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



1591년 이스탄불 외곽의 버려진 우물 속 시체의 혼잣말로 시작되는 「내 이름은 빨강」은 이처럼 간결하지만 확실하게 집중시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궁정 화원 소속 화공들이 그리는 세밀화와 관련된 살인 사건을 풀어간다. 하지만 그림뿐만 아니라 삶, 예술, 사랑, 역사 또는 현실 등의 많은 것들을 담고 있어서 글로 쓰는 세밀화를 보는 듯했다.



노벨 문학상뿐만 아니라 유럽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한때 화가가 되길 꿈꾸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화공들이나 그림에 대한 관찰력과 묘사가 탁월하다. 실제로 이 책을 읽는 동안 테두리에 금박 장식을 한 화려한 색감의 세밀화들을 여러 번 검색해서 찾아봤다. 책의 상당 부분이 그림에 관한 묘사여서 저절로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는데 나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었을 다양한 국적의 많은 사람들이 터키의 세밀화에 대한 구체적 인상과 호기심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에서 '나'라고 칭하는 화자는 장마다 번갈아 바뀌어간다. 첫 문장처럼 이미 죽은 시체이거나, 살인자이기도 하며 살인자를 찾는 누구이거나 사랑과 행복을 찾으려는 누구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림 속 개나 말 또는 '빨강'이라는 색깔이 스스로 화자가 되어 독자에게 이야기를 건네기도 한다. 소설의 장들은 마치 세밀화의 한 부분인 듯싶었고, 그 부분들이 이루는 전체는 하나의 정묘한 그림 같다는 느낌을 준다. 사건의 추이만을 따르자면 추리 소설로 읽힐 수도 있지만 세밀화를 통해 철학 하게 하는, 사색적이며 지적인 소설이었다.



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평면적인 그림인 세밀화는 그림 자체가 주인공이 아니라 이야기를 장식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인간 중심의 그림, 자신만의 스타일과 서명을 가질 수 있는 그림에 대한 욕망과 전통을 지키려는 신념 사이에서 번민을 하게 되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살인자를 찾는 과정에서 세 명의 화공에게 말을 그려보라는 주문을 한다. 화풍으로 살인자를 색출하려는 것인데 세 사람이 제각각 말을 그리는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의 정교함은 작가 스스로 화가가 되길 꿈꾸었던 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올리브, 나비, 황새라는 애칭을 가진 세 화공들이 말을 그리는 장면의 마지막 문장들은 이렇다.



˝멋진 말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바로 그 말이 된다. ˝ - 올리브



˝멋진 말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멋진 말 그림을 그렸던 위대한 옛 대가가 된다. ˝ - 나비



˝나는 멋진 말 그림을 그릴 때에만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 - 황새



화공들이 각자 말을 그리는 과정을 읽을 때 누가 살인자였는지를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하지만 살인자가 누구였느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 역시 이 소설의 일부이자 세밀화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의미를 찾고자 욕망한다. 하물며 그림 속의 나무 한 그루도 이런 말을 한다.



˝저는 아주 외로운 한 그루 나무입니다.
(...) 제가 외로운 진짜 이유는 제가 어떤 그림의 일부인지 저 자신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솔직히 말하면 저는 세상에서 도망쳐 바다를 건너다가 새와 과일이 풍성한 섬에서 안식처를 찾은 연인의 행복한 풍경의 일부였으면 했습니다! 인도 정복 길에서 일사병으로 며칠 동안 코피를 흘리다 죽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최후의 순간에 그늘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 제가 어떤 이야기에 의미와 우아함을 더해 주었을까요? (...) 저는 그저 한 그루 나무이기보다는 어떤 의미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서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충분히 행복한 사람들도 있다. 이 소설 속의 '빨강' 같은 사람들 말이다.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 나는 숨기지 않는다. (...) 나는 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낸다. 나는 다른 색깔이나 그림자, 붐빔 혹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는 여백을 나의 의기양양한 불꽃으로 채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내가 칠해진 곳에서는 눈이 반짝이고, 열정이 타오르고, 새들이 날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라,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나는 사방에 있다. 삶은 내게서 시작되고 모든 것은 내게로 돌아온다. 나를 믿어라! (...) 나를 보지 않은 사람은 나를 부인하겠지만 나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읽으며 들었던 나의 주관적 감상은 세밀화에 대한 지적인 탐구에 앞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화공들의 번뇌에 앞서, 삶의 의미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그림이기보단 어떤 색깔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들을 말이다. 화풍은 시대마다 변한다. 개개인의 화풍 역시 변화되기 마련이다. 나는 그림이기보단 색, 그 자체로 행복하고 싶어졌다.



˝우리는 사실 행복의 그림에 있는 미소가 아니라 삶 자체에서 행복을 찾아요. 세밀화가들은 그걸 알지요. 하지만 그들이 그리지 못한 것도 그거예요. 이 때문에 그들은 삶의 행복을 바라보는 행복으로 대체한 겁니다. ˝ - 《나는, 셰큐레》

 

 

 

「작가란 무엇인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오르한 파묵은 글을 쓸 때 때때로 등장인물들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을 원한다고 한다. 그리고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을 쓰는 동안 셰큐레가 되는 것이 즐거웠다고 했다. 한 폭의 세밀화와 같았던 이야기 속에서 그림으로 그려지길 바라지 않고, 스스로 그림이 되길 바랐던 주인공은 셰큐레가 아니었을까 싶다.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이스탄불 최고의 미인이라는 셰큐레는 살인자를 추적하는 카라와 시동생 하산의 끈질긴 사랑을 받는다. 주관적인 감상일 뿐이지만 책의 이야기꾼들 중에서 가장 선명한 색깔의 음성을 지녔던 주인공 역시 셰큐레였다.



소설을 읽듯 작가를 읽고 싶어 하는 나의 관점에서 본 오르한 파묵은 다분히 시각적 성향의 사고력을 지닌 사람인 듯싶었다. 「작가란 무엇인가」에 실려있는 그의 친필 원고를 보면 빼곡한 글 옆과 사이사이에 그의 스케치가 곁들여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시각화하고 구체화시킨 내용을 세밀히 전개시키는 그의 서술 방식은 그림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전체를 보든, 어느 부분을 집중해서 보든 '본'는 행위에 집중해야만 읽히는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스스로 보기를 원할 때 볼 수 있는 그림처럼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스스로의 톤과 음성을 지닌 개별적인 인물들이 그들만의 질감을 지닌 채 살아 움직여서 읽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글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때가 있다. 일종의 리듬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라 객관적인 무엇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런 작가들은 평소 관찰하는 것 못지않게 듣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작가들은 이야기의 흐름과 결말에 대해 자신도 알지 못 할 때가 많은 것 같다. 이야기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도록 자신을 열어두는 게 아닐까 싶은데 이런 작가들의 글은 비교적 강한 심상을 남긴다는 것과 섬세하다는 느낌을 준다.



오르한 파묵의 인터뷰를 보면 역시나 시각적 성향의 소유자답게 처음부터 책 전체의 윤곽을 잡아 놓고, 모든 것을 다 생각해 놓는다고 말한다. 세밀하다는 것과 섬세하다는 차이 역시 다분히 주관적이지만 글이 스스로 이야기하게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글은 세밀하지만 섬세하진 않았다. 이런 점이 오르한 파묵의 글을 읽게 만드는 개성이기도 한 것 같지만 말이다.



「내 이름은 빨강」은 읽는 것 자체는 수월했지만 감상을 남기는 건 쉽지가 않았다. 생각들이 저절로 연결 되질 않고 조각조각 끊기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르한 파묵의 글은 계속 읽고 싶어진다. 파묵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를 읽고 싶고, 자전적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파묵의 「이스탄불」˝어느 날 나는 책 한 권을 읽었고, 내 인생 전체가 바뀌었다. ˝로 시작한다는  「새로운 인생」에 궁금증이 생겼기 때문이다.



˝저는 낙관주의자입니다. 터키가 두 가지 정신을 갖는 것, 두 가지 서로 다른 문화에 속하는 것, 그리고 두 가지의 영혼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신분열은 사람을 지적으로 만들어줍니다. (...) 당신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죽이는 것에 대해 너무 걱정을 많이 하면 하나의 영혼만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분열되어서 아픈 것보다 더 문제이지요. 터키의 정치가들, 즉 나라가 하나의 일관된 영혼을 가져야 하고 동양이나 서양 어느 한쪽에 속하거나 민족주의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가들에게 제 생각을 알리고 싶답니다. 저는 일원론적인 관점에서는 비판적이지요.˝ - 「작가란 무엇인가」

 

 

 

터키의 동양적인 충동과 서양적인 충동 사이의 끝없는 대립이 평화롭게 해결되리라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이니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상상력이 작동하게 하려면 외로움과 고통이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오게 했다는 자기 파괴적인 그의 방식은 슬프지만 스스로 위로받기를 거부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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