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시를 접하는 사람들은 시의 낯섦이나 해독의 어려움에 부딪치며 멈칫한다. 뭔가에 가로막히는 기분이 드는 것은 시가 일상적으로 쓰는 생활 어법과 다른 어법을 쓰기 때문이다. 시는 은유라는 이상야릇한 수사법을 품는데, 은유는 일상 화법과 다르게-말하기다. - p.29 은유의 깊이, 은유의 광휘 " 

 

 저자는 "시를 읽어도 '우주에서 은하의 속도는 시속 100만 마일'이라는 지식을 얻을 수" 없음을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불분명한 근간의, 명확하지 못한 우주라는 시공을 나름의 해석으로 그려낼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은 또 무엇일까. 문학적 상상이 그 안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익혀온 이름난 시를 아끼고 사랑함에도 새로운 시를 마주했을때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던 낯섦과 두려움을 마주하게 된다. '은유의 힘' 안의 스물네 단락의 글을 읽다보면 그토록 경계했던 시읽기의 오독과 무지의 공포가 점차 옅어짐을 느낄 수 있다. 장석주는 '은유의 힘'을 통해 시인과 시라는 것들이 우리 삶과 분리된, 해석하지 못할 기호에 머물지 않도록 한다. 그는 시인을 "우리 주변에 즐비한 것들의 발견자"로, 시는 "삶을 이루는 모든 찰나에서 파열하듯이" 나타나 직관으로 낚아채진 번개와 같은 빛줄기로 묘사한다. 이는 시와 시인이 우리와 다른 것을 보고, 보여줌을 드러내지만 한편으로는 괴리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실제로 시에게로 다가가는 과정을 통해 "우주에서 은하의 속도는 시속 100만 마일"이라는 지식을 얻지 않았는가.  

 

 장석주는 '은유의 힘' 안에서 수많은 은유들을 논한다. 이는 "인간은 스스로가 만물의 영장, 우주의 주인이라는 믿음", "오만한 영장류의 시대"를 시인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에서 보여주는 목가적 소망의 노래에 대입하기도 하고, "실재계를 비추지만 현전을 그대로 옮기는 게" 아닌 '거울'이라는 장치를 통해 인간 자아 발달을 얘기하기도 하고,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가르는", "기호이자 상징체계"인 언어의 역할을 드러내기도 한다. 더불어 그는 "보다 정교한 상징체계를 기반으로" 삼으며 "전복과 파괴라는" 망치질에 단련되는 시와 철학의 유사성, "세계와 대면하는", "감각의 확장"을 유도하는 몸과 그 안에서 "신체라는 영토를 탈주해 독립된 지위를 갖는" 얼굴에 이르기까지 감각과 기관으로 확장-세분되는 것들에도 주목한다. 시인은 인류 최후의 목소리이며, 일곱번째의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존재이고, 말을 모으는 사람이며, 이 말들은 기호이자 이름이고 얼굴이며 비로소 완성되어 현존하는 의미이자 본질이 됨을 강조한다.

 

 문학작품 안에서 은유의 상징과 의미를 정답찾기 하듯이 찾아낸 교육 아래에 길러진 수많은 '**년생 아무개'들을 돌이켜보자. 그것은 자신의 얼굴이며, 떠올릴-떠올릴 수 없는 또다른 수많은 얼굴들이다. 대학 강의실, 한 교수의 입에서 "어둠은 모조리 일제고, 빛은 죄다 조국의 해방이냐"는 일갈을 듣기 전까지, 교과서에 실린 문학작품의 자투리들을 파헤치며 정답을 찾아냈던 기계에 지나지 않았다. 시인 장석주의 신간 '은유의 힘'은 기계들에게 던지는 -살충제 성분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계란이다. 굳어져 무디고 어쩌면 녹이 슬었을 기계에 던져지는 계란이 기계 작동의 매커니즘을 일거에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이는 얼굴과 기계를 향해 던지는 작은 충격과 균열을 주는 시도로 남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