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의 특이점이 온다 - 제4차 산업혁명, 경제의 모든 것이 바뀐다
케일럼 체이스 지음, 신동숙 옮김 / 비즈페이퍼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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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케일럼 체이스의 '경제의 특이점이 온다'는 저자의 전작 '살아남은 인공지능'에 이은 신간이다. 여기서 자주 언급되는 "특이점"이라는 단어는 책의 서문 17페이지에 "본래 함숫값이 무한이 되는 변숫값을 의미하는 수학 및 물리학 용어였"음을 설명한다. 하지만 책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는 의미로 생각해본다면 레이먼드 커즈와일의 2005년 베스트셀러 '특이점이 온다'에서 제시한 개념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커즈와일은 특이점이란 단어를 기술이 인간을 뛰어넘어 새로운 문명을 생산해갈 시점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인공지능의 능력이 인간을 앞서게 되면 이로 인해 만들어진 개념, 원리 등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인간이 인공지능을 통제할 수 없는 지점이 올 수 도 있다는 전망이다.

 체스와 바둑 등에서 인간이 인공지능에 패했던 사건이 중 충격을 떠올려보자. 이를 사회 전반적 영역에 대입했을때 '터미네이터' 같은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리게 되는 것이다. 쨌든, 최근 이 "특이점"이란 단어를 좀 더 캐주얼하게 접하게 되었는데, 어떤 분야에서 나올 수 있는 생산, 창조, 현상 등의 것들이 그 갈래가 최대치로 확장/통제불능 되었음을 의미하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가끔 보이는 '특이점이 온 ***'같은 인터넷 상의 글들을 통해 특이점이란 용어를 약간 비틀린 채 먼저 만난 경우도 많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에 관한 내용을 중점으로 경제 전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떠올릴만한 노동해방에 대해서 먼저 짚고 있다. 그동안 '노동에서 인간의 역할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먼저 떠올렸다면, 데이비드 오터는 "기계들이 정말 인간의 노동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면, 창출된 부를 누가 소유하고 어떻게 나눌지를 정하는 진지한 문제 p81"에 대해 언급하였다. 우리가 4차 산업혁명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노동을 잃을 것이라는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로인해 돈을 벌지 못하게 되는 직업군이 생길 것이라는 이유이다. 4차 산업혁명이 저소득 직업군의 일자리를 위협하게 되는 것이 그 첫번째 변화라면 이에 대한 사회적 배리어가 우선적으로 필요함을 생각했다.

 3장 타임라인 4 2041년의 미래 부분에서는 "효과적인 경제 정책이 도입되고, 부패가 근절되고, 과학 기술이 가난한 나라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좋은 영향을 끼쳤다 p 265"고 부의 분배에 있어 다소 유토피아적 미래를 표현하고 있다. 노동을 잃고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을 약 10퍼센트 정도의 비율로 보고 있으며 이를 "보편적 기본소득 - 캐나다 매니토바 주 남서부에 있는 도핀이라는 작은 도시의 주민들 1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 p276"을 통해 뒷받침하고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인간의 삶에서 노동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삶에서 노동을 필요악으로 간주할 것이다. 막상, 일 안하고 산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행복한가. 4차 산업혁명의 긍정적인 면이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줄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을 쌓는 일부터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행동과 예술의 갈래에 속하는 모든 활동을 넓은 의미에서 노동으로 볼 때 노동은 정말 우리의 삶에서 불필요한 것일까 의문을 갖게 된다. 이 의문은 1장 자동화의 역사-3 자동화의 발자취 안의 말의 최고 전성기 부분과 맞닿는다.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없어지게 된다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인류의 소용도 18세기의 말의 수요처럼 줄어들게 될 것인가?

 지나친 확대해석이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인구절벽의 원인도 이와 같은 흐름에 기민하게 반응한 류로 해석되지는 않을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인구절벽의 문제를 4차 산업혁명과 맞물려 자연스러운 세태 변화로 바라본 점도 있기 때문이다. 또다른 재미있는 점은 책에서 블록체인과 관련하여 비트코인에 대한 언급을 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요즘 국내에서도 한창 급격한 등락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이 가상화폐에 대한 신뢰를 언급하고 있는데, 현상황에서 보이는 양태를 떠올려보면 예상 기능대로 활용되기엔 시기상조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계속해서 부의 분배와 저자의 낙관에 대해 생각했다. 부자들을 탐욕스럽기만 한 인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과 발전에 있어 후진은 없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맞다. 특히 전자는 선입견에 대한 문제일수도 있고, 도의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마땅한 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읽으면서 계속 찜찜함을 지울 수는 없었는데, 저 두 요소를 맞물려 떠올려보니 어느 정도 공감이 됐다. 발전은 더 나아가는 방향은 있어도 그 이전 단계로 되돌릴 수는 없는 것도 사실이니 기왕이면 낙관적으로 해석하여 미래를 발전시켜 나가도록 목소리를 내는 저자의 태도가 더 합리적일 수도 있겠다.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으나 부분부분을 소화하며 읽기 쉽지 않은 내용이었다. 시간을 내어 읽어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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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 사유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다
로제 폴 드루아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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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어떻게 걷는지 보여주면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주겠다 -프리드리히 니체"

 

 나에게는 걷는 친구가 있다. 그는 스스로를 걷고 쓰는 자로 칭한다. 책세상의 신간인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을 손에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그였다. 비록 최근 그는 발달한 서울 시내의 따릉이 문화에 깊이 심취하게 되어 페달을 '굴리는' 일이 조금 더 잦아졌으나, 그래도 여전히 그만큼 걷기에 익숙한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본 적이 없다. 게다가 다행이도(?) 날이 추워진 관계로 다시 따릉이에서 내려와 걷는 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의 제목과 상통하게도, 옆에서 본 그는 성숙한 사고를 가진 작가이다. 그렇다면 정말, 걷는다는 행동에는 사유의 진척을 보조하는 어떤 기능이 숨겨져있는 것일까. 걷기와 사유의 사이에 존재하는 매커니즘이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면, 절친한 친구인 그가 오래도록 걷고 걷는 길 위에서 바라보고, 발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궁금해하며 책을 읽었다.

 

 "이 이중의 움직임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런데 이 움직임은 대단히 특이하다. 스스로를 거역하고, 자기 자신에 맞서서 끊임없이 자신을 파괴하는 움직임이다. 아니, 항상 스스로에 맞서 싸우는 동시에 자신을 연장하고 지탱하고 영속시키는 움직임이다. 우리는 줄곧 불균형을 향해 자신을 던지고 다시 균형을 잡는다. 불안정한 가운데 안정적이다. 우리는 불균형을 키우고 기획하고는 거기에 정착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동한다. 이처럼 걷는 방식이 우리의 특징이다.

 이제 이해했다. 반복할 필요 없다. 더는 그 생각을 말자.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 생각을 하라고 제안하겠다. 그 명백한 사실을 파고들라고 말이다. 걷기는 촉발되다가 모면되고, 시작되다가 바로잡히는 작은 추락이라는 사실. 나는 이 사실을 더 명료하게 들여다보고 탐문해서, 늘 계속되고 늘 저지당하는 추락의 조짐으로 나아가는 이 방식이 무엇을 내포하는지 탐구하고 싶다.  p15-16 서서 나아가기"

 

 사실 다른 부분들보다는 도입부에 있는 '걷기'에 대한 관점이 크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로봇산업이 발달하면서 종종 더 인간다워진 로봇의 모습을 뉴스를 통해서 접할 수 있었다. 이족보행 로봇으로 유명한 일본 혼다의 '아시모'나 국내 카이스트의 휴머노이드로봇연구센터의 '휴보' 같은 것들의 영상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다소 어색한 그들의 걸음을 떠올리며 이 아름다운 연속적 행위인 걷기를 인간처럼 구현해 낼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불균형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자기파괴적 행동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를 로봇이 할 수 이을 것이라 생각치 않았다. 책을 읽고 난 뒤에 문득 이족보행 로봇을 찾아보았는데, 미국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아틀라스'의 영상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거의 인간과 흡사한 백덤블링까지도 구사하는 로봇의 영상을 보며 그 전까지 한계를 두었던 로봇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그리고 더불어 그만큼 인공지능의 발달이 이루어졌음을 연관지어 떠올렸다. 이 둘이 접목된다면 인공지능을 가진 이족보행 로봇은, 우리의 철학자들처럼 '걸으며 사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걷기와 사유에 대해 깊은 땅굴을 파고 들어가 세세히 파헤쳐 낼 것 같았던 처음의 시작에 비해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되자 이름난 철학자들과 걷기를 연결시켜 나열한 내용이 개인적으로는 다소 아쉬웠다. 걷기라는 큰 주제로 모을 수 있는 철학자들의 소재를 실 하나에 묶어 나란히 잘 꿰어낸 목걸이같은 구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소 가벼운 내용으로, 그보다는 걷기와 사유에 대해 좀 더 확장된 소재들을 가져왔더라면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다만 "18 남몰래 절뚝인 디드로"와 같은 부분들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때로 인상적이고 날카로운 문장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아쉽게 느껴졌던 가벼움도, 철학적 내용을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걷는 자는 아니다. 길눈이 밝지 않아 목적한 곳을 찾아가려면 온통 그것에 집중해서 정신없이 걷는 편이다. 때로 익숙한 귀가길을 걸어가보곤 하지만, 길 위에서 걷는다는 행동을 하고 있는 자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바람에 걷는 동안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나는 이동수단 위에 얹혀져 옮겨지는 순간에야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는 타입인 것이다! 열심히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을 읽어놓고 밝히기에는 적절치 않은 고백이다. 지하철은 바깥의 풍경이 단절된다는 점과 특유의 양보문화 때문에 자리에 앉아 어떤 생각을 이어나가기 편치 않은 편이고, 근래 들어서야 선호하게 된 것이 버스다. 그 전까지는 버스 노선의 복잡함과 목적지에 정시에 도착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버스를 잘 이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 사이에 가끔씩 버스를 이용하면서부터 그 안에서 '자리에 앉기만 한다면' 지나가는 풍경을 배경삼아 몇시간이고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저자 로제 폴 드루아가 강조하는 걷기적 인간이 현대문명과 만나 변화된 것이 태워진 인간형이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본다.

 

 한 공간 안에서 정체된 채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걷기와 실려감/태워짐 사이에는 앞으로 나아가며 사유한다는 공통점이 존재할 것이다. 다만 그 안에는 목적지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다. 안타깝게도 여기서 걷는 인간과 태워진 인간 사이의 간극이 발생한다. 걷기는 오직 걷기만을 위한 행위가 존재한다. 어디로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걷기 위한. 이는 걷는 시간을 통해 머리 속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의미가 크다. 반면, 목적지가 없는 드라이브는 생각을 비워내기 위한 의미가 크다. 이 차이는 실제적인 "작은 추락"의 과정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고에서 오게 된 것은 아닐까. 엉뚱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들을 하며 나름 관심있게 책을 읽은 시간이었다.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을 읽고 파생된 사고들을 정리해놓았지만 실제 책의 내용은 '철학자'에 더욱 집중되어 있는 편이다. 이 점 유의해서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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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1-30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씨가 많이 추워졌지만 나가서 산책하고 싶네요.

테일 2017-12-01 23:00   좋아요 0 | URL
저는 오늘 올해 처음으로 눈이 오는 거리를 걸었습니다. 춥지만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
 
율곡 인문학 - 조선 최고 지성에게 사람다움의 길을 묻다
한정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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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풀어진 마음을 달랠 길 없는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긴 연휴가 일상을 잠깐 무너뜨렸다고 생각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도 아닌 것만 같다. 그동안 버릇처럼 해오던 일들이 쉽게 손이 가지 않아 애를 먹었다. 한껏 풀어짐에 기대어 얼마간을 지나보내고 나니 이제서야 퍼뜩 정신이 드는 것 같다. 아침에 본 일기예보에서 주말 즈음 눈이나 비가 올 예정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제서야 짧고도 어설프게 한 계절을 지나왔구나 싶어졌다. 어쩌면 가을을 탔으리라.  

 

 역사평론가 겸 고전연구가인 저자 한정주의 신간 '율곡 인문학'은 율곡의 "자경문"을 통해 그의 삶과 사상을 살펴보고 있다. 각 장은 입지, 치언, 정심, 근독, 공부, 진성 그리고 정의로 구분되는 7장으로 되어 있다. 각 장 안에서도 소주제들이 나뉘어져 있어 설명이 지리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큰 장점이었다. 자칫 생몰을 늘어놓는 위인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일화들은 그의 사상적 기반을 설명하는 정도의 에피소드로 기능해서 오히려 아쉬움을 느꼈다.

 

 전에 유시민 선생이 방송의 한 티비 프로그램에서 강릉의 오죽헌을 찾아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의 역할만 부각되어 있음을 지적한 바가 있었다. 마침 인상적으로 생각했던 두 인물이 3장 정심의 구방심공 [어지러이 흩어진 마음을 다잡아라] 부분에서 나왔을 때 주의깊게 읽었다. 특히 이이가 자경문을 쓰게 된 배경 중에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정신적인 방황을 한 4년이란 시간이 있었으니 이이의 생에서 신사임당이 미친 영향이 매우 컸음을 짐작하게 했다.

 

 특히 이와 비교되는 일화로 6장 진성의 전력어인 [사람을 정성껏 대하라] 부분에 그의 서모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어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위인전을 읽으면서도 두 사람에 대한 내용만 알았지, 서모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었다. 개인적으로는 흥미로운 내용이었으면서 한편으로는 이이의 아버지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해주지 못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사임당에 비해 부족한 롤모델이었다면 그는 어디에서 빈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인물을 찾았을까 궁금해졌다.

 

 율곡의 삶을 위인전으로 읽던 시절에는 미처 알지 못했으나 이제 다시 살펴보니 그가 가진 기량을 제대로 피워보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새삼 안타까웠다. 이 책의 근간이 되는 "자경문"은 그가 20세 때 지었다고 한다.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성숙도가 과거와 지금이 다르다고는 하나, 그 나이에 이미 스스로의 삶에 있어 그 방향을 정하여 세울 수 있었다니 뛰어난 인재로 평가될 만하였다. 또한 퇴계와의 접점이 짧아 두 학자가 동시대에 활동할 수 없었던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보통은 책을 읽으면 2-3일을 넘기지 않는다. 하지만 긴 시간을 더디게 보내면서 '율곡 인문학' 역시 더디게 읽었다. 그동안 항상 인문학이란 대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사전에 정의된 말로 생각했던 것과는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나름의 해석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만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과 기대했던 인문학의 범위를 '사람다움의 길'로 끝맺기에는 아쉬움이 남지만 배움을 확장시키지 못한 자신의 소양탓으로, 적당히 만족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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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기원 - 예일대 최고의 과학 강의
데이비드 버코비치 지음, 박병철 옮김 / 책세상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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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에서부터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린다. 어느 틈새로 바람이 들어오는지 모르지만, 때로 속도를 높이 차 한대가 매섭게 지나가는 듯한 소리다. 지난 140억년의 역사동안 지구의 움직임, 계절의 변화, 자연에서부터 오는 날씨의 현상들은 계속되어 왔다. 그것이 무엇에 영향을 받고, 어떤 식으로 민감하게 이루어져 있는지 다 알지 못해도 이처럼 삶 속에서 그 존재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경험하고 있다. 책세상의 신간인 '예일대 최고의 과학 강의 모든 것의 기원'은 "별과 은하계의 탄생부터 지구의 대기와 바다, 생물과 인간 문명의 발상까지 '어떻게 세상과 만물이 생겨났는지'"를 재미있게 풀어낸 책이다. 이 책은 슬쩍 넘겨보면 큰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난해하거나 고리타분해보인다. 언뜻 보이는 단어들에서 비일상적임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꽤 괜찮은 상대임이 느껴진다. 어쩔 수 없이 뉴트리노나 CNO 순환 반응, 중성자, 케플러 궤도, 카이퍼 벨트, 섭입대, 밀란코비치 주기 등의 단어들이 나오겠지만 그것이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아니다. 읽다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영화 장르 중에서 자연재해물을 좋아한다. 이것도 장르의 하나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재해가 일어나서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고 또 그 안에서 치열하게 사투를 벌여 극복해나가는 인류의 대응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예전의 자연재해물들이 회오리바람같은 것을 소재로 했다면, 최근은 인간으로인해 황폐화 된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나 인공적으로 자연을 되살리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사건을 다룬다. 최근에 본 '지오스톰'이란 영화도 그런 내용이었다. 자연의 균형이 깨진 가까운 미래에 최후의 수단으로 우주 정거장에서 날씨를 인공적으로 조정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영화에서는 아주 약간의 조작으로도 날씨가, 또 이를 넘어선 기후가 달라지게 되고 사람들과 그들이 이루어놓은 것들이 쉽게 파괴되었다. 헐리우드 특유의 미국 만능 주의가 범벅된 촌스러운 내용이지만 각지에서 일어나는 자연 재해를 묘사한 장면들이 꽤 흥미로웠다. 이런 개인적 관심과 더불어 '모든 것의 기원'에서도 '6장의 기후와 서식 가능성'부분을 관심있게 읽었다.

 

 "그러나 우리가 환경을 아무리 망쳐놓아도 지구는 적어도 앞으로 수백만 년 동안 멀쩡하게 유지될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질구조판은 인간이 내뿜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려놓을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것이 문제지만, 지구는 인간의 생존 여부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 p.205  6장 기후와 서식 가능성"

 특히 이 부분에서 지구 스스로 환경을 유지할 것이며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바탕이 되어주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낸 점이 좋았다. 지구를 환경과 생물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로 보는 '가이아 가설'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계속해서 영화 이야기와 묶어서 아쉽지만, '8장 인류와 문명'을 읽다보면 "가장 위협적인 기상 현상은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폭염"이다."라는 부분에서 문득 인상적인 특징을 떠올렸다. 그동안 본 몇 편의 영화들을 다시금 되짚어보니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단기적인 피해를 묘사할 때는 태풍과 회오리바람, 쓰나미, 변칙적으로 나타난 이상 한파 등의 현상을 이용했다. 그러나 먼 미래 인류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 묘사할 때는, 온도가 높아져 빙하가 녹아 세상이 물로 뒤덮이거나 긴 가뭄이 이어져 온통 사막화 된 황무지를 보여주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면 좋았겠지만, '모든 것의 기원'에서는 이를 체온 조절과 땀, 질병과 연결하여 마무리지어 아쉬웠다. 애초에 이 책에서는  그런 관점을 두고 언급한 내용이 아니기도 하지만.  

 

 끝으로 최근 한 모임에서 가위눌림과 수맥, 존재하고 있는 것과 구분된 차원의 틈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서 문득 떠오른 '홀로그램 우주 이론'에 대해 말을 꺼냈다가 설명할 길이 없어 아쉬웠는데, '1장의 우주와 은하'부분을 읽으면서 다소 이해에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론보다는 용어들을 좀 더 낮은 장벽으로 접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영화도 찾아보고, 책도 읽어보고, 또 이론들에 대해서도 찾아보시길 추천한다. 어디에 쓸데가 있을만한 내용은 아니지만, 잠깐은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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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 효과 - 프루스트를 사랑한 작가들의 글쓰기
유예진 지음 / 현암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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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달간의 사이로 프루스트에 관한 책을 연이어 만나게 되어 어리둥절했다. 고전의 힘은 이토록 사그라들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져오는 관심과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던 것인가. 저 악명높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대표되는 프루스트에 관한 현암사의 이 신간을 보고 반가우면서도 곤란했다. 과연 이 쉽지 않은 주제로도 얼마나 읽지 않고 버티기에 어려운 매력적인 깊이를 선사할 것인가. 고백하건데, 아직 다 읽지 못한 뒷 권들을 마저 읽어내기에도 벅찬데도.

 

 저자는 '프루스트 효과'를 통해 프루스트를 사랑한 여덟 명의 작가들의 글쓰기를 풀어내었다. 그 여덟 명의 목록에 버지니아 울프, 롤랑 바르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질 들뢰즈 등의 이름이 올라있다는 것만으로 프루스트에 대한 증명은 더 필요치 않다.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이들 작가에 대해서 이들이 얼마나 프루스트의 영향을 받았는지 또 어떻게 프루스트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했는지 분석하며 소개하고 있다. 오직 프루스트에 대해서만 집중되지 않기 때문에 여덟명 중 자신이 좋아하거나 관심있는 작가에 대해 관심있게 읽어볼 수 있어 더 좋다.

 

 "프루스트 소설에서는 한 부분이 스스로 말을 하고, 그 자체로 존재함으로써 기호들이 발생한다. '시간'은 작품의 소재이며 동시에 주제가 되는데, 그럼으로써 부분들이 생기게 되고 그러한 부분들은 "하나의 퍼즐에 끼워 맞출 수 없는 조각들"처럼 서로 이어질 수가 없게 되며 각자의 공간에서 존재를 유지한다. 그와 동시에 들뢰즈는 시간을 가리켜 "서로에게 수용되기를 거부하고, 동일한 리듬으로 발전하지 않으며, 문체의 흐름에 의해 같은 속도로 이끌리지도 않는 부분들의 궁극적인 존재"라고 정의한다. - p.150 제5장 통일성의 재발견"

 

 때로 전문적인 분석과 지식이 옅보이는 내용이라 간만에 자세를 잡고 주의깊게 읽어야 했다. 우리가 이런저런 사변적 글을 쓸 때 흔히 말하는 '의식의 흐름'적 글쓰기가, 이를 대표하는 프루스트를 통해 다시 보게 되니 앞으로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짜임새있게 글을 쓰도록 노력해야겠구나 반성하게 되는 계기를 한번씩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는 개인적인 짧은 반성을 의식의 흐름으로 토로하였고, 최근 차원과 관련된 여러 차원의 우주와 시공간 개념들을 떠올리게 되는 부분이라 따로 옮겨보았다. 우리가 순차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란 것이 결국 다른 차원에서 동시간적으로 혹은 그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내용과 비슷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프루스트의 글도 어렵다는 것도.

 

 이는 베게트가 "지난 몇 주 동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두 번 완독하였으나 그에 관한 글을 쓸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며, "끝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처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는 내용에서도 느껴진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프루스트의 작품이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중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이 모호한 흐름에서 순차적 시작과 끝을 구분하기 어려움과 동시에 읽기 시작하나 결코 다 읽지는 못하기 떄문에 끝이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이 완독에 대한 부채의식을 없애기 위해 이러저러한 방편으로 책들을 읽지만 부채감은 완독하기 전까지 계속되리라는 불길한 느낌을 받는다.

 

 '프루스트 효과'만이 아니라, 얼마 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여덟개의 시선으로 살펴본 타 출판사의 신간을 읽었다. 연속된 신간들의 등장에 국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완독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이 문제적 작품에 대한 동시대적 재조명에 관심이 갔다. 개인적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가 좌절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 읽어보고 싶고 궁금한 마음이 들었는데, 꽤 만족스러웠다. 다시 완독할 용기는 나지 않는데, 그래도 궁금하고 미련이 남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왜, 지금 프루스트일까! 이는 최근 디저트 문화가 급격히 성장하게 되면서 케익과 마카롱에 밀린 마들렌이 시장 우위를 선점하려는 큰그림을 그린 것은 아닐까 싶다. 는 개인적 분석을 덧붙이며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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