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2025.상반기 - 제51권 1호
한국문학사 편집부 지음 / 한국문학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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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노벨문학상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담겨 있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트라우마, 먼 이국의 궁중파티(p10)같은 표현은 얼떨떨했다. 정말 큰 성과이고 기쁨이긴 한데 이 정도로 생각했다고? 싶었다. 타인의 성과를 등에 업고 쿨한 척 하려는 건 아니지만 우린 이제 수상작을 원서로 읽는 사람들이니 좀 더 칠(chill)해져도 되잖아요. 약간 미심쩍은 눈으로 읽어나가다 특집으로 실린 좌담에서 인상적인 사진(p174)을 발견하고 웃음과 함께 마음이 좀 풀어져나갔다.


 문예지를 읽으면 즐거운 것이 다양한 글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맛있는 한 그릇도 만족스럽지만 아무래도 뷔페를 가서 이것저것 먹어보는 재미 또한 크지 않겠나. 평소 내가 선택하지 못할 법한 주제, 작가, 분야에 대한 글들을 보고 있자면 이전에 해본 적 없던 생각들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나는 '김미옥 현상'이라는 말을 처음 봤는데 해당 SNS를 안해서인지 책을 잘 읽지 않아서인지 모르겠다. 다만 좌담이 굉장히 수다스럽게 이어져서 즐겁게 읽었다. 전에 이 느낌을 어디서 받은 적 있는데 싶더니만 조교할 때 교수실에서 안듣는 척 듣던 교수님들 대화 같았다. 


 백가흠의 '술의 가을'은 1부터 5까지 읽는 동안 꽤 즐거웠다. 특히 좌익수를 보던 시절의 이야기는 읽는 것만으로도 입꼬리는 올라가도 눈꼬리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표정을 만들어냈다. 이런 것은 너무 생생해도 좋지 않다. 15번 꼭지까지 이어지는 글은 술의 가을인지 술이 술술인지 모르게 뒤로 갈수록 작가가 진짜 취했나 싶이 온통 새우에 술 마신 이야기가 이어져 웃기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술을 마시다 자주 기억이 끊기면 뇌에 좋지 않다고 하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애초에 음주에 직격인 간부터 전반적으로 건강에 좋지 않겠지만. 


 또 하나 재밌었던 꼭지는 '지금 우리 문화는'에서 한국 영화계의 현실을 다룬 내용이었다. 비슷한 말이지만 영화계에서 힘들다는 말은 너무 오랫동안 나와서 이제는 좀 힘들다고 하기 전에 왜 힘든지 개선하려는 변화를 보여야 하는 때가 아닌가 싶다. 논란있는 배우들 돌려쓰기, 감이 다 죽은 것 같은 시나리오, ott서비스 탓, 상영관 내부 청결, 업계 종사자도 영화관을 안가면서 도와달라 호소하는 행태들은 늘 말이 나오는데 개봉작들을 보면 절반은 이게 맞나 싶어진다. 관객들도 영화관 가서 영화보고 싶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를 만들면 사실 다들 간다.


 그런데 힘든건 영화산업만큼이나 출판도 마찬가지일테니 갑자기 함께 슬퍼진다. 그저 게으른 독자일 뿐이지만 저쪽에서 불이 났다길래 구경갔더니 우리집도 타고 있더라 같은 느낌이 든다. 영화는 대중문화이지만 독서는 그보다 더 파이가 적지 않은가. 요즘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문득 책을 읽는 사람을 보면 잠시 구경한다. 흔치 않은 풍경이 된 셈이다. 물론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로 서점에 줄을 서고 책이 동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부족하다. 한줌단이 열배 백배는 더 늘어났으면 한다. 책을 읽읍시다랑 기적의 도서관 좀 다시 부활해주길. 


 평소 소설과 시 위주로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면 이번엔 다른 주제들이 더 인상깊게 남아 즐겁게 읽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어 내용이 좀 벗어나긴 했지만 그래서 더 좋은 내용들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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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움큼의 외로운 영혼들 - 세기전환기의 멜랑콜리
강덕구 지음 / 을유문화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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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읽고 쓰지 않아 비밀번호를 열번쯤 틀리고나서야 들어왔다. 어차피 쓰는 것들은 이런 최악의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다 비슷비슷하기 마련인데 이것이다 라고 예상했던 것이 한 번 틀리고나면 그 뒤로는 언젠가 한번은 써봤던 것들을 차례로 시도하다 결국은 보안문자도 몇번 실수하고 몇 배의 고생을 하고는 간신히 출입을 허가받는다. 결국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이 답이니 안도와 함께 허탈함이 찾아온다. '한 움큼의 외로운 영혼들'을 읽고나서도 비슷했다. 결국 다 읽긴 했구나 하는 안도와 함께 찾아오는 허탈함. 그보다는 아쉬움에 더 가까우려나. 


 책을 읽기 전에까지 책에 대한 기대가 좀 있었다. 하지만 책에 대한 기대는 목차를 보는 순간 사그라들었다. "2부 21세기, 집을 잃은 영웅들 남자: 유아인, 하정우, 언니네 이발관, 검정치마, 직역하면..." 피로감이 끼쳐왔다. 서문이 다시 한 번 눈에 들어온다. "서문 당신의 실망스러운 비평가" 깊은 피로감을 안고 책장을 넘기면서 읽어보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라고 생각해봤는데, 정지돈에 대한 언급이 나오면서 결국 암담했다. 그 정지돈이 맞는지 찾아보다 결국 사건의 메일을 다시 복습하고야 말았는데 지질해져버린 이런 얘기를 왜 영웅이라 이름 붙여서 굳이 포장해놔야할까.


 저자의 어린 시절을 담은 도입부처럼 어떤 부분들은 흥미로울 뻔 했다. 하지만 잠시 작은 요소로 흥미를 끈다고 해도 이내 관심은 흐트러지고 만다. 미드 '빅뱅이론'의 주인공들을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마니아들의 부산스러운 대화가 이리저리 이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페니의 시선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볼 수 있다. 꽤 기대를 하고 있었던 탓에 결이 맞지 않는다는 말을 쓰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결국은 취향의 문제일수도 있다. 누군가는 공감을 하며 흥미롭게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나는 아니었고, 이렇게 아쉬운 소리를 늘어놓게 되어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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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2024.하반기 - 제50권 2호
한국문학사 편집부 지음 / 한국문학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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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지를 종종 읽다가 한동안 멈춰있었다. 조금 익숙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문예지는 벅찬 감이 있었는데 그보다 기간이 긴 편인 반년간지라 부담이 덜하려나 싶었다. 한국문학사에서 나온 계간지는 처음이라 이리저리 둘러보았는데 짜임도 살짝 느슨해보인다. 그 점도 마음에 든다. 책의 앞뒤로 광고 붙은 곳들이 이과적이라 재미있었다. 현금지급기, 암호칩, 컴퓨터, 산업용 단말기, IT서비스 업체 등이 문예지의 후원이 되어주고 있었다. 덕분에 이렇게 문예지를 만나보게 되었으니 읽어서 하는 응원보다 금융의 힘이 강하구나. 


 가장 기대했던 부분 중 하나가 '시'였다. 시는 긴장하고 주기적으로 스스로를 시에 노출시키려 하지 않는 이상 접하기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과제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특히 안도현 시인의 신작시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여 먼 옛날 답사를 통해 만나본 짧은 인연을 새삼 떠올리며 기대했다. 막상 접했을 때는 좋게 말하면 시인만의 색이고 아쉽다 하자면 신작의 신선함을 느끼기 어려워 기대만큼의 만족감은 아니었다. "새를 기다리며"의 6번째 연만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 시인의 의도와 다르게 내게는 섬뜩하게 느껴져서 였다.


 오히려 평소에는 다소 어렵게 느꼈던 시평이 더 흥미로웠는데 시를 읽으며 어딘가 집어 말하기 어렵고 찜찜하던 부분을 정리해놓아 공감되었다. 더불어 재미있었던 것은 최다영 평론가의 시선이 뒤이은 박병두 시인의 시와 최동호 시인의 시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결국 시에서도 '연식'이 느껴진다는 것일까 세대 공통의 감성이란 것일까. 이실비 시인이나 조온윤 시인의 시를 20년 쯤 뒤에 다른 세대의 독자가 읽게 된다면 또 이런 느낌을 받게 될까.


 생각의 끝에 만나게 된 것이 공교롭게도 '대학생 창작교실' 소설 부분의 "늙음을 이뤄내기까지"였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소설에서도 중년인 윤희와 이십대인 딸 지아, 그리고 돌아가신 시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각자의 삶을 조금씩 보여주며 그 시절의 삶을 드러내는데 '남동생의 밥을 조금 뺏어먹어 아빠한테 맞은 여공의 삶 (252)' 같은 것은 흉내낸다고 느껴졌는데, 시급만큼 비싼 카페 케이크(253)나 감정 쓰레기통(259)을 연상하게 하는 관계 문제는 본인의 것 같았다.


 그 전에 '작가가 만난 최고의 고전'에서 "사랑으로 산다"는 제목으로 사랑이란 단어를 차고 넘치게 보고 온 탓에 " 엄마,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사랑 사랑, 거릴까. (p.254)" 하는 지아의 말에 또, 사랑!하고 질려버릴 뻔 했다. 읽다보니 내가 먼저 남녀간의 사랑을 떠올린 것이 편협했고 오히려 더 매몰되어 있었구나 싶었다. 대학생 작가의 글이지만 손보미 작가의 "동전의 양면"과 함께 재미있게 읽은 편이었다. "동전의 양면"은 다른 세대의 인물들이 우연히 만나 둘만의 세계를 공유하며 서로의 삶에 의미를 남기는 관계성을 잘 이용한 단편으로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한국문학사에서 그 이름도 직관적으로 '한국문학'이라는 반년간지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24년 하반기 호를 받고서야 알았다. 다른 얘기이지만 이런 문예지를 다른 출판사의 계간지를 통해 몇 년 간 받아본 적이 있어 '한국문학'을 봤을때 반갑고 또 어떻게 다른 느낌이 들까 궁금해졌었다. 계간지를 내면서 대인원의 서평을 모집하는 큰 기획을 여러번 하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 했는데, 읽는 사람을 길러내는 씨뿌리기 작업을 그만치 했다는 것이 '한국문학'과의 인연으로도 닿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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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 - 상처에서 치유까지, 트라우마에 관한 24가지 이야기
김준기 지음 / 시그마북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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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ough no one can go back and make a brand new start, anyone can start from now and make a brand new ending. 어느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할 순 없지만, 지금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결말을 맺을 순 있다. - 카를 바르트 "

 인상깊은 구절이 몇가지 있어 적어두었지만, 가장 인상깊게 본 구절은 책의 표지에 써있는 문구였습니다.


 책을 읽기 전, 내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트라우마들에 대해 하나씩 끄집어내기 전, 저어하는 나를 달래주었던 문구였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여러 생각을 하곤 합니다. 대체로 내일 할 일을 계획하기도 하지만, 가끔 '과거로 돌아가서 가장 없애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떠올릴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후회되는 지난 일들이 떠올라 도리어 잠이 깨거나 이불을 발로 차기도 합니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마음에 짐처럼 남아있는 과거의 일들을 되살려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저 문구가 책장을 넘기기 전 마음을 한 번 다잡아 주었습니다. " 어느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할 순 없지만, 지금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결말을 맺을 순 있다. "


 우선 리뷰에 들어가면서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심리학적 문제 '트라우마'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네요. 트라우마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신체적, 정신적 충격을 경험한 후 나타나는 심리적 외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는 수많은 사고나 개인과의 마찰등이 정신적, 심리적으로 상처가 되어 그것이 오랫동안 남아 행동과 심리, 성격에 영향을 주는 일 등을 말합니다. 어린 시절 개에게 물렸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 개를 무서워한다던가, 교통사고를 경험한 사람이 자동차 타는 것을 꺼려하는 등의 일등을 쉽게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이것은 매우 특수한 일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 한 개인의 심리적 취약성보다는 그 취약성을 뒤흔들어 놓은 트라우마를 더 많이 의식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나는 매일매일 치료실에서 만나는 환자들의 이야기에서, 갈등이 심한 부부들의 양보할 수 없는 다툼 속에서, 그리고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 그리고 친구의 삶에서, 아주 흔하게 트라우마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저자는 트라우마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 개인의 삶에서 트라우마라는 것이 이렇게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생겨나는 문제임을 표현함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속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트라우마에 대해 재조명합니다. 이 책에서는 개인이, 그리고 개인을 넘어 사회가 품고 있는 상처를, 그러한 상처들을 영화로 표현한 작품들을 통해 비추어보고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책의 구조는 상당히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트라우마란 무엇인가/ 트라우마의 원인/ 트라우마의 증상/ 트라우마 공화국, 대한민국/ 트라우마의 치료] 다섯개의 파트로 나누어져 단계별로 읽을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심리학과 트라우마라는 것에 대해 모르는 독자도 순차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있지요. 또 각 단락별로 말하고 싶은 주제에 맞는 영화들이 몇편씩 소개됩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쉽게 풀어쓴 이론적인 설명이나, 개인의 경험, 혹은 주변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예로 들며 내용을 풀어가기 때문에 독자는 흥미를 갖고 쉽게 심리학에 접근하게 됩니다.


 또한 영화의 내용들도 매우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독자들은 소개된 영화를 통해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심리학의 내용과,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심리, 행동패턴을 좀 더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책을 읽고 난 뒤에는 소개된 영화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삶을 말하는 상당히 괜찮은 영화들이 이야기 되고 있고, 자신이 보았던 영화가 있다면 한층 더 깊이 마음으로부터 공감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영화와 책이라는 두 콘텐츠가 '심리학'이라는 코드와 만나 상승효과를 이뤄내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특히 더 읽고 싶었던 이유는, 개인적인 트라우마 때문이었습니다. 근래 들어 내면에만 치중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가지고 있던 중 "내가 가진 상처를 혼자서 끌어안고 고민하고 반성해봤자 남는 것은 자책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 그리고 그 문제에 대응하는 나 자신에 어떤 한계점이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책은 그 질문에 어느 정도의 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책으로 위안을 받는 일은 타인과 소통하여 치유하는 일만큼 소중하고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 아주 사소한 일상사도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
어른들에게는 별거 아닌 사건이지만 어린아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마음의 상처로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런 사건들이 목숨을 위협받을 만큼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이 평생에 걸쳐 자아 존재감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 당시 그 사건을 당할 때 아이였던 당신은 무척 당황해했고, 무서워했고,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의 당황스러움, 수치심의 기억이 점점 옅어져가고 다른 좋은 기억도 많이 남게 되어 이런 사건의 기억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자라게 됩니다. 하지만 몇몇 기억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난 뒤에도 자신이 모르고 있는 사이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경 회로 깊숙한 어딘가에 그 기억이 그대로 남아 별 것도 아닌 일에 두려움이나 수치심, 분노감 같은 감정이 갑자기 재현되기도 하고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하는 식으로 말이죠. p51 파트2 트라우마의 원인 "


 누구나 알 수 있는 말이지만 이 부분에서 크게 공감했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상사도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는 말은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는 잘 알려진 비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잘 알려진 이 속담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 단락을 읽으며 누군가로부터 어린 시절 어떤 사건에서 제가 느꼈던 감정들에 대해 이해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 그때 그랬구나.' 하는 듯한 위안을 받았지요. 정말 간단한 말이고, 어찌보면 누구나 아는 것들을 적어놓은 것일 수도 있지만, 책을 통해 차근히 조리있게 새겨진 문장을 바라보면서 지나치는 말들보다 더 강렬한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위안이 될 수 있었습니다.


 " 시계는 움직였지만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해는 뜨고 졌지만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과거에는 소리가 있었다면 이제는 침묵뿐이다. 한때 완전했던 것이 이제는 산산이 부서졌다. - p87 영화 '위 아 마셜' "


 그리고 이처럼 저 역시도 지난 과거에 대해 아직 집착하고 있던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시계는 움직였지만 시간은 흐르지 않았'던 것이지요.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않고 자신에 대한 일들만 생각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책장을 넘기게 되었을 때 내용은 개인에서 사회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나는 내 개인의 내면에 치중하는 일부분만큼도 사회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구나, 그건 또 다른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무관심이었구나'하고 깨달았습니다.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책은 이제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를 말합니다. 그 중 가장 인상깊었던 구절은 이것입니다.


 "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사고의 전환'이었습니다. 즉 매사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로 임한 결과 인생의 장애물을 인생 도약의 뜀틀로 바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쓰시타는 콤플렉스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발전 시킬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은 것이지요. 긍정적 사고와 희망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사례인데,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에도 긍정적 사고와 희망 이상의 치유책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p236 "


 이 부분을 읽으며 '원영적 사고'라는 밈을 떠올렸습니다. 실패와 거절의 경험을 오히려 긍정적인 상황으로 바꾸는 사고의 전환이 바로 그런 예가 아닐까요. 갈수록 흉악한 범죄 소식이 많이 들려오고, 상식과 배려가 부족한 사회구성원들의 다툼이 공론화되는 일이 잦아지며 이해와 용서가 부족한 사회풍조가 불안과 스트레스를 줍니다. 더불어 과도한 경쟁, 성장과 성공에 대한 압박과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자책과 우울에 빠지게 되는 개인들이 고립되는 현상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부정적인 사건들에 피로감을 느낄 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긍정적인 사고의 표현이 좋은 반발을 일으킨 예입니다. 


 " 처음에 그들은 상대방의 의도부터 의심합니다. "정말 날 선의로 도우려 하는 것인가? 나에게 뭘 바라는 것은 아닌가? 나를 이용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에 반사적으로 다가오는 상대방과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상대방의 의도가 진실이란 걸 알게 되어도 그들은 그 선의의 의도를 비웃습니다. "당신은 운이 좋아서 나같은 상처를 경험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어떻게 당신 같은 평범한 사람이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상처를 눈곱만큼이라도 이해할 수 있겠어?", "도움 같은 거 필요 없어, 당신은 날 도울 수가 없다고." -p252 "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고 그것을 털어내기 어려운 사람들은 종종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저 역시도 상처를 가지고 있었고, 아직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좁혀진 시야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것들도 있지요. 그래도 이 책에서는 '희망'을 말합니다. 외부에 대한 불신을 가진 사람들이 진정한 소통자를 만나 상처를 드러내고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혹은 세상을 향해 개인이 맞서 상처를 딛고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자라나는 나무는 없듯이 고난과 아픔 속에서도 자라나는 희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상당히 많은 부분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보듬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화와 책과 심리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 개인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좋은 시간을 선물해줄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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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다정한 그림들 - 보통의 일상을 예술로 만드는 방법
조안나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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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제나 맛없는 비스킷을 먼저 먹고 가장 맛있는 건 나중에 먹는 나는, 힘든 일을 한번 겪고 나면 나머지는 웬만하면 다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러니까, 햇살 가득한 스타벅스에서 이 글을 쓰는 수요일은 행복 그 자체이다. (41) "  


 어떤 분야이든 전문적인 지식과 안목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괜히 거리감이 들었다. 굉장히 평범한 사람인 나는 언제든 어느 누구와든 대체될 수 있는 흔한 사람인데, 그들은 뭔가 특별한 능력이나 세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나 예술을 감상하고 그걸 풀어낼 힘을 가진 사람들은 더욱 멀었다. 분야마저 어렵게 느껴지곤 했다. 요즘은 생각을 바꿔 나도 뭔가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만큼 즐거웠다면 됐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마음을 내려놓기는 쉽지 않다. '나의 다정한 그림들'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조금이라도 더 보고 배우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저 문장을 읽는 순간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책의 리뷰도 수요일에 써서 남겨야지, 마음먹었다. 


 책을 읽고 감상을 쓰는 시간동안 항상 내려져있던 거실창의 블라인드를 일부러 올려두었다. 어떨 때는 별안간 책을 읽다말고 블라인드를 올리러 달려가곤 했다. 늘 모니터와, 화면과, 활자를 보던 눈이 어느 한 순간이라도 푸르고 일상적인 풍경을 바라봤으면 좋겠다 마음먹게 되는 책이었다. 하루종일 외부와 단절시켜놓고도 답답한 줄 몰랐던 공간에 개방감이 더해지는 변화를 덕분에 꽤 즐기게 되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 마련해둔 화단의 나무들이 조금씩 물드는 사소한 풍경이라도 시선 안에 들어오면 특별해지는데, 화가들에게 더 넓고 푸르른 자연이 주어진다면 그리지 않을 수 없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자연과 정물을 그린 작품들이 많은 것일까. 모델료가 필요하지 않다는 장점도 있겠지만. 


 읽으면서 공감도 많이 하고 닮은점을 찾아내기도 하느라 오래 걸렸다. 일상이 수시로 끼어드는 상황에서 할 일을 하는 고군분투인지라 책 안에는 코로나로 격리를 하던 시간, 반찬 해먹는 일, 잠들기 전 인터넷 쇼핑 같은 주제가 등장한다. 나 역시 책을 읽으면서 세탁소도 다녀오고, 분리수거도 하고, 택배를 받기 위해 몇 번이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하면서 '느낌 있게 사는(183)'건 일상 안에서는 좀처럼 쉽지 않구나 했다. 어느 날 지인이 어떤 가수의 얘기를 하면서 결혼을 하면 예술성이 죽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명곡의 탄생은 짝사랑과 실연 기간에 집중된다는 우스갯소리와 곁들인 말이지만 순간 당황스러움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른 그 말을 다시 생각해보니 책 한 권 읽는데도 생활이 끼어드는 순간이 있는데, 예술을 하며 느낌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더 어렵겠냐는 뜻으로 느껴져 속으로 그랬구나 했다.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세속적인 지점은 미술 에세이를 쓸 때 저자가 거치는 4단계(129)를 설명한 부분이다. 어떤 분야에 대해 에세이를 쓰고 싶은 사람이 참고해도 좋겠지만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으로 써도 좋겠다. 전에는 전시를 가기 전에 미리 공부를 안해가면 이해도 못하고 어떻게 감상해야 되는지 모를 것 같아 걱정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니는 도슨트 안내 시간에 그림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면서 설명만 들으며 힘들게 쫓아다닌 적도 있다. 그런 감상법이 나에게 더 잘 맞아서가 아니라 잘 모르면서 보는 걸 부끄럽게 또는 의미없게 여긴 탓이다. 하지만 모르고 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좋다'고 느꼈다면 "내 삶에 필요한 이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왜인지 이유를 생각해보자. 같은 감상법들은 나에게 더 잘 맞는 방법이라 도움이 되었다. 


 많은 그림들이 소개되는데, 샐리 스토치의 그림(25)을 안내 받으며 기쁨을 느꼈다.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인가 했는데, 책에서도 스토치의 그림을 소개하며 호퍼를 말한다. 물론 나중에 호퍼의 그림도 등장한다.(143) 하지만 둘 사이의 분위기가 다르고 굳이 누구의 그림이 더 좋다고 평하지 않아도 될 만큼 시선을 끄는 각자의 매력이 존재한다. 카페라는 익숙한 공간이 화폭으로 옮겨져서일까. 잘 모르는 예술의 세계를 쉽게 설명해주고, 유명한 작가와 그림들을 배우는 내용도 좋지만, 이런 어렵지 않은 접근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커피를 한 잔 내려 책을 읽는 시간처럼 그래서 어떤 '작품 속 의미'들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는 '분위기'를 예술에서 음미하는 순간을 선사한다. 새삼 '다정한'의 의미를 깨달았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정리하는 동안 잠시 여행을 다녀왔다. 책이 인상깊었던 탓일까, 흐리던 날이 개어 어느 날의 한라산을 바라보고는 책에서 본 오키프의 그림같다고 떠올렸다. 작가는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면서 아그네스 마틴의 <행복한 휴가>(225)를 이야기 했지만, 단순한 선이 칠해진 <행복한 휴가>보다는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페데르날>(91)이라는 그림이 한라산과 닮아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한라산이 이렇게 생겼었나 새삼스럽기도 했는데, 아마 이런 감상은 이전에 가지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는 혼자 한라산을 보며 이 그림을 떠올릴 것을 짐작하니 천천히 느리게 나를 변화시키는 힘이 독서에 남아있음을 발견한다. 책과 그림과 저자와 일상과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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