하기로 하고 나의 의도치 않은-혹은,- 부족함도 이해받으리라 여기는 관용을 경험하게 되었다. 팝콘 씹는 소리를 좀 내면 어떤가, 누구는 통화도 하는데. 그렇게 완벽한 한패, 나쁜 무리가 되어 본 영화는 불쾌하지만 유쾌했다.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주게 되는 계기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것. 핸드폰에 저장된 내 번호가 아줌마라고 되어 있는지, '희지(209)'하고 이름으로 되어 있는지 그런 사소함으로 달라지게 된다는 것처럼 그날의 2시간을 어떻게 느낄지 바꾼 것이다. 

그래 삶이 세상이 사람이 결국은 이렇게 어쩔 수 없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호오와 시비와 상관없이 얽혀 가는 것이라는 걸 2시간동안 책을 읽고, 2시간동안 세상 속에서 사람들에게 시달리며 얻어졌다. 이것이구나. 미움과 화를 접고 스스로의 평범성을 확신하지 않기로 한다. 나 역시 지질하고 구차하고 못난, "세계를 상대로 아주 오랫동안 저질러 온 실수(283)"가 있을지도 모른다. '너의 나쁜 무리'를 통해 세상과 한패가 되는 법을 하나 배운다. 세상이 왜 이러나 싶을 때보다 조금 더 든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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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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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고 내밀한 이야기들의 이상한 중독성‘, 우리의 새로운 길티플래져 <너의 나쁜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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