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 너머 - 불확실한 세계를 돌파하는 과학의 태도
카밀라 팡 지음, 조은영 옮김 / 푸른숲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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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너머'를 앞에 두고 사실은 그 시선을 따르기보다는 엿보고 싶었던 호기심이 컸다. 과학의 태도로 삶에 접근해보기를 권하는 저자의 추천에 익숙한 어색함이 일깨워졌다. 먼 옛날 안 풀리던 수학문제를 공부 잘하는 친구에게 물어봤을때 예사롭게 그냥 이 공식 적용하면 되던데 하고 답하던 모습이 떠오르는 듯 했다. 문제를 보면 어떤 공식을 적용해서 풀어야할지 아는 것이 당연하다던 그 무구한 눈빛, 지극히 당연한 것에 대한 믿음과 재미까지 담겨있는듯 하던 그 모습이 보였다. 큰일났다. 내가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는 '만약'을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과학적인 관찰과 결과 도출을 따져보는 게임을 한다고 했다. 나 역시도 만약을 떠올리는 일을 '재미로도 하고, 습관적으로도 하(51)'는데 나의 만약은 조금 다르다. 만약 회사에 있는데 갑자기 전쟁이 나면 집으로 가야할까 피난처로 가야할까 나 어느날 갑자기 비둘기가 된다면 나=비둘기는 나는 법을 알까 모를까 같은 만약의 세상을 상상하는 것이다. 저자의 만약이 '가설'이 되고 나의 만약은 인프피가 되는 다름이 재밌으면서 민망하고 씁쓸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다름만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과학적 사실도 가끔은 난해하고 대체로 흥미로웠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의 보편을 설명하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책의 곳곳에서 저자가 얼마나 열심히 자신의 상황을 긍정하고 노력해서 세상을 바라보려고 했는지 느껴졌다. 더불어 암세포 연구나 암흑 물질, 코로나 백신, 중력파, 양자역학 같은 전문적인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아졌다. 이 내용들을 흥미롭게 읽고 다 이해한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 이야기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 지나치게 개방적인 자세 때문에 갈피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 반대로 마음을 완전히 닫은 채 선입견에 휘둘리지도 않을 것. 34" 

과학을 향한 자세를 말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관계 보편의 기조나 다름없다. 자신의 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다른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 것. 이렇게 생각하니 염려되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과학의 시선이라고 해서 나에게 전혀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또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수학의 정석을 보고 놀랐던 마음이 과학이라는 말에도 겁을 먹었었다. 이제 어른이니 더이상 과거의 트라우마에 갇혀 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하며 조금 더 친근한 마음으로 접근해나갔다.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 다른 학력과 사회적 배경을 지닌 사람, 대조되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모이면 문제 해결과 수평적 사고에 도움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연구 결과와 실제 세계에서의 응용에서 형평성을 보장하는데도 대단히 중요하다. 182' 이 다양성에 대한 내용을 읽으면서 이제는 일일이 관심을 기울이기에도 너무나 보편적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어지는 남성 중심의 연구, 인종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연구 결과의 내용을 보고 다양성을 고려한다는 것이 어떤 범위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깨달았다. 유연과 확장의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통해 이해와 존중의 고정된 방향으로 보고 있었던 시선을 바꿔주는 내용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부분은 8장 편향에 대한 내용이었다. 의식 또는 무의식으로 운영되는(228) 편향이라는 것에 대해서 전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MBTI라는 것이 유행하며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테스트를 해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결과가 자신과 꼭 맞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가끔 결과값이 달라진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보이는 것과 실제 자기의 모습이 다르게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그중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난 이런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확언하는 사람 중에 진실로 그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적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있지 않은가.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이 본인이 맞을까,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자신은 이런 사람일 것이라고 바라는 대로 스스로조차 속이고 있는 것인지 항상 궁금했다. 외부로 뻗어나가기보다 내부로 검열부터 들어가는 이 비생산적인 편향에 대한 강박적인 균형과 저항 욕구는 "어차피 개개인은 모두 셀 수도 없이 많은 인지 편향을 지니며, 전혀 편향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중립에 가까운 세상에서 살 가능성은 없다. 247"는 말에 조금 위안을 받았다. 

이렇게 이해를 위한 확장을 하며 책을 읽는 동안 자신에 대해서는 축소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도 되었다. 과학이 자신에게 낯선 언어일 것이라는 생각, 저자는 나와는 다른 능력, 세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구분 같은 것들을 바꿔나갔다. 처음엔 보편의 궤도를 넘는 생각과 시선을 말하는 것이라 여겼는데, 각자의 궤도를 가진 사람들이 그 너머에 있는 외부와 타인과 닿아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말하고 느끼는 모든 방법을 열성적인 전달자를 통해 만나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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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스러운 돌봄 - 잘 키우려 할수록 나빠지는 불행에 대하여
신성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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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이 세상에 부모 마음 다 같은 마음'이라 해도 모든 부모는 부모이기 전에 시민이고 개인이다. 자식 또한 부모의 분신이 아니라 고유한 타인이다. 우리는 아이와 좋은 이별을 맞기 위해 사랑한다. 사랑을 줄 수 있지만 생각을 심을 수는 없다. 부모이기 전에 각자의 '나'들이 먼저 자신을 들여다보고, 타인을 돌보는 그 마음을 돌이키기를 제안하고 싶었다. 7"

 책을 읽기 전에 자극적인 기사들을 보고 가지고 있던 요즘 아이와, 부모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혹시 모를 사고나 다툼으로 항의가 들어오는 일이 많아 더이상 소풍같은 야외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 운동회 때 생기는 소음 때문에 민원이 들어온다는 것, 틀렸다 졌다는 것에 자존감에 영향을 주고 아이들이 상처를 받기 때문에 시험을 없애고 등수를 지우고 잘한 것도 따로 불러 칭찬해준다는 것 등 고리타분 하지만 전과는 다른, 요즘의 교육 현장에 대한 낯섦과 의문이 있었다. 가정에서의 돌봄과 교육은 점차 방만해지고, 상처와 실패 하나 없(어야 할)는 무균 상태의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자존심에 사사로운 상처가 나면 그 벽 앞에서 스스로를 포기해버리거나 타인과 외부를 향해 과도한 분노를 표출한다. 세상이 이렇게 변화하기까지 우리가 무엇을 놓쳤고 무엇을 오독하였는가 '탐욕스러운 돌봄'을 통해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읽었다.  

 '탐욕스러운 돌봄'에서 만나게 된 돌봄의 범위는 예상보다 넓었다. 단순히 양육의 관점에서 봤던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우리 사회 전반적인 돌봄을 마주하고 있었다. 특히 2부에서는 이주노동자, 의료돌봄, 다문화, 난민, 장애인, 성소수자, 재해 생존자, 노동자 등 사회의 틀 안에서 연대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에 대한 돌아봄과 돌봄을 함께 이야기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서울과 비서울이라는 우리나라의 중앙집권현상에 대해서도 꼬집는다. 우리가 바꾸고자 하는 세상이 이렇게도 작고 넓고 내밀하면서도 전체적인 모든 것이었다니, 아이양육에서 개인, 집단, 사회, 환경 까지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탐욕의 부작용을 말하고 있는 그 확장이 달가우면서 탐욕스럽게도 느껴졌다.

 책의 곳곳에서 저자는 자신도 역시 아이를 남 부럽지 않게 잘 키우려 애쓰는 보통의 양육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입시 컨설턴트에게 조언을 구해 학습 로드맵을 얻기도 하고, 맘카페를 통해 학습 정보를 얻으려 등급올리기에 노력한다. 직접 학원이나 센터에 아이를 '라이딩'해주고, 다른 양육자들의 입성을 통해 수준을 가늠하고, 다른애의 성취를 은근히 살피며 위치를 짐작한다. 아이가 아직 글을 모를 때(44)는 문구를 바꿔 알려주어 자연스럽게 관심을 돌리도록 어르기도 한다. 이 평범함에 마음을 붙이고 이해를 도모하다가도, 평범을 의심하기도 하며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 의심이 저자와의 거리감을 만들었는데, '평범'으로 인식할만큼 비슷하면서도 어느 순간의 다름이 큰 간극을 만들기도 해 읽는 동안 좋은 자극이 되었다. 특히 "불행히도 한국의 아이들에게는 박물관으로 소풍 갈 권리가 없다(133)"는 박물관과 아이에 대한 일화에서는 저자가 과잉된 반응을 하는지, 스스로가 차별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여러번 되새겨보게 되었다.  

 " 사유가 필요하다. 어른이 먼저 사유하고, 아이들에게도 사유하는 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며 다음 세대의 삶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소통할 때, 갈등을 해결하고 올바른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70"

 대체로 강하고 분명한 어조로 현상을 짚어내고 가감없는 비판을 해 자연스럽게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냈지만, 한편으로는 실망스럽기도 했다. 캠핑장에서 열린 체육대회 때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1등을 한 아이에 대해 불만을 품었음에도 그 집 부모와 운영진이 친해보여서 항의도 하지 못하고 의욕을 잃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32)는 시작이었다. 코끼리코를 열번 돌아야 하는데 여덟번 돌았으니 잘못됐다, 재대결을 하자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용기라니. 부모를 등에 업고 남의 자리를 빼앗는지도 모르고 만들어진 영광을 얻어가는 아이들에 대해 지적하는 한 편, 잘못을 보고도 잘못이라 말하지 않고 침묵과 외면으로 상황을 피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앎을 실천으로 옮기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높은 것인가 이해하지만 아쉽기도 했다. 

 " 사실 사춘기를 향해 가는 요새 딸아이의 가장 큰 특징은 '동시대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대의 사회, 문화, 예술, 풍습 등을 아우르는 전반적 경향에 조응하는 태도를 동시대성이라 한다면, 지금 아이는 매우 수행적으로 동시대성을 체현하고 있다. 164"

 읽기 전에 예상했던 양육의 돌봄은 3부, 특히 4부에서 깊게 다루고 있는데 문득 예전에 어떤 드라마를 보다 아역배우가 학교에서 두부한모라고 자신을 놀리는 친구와 싸운 일을 말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이와 비슷한 충격을 '탐욕스러운 돌봄'에서도 만났는데, 기생수(기초생활수급자, 75)라는 줄임말과 다문화가정의 아이를 두고 NPC(Non Player Caracter,72)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동시대성'을 체현하고 있는 예비 사춘기 아이를 통해서 요즘의 흐름을 파악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언뜻 세대가 함께 어우러짐을 말하는 것 같지만, 이러한 표현들이 어른도 아니고 아이들의 세계에서까지 등장하게 된 것에 대한 바탕 또한 드러낸다. 가정환경을 두고 비꼬는 표현, 다른 사람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 자기중심적이고 비인간적인 시선이 타인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따져보던 어른의 셈법에서 나왔음이 분명했다.   

 "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아이들은 전부 다르다. 누군가의 자식이기 이전에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세계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신만의 역동을 만들어낸다. 155" 

 '탐욕스러운 돌봄'에는 나의 아이를, 또다른 개인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키워나가야 할까, 어떻게 교육하고 돌보고 존중하고 성장시켜 결국 나라는 세계와 분리하여 전혀 다른 우주를 가진 존재로 인정하고 사회구성원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내밀하고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이야기라 읽는 내내 함께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초반 무기화 되어버린 자존감과 페미니즘(25)의 유사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 해도 좀 더 거칠게 부딛히는 면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돌봄 문제에 대해 오래도록 고심해온 흔적들이 느껴질 때마다 거친 면들이 조금씩 다듬어지고 좁았던 시선을 넓게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좁은 돌봄의 의미를 넓혔을때, 그리고 결국 그 넓힌 세계가 다시 처음의 돌봄을 위한 밑바탕이 되는 것임을 다시 깨달았을 때 책을 덮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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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 시대의 귀환 -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과 무한 각축의 시작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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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미국의 패권이 쇠락해가고 있다는 말은 묘한 감상을 준다. 미국과 별 상관도 없는데 아주 어린시절부터 가져온 어떤 이미지, 크리스마스 라고 하면 90년대 미국 중산층 가정을 보여주는 <나홀로집에> 같은 영화가 떠오르거나 늘 지구의 재난과 멸망 위기에 펄럭이는 성조기와 함께 등장해 세상을 구하는 미국이 주인공인 영화를 보며 자라와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메리칸 드림이 사라진 지금, 미국의 패권 말기는 어떤 의미와 현상을 가져올 것인가 <야만 시대의 귀환>과 함께 알아보고 싶었다. 

올림픽과 산불 같은 소식들도 있지만 미국의 상호관세 10퍼센트 부과 소식이 뉴스의 시작이었다. 미국의 행보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만큼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이전에 합의했던 상호관세와 투자 협상은 어떻게 될 것인지 긴 시간 다양한 방식으로 보도가 이어졌다. 트럼프의 영향 아래 예측불가능한 국제 정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라고 썼다가 자고 일어나니 관세를 15퍼센트로 조정했다는 뉴스가 속보로 올라와 있었다. 이쯤되니 우리가 무언가를 예측하고 대비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싶어진다. 

차례를 살피며 2장의 미국은 왜 그럴까와 3장 트럼프는 왜 이럴까를 가장 궁금하게 여겼는데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과 함께 패권의 중심이 중국으로 넘어갔음/넘어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어 위기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중국은 아직, 이라는 방심 혹은 방어적 생각과 약간의 경시가 내면에 잔존해있었기 때문이리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몇몇 중심이 되는 도시의 놀라운 발전과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흡수한 기술과 정보가 세계 최상의 수준이라는 사실이 경고처럼 전달되었다. 결국은 그 마저도 자원이 될 넓은 땅의 개발되지 않은 지역들을 꼬집으며 현실을 부정하려 해도 그 둘은 엄연한 진실이었다.  

" 높은 충성도를 전제로 하고 강력한 집단성을 특징으로 하는 그룹들의 경우에는, 일단 믿는 이에게 그 삶을 아주 간편하게 만듭니다. 세상만사를 설명할 수 있다 싶은, 만능의 설명틀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깥세계가 타자시되고 이질시되는 만큼, '우리끼리'는 더 강력하게 따듯한 정을 나눌 수 있죠. 내부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정 말입니다. 188" 

이 위기에서 미국의 선택은 또다시 트럼프였는데 이를통해 대중들이 무엇에 자신을 동일시하려하고, 현실의 이해관계를 파악하는데 어떤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두려움과 무지가 어떤 맹목을 낳는지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비단 미국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몇 차례의 선거와 집회, 심판과 분열로 드러나고 있다. 미국이 쥐고 있던 패권에 소요되던 부담을 전가하기 시작한 지금, 세계 패권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는 때 이에 영리하게 대처할 수 있는 대비가 필요한데 4년 뒤에 또 어떤 선택을 할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도 치명적이다. 

" 1990년대식 자유주의를 뒷받침하는 두 다리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였습니다. 한데 노동 인구의 다수를 경향적으로 빈민화시키는 신자유주의는 결국 노동자들의 상당수를 신자유주의 체제를 수용한 좌파로부터 떼어내 민족주의적 우파의 지지자로 만들었습니다. 285" 

지구촌과 세계화의 슬로건 아래 성장해 온 세대들에게 현재의 변화는 당혹스럽다. 세상이 더 확장된 평화의 그늘 아래 무한한 발전의 풍요를 얻으리라 여겼지만 오히려 불안과 긴장이 극대화되고 발전은 격차와 갈등으로 변모하여 위협이 되었다. 과도한 경쟁과 계층 사이의 간극을 일반적인 수단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는 좌절이 내부의 분노로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 다름을 이용한다. 보호주의와 고립주의, 인종주의적 이민 반대 등의 우파 레퍼토리를 이용해 우월심리를 자극해 심어진 극우 사상은 기득권과의 갈등을 교묘히 빗겨나가 대중들을 입맛에 맞게 결속시키는 수단이 된다. 

'야만 시대의 귀환'은 미국을 읽는 동시에 우리나라의 현 주소를 고민하도록 만든다. 세상은 약간의 속도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한 흐름으로 변화하고 있다. 한국이 특히 빠른 속도로 위기에 접근했던 고령화와 인구 감소라는 치명적인 약점(186)을 딛고, 이 혼란속에서 우리가 패권의 변동이라는 미중 사이의 힘 겨루기에도 균형을 유지하여 이 '생존 문제'에 대처해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며 읽었다. 쉽지 않은 문제이지만 어렵지 않게 풀어내어 좋았다. 솔직하자면 개인적으론 지금으로 이른 배경을 채우는데 더 도움이 되었지만 누군가는 이를 통해 앞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세상을 읽기에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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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 다산초당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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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친구와 한참 이야기를 하다 이제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멸종을 앞둔 위기종처럼 보인다는 말을 했다. 결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인 세상에서 자라오다 도착해보니 아무도 결혼하지 않는 세상에 온 것 같아 낯선데, 몰려오는 사람들의 무리가 너무도 당연히 결혼하지 않는 상식을 말하는 것 같아 자칫하다간 그 전의 세상에서도 이 후의 세상에서도 밀려나버릴 것만 같단 이야기였다. 그래서 '필연적 혼자의 시대'가 눈에 들어왔다. 어쩌다 낯선 세상에 불시착해버린 것이 아니라 이것은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였음을 확인받고 싶었다.  

남과 비교해서 부족하거나 결핍이 있는 것을 못견뎌하는 세상에서 왜 사람들은 유독 '전통적 가정'의 형태만은 잃어도 괜찮아하는걸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세뇌되어 왔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혼자 살 수 있고, 혼자 사는 삶이 더 이득이라는 계산을 끝낸 것 아닐까. 외부조건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평균적인 교육 수준이 일정 기준을 넘어섰을때 그동안 유지되어 왔던 공식이 깨지고 새롭게 수정된 결과값이 나온 것이다. 이 변화가 생존을 위해 무리를 이루도록 판단내렸던 계산값이 달라졌기 때문인지, 어쩌면 애초의 목표가 달라져 새로운 계산법으로 내린 결과인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런 분석이나 이유같은건 필요없이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왜 결혼을 하지 않을까, '왜'로 시작하는 질문들은 전 세대의 것이다. 새로운 세대에게 이 자연스러운 현상을 전에 결혼이 때가 되면 당연히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처럼, 그냥 안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세상인 것이다. 왜 결혼을 하는가에 남들이 다 하니까, 종의 유전자를 후대로 잇기 위한 본능이니까 같은 오래된 답들처럼 남들도 다 안하니까, 이 종이 이제는 자연히 사라지게 될 흐름이니까.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마 저자는 사람은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생각하기로 이 변화의 가장 큰 이유는 부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책임과 조건에 대한 부담. 나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세상에서 내가 너를 책임질 수 있을까, 영원하지도 않을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유로 이 관계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게다가 결혼으로 인해 엮이는 관계들도 부담이다. 결혼도 되돌리기 어려운데, 출산은 더더욱이다. 이렇게 멀리 생각하지 않아도 책임을 위한 조건을 만들기 위한 과정 마저도 부담이다. 취업하고 차나 집을 마련할 돈을 모으고, 한 가구의 가장들이 되기에 거쳐야 할 조건들이 많다. 없으면 없는대로 꾸려나가면 된다지만 부족할 바에야 차라리 없는게 더 낫다고 '낳음 당했다'는 표현까지 나오는 세상이다. 

" 내가 만난 1인가구들도 호퍼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카페, 버스, 빨래방, 그리고 자기만의 방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타인의 존재는 어떤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은 백색소음으로 떠돌았다. 110"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서적으로는 고독한 현대 미국 사회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호퍼의 그림과 1인가구들의 일상속의 뷰가 닮아있다는 점을 역설했는데, 그렇다면 저런 장소들에서 대체 타인과 어떤 관계맺기를 해야하는 것인지 알수가 없어서 의아했다. 카페, 버스, 빨래방, 자기만의 방에서 너무나도 타인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 그 공간을 이용하기 위한 목적에 타인이 고려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 결혼을 하지 않는 새로운 세대들의 특징이라고 규정될 수 있는가. 이들에 대한 어떤 규정들은 결과를 위한 규정같이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조카바보(281)'같은 것도 형제자매의 자식이어도 아이는 그저 아이일 뿐 조금 더 관심이 가고 예뻐할 뿐이지 프레임만큼 애정을 쏟지 않는다거나 사실 큰 교류나 관심이 없다는 입장인 사람들도 다수 보았다. 이들의 특징이라기 보다는 개인의 성향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하는 점이 아닐까 생각했다. 

" 가족은 장시간 노동에 브레이크를 거는 존재다. ...중략... 혼자 사는 노동자들은 이런 요구를 받거나 걱정 섞인 잔소리를 들을 일이 거의 없다. 언뜻 보면 이는 자유로움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가족으로부터 해방된 시간과 공간을 다시 일에 투입하다 보면, 이들의 일상은 자신도 모르게 일에 잠식당한다. 브레이크 없는 자유는 결국 멈출 수 없는 질주가 된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업무용 인생이 된다. 61" 

이 부분에서도 의아함을 느꼈다. 1인 가구의 가장들은 무엇보다 스스로가 이끄는 가정에서의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가족으로부터 해방된 시간을 다시 노동에 투입하다니, 요즘은 정해진 값어치 이상의 노동,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업무는 거부하는 '새로운 보통'들이 등장하지 않았던가. 인터뷰 대상의 연령층이 너무 높게 고정되어 있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개인의 삶을 유지해나가는 것을 말하는데 있어 가사노동은 피할 수 없는 화제였다. 밥이라는 것이 대체 뭐길래 "균형 잡힌 식사를 하기 어렵다(29)"는 답이 혼자 살 때 가장 어려운 점 1위일까. 결혼을 해서 가족이 있으면 식단의 균형이 저절로 잡히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이들이 떠올린 균형 잡힌 식사라는 것은 어쩌면 엄마와 살 때 제공되던 엄마의 가사노동의 결과(엄마 아니면 플랫폼 111)였을지도 모른다. 결혼 후 아이가 생겼을 때 아이 식사를 챙기기 위한 변화를 염두에 두었을 수 있지만, 그 역시 엄마의 가사노동 결과일 것이다. 그러니 '엄마처럼'은 살고 싶지 않을지도(25).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는 말. 사실, 엄마들도 이 새로운 세대를 키울 때 비슷한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분명 결혼해서 가정을 잘 꾸리고 살아가라는 바람도 있었겠지만, 하고 싶은 일도 하고 결혼함과 동시에 사회적인 자신을 멈추지말고 돈을 벌어서 스스로 쓰며 살아가라는 바람도 강하게 담았다. 그동안 지속되어 온 여성의 삶에 대한 의문과 저항이 두 세대의 바람으로 묶여 지금 진통을 겪으며 결과로 나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왜 혼자서 살아가기로 했을까, 앞으로 우리가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선택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책을 앞에 두고 많이 생각해보며 읽었다. 가보지 않은 길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혼자로 존재하되 함께 가는 방향을 모색하여 나아갈 필요성을 크게 느끼며 '필연적 혼자의 시대'를 읽었다. 어떤 내용들은 나의 체감이나 생각과는 다르기도 했지만, 어떤 내용들은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바탕을 짚어낸 듯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뭐든지 혼자 해내는 새로운 시대에 대해 발빠르게 파악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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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삶 사이에서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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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리고 동시에 숨기고 있던 의문, 부끄러움을 낱낱이 드러내놓은 기분이었다. 일터 앞에 있는 대로는 대부분의 시위자들이 향하는 목적지로 이어져있어 큰일이 있을 때에는 거의 항상, 그리고 때때로 이러저러한 문구가 새겨진 깃발과 조끼를 갖춘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며 지나가곤 했다. 길고 지리한 사람들의 행렬과 소음, 물이나 화장실을 찾아 들어오는 방문객들을 창 밖으로 바라볼때면 옆에서 불평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화장실을 찾아 어디까지 들어와서 불편하다거나, 하루종일 너무 시끄럽다거나, 퇴근할 때 길이 막힐 것 같다는 그런 작은 불편이었다. '바깥의 저 사람들이 하나씩 달고 있는 '노동'이라는 단어, 우리가 그거잖아요. 우리 휴가가 보장되고, 연봉이 오르고, 고용이 보장되는 게 저 불편에서 왔어요.' 그들과의 사이를 벌릴 용기도 없어 속으로 웅얼거리고는 "소시민"답게 오늘 퇴근하고 어떤 일정이 있느냐며 말을 돌리곤 했다. 이런 자신의 비겁함이나 그나마 선하고 싶다는 욕망을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드러내도 될까 그런 복잡함을 품고 책을 읽었다. 

칼럼으로 연재되었던 글들이라 한편의 분량이 길지 않고 대체로 명확한 주제가 드러나 읽기 편하다.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나도 알고 있는 우리 세상의 이야기를 한번쯤은 도마 위에 올려놓아 보자고 건네는 듯 하다. 그만큼의 가벼움으로 읽고 넘기기만 해서는 안되겠지만, 확실히 부담은 덜했다. 트렌스젠더나 돌봄노동, 다문화와 난민, 미얀마 민주화 운동과 난민 문제, 동물보호법, SPC 제빵공장 노동자의 죽음 같은 사회와 개인 문제에서 123사태, 부정선거 논란, 부동산 대책, 코인과 주식 같은 정치와 경제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가 다뤄진다. 

" 여성 노동자들은 파업 기간 내내 '떴다, 아지메 부대'를 자처하며 치열하게 싸우고 먹였다. 그러다 희생양이 됐다. 정리해고 후 노조에 직고용됐는데 같은 일을 하는데도 임금이 줄고 신분도 열악해졌다. 함께 해고된 남성 노동자들은 복직됐다.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복직을 노사 협의에서 다뤄달라고 노조에 요청하자 노조 대의원대회는 거부했다. 107" 

읽는동안 여성의 문제가 많이 눈에 띄었다. 책 안에서도 김장 버티기, 제사 폐지를 주장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나 살림 밑천으로 쓰인 수많은 여성들의 삶, 그리고 돌봄노동의 현실까지 다양한 여성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언제고 대체될 수 있고 가장 변화가 없는 환경과 조건에서 여성들의 노동은 계속되고 있다. 어느 건물에나 있는 화장실을 청소하는 노동자들에게 휴게 공간이 없어, 화장실 한 칸을 막아 그 안에 청소도구를 두고 청소노동자 역시 그 화장실 칸 안에서 쉬고, 밥을 먹는다. 매일 화장실을 이용하면서도 타인의 상황을 눈여겨보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문제가 공론화되기 전까지 눈치채지조차 못했다. 거기다 노동 투쟁의 현장에서조차 지워지고 배제되는 여성의 권리가 암담했다. 투쟁을 하면서도 동료들의 밥을 차려먹어야 했던 이들은 가정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집안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하고 당연스러운 노동을 또 해내야겠지. 거기서 우리는 또 얼마나 벗어났을까. 

" 한 여성이 '바깥일'을 하려면 다른 여성의 돌봄노동이 필요하고, 누군가 김치 담그기에서 해방되자면 누군가의 고단한 노역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되새긴다. '엄마표 김치'라는 그리운 말이 실은 "넙죽 받아먹기만 하는 자들이 계속 받아먹기를 염원하는 말"이라는 걸 깨우쳐준다. 303" 

사투리에 대한 이야기(116)가 나왔을 때 예전에 나도 경상도 출신 사람들 특유의 사투리에 의문을 품었던 것이 생각났다. 다른 지역 출신 사람들은 직접 물어보지 않는 한 말투로 고향을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유독 경상도 출신의 사람들은 사투리를 그대로 사용하는 비율이 높았는데 그 의문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관심있게 읽었다. 전에는 왜 그럴까에만 생각이 그쳤다면 요즘은 사투리를 쓰거나 쓰지 않는 것에 관심을 두는 일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서울과 가까운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서울 중심적인 행태가 불편하다고 여겨지는데, 고작 억양이나 말투같은 것으로 왜 고치지 않을까 왜 고칠까 생각하는 것조차 그 배경이 어떠하든 불필요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어떤 기준에 대한 잣대가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 게 과연 옳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우리가 과거에 당연시했던 가치들이 지금은 잘못이었고 무지였음을 깨닫곤 한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다고 하더라도 아주 나중에 세상의 판단 앞에서 어떻게 해석될지는 알 수 없는 것 아닐까. 솔직하자면 어떤 주제들은 반발심과 같은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분명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변화의 흐름에서 갑자기 멈춰서서, '이 방향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어' 하고 깨닫게 되는 일도 있었다. 오히려 그때는 미숙했고 지금의 전환이 더 맞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불과 10여년 전 쯤만 해도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결혼도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 미래가 이렇게 가깝게 다가올지 몰랐다. 인간의 모든 역사에서 당연한 본능이라고 여겨졌던 큰 줄기 하나가 서서히 말라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나아가기로 한 방향이 맞다고 어느 누가 정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의문 앞에서도 결국 나아가야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변화를 손에 넣을 수 있음을 알지만 요즘의 진통을 떠올려보면 이 앞이 가려던 곳이 맞을까 의문을 떨칠 수 없게 된다. 

" 문학의 쓸모는 타자에 대한 공감이라고 믿었지만, 어느 순간 젠더나 섹슈얼리티의 타자, 심지어 비인간 타자에게는 관심이 가도, 계급적 타자에게는 그러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내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만 진보적이며, 약간의 기부로 부채감을 퉁치고 마는 패션 좌파가 된 것은 아닐까 자문하고 있었다. 261" 

스스로를 좌파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이 문장에 이르러 큰 공감을 했다. 처음엔 바로 앞을 막아서고 집요하게 눈을 마주하는 낯선이를 상대하는 기분이 들어 어쩐지 불쾌하고 피하고 싶었다. 이게 당신의 모습이라고, 티비 앞에서는 세상이 어쩌려고 그러냐며 말을 얹다가 다른 사람들 앞에선 글쎄요,하고 말을 뭉개고 생각나면 가끔 이리저리 기부를 했다가도 길에서 서명을 받는 사람들 앞에서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기는 일이 망설여졌다. 공감은 하지만 실천은 어려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들킨 기분으로 문제 앞에 서는 일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선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에 나름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만 하는 약함을 꼬집는 것 같았다. 잘한 것이 없어도 잘하고 있다고 위로받고 싶은 욕심까지 들킨 기분이었다. 그 나약함과 욕심 덕분에 어떤 주제 앞에선 공감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하는 사람과 자신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과연 언제까지 이 흐린 구역에서 있는 것이 가능할 것인지 마음 속에 의문과 불안을 품어보았던 사람이라면 '앎과 삶 사이에서'가 거울과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답을 구하는 길을 가자고 말을 건네오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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