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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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책이란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 (p280)

 

 

 

조지 오웰1984」를 읽는 동안 이해할 수 없어 막막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이해되어 막막했다. 오웰이 이 책을 완성한 때는 1948년이었지만 어쩌면 그도 좀 더 깊이 통찰했을 뿐, 미래를 예측한 것이 아닌 현실의 이야길 썼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권력을 향한 사람들의 본능이 어느 때고 달랐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으니 말이다. 소설 속 오웰의 말처럼 권력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이며 그들이 실제로 하고 있는 일들은 소설보다 훨씬 지독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 (p53)

 

 

 

실제로 우리가 목격한 바가 있으니 이에 무엇을 더 보태어 말할까 싶다. "말하자면 모든 역사는 필요에 따라 깨끗이 지우고 다시 고쳐 쓰는 양피지 위의 글씨와도 같은 것이었다. "란 소설 속 문장처럼 과거는 단순히 변경된 게 아니라 사실상 파괴되어 버린다. 현실에 맞추어 과거를 변경시키고, 그에 대한 기록마저도 남지 않으며, 언젠간 우리의 기억조차도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때가 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란 말처럼 우린 이미 그런 삶의 토대 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다만 그 순간을 목격한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과거에서 말한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늘 현재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왜 그들은 좀 더 중대한 일에 대해서는 그 같은 함성을 지르지 않는 걸까?" (p100)

 

 

 

이에 대한 답을 소설에선 이렇게 말한다. 불만이 있어도 일반적인 사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달리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투정을 부린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대인들이 느끼는 분노는 대상을 수시로 바꿀 수 있는 방향 감각이 없는 감정이라고 묘사한다. 더불어 남자들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증오하는데 이는 성적인 욕망을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 속 사람들은 여러 수단을 통해 늘 감시당하고, 비밀리에 사상경찰이 활동한다. 그나마도 이런 상황들을 직시하며 고민하는 세대는 소설 속 주인공의 세대가 마지막인 것 같다. 왜냐면 이런 묘사들은 주인공 윈스턴이 그저 회피하기만 하는 젊은 세대들을 관찰하며 생각했던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공포와 증오와 고통만이 있을 뿐, 감정의 존엄성이나 깊고 미묘한 슬픔 따위는 손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다. " (p47)

 

 

 

이런 문장에 공감할 수 없었으면 좋겠지만 공감이란 단어에서 이해와 소통이 아닌 되려 씁쓸함을 발견하곤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실제로 우리가 쓰는 단어의 의미는 지금과는 다른 느낌으로 변질되어 갈지도 모른다. 소설에선 기존의 낱말들을 없애고 최소한으로 의미를 축소시킨 '신어'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이를테면 '말을 뼈만 남도록 잘라내고 있는 셈'이라고 묘사한다. 사용하는 낱말 수가 줄어들면 그에 따라 의식의 폭도 좁아진다. 사용하는 단어의 수와 그 미묘한 뜻의 차이만큼 우리의 생각도 다양하고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어를 만드는 목적은 사고의 폭을 좁히기 위한 것이며 대중이 단순해질수록 정권을 잡은 이들은 더 과감해질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졌다. " (p222)

 

 

 

서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고 싶지 않은 건 보지 않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은 원인이 아닌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엔 읽는 것이 발각되면 안 되는 <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라는 책이 등장하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계층 사회의 장기적인 존속은 가난과 무지를 전제로 할 때 가능해진다. 모든 사람들이 시간적인 여유와 경제적 안정을 똑같이 누리게 되면 빈곤에 허덕인 나머지 사회에 무관심했던 대중이 마침내 눈을 뜨게 되고, 소수의 특권층을 몰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화는 생산되어야 하지만 분배되어서는 안되고, 결국 실제적으로 이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은 끊임없는 전쟁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전쟁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목적이라기보단 인간의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의 규모는 국민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만을 충족시키고 그 잉여 물자를 완전히 소모할 수 있는 범위에서 계획된다. 이는 국민을 만성적인 궁핍 상태로 유지시키기 위한 것인데 전반적으로 궁핍한 상태여야만 특권층의 지위가 한층 높아지고 집단 간의 차이도 더욱 심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권력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층 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적 변화란 그들의 주인이 바뀌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 (p283)

 

 

 

실제로 전 세계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은 다국적 기업의 이익으로 돌아가고 있다. 부를 취하는 사람들은 권력도 취하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더욱 가난해지고 있다. 이는 어느 한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의 흐름이며 어떻게 보면 늘 그래왔던 돌림노래인 것이다. 그리고 권력자들은 대중들이 자신의 힘에 의지할 수 있도록 평화를 거부한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 실제의 내란이나 국지전 등 불안한 상황들이 이어질수록 생존을 위해 권력에 의존하는 것을 당연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현실 그대로의 세계를 가장 모른다. " (p299)

 

 

 

소설엔 '이중사고'란 개념이 등장하는데 필요에 따라 자신의 기억을 끊임없이 말살시키는 것을 말한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거나 교묘한 거짓말을 하는 것, 철회된 두 가지 견해를 동시에 지지하는 것, 서로 모순되는 줄 알면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믿는 것, 도덕을 주장하면서 도덕을 거부하는 것, 민주주의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 당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 잊어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든 잊어버리는 것 등을 지칭하는데 현재 당이 선택한 상황에 맞게 모든 과거의 발언이나 기록을 끊임없이 번복하는 것이다. 이 개념이 낯설지 않은 게 이런 이중사고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남자의 머리가 아니라 그의 목구멍이다. 그가 내뱉는 것은 단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말은 아니다. 그저 오리가 꽥꽥거리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소음일 뿐이다. " (p78)

 

 

 

오리의 입장에선 다분히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소리만 있을 뿐,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해석할 수 없어 번역기가 필요한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사람이 어떤 말을 할 때 진정성을 담고 있다면 말하는 사람의 눈에 영혼의 빛이 반짝거린다. 하지만 이중사고를 하는 사람에겐 영혼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소음을 내는 사람들의 눈은 빛나지 않는다. 어느 곳을 바라보는지 모를 눈빛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부모와 자식, 인간과 인간, 남자와 여자 간의 유대를 끊어버렸네. " (p374)

 

 

 

우리의 현실은 사랑과 정의가 아닌, 혐오와 증오의 토대 위에 존재하는 것 같다. 모든 방향으로 뻗어가는 이런 감정의 원인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이런 현실을 통찰할 수 있는 사람들마저도 멸종한다면 우리는 어떤 토대 위에서 살아가게 될지 두렵기만 하다. 조지 오웰의 「1984」는 읽는 동안 소설을 읽는 만족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 내용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오직 현실을 반추해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믿고 싶다. 이 시대의 살아 있는 대표 지성으로 꼽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은 인생의 만년에서야 '진보는 추의 운동'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한 바 있다. 바우만의 통찰 대로 지금은 다만 잠시 밀려나고 있는 중이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또한 읽고, 생각하고, 쓰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뿐만 아니라 이런 과정의 고민들까지도 진실하게 기록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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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15-12-02 0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상 잘 읽었습니다. 그 당시의 소설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시대적인 갭을 그닥 느낄 수 없죠-, 저 역시 읽는 내내 놀라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좋은 고전은 시간을 반추하기도 선견하기도 하나 봅니다.

물고기자리 2015-12-02 09:58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이 소설로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는 건 너무 속상한 일이지만 한편으론 문학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소설이었기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고, 덕분에 지금의 현실을 반추할 수 있지 않았나 싶거든요. 사회와 인간의 심리를 관찰하는 작가의 능력이 새삼 중요하단 생각을 해보게 되더라고요..

cyrus 2015-12-02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이 인용한 소설 100쪽 문장.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 서면 기어다니는 기레기들이 많아진 세상을 예언하는 것 같습니다.

물고기자리 2015-12-03 08:5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참 씁쓸해요.. 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뿔뿔이 흩어진 느낌이 들어요. 팍팍한 현실이니 각자 살아남기에 집중하느라 그럴 테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다들 무력해진 느낌이에요. 소설 속 사람들처럼 길들여져 가는 건 아닌지 답답하기도 하고요. 실망이 반복되면 무관심해진다는 말처럼 그래도 나아질 거란 희망이 있던 예전과는 다른 모습들 같거든요. 홀로 제 갈 길을 가는 정부와 국민들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고, 답답함에 모두들 엉뚱한 곳에 화를 풀며 살고 있는 것 같아요.. ㅜㅜ

AgalmA 2015-12-06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을 할 때 가장 두려운 것은 내 말은 내가 모르는 어떤 허점이 있을까 입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말하는 것은, 말을 하면서 글을 쓰면서 알아채고 수정할 수 있는 숙고의 과정과 경험이 있기 때문이죠. 이 상황은 자기 합리화와 도취에 빠질 수도 있다는 위험성도 있죠. 그리고 말에는, 내 말에 대한 신념보다 내 생각의 모자람과 다른 시각을 알 수 있을 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용기를 내어 말할 수 있는 사람, 공간, 시간이 모두 완벽하게 세팅될 수 없다는 절망감은 늘 동반됩니다.
난독에서 비롯된 폭력적인 글, 아우성, 화풀이 같은 글이 아닌 적재적소의 말과 행동은 하는 것도, 보는 것도 너무도 어렵습니다...

물고기자리 2015-12-06 22:29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래요ㅜㅜ 배설일 뿐인 말과 행동을 접하는 것에도 지쳐가지만 생각이 많아질수록 제가 사용하는 말과 글에도 고민이 많아져요. 제대로 뜻을 전달한 건지 아니면 제대로 들은 건지에 대한 확신도 줄어가는 것 같고, 세월이 흐를수록 단어의 의미들이 무겁게만 느껴지네요.. 게다가 그 단어들이 정말 나의 뜻일까란 생각도 들어요. 그렇지만 어떤 말이냐를 떠나 진정성이 느껴질 때 용기를 내어 소통을 한다면 서로의 거울이 되어줄 수는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를 통해 내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고, 저 역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땐 모호했던 단어의 의미들이 제게로 안착되는 느낌을 받기도 하니까요.

다만 그런 거울이 깨지지 않도록, 나 역시 탁한 거울이 되지 않도록 잘 보듬어야 할 텐데 그게 참 쉽지 않은 일이죠.. 무엇이든 깨지기 쉬운 요즘 같은 세상에선 특히요. 하지만 적어도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는 축복인 것 같아요. 구체적인 단어로 제 자신을 관조할 수 있으니 말이에요. (아마도 아갈마님이 제게 좋은 거울이기 때문이겠죠..ㅎ) 적재적소엔 못 미칠지라도 제가 쓰는 단어엔 진정성이 묻어나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