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사랑니 TURN 4
청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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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우 찾은 이직처였지만 도망치는 곳에 낙원은 없다더니 진실로 그러했다. 인격적으로 무시당했고, 월급은 크게 줄었다. 스트레스는 서로 간에 어찌나 끈끈한지 매번 손을 잡고 단체로 찾아왔다. 누가 내 마음 좀 알아줬으면 좋겠네, 좆같은 세상. 속으로 욕만 할 뿐 꾹 참으며 사는 탓에 좆같은 세상은 매일매일 좆같기만 했다. p43 " 

 처음, 책 두 권이 있었다. '플라스틱 세대'와 '낭만 사랑니' 뭔가 반대 느낌의 두 제목을 보고 있다가 아무래도 낭만은 뭔가 나랑 안 맞을 것 같아 순서대로는 아니지만 '플라스틱 세대'부터 읽었다. 사랑니는 이미 다 발치하고 난 뒤라 없기도 했고. '플라스틱 세대'를 기대 이상으로 재밌게 읽어서 '낭만 사랑니'를 읽으려니 영 집중이 안됐다. '플라스틱 세대'는 사건이 끊임없이 벌어져서 순식간에 다음 전개로 나가게 만드는데 '낭만 사랑니'는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염라와 나한이 나오고, 치위생사의 이름이 천직이면서도 불길하게도 이시린이고. 잠깐 보려다가 다 읽어버린 '플라스틱 세대'와는 다르게 '낭만 사랑니'는 읽어보려고 앉았다가 몇 번 딴짓하게 됐다. 결국에는 이렇게 감동하게 될 줄 모르고. 이 두 책이 동시에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더라 비교하게 되었던 것이 " 이처럼 우주만물은 상호작용을 하며 인연을 쌓고, 서로를 느끼고, 공명하며, 아름다운 개성을 얻는다. p101"는 것 아닐까. 

 "못난 자들은 자기만큼 못난 자도 견딜 수 없기 마련이라 과장은 오만한 자를 보면 혐오감을 이기지 못해 구역질했고, 지금은 위기 상황이었다. p81 " 아, '낭만 사랑니'의 장점이자 단점은 시린의 직장생활이 너무 안좋은 방향으로 진짜 같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자면 뭔가 떠오른다. 넓지도 않은 한국 땅 어딘가는 두 번 다시 근처도 가고 싶지 않은 지역이 있는데 '거지같은 전직장 구역'이다. 밥만은 맨날 갈수있는 한 가장 맛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먹어서 근처 맛집이 어디있는지 잘 꿰고 있지만 그 맛집 두 번 다신 안가도 괜찮을 그곳. 책을 읽다 문득 세상이 왜 이러냐며 성토하고 싶어지는데, 그럴때마다 심호흡을 하며 과거의 어딘가에서 밥벌이를 하다 겪은 일들을 줄줄이 펼쳐놓고 싶은 마음을 잘 갈무리한다. 시린의 일상과 주변인들이 너무 진짜 같아서 답답하고 피곤한데 공감도 됐다. 나와 다른사람 사이의 거리감이나 관계같은 것들을 생각해보며 읽었다. 서로에게 칼날같은 말을 내뱉으면서도 그 안에는 염려, 사랑, 불안, 관심, 슬픔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인물들에게서, 나는 걱정이라고 이름 붙인 것들로 도리어 남에게 생채기를 낸 일들은 없었던가 떠올렸다. 속마음이 그대로 상대에게 전해지도록 노력하는 일도 용기가 필요하다. 

 "평소에는 사방이 암흑이라 본인이 꺼진 줄도 몰랐지만 환하게 타오르는 불을 목격하는 순간이 오면 어쩔 수 없는 조바심이 들었다. '혹시 나만 꺼져 있는 걸까?'하고. 목구멍 언저리가 아릿했다. p35" 청소년소설을 읽는 걸 좋아하는데 그 안에 야무지게 공감과 갈등, 극복, 성장같은 것을 넣어놓은 점이 마음에 든다. '낭만 사랑니'는 그 못지 않은 의미들을 꾹꾹 눌러담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흔들리는 어른들을 위한 성장소설이 아닐까 싶다. 어릴땐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은지 고민하는데, 어른이 되고 나면 속도가 신경쓰인다. 방향은 이미 돌릴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저마다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 남들이 가는만큼은 가고 있나 뒤쳐진 건 아닐까 불안해지고 만다. 나란했던 것 같은 사람들의 등만 보이는 것 같고, 내 등을 보고 있을거라 생각되는 사람들보다는 앞서있고 싶은 시기와 교만에 익숙해지는 것을 '어른이 됐다'고 핑계삼는다. 그러지말아야지.
 
 " 그녀는 늘 일어나지 않은 일을 고민하며 살았다. 눈앞에 실체 없는 장막을 두고 사는 그녀에겐 앞으로 나아가는 일보다 제자리에 멈춰 있는 일이 편했다. 남들에게는 손끝으로 가벼이 밀어내는 문일지라도 그녀에게는 부딪칠 엄두가 나지 않는 벽이었다. 시린은 콧잔등을 간질이는 강아지풀 같은 고민 하나로도 온 세상의 파멸을 상상했으니, 매사가 무서웠다. p133 " 주인공 시린의 나약함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었다. 망했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실수가, 막힌 길이 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상황, 그 일의 과정이나 결과일뿐 나의 시간은 계속된다. 막상 상황 앞에서는 그게 전부인 것 같지만 과정 속에서는 한 순간일뿐이고 내가 나아가고자 하면 나는 망하지도 끝나지도 않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한때는 몰랐다는 걸 곱씹으며 읽었다. 

 아쉬운 것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을 소개하려면 내용이 너무 많이 드러나게 될까 피해야한다. 처음에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었던 시작을 나처럼 어렵게 여기거나 진부하거나 지루한 소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갈수록 관계와 세상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감동을 주는 좋은 책이었으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특히 수보리와 나호라의 이야기에서 감동했다. 이 둘의 갈등은 이미 결말을 어느정도 예상했음에도 사건을 풀어내는 말들이 깊이있는 울림을 준다. 언젠가부터 책 선물도 취향이 타는 조심스러운 선택지가 되었지만, 이 감동을 전하고 싶어 친구에게도 책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벗이여. 그대를 보고 나는 내가 되고, 그대 또한 나를 보아서 그대가 된다네. p222" 읽고나면 떠오르는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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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세대 TURN 5
김달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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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에게 갑자기 나타나는 이상 식욕! 플라스틱에 대한 탐닉으로 이성이 마비되고 목숨까지 위협받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 

 시작이 어려웠다. 읽어야 할 책들이 몇 권 있었고, 그 중에는 오랜 시간을 요할 것 같은 책도 있고 도서관 대출기한이 끝나가 금방 반납해야 할 것도 있었다. '플라스틱 세대'는 그에게는 애석하지만 나에게는 다행히도 둘 다 해당되지 않았다. 거기다 다른 책들에 비하면 읽기도 편할 것 같아 뒤로 미뤄두고 나중에 읽어볼까 싶었다. 다른 일을 하다가 하루가 거의 끝나갈 무렵, 뭔가를 제대로 시작하기엔 부담스러운 시간에 가벼운 마음으로 한두장 읽어보다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속도감있는 빠른 전환은 몰입도 빠르게 만들었다. 재밌다. 재난물을 좋아하는 취향과도 맞았다. 

 " "웃기지 않아요? 연간 몇천만 톤씩 플라스틱 쓰레기를 배출해서 환경을 망쳐왔던 인간들이 이제 그걸 다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는 게. 적어도 지구는 덜 아프겠어요." p36"
솔직히 좀 뻔하다고 생각한 면도 있다. 주로 인간이 파괴한 환경이 자연의 분노로 돌아와 그 댓가를 치른다는 메시지는 자연보호 표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안에 담긴 선한 의도를 넘어서는 특별함을 갖거나 매력을 찾기 어려운 주제다. '플라스틱 세대' 역시 특유의 공익광고스러움을 가지고 있지만 특별했다. 플라스틱을 먹는 이상식욕 증상이 나타났습니다,에서 끝나지 않고 세대로 이어지는 변화를 꾀했다. 이야기의 범위가 길어지면서 전개에 속도감을 더하고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가끔 인류의 진화는 어떻게 이루어질지 생각하곤 하는데,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는 조건은 무엇인지를 두고 신체와 심장, 폐 같은 장기를 대신하는 것이 인공물이라면 사람과 로봇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으로 두는가, 기억을 저장하고 학습을 보조할 수 있는 칩이 이용된다면 사람과 AI의 경계는 어떻게 되는가 같은 문제를 떠올렸다. '플라스틱 세대'는 새로운 진화를 맞이하는 인류를 상상하게 한다.  

 " 재현이 온라인에 남긴 증언은 과연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MZ세대라고 불리는 1990년대생을 중심으로 퍼진 알 수 없는 플라스틱 섭취 현상은 그동안 체내에 축적된 환경호르몬이 내분비계에 영향을 미쳐 끝도 없이 플라스틱을 원하도록 세포 변형을 일으킨 결과였다. 그들의 뇌는 플라스틱을 음식으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의 몸은 자기가 원해서 받아들인 것에 의해서도 쉽게 파괴됐다. 플라스틱으로 인해 죽어가는 해양 포유류의 전철을 밟게 된 것이다. p55 " 애석하게도 MZ세대들이 그 플라스틱 세대의 첫 걸음이 되었는데, 안타까웠다.  MZ라는 명명도, 그걸 대표하는 이미지도 기성세대의 마음대로 규정지어졌는데 플라스틱 세대로도 꼽히다니. 자원을 마음껏 써온 MZ보다 더 윗세대는 이상식욕이 발현하지 않는데, 빨대도 종이로 대신하게 되었던 MZ세대들은 플라스틱 빨대를 그리워했던 만큼 플라스틱을 먹고 싶어하게 된다. 영원히 고통받는 MZ 살려. 

 재난영화에서 앞으로 닥쳐올 재난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주인공 집단이 늘 그러하듯, 이 이상식욕과 그 뒤에 숨겨진 거대한 비밀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주인공 예인 역시 고단한 길 앞에 놓여진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야만 하는 주인공의 숙명을 안고 세대의 흐름을 거슬러 나아간다. " 예인은 두렵고 무서웠다. 그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을 강하게 결박한 경찰의 팔에 얼굴을 파묻고 매달렸다. 당신도 죽을 거야...... 비로소 예인의 중얼거림을 알아들은 경찰이 힘을 풀었다. 괜찮다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예인을 달랬다. "죽는다고요, 진짜 다 죽는다고." 예인은 현실감을 되찾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아니, 그것은 뒤늦게 찾아온 현실감이었다. p108 " 누가 모든게 안전하고 검증되었다는 말 대신 모든게 망가졌고 결국 다 죽을거라는 말을 믿고 싶겠는가. 듣기 조차 싫을 현실을 폭로한 예인은 재난의 중심으로 끌려간다. " 사람, 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먹잇감을 찾으려 필사적으로 쓰레기통을 뒤지고 차도로 뛰어들었다. 충희의 시선을 따라 이 광경을 함께 보게 된 예인이 차게 얼어붙었다. 충희는 예인에게 등을 내보이며 업히라고 했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p156 " 좀비를 다룬 아포칼립스 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요처럼 책을 읽으며 플라스틱으로 인해 상실된 인간성과 치안이 무너진 도시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인지의 순간은 부정과 함께하고, 진정한 혼란은 인식과 인정 사이에서 발생한다. 현실의 혼란에서 우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하겠지만. 

 하루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읽기 시작한 책은 다음날의 시작이라는 넉넉함을 맞이했다. 조금만 읽어봐야지,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빠져들어 멈출 수가 없었다. 아주 잠깐 사이에 남은 책장의 두께보다 읽은 책장의 두께가 더 두꺼워진 것 같았다. 그만큼 빨리 줄어드는 책장이, 어차피 조금만 더 읽으면 되니까 그냥 마저 읽어버리라고 부추겼다. 모자란 잠은 지금이 아닌 나중의 내가 감당하면 될 일이니까. 자연과 건강을 해치는 플라스틱을 다음 세대에게 넘기는 무뢰한처럼 생각했다. 다음날을 피곤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부디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첫 장을 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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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셋 2025
김혜수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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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볍고, 인상적이고, 길지 않다. '셋셋'은 오랫동안 책을 읽지 않았던 사람에게 딱 맞는 소설집이다. 핸드폰은 어디서든 손에 들고 있을 수 있지만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펼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건들이 필요한지. 주변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하고, 갑자기 떠올라 처리해야 하는 잡일이 없어야 하고, 커피도 한 잔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긴 연휴를 앞두고 책을 읽을 여유가 많겠다 생각했더니 누구나 다 그 날을 기다려왔던지 늘 뭔가 일이 있어 연휴가 끝나자 일상으로 돌아와 책을 제대로 펼쳐보았다. 읽다보니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다 읽었는데 각각의 매력이 달라 읽을 때마다 기분도 감상도 변했다.  


 " 우리는 머리를 어떻게 감아야 하는지 부모님한테서 배운 적이 없었다. 우리는 눈치껏 알아서 자라고 있었다. 어른이 되어 그때를 돌아보니 헛헛한 마음이 든다. 아이들이 눈치껏 자라면 분명 무언가를 놓친 상태로 자라버린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때 놓친 것들은 지금에 와서 다시 찾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p27 김혜수_여름방학 "


 두 아이 사이의 미묘한 관계와 2000년대로 돌아간 듯한 그 시절의 감성이 물씬 풍기는 요소들도 재밌다. 내가 어렸을 적엔 'ㄹ'을 넣어 별명을 짓는 게 유행이었는데 동네마다 규칙이 달랐던 건가 도깨비말이 생소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피시카산'을 보며 그래도 뒤쳐지지 않고 잘 따라한다며 우쭐하다 25년 정도 뒤쳐진 생각을 하고 있는게 우스웠다. 추억할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름방학'이 더 재밌지 않을까싶다.


 영화 서브스턴스를 보며 자신은 어떻게 늙어가고 있는가 외모점검을 하게 되었다는 감상을 남긴 사람들이나 기생충을 보고 냄새가 신경 쓰인다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을 본 적이 있다. 일차원적인 감상이고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어조였다. 엘라스틴 샴푸에서 나는 냄새가 전지현 냄새일 것이라고 믿던 세희와 은진, 세희에게서 나던 군내가 자신에게도 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은진을 보면 누군가에게는 그 마저도 인지의 순간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한다.   



 " "이상하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p.58 이서희_지영 "


 정말 무서운 문장이었다. 어느 괴담의 가장 소름끼치는 순간이 이렇지 않을까. 이번 셋셋을 읽으며 인상적인 문장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이 문장을 선택하겠다. 이쯤에서 상당히 질겁하고 이 뒤로 또 얼마나 끔찍한 이야기가 이어지려나 싶었던 것과는 다른 흐름으로 무난히 끝을 맺는 내용이지만 이 문장을 보고 확 몰입이 되기도 했고, 전체적으로 종교와 연관이 있는 작품들이 꼽혔나 싶은 생각이 들어 다른 작품들도 유기적으로 살펴보게 되었다. 


 '동물원을 탈출한 고양이'나 '아이리시커피'는 불쾌함이 더 크게 느껴졌던 글들이다. 재미가 없거나 별로여서가 아니라 치매라는 소재를 너무 잘 써서 실제감에 답답한 느낌을 받아서이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에 종종 가서 카페일을 돕기도 하는 터라 읽는 내내 손끝이 차가워지는 불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이것들이 더이상은 소설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같은 소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호날두의 눈물'은 그 전까지 다소 심각하고 가라앉은 감상을 전환시켜주는데다 사회적으로 40대 남자가 20대 여자에게 편의점 1+1 커피를 하나 나눠주는 행위가 불법인지 아닌지 논의가 필요한 문제가 제기되어 흥미로웠다. 하도 결백을 주장하길래 가해자의 입장에서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지만 남자 아르바이트 생에게는 1+1 콜라를 나눠주지 않고 가지고 온 것을 보고는 아, 개저씨네 했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여자친구와 헤어진 것까지 날강두 때문이라니 이건 좀 억까아닌가 생각하면서도 웃으며 읽었다. 


 셋셋을 통해 낯선 이름의 작가들을 만났는데 금방 반갑고 익숙한 이름들이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사진과 짧은 영상에 익숙해진 바스라진 집중력을 끌어모아주고 긴글이 부담스럽지 않게 적당한 공감과 자극이 오가는 내용들이라 다음 셋셋도 기대하게 된다. 새해를 맞아 독서를 결심한 누군가 요즘 재밌게 읽을만한 책 없는지 물어오면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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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닌 -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하승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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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떤 사람인가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는 소설' 이라고 짧은 한 줄 평을 남겼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계속해서 괴로웠다. 내가 한 것은 질문이 아니라 변명이고 항의였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편에 선다. 아무래도 주인공의 시점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 서사에 몰입하고 입장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멜라닌'은 나를 철저히 시선으로 만든다. 책에서 나오는 수많은 배경인물들 재일을 지켜보고 재일을 무시하고 재일을 구분짓는 시선이 나였다.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하려면 가능하겠으나 대부분은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여길 것이다. 우리가 기사로 접하는 수많은 사건들에 대해 판단하고 비난하는 인터넷 대법관의 자세를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신념, 판단, 상식 등이 마땅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 는 평론가 신형철의 문장은 이런 현상을 꿰뚫는다. 평범한 나 자신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멜라닌'은 한국사회의 문제 그 자체이다. 그러면서 한국적이지 않다. 장애, 국제결혼, 인종차별,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한부모가정, 마약, 학교폭력, 이민자, 세대갈등, 정치, LGBT, 범죄 등등 생각나는 핵심 단어들을 늘어놓기만 해도 사회 전반의 문제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한 그릇 안에 섞여 담긴 것이 비빔밥을 떠올리게 하는데 한국적이지 않은 것들- 이민 가정의 생활상- 마저도 한국적인 방식으로 끌어안았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봤어, 라고 하듯 어떤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을지 몰라 다 담아본듯하다.  


 " 내 피부는 파랗고 엄마는 베트남 사람이다. p.7 "


 '멜라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소설의 도입부인 첫 문장을 제외할 수 없다. 어떤 비유적 표현이 아닌 말 그대로 피부가 파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주인공 재일은 한국-베트남 국제결혼가정에서 파란 피부로 태어났다. 재일이 겪게 되는 일들이 재일이 파란 피부를 가졌기 때문인지, 국제결혼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 불분명하게 뒤섞여있다. 재일을 바라보면서 나와 재일을 구분지을 수 있는지, 나는 어디에 속해있고 그건 어느 정도의 위치로 셈이 가능한지 짐작해본다. 재일을 바라보는 시선이 되듯, 나를 바라보는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 이 피부색은 나를 계급의 가장 낮은 단계로 내려보낸다. 다수에 속해 있음이 정상성을 정의하는 세상에서 내 피부는 확연한 비정상이었다. 장애를 가진 것과 다름없었다. 살가운 태도로 나를 대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 행동에는 반드시 동정과 연민 그리고 약간의 자기만족이 섞여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음울한 기분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나는 이유 없이 무시당했고 때로는 예고 없는 친절에 당황했다. p.24 "


 은연중에 내 피부가 파랗지 않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소설속의 재일을 동정하고 연민하는 자신을 깨닫는다. 오늘 리뷰를 쓰기까지 연달아 보게 된 기사가 트렌스젠더가 여성부 운동 경기에 참가해서 순위권을 모두 차지했다는 것과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서 은근히, 하지만 노골적이고 전형적인 인종차별을 드러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우리나라는 남이고 북이고 그냥 아무렇게나 불러버린 우리에게만 '역대급'인 무례가 저질러졌다. 시선을 사로잡은 기사들 안에서 나를 포함하고 있는 목록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동시에 베트남인인 엄마가 피해자이고 상식적인 사람이고 한국인인 아빠가 가해자이고 몰상식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면모들이 불만스러웠다. 드러난 폭력성의 차이이지 상대방을 무시하고 존중하지 않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 아닐까. 베트남에서는 정말 파란색과 상관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대비되는 구도를 위해 지나친 차이를 둔 설정이지 않았을까. 베트남 사람들도 파란 피부는 차별했을텐데, 결국 너를 버린건 엄마인데,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네 몫의 생활비를 벌어오는 건 아내에게 배신당한 아빠일텐데, 넌 그런 아빠를 버리고 엄마를 찾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신부를 돈으로 사오는 국제결혼의 문제점에 대해 많이 접해왔으면서도 막상 국적으로 나눠지는 '편'에 서려고 하는 마음이 드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래서 자꾸만 스스로를 검증하는 질문을 한다. 편견과 차별은 옳지 않다. 폭력과 범죄는 근절되어야 한다. 당연한 말로 여기고 있으면서 자신의 입장이나 이익에 따라 기우는 마음은 잡기 어렵다. 하지만 재일아, 클로이는 목숨을 잃었지만 넌 살아있잖아. 넌 남자잖아. 넌 영어를 할 수 있잖아. 넌 젊잖아. 같은 구분들을 만들어내는 스스로의 얄팍함이 느껴질 때마다 껄끄럽다.   


 불편한 부분들이 흥미를 자극했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을 보여지는 그대로 가져왔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이런 점들이 전부 '멜라닌'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했으리라. 


 "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어둠이 내게는 안식처가 되었다. 빛이 없는 세상에는 색깔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물이 검게 채색된 시간, 물에 잠겨 있는 동안 나는 투명했다. 호수에 둥둥 떠 있으면 어둠은 정수리 위로 시커먼 입을 벌렸다. p170 "


 " 나는 더 이상 백인을 우러르지도, 흑인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선망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았다. 인간을 무채색으로 만들고 나면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 일터와 인간 관계에 지친 사람들, 애국심과 규율로 무장한 벙커에 숨어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p291 "


 어둠안에서 안식처를 발견한 재일이, 그 안에서도 서로를 향한 공격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으며 " 작고 어린 파란색의 개인 p.291 "은 성장했다. 그리워했던 것에 품었던 환상만큼 버리고 떠나온 것에 대한 이해를 갖는 파란색의 존재가 되길. 


 단숨에 읽은 장편은 오랜만이다. 만연한 혐오가 피곤해질때 그것이 외부에서 나를 공격해오는게 맞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비워내고 싶을 때 읽어보면 자극이 되어줄 만하다. 책을 읽고 언젠가 파란 피부의 사람을 마주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잠깐 생각해보자. 혹은 어느날 피부가 파란색이 되어버린 스스로는 어떨 것 같은지. 그 둘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었던가. 자신의 안에 점으로 뭉쳐진 '멜라닌' 덩어리를 마주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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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의 아이들 꿈꾸는돌 39
정수윤 지음 / 돌베개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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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결국은 혼자서 가야 하는 길. 누구도 대신 죽어 줄 수 없듯이 누구도 대신 저 강을 건너 줄 수 없다. 친구들은 이 땅에 남을 것이고, 나는 새로운 땅으로 떠나야 한다. 외롭고, 무섭지만, 그래야 한다.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p 87 " 


 디아스포라 문학이라는 말이 좀 생소해서 찾아보았다. 디아스포라는 그리스어로 '고국을 떠나 흩어진 사람들'이란 뜻으로 원래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지칭한다. 후에 그 의미가 확장되어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 집단 또는 그 거주지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문득 자연스럽게 실향민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낯설게 생각했는데 전부터 우리를 관통하고 있는 의식과 다름 없었구나 싶었다.


 소설은 머리를 땋듯 세 사람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되는데 처음엔 좀 헷갈려서 여름과 설이의 이야기를 여러번 다시 읽기도 했다. 이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합쳐지게 될지도 궁금하기도 했고, 낯선 북한식 표현들도 많아 아래 달려있는 주석을 참고하며 읽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다. 대부분의 표현들이 의미를 어림짐작으로 알 것 같은데 우리가 쓰는 말보다 조금 더 거친 느낌을 주는 표현들이 많았다.  


 " 아니, 아랫동네 여성분들은 이렇게 혁명적으로 사람을 사귀시나. p137 "


 2023년 6월 4일 블라디보스토크 북 영사관 가족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며칠이 지나고 우리나라 뉴스에서도 이 영사관 가족의 실종 사건을 다루며 그들이 한국으로의 망명을 시도했을 가능성에 대해 보도했는데 그로부터 한 달 뒤 러시아 공안 당국이 이들 모자를 체포하기 위해 모스크바 행 항공기를 강제로 회항시켜 공항에서 이들을 체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축구선수가 꿈이고 손흥민을 좋아하는 '한광민'의 이야기를 읽으며 언젠가 보았던 이 사건이 떠올랐다. 


 " 지우자. 비우자. 그리고 한 마리 물고기가 되자. 내게도 분명, 태어난 이유가 있을거야...... p154 "


 '민설'이 돼지우리에서 숨어지내다 가족들도 등지고 고향을 떠나와 갖은 고생 끝에 브로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여자가 부족해 돈을 주고 신부를 사오는 낯선 몽골 남자의 집이었다. 여성들은 탈북을 시도하며 브로커에게 속아 인신매매를 당하기도 한다는 기사를 흔히 본 기억이 떠올랐다. 설이 강제로 남자에게 보내졌을때는 소름이 끼쳤는데, 죽을 각오로 저항해서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났을땐 우유를 먹이고 먹을 것을 싸서 보내준 할머니의 마음은 또 어떤지 사람이 가진 복잡한 면면들을 가만히 생각해보게 된다. 


 " "대가로 뭘 원하죠?" 미카엘인가 하는 작자가 달짝지근한 미소를 보냈다. 실없이 왜 자꾸 웃는거야. 흥, 저런 달콤함에 속을 만큼 바보가 아니야, 난. "원하는 거 없어." "거짓말하지 말아요." 나는 다시 섬으로 눈길을 주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인간들이 저 섬만큼이라도 솔직해지면 좋겠다. "내가 원하는 게, 딱 하나 있기는 있어." 거봐, 내가 뭐랬어. "로즈(여름)의 행복." p142 "


 사람이 가장 무섭고, 또 사람이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 파도의 밀물과 썰물처럼 오가며 마음을 저미고 감동을 준다. 여름이 미카엘을 만나 그의 선의를 믿기로 한 것, 광민이 배낭여행을 온 일행들과 우연히 만나 남한 대사관으로 가는 법을 전달받게 된 것, 설이를 팔아넘겼던 브로커 부녀가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돌아와 함께 떠나기로 한 것이 그렇다. 결국 이들이 만나 함께 파도치는 바다에 서게 되기까지의 여정이 전부를 버리고, 걸어서 가까스로 닿게 되는 생에 대한 도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근 고위층의 잇단 망명으로 혼란해진 북한 체제에 대한 뉴스를 많이 접하게 되면서, '고발'이라는 책을 낸 반디라는 작가에 대해서도 재조명 되기도 했는데 '파도의 아이들'도 함께 관심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같이 읽어본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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