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떻게 걷는지 보여주면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주겠다 -프리드리히 니체"
나에게는 걷는 친구가 있다. 그는 스스로를 걷고 쓰는 자로 칭한다. 책세상의 신간인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을 손에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그였다. 비록 최근 그는 발달한 서울 시내의 따릉이 문화에 깊이 심취하게 되어 페달을 '굴리는' 일이 조금 더 잦아졌으나,
그래도 여전히 그만큼 걷기에 익숙한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본 적이 없다. 게다가 다행이도(?) 날이 추워진 관계로 다시 따릉이에서 내려와 걷는 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의 제목과 상통하게도, 옆에서 본 그는 성숙한 사고를 가진 작가이다. 그렇다면 정말, 걷는다는
행동에는 사유의 진척을 보조하는 어떤 기능이 숨겨져있는 것일까. 걷기와 사유의 사이에 존재하는 매커니즘이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면, 절친한 친구인 그가 오래도록 걷고 걷는 길 위에서 바라보고, 발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궁금해하며 책을 읽었다.
"이 이중의 움직임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런데 이 움직임은 대단히 특이하다. 스스로를 거역하고, 자기 자신에 맞서서 끊임없이
자신을 파괴하는 움직임이다. 아니, 항상 스스로에 맞서 싸우는 동시에 자신을 연장하고 지탱하고 영속시키는 움직임이다. 우리는 줄곧 불균형을 향해
자신을 던지고 다시 균형을 잡는다. 불안정한 가운데 안정적이다. 우리는 불균형을 키우고 기획하고는 거기에 정착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동한다. 이처럼 걷는 방식이 우리의 특징이다.
이제 이해했다. 반복할 필요 없다. 더는 그 생각을 말자.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 생각을 하라고 제안하겠다. 그 명백한 사실을
파고들라고 말이다. 걷기는 촉발되다가 모면되고, 시작되다가 바로잡히는 작은 추락이라는 사실. 나는 이 사실을 더 명료하게 들여다보고 탐문해서,
늘 계속되고 늘 저지당하는 추락의 조짐으로 나아가는 이 방식이 무엇을 내포하는지 탐구하고 싶다. p15-16 서서 나아가기"
사실 다른 부분들보다는 도입부에 있는 '걷기'에 대한 관점이 크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로봇산업이 발달하면서 종종 더 인간다워진 로봇의
모습을 뉴스를 통해서 접할 수 있었다. 이족보행 로봇으로 유명한 일본 혼다의 '아시모'나 국내 카이스트의 휴머노이드로봇연구센터의 '휴보' 같은
것들의 영상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다소 어색한 그들의 걸음을 떠올리며 이 아름다운 연속적 행위인 걷기를 인간처럼 구현해 낼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불균형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자기파괴적 행동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를 로봇이 할 수 이을 것이라 생각치 않았다.
책을 읽고 난 뒤에 문득 이족보행 로봇을 찾아보았는데, 미국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아틀라스'의 영상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거의 인간과 흡사한
백덤블링까지도 구사하는 로봇의 영상을 보며 그 전까지 한계를 두었던 로봇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그리고 더불어 그만큼 인공지능의 발달이
이루어졌음을 연관지어 떠올렸다. 이 둘이 접목된다면 인공지능을 가진 이족보행 로봇은, 우리의 철학자들처럼 '걸으며 사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걷기와 사유에 대해 깊은 땅굴을 파고 들어가 세세히 파헤쳐 낼 것 같았던 처음의 시작에 비해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되자 이름난 철학자들과
걷기를 연결시켜 나열한 내용이 개인적으로는 다소 아쉬웠다. 걷기라는 큰 주제로 모을 수 있는 철학자들의 소재를 실 하나에 묶어 나란히 잘 꿰어낸
목걸이같은 구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소 가벼운 내용으로, 그보다는 걷기와 사유에 대해 좀 더 확장된 소재들을 가져왔더라면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다만 "18 남몰래 절뚝인 디드로"와 같은 부분들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때로 인상적이고 날카로운
문장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아쉽게 느껴졌던 가벼움도, 철학적 내용을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걷는 자는 아니다. 길눈이 밝지 않아 목적한 곳을 찾아가려면 온통 그것에 집중해서 정신없이 걷는 편이다. 때로 익숙한 귀가길을
걸어가보곤 하지만, 길 위에서 걷는다는 행동을 하고 있는 자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바람에 걷는 동안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나는 이동수단 위에 얹혀져 옮겨지는 순간에야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는 타입인 것이다! 열심히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을 읽어놓고 밝히기에는
적절치 않은 고백이다. 지하철은 바깥의 풍경이 단절된다는 점과 특유의 양보문화 때문에 자리에 앉아 어떤 생각을 이어나가기 편치 않은 편이고,
근래 들어서야 선호하게 된 것이 버스다. 그 전까지는 버스 노선의 복잡함과 목적지에 정시에 도착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버스를 잘
이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 사이에 가끔씩 버스를 이용하면서부터 그 안에서 '자리에 앉기만 한다면' 지나가는 풍경을 배경삼아 몇시간이고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저자 로제 폴 드루아가 강조하는 걷기적 인간이 현대문명과 만나 변화된 것이 태워진
인간형이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본다.
한 공간 안에서 정체된 채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걷기와 실려감/태워짐 사이에는 앞으로 나아가며 사유한다는 공통점이 존재할 것이다.
다만 그 안에는 목적지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다. 안타깝게도 여기서 걷는 인간과 태워진 인간 사이의 간극이 발생한다. 걷기는 오직 걷기만을
위한 행위가 존재한다. 어디로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걷기 위한. 이는 걷는 시간을 통해 머리 속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의미가 크다.
반면, 목적지가 없는 드라이브는 생각을 비워내기 위한 의미가 크다. 이 차이는 실제적인 "작은 추락"의 과정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고에서
오게 된 것은 아닐까. 엉뚱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들을 하며 나름 관심있게 책을 읽은 시간이었다.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을 읽고
파생된 사고들을 정리해놓았지만 실제 책의 내용은 '철학자'에 더욱 집중되어 있는 편이다. 이 점 유의해서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