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S. 프리쳇은 단편소설을 "지나가며 곁눈질로 얼핏 본 무엇"이라고 정의했다. 처음에는 얼핏 본 것일 뿐이다. 이윽고 그 얼핏 본 것에 생명이 생기고, 순간을 밝히는 뭔가로 바뀌고, 아마도 독자의 의식에 지울 수 없는 무언가가 깊게 새겨질 것이다. (...) 아마 우리의 심장 또는 지성은 글을 읽기 전에 비해 아주 살짝 그 위치가 달라졌으리라. 우리의 체온은 눈에  띄게 올라가거나 내려가리라. 이윽고 숨이 다시 차분해지면, 우리는, 작가와 독자는 마찬가지로 정신을 수습하고 일어나니라. 그리고 체호프의 등장인물이 말했듯이 "따뜻한 피와 신경으로 창조되어" 다음 일을 향해 전진하리라, 삶을 향해. 언제나 삶을 향해. " (p342)

 

 

 

위에 인용한 문장처럼 좋은 글이란 심장이나 지성의 위치를 살짝 달라지게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삶으로 향할 수 있는 작거나 큰 힘을 보태어 준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작가라면 읽기 전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이 책을 막 읽기 시작하려는 순간, 나의 심장은 조금 빠른 리듬으로 두근거렸고, 기대감이 어린 전율이 등줄기를 살짝 훑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레이먼드 카버필요하면 전화해는 카버의 미발표 단편들과 에세이, 그가 쓴 서문이나 서평들이 실려있는 책이다. 단편으로만 접했던 카버의 목소리를 소설이 아닌 다른 글들을 통해서도 접할 수 있었는데 그의 소설과 에세이의 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간결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만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레이먼드 카버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카버 작품의 일어 번역자이기도 했던 하루키는 "번역을 하는 동안 레이가 옆에 있다고 느꼈으며 그의 전집 번역을 마치는 게 두렵다"고 했단다.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 읽기 전의 기대감과 다 읽어 간다는 아쉬움을 동시에 줄 수 있는 작가란 흔치 않다. 나에겐 하루키도, 카버도 그런 작가들에 포함되는데 두 작가를 모두 좋아하다 보니 그들의 글이 주는 서로 다른 여운에도 애정을 가지고 있다.

 

 

 

하루키의 인물에게선 삶과 타협하거나 농밀하게 밀착시키지 않은 채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으려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하루키의 주인공은 (적어도 의식적으론) 자신이 찾는 것도, 가야 할 방향도 확신하지 않고 있다. 저항하지 않고, 이끌리는 대로 한 걸음씩 움직이며 보이는 모든 것들을 관찰해 나간다. 이런 여정엔 (의식이 고정되어 있는) 남자의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는데 확신 없이 시작된 여정이니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의 유연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 그의 인물에 동화되거나 압도되지 않고, 나 역시 나의 무의식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나를 관찰하게 된다.

 

 

 

카버의 글에선 고단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현실과 밀착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일상의 피로와 불안이 느껴진다. 삶의 체취가 진하게 풍겨온다. 무슨 일이 당장 일어날 것만 같다. 카버의 인물들에게서 피로와 불안을 덜어내면 오히려 비틀거리다가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져 버릴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유연하지 않다. 무엇인가 지켜야 할 것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곧 잃어버릴 것 같거나 이미 잃어버린 직후인 것 같다. 그럼에도 글은 과장되지 않고 지극히 고요하다.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데도 긴장하게 되고, 집중하게 된다. 

 

 

 

두 작가의 장점이 이렇게 드러나는 것 같다. 하루키는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것들을 섬세하게 나열해가며 조금씩 무의식의 한가운데로 이끌어간다. 피로 없이 그 여정으로 동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카버는 직접적으로 불안을 건드린다. 여정을 거치지 않고 그 현장의 중심으로 곧바로 데려간다. 단편소설을 쓰는 작가이니 만큼 카버에겐 과정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나름의 방법으로 내면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 쌓여 있는 앙금들을 발견하게 해준다.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지를 통해서 말이다.

 

 

 

하루키가 소년의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 중엔 함부로 결론짓지 않으려는 거리두기식 관찰법과 책임져야 할 자녀가 없었다는 것도 포함될 것 같다. 자신에게 좀 더 많은 시간을 낼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카버에겐 하루하루를 벌어 돌보아야 할 자녀가 있었기에 글을 쓰면서도 어느 정도의 불안이 늘 따라다니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내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내 삶과 글을 만들고 움직인 가장 큰 요인이다. 알겠지만, 나는 여전히 내 아이들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비록 이제는 앞날이 상대적으로 더 명확하고 주위도 조용하지만 말이다. " (p194)

 

 

 

카버가 말하는 어느 빨래방에서의 일화를 읽을 땐 마음이 아팠다. 그의 당혹스러움과 무력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오래 걸리는 일엔 집중할만한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잡고 악착같이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그의 환경에선 단편소설이나 시를 써야만 했다. "짬을 내 자리에 앉아, 운이 좋다면 재빨리 써서 완성할 수 있는 글들이어야만 했다. "고 말한다. 카버는 자신을 위해 하루에 한두 시간만 짜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시간 자체가 천국 같았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장편소설을 쓰려면 작가는 그 자체로 이치에 맞는 세상을, 작가가 믿을 수 있고 완전히 이해하고 정확히 묘사할 수 있는 세상을 살아야만 한다. 적어도 한동안은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세상 말이다. 이와 더불어, 그 세계가 본질적으로 옳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 하지만 내가 알고 살아가던 세상은 이 경우에 해당되지 않았다. 내가 살던 세상은 날마다 법칙과 방향과 속력이 바뀌는 듯했다. " (p186)

 

 

 

그의 삶은 달라졌지만 어느 순간부턴 자신이 원해서 단편소설과 시를 쓴다고 말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으며, 갑자기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면 어떻게 할 것인지 혹은 왜 아직 저녁식사가 준비되지 않았는지 아이가 따지며 물을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카버는 그 과정에서 뭔가를 배웠다고 한다.

 

 

 

"단편소설은 쉼표와 마침표가 어디에 위치하는가에 따르는 결과물이었다. " (p192)

 

 

 

레이먼드 카버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모두 좋은 가장 큰 이유는 문장의 간결함에 있다. 간결하다는 것은 어떤 것을 표현함에 있어 스스로 혼란스럽지 않다는 뜻인 것 같다. 어떤 삶을 살았든, 어떤 다른 경험을 했든, 두 사람 모두 결과적으로 작가가 될 수밖에 없는 기질과 능력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이다. 카버가 말하길 한 작가와 다른 작가를 구별지어주는 기준은 재능이 아니라고 한다. 재능이 있는 작가는 차고 넘친다며, 특별한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작가, 그것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작가는 흔치 않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트릭을 싫어한다고 강조한다.

 

 

 

"작가는 트릭이나 술책이 필요 없으며, 심지어 주변에서 가장 똑똑한 인물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작가라면, 바보처럼 보일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가끔은 그냥 멍하니 서서 이런저런 대상을 바라보며 푹 빠져 입을 헤벌리고 감탄할 필요가 있다. 그 대상은 석양일 수도 있고 낡은 신발 한 짝일 수도 있다. " (p164)

 

 

 

그리고 그는 신중하게 검토하는 자세를 존경한다고 말한다. 결국 작가에게 있는 건 단어뿐이니, 기왕이면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고 적절한 곳에 구두점을 찍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최대한 잘 표현하는 게 좋지 않겠냐며 말이다. 과장되었거나, 정확하지 않거나, 애매하다면 독자의 눈은 그 단어들을 미끄러지듯 지나가버리고 작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헨리 제임스는 이렇게 불운한 글을 "빈약한 열거"라 불렀단다.

 

 

 

"만약 제대로 쓴다면, 그 단어들은 모든 음을 정확히 때릴 수 있다. " (p171)

 

 

 

레이먼드 카버는 그의 글이 간결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미니멀리스트' 수준으로 모든 걸 없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모든 문학작품은 단지 자기표현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 작가와 독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한다. 독자에게 이해받는 걸 글쓰기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의 능력이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누구나 알 수 있게 다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 소소해서 놓치기 쉬운, 무시하기 쉬운 우리의 사소한 감정들을 새삼 건드려주고, 다시 보살펴 줄 수 있도록 말이다.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하루키도 이런 말을 했었다. 쉬운 언어와 훌륭한 은유, 좋은 알레고리를 사용해야 한다고, 독자들에게 뭔가를 설명할 때는 아주 친절하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독자들도 알겠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아주 오만한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루키의 첫 소설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실린 작가의 말엔 이런 부분이 있다.

 

 

 

"나는 좀 더 심플하게 쓰자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쓰지 않았을 정도로 심플하게, 심플한 언어를 쌓아, 심플한 문장을 만들고, 심플한 문장을 쌓아, 결과적으로 심플하지 않은 현실을 그리는 것이다(그 후 레이먼드 카버를 번역하면서, 그가 하고자 하는 것도 나와 같은 시도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가졌다). "

 

 

 

이것이 바로, 내가 카버와 하루키의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복합한 현실을 그리는 그들의 글을 읽으며 한편으론 나의 현실을 잊고, 또 다른 한편으론 현실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그 여정을 같이 해주고, 카버는 단번에 그곳으로 데려다주는 것만 다를 뿐이다. 사실 두 작가의 글이 아니라도 모든 이야기는 흥미롭다. 이야기의 서사뿐만 아니라 사람 자체를 읽는 걸 좋아하는 나에겐 지루한 묘사들이나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문장도 나름으로 흥미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체만큼은 두 작가의 글이 좋다. 목소리의 톤은 달라도 스스로의 감정에 취하거나 성마르지 않는, 일정한 리듬을 가진 글을 좋아한다.

 

 

 

글에도 표정과 목소리가 있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작가뿐만 아니라 모든 글에는 특유의 음색이 묻어있고 표정까지 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화가 나 있거나, 불안하거나, 짜증스럽거나 슬퍼 보이기도 하고, 낮은 저음으로 조용조용 속삭이기도, 얇고 높은 톤으로 빠르게 내뱉기도 한다. 번역의 탓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어떤 표정이나 목소리가 없는 글을 읽을 땐 당황스럽기조차 하다. 아무리 유명한 작가의 글이라도 그럴 경우엔 겨우 생각만 조금 반응하게 된다. 심장이 제 위치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다. 장편이든 단편이든 소설의 경우엔 작가 나름의 음색이 묻어있는, 담담한 표정과 일정한 톤의 리듬이 있는 글이 좋다. 연기를 못하는 배우일수록 과장된 몸짓과 표정을 짓듯이 어조의 기복이 큰 글은 산만해서 집중하기가 어렵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큰 근육보단 잔근육을 적절히 잘 사용한다. 아니, 사용한다기보단 감정을 움직여 자신의 몸을 반응시킨다.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는 평을 듣는 배우더라도 미리 계산된 몸짓을 하는 배우의 연기엔 마음이 움직여지질 않는다. 표정에 의지하지 않고 눈빛으로 이야길 하는 배우의 연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때론 대사와 다른 말을 하고 있어 더 감정이입이 된다. 이를테면 싫다는 말을 하면서도 눈빛으론 정 반대의 말을 하는 것이다. 간결한 글이 좋은 이유와도 비슷한 것 같다. 표정을 읽으려고 애쓸 필요 없이 눈빛을 읽듯 문장에만 집중하면 되기 때문이다. 진실한 연기일수록 요란하지 않다. 좋은 글일수록 치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나에게 필요하고, 맞는 글이라면 얼핏 보았을 뿐이더라도 내 안에서 스스로 움직이며 성장하는 것 같다. 게다가 카버가 인용한 체호프의 글처럼 "따뜻한 피와 신경으로 창조되어" 언제나 삶으로 향할 수 있게 해준다. 글에는 그런 힘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그래서 내게 필요한 글들을 찾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 표현이 간결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내면이 단순해서가 아니다. 쌓여있는 많은 말들 중에서 무거운 것들은 가라앉히고 그 위로 떠올려진 투명한 말들만을 건져올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심장의 위치를 살짝 달라지게 했던 글들은 바로 그런 글들이었다. 참 신기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작가의 글들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서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야말로 시공간을 넘나드는 문장 속의 인연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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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10-09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의 글에 대한 가치관이 드러나 있군요. 잘 읽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물고기자리 2015-10-10 00:16   좋아요 0 | URL
그냥 읽는 것에 대한 취향 정도지요^^ 근데 아무래도 쉽게 변하진 않더라고요ㅎ

AgalmA 2015-10-13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와 카버에 대한 나이론 저와 비슷하시네요.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 나이 14세로, 레이먼드 카버는 39세로 저는 생각하죠...

p186, p171 격하게 공감요/


물고기자리 2015-10-13 11:13   좋아요 0 | URL
불안정한 주변의 세계를 하루키의 소년이 저항 없이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느낌이라면 카버의 남자는 그 남자로 인해 주변까지 불안해지는 느낌도 들어요..

저도 저 인용문들을 격하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카버가 인식하던 세상은 결국 그의 단편소설이 되었고, 단어가 음표인 듯 자신의 음을 연주하는 느낌이 무엇인지도 너무너무 알 것 같거든요. 실제로 단어를 연주하는 작가들이 있으니까요ㅎ

2015-10-13 0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13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