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병실
오가와 요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수첩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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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가와 요코의 초기작 4편이 실려 있는 소설집이다. 이 책을 읽고 난 감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관능적이다'라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나 오감을 이토록 정밀하고 관능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작가는 드물다. 특히 이 작품집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그러한 문장이 튀어나온다. 

혀와 이와 침이 서로 얽히는 눅눅한 소리가 그의 안쪽에서 들려온다. 대단히 육체적인 소리다. -'완벽한 병실' 

한 모금의 야채주스를 마셨다. 혀의 표면에 거칠거칠한 채소 섬유가 남았다. -'호랑나비가 부서질 때' 

나는 무화과 가지를 꺾어 그 단면에서 나오는 희고 불투명한 즙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으로 만지면 생각보다 훨씬 끈끈해서 손끝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다이빙 풀' 

나는 스케치북 한가운데에 눈짐작으로 2.5센티미터쯤의 동그라미를 그렸다. 종이와 연필심이 마주치는 소리가 날 듯한 단단한 선이 그려졌다. -'식지 않는 홍차'

이 문장들은 모두 무작위로 페이지를 펼쳐 뽑은 것들이다. 이러한 문장을 반복해서 읽다보면 우리 일상의 시간들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에 빠진다. 그리하여 이 소설의 장면들은 '마치 정지된 표본' 같고 '무균의 하얀 병실' 같다. 스토리가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의 서성거림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국내 출간된 이 작가 작품은 모두 소장하고 있는데, 역시 <박사가 사랑한 수식>과 <약지의 표본>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그리고 이 책 <완벽한 병실>도 베스트3 안에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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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파라다이스
강지영 지음 / 씨네21북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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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부터 본격적인 습작을 시작한 햇병아리 여류작가'인 강지영.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러한 선입견은 180도 달라질 것이다. 노련해도 너무 노련하고 익어도 너무 농익은 글발과 스토리 구축 능력, 더욱이 그러한 스킬뿐이라면 흥 하고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이 작가 알맹이가 제대로다. 어두침침한 인생 군상들을 어쩜 이렇게 늙은이처럼 구수하게 그려낼 수 있는 건가, 작가 나이를 생각해보면 정말 의아해진다.  

추리라기보다는 스릴러 장르에 가까운 <굿바이 파라다이스>에는 총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벌집에는 벌이 살지 않는다', '사향나무 로맨스', '굿바이 파라다이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그녀의 소설에서 살인은 그저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일어난다. 죽은 후 살아나거나 소설 속 서술의 주체가 되는 일도 자연스럽다. 잔인하지만, 그 속에 인간의 눈물 같은 짠맛이 묻어난다. 단순히 '죽이기 위한 죽음'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죽음'의 비중이 더 높다. 

무엇보다 작품 하나하나가 참 재미있다. 그리고 불모지인 한국 스릴러 장르에서, 지극히 한국적인(미국, 유럽, 일본 스릴러 흉내가 아닌) 스릴러를 써낸 것에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작가의 말에서 강지영은 '할머니는 요긴하다. (중략) 그렇게 할머니는 내 손가락을 빌어서 소설을 쓴다. 말하자면 나는 할머니의 대필작가인 셈이다.'라고 쓴다. 아, 그녀 작품의 깊은 구비구비가 그렇게 탄생한 거구나 조금은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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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게임 헝거 게임 시리즈 1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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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정교한 SF이자 모험소설. 스티븐 킹의 찬사가 달린 책이라도 읽고 나면 실망할 적이 많은데 이 책은 엔터테인먼트로는 거의 최고 수준이다. 

미래의 가상제국 캐피톨과 그 주위를 둘러싼 12개의 지역 판엠. 판엠은 캐피톨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매년 남 1, 여 1의 조공인을 바치고 24명의 청소년들은 한 곳에 모여 서로 죽이고 죽는 쇼를 연출해야 한다. 살아남는 1인만이 승자가 되는 잔인한 게임. 영화로도 제작된 일본소설 <배틀 로얄>을 떠올리는 스토리다. 

12구역에 사는 주인공 캣니스는 여동생을 대신해 조공인을 자원하고 피타와 함께 헝거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독자는 그저 TV Show를 감상하듯이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미래의 세계에 대한 묘사는 정교하고 흥미롭지만, 헝거 게임 시작 이후의 스토리는 조금 덜 자극적이랄까. 좀 순진한 모험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독자층을 청소년까지 고려해도 될 정도로, 소재에 비해 잔인함은 덜하다. 하지만 주인공 캣니스와 피타에게는 사람을 당기는 매력이 넘치고, 그들의 운명을 걱정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다. 꽤 괜찮은 작가 하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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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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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에 대해 난 편견이 있다. 이 대구 출신 작가를 좋아한 지도 20년이 넘어 간다. 고등학생 때 읽은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라는 시집으로, 대학입학 시험을 치른 날 읽은 <아담이 눈뜰 때>라는 소설로 시작된 오랜 편견. 

10년 만에 내는 소설이라 반가움이 앞섰지만 '우익 청년 탄생기'라는 출판사 홍보에는 그다지 끌리지 않아 좀 묵혀뒀다 주문을 넣었다. 받아보니 랜덤하우스 책 치고는 책의 모양새가 괜찮네. 흑백의 배경에 마젠타색 타이틀, 길게 펼쳐지는 독특한 표지 제본.  

한때는 동성애, 사도마조히즘 등 너무 센세이셔널한 소재들을 소설로 써대서 검열을 당하기도 했던 그. 이번 작품은 그에 비하면 참 온건하다. 그리고 가장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책은 참 쉽게 읽힌다. 안정된 문장에, 인물을 알레고리화하여 묘사하는 능력, 금과 은이라는 주인공들의 운명이 궁금해 손에서 책을 떼기가 힘들다. 그리고 간간히 장정일다운 설정(여전한 동성애 묘사 등)도 흥미롭다. 

'구월의 이틀'이라는 제목은 류시화의 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소설 속에 묘사된 현대문학 강의 첫 시간. 인간이 긴 인생을 살아가지만 의미있는 시간은 구월 중에 단 이틀이라는, 청년기의 중요성을 압축해서 묘사한 부분에 공감이 갔다. 은의 명석함을 보여주는 데 유의미한 장면이기도 했고. 금과 친구가 되는 계기이기도 하다. 

금과 은의 '구월의 이틀'은 이제 끝나버린 것이리라. 용광로 속에서 끓어 굳어진 형태로 뱉어내진 이후, 남은 인생은 굳어진 채로 그들은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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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문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주영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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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모치 아사미의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에 이어 읽은 책. 표지의 일러스트는 약간 조잡한 느낌을 주고, 12000원이라는 가격은 책의 장정이나 쪽수에 비해 좀 비싼 것 같다. 그럼 내용을 넘겨 볼까. 

오키나와의 어떤 청소년 치유 캠프 풍경으로부터 소설은 시작한다. 여기서 변화를 겪은 사람들은 캠프의 리더를 존경하며 계속해서 인연을 유지하는데, 이 리더가 오해로 체포된다. 그러자 3명의 남녀가 비행기를 납치하고 리더의 석방을 요구한다. 이 리더는 모월 모시 달의 뒤편으로 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들은 그걸 위해서 납치를 감행한 것이다. '과연 그들은 무사히 달의 뒤편으로 떠날 수 있을까?'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환상 스릴러에 가까운 스토리.  

비행기 속에서는 납치와 무관한 살인사건이 한 건 일어나고, 납치범들의 요구에 의해 승객 중 한 명인 자마미가 이를 추리해낸다. 자마미는 납치에 휘말린 주변인이지만 어쩌다보니 엔딩까지 함께하며 이들의 운명을 지켜본다. 이런 요소마저 없었다면 참 심심한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리더와 납치범들과의 조우 후 최후의 반전이 있지만, 설득력은 좀 떨어진다.  

전체적으로 논리적인 설득력은 좀 떨어지지만 속도감 있게 읽혔던 스릴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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