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우리를 정의하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 보여주는 얼굴이 아니라 우리의 비밀이라면, 그렇다면 나를 삶의 표면 위로 떠오르게 하고 나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하는 비밀은 바로 그 그림이었다.˝ (2권 p470)



마음이라는 것이 자신의 삶을 채색할 수 있는 일종의 물감이라는 상상을 해본다면, 그에 새로운 색감을 더해주거나 농도의 다양함을 주는 것이 바로 소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의 스펙트럼을 넓혀 줌으로, 사실에 대한 학습이 아니라 어떤 것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감상'과 그 가치를 예측할 수 있는 '직관'을 키워주는 것 중의 하나가 소설이라고 말이다. 이야기란 삶이고, 제각각의 색과 농도를 지닌 인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지식이나 정보 분야가 아닌, '이야기' 자체가 주인공인 소설에 관해서 만큼은 오직 나의 시선으로만 경험하고 싶다. 그래서 책을 읽기 전엔 줄거리를 나열하는 방식의 상세한 리뷰는 보지 않는 편이다. 대신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상 위주로 읽어 본다. 이야기의 구조란 단번에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진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리뷰에서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에 관해서다.



소설을 읽기 전까진 타인의 감상이 나에게 스며들지 않도록 읽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만 읽고 난 후엔 다양한 리뷰들을 읽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도 나의 감상을 끄적이고 난 후에야 한다. 개개인의 서로 다른 감상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소설의 리뷰를 대하는 방식은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그 소설의 연장선에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라는 관점에서다. 투박한 단 한 줄의 글에서도 나의 스펙트럼을 넓혀줄 양식을 얻게 될 때가 있으니 말이다.



황금 방울새도 그런 리뷰들이 기대되는 이야기를 지녔다. 그리고 나에겐 읽을거리가 많은 소설이었다. 나의 이야기들이 소설의 이야기와 만났기 때문이다. 구태여 막연한 상상을 해 볼 필요가 없었다. 책을 읽는 동안 주인공인 '시어도어 데커'의 상실감과 고통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2권의 마지막에 다다를수록 그동안 시오가 보여준 것들은 일부였을 뿐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 많은 이야기 뒤로 더 묵직한 앙금들이 남아 있었다는 걸 말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인 파브리티우스의 그림 '황금 방울새'어떤 면에서 시오의 운명과 닮아 있다. 작가가 모티브로 삼은 그림이 왜 하필이면 '황금 방울새'였는지 그 정교한 선택에 놀랐다.



˝어떤 물건을 좋아하면 그 물건은 생명을 갖게 돼. 처음으로 마음을 활짝 열고서 평생 쫓아다니게 만드는, 혹은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되찾으려고 애쓰게 만드는 그런 이미지들 말이야.˝ (p460)


˝어떤 그림이 정말로 마음을 움직여서 우리가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면 '아, 난 이 그림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좋아'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 사람이 어떤 예술 작품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가 아니야.

 

그걸 좋아하게 만드는 건 좁은 통로에서 들려오는 비밀스러운 속삭임이지. 쉿, 그래, 너. 얘야. 그래, 너.

 

아주 사사롭게 마음을 건드리는 거야. 네가 보는 그림은 내가 보는 그림과 달라. 정말로 위대한 그림은 아주 유동적이어서 여러 각도에서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속으로 스며들지, 독특하고 아주 특정한 방식으로 말이야.˝ (p461~462)




누군가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는 점에서는 그림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책, 건축, 공예품 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품의 사연과 인물들은 세월에 흐려지더라도 소멸되지 않은 예술 그 자체는 남아서 어떤 개인들에게 제각각 다른 의미로서 삶의 이유나 위로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것엔 논리적인 이유 같은 건 없다. 그저 좋기 때문이고,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으로 인해 덜 유한하고 덜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림은 그 증거이자 버팀목이었다. 그림은 내가 살아가는 수단이자 전부였다. 그것은 대성당을 지탱하는 쐐기돌이었다." (p186)



그리고 그런 작품들은 유한하고 연약한 우리들이 남긴 것들이다. 인간들이 말이다. 그 사람이 살았던 시간은 스러지지만 그 정점이었던 순간이 예술로 남아 또 다른 이를 지켜준다. 누군가가 남긴 그 무엇을 예술로 만드는 것 역시 개개인의 사연이고 마음들이다. 서로에게 필요와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대가의 작품이 아닌 사소한 어떤 것에서라도 우리는 예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름다움은 현실의 결을 바꾼다호비 아저씨의 말을 생각했다.˝ (p465)



상실, 아픔, 슬픔들은 인간의 유한함과 연약함이 원인이겠지만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역시 같은 이유이기 때문이다.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면 현실의 결은 변화한다.



˝이 세상의 위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위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자신을 처음으로 흘깃 보고, 그 속에서 스스로를 꽃피우고 꽃피우는 것.˝ (p466)



충분히 괴로워하고 슬퍼하더라도 나로서 살아가는 것을 회피하지만 않는다면 그런 아픔들조차도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는 예술이 될 거라 생각한다. 고통 없는 아름다움은 없으니 말이다. 서로 닮았던 작고 외로운 방울새와 시어도어 데커는 서로를 구원할 운명이었던 것 같다. 운명은 승복이 아닌 발견이라 믿고 싶다.



시오가 머물던 호비 아저씨의 공간은 나에게도 위로를 주었고, 그의 친구 보리스가 문을 두드리면 어쩐지 내 마음에도 따뜻한 균열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또 하나의 이야기가 내 마음의 색채를 밝혀 주었다. 그리고 나의 '황금 방울새'는 내가 읽었던, 앞으로 읽을 책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행복하자 2015-07-04 0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먼 옛날~~ ㅎㅎ
이 작가의 비밀의 계절를 읽고 충격과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디오니소스학파라는것이 있다는 것도 첨 알고 실제 밀교처럼 행해지고 있다는 것도 첨 알고~~
이 책도 기대가 되요~~ 꼭 읽어봐야겠어요..
밀리고 쌓인 책들은 어떡하죠? ㅎㅎ

물고기자리 2015-07-04 02:05   좋아요 0 | URL
전작을 읽으셨군요~ 저도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절판됐더라고요ㅜㅜ 저도 밀리고 쌓인 책들이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