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다정한 그림들 - 보통의 일상을 예술로 만드는 방법
조안나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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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제나 맛없는 비스킷을 먼저 먹고 가장 맛있는 건 나중에 먹는 나는, 힘든 일을 한번 겪고 나면 나머지는 웬만하면 다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러니까, 햇살 가득한 스타벅스에서 이 글을 쓰는 수요일은 행복 그 자체이다. (41) "  


 어떤 분야이든 전문적인 지식과 안목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괜히 거리감이 들었다. 굉장히 평범한 사람인 나는 언제든 어느 누구와든 대체될 수 있는 흔한 사람인데, 그들은 뭔가 특별한 능력이나 세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나 예술을 감상하고 그걸 풀어낼 힘을 가진 사람들은 더욱 멀었다. 분야마저 어렵게 느껴지곤 했다. 요즘은 생각을 바꿔 나도 뭔가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만큼 즐거웠다면 됐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마음을 내려놓기는 쉽지 않다. '나의 다정한 그림들'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조금이라도 더 보고 배우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저 문장을 읽는 순간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책의 리뷰도 수요일에 써서 남겨야지, 마음먹었다. 


 책을 읽고 감상을 쓰는 시간동안 항상 내려져있던 거실창의 블라인드를 일부러 올려두었다. 어떨 때는 별안간 책을 읽다말고 블라인드를 올리러 달려가곤 했다. 늘 모니터와, 화면과, 활자를 보던 눈이 어느 한 순간이라도 푸르고 일상적인 풍경을 바라봤으면 좋겠다 마음먹게 되는 책이었다. 하루종일 외부와 단절시켜놓고도 답답한 줄 몰랐던 공간에 개방감이 더해지는 변화를 덕분에 꽤 즐기게 되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 마련해둔 화단의 나무들이 조금씩 물드는 사소한 풍경이라도 시선 안에 들어오면 특별해지는데, 화가들에게 더 넓고 푸르른 자연이 주어진다면 그리지 않을 수 없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자연과 정물을 그린 작품들이 많은 것일까. 모델료가 필요하지 않다는 장점도 있겠지만. 


 읽으면서 공감도 많이 하고 닮은점을 찾아내기도 하느라 오래 걸렸다. 일상이 수시로 끼어드는 상황에서 할 일을 하는 고군분투인지라 책 안에는 코로나로 격리를 하던 시간, 반찬 해먹는 일, 잠들기 전 인터넷 쇼핑 같은 주제가 등장한다. 나 역시 책을 읽으면서 세탁소도 다녀오고, 분리수거도 하고, 택배를 받기 위해 몇 번이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하면서 '느낌 있게 사는(183)'건 일상 안에서는 좀처럼 쉽지 않구나 했다. 어느 날 지인이 어떤 가수의 얘기를 하면서 결혼을 하면 예술성이 죽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명곡의 탄생은 짝사랑과 실연 기간에 집중된다는 우스갯소리와 곁들인 말이지만 순간 당황스러움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른 그 말을 다시 생각해보니 책 한 권 읽는데도 생활이 끼어드는 순간이 있는데, 예술을 하며 느낌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더 어렵겠냐는 뜻으로 느껴져 속으로 그랬구나 했다.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세속적인 지점은 미술 에세이를 쓸 때 저자가 거치는 4단계(129)를 설명한 부분이다. 어떤 분야에 대해 에세이를 쓰고 싶은 사람이 참고해도 좋겠지만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으로 써도 좋겠다. 전에는 전시를 가기 전에 미리 공부를 안해가면 이해도 못하고 어떻게 감상해야 되는지 모를 것 같아 걱정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니는 도슨트 안내 시간에 그림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면서 설명만 들으며 힘들게 쫓아다닌 적도 있다. 그런 감상법이 나에게 더 잘 맞아서가 아니라 잘 모르면서 보는 걸 부끄럽게 또는 의미없게 여긴 탓이다. 하지만 모르고 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좋다'고 느꼈다면 "내 삶에 필요한 이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왜인지 이유를 생각해보자. 같은 감상법들은 나에게 더 잘 맞는 방법이라 도움이 되었다. 


 많은 그림들이 소개되는데, 샐리 스토치의 그림(25)을 안내 받으며 기쁨을 느꼈다.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인가 했는데, 책에서도 스토치의 그림을 소개하며 호퍼를 말한다. 물론 나중에 호퍼의 그림도 등장한다.(143) 하지만 둘 사이의 분위기가 다르고 굳이 누구의 그림이 더 좋다고 평하지 않아도 될 만큼 시선을 끄는 각자의 매력이 존재한다. 카페라는 익숙한 공간이 화폭으로 옮겨져서일까. 잘 모르는 예술의 세계를 쉽게 설명해주고, 유명한 작가와 그림들을 배우는 내용도 좋지만, 이런 어렵지 않은 접근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커피를 한 잔 내려 책을 읽는 시간처럼 그래서 어떤 '작품 속 의미'들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는 '분위기'를 예술에서 음미하는 순간을 선사한다. 새삼 '다정한'의 의미를 깨달았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정리하는 동안 잠시 여행을 다녀왔다. 책이 인상깊었던 탓일까, 흐리던 날이 개어 어느 날의 한라산을 바라보고는 책에서 본 오키프의 그림같다고 떠올렸다. 작가는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면서 아그네스 마틴의 <행복한 휴가>(225)를 이야기 했지만, 단순한 선이 칠해진 <행복한 휴가>보다는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페데르날>(91)이라는 그림이 한라산과 닮아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한라산이 이렇게 생겼었나 새삼스럽기도 했는데, 아마 이런 감상은 이전에 가지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는 혼자 한라산을 보며 이 그림을 떠올릴 것을 짐작하니 천천히 느리게 나를 변화시키는 힘이 독서에 남아있음을 발견한다. 책과 그림과 저자와 일상과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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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맛집 산책 - 식민지 시대 소설로 만나는 경성의 줄 서는 식당들
박현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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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 맛집 산책은 그리움을 먼저 전해주었다. 경성이라 불리던 시대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책에 소개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식당 중 한 곳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언젠가 엄마와 함께 종로와 인사동엘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그때만해도 종로에 자주 가질 않아 목적한 곳 외에 어디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실지 몰랐다. 일을 마치고 괜찮아보이는 곳에 들어가 기분좋게 먹고 마신 우리의 외출은 썩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날 밤 우리의 자랑을 들은 아버지가 놀라움과 안타까움 게다가 약간의 기막힘을 담은 기색으로 거기까지 갔으면 이문설렁탕을 먹으러 갔어야지! 하시는게 아닌가. 대체 그 설렁탕이 무엇이길래! 눈앞에 놓인 설렁탕을 두고 '왜 먹질 못하니' 탄식하는 김 첨지를 떠오르게 만들었던 것일까. '경성 맛집 산책'에 바로 그 이문설렁탕 집도 소개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때의 추억이 떠오르며 궁금했다. 


 책이 제법 귀엽다. 음식점에 대한 소개와 함께 메뉴판이 제공된다. 비싸보았자 50전 내외의 가격을 보며 부자가 된 기분도 느낀다. 만원만 가져가도 갑부가 되겠구나. 설렁탕이 15전 냉면이 20전이니, 뒤에 전 대신 천원을 붙이면 요즘 물가인 셈일까? 책에서는 1원에 5만원 정도로 소개했는데 1원에 10만원으로 봐도 무방할만큼 식대는 갈수록 오른다. 요즘 물가를 비교해 생각해봐도 일반적인 식사 한끼 가격보다는 좀 더 비싼가 싶은데, 책 속에 나오는 음식점들이 대부분 고급스러운 곳이라 호텔 식사값이나 커피값으로 생각해보면 비슷하다. 그러니 1원도 안되는 가격들에 살짝 넉넉한 기분을 내봤지만, 그때도 갑부는 커녕 설렁탕과 냉면 값 살벌하게 오른 물가에 허리띠를 졸라 매는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서민의 삶일 것이다. 시대가 시대니만큼 더 힘들었으면 모를까. 


 다시보니 가격면에서는 영 귀엽지만은 않은 경성의 맛집 면면을 살펴보니, 고급스러운 호화로움이 느껴진다. 그때 당시를 보여주는 신문, 사진 그리고 문학작품 안에서 등장하는 묘사를 살펴보면 꽤 재미있다. 얼마 전 유행했던 개화기 스타일의 의상을 그대로 입은 듯한 사람들과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섞여 광화문이나 인천, 전주, 군산 같은 관광지에서 요즘도 볼 수 있는 모습같기도 하다. 그 시절 사람들의 옷차림이 내노라하는 식당들의 호화스러움 못지 않게 멋을 낸 점이 인상적이다. 이 고급 음식점들이 소설 등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요즘 위스키를 마시고 오마카세나 호텔 식사를 예약해서 향유하는 문화가 새삼스러운 과소비 풍조라기엔 오래된 것이 아닌가 싶다. 


 책이 상당히 두툼한데 읽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책을 읽고 나니 어떤 장소들은 눈 앞에 풍경이 펼쳐질 것도 같다. 이제는 흔해진 음식들이지만,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식문화로 자리잡은 메뉴들을 컨셉에 맞춘 차림을 하고 즐기러 다녀와도 재밌겠다. 시간을 뛰어넘어 혹은 옮겨와 오래된 가을 길을 걷는 특별한 산책을 다녀와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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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를 날리면 - 언론인 박성제가 기록한 공영방송 수난사
박성제 지음 / 창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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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뉴스는 보도국과 디지털뉴스국이 알아서 만든다. 기자들은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소신껏 기사를 쓴다. 데스크와 국장은 그것을 고치거나 손볼 수 있다. 그러나 사장은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MBC는 그런 언론사다. (17) "


 언론기관에 종사한 저자가 쓴 책이니만큼 우리가 경험해 온 굵직한 사건들을 하나씩 조명하며 조금 더 깊숙이 전달해준다. 잊었던, 혹은 담아두었던 사건들이 기억속에서 끌려나올 때마다 새삼스럽고 충격적이다. 그 시간들을 다 지나와서 또 지금 이런 현실이라니.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서일까 우리가 어리석고 이기적인 탓일까. 


 광화문에 볼일이 있어 다녀올 적이면 하루에도 진영을 나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있는지 놀랍다. 정말 이 많은 사람들이 서로 극렬히 대치된 저마다의 신념에 뿌리를 두고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이들이 이렇게 행동하게 된 바탕에는 언론의 영향도 크다고 생각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검증되지 않은 자극적인 보도들. 어떤 종편 채널에선 사담으로도 나누지 않을 내용을 출연진들이 앉아 방송으로 내보낸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언론의 태도가 천차만별이라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지금 뉴스를 볼 때면 빙산의 일각만이 주어지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익이 눈을 가리면 입도 거짓을 말하는 데 부침이 없는 것일까. 책에서도 '블랙리스트'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는데 요즘의 행보를 보면 없어지지 않은 리스트가 다시 채워질 흐름을 보인다. 그 자체를 부정하면서 더욱 천연스럽게.


 가볍지 않은 내용인데 어느샌가 페이지가 줄어있다. 홀리듯이 책을 읽어나가게 되는 것이 확실히 문장이 명료하고, 사건들이 일부러는 아니어도 자극적인 면이 있어 기대보다 흥미롭게 읽었다. 예상하기로는 감성을 좀 팔고 딱딱한 내용이 될까 싶었는데, 현란하게 돌아가는 최근 국정과 언론의 행보에 '이 시기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는 내용만 담아도 책장이 금방 넘어갔다. 


 " 그렇다면 좋은 언론은 어떤 사명을 추구해야 하는가. 많은 언론인들이 '권력을 감시하고, 사회적 약자를 대변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다. 마치 '학생은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나는 거기에 '인권을 수호하고, 전쟁이 아닌 평화를 지향하며, 지구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을 더하고 싶다. (200) "


 마치 인기 영화 시리즈의 슈퍼히어로가 할만한 대사같다고 생각했다. 언론이 권력 감시와 약자 대변의 기능만 해줘도 대중들은 차고도 넘치게 만족할텐데. 학생이 공부 열심히 하기도 힘든 것은 맞으니까. 책을 읽는 동안, 그리고 짧은 서평을 쓰면서도 조심스러웠지만, 저자의 바람처럼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언론이 언론인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단 희망찬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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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인생은 흐른다 - 이천 년을 내려온 나를 돌보는 철학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김한슬기 옮김 / 페이지2(page2)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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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독서가들이 그렇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인상깊은 부분이나 의문이 생기는 곳에 표시를 해두거나 따로 메모를 하기도 할 것이다. 나의 경우엔 전에는 일일이 책갈피를 꼽아두기도 했는데 나중에 정리하며 떼는 것도 손이 많이 가고 표시 테잎도 낭비되는 것 같아 요즘은 핸드폰으로 그때그때 사진을 찍거나 따로 적어둔다. 왜 이런 얘기를 꺼내냐면, '그럼에도 인생은 흐른다'를 읽으면서 표시하고 싶은 부분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인상적인 부분을 일일이 따로 남겨두려다 책의 모든 부분을 필사하는 것과 다름없어질 것 같아 그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 어떤 책을 읽기로 마음 먹었을 때 재미있을 것 같다, 취향에 맞을 것 같다는 가늠을 어느 정도 해보는데 예상을 뛰어넘어 마음에 들었다. 다만 읽는 내내 요즘말로 순살이 되도록 맞는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맞는 말만 아프게 때려넣어도 되는걸까. 읽다보면 이 문장에도 맞고, 저 문장에도 맞아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한숨을 쉬다가 이 정도면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게 맞나, 나잇값은 하고 있나, 성인으로써 이대로 괜찮은가 끝없는 반성에 들어가게 된다.  


 " 자신조차 못한 일을 타인에게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애정을 찾는 행동은 우정이 아닙니다. 혼자서는 견디기 힘드니 타인에게 기대려는 행위일 뿐입니다. (23) "


 " 인간은 자기 재산을 넘보는 사람을 가만히 두고보지 못합니다. 누군가 자기 땅을 조금이라도 넘어오려고 하면 주저하지 않고 돌을 들고 무기를 휘두릅니다. 하지만 타인이 자기 인생을 침범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심지어 인생 전체를 순순히 남의 손에 넘겨주기도 합니다. 단 몇 푼이라도 돈을 내어주는 일은 꺼리면서 삶을 내어주는 데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재산에는 인색하면서 시간을 나누는 데는 거리낌이 없으니, 정작 아껴야 할 것을 낭비하고 있는 꼴이 아닙니까? (24) "


 정말 책의 초반에 나오는 내용인데 벌써 뼈도 멘탈도 가루가 되어 버린 기분이다. SNS 줄이겠습니다. 타인의 평가에, 좋아요에 자아를 의탁하는 일희일비를 하지 않겠습니다.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싶어진다. 솔직히 제목은 '그럼에도 인생은 흐른다'고 이래도 저래도 지나갈 일은 지나가기 마련이라는 조금은 물렁한 느낌을 주는데, 반대로 내용은 맵다. 이천 년을 내려온 철학이 얼마나 '지금'에 반영될 수 있겠냐며 얕보았다가 이천 년동안 변치 않고 사람을 야무지게 패주는 던 경력에 압도되었다. 요즘 멘탈이 좀 풀렸다거나, 따끔한 자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이 책이 고루한 소리만 늘어놓는 것은 아닐까 의심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부는 틀림없이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161)' 현실성도 잡고 있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다이다'는 농담을 진담과 다름없이 하는 요즘 세대가 봐도 공감할만한 어조다. 개인적으로 책장에 쌓인 책들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책을 사서는 안 됩니다', '평생 동안 제목조차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책을 쌓아둔 서재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거대한 책 더미는 가르침이 아닌 부담을 줄 뿐입니다. (227)'는 내용도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책 사다놓고 안 읽는 사람'의 호칭을 정하는 글을 본 적 있는데, 그에 따르면 소장학파이자 책곰팡이인 입장에서 '비우기'를 실천하지 못한 미련이 또 한 번 들쑤셔졌다. 


 정말 공감되고, 마음을 후벼파는 내용이 많은 책이다. 겉표지나 제목을 보고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거나 재미없을지도 몰라 선뜻 읽을 시도를 하기 어렵다면 부담을 내려놓아도 괜찮겠다. 각 장이 1~2 페이지 정도 분량으로 짧게 되어 있어 생각보다 읽기 수월하고, 어조가 냉랭하여 자기계발서 같이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감이 없이 짧게 일침을 놔주는 느낌이다. 지금 다시 보니 표지에 '어느 철학자의 차가운 위로'라고 쓰여진 문구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염려를 내려놓고 가볍게 하루에 한두장 정도 읽으며 그날의 자기반성을 해봐도 좋겠다. 마음은 조금 괴롭지만 연말이 다가오며 느슨해진 정신에 기강 잡는 시간도 필요하니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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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요새 - 사유의 미로를 통과하는 읽기의 모험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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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응축 영역'이란 사랑의 감정이 응집되는 대상 곧 사랑의 파트너를 말한다. '정박 지점'이란 사랑이 닻을 내리는 지점 곧 사랑하는 이유다. 문제는 응축 영역과 정박 지점이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슈미츠는 '먼저 죽은 파트너를 생각나게 한다'는 이유로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사례로 든다. 그 경우에 사랑의 대상은 현재의 여자이지만 그 사랑의 목표는 과거의 여자다. 응축 영역 곧 사랑의 대상과, 정박 지점 곧 사랑의 이유가 분리돼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파국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84/사랑은 왜 깨지기 쉬운가) "


 [그앨 정말 좋아하나 / 너를 닮아서 사랑하나 / 흔들리는 마음은 점점 알 수가 없어]

오래 전 한 가수가 불렀던 노래의 가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사랑의 딜레마'는 이리도 가까운 곳에서 '응축 영역'과 '정박 지점'의 어긋남을 노래하고 있었다. 읽으면서 쉽지 않다고 몇번을 되뇌이고 있다가 직관적으로 '이건 나도 예를 들어서 설명할 수 있겠는데?' 싶은 깨달음이 온 부분이다. 어렵지만 어렵지만은 않다. 


 '생각의 요새'는 약 500여쪽에 달하는 인문학 도서다. 책의 소개로는 '오컴의 면도날'같은 간결하고 선명한 언어로 사상가들의 생각과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고 하지만 일단 어려워보인다. 하지만 어려운 말 쓰지 말라고 화내는 것보다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배워가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에 천천히 읽어보려 도전했다. 나와 같은 입장의 사람들에게 좀 더 유혹적인 리뷰가 되었으면 해서 다가가기 쉬울 감상을 소개글보다 먼저 넣어보았다. 면도날은 아니더라도 가위정도는 될만한 시선이었다면 좋겠다.


" 루만은 사회적 체계가 '소통'(커뮤니케이션)의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소통은 정보를 알려주고 그 정보를 이해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소통은 '정보-통보-이해'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누군가 생각 곧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통보하면, 그것을 받아들여 이해하는 순간에 소통이 성립한다. 생명체가 끊임없는 신진대사로 자기를 유지해 가듯이, 사회적 체계도 끊임없는 소통의 반복으로 자기를 유지해 간다. 만약 소통이 사라지면 사회적 체계는 소멸한다. (106/체계이론과 주체 없는 사회학) "


 요즘 SNS를 처음 이용해봤는데, 허공에 아무말을 말해보는 기분이 들어 사람들이 왜 이런 걸 하는걸까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친구라 서슴없이 부르고 '소통'하자며 하트를 남기는 것을 부럽게 바라보며 SNS 초보는 혼자 궁금했던 것이다. 우리는 왜 가장 깊고 내밀한 공간에 들어앉아 그림자 같은 상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내고 소통을 이야기할까. 소멸되고 싶지 않은 사회적 체계가 우리 내면 무의식에 자리잡아 어디로든 무엇이라도 발신하여 수신을 얻어내라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부 흡충이나 촌충이 숙주를 조종하는 것처럼.


 또 하나 흥미로웠던 부분은 " 오늘날 민주주의는 유권자가 선거로 대표를 뽑는 '대표제 민주주의'(대의민주주의)를 뜻한다. 그러나 대표제 민주주의는 '인민의 직접 통치'라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열등한 민주주의라는 평가를 받는다.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할 여건이 돼 있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채택한 차선의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124/대표제의 길, 민주주의의 길) " 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홉스와 루소의 사상이 충돌하는 부분에 이르러(126) 요즘 시기에 이 부분의 내용을 읽는다면 공감도 되고 생각할 점도 많을 것이다. 


 " 대표제는 다수의 의지로부터 떨어져서 대표자가 독자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을 허용한다. 나아가 스스로 의지를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대표해서 행동하는 것도 대표제에서는 가능하다. 그런 차원의 대표제가 적용될 수 있는 사례로 이 책은 환경. 생태 문제와 미래 세대 문제를 든다. 지구를 대표해 온난화 문제를 제기하고 싸우는 것,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을 대표해 보호를 요구하는 것이다. (127/대표제의 길, 민주주의의 길) "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현실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를 대표해 지금 세대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가능하다.(128)"로 이어지는 책의 내용은 꽤 강렬하게 다가왔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떠올리며 대표제의 명암을 가늠해보았었는데, 지난 24일을 기점으로 연일 이어지는 뉴스를 보며 특히나 생각이 많아지는 부분이었다. 


 책의 몇몇 부분과 함께 나의 짧은 감상을 정리하며 리뷰를 남겼는데 어떤 부분은 좀 멀리 떨어져서 흐린눈을 하고 지나가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생각이 알 수 없는 곳으로 튀어 한동안 멀거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몸 테크닉(142)'과 '헤게모니 투쟁과 대중문화(149)' 부분을 읽으며 언급되는 하비투스, 대중문화에 대해 생각하다 이런 속도로는 연말에나 완독하여 리뷰를 쓰겠구나 싶어 초반부 읽은 내용을 바탕으로 추천글을 남긴다. 생각보다 흥미로운 내용도 많고 생각이 튀어가는 지점이 재밌으면서, 빨리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지는 책이다. 처서가 지나고 날이 선선해지는 시기가 오고 있으니 당신에게 사유를 선물할 '생각의 요새'를 하나 지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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