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소설인가 - 교유서가 소설
고은규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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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돌아보느라 무엇도 쓰기 어려워지는 책이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달수는 독방에 갇힌다. 그는 15년 동안 방 안에서 자신이 왜 갇혔는지, 누가 자신을 가뒀는지 알아내기 위해 짐작되는 과거를 적어내린다. 이른바 '악행의 자서전'. '이것은 소설인가'는 오달수를 가두었던 독방이라는 공간과 그가 적어내렸던 악행의 기록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천천히 계단을 올라 7.5층의 작은방으로 걸어들어가는 듯 했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앞에는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종이가-앞으로 내가 채워 넣어야 할 빈 공간이 하나씩 쌓이는 것 같았다. 

표제작인 첫 단편 <이것은 소설인가>부터 이어지는 <묻는 남자>까지 연달아 읽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내용이었다. "되찾아야 할 '윤리적 관계'"를 넘어 법으로도 걸릴만한 내용들 아닌가. 하지만 가장 먼저 내 마음에 맺힌 것은 빌려온 책에 대한 것이었다. 책장에 꽂힌 몇 권의 책이 수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내 것이 아니고, 또 앞으로도 내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동희가 자바를 데려와 몇 년을 키웠어도, 자바를 내가 데려온 윤오의 고양이라고 여기고 있듯이.
관철이 나미의 연락을 받은 것처럼, 동희가 윤오에게 연락했던 것처럼, 어쩌면 어떤 이야기는 십년만에 연락한 과거의 지인이 다짜고짜 책을 돌려주겠다며 일상에 끼어드는 내용으로 시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건 정말 소설이 아니겠지만. 고은규의 글들은 대체로 이렇게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려 블로그에 올렸다던 폭로글이 마치 동의없이 지인의 사적인 이야기를 소재삼은 소설들을 꼬집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소설에서처럼 너는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없어? 하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어떤 것들이 떠오를까. 순간 어떤 말도 할 수 없이 멈추게 된다. 이미 쌓아온 것은 어찌할 수 없다 하더라도, 과거에서부터 되살아 올 사람을 남겨두고 싶지도 않고 떠오를 잘못을 쌓으며 살고 싶지도 않아 한동안 많은 것을 줄이고 지내왔는데도 그렇다. 그러는 너는 나한테 잘했느냐며 되묻는 사람 역시 되고 싶지 않은데 사실 그것도 쉽지 않다. 

이어지는 <너의 집이 좋아>, <긁지 마, 제인>, <어느 로프공>, <이별을 그딴 식으로 하는 사람>은 집이라는 공간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 시대의 주거활동은 왜 이토록 많은 잡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집을 위해 치러지는 비용이 커서? 보내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집이라는 공간의 내밀함 때문에? 거주 불능의 상태가 주는 위협, 아무도 원하지 않아 떨어진 가치와 고립, 타인이 만들어내는 각종 생활 소음와 불편을 마치 자신에 대한 공격처럼 여기는 일이 많다.
초반 단편들처럼 나 자신에 대한 거리두기를 하게 만드는 강렬한 내용들도 인상적이었지만, '집'과 얽힌 불편함들도 어느 하나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내 집이라는 공간마저 내가 짊어지고 통제해야 하는 달팽이(만약 집이 크다면 거북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껍질을 지고있는 동안 신경을 거스르는 것들을 참을 수가 없어지는 불편이 생생하게 와 닿았다. 

" 그가 새 연인에게 묻는다.
"나 너희 집에 가도 돼?"
새 연인이 답한다.
"뭐가 어렵다고. 가자." 93 <너의 집이 좋아>" 

그 중 이 사소한 대화가 지난 달 읽은 김개미의 시집*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왜 집으로 온다는 거니>라는 제목인데 시집 안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 중에 하나여서, 다른 시들과 함께 이 시를 알리고 싶어 시집을 몇 권 사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집이란 공간과 타인과 나 사이에서 흐르는 여러 감각들을 깨우는 내용인데다 속으로만 담고 있던 것을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었다.
집과 나 사이에 타인이 끼어드는 순간 집이라는 공간이 달라진다. 불편하고 어색한 외부가 된다. 이것은 고양이에게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익명으로 머물다가는 카페같은 곳보다 더 조심스럽고 불편한 태도와 시선으로 집을 바라보게 된다. 저기는 원래 손을 대지 않는 곳인데 구경해도 괜찮아, 거기는 외출복차림으론 앉지 않지만 괜찮아, 여기는 정리를 안했지만 열어봐도 괜찮아, 우리집은 나 한 사람을 감당하기에도 부족하지만 네가 놀러 오겠다면 괜찮아, 하지만 사실은 모두 괜찮으면서 괜찮지 않다. 

이 괜찮지않음을 예사롭게 넘기려는 사람들에게 책은 시선을 맞추고 다짜고짜 묻는다. '혹시 이게 괜찮으신가요?'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묻는다. '정말 괜찮으신가요?'* 그런 책이어서 어려웠고, 힘든 지점이 있었다. 타인의 상처 앞에서 누가, 왜, 어떻게, 어떤 상처인지를 궁금해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을 헤아려보는 것을 소홀히했기 때문에. 소설의 경계에서 빠져나와 이제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독자의 몫으로 남겨주는, '이것은 소설인가'.


* 올드보이 2003
*단편 <이별을 그딴 식으로 하는 사람>의 자바
*단편 <묻는 남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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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셋째 밤 ㅣ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3
일월명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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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난 겁쟁이다. 아직도 가끔 집에 혼자 있는 밤이면 무서워서 불을 켜놓고 잔다. 미신도 잘 믿고 대신 허세도 잘 부린다. 믿는다고 무서워하면 얕잡아보일까봐 안믿고 안 무서운 척 한다. 공포영화, 소설, 만화도 한번 보면 잊어버릴 때까지 무서워서 머리감을때 노래 불러야 하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보고싶어 한다. 가끔 눈을 가려가면서, 보다 말고 멈춰서 귀여운 동물 영상으로 마음을 달래면서도 소름 쫙쫙 돋아가면서도 기어이 본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러니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셋째 밤'을 앞에 두고 또 어땠을까? 아니 왜 벌써 셋째밤이냐며 첫째, 둘째밤엔 왜 날 안불렀을까, 솔직히 요즘 진짜 무서운 공포 소설 읽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허세를 부리며 호기롭게 자원했다. 

책을 읽기 전 '호러 심청'과 '괴담-방 탈출 카페 제작 중에 생긴 일', '창포꽃을 세 번 접으면' 제목을 가장 인상 깊게 봐뒀기 때문에 기대도 컸다. 예상하기로는 '호러 심청'은 고전 소설인 심청 얘기를 잔혹동화 방식으로 비틀었거나 현대판 생활고를 겪는 소녀 가장의 분투기를 다뤘으리라 싶었다. '괴담...'은 영화 <백룸>이나 <8번 출구>처럼 요즘 유행하는 리미널 스페이스를 이용한 공포물이 아닐까 싶었고, '창포꽃...'은 어렴풋이 사랑 이야기가 얽혀 있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과연 공포물 짬밥 nn년차의 예상은 맞았을까? 

가장 무서웠던 건, '괴담...'이었다. 사람마다 뭘 가장 무서워하는지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귀신을 가장 무서워하는 겁쟁이에게 '괴담...'은 진짜였다. 독백 형식으로 된 전형적인 괴담풀이라 '괴담...' 도입부쯤에는 솔직히 좀 유치하겠네, 생각했다가 점점 무서워져서 의외였다.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구조를 따르는 것 같은데(계속되는 허세) 읽다보면 몰입이 되면서 어디를 향한지 모르는 반성을 하면서 읽었다. 알겠지만 겁쟁이들은 무서우면 일단 잘못을 빈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야!'였다. 제목부터 강렬한 이 소설은 가장 첫 번째로 '단편들...셋째 밤'을 여는데, 어쩌면 이 소설을 가장 무섭게 여길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괴담인 것 같으면서도 또 그 아는 맛에 빠져들게 되는 소설이었다. 사람이나 사건을 무서워하는 편이 아닌데도 인상깊게 읽었으니 현실적인 공포를 잘 살리지 않았나 싶다. 또 다른 단편 '우리 안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읽으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창포꽃...'이었는데, 아! 이 단편을 수십년만 빨리 읽었어도 나도 써먹어보는거 였는데 그걸못해봤네 싶어 아쉬웠다.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반드시 잘 기억해두겠다. 그러니 다른 독자들은 이 단편을 읽기 전에 꼭 종이와 펜을 준비해두세요. 요즘은 핸드폰에 적어두면 되려나. 만약 나라면을 여러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N 입장에서 즐거웠다. 성향이 F인지 T인지에 따라 가장 감상이 갈릴 수 있는 단편이 아닐까. 근데 일단 나라면 고소할거임. 당할 확률이 더 많지만. 

SF요소가 있는 단편들도 있었는데, 트럼프가 망쳤다. 이제 은하연방 같은 단어를 보면, 트럼프가 달은 미국 땅*이라며 담당 우주군 유니폼까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게 떠올라 웃음이 터지게 되었다. 연임에 성공한 미국 대통령이 이렇게 제 정신이 아니라는 걸 전세계에 공표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 공포이자 웃지만은 못할 코미디다. 어쨌든 덕분에 마지막 단편인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현실의 달리 방법이 없는 인물에 의해 제압되었다. 

원래 예고를 하는 콘텐츠는 그만큼 기대를 불러 모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감상자를 준비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려워진다. 공포물입니다,하면 얼마나 무서운지 한번 두고 보자 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고, 추리물입니다,하면 범인이 누구인지 트릭이 뭔지 밝혀내겠다 마음으로 보게 되는 것처럼. 그런 기대와 준비에도 충분히 무섭게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셋째 밤' 읽었다. 재밌었다고 말하며 책을 덮을 수 있었는데, 무서웠던만큼 읽는 시간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남은 감상이었다. 공포를 즐길 줄 아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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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
김영민 지음 / 김영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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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소설집을 읽기에 아직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자신에 대한 불신. 그리고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한쪽만의 탓이 아니라는 변명에 기대어 저자에 대한 미약한 의심을 피워내며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를 읽었다. 제목만 보고 달달하게 단맛만 맛보려고 이 책을 집어들었다간 큰 혼이 날 것이야, 책 표지가 아니더라고 책등이나 날개에라도 경고해 두었어야 페어플레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 조교없이는 자살할 능력조차 없는 것이 교수 아닌가! 교수가 자살 같은 것을 할 리가 없다! 197" 

첫 단편 제목이 [이웃집 개에게 쓰는 편지]였을때부터 예감했어야 마땅하다. 그 어떤 비유가 아닌 진짜 이웃집 개에게 편지를 쓰는 사람의 글을 읽게 되리란 것을. 가끔은 화가 나기도 했다. 이렇게 말장난 같은 문장들 사이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밝히라고, 괜히 울화통이 터질 것 같기도 하고, 남들은 다 여유롭게 눈짓을 주고받으며 낄낄 웃으면서 책을 읽고 있을 것 같아 초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만 웃지 못하고 있을까봐 포모*를 느끼게 하는 소설이라니. 

" 무슨 '주의자'가 될 시간에 내향인은 차라리 자기반성에 몰두한다. 내로남불 태도를 거부한다. 오히려 내불남로 태도로 살아간다. 내로남불을 하느니 생불이 되겠다는 것이 내향인의 인생관이다. 90" 

이미 다 우려낼대로 우려내 맹물밖에 남지 않은 MBTI 얘기도 듣다보면 어느새 집중하게 만드는 언변이 매력적이다. 그러니 체력과 집중력 저하로 인해 따라가기 버거워져도 정신차리고 다음장으로 따라붙게 만드는 힘이 있다. 때로는 좀 과하게 나간다 싶기도 하고, 너무 멀리 퍼져나간 갈래를 적당히 갈무리해줬으면 하다가도 '뇌절은 뇌절이다.'* 하고 포기와 인정을 하게 된다. 

" 완성된 사람은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미완성이기에, 결함이 있기에, 상대를 찾아 나서고 그 상대가 그를 완성하려 들 때 사랑이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결함을 포함합니다. 아니, 결함이 필요합니다. 결함이 없으면 사랑하고 싶지도 않고, 사랑이 가능하지도 않겠지요. 215" 

여유롭게 문장을 다루며 글을 요리해나가는 모습이 약이 오르게 만들기는 하지만, 확실히 '대체 뭐야?' 하고 흰눈으로 보기엔 날카로운 문장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기강을 잡고 있었다. 비슷한 느낌을 어디서 받았더라 한참을 생각했는데, 예전에 플라시보 시리즈로 읽어본 적 있었던 초단편 장르의 개척자 호시 신이치였다.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에서 즐거움을 느꼈다면 호시 신이치도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웃긴 것 같은데 우습진 않고, 아무말이나 늘어놓는 것 같은데 그 안에 예리하게 벼려진 침이 하나 숨어있어 읽다보면 묘한 책을 하나 읽어보고 싶다면. 가진 재능을 왜 이렇게 휘두르는지 궁금해지는 글빨을 가진 작가를 만나고 싶다면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를 읽어보길 추천한다. 차마 더 풀지 않고/못하고 쌓아둔 글이 분명히 더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다음이 궁금해지는 만남이었다.


*FOMO (Fear of Missing Out) 놓치는것에대한두려움
*[동어 스님전]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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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월드 - 교유서가 소설
오선영 지음 / 교유서가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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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스무 살 넘으면 꼭 가자. 138_스페이스 월드

 한동안은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책들의 맨 위에 '스페이스 월드'를 올려놓을 것 같다. 오선영 작가의 '스페이스 월드'는 좀처럼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른다. 하고픈 말을 위해선 적나라한 인물과 클리셰나 다름없는 익숙한 사건들을 가져와 고스란히 펼쳐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솔직함이 재미있고 익숙하게 다가오는 점이 좋지만, 한편으로는 독자를 한걸음 더 그의 안으로 혹은 세계의 예상치 못한 골목 안으로 이끌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남는다. 

 익숙한 피곤함을 안겨준 '어니언마켓'이 첫 시작이어서 책을 읽는 동안 그런 인상이 더 강하게 남았는지 모른다. 이름만 살짝 바꾼 당근마켓 소재부터, 영어유치원 레벨테스트니, 엄마들 브런치 모임이니,하는 여왕벌 얘기는 소설,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니까. 이렇게 판에 박힌 인물과 사건을 끌어다놓을 수 밖에 없었나. 아이 엄마들 모임은 다 저렇게 서로 눈치만 보고, 어딘가 한둘씩 정상적이지 못한 구석을 드러내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경쟁하고 남 욕이나 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틀 안에 또 한 번 찍혀나와야 했을까. 기대가 컸던만큼 섭섭했다.

 특히 '아직 오지 않은 말'처럼 관계 속에 깊이 파고든 균열의 정체가 이렇게 긴 시간동안 사이를 가르도록 방치할만한 것이 맞을까 의문이 들 때도 그 한 걸음이 아쉬웠다. 각 단편들 안의 인물과 사건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기에서 허구로 한 걸음 더 나아가줬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오히려 안평이라는 공간에서 '순자'를 통해 두 세계가 엮이는 것을 보며, 선주가 놓쳤던 안평마을의 마지막 날을 이렇게라도 보게 되었구나 안도했다. 어쩌면 그래서 이들은 어떻게 되는걸까, 그 이후가 걱정되는 마음이 아쉬움으로 쌓였는지도 모른다.

 읽어가며 아쉬움을 지워내는 재미도 쌓여갔다. 익숙하고 단편적이라 치부하고 말아버리기엔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묘한 끌어당김이 있었다. 이런 느낌을 어디서 느껴봤더라? SNS를 하다 자극적인 내용의 사연 콘텐츠를 우연히 보고 결말이 궁금해져 계정까지 찾아가보게 되는 그 느낌이었다. 마치, '중고거래에서 사간 내 물건 플미 붙여서 판 사기꾼 참교육 썰' 같은 제목이나 '남직원만 따로 챙기면서 꼬리치는 회사남미새 썰' 같은 제목이 떠오른다. 유치하고 뻔하다고 거부하기엔 어려운 재미와 공감대가 있다. 그렇다면 이 또한 이 책의 매력이 된다.

 곁에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그런 자신의 내면을 어쩔 수 없이 모른척 삼켜내고 멀쩡한 얼굴로 버텨내야 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그 나약하고 비겁한 이중적이고 평범한 모습들이 주변에 흔하고, 흔한만큼 공감되는 스스로를 깨닫는다. 보증금을 가지고 도망가버린 도영에 대한 원망보다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배경을 가진 은하에 대한 불쾌감이 종종 더 짙게 느껴졌던 '안평', 여자친구와 회사동료 사이에서 혼자 줄을 타던 '카페인 랩소디', 자신의 인생으로 걸어나간 친구에 대한 애정과 원망이 오가는 '스페이스 월드', 보낼 수도 품을 수도 없는 '임시보호자'처럼.

 처음엔 작가의 색과 힘이 조금만 더 보였다면 어땠을까 싶었는데, 어쩌면 결말이 좀 더 닫혀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영된 아쉬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것 역시 생각하기를 작가에게 외주 주려는 챗지피티 시대의 영향일까. 이미 결말이 열린 채 마무리지어진 책을 앞에 두고 생각이 미치는대로 여러번 다시 보니 멈춰있던 그 지점에서 직접 인물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처음은 가벼움으로, 그 다음은 궁금함으로, 그리고 좋았는지 싫었는지 구분하기 어려운 모호한 마음으로 자꾸만 펼쳐보게 되는 면이 있다.

 선주가 너무 미워서 나쁜 년이라고 열번씩 욕해주고 싶었던 건 누구였을까, 종종 책을 읽다가도 멈추고 궁금해하곤 했다. 그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그대로 담아내려고 노력한 결과물이 흔하고 뻔한 모습들이라 그리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아쉽게 여겼던 것일까 뒤늦게 곱씹어보게 된다. 나는 왜 이렇게 느꼈을까, 왜 좋은가, 왜 싫은가 이유를 갖기 위해 계속해서 다시 읽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 묘한 인상을 남긴다. 책을 읽고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을 카드에 적어 다른 사람과 서로의 이유를 나눠보고 싶은 책이다. 그럼 한 걸음씩 더 가까워지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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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블루스 ㅣ B사이드 아카이브 1
슬리만 카데르 지음, 이수원 옮김 / 니케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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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바로 이런 이야기였구나. 

" 하지만 난 뒤로 물러서지 않았어. 언젠가는 하늘과 새, 그리고 엄마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으니까. 진짜로! 81" 

솔직히 말해 배꼽 빠지게 웃기진 않는다. 아마 프랑스 식 유머가 일일이 약간의 해석을 붙여서 전달되어야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명한 인물이나, 지역, 비슷한 발음 같은 것들을 이용한 말장난들은 바로 알아채서 이해한다면 재미를 느끼지만 (발음이 비슷한 점을 이용한 농담) 이런 식으로 설명을 통해서 읽게 되면 웃을 수 있을만한 포인트를 잃어버리고 전달되기 때문이다. 좀 아쉽긴 하지만 왐은 상당히 정신사납고 수다스러운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금새 바쁘다. 

자신이 어디에서 어떤 위치에 있던 일단 뭐든지 하고, 또 한번쯤은 배에 힘을 주고 앞으로 나서봐야 뭔가를 손에 쥘 수 있다는 걸 왐이 증명한다. 처음 영어를 할 줄 모르면서 덮어놓고 '예스, 예스'할 때부터, 아 주인공이라고 믿고 보기에 좀 찝찝한 느낌인데? 싶다가도 가진 능력도 없이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유람선 '오션킹'을 타기로 결정한 배짱과 자신이 꽤나 매력있다고 믿는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 흥미를 끌었다. 그리고 왐과 함께 유람선에 오르자마자 바보같고 어리석은 언행만 보이는 그의 트롤력에 붙여보지도 못한 정이 다 떨어지는 기분을 맛본다. 

여권 숨기기, 여자와 눈만 마주쳐도 착각하거나 느끼하게 굴기, 작업복 투정부리기, 작업시간 펑크내고 자기, 근무 빠지고 식당가기 같은 일들을 단기간에 해치우면서 한국인을 답답하게 만든다. 겉으로는 쎈 척하며 허세를 부리지만 속으로 진땀을 흘리고 때로는 남몰래 눈물마저 흘리다 잠드는 온갖 찌질한 모습을 다 보고 있자면, 얘는 그냥 여권 돌려주고 '오션킹'에서 그냥 쫓아내는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관리자 뽀빠이의 밀착 관리를 통해 시키면 모든 일을 다 해치우는 어엿한 '조커'가 되어가는 왐의 성장을 보다보면 왠지모를 기특함을 느끼게 된다. 

대체 이 정신사나운 사람의 이야기가 언제 웃겨지지? 얘 때문에 나도 유람선 가장 밑바닥 칸에서 50리터 쓰레기 봉투 세 개를 가득 채울만큼 많은 바퀴벌레가 드글거리는 열악함을 강제 체험하고 있는데, 책의 절반이 넘어가도록 햇빛이라곤 더이상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배의 바닥층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리기 전에 갑판 위로 올라가 볼 수나 있을지 조급해진다. 이대로 물이나 푸고, 바퀴벌레 치우고, 로봇의 쓰레기를 비우고, 형광초록 마운틴 듀나 마시다 어느날 왐의 항해는 끝났습니다, 하고 하선하게 되려나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인내심이 다 마를 것 같은 때에 드디어 왐에게도 볕들 날이 온다. 그리고 왐이 보여준 밑도 끝도 없이 일단 질러보는 배짱, 그리고 하면 하고, 가면 간다는 과감함이 긴 시간 시키는 일은 다 한다는 '조커'가 쌓아온 쓸모와 섞이면서 상승효과를 가져오기 시작한다. 거기에 약간의 우연한 행운들이 살을 더해 쓸모는 없는데 쓸데는 많았던 왐을 쓸모가 많고 쓸데는 적어지도록 만들어줬다. 더 나은 평판과 더 나은 근무 환경으로, 나름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영 못마땅했던 주인공이지만 그래도 유람선 타서 일할 생각을 한 거 보면 애가 영 띠리하기만 한건 아니었다며 슬그머니 재평가하게 된다. 

왐의 환경이 개선되면서 읽는 사람의 마음도 조금은 풀어진다. 어쩜 이렇게 수다스러운가 싶었던 왐의 세세하고 생생한 설명 탓에 정말 같은 선실 안에서 상대방이 만들어내는 사소한 소음, 풍기는 땀냄새 같은 것 마저도 짜증을 유발하는 피곤을 함께 쌓는 마음으로 몰입해서 지켜봤던 것 같다. 그래서 조금은 함께 고생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엔 같이 웃게 되는 이야기다. 웃기다기 보다는 재미있다는 감상이 더 어울렸다. <오션 블루스>의 생생함 덕분에 생에 첫 크루즈 체험을 바닥층에서 시작한 기분이다. 그리고 바퀴벌레 얘기를 읽은 탓에 두번째 탑승은 하고 싶지 않아질 것 같다. 

너무 더워서 바다로 여름휴가 가는 것조차 망설여지는 때, 가장 가깝게 찾을 수 있는 여행지가 되어줄 소설이다. 다만 바다가 보이는 창을 가진 깨끗하고 조용한 객실이 아니라 배의 가장 밑바닥, 이층침대 두개가 놓여진 좁은 공간에서 수다스러운 빌런과 함께하며 얘 언제 사람되긴 하겠지, 응원하는 마음으로 함께해야 한다. 그럼 왐이 당신에게 절묘한 운명과도 같은 이야기와 웃음으로 보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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