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깔과 결을 담은 우리말 - 풍부한 감정, 다양한 감각, 섬세한 표현의 매력
김경집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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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한 책인데 의외로 빠져들게 되었다. 저자의 단호함과 확신, 우리말과 문화에 대한 애정이 읽는 사람도 감화되게 만드는 면이 있었고, 풀어내는 단어들의 면면이 꽤 매력적이기도 했다. 이런 책들은 주제나 방향성이 있는 사전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싶겠지만 줄줄이 단어만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책 중간중간 K-콘텐츠, K-스토리 파워 같은 것들을 두고 우리 문화가 세계로 어떻게 뻗어나갔는지 엮어낸 글도 있어 환기가 된다. 이 단락의 시작은 두번이나 연속으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시작해서 저자가 얼마나 그 흥행을 기쁘게 여겼는지 감도 안온다. 재미있게 보고 큰 흥행에 함께 기뻐하기는 했지만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을만큼 시간이 지나서 다시 봐야하나 싶었다.
이밖에도 가수 BTS와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도 자주 등장한다. 이 콘텐츠들이 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는가, 또 우리의 영화, 드라마 등의 작품이 왜 호평을 얻는가를 그 힘의 바탕에 언어가 있었음을 연결해 풀어낸다.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는 이유도 다양한 맛이 담긴 우리말로 쓰인 대사들이 가진 미묘한 차이를 어려움 없이 이해해 '능수능란'하게 풀어내는 자연적인 능력(36)이 있고, 이를 섬세하게 풀어낸 연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가끔은 좀 과한가 싶다가도, 아예 한글이 없이 영어나 일본어 표현이 남용되는 간판이나 멀쩡한 제 이름을 두고도 굳이 바꿔서 쓰는 탓에 불고기, 덮밥, 찹쌀떡 같은 말이 오히려 자리를 잃게 되는 걸 보면 이정도로 아끼고 내세워도 부족하단 생각도 든다. 

- 살갑기는 평양 나막신(119)  
- 애운하다(182)
- 시식잖다(113)
- 자늑자늑하다(244)
- 드다르다(260)
- 반지빠르다(363) 

이 단어들을 알고 있거나, 보면 뜻이 어느 정도 감이 올까? 나는 사실 전혀 감이 오지 않는 표현이라 따로 적어둔 것이다. 몇 해 전 청소년들의 어휘력 저하 문제를 다룬 프로그램*이 화제가 된 적 있는데, '사흘, 글피, 기적 소리, 심심한 사과'같은 표현들의 의미를 모른다는 내용이 나왔었다. 그때 청소년들이 제시된 단어를 보고 이런 뜻이 아닐까,하고 유추하던 것처럼 나 역시도 책을 보면서 이런 뜻일까 예상해보다 처참히 틀리곤 했다. 그래서 그때 요즘애들은 이런 단어를 정말 모르나 의아하게 여겼던 것을 반성했다. 모를 수 있고, 배워서 알면 되는거지. 책에서 소개될 단어들을 첫눈에 봤을때 의미가 대충이라도 느껴지는지 아닌지를 유심히 봤는데, 같은 묶음 안에 있어도 어떤 의미로 쓰일지 감이 오지 않는 단어들이 있어서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웬만한 단어들은 보면 대충 느낌이 오겠지, 싶어서 좀 만만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꼽꼽하다(211)'처럼 꿉꿉하다의 작은말이 있을거라 생각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다. 비슷하게는 '반주그레하다(300)'의 큰말 번주그레하다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예 몰랐던 표현을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은 책을 읽기 전부터 익히 기대했던 점인데, '차끈하다(256)'를 봤을때는 달리 와닿는 면이 있었다. '차끈하다'를 그냥 봐서는 느낌이 잘 안오는데 따끈하다와 연관지으면 반대로 차갑다는 뜻이겠구나 싶어진다. 최근 '식다'는 표현을 두고 뜨거운 음식의 온도가 내려가면 식었다고 하는데, 차가운 음식의 온도가 올라가도 식었다고 표현하게 될 때가 있어 혼자 궁금해하다 용법을 찾아본 적이 있다. 온도가 내려갈 때 쓰는 말이라 차가운 음식의 온도가 올라가면 데워졌다 따뜻해졌다고 사용해야 한다는 결과를 보았지만, 이는 미묘하게 어감이 다르게 여겨져 아직 속시원한 해결을 보지 못했던 참이다. 마침 따/차"끈하다"를 같이 사용하는 것을 보고 다시 생각이 났는데, 다른 독자들의 생각도 궁금해졌다. 

또 다른 재밌었던 점은 잘못된 사용을 하고 있는 표현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건 재밌다기 보다는 부끄러운 점이기도 한데, '어중간하다(125)'가 한자에 우리말 접미사가 붙은 혼혈어이고 이를 '어줍다' 나 '어정뜨다' 같은 우리말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중간하다는 말을 잘 써와서 다른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과,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익숙한 표현의 실체를 맞닥뜨리게 된 듯한 가벼운 놀람이 있었다. 어중간하다와 같이 묶여있는 '어지빠르다(엊빠르다)(122)'는 정도가 넘고 처져서 어느 한쪽에도 맞지 않다는 뜻이라는데, 엊빠르다를 무심결에 엇비슷하다와 비슷하게 생각했다가 전혀 다른 뜻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동안 잘못 써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리기 같은 시합에서 누가 먼저 들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엇빠르게/엇빨리 들어왔다는 표현을 구어로 사용한 적이 있는데, 내가 착각했던 것처럼 잘못된 표현이었으나 듣는 이도 대충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에 있었던 것이 우스우면서도 신기하다.
비슷한 실수로는 '암팡지다와 옴팡지다(162)'가 있다. 작지만 암팡져,라는 말을 어리거나 몸집이 작아도 태도 단단하고 기세가 좋다는 의미로 사용해왔던 것처럼 비슷하게 옴팡지다를 써왔는데, 옴팡지다는 '아주 심하거나 지독한 데가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책에 들어준 예시처럼 옴팡지게 뒤집어썼다는 말을 보니 그 차이가 이해되었는데, 이렇게 확실히 구분해서 설명을 읽기 전까지는 옴팡지다 역시 암팡지다는 의미와 구분없이 잘못 써왔던 것을 깨닫게 됐다. '민틋하다(302)' 역시 맨틋/맨뜻/맨들로 대신해서 써왔던 것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말을 정말 대충하고 다녔구나 부끄러움과 반성이 몰려온다. 그럼에도 나와 대화를 나눈 상대는 찰떡같이 뜻을 알아듣고 이어가주었으니, 저자가 왜 한국어 화자들 사이에 섬세하게 구분하고 공감하는 미묘함이 있다는 것(36/37)을 감탄하였는지도 알 것 같다. 
인터넷에서 한글의 다양한 의성어, 의태어 표현에 대해 감탄하는 외국인 영상*을 본 적 있는데, 그때는 그저 외국인이 한국말을 잘하는 것과 그 미묘한 차이를 표현해내는 것이 재밌고 신기해서 보고 좋아요를 눌렀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글의 가치와 글맛에 대해 그 사람이 더욱 진지하게 마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겨졌다. 저자가 계속해서 의성어와 의태어의 가치에 대해 강조(189 의성어와 의태어라는 보물창고)하는 것을 보니, 당연한 것을 예사롭게 여기지 않고 귀하게 봐야겠단 생각도 들었다. 

" 우리말의 풍부하고 다양한 부사와 형용사는 문화와 콘텐츠 영역에는 엄청난 축복이다. 그런데 언어의 경제성이 중요한 구어에서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안 쓴다. 그래서 그런 낱말을 만나려면 부득이 문어, 즉 글자로 만나야 하는데 독서 인구가 갈수록 빠르게 줄고 있으니 이러한 언어들이 소멸된다. 그것이 얼마나 큰 문화적 손실인지는 잃고 난 뒤에야 뼈아프게 절감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 미리미리 챙겨야 한다. 몸에 필요한 비타민은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서 문화의 진짜 필수영양소인 낱말을 잃는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84" 

저자는 우리말의 장점과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특히 우리가 사용하지 않아 점점 잊혀지고 사라지는 언어의 소멸에 대한 큰 우려를 표한다. 말이란 자꾸 써야 퍼지고 생명력을 갖게 된다(53)며 쓰지 않으면 무용한 것에 지나지 않(34)으니 죽은 언어가 되지 않도록 잘 사용되지 않는, 그러나 소중한 우리말 표현을 가끔이라도 불러내(43) 볼 것을 이야기한다. 더불어 문화와 언어의 힘을 중요시 여기는 만큼 이를 강력한 국가의 힘으로 보고 정책과 지원을 펼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272)도 함께 담아냈다. 당장 눈앞의 이익(경제/돈)에 얽매이지 않고 장기적인 힘이 되어줄 문화의 가치와 역할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과감한 결단을 내린 행보(282)를 짚어준다. 책안의 'k-데모크라시의 힘(139)' 내용은 요즘 개봉하여 주연 배우들과 관람객들마저 공격을 받고 있는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인물에 대한 평을 담고 있어 우려가 되기도 했다. 요즘처럼 맥락을 읽지 못하고 정치성향으로 피아를 구분하여 욕하고 비난하고 매도하며 검증이니, 사상, 매국이니 하는 잣대를 휘두르고 다니는 사람들이 기승을 부리는 탓에 공감하며 읽은 부분이기도 했다. 

" 언어는 계속해서 생성, 변화, 소멸한다. 새로운 언어가 나오는 만큼 새로운 사고와 감각이 탄생한다. 언어는 모든 콘텐츠의 원천이다. 우리말에 널리 깔려 있는 의성어와 의태어를 활발하게 사용하고 연구하며 그런 사유와 감각의 방식을 새로운 콘텐츠 영역에 이식하고 배양하는 것이 차별적이며 지속적인 한류의 힘을 길러내는 것이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 생각만 바꿔도 세상이 바뀔 수 있다. 198" 

가볍게 읽을 생각이었는데 읽을수록 재밌다. 하나씩 단어와의 관계를 풀어가며 읽다보니 시간도 오래 걸렸다. 그 의미를 대충이라도 가늠할 수 있는지, 의미를 짐작하는 정도인지 알고 사용할 수 있는지, 확실히 설명이 되는지 구분해가며 마주했다. 이게 저자가 말한 "낱말 만지기(233)"와 비슷한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낱말 만지기'라는 개념을 지난 23년 [어른의 말.글 감각]이라는 책에서 선보였다고 하는데, 기호로서의 문자를 감각을 동원해 입체적으로 알아보는 활동이라 한다. 백마디 말보다 한번의 경험이라는 것을 그대로 적용한 활동이 아닌가, [어른의 말.글 감각]의 내용도 궁금해졌다. 겉만 봐서는 학술적인 내용을 담은 딱딱한 어휘집처럼 여겨질 수 있겠지만, 기대 이상의 깊이와 새로운 발견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함이 있는 책이니 꼭 한번 읽어보길 추천한다. 

" 언어가 사라지면 그 말이 담고 있는 내용도 함께 사라진다. 안 쓰면 사라진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바로 나 자신이다"라는 말은 "나의 언어가 곧 나의 삶이다"와 같은 값이고, "내 말과 삶에서 빚어낸 사유가 내 콘텐츠이다"와 이어진다. "말이 곧 얼이다"라는 말은 상투어가 아니라 속이 꽉 찬 말이다. 얼은 감각과 감정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 거기에 사유가 담겨야 한다. 그래서 사유의 언어가 필요하다. 381" 


*2021년 3월 EBS '당신의 문해력'
*인스타그램 anssem_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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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나간 세상에서 아픈 사람들 -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정신과 의사의 생존 가이드
조애나 치크 지음, 제효영 옮김 / 심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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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쓰레기 같아?
근데, 가끔 좀 쓰레기처럼 굴면 안 되는 거야?
그러게, 쓰레기가 될 수도 있지.
안 그런 사람이 있을까? 184" 

영화 <더 드라마>에서 결혼을 앞둔 커플이 친구들과 저녁을 즐기다 자기 인생 최악의 비밀을 하나씩 밝히기로 한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상처주고 거짓말을 한 과거의 잘못을 하나씩 고백하는 그들 사이에선 약간의 경멸, 비밀스러운 눈짓과 웃음이 오간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조금 더 은밀하고 얄팍한 유대가 한겹 더 쌓인다. 안 그런 사람이 있을까,하는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평범해보이는 선량한 이웃의 모습을 한 영화 속 인물들에게도 쓰레기같은 비밀이 하나씩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가끔 쓰레기가 되며 산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며 살지만 그래도 가끔은 쓰레기가 되고 만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꾸만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 같은 순간을, 하루를 보내고 난 뒤에 자책에 빠지곤 하는 우리에게 '정신나간 세상에서 아픈 사람들'은 쓰레기가 될 수도 있지, 해버린다. 그리고 가끔 당신이 쓰레기가 되는 이유는 당신이 분리수거도 안되는 쓰레기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불운하게도 쓰레기통 같은 세상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풀어놓은 비밀이 관계를 망치는 방아쇠가 되지만,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중에도 당신이 하려고 했던 그 나쁜 행동이 반드시 당신이 사이코패스라는 의미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빈번하게 벌어지는 사건들을 접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아, 그것을 자신의 의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어린 시절엔 더욱. 그러니 자신에게도 그런 비밀이 있다해도, 쓰레기통 속의 쓰레기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해도 너무 자책하지 않기로 하자.
사실 나 역시 책의 목차를 보자마자 5장부터 읽었다. 5장의 제목은 <인간쓰레기가 되지 않는 법>이다. 비록 책이 인간쓰레기가 되지 않는 확실하고 명료한 방법을 소개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지 않는 법을 말해준 것에 가깝지만 그래서 더 좋다. 지금은 그래 뭐 쓰레기면 어때, 하거나 쓰레기가 아니라 쓰레기통 구역을 잠깐 지나고 있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 뿐이야 생각하기로 해본다. 

" 사는 건 힘든 일이다. 부처가 깨닫고 가르친 고귀한 진리의 첫 번째가 인생은 고통이라는 것이고, 프로이트의 가장 큰 열망은 환자 개개인의 절망을 공통의 불행으로 전환하는 일이었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인류의 진화가 행복하거나 평온한 삶이 아닌 생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18" 
다행히 너무나 평범하고 나약한 우리만이 아니라 대단해보이는 사람들마저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공표해놓았다는 것이다. 나만 힘들거나 특별히 더 나쁜 선택만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이 고통은 모두에게 속해있다. 그러니 때로 나쁘게도, 약하게도, 흔들리며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SNS를 보면 다른 삶들의 하이라이트만 모아놓은 것임을 알고도 비교하게 되곤 하는데, 인류의 모든 걸음은 비하인드를 통해 추진력을 얻었음에 다시 위로를 받게 된다. 

 "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이 불안과 우울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건, 생각을 중시하는 게 당연시되는 환경에서는 괴로움이 지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건강한 감정 경보인 두려움, 수치심, 죄책감, 분노, 슬픔, 저조한 기분을 없어져야 할 감정으로 여기며 스스로 자기 몸에 두 번째 화살을 쏜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지 자꾸만 곱씹고, 기분이 나아지는 게 정상이라고 가정하고, 혹시 과거에 저지른 잘못이 이런 나쁜 기분의 원인은 아닌지 찾으려고 하고, 이렇게 안 좋은 기분으로 영원히 살면 어쩌나 294"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은 생각을 했던 부분 중 하나인데 여기서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우리가 반복해서 두번째 화살(237)*을 자기자신에게 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번째 화살은 불교 경전에서 전해지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가르침이라고 한다. 나쁜 사건은 단 한 번 일어났을 뿐인데 우리는 그 사건을 계속해서 곱씹으며 그 때의 부정적인 감정을 이어간다.
세상은/상대는 한 번 화살을 쐈을 뿐인데 그것에 얽매여있으면 스스로 자신에게 또 다른 화살을 꼽는 것과 다름없다. 이 불필요한 감정에 부림 당하지 않고 멈추고자 하는 것이 두번째 화살을 피하는 방법이다. 이와 싸워 이기거나 회피하거나 매몰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끌려다니지 않아야 함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우리는 일이 잘 안풀리거나,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날 때 심지어 아플 때도 반사적으로 자기자신을 살핀다.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상황이 이렇게 되기까지 뭐가 문제였을까 자신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나 때문일까, 나는 왜 이럴까 같은 자책과 점검, 반성을 하려한다. 이 두번째 화살을 자신에게 겨누기 전, 타인이 이런 상황에 처해있다면 어떻게 대해줄 것인지 생각해본다(209).
타인이 실패를 겪거나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자신을 탓하던 생각을 그대로 할 수 있을까?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속으로 생각할지언정 차마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타인에게 보이는 위로와 친절을 같은 상황에 처한 자신에게도 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쉽게 잊는다. 가장 잘 대해주고 아껴줘야 할 자기 자신에게 남보다 못한 대접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또 하나 우리가 머리속에 잘 기억해두어야 할 것은, 완벽함에 대한 추구, 영원한 지속은 없다는 것이다. 저자 역시 "영원한 것은 없다는 깨달음을 통해 도리어 위안을 얻게 되었다 234"고 했는데, 우리-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이미 그 깨달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 없다. 이미 지드래곤이 말하지 않았던가, 영원한 건 절대 없다고. 케이팝이 오늘도 1승을 했다.
더불어 영원하지 않음은 완벽함에 대한 환상을 단념시킬뿐 아니라, 우울과 불안이 우리를 잠식하는 때마저도 일시적임을 말한다. "우울하고 불안할 때 떠오르는 생각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모두 기분이나 감정을 일시적으로 나타낼 뿐이다. 338" 그러니 그늘 아래에 있을 때 잠시 자리를 피하라고 조언한다. 그늘에서 벗어나고 보면 가득했던 구름들이 걷히는 순간이 온다. 
세상이 혼란하고 험난해질 수록, 나와 다른 사람을 나누고 서로를 탓하고 싶어질수록 연민과 공감을 통한 인간성의 회복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선함과 악함을 구분짓고 싶고 나와 남을 나누고 싶겠지만, 우리는 어느 한 가지 역할만 하며 사는 것이 아니고(146) 우리의 행동은 서로 연결(221)되어 다른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더욱 위로가 되는 것은 남과 나를 구분짓고 나누는 것보다 타인에 대한 호기심과 연민에서 비롯된 낯선 사람과 나눈 작은 호의 같은 것들이다. 

" 이런 세상에서 스트레스 받고 괴로워하는 건 어디가 망가진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놓이면 괴로워하도록 만들어졌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생존을 도와주는 경보장치가 작동한 결과다. 세상은 붕괴 직전이고, 모두의 경보가 크고 또렷하게 울려야 시스템이 다시 균형을 찾을 수 있다. 17" 

'정신나간 세상에서 아픈 사람들'을 읽는 것은 삶이 레드레드 신호를 주는 딱 그만큼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거기서 벗어나야 하거나 괴로움에 부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 삶은 원래 힘든 것이다. 가끔 힘들고, 남과 같이 살아가야 하는 게 부담스러운 정신나간 세상에서 우리는 때로 아프다. 다만 어떤 가치를 선택하고 따르며 사느냐(378)를 스스로 정해 행동하며 살 수 있다. 단순히 세상 탓을 하고 개인에게 위로만 건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책이라 의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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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 소통 불가능성의 인문학
정희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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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늘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매번 대화 주제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맞춘 주제를 만날 때마다 반복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김과 만나면 건강 이야기를, 박과는 가족 이야기를, 최와는 취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처음엔 대화 주제가 바뀌지 않고 그 내용 마저도 매번 비슷하게 이어진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대화할 때 중간에 길을 잃어 다른 이야기로 흘러갔거나, 결말이 나지 않을 주제여서 못다한 이야기를 마저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의 대화가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의 대화가 반복되는 건 어쩌면 말이 통하지 않아서,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토론을 하거나 시비를 가리는 것도 아닌, 일상적인 대화 안에서조차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낀 뒤로 처음엔 실망감이 들었다. 왜 내 말을 안 들어주지? 그리고 이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도 용케 서로 만나서 대화를 하고 못다한 이야기는 다음에 마저 하자며 헤어졌구나. 지금은, 그냥 그렇구나 한다. 이 책의 소박한 목표가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소통이란 원래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소통의 실패를 나의 성격이나 태도 문제로 돌리지 말자" 23
원래도 힘든 것이 너와 내가 같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나서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위로가 되었다면 그것으로도 괜찮아졌다.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를 보고 처음엔 분명한 갈등들을 떠올렸다. 요즘은 각자 자신이 속한 집합 안에서 그 밖의 모든 집합들과 다툼을 벌이고 있다. 정치적 성향, 성별, 지역, 직업, 성향, 종교, 심지어 복숭아는 딱복이 좋은지 말복이 좋은지, 탕수육 소스를 붓는지 찍는지로도 첨예하게 갈라진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아무리 대화해보았자 차이와 갈등만 깊어지고 달라지는 일이 없다. 웃으며 시작해도 비난과 비하로 갈라지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순간 차이가 차별이 되고, 갈등이 혐오가 되어 극단적인 분열과 다툼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을 뿐 이를 풀어나가기 위한 시도와 의지는 미약하고 그조차 점점 단절되고 있다고 느껴졌다. 이대로 괜찮은걸까, 어떻게 해야할까 궁금했다. 

책은 냉철했다. 타인과 '완벽한 소통'을 하는 것은 평화롭고 평범한 방식으로는 불가함(35)을 명료하게 밝힌다. 나와 남이 다른 존재라는 사실에서 오는 다름은 생활, 사고, 공감의 배경에 영향을 끼친다. 보라색을 말할 때 각각 떠올리는 보랏빛이 서로 다르듯, 그러나 서로 같은 색을 말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정리해서 알려주고, 이 모양인 세상과 그보다 더한 사람들에 맞서 더 잘 싸우는 법을 알려주거나, 대신 욕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저자는 독자를 설득한다. 이 책을 읽어보겠다고 선택한 당신, 소통을 위한 의지와 준비가 되어 있군요. 소통의 어려움을,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세요. 그리하여, 설득되었다. 

물론 이 책에서도 소통법을 알려주고 있다. 다만 저자가 알려주는 소통법은 하나같이 침묵하기, 적당한 선에서 대화를 멈추기, 설득하려 하지 않기, 자리를 피하기 같은 방법이다. (3장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소통법 161) 이기는 법을 잔뜩 기대하고 눈에 힘을 주었다가 어쩐지 힘이 빠지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읽고나서 생각해보니 싸움의 고수도 어찌할 수 없는, 무기를 든 상대 앞에서는 무조건 도망치라고 조언하지 않는가. 36계 줄행랑이 그 비법인 것처럼 이기려고,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거나 소통의 어려움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고수의 비법이라면 비법이 맞는 셈이다. 

처음엔 문장이 명료하고 딱딱해서 어색하게 느껴졌었다. 생각해보니 '소통'하기 위해, 가급적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문장으로 썼구나 싶었다. 혹은 강의를 기반으로 한 내용을 책으로 정리하였기 때문에 전달하는 방식을 바꾸면서 생긴 틈이 느껴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소통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바꿔 화를 가라앉히고 상처를 줄일 수 있도록, 밖이 아닌 내부를 향한 조언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세상과 싸우는 것 같고 사람들과 단절되어, 사는 게 살아남는 일이 되어 외로운 섬(57)처럼 느껴진다면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를 읽어보자. 긴장과 무게를 덜어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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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조절 - 안전하지 않은 사회에서 나를 지켜 내는 방법
권혜경 지음 / 을유문화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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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 조절'. 제목을 앞두고 말 그대로 나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운, 이를테면 더위 때문에 더 민감하게 짜증이나 화를 내게 되는, 사소한 일이라도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기분이 상하고 불만을 표출하게 되는 감정조절장애에 대한 내용일 것이라 추측했다. 막상 앞에 두니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더 넓었다. 감정 조절의 개념에 대해 내 안에 있는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성장하며 겪어온 경험과 나를 둘러싼 세상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도록 도왔다.
들어서며 1장에서는 나와 같이 오해가 있었을지 모를 독자들에게 감정 조절의 개념을 설명해주고, 3장에서는 개인의 경험-유아기와 성장 과정이 끼친 영향을, 4장은 사회 문화적 배경과 사건이 끼친 영향을 살펴볼 수 있으니, 만약 자신 내면의 불안정함이나, 사회의 갈등과 불안이 어디에서 기인했는가에 대해 이해해보고 싶다면 3, 4장의 내용이 흥미로울 것이다. 
마무리하는 5장에서는 감정 조절의 해결책, 트라우마 극복과 내면의 치유를 돕는다. 이론적인 설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호흡과 신체의 이완, 명상, 수면 등 직접 실천하며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하고 있어 실용적이다. 마지막 장 뿐 아니라 각 장의 마지막(56, 113, 201, 311)엔 명상 실습을 실었는데, 저자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육성으로 해당 내용을 들으며 명상을 할 수 있다고 안내(65)되어 있다. 
저자는 '안전/안전하다고 느끼는 감각'이 감정 조절에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겪은 경험과 우리 사회의 불안 요소가 몸과 마음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한다. 사람은 안전한/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고, 상대방의 감정도 조절할 수 있는 상호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다고 여겼다. 

사실 처음 책을 손에 들고 목차를 살펴보았을때 가장 궁금했던 내용은 '안전하지 않은 사회는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드는가'란 부제를 단 4장이었다. 우리사회가 겪어야 했던 사건들을 떠올려보면 전쟁이나 군부 독재 같은 수십수만의 죽음과 사상의 분열과 갈등 뿐 아니라, 자연재해나 각종 사고들로 인한 피해가 있다. 그중 안전과 관련된, 충분히 예방이 가능했을 사건들이 남긴 트라우마가 사회 안전과 더 관련이 있다고 여기고 의식과 무의식에 무엇을 남겼는가 궁금했다.
책에서도 언급하는 대형사건들 삼풍백화점, 대구지하철, 세월호, 이태원까지. 특히나 저자가 '감정 조절'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228)는 세월호 참사는 보도가 이어지는 동안 수많은 아이들의 생명이 희생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좌절감, 분노와 슬픔, 사회에 대한 불신, 이마저도 이용하고 조롱하려 하는 부류에 대한 경멸 같은 것들이 얽힌 무력함과 세상에 대한 긍정을 소진해버린 듯한 탈력을 남겼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이 상처는 우리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가. 이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과 가해자 및 관련자 처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피해자와 연대하는 시민의식도 더 고양되어야 할 것이다. 238"
우리사회에 부재하는 것은 진상 규명과 가해자 및 관련자 처벌이 아닐까. 강점기 이후 매국노에 대한 완전한 처분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그들이 기득권이 되어 쌓아올린 사회의 틀은 과연 잘못된 일을 끝까지 고쳐 처벌과 반성이 뒷받침하도록 되어 있을까.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는다. 그들을 대신한 보여주기 식 처분을 통해 덮이고 졸속으로 정리된다. 시간이 지나 사람들의 공분과 관심이 사그라들고 난 뒤에 '냄비근성'이라며 비웃고 스스로를 자조하도록 조장한다. 혹 잊지 않고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 보상을 얻으려 한다, 이용하려 한다며 매도해 넘긴다.
" 세대 간의 저주는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전대에서 누군가 잘못하면 그 죄가 자손 대대로 이어진다는 의미로, 다양한 문화에 걸쳐 통용되는 개념이다. 문자 그대로 보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전대의 잘못이라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부모의 역할이 가정에서 매우 중요하고 자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말로 풀어 볼 수 있다. 239"
마찬가지로 요즘 사회를 시끄럽게 만든 친일매국노 집안에 대한 공분이 거세지자 이를 두고 현대판 연좌제를 운운하며,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아무것도 모르는 후손에게 묻는다며 옹호하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마찬가지로 본질을 흐리고, 드러난 과거를 다시 덮으려는 의도를 가진 행위이다. 한 개인의 자만이 스스로 일본인을 자처하며 매국 행위를 한 선대가, 타인의 신체와 생명을 가지고 비윤리적인 실험을 자행하는 후대로, 부정으로 쌓은 집안의 부로 만들어낸 거짓된 명예를 뒤집어 쓴 후대로 이어짐을 증명했다.
또 하나 4장의 내용 중에 눈에 띄었던 것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남아 선호 사상 및 남성 중심 사회에서 고착화되어 있었던 성관념이 깨어지며 나타나는 진통이 여성을 향한 폭력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부 남성들은 사소한 좌절과 거절에도 과한 수치심과 분노 반응을 보이는데, 이 "자기애적 분노란 자기를 대단하다고 믿는 사람이 그 믿음에 위협당했을 때 보이는 폭발적 분노(298)"라는 설명에 '이들은 왜 이럴까'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풀리게 되었다.

애착 유형에 따른 성격 형성에 대해 알아보는 3장의 내용도 기대이상으로 흥미로웠는데, 유형별로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구분을 짓고 예시가 될만한 상황 설명도 있다. 덕분에 읽으면서 자신의 성향을 비교해서 맞춰보게 되고, 이런 사람을 주변에서 본 적은 없었나 떠올리며 읽게 된다. 성인 애착 유형 검사(175)를 해볼 수 있는 문항도 있으니 자신이 어떤 유형인지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철수와 영희의 사례(186)가 너무나 전형적인 관계의 불화여서 뻔한 내용이지 않은가, 관계에 있어 굳이 이런 것들(결혼기념일 날짜, 식당 예약, 편의점을 다녀오거나 서재에 머무는 등의 사소한 일정, 애정표현)을 상대에게 설명해주고 알려줘야 하는 걸까 싶었지만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모른다>는 사실 앞에서 수긍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요즘 우리사회가 갈수록 서로에게 날카롭고 상대의 작은 잘못이나 실수, 자신에게 끼치는 손해 같은 것들에 더욱 예민하고 과한 보복을 하려 드는 분위기를 띄고 있음을 공감할 것이다. 
" 이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사람, 아주 사소한 스트레스도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싸우기 방어기제가 반사적으로 또 극단적으로 일어나는 사람의 뇌는 일반 사람의 뇌와 해부학적으로 다른 경우가 많다. 대개 이들은 오랫동안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온 경우가 많다 보니 위협을 감지하는 뉴로셉션이 지나치게 작동하고, 그 결과 편도체가 과잉 활성화되고, 지나친 스트레스 호르몬 방출의 결과로 해마의 크기가 줄어들어 경험을 처리하고 소화하기가 남들보다 더 힘들어진다. 그러면 남들보다 더 민감하게 위협을 감지하고, 또 이에 과하게 반응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89"
책을 읽으며 어린시절부터 또래와 경쟁하며 성장하는 한국 사회의 스트레스가 물질만능주의, 결과 지상주의 같은 가치와 함께 사회적으로 지키고 배려해야 할 도덕과 윤리를 무너뜨리고 혐오와 분열이 심화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살펴보니 개정증보판을 통해 다룬 세대 간 트라우마 대물림, 남녀 갈등과 여성 폭력 등의 내용에 특히 많은 공감을 하며 읽었다. 새로 다룬 주제들이 공교로운 시의성을 띄고 있는 것을 보아 저자가 초판 출간 이후에도 10년의 시간동안 끊이지 않고 사회 현상과 개인 내면의 불안에 대해 연구해 책임과 애정을 가지고 새로 담아내 독자 앞에 선보였음이 느껴져 충분한 응원과 감명을 얻었다. 위협과 불안에서 회복하는 일, 현상을 위협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자신을 더 잘 다루는 일,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감정에 압도되지 않는 일을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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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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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뜻한 시월의 이날,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나의 할아버지는 애국지사다. 한국이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에 일본의 지배에 맞서 싸운 자유의 투사다. 보수적인 양반 지주 가문에 수치를 안긴 장본인이 아니라 영웅이자 순교자이다. 44"

공교롭게도 요즘 세상은 한 엘리트 집안의 친일행적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선대부터 좀 산다고 하는 집안들이 대체로 나라 팔아먹고 돈받고 땅받고 입씻은 사람들이 아니던가.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청산이 없이 효율을 따져 빨리 성장하고자 했던 부작용이 아직도 여전하다. 선대가 쌓은 죄값으로 부유히 자라 유명인이 된 후대가 방송에 나와 몇대를 이어온 자신의 집안에 대해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장면은, 그 개인으로서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자랑하는 것에 급급해 짧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냈고, 우리사회에는 심각한 역사의식 부재와 물질만능적 사고의 천박함을 경고했다. 피로해진 눈을 씻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마주한 '비밀의 들판'은 드러내고 자랑하지 않은,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말하고 있었다. 부유함과 위명으로 화려하게 덮어씌운 거짓 대신, 조용하지만 끈질기게 이어져 증명하는 가족의 역사이자 개인의 삶이었다.

 '나-주혜'로 인해 시작된 것이라 여겼던 기록은 사실 그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 갑작스런 폐수술(4년의 수감 생활 이후 결핵을 앓은 할아버지로부터 감염된 오랜 지병으로 인한) 이후 기억력이 감퇴하고 무기력해진 아버지의 일상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고, 전에 할아버지에 대해 찾아 기록하려 했으나 멈춘 채 두었던 계획이 다시 수면 위에 오른다. 그는 전화통화 조차 응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에 대해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전부 글로 써달라 요청한다.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의 존재는 인생 전반에 걸친 수치와 멍에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수감생활을 했었다는 사실만을 알고 왜 수감되었는지는 알지 못했고, 자신이 범죄자의 아들이란 생각에 제대로 웃지도 말을 하지도 않고 지내왔다. 아버지가 범죄자가 아니라 잊혀졌던 애국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아내조차 다른 사람처럼 달라졌다고 평(224)할 정도로 영향을 받아왔던 것이다.
 역사,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누가 기억하는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지만 그와 그 자신에게서 이어져나간 이들에게 전해질 것이라는 걸 보여준다. '비밀의 들판'에서는 아버지-은설의 기록도 함께하고 있으니, 언젠가 나 역시 아버지의 이야기를 청해 듣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졌다. 비록 그의 삶에 비장한 저항이나 사상, 운동 같은 것은 없었을지라도 내가 그를 알고 기억하기 위해서. 굉장히 세세하고 때로는 늘어지거나 돌아가고 있다고 여겨질만큼 자세했는데도, 누군가의 삶을, 가족의 역사를 담아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짧고 간명했다. 

 " 할머니는 애국지사의 아내였다. 평생토록 남편을 잊으려고 애쓴 뒤에, 결국 영원히 남편 곁에 눕게 되었다. 354"

 더불어 가족의 기록은 오랜 시간동안 침묵해온 할머니의 증언이기도 하다. 처음엔 할머니의 침묵이, 남편과 관련된 자료를 전부 없애버린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며 인터뷰가 계속될수록 살아남고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버텼구나 받아들이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삶이 명예로웠을지라도 가족들에게 남긴 상처는 적지 않았다. 원치 않는 결혼이었다며 아내는 고향 가족의 집에 남겨두고 훌쩍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남자, 사업 자금을 모으기 위해 첩을 들이려는 남자, 수감되어 있던 동안의 일을,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남자, 자신의 아내 뿐 아니라 두 아이도 책임지지 않고 죽은 남자이기도 하다.
 사실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느낀 것은 역사 속에서 고통받은 민족이나 애국같은 비애와 의기 넘치는 큰 뜻이 아니었다. 어린시절 나의 할머니에게 들었던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 누가 묻지도 않고, 어디에 말할 곳도 없어 어리고 철없는 손녀 옆에서 옛이야기 들려주듯 풀어내던 그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이었다. 오봉이니 쓰메끼리 같은 사소한 일본어들을 섞어서 쓰던, 전쟁의 잔인함과 피난길의 공포를 기억하던, 시집살이의 설움을 지워내지 못했던 내 할머니의 이야기는 제자리에 얌전히 있는 소녀(69)라는 이름을 가진 금순 할머니의 삶과도 닮아있었다.

 저자가 완전한 미국인이라는 사실에 가끔은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다. 한국인 가족을 가지고 있지만, 그 틀을 제외한 모든 것을 미국에서 채워넣은 사람. 둘 다 가지고 있지만 '어디에서 왔는지("넌 어디 출신이야?" 14/387)' 끊임없이 대답해야 하는 사람이며, 존재의 한가운데에 난 구멍에 대해 들여다보아야 하는 사람의 고백이 함께했다. 두 나라 어디에서도 편하지 않다던 그의 내면이 불편할수록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음을 느꼈다. 처음엔 잊혀진 독립운동가였던 자신의 뿌리를 바로 세워 다시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과정을 겪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되돌리고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가족의 역사 안에서 이어져 온 상실을, 자신이 누구인지, 왜 관계 속에서 고통받고 실수하는지, 스스로도 이유를 찾기 위해 고뇌해야 하는 방황을 끊고자 한 사람의 노력이 더 크게 보였다. 과거와 역사가, 가족으로 이어지는 경험과 삶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비밀의 들판'은 말하고 있다. 이번 주말 읽기 좋은 책이다.

 " 나는 너희가 알았으면 해. 너희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 될지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386"   



* 유니클로 광고 ‘Oh My God, I can't remember that far back!’ ‘80년도 더 된 일을 기억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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