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엔드 - 과학과 종교가 재앙에 대해 말하는 것들
필 토레스 지음, 제효영 옮김 / 현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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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여름이면 지구의 멸망, 인류의 심각한 위협을 소재로 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찾아온다. 그간 우리가 접해왔던 흥행작들의 목록만 봐도, 인류 내면에 자리잡은 두려움 면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인공지능의 자각으로부터 시작된 기계의 반란 '터미네이터', 급격한 환경변화로 야기된 빙하기 '투모로우', 인간의 유전자 실험으로 탄생한 괴물 상어 '딥 블루 씨' 국내 영화로는 '연가시, 판도라, 부산행' 같은 전염병이나 핵발전소의 폭발, 좀비 바이러스 영화들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 소재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이다. 현암사의 신간 "디 엔드 - 과학과 종교가 재앙에 대해 말하는 것들 / 핵에서 인공지능까지 인류의 불행을 불러올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심층 탐구"는 이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소재가 될 법한 요소들을 하나씩 분석한다. 

 

 읽으면서 회의감을 느끼는 부분이 많았는데, 대부분의 요소들에서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인간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만 어마어마한 재앙을 일으키고 막대한 피해를 낳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존재 자체가 지구에게는 피해를 일으키는 재앙적인 존재로 보인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가 저지를/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모든 파괴적 행위들 뿐만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행하는 일들이 지구의 시간으로도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자연적인 생태계의 파괴를 불러왔다. "인류는 겨우 몇백 년 동안 환경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도 진화 속도가 따라올 수 없을 만큼 급격한 변화였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숲을 밀어버리고 바다를 오염시키고 생태계를 조각조각 분열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 p163 공룡과 도도새" 이는 상아가 없는 코끼리, 덩치가 작은 곰들이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마지막 열네 번째 단락으로 가면 '사전 대응과 예방' 부분이 나오는데, 그동안 열거했던 문제들의 심각성에 비해 해결 방법은 미온적인 느낌을 받는다.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의 설정처럼 한 고객 응대 서비스 용 인공지능이 자신들끼리의 은어를 만들어 대화를 나눈 사건, 우리가 익히 아는 몰디브라는 섬이 곧 바다 속으로 침몰할 위기에 처한 온난화의 심각성, 종교 간 분쟁으로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전쟁과는 상관없는 민간인들의 사망 소식 또한 매일같이 전해지는, "세계 어딘가에서 핵폭탄이 터지는 문제는 이제 가능성을 가늠하기보다 시점이 언제인지 파악하는 것이 대체로 더 중요한 사안이" 된 지금 가장 유력한 곳 중 하나인 북한 문제가 -비록 우리는 큰 신경을 쓰지 않으며 일상을 유지하지만- 심각하게 대두된 시기에 "믿음보다는 증거를, 계시보다는 관찰을, 종교보다는 과학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한 문장은 너무나 미약하게 느껴져 아쉽다.


 이 책은 인간에게 있는 소멸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를 다룬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 이후의 세계와 내세를 기약하는 종교를 만들고,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인구절벽에 대한 위기의식과 휴거같은 지구종말론 선동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환경오염으로 비롯된 온난화와 과학발전의 뒤를 따르는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 인간과 유사해지는 로봇에 대한 불안감, 마지막 전쟁이 될 핵무기 등이 자기 자신에게서 부터 비롯된 것임에도 왜 인간은 그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느끼고 있는 많은 위협들에 대해 공감하는 한 편, 지구에서 살고 있는 다른 종들도 인류가 느끼는 이 두려움을 자각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부분이었다.

 

 "세상에는 우리가 의문을 가질 수는 있지만 '절대로' 답할 수 없는 현상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럴 때 인간은 바로 앞에서 잡힐 듯 가물거리는 생각을 '표면적으로 들여다보는'것이 전부일 뿐, 실눈을 뜨고 아무리 골몰해봐야 제대로 볼 수 없다. - p113 인류의 목숨을 위협하는 발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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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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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시를 접하는 사람들은 시의 낯섦이나 해독의 어려움에 부딪치며 멈칫한다. 뭔가에 가로막히는 기분이 드는 것은 시가 일상적으로 쓰는 생활 어법과 다른 어법을 쓰기 때문이다. 시는 은유라는 이상야릇한 수사법을 품는데, 은유는 일상 화법과 다르게-말하기다. - p.29 은유의 깊이, 은유의 광휘 " 

 

 저자는 "시를 읽어도 '우주에서 은하의 속도는 시속 100만 마일'이라는 지식을 얻을 수" 없음을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불분명한 근간의, 명확하지 못한 우주라는 시공을 나름의 해석으로 그려낼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은 또 무엇일까. 문학적 상상이 그 안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익혀온 이름난 시를 아끼고 사랑함에도 새로운 시를 마주했을때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던 낯섦과 두려움을 마주하게 된다. '은유의 힘' 안의 스물네 단락의 글을 읽다보면 그토록 경계했던 시읽기의 오독과 무지의 공포가 점차 옅어짐을 느낄 수 있다. 장석주는 '은유의 힘'을 통해 시인과 시라는 것들이 우리 삶과 분리된, 해석하지 못할 기호에 머물지 않도록 한다. 그는 시인을 "우리 주변에 즐비한 것들의 발견자"로, 시는 "삶을 이루는 모든 찰나에서 파열하듯이" 나타나 직관으로 낚아채진 번개와 같은 빛줄기로 묘사한다. 이는 시와 시인이 우리와 다른 것을 보고, 보여줌을 드러내지만 한편으로는 괴리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실제로 시에게로 다가가는 과정을 통해 "우주에서 은하의 속도는 시속 100만 마일"이라는 지식을 얻지 않았는가.  

 

 장석주는 '은유의 힘' 안에서 수많은 은유들을 논한다. 이는 "인간은 스스로가 만물의 영장, 우주의 주인이라는 믿음", "오만한 영장류의 시대"를 시인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에서 보여주는 목가적 소망의 노래에 대입하기도 하고, "실재계를 비추지만 현전을 그대로 옮기는 게" 아닌 '거울'이라는 장치를 통해 인간 자아 발달을 얘기하기도 하고,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가르는", "기호이자 상징체계"인 언어의 역할을 드러내기도 한다. 더불어 그는 "보다 정교한 상징체계를 기반으로" 삼으며 "전복과 파괴라는" 망치질에 단련되는 시와 철학의 유사성, "세계와 대면하는", "감각의 확장"을 유도하는 몸과 그 안에서 "신체라는 영토를 탈주해 독립된 지위를 갖는" 얼굴에 이르기까지 감각과 기관으로 확장-세분되는 것들에도 주목한다. 시인은 인류 최후의 목소리이며, 일곱번째의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존재이고, 말을 모으는 사람이며, 이 말들은 기호이자 이름이고 얼굴이며 비로소 완성되어 현존하는 의미이자 본질이 됨을 강조한다.

 

 문학작품 안에서 은유의 상징과 의미를 정답찾기 하듯이 찾아낸 교육 아래에 길러진 수많은 '**년생 아무개'들을 돌이켜보자. 그것은 자신의 얼굴이며, 떠올릴-떠올릴 수 없는 또다른 수많은 얼굴들이다. 대학 강의실, 한 교수의 입에서 "어둠은 모조리 일제고, 빛은 죄다 조국의 해방이냐"는 일갈을 듣기 전까지, 교과서에 실린 문학작품의 자투리들을 파헤치며 정답을 찾아냈던 기계에 지나지 않았다. 시인 장석주의 신간 '은유의 힘'은 기계들에게 던지는 -살충제 성분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계란이다. 굳어져 무디고 어쩌면 녹이 슬었을 기계에 던져지는 계란이 기계 작동의 매커니즘을 일거에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이는 얼굴과 기계를 향해 던지는 작은 충격과 균열을 주는 시도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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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피해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 - 페미니즘이 이자혜 사건에서 말한 것과 말하지 못한 것 우리 시대의 질문 5
양효실 외 지음 / 현실문화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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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 말해지거나 더 말해진 것들 사이에서 우리는 매 순간 스스로를 잃고 혼란스러워진다. - p.105 아직 제목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피해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를 읽기 위해 우선 문제가 되는 "이자혜 사건"부터 찾아봐야 했다. 현실문화에서 나온 우리 시대의 질문 다섯번째 시리즈인 이 책은 "페미니즘이 이자헤 사건에서 말한 것과 말하지 못한 것" 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책의 275쪽에 약간의 정보가 기재되어 있지만 그로서는 정확한 내용을 알기 어렵고 따로 포털을 검색하여 해당 사건을 갈무리하여 이 책의 출간 의도와 배경을 알아야만 했다. 누구나 책을 읽기 전에 해당 사건에 대해 알아야 하겠지만, 이 사건을 알아본다면 이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정확히 판단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쟁점이 되는 성관계에서 두 주체의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여부부터 시작하여, 당시 미성년이었던 피해자의 선택에 주체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문제도 얽혀있다. 거기에 제 3자인 이자혜의 성폭행 공모/조장이 있었는지에 대한 여부까지 간다면 더욱더 복잡해진다. 이자혜가 그려낸 창작물들과 남겨놓은 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안의 글들이 보여주는 당혹스러운 폭력성과 원색적인 욕망의 적나라한 표출은 현실과의 경계를 교묘히 이용한 이입과 조롱의 단면이기도 했다. 알아보기 위해 건드렸다가 더욱 복잡해진 눈으로 '당신은 피해자입니가, 가해자입니까'를 읽었다.

 

 쟁점은 이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2차 피해를 줄이기 위해, 혹 모두가 순결하고 정의로운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 이자혜가 닿아있는 모든 부분에서 그를 제거하여 삭제해버렸다는 점이다. "소비자본주의는 이제 '유저' 혹은 '독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비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도덕적인 행위는 이제 윤리적인 소비자가 문제시된 생산물, 혹은 생산자를 시장에서 축출함으로써 실현된다. 성폭력 사건에 연루된 소설가, 시인의 작품을 삭제하라는 요구들,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을 시장에서 쫓아내라는 요구들은 그 작품 내지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된다는 식으로 개념을 과도하게 적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윤리의 이름을 내건 집단적 알리바이 만들기에 가깝다. - p.44 페미니즘이 해시태그를 만났을 때" 공공연히 알려진 유명인에 의한 폭력/피해 사건의 피해자들이 이를 알리면서 원하는 것이 사과와 보상 그리고 유명인인 가해자를 공적인 매체에서 더이상 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이자혜가 '제거'된 각계각층의 빠른 피드백이 대중의 요구에 발빠르게 부합한 점으로 보인다. 부정을 저지른 자의 창작 또는 공공연한 사회/경제적 활동은 사회윤리 의식에 반하는 결과를 보인다. 수많은 '청산'들은 시대의 과제이고, 우리는 그토록 빛이 어둠을 이기고 진실이 거짓을 이기는 사회가 되길 바라왔다. 자신의 욕망과 이기로 타인을 상처입히고 손해보게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그의 죄과와 별개로 구분되는 창작/사회/경제 활동으로 인해 대중의 지지를 얻고 이익을 보며 지내고 있다면 그러한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지점이었다.

 

 사건을 바라보는 개인적 관점 때문에 서문에서부터 이어지는 내용들이 편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많은 관점들이 "이자혜는 여자이기 때문에 수 시간만에 밥줄이 끊겼다(이 주장을 반박할 만한 근거가 있다면 제발 알려달라). - p.120 아직 제목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며 그의 제거됨의 부당함을 강조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계속하여 만약 자신이 피해자의 입장이라면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인가 고려해보길 떠올리게 된다. 더불어 "미지가 경험하는 세계는 두말할 나위 없이 21세기 한국사회의, 여성의, 청년의, 빈곤 계층의 경험이 녹아 있다. - p.172 오해의 세계" 는 점에서도 이미 삭제된 이자혜의 창작물들 중 남아있는 몇 편만을 본 지금에서도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음을 밝힌다. 공통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그렇지 않다면 미자를 통해서 느꼈을 공감을 부정하는 것이고 자신은 깨끗하길 원하는 위선'이라는 시선 역시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한편으로 이자혜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이들이 쓴 글을 읽으며 만약 내 지인의 일이라면 다른 면모를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동감을 한다. 이 이상의 것들은 더이상 판단할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것에 부친다. 현시점에서 가지고 있는 뒤늦은 부스러기들로 이만큼의 입장을 드러낸 것 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이다.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언급하는 일 만으로도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분류되는 날선 분위기와 무엇도 결론나지 않은 채 소멸된 사건의 흐름이 그러하다.   

 

 사건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275쪽의 개요와 197쪽의 '도덕적 폭력, 그 상큼한 쾌락의 원천'에서 다시 서문으로 이어지는 순서로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65쪽의 '이 여자들을 보라:애드리언 리치의 '강간'과 비르지니 데팡트의 강간 이론'인데 이자혜 사건과 거리감을 둔 글로 맨 처음 혹은 가장 마지막에 읽는 것을 추천한다. 전체적인 흐름을 잘 아우르는 내용이었다. 개인적으로 이자혜와 거리를 둔 내용의 글이 더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개인적으로/심정적으로 그녀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입장에서 사건을 해석한 글도 접해보고 싶었다. 번외로 아쉬운 점은 우리 시대의 질문 시리즈가 꽤 좋은 기획으로 출간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떤 목록이 있는지 찾아봐도 검색이 잘 걸리지 않는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1,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2, 곁에 서다 3 까지만 대표 포털에서 검색되고, 인터넷 서점에서도 헬조선에는 정신분석 4 까지만 확인된다. 다섯번째 시리즈까지 나왔는데. 시리즈 디자인을 좀 더 통일감있게 해서 시리즈 느낌도 팍팍 내주고, 검색에서 확인될 수 있게 출판사 블로그에서도 강조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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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의 인상 - 조선 청년, 100년 전 뉴욕을 거닐다 동아시아 근대와 여행 총서 1
김동성 글.그림, 황호덕.김희진 옮김, 황호덕 해설 / 현실문화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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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버스도 우리보다 더 행복하지는 않았으리라."

 

 근대를 대표하는 표식에는 무엇이 있을까. 1900년대 초반의 서양과 동양의 모습을 구분짓은 요소는? 기와집과 초가집이 넓고 낮게 펼쳐져있는 1900년대 과거 서울의 모습을 남긴 사진 자료들과 막 1902년 완공된 플랫아이언을 시작으로 조성된 뉴욕의 고층건물들의 사진을 보면 그 차이가 명확하다. 때문에 김동성이 '동양인의 미국 인상기'에서 표현한 처음 본 뉴욕에 대한 인상은 낯선 것에 대한 놀라움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뉴욕의 마천루들이 우리의 맨눈에는 길게 늘어선 산맥처럼 보였"다고 하며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고국에서 우리의 신들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유의 여신상을 향해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덧붙여 다른 유명인사나 정부보다도 고층건물 등의 도시상에 더욱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높은 스카이라인을 자랑하는 마천루에 대한 동경과 경외은 마치 더 높을 곳을 향해 쌓아올리는 바벨탑에 대한 그것과 같다. 그리고 그는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큰 바다의 한 방울 물과 같"다고 느낀다.

 

 그 외에도 아주 소소한 일상들에 대한 간결한 설명과 함께 자신의 생각을 적어놓았는데, 그의 생각이 매우 진보적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전통적 가정상을 두고 미국의 독립적이 가정의 모습을 "이 시대의 가장 훌륭한 제도"라고 표현한 점은 인상적이다. 덧붙여 뒷부분에 나오는 "사랑" 부분의 내용에도 "고국에서는 부모가 젊은이들의 배우자감을 골라주는" 것에 대해 말하며 반면 미국의 "젊은이들은 대단한 자유를 누리고" "스스로가 선택한 이와 사랑의 도피를 할 정도"라고 연애와 결혼 제도에서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여성 참정권"에 대한 내용인데 짧지만 직접 읽어본다면 좋을 것 같다. "미국의 여성 규범에 대해 미국을 지배하는 것은 여성"이라고 표현하는 김동성의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시선이 눈에 띈다.

 

 읽으며 재미있었던 부분은 '옷'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당시 김동성이 "미국인들은 분명 세계에서 가장 옷 잘 입는 이들"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제는 오히려 한국인들에 대해 유행에 민감하고 스타일리쉬하다는 평이 많다. 반면 유행이나 남을 신경쓰지 않는 단순하고 편한 스타일이라고 표현되는 미국의 스타일은 시대와 지역 차이가 있겠지만 1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전도된 평가로 새삼스러운 시간의 골이 느껴졌다. 이어 나오는 "개구리 다리"에서는 "고국에서는 식용이 아니던 개구리 다리가 이곳에서는 미국 메뉴의 최고 유행 요리 자리에 올라 있다"는 내용이 나와 충격적이다. 우리는 개구리 뒷다리가 서양인들은 끔찍하게 생각할지도 모를 우리의 토속 음식 문화 중 하나 쯤 된다고 여기며 지내왔을텐데! 정반대의 입장이라니!

 

 저자인 김동성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책의 첫머리에 나온다. "미주의 인상을 펴내며" 김동성의 저작물들을 옮겨 펴낸 황호덕이 대표로 써놓은 머릿말인데, 그 안에 줄줄이 담긴 김동성의 흔적은 여전히 생소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글들은 그와는 별개로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동안은 외부에서 본 조선의 모습이 담긴 기록 등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외부로 나아간 조선의 시선은 오히려 낯설고 조심스러운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표지부터 한자로 내리 쓴 제목까지 강렬하지 않은 것이 없어 경계가 생기는 책이다. 하지만 1900년대부터 넓게는 1930년대까지의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한다면 또는 외국에 대한 호기심이 풍부하다면 이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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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이미 와 있는 미래
롤랜드버거 지음, 김정희.조원영 옮김 / 다산3.0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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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지난해의 일이다. 일본의 한 편의점에 일손부족을 해결할 계산 로봇이 등장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로봇'이라는 단어가 주는 형상화 적 시스템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방식으로 자주가는 대형 마트에서도 계산을 하고 나온다. 계산원을 거치지 않고 직접 바코드 인식을 시켜 물건을 계산하고 나오는 것이다. 일본의 것이 좀 더 나은 점이라면 일일이 바코드를 찍지 않아도 한꺼번에 바구니에 담아두면 된다는 것과, 계산대 아래로 물건을 내리면서 자동으로 간단한 포장이 된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그 밑으로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마트의 자율계산대에 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댓글이 달렸다. 인터넷을 주로하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많이 구하는 젊은 세대에게 4차 산업혁명을 통해 감소하게 될 일자리가 피부로 느껴지게 된 사건이었기 때문이리라.

 

 4차 산업혁명에 대해 처음 접한 것은 한 기업의 광고 내래이션이었다. 어떤 부연은 없이 '4차 산업혁명 시대'라는 문구를 넣은 내래이션이 귓가를 지나쳐갔다. 보는 입장에서도 그것이 단순 기술 혁신 관련 용어이고 나의 입장에서는 아무 상관이 없는 업계의 변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로 티비를 보다 이것이 앞으로 수십년을 더 살 -것이라 희망하는- 자신과 인간이라는 존재로 그 명맥을 이어나갈 종의 생활을 뒤흔들 또 하나의 흐름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춘천으로 여행을 떠난 편에서 바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다가올 미래에 대해 떠올리면 발달된 기술에 대한 경이와 그로인해 인간이 노동시장에서 설 자리가 없다는 위기의식이 뒤섞여있는 감정이 들 것이다. 과거 산업혁명에서도 기계화에 맞선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났던 것처럼.

 

 독일의 롤랜드 버거 사의 '4차 산업혁명 이미 다가온 미래'는 4차 산업혁명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예민한 문제가 될 수 있는 인간의 일자리 상실에 관한 부분 역시 과거의 산업혁명들과 다르지 않게 이를 통해 새롭게 생겨날 일자리가 더욱 많을 것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수긍이 된다기 보다는 염려가 더 많이 되었는데 사회가 고령화됨에 따라 새로운 일자리의 창출은 기존 노동인구에게 큰 메리트가 없을 것이란 예상이 들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발전 과정을 경험하며 우리는 산업 현장에서 수많은 베테랑 직업인들이 자신의 자리를 잃게 되었는지 목도하였다. 지금의 발전 속도로 기대하건데 중/노년층의 일자리 뿐 아니라 현재의 청년층부터 가까운 미래에 닥칠 전문분야의 노동시장 축소와 새로운 기능인으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개발해야 할 부담을 안아야 할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인력의 대체가 앞으로 다가올 인구절벽에 대한 대비책이 될 것란 생각이 들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유적 존재로서 규정하고 동물과의 차이점을 역설한다. 단순 생계의 목적이 아닌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의 '노동'을 통해 구분이 된다는 관점이다. 이는 노동의 기여와 분배가 획일적인 공산주의 사회 체제에서 더 큰 활용성을 띈다고 보았다. 앞으로 직접적 노동이 기계에로 전가되는 사회 체계가 생겨난다면 외려 노동의 목적에서 생계는 배제되고, 자아실현이나 본질을 추구하는 노동활동에 더 집중되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된다면 굳이 지금 수준의 인구가 앞으로도 필요할 것인가 싶어진다. 오히려 인구는 지구 생태에 비해 많은 편이며 사회의 발전 속도와 인구 감소 추이는 당장은 다소 혼란스러울 지라도 자연스러운 변화인 것이다. 이는 '4부의 2030 7대 메가트렌드' 부분을 읽으며 좀 더 흥미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주제였다.

 

 생소하거나 이해도가 적은 분야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와 읽기 편한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의 흐름을 가볍게 파악해보고 싶다면 읽어볼만 하다. 기술의 발전이 바로 우리 발뒤꿈치 정도에 다다랐음이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한순간이면 우리를 앞질러 그 뒤를 좇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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