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설을 읽다가 중반부쯤이 지나면 불현듯 첫 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처음 읽기 시작할 때의 낯섦이 사라지고 어느덧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 처음의 낯섦을 익숙해진 시선으로 다시 경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쩌면 책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도 같다. 이 소설이 바로 그런 소설이다. 남은 책장이 줄어드는 것이 안타깝고, 내가 주인공 '시어도어 데커'가 되어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는 듯 느껴졌다.



어린 시절 책을 읽는 것이 좋았던 이유는 낯섦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세계, 경험했던 적 없는 이야기가 좋았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을 관찰하길 좋아했고, 누군가의 애정으로 낡아진 물건들이나 익숙지 않은 사물들을 살펴보는 걸 좋아했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낯선 나라의 이름을 하나하나 발음해 보는 걸 좋아했고, 동그란 지구본을 돌려가며 새로운 곳을 발견하는 게 재밌었다.



누구든 자신의 이야길 하면 관심 있게 귀 기울였고, 순하고 얌전한 나를 귀여워해 주시는 어른들의 눈빛 속에서도 나는 그분들의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는 예민한 아이였다. 타고나길 그랬고, 타인의 감정에 무신경해질 수 없는 나의 번잡한 마음이 때때로 나를 피곤하게 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보단 누군가의 바람에 익숙해진 아이였고, 나의 유일한 도피처는 책이었다.



책 속에서는 나를 위해 쉴 수 있었다. 낯선 이야기일수록 나는 더 대범하게 이야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장소와 인물, 그 안의 내용만 다를 뿐 생각과 감정의 경로가 나와 유사한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시어도어 데커'도 그렇다. 시오는 내가 사람들을 봤던 시선으로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나 자신인 듯 안타깝고 아팠다.



황금 방울새의 저자인 도나 타트자신의 소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다. 충분한 시간과 공을 들인 장인의 세공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글에서 그런 정성이 느껴지면 나 역시 어떤 단어 하나도 허투루 읽게 되질 않는다. 완독률 98.5%의 책답게 술술 읽히지만 술렁술렁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 자신은 어떤 색깔도 없는 투명한 상태로 존재하며, 오직 읽는 것을 위해서만 호흡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자의 뛰어난 스토리텔링은 모든 것들이 선명하면서도 아득한 느낌으로, 내가 읽는 것이 아니라 글이 나를 이끌어 가게 만든다.



주인공과 똑같은 사랑과 상실, 아픔은 아니지만 나 역시 그렇게 견뎌온, 견뎌야만 하는 슬픔들이 있다. 대상은 달라도 느끼는 방식들은 비슷하다. 낯선 이야기 속에서 그런 익숙함을 발견하고 공감했다. 하지만 추락하는 슬픔은 아니다. 아픔을 같이 공유했지만 그것을 요모조모 살펴보고, 닦아주고, 다시 제 자리에 돌려놓음으로 나는 좀 더 단단해질 수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아직 1권만을 읽었으니 앞으로의 이야기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결말이라도 나는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티븐 이런 추천사를 남겼다.



˝읽는 내내 투수가 한 점도 내주지 않고 끝까지 이끌어가는 경기를 보는 것처럼 놀라고 흥분했다. 실수가 나길 기대하고 있다면, 이 책에선 헛수고다. 도나 타트는 '중독적이며 삶의 버거운 슬픔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예술'이라는 주제를 과감히 돌파하면서 문학작품으로서 큰 성공을 거뒀다.˝



나는 이렇게 멋있는 찬사는 못 하지만 읽는 동안 어떤 잡념도 느끼질 못 했다. 몇 페이지를 지난 다음부턴 단 한 줄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읽을 수 없었다. 라고 1권의 리뷰를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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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7-01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직 읽는 것을 위해서만 호흡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최고의 찬사를 하신 것 같아요. 저도 읽어볼게요.

물고기자리 2015-07-01 09:20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저는 정말 푹 빠져서 읽었어요. 책이 짧지 않아서 다행일 정도로요 ㅎ 에이바님께도 좋았으면 좋겠어요~

레삭매냐 2015-07-01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원서로만 고이 모셔 두었는데, 번역 판이 나왔다니 번역판으로 읽어야겠습니다.

물고기자리 2015-07-01 11:01   좋아요 0 | URL
원서를 가지고 계시군요, 이 책은 번역도 꽤 공을 들인 것 같아요. 워낙 표현이 촘촘해서 번역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더라고요 ㅎ 저자의 전작도 궁금한데 우리나라에선 절판된 것 같아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