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다른 이들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 못했다. " - 노발리스
오르한 파묵의 소설을 왜 읽고 싶은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책장에 읽지 않은 파묵의 책이 꽂혀 있으면 나의 시선이 자꾸 그곳을 향한다는 걸 느끼게 된다. 다른 책들이 비교적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다면 파묵의 책들은 읽힐 순간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 같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터키 이스탄불 태생이며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한 그의 소설은 「내 이름은 빨강」을 통해 처음 접했었는데 그땐 그저 인상적이란 느낌 정도였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호기심으로 일렁였다. 작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으로 선택한 책은 자전적 회고록인 「이스탄불」이었고, 지적이며 집요한 작가로서의 정신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다음으로 읽은 책은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집인 「아버지의 여행가방」이었는데 책의 제목으로 인용되기도 했던 그의 수상 연설은 정말이지 강렬했다. 나는 어느덧 이렇게 오르한 파묵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 (p9)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 역시 이처럼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은 굉장한 흡인력을 지녔다. 이 감상이 보편적인 감상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파묵의 문장은 늘 뜨겁고 진지하다. 꾸밈에 치중하지 않는, 지적이며 진정성 있는 그의 표현들을 접하고 있으면 글자 하나하나와 일일이 눈을 맞추는 느낌으로 읽게 된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자마자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정독했는데 두 번째 읽을 땐 처음 보다 훨씬 좋았고 좀 더 강렬했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읽더라도 책이 스스로 말하기 시작하며 큰 노력 없이 저절로 읽히는 소설을 쓰는 작가들도 있지만 오르한 파묵은 명쾌한 감상이나 유희, 또는 일종의 도피로서의 독서가 아닌 매 순간 모든 문장에 집중하게끔 만든다. 파묵의 글엔 어떤 절실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심히 또는 가볍게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마치 문장 속에 통증이 동반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도 든다.
"모든 단어, 모든 비유가 마음에 와 닿았던 이유는 문장이 비범하거나 단어가 특별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책이 나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p13)
몰두하게 되는 책들에선 대개 이런 느낌을 받게 된다. 문장들이 몸으로 흡수되는 것 같달까, 서로 낯설지 않아 내가 책을 읽는 것인지, 책이 나를 읽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느낌 같은 것 말이다. 「새로운 인생」의 내용이 나에게 완벽히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터키의 역사와 현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정서로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파묵의 날카롭고 예민한 글은 어쩐지 나도 그 거리에 가 본 것 같은, 살아본 것 같은 묘한 기시감을 만들어 준다. 마치 언젠가의 생에서 겪어본 적 있는 경험을 글로 다시 읽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는 특수한 환경에서도 보편적인 정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작가로서의 능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로 말하면 기억 상실로 고통받고 있는 이 나라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애쓰는 불행하고 바보 같은 주인공이다. " (p362)
이 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저 우연히 진행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모든 일들이 완벽히 짜인 구조 안에서 움직여 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게다가 다양한 해석으로 읽는 것이 가능한 열린 구조를 지니고 있어서 더없이 매력적이다. 터키의 역사와 현실로도, 개개인의 정신으로도, 두 영혼으로 분리된 작가 오르한 파묵 자신의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결말에 대한 생각과 등장인물들의 의미 역시 다양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에 다 읽은 후에도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책이었다. 눈으로 읽었지만 어쩐지 손에 열기가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당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책의 모든 구석구석을 충분히 주의하면서 지능적으로 보았는가?" (p373)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난해함을 지닌 파묵의 소설은 꼼꼼히 읽어나가야 한다. 글이 알아서 나를 채워주길 기다리고 있다간 그가 소설을 위해 설계한 내용들의 기초를 놓치고 지나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파묵은 독자들이 자신의 글에 완벽히 집중하길 바라고, 또 그렇게 쓰는 작가인 것 같다. 그냥 이유 없이 여백을 메우기 위해 쓰인 문장도, 독자를 위한 친절하고 섬세한 묘사 같은 것도 없다. 오직 한 사람의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세밀하게 스케치하듯 채워진 문장들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통증과도 비슷한 만족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완벽히 닫힌 생각으로의 만족이 아닌 모든 가능성을 향해 뻗어나가는,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정신으로서의 만족을 말이다.
"때로, 계속해서 여러 권을 읽으면 그 책들끼리 속삭이는 게 들렸고, 이렇게 해서 내 머릿속이, 모든 구석에서 각각의 다른 악기가 소리를 내는 오케스트라 연주장으로 바뀌어 버린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내 머릿속의 이 음악 때문에 내가 인생을 견디며 산다고 인식했다. " (p323)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오르한 파묵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문장들 때문이다. 「작가란 무엇인가」에 실려 있는 파묵의 인터뷰에 의하면 자신에겐 공동체에서 스스로를 떨어져 나오게 만드는 자기 파괴적인 면이 있는데 상상력을 작동시키기 위해선 외로움이라는 고통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파묵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절실함은 이런 고통과, 고통에 뒤따르는 희열의 잔상인 것 같았다. 파묵의 매력은 담담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맨 얼굴의 정신을 진정성 있게 표현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아버지의 여행가방」에 실려있는 파묵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의 일부를 다시 옮겨보고 싶다.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 글을 읽노라면 모든 작가와 독자들이 더더욱 행복해지길 바라게 되니 말이다..
˝저는 쓰고 싶어서 씁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씁니다. 제가 쓴 것 같은 책들을 읽고 싶어 씁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많이 화가 나기 때문에 씁니다. 방에서 하루 종일 앉아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씁니다. 오로지 현실을 바꾸었을 때에만 그것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에 씁니다. 저 자신,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리들이 이스탄불에서, 터키에서 어떤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지를 전 세계가 알았으면 해서 씁니다. 종이, 연필 그리고 잉크 냄새를 좋아하기 때문에 씁니다.
문학을, 소설을 무엇보다 더 신뢰하기 때문에 씁니다. 저의 습관과 열정이기 때문에 씁니다. 잊히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씁니다. 문학이 제게 가져다준 명성과 관심이 좋기 때문에 씁니다. 홀로 있기 위해 씁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제가 왜 그토록 화가 많이 나 있는지를 어쩌면 이해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씁니다. 제 작품이 읽히는 것이 좋아서 씁니다. 한번 시작한 이 소설을, 이 글을, 이 페이지를 이제 끝마쳐야지 하는 생각에 씁니다. 모든 사람들이 제게서 이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씁니다.
도서관들이 영원할 것이며, 저의 책들이 그 서가에 꽂힐 것이라는 것을 순진하게 믿기 때문에 씁니다. 삶, 세계, 모든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경이롭기 때문에 씁니다. 삶의 그 모든 아름다움과 풍부함을 단어들로 표현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씁니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씁니다. 항상 갈 곳이 있는 것 같지만 마치 꿈속에서처럼 도저히 그곳에 갈 수 없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씁니다. 도무지 행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씁니다. 행복하기 위해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